압력만이 북한을 움직이게 한다.
국가간에 전쟁이 아니고 교섭으로 일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대화만 가지고서는 안 되며 압력을 가하여야 한다. 압력이 따르지 않은 대화라는 것은 차 마실 때 하는 이야기와 같다. 납치된 다섯 명을 되찾고 그 자녀들 7명을 귀국시킨 것은 일본 국민의 압력의 힘이었다. 압력의 중심은 피해자 가족회였다. 가족회의 결성이 국민의 거대한 압력을 결집하는 구심점이 된 것이다.
납치당한 당시 가족들은 어디에서도 아무도 돌보지 않은 고독 속에서, 혹시나 바다에 빠지지 않았는지, 암벽과 해안의 암초 등을 기약도 없이 찾아 헤맸던 사람들도 있었다. 「혹시나 메구미의 소식을 들을 수 있지 않나 하고」요꼬다 부처는 나와 함께 고오찌에 있는 어느 사람을 찾아간 일도 있었다. 희미한 실마리도 놓치지 않고 일본 각 지방을 동이건 서이건 찾아 헤맨 요꼬다 부부의 20 수년의 세월을 누가 보상할 수 있단 말인가! 일본 전국 각지의 납치 피해자 가족이 드디어 전국 조직을 결성하게 되었다.
납치피해자 가족회의 결성! 1997년 3월 25일, 이 날은 이 운동의 획기적인 시발점이 되었다. 결성의 배경에는 납치의 조사를 위하여 전국 각지를 돌아다니며 자료와 증거를 수집하고 납치가족 전원과 깊은 연결을 맺은 헤이모도 다쓰기치 씨 (일본 공산당의 하시모도 아츠미 참의원 의원의 전비서)의 역할이 컸다. 가족회의 결성은 전국적으로 국민의 강한 지지를 받아 정치계를 움직이기 시작하였다.
그 결과 납치는 이제 모르는체하고 넘어갈 수는 없게 되었고 김정일은 판단하기에 이른 것이다. 납치를 자백하고 동시에 일본과 국교를 회복하여 배상금을 받아내려는 속셈이었다. 모리기 로오 수상(당시)에게 은밀하게 납치의 해결을 타진해온 것이 2001년 1월, 지정된 장소인 싱가폴에 밀사로 나가까와 히데나오 의원을 파견하였는데 김정일의 심복인 강석주 (제1외무부장)가 그 장소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강석주는 이 책에서도 가끔 등장하는 인물이다. 미국으로부터 경수로 2기를 약삭빠르게 욹어 내고 1995년에는 수해를 구실로 각국에서 100만 톤 가까운 식량을 받아들인 사람이다. 납치 피해자를 일본으로 돌려보낼 수도 있다는 호의적인 이야기를 꺼냈다. 별일이 없었다면 모리 수상이 평양으로 가는 것이었는데 실언과 실태로 하야한 관계로 고이즈미 수상에게 우연하게도 차례가 돌아가게 된 것이다. 어떻든 누가 가더라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고이즈미 수상은 「내가 평양에 갔기 때문에 납치 문제 해결이 가능했다」며 호언하면서 마치 자기가 사태를 주도하는 양 착각을 하고 있었다. 나는 그의 경솔을 비웃으며 졸저 「남치와 핵과 아사의 나라 북조선」(2003)에 이렇게 썼다. 「우화에 자기가 시간을 알리므로 태양이 솟고 새벽이 온다고 생각하며 만족하고 있는 어리석은 닭이 나온다. 이 닭을 연상케하는 어리석은 말이다.」(p95)
납치피해자 가족과 국민의 운동이 압력이 되어 김정일을 압박하게 되었다. 국가범죄의 해결에는 국가가 나서지 않으면 안 된다. 고이즈미 수상은 국가의 대표로서 김정일과 절충하였다. 국민의 압력에 의해서 자기가 움직이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우둔한 지도자는 자기 스스로가 움직이고 있다고 착각하게 된다. 고이즈미 씨는 마치 납치를 자기의 전매품처럼 생각하고 있다. 그렇게 되니 9.17이후에 이권을 챙기려는 사람들과 내노라 하고 나서기 좋아하는 사람들이 수상 주변에 모여들어 온갖 도깨비가 꿈툴거리는 모양을 보기 싫을 정도로 보여주었다.
그러자면 일부 국민도 착각에 빠져 고이즈미 비판을 하게 되면 위대한 닭님에게 그런 실례되는 말을 하느냐며, 가족회에 대한 비난이 시작되었다. 2004년 5월 22일, 재차 북한을 방문하고 돌아온 날 밤, 고이즈미 수상의 가족회에의 보고회 중 가족의 말. 요고다 기고꼬 씨 「생각할 수 있는 일 중 최악의 이이다 시게오 씨 「수상은 애들의 심부름꾼, 아니 그 이하」 마스모도 기매이 씨 「수상한테 자존심이라는 것이 있습니까」이들의 말은 모두 옳다. 그러나 많은 비난의 메일과 팩스가 왔다고 한다. 가족회를 비난하던 사람들도 착각으로 말미암아 비난하고 있는 것이다. 결국 진실에 눈을 뜨게 될 날이 오겠지.
생각해 보자. 가족의 절규가 있었기에 세론을 움직이고 김정일을 밀어붙여 납치자백으로 몰아넣은 것이다. 북한의 악마적 본질을 세상에 밝히고 일본 국민이 북한에 대한 인식을 높이는데 크게 공헌을 하였다. 역대 수상이나 정치가, 외무성의 누가 했단 말인가! 아무도 없었다. 고이즈미 수상이 착각한 것처럼 국민들도 수상에게 부탁하면 부탁이 이루어 질 것이라는 착각이 생겼다.
운동보다도 부탁에 중점을 두게 되면 운동은 느슨해지기 마련이다. 가족회나 구출하는 회 (북조선에 납치된 일본인을 구출하기 위한 전국협의회)에도 어떤 동요가 생겼다. 유감 된 일이긴 하지만 운동에 흔히 있을 수 있는 일시적 현상이었다. 여러 가지 요구나 시민운동을 활기차게 하다가 겨우 국회에 의원을 냈다고 치자. 그 순간부터 운동은 느슨해지고 무너져간다. 운동측은 의원을 냈으나 이제 큰 성과를 얻게 될 것이라고 크게 기대를 걸게 된다.
부탁이 주된 활동으로 바뀐다. 의원은 청년인이 되고 만다. 그리고 운동은 잊어지게 된다. 이러한 쓰라린 경험을 나는 몇 번이고 경험했다. 예상 했던 대로 운동은 원점으로 돌아오기 마련이다. 운동이 있으므로 해서 교섭이 된다. 운동을 떠난 교섭은 단지 거래에 지나지 않는다. 고이즈미 수상의 최초 방북과 재차 방북의 차이는 여기에 있다. 납치해결은 잊고 자기가 움직이고 있다고 착각하고 납치해결 보다는 북한과 국교정상화에 기울어졌다.
쌀 25만 톤과 의약품 1천만 불 제공 등 김정일의 기분 맞추기에 시종하였다. 원점으로 돌아온 것이다. 운동이야말로 기초이다. 가족회를 받치고 있는 국민의 힘이 김정일로 하여금 비명을 지르게 한 것이다. 압력의 위대함을 김정일이 증명해 준 이상 이에 확신을 갖고 정정당당하게 압력을 행사해야 한다. 압력이나 제재는 절대 안 된다고 하는 일부의 주장이 있다.
압력을 넣게 되면 전쟁으로 발전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와다 하루키 씨와 같은 북한의 대변자도 있다. 어느 야당 지도자는 NHK의 각 정당 토론회에서 활발하게 토론할 것을 주장한다. 사회자가 북한이 대화에 응하지 않는데 어떻게 합니까? 라고 물었다. “그러면 그럴수록 대화가 필요합니다.” 정치가는 말이 장난감이 아니다. 말 가지고 놀면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