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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 앙 외적 위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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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행 내적 속성 |
사 은 사 요 처처불상 사사불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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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원상은 신앙의 대상이면서 수행의 표본입니다.
왼쪽 신앙으로 이야기하면 일원의 외적인 위력을 신앙하는 것입니다.
일원의 내용은 사은의 위력이다. 사은의 위력을 활용하는 것이
사요입니다. 간단히 강령으로 표현한 것이 처처불상이요 사사불공이다.
우리가 무엇을 신앙하느냐? 바로 처처불상을 신앙한다.
많은 사람들은 나라는 존재는 유한하고 실수가 많기 때문에 완전한
대상을 그리워하고 따르고 싶은 마음이 있습니다. 그 완전한 존재를
하느님이라고도 하고 부처님이라고도 하는데, 사실 어디에서 그런
위력이 오느냐? 보이지 않는 저 대상에서도 오지만 내가 만나는 대상
대상이 다 위력 있는 부처님이다.
신앙의 대상이 수직적인 관계에서 수평적인 관계로 바뀌는 것이다.
수직과 수평의 관계를 아우르는 것이다. 그래서 처처는 우주만유입니다.
우주만유가 전부 다 부처의 존재다. 그래서 그 대상 대상에게 불공을
해야 한다. 그 불공하는 것이 바로 보은이다. 보은 즉 불공이다.
기독교는 신앙이 강하고 불교, 유교, 도교는 수행이 강합니다.
기독교는 대신에 수행이 약하고, 믿음으로써 해결합니다.
그러나 동양 종교 계통은 주로 수행을 통해서 해결을 하려고 합니다.
우리는 내적, 외적인 부분을 잘 병용한다고 생각하면 됩니다.
전 시간에 외적 위력을 사은, 우주만유의 본원이라고 했습니다.
내적 속성은 제불제성의 심인이다. 일체중생의 본성이다. 그래서 심인과
본성 이 두 가지를 여래의 불성이라고 했습니다. 똑같은 소리입니다.
수행은 제불제성의 심인자리를 수행하자. 즉, 제불제성의 마음 씀씀이는
일원상과 같은 마음 씀씀이다. 그럼 우리 보통 사람은 본질이 일원상과
같은 사람이다. 아주 중요한 이야기입니다.
나는 죄인이요. 나는 못난이요. 나는 멍청이요, 나는 바보요.
이것이 아니라. 나라는 존재는 어떤 구름에 가리워서 욕심과 습관 또는
업력에 의해서 실수하는 것이지 실제로 내 본질은 일원상과 같다는 것이
원불교의 중요한 수행관입니다.
그럼 차이는 무엇이냐? 나는 못났으니까 수행을 통해서 원만하게
만든다는 것과 나는 본래 일원상인데 내가 깨쳐서 그 자리를 지키고
쓰면 내 본래자리로 그대로 하는 것이다.
고향도 모르고 고향이 없는 상태에서 고향을 찾아가는 수행과
내 고향을 알거나 본래고향이 있는 줄 알고 그 고향을 찾아가는
수행은 전혀 다릅니다.
여러분들 고향이 있으시죠? 우리는 알든 모르든 다 고향이 있습니다.
그 마음고향이 어디냐. 일원상이다. 여러분의 마음고향은 일원상이다.
여러분의 고향은 아주 어딘 줄도 모르고, 아주 더럽고, 아주 못났고
바보 같고 가난한 것이 고향이 아니라.
우리의 고향은 원만구족 지공무사한 데가 고향이다.
이것이 왜 중요하냐? 어떤 실수를 했을 때, 잘못 했을 때 보는 시각의
차이점이 있습니다. 기독교에서 통성기도를 하는 이유는 본인을
바라보는 입장이 근원적으로 죄인입니다. 그래서 믿을 사람은 한 명도
없고 오직 유일신 밖에 없습니다. 전부 다 죄인입니다.
그런데 우리 원불교와 불교의 경우는 실수를 해도 본질적으로
근원적으로 부처님인데, 습관, 욕심, 무명, 업력에 의해서 내가 실수를
한 것이다. 본래 못나서 실수를 한 것이 아니라,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습관이나 업력, 무명에 의해서 살수한 것일 것이다.
이것은 대단한 차이가 있다. 자기를 끝까지 학대하느냐,
아니면 자기를 끝까지 긍정하느냐의 차이가 있습니다. 끝까지 자신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왜? 실수한 것이니까. ‘참나’가 한 것이 아니라
욕심과 습관과 업력, 어둠이 실수한 것이다.
이것은 원불교 수행론에 있어서 대단히 중요하다. 깨달음을 찾아 가지만
없는 것을 찾아서 깨닫는 것이 아니라 본래 자리를 회복하는 것을
깨닫는 것이다.
그러면 내 참마음. 내 본래 고향은 어떠냐? 첫째 텅 비어있다.
그런데 우리는 무엇으로 차있어요?
/ 마음이 욕심으로 차있다.
본래는 어때요? 본래는 비었다. 본래 죄인이고 욕심이 찬 것 아니라
업력이 본래 있는 것이 아니라 본래는 비었더라.
이것이 아주 중요합니다. 빈 바탕 안에서 그 속에서 두렷하고 그 속에서
이 바른 것을 우리가 제대로 돌아가는 겁니다. 내 본래 마음은 그렇다.
훈련을 나보면 안다.
어떤 사람이 명상을 차분히 했더니 부모님에게 전화할 생각이 났다.
어떤 사람이 땀 흘려 헌배를 했더니 미웠던 사람이 별로 안 밉다.
어떤 사람이 기도를 했더니 탁 아이디어가 떠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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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적 속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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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空 - 비우다 |
정신수양 일 심 |
원圓 – 밝 다 |
사리연구 알음알이 | |||
정正 - 바르다 |
작업취사 실 행 |
원이란 밝다는 것이고, 정은 바르다. 공은 비우다.
본래 우리의 마음은 텅 비었고 비어서 밝고 밝으면서 두렷하게 바릅니다.
이 빈 것. 공을 활용하는 것이 정신수양입니다.
원.. 밝은데 무엇에 밝은가? 일과 이치. 사리에 밝아서 사리를 연구한다.
그 다음 정.. 바르게 한다는데 무엇을 바르게 하느냐? 작업을 취할 것은
취하고 놓을 것은 놓는다.
이것을 대종사님은 일심, 알음알이, 실행 이라고 표현해 주셨습니다.
공空 – 일심. 정신수양
자. 보통사람은 하루에 오만 가지를 생각한다고 하는데,
그 중에 사만 구천 가지 생각이 부정적인 생각이다. 보통 사람은
삐딱하게 생각한다. 안 좋게 봐요. 이것이 중생의 분별성, 주착심,
요란함이라고 한다. 요것을 망념이요 잡념이라고 한다.
그래서 수양이라고 하는 것은 이 망념을 닦는 것이다.
수기망념이라고 한다. 망념을 닦은 것을 수라고 해요.
작은 망념은 분별심이요, 큰 망념은 주착심이라고 한다.
이런 주착을 닦아버린다. 그래서 텅 비게 만든다.
사람들이 오만 가지 생각을 하고 나서 뭐라고 하느냐. 아이고 머리가
아프다. 머리가 뜨겁다. 띵하다... 그래서 이것이 심하면 뭐가 옵니까?
정신병이 오는 거예요. 우울증이 오고 강박증이 오고..
정신을 못 차리는 겁니다.
참 구제하기 어려운 것이 정신병인 것 같아요.
차라리 팔뚝이 없고 다리 하나 잘라져도.. 괜찮아요. 활동하는데 좀
불편합니다. 그런데 이 정신에 병이 오면 정말 곤란합니다.
우리 인생의 행복이라는 것은 온전한 정신의 행복인 것 같습니다.
맑은 정신, 밝은 정신, 이것은 내 고향자리입니다.
돈에 행복이 있는 것이 아니고 명예에 행복이 있는 것이 아니고,
나의 본래 정신이 맑고 밝고 나의 본래 마음이 깨끗하고,
나의 본래 마음이 어지럽지 않을 때. 그때가 가장 행복 합니다.
사람들은 그 행복을 저기 뒤로 젖혀버립니다. 바쁘다고.. 그리고
그 행복을 찾지 않습니다. 행복의 필수조건이 아니지만 있으면 괜찮다는
돈을 벌기 위해 날마다 공을 들입니다. 그리고 그 공을 들이는 것이
행복을 위한다고 합니다. 행복을 위해서 시험공부하고, 일하고, 돈 벌고
하는데.. 그 행복이 어디에 있느냐? 내 온전한 정신이 비었을 때 온전한
행복을 맞이할 수 있다.
그런데 온갖 망념 속에서 사니까.. 여러분들께서는 일심이 되십니까?
일심은 천념만념. 온갖 천 가지 만 가지 생각을 하나로 만드는 것입니다.
이것이 일심입니다. 되십니까?
염불을 시켜보니 어떤 사람은 염불 할 때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하면서 딴생각을 하고 그 딴생각에 또 새끼를 쳐서 돌아다닙니다.
좌선을 해 보라니까.. 어떤 이는 머리가 아프고,
생각이 더 많이 난다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에 있어서 이 원불교를 만났다면 비우는 재미를 알아야 한다.
비우면 묘합니다. 비우면 밝아져요. 기가 막힙니다. 내가 어떤 판단을
어려울 때.. 경전을 통해서 얻을 수 있고, 멘토를 통해서, 책을 통해서
얻을 수 있다. 진짜 수행이란 내 안의 자성광명을 통해서 해답을 얻는
것이다. 이것이 중요하다.
그런데 내 스스로 해답을 못 얻습니다. 온갖 번뇌가 꽉 차서
답이 안 나옵니다. 그래서 훈련 2박 3일만 나도, 10일만 나도
마음에 참회가 되잖아요.
‘아.. 내가 마음이 거칠었구나.’
‘내가 시간을 너무 불필요한데 많이 썼구나.’
‘내 수양이 부족했구나.’
‘내가 마음공부에 소홀했구나.’
그런데 다시 돌아오면 비울 줄 모르고 채울 줄만 알죠.
불신과 욕심을 채우니까 다시 매해 집니다. 그래서 취사는 실행이잖아요.
실행은 잘 하려고 하면 판단을 잘 내려야 할 것 아니에요.
나 자신, 내 가정, 내가 소속된 단체에서도 판단이 정말 중요합니다.
그 때 어떻게 해야 올바른 판단이 나오느냐? 비워야 합니다.
비워야 판단이 객관화 될 수 있습니다. 비우지 못하니까.
기독교는 신의 마음으로.. 하나님을 믿음으로써 들이댄다.
다른 번뇌망상을 그 믿는 마음 하나로 모읍니다.
기독교는 그런 효과가 있습니다. 신앙이 수행이 됩니다.
이 마음을 비우려면 먼저 수 많은 마음을 한마음으로 가져오라고
했습니다. 그 수많은 마음이 무슨 마음입니까? 망념이요, 잡념이요,
요란함이라고 했는데, 무슨 마음입니까?
주로 부귀영화를 좇는 욕심들 아니에요?
감정의 노예요. 경계의 노예요. 습관, 업력의 노예입니다.
그렇지 않아요?
먼저 한마음을 만들려면 서원으로 집중시켜야 한다.
수 많은 재색명리 부귀영화의 마음들 온갖 번뇌망상의 마음들을
서원이라는 마음으로 모아야 합니다.
‘교무님 너무 머리가 아파요.’
‘텅 빈 마음이 잘 안 되요.’
정신수양의 자성의 정定. 이 정의 60 - 70%는 서원과 신심만 있으면
번뇌가 팍 줄어듭니다. 정말입니다. 왜냐하면, 서원과 신심은 수 많은
욕심을 모은 것입니다. 그래서 수 많은 번뇌망상을 작은 욕심. 서원과
신심을 큰 욕심이라고 합니다.
결국 번뇌가 작은 욕심들입니다. 그 작은 욕심을 큰 욕심으로 한데
모으는 것입니다. 그 큰 욕심이 성불제중의 욕심이요, 제생의생의
욕심이요, 어떤 진정한 가치와 진정한 행복에 대한 욕심입니다.
그러면 다시 서원과 신심을 통해서 작은 욕심들이 이루어집니다.
내가 원하고자 하는 욕심들은 이 서원 밑에 있는 것입니다.
이 작은 욕심들을 더 큰 욕심으로 모으는 것입니다. 그랬을 때
이 사람은 수 많은 번뇌망상을 먼저 한 마음으로 가져 올 수 있습니다.
더 나아가서는 서원마저도 비워버려야 합니다. 한꺼번에 비울 수
있습니다. 어떻게? 깨달으면 됩니다. 그것도 알기 밖에 못합니다.
대종사님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자기가 엄청난 재산이 있는 줄
알았어도 자기 것으로 쓰려면 이전 등기를 한 다음 써야 한다.
이 삼학의 관계가 서로 떨어질래야 떨어질 수 없는 관계입니다.
예를 들어서 고시공부를 하는 사람은 놀고 싶고 자고 싶고 게임하고
싶고 연애하고 싶은 모든 것을 고시공부 목적 하나에 둡니다.
그래서 그 목적 때문에 다른 잡념들이 상당히 줄어듭니다.
이것을 목적 반조라고 한다. 이것도 대단한 수양공부입니다.
그럼 왜 기도를 안하고 좌선을 하지 않느냐?
다른 욕심에 에너지를 뺏겨 버렸기 때문입니다. 내 목적이 온갖
재색명리 부귀영화면서 좌선을 하겠다고? 좌선이 될 것 같아요?
좌선 못합니다. 우선 순위에서 밀려버립니다. 밀릴 수밖에 없다.
원불교라는 종교가 수행과 신앙을 같이 하는 종교인데
수양, 연구, 취사를 함께하지 않으면, 기독교인보다 더 못하는 것이다.
기독교는 신앙의 힘으로 수양력이 생깁니다.
신심의 힘은 크게 말해서는 첫째, 나라는 존재가 일원상이라는 것을
믿는 것이다. 나는 중생, 바보, 천치가 아니라. 나는 바로 일원상의
존재를 믿는 것이 신이다. ‘안 믿어지는데요?’ 당연하지. 그러니까
분발심을 내고, 왜? 일원상인지, 왜? 부처인지. 연구를 계속하는 것이다.
그것이 ‘신•분•의•성’이다.
둘째, 분발심입니다. 신은 나라는 존재가 부처이다. 나는 ‘공•원•정’을
이미 갖추고 있음을 먼저 믿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안 믿어집니다.
내가 해보니까 실수도 많고 엉망진창이고 욕 얻어먹고 혼나고 갑갑하고
미래 전망이 안보입니다. 그렇지만 믿고 분발심으로 갖다 대는 것입니다.
셋째, 의심입니다. 의심과 불신은 다르거든요? 의심하는 것을 불신으로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그럼 무엇이 불신이냐? 믿지 않고 의심하는 것은
불신입니다. 그래서 여우 같은 의심이라고 합니다.
모두가 처처불상이라고 했는데. 내 눈에는 다 도둑같이 보이고 못된
놈으로 보이는데 어떻게 부처님이라는 말이냐? 그럼. 도대체 부처가
뭐지? 그리고 나도 부처라고? 부처가 뭐고 중생은 무엇이냐? 무엇이
부처라는 건지 의심이 들어가야 합니다.
넷째, 성입니다. 그 의심을 놓지 않고 계속하는 것이 성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알기 전까지 불신입니다. 그러나 알기 전에 먼저 믿고
아는 것입니다. 이것이 종교입니다. 철학은 의심을 통해서 들어가는
것입니다. 출발이 의심입니다. 종교는 믿음을 통해서 들어가는 것입니다.
처음에 믿고, 그것을 다시 왜 그럴까? 하고 들어가주는 것이 종교입니다.
무슨 차이가 있을까?
어떤 사람이 아버지 없이 어머니와 몇 십 년을 같이 살았는데 어머니가
느닷없이 어떤 남자를 데리고 와서는 ‘너의 어버지다”라고 합니다.
아들이 ‘내 아버지인줄 어떻게 알아?’ 불신했습니다.
나중에 커가면서 닮은 것을 보고 또는 습관을 보고 아니면 과학적인
DNA 검사를 통해서 알았습니다. 그때부터 우리 아버지로 알고
받들어줍니다.
그런데 먼저 아버지라고 하니까, 아버지로 대접해 주고 난 다음에
나중에 의심을 통해서 즉, 까닭 있는 마음을 통해서 아버지로 아는 것은
인생의 차이가 엄청나게 난다.
나라는 존재가 부처라는 존재로 출발해서 부처를 얻는 것과 내가
부처인줄 믿지 못하는 마음에서 서서히 공부를 해서 커나가는 것은
엄청난 차이가 있듯이 인과에 대한 믿음과 나라는 존재가 부처라는 것을
믿는 것, 그리고 그것을 안 믿는 것은 인생의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그래서 믿음은 할 수 있다는 믿음. 교법에 대한 믿음. 스승에 대한
믿음이 같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참 중요한 이야기다.
이 회상에 인연이 안 되는 사람은 내가 보면, 신으로 안하고
불신으로 해요. 그럼 불신으로 해도 좋아. 그러면 알려고 하면 좋은데.
알려고도 안 해. 하다가 말아버리고, 나태하고, 그리고 불신합니다.
결국은 자기 인생은 스스로 손해 보는 인생밖에 안 되는 겁니다.
자. 나는 인과를 못 깨쳤다.
인과를 믿는 사람과 안 믿는 사람이 어떻게 될까요?
불신하는 사람이 서서히 교전 보고 법문 듣다가 어느 순간에 신으로
넘어갑니다. 어떤 사람은 계속 안 넘어가기도 합니다. 3년 후에
불신에서 신으로 넘어간 사람은 그때부터 탄력이 붙습니다.
더 늦게 신으로 넘어간 사람은 그 후부터 탄력이 붙습니다.
그러나 처음부터 신에서 출발한 사람은 바로 탄력이 붙습니다.
믿기 전까지 과정은 대체적으로 자기 상식, 자기의 경험을 통해서 산다.
그런데 불신은 대체적으로 아전인수 자기입장에서 해결합니다.
객관화되지 못하고 어떤 판단의 기준이 전부 자기에게 유리한
입장에서만 생각합니다. 그러니 얼마나 더 손해입니까?
그래서 인연이 중요하다. 왜냐하면 처음에는 믿기는 믿어야 하는데.
알지도 못하는 상태에서 믿잖아요. 기독교를 만났으면 기독교를 믿고,
원불교를 만나면 원불교를 믿을 겁니다. 그런데 어떤 인연이냐?
기독교 인연이 많은 사람은 기독교로 가고 원불교 인연이 많은 사람은
원불교로 올 것이다. 인연이 대단히 중요합니다.
내가 불교와 인연이 되었다면 어떨까요?
머리 깎고... 머리 깎은 모습 상상이 됩니까?
인연이라는 것이 참 무섭습니다.
복 중에 제일 큰 복이 인연복입니다. 특히 불연, 법연입니다.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어찌 다행이’란 말이 있습니다.
‘어찌 다행이 이법을 만났던고..’
진짜 지혜 똑똑한 사람은 기독교, 불교, 천주교 다 다닌 다음에
그 중에 자기가 골라서 올 수 있겠지만, 그 판단의 기준이 쉽겠어요?
그래서 결론은 일심-정신수양은 텅 빈 자리를..
내 고향자리로 가자는 것이다. 이것은 주로 아침, 저녁에 합니다.
저녁에는 먼지를 닦는 청소입장, 참회와 반성이고, 아침에는 먼지가
없으니까 본래 그 자리로 들어가는 그 공부를 하라는 것이다.
그런데 서원이 없고 믿음이 없으면 자기 맘대로 합니다.
작은 욕심, 부귀영화에 놀아납니다.
서원과 신이 서지면 마음이 정定해집니다. 정해진다는 건 대지에
깃발을 꽂는 것과 같습니다. 확실하게 깃발을 박아버리지 않으면
요란하고 정신이 없다. 내 삶의 방향을 어느 방향으로 가겠다는
방향타가 없는 것이다.
원圓 – 알음알이 . 사리연구
그 다음 텅 비면 딱 솟아오르는 것이 있다.
그것은 원圓. 아주 밝아진다. 이게 내 본래 고향자리다.
나는 멍청한 놈으로 규정해놓고 열심히 공부해서 밝아지리라. 다릅니다.
이 밝은 것은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일이 있고, 다른 하나는
이치가 있다. 이치는 대소유무라고 합니다. 일은 시비이해라고 합니다.
원圓 밝은 |
< |
사 事 |
시비이해 是非利害 |
이 理 |
대소유무 大小有無 |
이치는 깨닫는 것이다. 초견성이 대자리를 아는 것이고, 중견성은
소자리를 아는 것이고, 유•무자리 전체를 아는 것이 상견성이라고
이야기 합니다. 더 나아가서 수양. 양성을 하는 것. 더 나가서는 취사로
대기대용으로 조화롭게 쓰는 것을 견성의 다섯 단계로 이야기 합니다.
이치는 내 마음대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치를 알아서 시비이해를
운용하는 것이다. 이 대소유무라는 이치라는 것은 대종사님의 기가 막힌
진리의 공식입니다. 대종사님은 우주만유의 전체를 여덟자로 끝내버렸다.
대소유무와 시비이해만 알면 끝나는 것입니다.
제일 멍청한 사람은 무엇을 보고 사느냐?
이利. 나한테 이익이 되는가? 안 되는가? 내가 즐거운가? 돈이 되는가?
내가 먹을 것이 더 있는가? 없는가? 양심이고 뭐고 다 필요 없다.
‘나에게 이익이 되는가? 안 되는가?’입니다.
그리고 해가 되는 것은 최대한 피합니다. 봉사해라 하면,
‘미쳤어? 봉사하게 나한테 이익도 안되고 내 돈 들고, 내 시간 뺏기고.’
절대 안 하죠.
그런데 더 자세히 보았더니 이 시가 이가 되더라. 그래서 이해만 따지면
‘일반중생’이라고 하고, 시비를 보는 사람을 ‘지성인, 지식인’이라고
합니다. 양심 있는 사람들에게 시란 옳은 것입니다.
공자님은 의라고 표현 하셨습니다. ‘견리사이見利思利’라고 말씀하셨다.
이득을 보려거든 먼저 의를 생각하라고 하셨습니다.
제가 독일의 뮌헨을 갔었는데, 시내 중심가의 좁은 길에 큰 빌딩이
있었는데 건물 아래 부분이 사람들이 지나다닐 수 있도록 ㄱ자 모양으로
깎여 있고 기둥 하나 세워져 있었습니다. 이 건물이 언론사건물이었는데
길이 좁으니까 건물 아랫부분을 도로로 만들어서 사람들이 자유롭게
통행할 수 있도록 한 것이었습니다. 그 비싼 땅에 사람들이 편리하게
다니게 하니까 그 건물 안의 가게가 장사가 너무 잘된답니다. 언론사가
손해를 보고 길을 만들었더니 결과는 손해를 안 보고 이익을 봅니다.
반대로 많은 사람들은 이득을 쫓는데 결과는 해가 됩니다.
장사를 하는데 이문을 더 붙였는데 나중에 들켜서 쫄딱 망합니다.
옛날에 풀mu원에서 두부 안에 뭐 넣어가지고 한참 만두에 뭐 넣고..
회사의 이익만 생각하면 다 망해버린다. 그 안에 정당성이 필요하다.
이치를 알아서 일을 잘하자는 것이 우리 원불교의 공부다.
그런데, 여기서 제가 좀 할 말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정말 멍청하다.
이치에도 가늠이 안 잡히고 일은 갑갑하다. 이런 사람은 전생부터
안 닦았다. 희한하게 사리연구의 맹점이 있다. 내가 고민이다.
연구라는 것이 알자는 것이고 배우자는 것인데.. 묘한 것이 멍청한
사람은 더 배우고 알아야 하고 더 연구 해야 하잖아요?
그런데 멍청할수록 더 안 합니다. 똥 고집만 부리고.. 대개는 멍청한
사람은 자기가 멍청한지 모릅니다. 그러니까 연구가 안 된다.
어떤 사람은 엄청 똘똘해서 일은 잘합니다. 이생에서 영리하게 돈을
많이 벌었는데 날이 가면 갈수록 처참해지고 죽은 다음엔 욕만 뒤지게
먹습니다. 그건 시비이해를 운전했는데 이치에 바탕 하지 않았습니다.
진리의 이치나 마음 자리를 공부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가면 갈수록
안이 허황해지는 것입니다.
진짜 일을 잘하려면 깊게 보고, 넓게 보고, 멀리 봐야 한다. 사람이 보다
깊고 넓으려면 대소유무 공부를 해야 한다. 대소는 성리라고 하고,
유무를 인과라고 합니다. 또 대소는 이치, 유무는 참마음이라고 합니다.
원圓 밝은 |
< |
사 事 |
시 비 이 해 | |
이 理 |
대 소 |
유 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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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리 • 이치 |
인과 • 참마음 |
대소유무가 되어야 시비이해를 가져다 쓸 수 있는데, 많은 사람들이
이해만 보다가 시비를 보는데 시와 비에 있어서 각자 판단이 다릅니다.
그 이유는 이치를 모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얼른 볼 때는 시인 것
같은데 나중에 봤더니 시가 아닐 때가 있는데 그것은 이치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지견이 짧으니까 그렇습니다.
왜 이치에 어둡죠?
/ 비우지 않아서.
왜 비우지 못 했죠? 욕심 때문이죠. 욕심 때문에 비우지 못하고 비우지
못하니까 이치에 밝지 못하고 이치에 밝지 못하니까 시비에 밝다 해도
사람이 천박한 것입니다. 구조가 이렇습니다.
이것은 원불교 교리를 설명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마음세계를..
우리의 현실 그대로를 이야기 하고 있는 것입니다.
신과 서원이 얼마나 중요한가? 신과 서원이 있어야 비울 수 있고
비울 수 있어야 비로소 이치에 가늠을 잡을 수 있습니다.
이치에 가늠을 잡아야 제대로 시비의 판단을 할 수 있고 내가 얻고자
하는 이득은 그 안에 자동적으로 온다.
원圓 밝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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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 事 |
시 비 |
이 해 |
인 |
과 | |||
이 理 |
대 소 |
유 무 | ||
성리 • 이치 |
인과 • 참마음 |
그래서 시비가 인이고, 이해가 과입니다. 즉 내가 아닌 짓거리를 하면
손해가 온다. 옳은 짓거리를 하면 이득이 온다. 옳은 것이 무엇이냐?
먼저 비울 줄 알아야 한다. 그것이 옳은 것이다. 비울 줄 모르면요.
자기는 옳다고 생각하는데 그릇 되게 된다. 자기 꾀에 자기가 넘어간다.
우리가 서원과 신심이 깊어야지 비울 수 있고, 비워야지 밝게 판단
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가 세상을 살면서 겨우 먹고 산다는 것이
비울 줄 모르고, 욕심으로 채우고, 나 돈 잘 벌어서, 우리 새끼들하고
배불리 퍼먹고, 내 명예 드러내서, 나 재미있게 사는 것.
이 생각하는 것은 우리 교리하고 정 반대입니다. 결과가 어떻게
되겠어요? 그 사람의 실행은 어떻게 할 것 같아요? 그 사람이 좌선을
실행하겠습니까? 그 사람이 법회를 보러 오겠습니까? 그 사람이 일기를
쓰겠어요? 그 사람이 명상의 시간을 갖겠어요? 그 사람이 선업을
짓겠습니까? 그 사람이 습관 개조에 공을 들이겠어요? 그게 쉽지 않다.
이 작업이라는 건 육근동작이죠?
육근동작이라는 것은 안이비설신이고, 이건 결국은 심신동작이다.
심신동작이 선업이냐 악업이냐 하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작업이라
하는 것은 몸으로 동작하는 작업으로 생각한다.
원불교의 작업은 마음까지 말하는 것이다.
그 다음에 업이라는 것은 두 가지인데 하나는 선업이요. 다른 하나는
악업이다. 심신을 동작해서 어떤 사람은 선업을 짓고, 어떤 사람은
악업을 짓는다. 그래서 선은 취하고, 악업은 사해버려라. 이 말입니다.
그 선악의 판단은 뭘까? 연구다. 그 판단을 잘하려고 했더니 비워야
한다. 비우려 했더니 욕심 문제가 있더라. 같이 연결되게 됩니다.
이 문제아는 문제인줄 모르는 것이 문제아죠. 연구력은 자기가 모른 줄
모르는 것이 제일 문제에요. 연구력에서도 제일 중요한 것은 신입니다.
오늘 신만 얘기해서 좀 그런데 사실입니다.
신이 없는 사람에게는 자기가 어두운 줄 모르고 있으니까 다른 사람이
그것을 지적해 주지도 않고 지적해 주어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신이 중요한 것입니다. 신이 있다면 다른 이가 충고를 해 줄 수 있고,
충고도 받아들입니다. 신이 없으면 말을 안 합니다. 충고를 받아들이지
않으니 말을 안 합니다.
작업(作業) |
육근동작- |
심신작용- |
|
선업 |
- 취取 |
악업 |
- 사捨 |
자 여기서 취사로 들어가면 우리가 심신 작용 한 것이 업이라고
했잖아요. 그런데 내가 선을 취하고 악을 사하는 것은 나의 습관에
의해서 합니다. 대부분 예전부터 했던 데로 합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세요 나는 주로 선을 많이 취했나? 악을 많이 취했나? 함 봐보세요.
아침의 좌선을 못하는 사람이 좌선을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아침에 일어나서 좌선을 취해야 하는데 왜 잠을 취해? 왜그래요.
/ 습관.
습관이지. 그래서 대종사님은 작업취사에 철석같이 굳은 습관이라고
하셨습니다. 습관을 제거하려면 뭐가 있어야 합니까? 습관의 돌이
있다면 어떻게 해야 부수어지죠? 정으로 깨던가 드릴로 뚫어야 합니다.
한꺼번에 습관의 돌을 부수려고 하는 사람은 대단한 사람입니다.
“죽기로써, 기어이, 용맹 있게”
대종사님은 그렇게 표현해주셨습니다.
정신수양은 오래오래 계속하면 이렇게 되어있고
사리연구도 마찬가지입니다.
수양은 천수 만수 억만수 千修 萬修 億萬修
연구는 천각 만각 억만각 千覺 萬覺 億萬覺
취사는 천행 만행 억만행 무량행 千行 萬行 億萬行 無量行
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습관의 돌은 하나씩 팍팍 깨야 합니다. 한꺼번에 하려고 하면
안 깨집니다. 하나씩 깨는 것이 유무념입니다. 유무념을 잡아서
계속 두드려 깨야 한다. 그리고 잊지 않게 일기로 확인하는 것입니다.
대종사님은 너무하시죠. 적당히 하라고 안 하십니다.
끝까지 하라고 합니다. 그런데 여기서도 신이 중요합니다.
이 신과 업의 관계입니다.
신이 깊으면 업이 내려간다.
신이 얕을수록 업이 힘을 발휘합니다. 신과 업은 반비례합니다.
내가 과거의 업을 녹이고 싶다. 그러면 신이 있어야 한다.
업이라는 것은 습관의 힘이다. 습관의 힘을 바꾸기가 쉽나요?
습관의 힘은 무섭습니다.
여러분이 회사를 완전히 망하게 하는 간단한 방법이 있습니다.
회사의 사주를 마약을 하게 한다거나, 잡기를 하게 한다거나,
유혹의 경계에 빠지게 합니다. 또는 그 단체에 이간질 시켜버리면
됩니다. 간단해요. 이런 것 알려주면 안 되는데, 즉 단합을 깨면 되요.
그럼 그 회사 금방 망합니다. 사주가 제정신을 못 차리고 에너지를
딴 데 뺏기면 바로 망합니다.
그 반대로 말하면 내부의 개개인들을 단합을 시키는 것이 가장 큰
공력이다. 그리고 지도자는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인가?
마음은 거기에 전념해야 한다. 확실히 되겠다는 확신이 있을 수록
과거에 묵은 내 업들은 비워질 수 있습니다.
우리가 왜 취사력이 약하냐? 신이 약하니까 작업취사가 안 되는 것이다.
어두워서.. 연구력이 약해서도 안되죠. 판단을 못하니까.
아침에 자는 것이 나은가? 저녁에 술 먹는 것이 나은가?
저녁에 일기 쓰고 아침에 선하는 것이 나은가에 대한 판단력이
없는 것입니다. 설사 안다 할 지라도 업의 무게가 얼마나 무거운지요.
기어이 죽기로써 하지 않으면 업의 무게에 다 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스스로 합리화합니다. ‘나는 성격이 그래요’, ‘나는 늦게 만났어요’,
‘나는 여자이니까’, ‘나는 전생에 안 닦았나 봐요’.
그러나 대종사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일원상에는 다 원만구족하고 지공무사하다’고..
이것을 진공묘유의 수행이라고 합니다. 교리도 오른쪽에 보면
진공묘유의 수행문이라고 나오죠? 이것은 무슨 소리냐?
진공이 원래 묘유입니다. 진공은 ‘공이불공’이라고 말합니다.
완전히 비어서 텅 빈 것이 아니라. 텅 빈 충만이라고 이야기합니다.
|
|
진공 眞空) |
공이불공 空而不空 |
공적 空寂 |
묘유 妙有 |
유이비유 有而非有 |
영지 靈知 |
지금 일원상의 내적인 속성을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우리의 본래 마음자리, 고향마음을 말하는 것이다.
지금 저를 보세요.
저를 보고 있는 눈. 귀. 제 말을 듣고 있는 것이 있죠?
그것이 마음이다. 그 본래의 마음은 어떻단 말이냐?
진공이다. 본래의 마음은.. 텅 비었다.
여러분들 중에는 저를 바라보는 눈이 여러 가지가 있을 것이다.
얼굴이 각 졌어요. 넓적해요.
옛날에 전농교당에서 어린이 법회를 보는데 ‘야. 이대팔 이대팔이다.’
처음에는 무슨 말인지 몰랐습니다. 머리의 가르마가 2대 8이란
말이었습니다. 그리고 나한테 코미디언
애들한테 그런 소리 들으면서 다 교화했습니다.
그 애들이 보는 시각은 코미디언 아무개 같이 넓적하고,
머리가 2대 8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외적인 모습일 뿐입니다.
내 내적인 것, 내 본래마음은 형체가 없습니다. 형체가 없어도 또
잡으면 다 있어집니다. 알아들을 건 다 알아듣고 기쁜 건 기쁘고..
슬프면 눈물 흘리고.. 이게 제 마음이고 여러분들의 마음이다.
그 마음이 어떻게 생겼느냐? 어떻느냐? 진공묘유다. 지금 원불교의
일원상의 진공묘유가 아니라, 지금 제 목소리를 듣고 있는 여러분들의
마음이 본래는 텅 비었다. 그런데 분별성, 주착심에 놀아나고 있고
노예로 살고 있다. 돈에 묶여있고, 명예에 묶여있고, 어떤 상에 묶여있다.
본래는 그렇지 않고 본래는 진공이다.
그런데 그 진공의 내용을 더 들어가봤더니 묘유다. 이걸 뭐라고 하느냐?
없으면서(진공) 있고(묘유) 있으면서(묘유) 없다(진공)고 합니다.
우리 마음으로는 공이불공을 ‘공적’이라고 표현합니다.
유이비유는 ‘영지’라고 합니다. 우리의 마음은 텅 비어서 고요합니다.
고요할 ’적寂’자는 요란함이 없고 사심이 없는 순수한 그 마음을
말합니다. 그런데 그 가운데 신령스럽게 알더라.
많은 사람들이 착각하는 것이 아는 것 영지라는 뭐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영지라는 것이 영혼이고, 그 영혼은 내 뇌나 내 가슴에
있고 나의 부모로부터 태어날 때 받은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 실체는 뭐라고? 공, 진공이다. 실체가 없더라.
그 실체가 어떻게 생겼냐? ‘불생불멸’이더라. 그 실체는 생긴 바도 없고
멸한 바도 없다. 그래서 이것이 영생하다. 영생한 중에 내가 어떻게
인과로써 계속 영향력을 미쳤냐가 다르다. 우리는 영생을 하면서
육도윤회로써 몸을 다시 받아서 왔다갔다 왔다갔다 한다.
서동파가 공부를 많이 했어요. 어느 날 서동파가 어떤 스님에게 갔는데
스님 방에 갔더니 의자가 없다. 스님이 앉으라고도 안 해서 서동파가
장난기가 동했다. 서동파는 그 때 상당히 높은 관직에 있었습니다.
서동파 : 내가 스님을 의자 삼고 앉고 싶습니다.
스님 : (오. 요놈 봐라...) 그래 만약에 네가 내 질문을 응해서 맞추면
나를 의자로 삼고 앉아라. 그러나 못 맞추면 너의 옥패를 벗어라.
결론은 서동파가 옥패를 벗어 주었습니다.
스님이 뭐라고 질문을 했냐면?
‘네가 나한테 앉겠다는데 나라는 것은 지수화풍 사대다.
지수화풍이 본래 공인데 어디에 앉을 것이냐?’
이렇게 질문을 하니까. 서동파가 콱 막혀버린 것이다.
어떻게 앉을 수 있어요?
가서 앉아버리면 된다. 없다고 하는 것에 또 묶인 거죠.
그때 내가 있었으면.... ㅎㅎㅎ
여기까지 질문 있으면 하고 좀 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쉬었다가 하겠습니다.
================= 2부 =============================
계속하겠습니다.
오늘은 진공묘유의 수행문을 공부하고 있습니다.
정신수양. 사리연구. 작업취사에 대해서 계속 공부를 하고 있습니다.
수양 연구 취사의 더 깊이 있는 내용은 나중에 삼학공부,
정전에서 하도록 하겠습니다.
삼학과 팔조의 관계는 어떻게 되는 것인가를 말씀 드리겠습니다.
삼학이라 하는 것은 일원상. 진리의 속성을 드러내는 것이고 내용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 내용이 아무리 있다 해도 삼학의 힘을 얻는 것은
신분의성을 통해서 얻습니다.
공의 원리, 원의 원리, 정의 원리, 즉 수양 연구 취사.
수양력, 자주력, 정력.
연구력 혜력, 또는 반야지.
계력, 취사력, 실행력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이렇게 되기 위해서는 바로 신 분 의 성이 있어야 합니다.
즉 수양력이 힘을 붙지 못하고 연구력이 밝아지지 못하고 취사의 힘을
못 타는 것은 신분의성이 약한 것이다. 바꿔 말하면 ‘불신 탐욕 나 우’가
있는 것이다.
수양력도 신분의성으로 해야 하고
연구력도 신분의성이 들어가야 하고
취사력도 신분의성이 들어가야 그 힘이 있다.
내가 맛있는 것 보는 것과 갖고 오는 것과 먹는 것이 다릅니다.
맛있는 것, 보는 것, 가져오는 것, 먹는 것 다 다릅니다.
결국 그렇게 하려면 먼저 신분의성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오늘 나눠준 것 있죠? 그걸 보면서 설명을 드리고자 합니다.
첫째 장. 교법의 선언이죠.
천하의 대도요. 만고의 대법이다. 그래서 일원의 원만한 진리 그랬는데,
오른쪽에 보면, 삼학 팔조는 만생령 부활의 원리요 대도이다.
이 말이 무슨 말인지 가늠이 잡혀야 한다. 만생령이 부활을 한다.
다시 산다는 말입니다. 즉, 육신의 갇힌 나, 업력에 묶인 나가
삼학팔조를 통해서
정말로 거듭난다. 그래서 대도다.
삼학팔조의 원만한 수행이다.
대종사님 당신도 밑의 제자들에게 물으셨다고 합니다.
‘내가 정신의 수양력, 사리의 연구력, 작업의 취사력이
어디에 편중된 것 같으냐?’
정산종사님도 그러셨다고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기의 습관과 자기가 원하는 것, 좋아하는 것을 하게
되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수양만 좋아해, 어떤 사람은 연구만 좋아해,
어떤 사람은 취사만 좋아합니다. 그러나 이것 모두 서로가 서로에게
영향을 주기 때문에 수양도 연구와 취사에 바탕 해야 하고,
연구도 수양과 취사에 바탕 해야 하고, 취사가 수양과 연구에 바탕
한다고 할 것 같으면 서로가 병진하는 것이 몇 배의 효과가 있다.
그것이 무시선, 무처선으로 동정간에 되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 다음 가운데 보면 사은보은은 세계 평화의 원리요 대도이다.
왜 세계 평화의 원리죠? 사은에 대한 보은. 사은을 느끼고 알아서
거기에 대한 보은을 할 것 같으면 이세상의 전쟁이 다 종식될 수 있다.
사은의 원만한 신앙, 봉공이라고 했죠. 사은실천인데..
사은의 원만한 신앙. 왜 원만한 신앙이죠?
미신적인 것도 아니고, 진리 자체 덩치에 처처불상 자체를 신앙하잖아요.
그 다음에 봉공이다.
사요실천은 세계 평등의 원리요 대도다.
왜 저번 주에 사요가 왜 평등의 원리인가 했죠? 저번 주에 어려웠어요?
저번 주의 사요설명은 제가 공짜로 알려주기 싫은 내용입니다. 자력양성,
지자본위, 타자녀 교육, 공도자 숭배. 이것이 이 세상에 무지와 빈곤과
질병을 다 해결해서 평등세계를 이룰 수 있는 대도이다.
사요의 원만한 치국, 치평 치국 평전하이다.
이 사요가 국가세계에 될 것 같으면 치국 평전하가 다 된다.
그 다음에 삼학공부로 넘어갑니다.
정신수양. 사리연구. 작업취사라고 되어 있습니다.
다음 양쪽에는 무시선. 무처선이라고 되어 있죠?
정신수양. 우리의 텅 빈 공한 자리를 내가 만들어가는 수행의 방법이
네 가지가 있는데 그 네 가지는 염불과 좌선 기도와 주문이라고
이렇게 해주셨습니다.
그 일 그 일에 마음을 멈추고 잡념을 제거하는 공부이다. 망념을
잡념이라고 표현했고 이것을 요란함이라고 했고 분별성 주착심이라고
표현 했습니다. 마음에 요란함이 없는 것 그래서 일심정력이라고
했습니다. 일심 수 많은 마음들을 한마음으로 그 한마음은 나중에
한마음도 넘어선 공의 마음입니다. 그래서 정력이라고 했습니다.
이 정력에 바탕 한 사리연구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정신수양은
바탕이라고 합니다. 정신수양의 바탕 아래서 밝아진 사리연구가
되어야지 정신수양을 하지 않고 연구만 하면 나주에 말라 비틀어져요.
깊이가 없고 이치보다는 일만 하게 되어있습니다.
우리 공부가 묘해요. 수양 연구 취사가 곁들여지면 무궁무진한 창조적
활동 조화 균형이 나오고 그 속에서 엄청난 역량이 터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만사성공이라고 했습니다.
엊그저께 LG전자의 기업연구원에서 하는 소리가, 창조적인 활동은
아이큐에 있는 것이 아니다. 두 가지로 설명 했습니다.
하나는 동기부여와 다른 하나는 집념이라고 말했어요.
우리 교리로 말하면 동기부여는 신입니다. 할 수 있다고 하는 확신,
희망, 원력 그것이 동기부여다. 해야겠다는 마음, 반드시 하면
될 것이라는 마음. 그리고 집념은 무엇이에요? 분•의•성을 넣은 것이다.
그러면 창조적인 아이디어가 나온다는 거에요. 전부 신분의성을
벗어나지 않습니다. 신분의성을 만사 성공의 원동력이라고 했다.
사리연구를 보면 경전, 강연, 회화, 의두, 성리, 정기일기.
그 일 그 일에 배워 알고 생각해서 진리를 깨닫는 공부다.
마음에 어리석음이 없는 것이다. 일에 어리석지 않고 이치에도 걸림이
없다. 그래서 명심오도다. 내 마음이 밝아지고 오도다 도를 깨닫는다.
작업취사는 상시일기, 주의, 조행, 참회다.
그 일 그 일에 정의는 결단 있게 취하고 불의는 결단 있게 놓아버리는
공부다. 결단 있게 하고. 용맹 있게, 기어이, 죽기로써 해야지. 내가 업을
넘어설 수 있지. 그렇지 않으면 자기 습관의 업을 넘지 못합니다.
정말 어려운 것 같다.
신이라는 것은 한 사람이 변화가 되는 게 몇 퍼센트%?
십 수 퍼센트% 라고 한다.
나는 그것을 부정하죠. 우리 서원을 갖다 대서 신분의성으로 삼학공부를
할 것 같으면 얼마든지 중생이 부처로 변할 수 있다. 그래서 마음에
그름이 없는 것이다. 이것을 중도실천이라고 표현 했습니다.
중도를 정의로 표현했습니다. 옛날 일제식민지시대에 정의라고 못하고
중도라고 표현 했습니다. 그래야 일본 애들이 봐주니까.
중도라는 말과 정의라는 말이 똑같습니다.
자 넘어갑니다. 이것은 <대산종사님의 교리 실천 도해>라고 합니다.
이걸 보시면 가닥이 잡혀요. 이 세상의 어떤 이론들이 다 이 안에
들어옵니다. 원불교 교리가 아닙니다. 우리의 마음의 원리이고,
이세상의 수행이 이 안에 다 들어가 있다.
자. 정신수양, 사리연구, 작업취사
마음을 닦고 마음을 알고 마음을 잘 쓰고
그래서 정 혜 계라고 합니다.
정심이다. 마음을 고요하게 하는 것이다. 요란한 것을 고요하게..
그 다음 명심이다. 마음을 밝게 하는 것이다.
그 다음 정심이다. 마음을 바르게 하는 것이다.
그름이 없게 하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의 성품을 양성, 견성, 솔성이다.
성품을 기르는 것이고 보는 것이고 쓰는 것이다. 거느려서 쓰는 것이다.
이것을 온전한 생각으로 취사라고 합니다. 온전한 정신. 그 생각이 취사.
무엇을 취할 것이냐? 중도를 취하고 사도를 버려야 한다.
선을 취하고 악을 놓아야 한다.
이것을 공 원 정이라고 한다.
이것을 양공이요 관공이요 행공이라고 이야기 한다.
그 진공을 기르는 것. 진공을 보는 것, 행하는 것이 수양 연구 취사다.
그 결과는 수양을 잘하면 해탈을 얻을 수 있다.
연구를 잘하면 대원정각이다. 큰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 일과 이치.
취사는 중정의 도를 얻을 수 있다.
정신수양 이것을 ‘보림지지保任止知’라고 한다. ‘보림’이라는 것은
내가 깨친 것, 견성한 것을 그대로 기르는 것을 보림이라고 한다.
놓쳐버리지 않는다. 그 자리를 잘 보호해야 돼. 수호라고도 이야기 한다.
지지라는 것은 그 아는 것을 멈춘다. 스톱stop 시킨다.
그랬을 때 비워진다.
그 다음 연도치지硏道致知라..
도를 연마하고 이치를 알아간다.
그 다음 수덕지선修德至善이라..
덕을 닦고 선에 이르게 한다.
그래서 일심을 모으는 공부요. 지혜를 연마하는 공부요.
실천하는 공부다. 그 밑에는 여러분 스스로 하고요.
마지막에 대적공이라 했다.
그 다음 장..
정신수양. 사리연구. 작업취사.
정 혜 계라 한다.
이것을 유교에서는 지혜인용이라고 하는데 인은
정신수양이 바로 인(仁)이요. 지는 이 지(智)요.
작업취사는 용(勇)맹 있게 하는 것을 말한다.
이것을 온전한 생각 취사라고 한다.
온전 늘 멈추고, 생각 늘 생각하고, 취사 늘 취사하는 것을
천정 만정 억만정 무량정
천각 만각 억만각 무량각
천행 만행 억만행 무량행 이다.
무량행은? 우리 좌산님 법문에 의하면
하고 하고 또 해서 함이 없어도 할 때까지
보고 보고 또 봐도 봄이 없을 때까지
정신수양은 만능이라 한다. 사리연구는 만지다. 취사는 만덕이다.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그래서 이것은 무시선 무처선으로써 귀결이 되는데
거기에 보면 중간에 정기훈련, 상시훈련 되어 있죠?
정기훈련은 수양 연구가 주가 되죠?
상시훈련은 작업취사가 주가 됩니다.
정기훈련은 정시공부요, 상시훈련은 동시공부다.
성품은 할아버지 조(祖)자가 써졌고, 정신은 아버지 부(父)자가 써졌고,
마음은 아들 자(子)자가 써졌고, 뜻은 손자 손(孫)자가 써졌다.
성품이 동할 것 같으면 정신으로 나온다.
그 정신이 한마음이 동하죠. 그것이 어떤 뜻으로 가느냐? 그래서
성품은 깨치는 것이고
정신은 수양하고 통일하는 것이고
마음은 공부하는 것이다.
뜻은 서원으로 가야 한다.
이 뜻이 서원이냐 욕심이냐에 따라서 그 마음이 선한 마음이 되고
악한 마음이 되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 정신이 온전한 정신이 되기도
하고 정신 없는 정신이 되기도 한다. 그것이 깨달음으로 가느냐?
성품->정신->마음->뜻 이렇게 되기도 하고,
뜻->마음->정신->성품 이렇게 되기도 합니다.
이것은 결국 나를 말한다. 나의 표현이다. 나는 성품이요. 정신이다.
성품->정신->마음->뜻 이것은 내가 정할 때를 말한 것이고,
뜻->마음->정신->성품 이것은 동할 때를 말한다.
내가 동 할 때, 정 할 때 내 마음을 말한다.
그래서 서로가 서로에게 도움을 줍니다.
성품을 깨칠 것 같으면 이 사람은 회광반조廻光返照를 할 수 있다.
자성반조를 할 수 있다. 정신수양을 해도 성품자리에 쉽게 갈 수 있다.
정신이 온전하면 마음이 훨씬 더 복잡하지가 않다.
수많은 마음들을 온전한 정신수양으로써 거둬들인다.
그래서 그 마음을 다시 쓴다. 선한 마음으로..
그 뜻이 서원으로 갖다 쓴단 말입니다.
보통 중생들은 그렇지 않죠. 욕심으로... 욕심은 과욕을 말합니다.
먹고 자고 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이 세상에 재색명리가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것을 과히 취하는 것을 욕심이라고 표현하는 것입니다.
그 뜻이 어떠한가에 따라서 마음도 달라지고 마음이 어떠한가에 따라서
뜻도 달라진다. 이것이 나의 동정간의 문제입니다.
상시훈련에 보면 취(取)는 솔성요론 이라고 했고, 사(捨)는 삼십계문이다.
이렇게 표현을 해주셨습니다.
팔조로 넘어가겠습니다. 팔조에 보면,
오른쪽에 보면 허심영부(許心靈父) 헌신사계(獻身斯界)
마음은 영부에게 바치고 몸은 사바세계에 바치겠다.
이건 주산종사 글입니다.
왼쪽에 법륜상전(法輪常轉) 영겁불휴(永劫不休)다.
법륜이 항상 굴려가지고 영겁을 통해서 쉬지 않겠다.
이것을 정진이라고 합니다.
위에 보면 진행사조와 사연사조.
즉 내가 일원상의 진리에 가도록 기름칠 해주는 것.
삼학공부를 해주게 하는 것이 신 분 의 성이다.
그런데 그것을 못하게 하는 잡초 같은 것이 있는데
그것이 불신 탐욕 나 우이다.
신 분 의 성도 두 개씩으로 나눴습니다.
먼저 신 하나는 정신이요. 다른 하나는 미신이다.
정신이라 하는 것은 진리를 바르게 믿고 정법정사를 믿는 것이다.
미신은 진리를 어긋나게 믿는 것이다.
그래서 자력신 타력신을 병진해야 한다.
자력은 내 자성이 부처라는 것. 타력으로는 우리 스승님과 진리가
바로 확실하게 정법정사라는 것을 믿는 것이다.
전탈전여 전신전수라고 있죠.
전탈전여라는 것은 전부 빼앗고 나서 전부다 준다는 뜻이다.
내 욕심을 비우고 서원을 돌려 키웠을 때 비로소 내가 마음이 편해지고
얻을 수 있다. 전심전수. 오롯 전체를 믿어야지 전체를 받을 수 있다.
반신반수라고 하던데 반만 믿으면 반만 받아요.
자기가 믿는 만큼 받는 것입니다.
신도 법위에 따라 신이 다릅니다.
보통급의 신이 있고, 특신급의 신이 있고, 상전급의 신이 있어요.
믿음의 깊이, 넓이, 높이가 달라집니다.
가장 제대로 믿은 사람은 정산종사님, 대산종사님이다.
정산종사님은 ‘내가 삼학팔조공부로 성불하는데 자신하겠다.’고
하셨잖아요. 자신하세요 여러분들은?
대신근이다. 신의 뿌리가 팍 박혀야 한다. 그래서 결정의 원동력이다.
탁 결정이 되어야지. 이럴까 저럴까 하면 안 된다.
분발도 정분과 객분이 있다. 정당한 법으로 용맹정진하는 마음이고
철없이 날뛰는 혈기의 용이다. 대분지라고 해서 촉진의 원동력이다.
그 다음 의심도 정의도 있고, 사의가 있다. 사리 간에 바른 의심을
일으키는 것과 정당한 일을 믿지 아니하고 저울질 하는 것이 사의다.
여우 같은 의심을 내는 것.
그래서 대의단을 뭉쳐야 한다. 의심을 모으고 모아서 한 단이 되어야
한다. 그랬을 때 대각의 열쇠를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정산 종사님도 대종사님도 다 의단이 있으셨죠?
여러분은 의단이 있으십니까?
의단. 의심이 있어야 합니다. 지갑에 돈만 갖고 있으면 중생입니다.
지갑에 의심을.. 대각의 열쇠를 가지고 다녀야지.. 카드만 넣고 다니고..
성도 정성과 우성이 있다.
정당한 일에 한결 같이 바치는 정성이 있고, 그 일에 역리로 바치는
정성이 있다. 그래서 대정성은 성공의 어머니다.
불신 탐욕 나 우는 반대되는 것이다.
정당한 일을 믿지 못하고 결정하지 못하는 것.
불신은 성공을 막는 장벽이다.
탐욕은 모든 일에 상도를 벗어나서 과히 취하는 것으로써 탐욕은 모든 죄악의 싹이다.
나. 모든 일을 뒤로 미루고 하기 싫어하는 것. 나태다.
핑계를 잘 잡습니다. ‘나는 성격이 그러니까’, 나는 얼마 안 됐으니까’,
‘나는 윗사람이 아니니까’. 그러면서 자기의 나태를 합리화하죠.
우. 진리를 모르고 자행자지 하는 것. 자행자지란 자기가 하고 싶으면
하고 말고 싶으면 마는 것을 자행자지라고 합니다. 우는 진리의 어두운
마음의 소경이다.. 그렇게 표현해주셨습니다.
시간이 많이 되었네요.
이것만 하고 마치겠습니다.
무시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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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動) - |
정의 正義. |
중도中道 |
무처선 |
정(靜) - |
일심 一心 |
정념 |
동정간 불리선을 무시선 무처선 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정시에는
삼학의 수양과 연구를 통해서 정기훈련을 하게 되어 있고, 동시에는
상시훈련으로써 상시응용주의사항이라든가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핵심을 더 말하면 정시에는 일심이 핵심입니다. 일심이 아닌 것은
잡념 망념에 산다. 여러분 어떠세요? 머리에 뜨거운 사람이 많습니다.
중생들은 이 주착심 뭐가 주착심 이냐면? 주로 재색명리입니다.
부귀영화죠. 저도 주착심이 있더라구요. 가만히 생각하면 요새 자나깨나
학사 생각이다. 주착심. 딱 생각이 붙어있다.
의자가 앉았다 일어나면 의자가 떨어져야지. 궁둥이에 붙으면 어떻게
되겠어요? 숟가락으로 밥 먹었으면 숟가락을 놓고 다른 일을 해야지
숟가락을 계속 들고 다니면 어떻게 해요?
똑 같은 것이다. 주착심이란 것은 어떤 것이 계속 붙어 다니는 것이다.
중생들은 여기에 에너지를 다 뺏긴다. 그때 주착심을 다 놔버리고 일심.
빈 마음으로 가자. 이것이 무시선이다. 정시에는...
그럼 동시에 수양 연구 취사는 뭐냐? 선은 뭐냐?
바로 정의다. 정의는 중도라고도 표현합니다.
아까 동시에는 정의라고 했습니다. 정시에는 일심이라고 했습니다.
[수양]
정: 일심- 수양의 정시는 일심, 안정입니다. 마음 나가는 번수를 세는
것입니다. 내 마음이 몇 번 나갔는가.
동: 정의- 동시에는 정의입니다. 정의는 안분과 수호라고 합니다.
동시에는 내가 어떤 경계에 얼마나 편안한가? 그리고 내 마음이 얼마나
빼앗겨 나가는가. 지켜내는가. 이것을 끌리는가 안 끌리는가.
[연구] 연구에 정시와 동시가 있습니다.
정: 일심- 연구의 정의는 슬기롭다. 꿰뚫어볼 수 있는 지혜가 있느냐?
동: 정의- 동시에는 분석과 판단입니다. 빠르게 분석해서 빠르게 판단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렇지 못하면 중요한 순간을 놓쳐버립니다.
이것이 수양을 통한 예지력입니다. 이치를 본 예지력입니다.
취사를 통해서 다른 걸림돌을 제거한 것입니다.
연구도 안으로 이치가 어떠한가. 밖으로 일이 어떠한가 판단이 됩니다.
[취사]
정: 일심- 취사의 일심은 대중.
동: 정의- 동시에 정의는 주의와 취사. 정의를 얼마나 주의 깊게 취사를
하느냐? 동시에는 지속적으로 대중을 가지고 해낼 수 있느냐?
무시선법에 보면 잡념을 제거하고 일심을 양성해라.
뭐 할 때? 육근이..? 한자라.. 요즘에 대종사님이 말씀하신다면
일이 없을 때는 -즉, 정할 때는- 잡념을 제거하고 일심을 양성하라.
일이 있을 때는 -즉, 동할 때는- 불의를 제거하고 정의를 실행하라.
그 정의가 중도다.
수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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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 - 정의 |
안분, 수호 |
정 - 일심 |
일심. 안정. 번수 | ||
연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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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 - 정의 |
분석 판단 |
정 - 일심 |
슬기 | ||
취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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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 - 정의 |
주의, 취사 |
정 - 일심 |
대중 |
자. 질문 있으면 해주십시오.
어려웠지요?
===================== 질문 과 답변 ====================
Q_김호겸: 아까 학사를 말씀하며 주착심을 얘기 했고, 삼학에서는
의두를 품어서 생각하고 생각해서 의단이 된다고 하셨는데. 학사가
주착심이 되는 것과 의두를 품어서 의단이 되어서 대각의 열쇠를 얻는
것의 차이점은 어떤 것인가요?
A_교무님: 그래서 때와 장소에 맞는 것이 중요해요. 그래서 선 시간에는
부모님에게 효도할 마음이 나는 것도 잡념이라고 합니다. 망념이에요.
내가 학사생각을 어떻게 할까 하지만, 일심이 되어서 그 일 그 일에
연마는 계속 해야 하지만 그렇지만 그것이 나의 모든 생각을
덮어버리거나 좌선하면서 생각나면 그것이 아니다.
화두도 마찬가지예요. 그게 의단이 되지만 그것도 때와 장소가 맞아야지.
동정이 맞아야 한다. 어떤 사람은 지금도 원불교 만나서 정신의 수양력
하면 정만 생각합니다. 고요할 정만… 천만의 말씀이에요. 사실은 동이
중요하다. 정이 바탕 한 동을 잘하자는 것이다.
과거의 수양 연구 취사력도 이게 참.
어떤 사람이 나에게 이렇게 질문할 수 있어요. ‘교무님 삼학 공부 안
해도 똑똑하게 잘해요.’ 그것은 부지 중 삼학이라고 합니다. 그 사람은
그일이 있을 때는 열심히 하는데 그일이 지나고 나면 지속적으로
안 되는 것이다. 그래서 부지 중 삼학을 착각해서 원불교 삼학공부
안 해도 먹고 살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참 많습니다. 그것은 일이
닥치면 하지만 일이 끝나면 덮는다. 이치가 동반되지 않고 원리가
동반되지 않다. 취사도 자기 습관을 근원적으로 해결할 수 없다.
대종사님도 철석 같은 습관의 업력을 제거 할 때, 유무념으로 하나씩
파버리게 했잖아요. 편 떼기 해라. 이렇게 기가 막히게 해놨습니다.
오늘 아마, 50% 알아 듣는 사람은 공부 많이 한 사람이다.
처음 온 사람은 10% 알아듣고. 그것은 제가 강연을 잘 못 하는 게
아니라 그럴 수 밖에 없습니다. 오늘 모르겠다 하면 다음에
안 나오시던가 계속 나오면 알 수 있습니다.
영어도 몇 년 해야 아는데..
Q_
A_교무님:
수양 – 만능
연구 – 만지
취사 - 만덕 할 수 있다.
정신수양을 하면 만능을 갖춘다. 사리연구를 하면 만지가. 작업취사를
잘하면 만덕을 할 수 있다. 여기서 만능을 모르겠다는 말이죠.
연구해봐라.
정신수양의 세계에 대해서 이해를 잘 해야 합니다. 단순히 좌선해서
정신수양이 아니다. 아까 수양은 신분의성과 서원이 근간되어야 한다고
했잖아요. 그리고 수양 안에는 연구취사가 동반되어야 한다.
낮에 싸돌아 다니고 술 먹었는데 아침에 수양 하겠어요? 못하지.
일과 이치가 전혀 분간이 안 되는데,
수양이 좋은지 안 좋은지 어떻게 판단해.
그런데 만능이라는 것은, 무능이라는 말입니다.
더 모르겠는가?
만지는 무지라고 한다.
만덕은 무덕이라고 한다.
한번 연마해 보세요.
이게 불교의 매력입니다.
텅 비잖아요? 그러면 어디에나 다 갈 수 있고
어디에나 다 어울릴 수 있고 누구에게나 다 할 수 있습니다. 텅 비면..
그러기 때문에 능하다는 것도 없어. 그러기 때문에 능하다는 것이다.
비워버리기 때문에..
수양이 참 중요합니다. 특히 현대사회에서..
여러분 이 세 가지에서 조금 뭐가 더 부족합니까?
다 부족합니까?
서로가 서로에게 밀접한 영향력을 미칩니다.
여러분 만생력 부활의 원리라고 하는데 내가 삼학공부를 통해서 부활.
거듭나야 합니다. 저도 노력하고 여러분도 같이 노력하면 좋겠습니다.
감사합니다. ^^
타이핑:
편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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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감사합니다 ^ ^
은전교우님 댓글 고맙습니다. ^^v
늘 수고해주심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
혜은교우님의 공부심에 더욱 힘이 납니다. ^^
갈수록 양도 많아지고 내용도 알차지는 것 같습니다. 정원교도님께 늘늘 감사드립니다.
교무님 덕분에 내용이 알차지는 거겠죠. 순명교우님도 힘내요 ^^v
매번.. 인쇄만해가고 리플을 못남겼네요;; 반복학습 할 수 있게 도와주셔서 감사드려요!!^^
반복학습 너무 중요합니다. 제가 더 기쁩니다. ^^
이번 문서는 30페이지가 넘네요~^^ 정말 수고 많으십니다~ 덕분에 공부 잘 하고 있어요
목에 핏대 세우시는 교무님에 비하면 새발의 피죠... 언제나 화이팅~ ^^
감사합니다.
읽어주신 은혜 고맙습니다. ^^
어지간한 책한권은 만들수 있겠네요;; 늘 감사드려요~
뜨거운 공부심.. 늘 고맙습니다. ^^
여러분들의 댓글과 공부심에 저도 힘이 납니다. 우리 모두 열불해 보아요 d^^b
늘 새로운 법문 감사합니다.^*^
오오, 이 설법을 읽을 수 있다니...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