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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생활 속에서 찾는 우리 문화유산,
황성동, 용강동, 동천동 일대 답사기.
월성중학교 2학년 6반 김민욱
어느새 한해의 마지막 달인 12월. 시험도 끝나고 한결 여유로워 졌다. 그래서 이번에는 그냥 우리 동네를 답사해보기로 한다. 사실 황성동, 용강동, 동천동에 무슨 유적이 있느냐 하는 분들이 많다. 다들 아시다시피 황성동은 주로 아파트들로 이루어져 있는 주거공간, 용강동은 대체로 공단구역, 동천동은 시청과 여러 주거지역이 몰려있는 동네이다. 대부분 주민들은 동네에 이런 문화재가 있는 것도 알아도 무슨 문화재인지 모르는 사람들이 태반이다. 국가가 문화재보호를 하며 정책을 이행하기 전에 우리가 우리 동네의 문화유산에 먼저 관심을 가지고 지켜나가는 게 더 중요한 일일 것이다.
서론은 여기서 끝내고 가장 먼저 우리 동네인 황성동을 답사해보기로 한다. 황성동에서 가장 잘 알려진 곳은, 바로 황성공원이다. 신라시대 수도였던 경주는 동, 서, 남이 모두 산으로 둘러싸여 있어 분지 형태를 이루고 있었으나 유독 북쪽만 허했다(그나마 있는 산이라고는 소금강산 정도). 이는 북쪽에서 찬바람이 들어올 염려가 있어 인공적으로 숲을 조성해 막았으니 지금의 황성공원이다. 이처럼 황성공원은 조상들의 지혜를 엿볼 수 있는 역사의 현장이라 할 수 있다.
(황성공원 시립도서관. 수십 년간 경주 시민들의 지식을 책임져준 황성공원의 상징.)
일단 시립도서관 앞에는 나라공원이라는 작은 공원이 하나 더 있다. 자매결연을 한 일본 나라 시와의 친선을 위해 조성된 곳이다. 그리고 장군 동산 옆길로 가면 호림정이라는 팻말이 보인다. 그리고 그 옆에는 한솔분재농원이라는 개인 사유지가 있다. 이 한솔 분재농원 안에 바로 유적지가 있다. 사유지이므로 일단 양해를 구해야 한다. 여기는 개 두 마리가 있는데 작년에는 꽤 사나운 개들이 있었는데 요즘은 크게 짖지 않는 개들로 바뀌었다(작년에 한번 날 보면 내가 나갈 때까지 짖어대느라 여간 골치가 아니었다. 그래도 경비정신 하나는 투철했다.). 그렇게 개들을 통과하면 낡은 집이 나온다. 바로 여기가 전설로 내려오는 '호원시지'이다. 전래동화집에 절 때 빠지지 않는 호랑이 처녀 이야기의 바탕이 된 호원사의 터다. 이야기는 잘 알려졌지만 어째 절터는 거의 알려지지 않다. 그나마 절터도 무너진 탑과 지금은 개인 집이 된 금당 터로만 짐작이 가능하다. 하루빨리 나라에서 관리를 했으면 좋겠다.
(나라공원. 일본식 석등과 우리 석등이 대칭을 이루고 서 있다.)
(호원사지. 탑 일부는 누군가의 장독대로 전락해 버렸다. 근데 이것도 나름 멋있다.)
(누군가의 집이 되어버린 금당 터.)
호원사지를 나와서 이번에는 아까 갈림길 중 호림정 팻말이 있는 쪽으로 가본다. 호림정은 황성공원 내에 있는 궁도장이다. 가보면 몇몇 회원들이 오셔서 활을 쏘신다. 바로 여기 궁도장의 중심 건물 '호림정'역시 기나긴 역사를 가지고 있다. 호림정 건물은 원래 안압지에 있던 것을 옮겨온 것이라고 한다. 호림정 옆에는 옛날 경주부윤들의 비들이 줄지어 있다. 정말 궁도장과 잘 어울리는 건물이란 생각이 든다.
(호림정. 꽤 잘 만들어진 건물임을 알 수 있다. 좌측에 비석 두기가 살짝 보인다.)
(경주부윤들의 공덕비.)
호림정을 나와서 김유신 장군 동상을 올라가 본다. 여기 김유신 장군 동상은 박정희 대통령 때 만들어져 황성공원의 상징물로 자리 잡았다. 김유신 장군 동상이 서 있는 동산은 높이가 50m에 조금 모자라는 야트막한 동산이다. 이 산은 앞서 말했듯이 허한 북쪽을 보충하기 위해서 조성된 인공산이다. 여기는 밤에 오면 야경이 꽤 멋지다. 황성동에 살면 어디서든 보이는 친근한 동상이다.
(김유신 장군 동상. 햇빛 때문에 마치 후광이 비치는 것 같다.)
황성공원의 마지막 답사 처는 박무의공비다. 김유신 장군 동상 앞으로 나 있는 아스팔트 길 끝 출구에 있는데 거의 알려지지 않다. 이 비의 주인공은 박의장으로 임진왜란 때 의병으로 있으면서 이장손의 비격진천뢰를 사용해 경주성 탈환작전에 큰 공을 세우신 분이다. 그 후 박의장이 세상을 떠나자 조정에서는 그의 공을 높이 사 무의공이라는 시호를 내린다. 그리고 철종 때 이 비석을 세우게 된다. 임진왜란의 흔적을 알 수 있는 유물이다.
(박무의공비. 출구 근방 삼층석탑 근처에 있어서 쉽게 찾을 수 있다.)
황성공원을 나와서 다른 유적들을 찾아 나선다. 먼저 발견한 곳은 간묘이다. 황성마트 앞의 작은 소나무숲에 있다. 간묘의 주인은 바로 간신 김후직. 여기서 말하는 간신은 간사한 간신(姦臣)이 아니라 충언을 하는 간신(諫臣)을 말한다. 김후직은 진평왕이 정사를 돌보지 않고 사냥만 해서 항상 사냥하지 말라는 충언을 했다고 한다. 왕은 그 충언을 무시하고 계속 사냥을 다녔고 후에 김후직이 죽게 되자 감후직은 왕이 사냥 다니는 길옆에 묻어 달라고 했다. 그리고 여느 때 처럼 진평왕이 사냥을 가자 무덤 근처에서 '가지 마소서'란 소리가 들렸다고 한다. 왕은 이 소리의 연휴를 알게 되었고 활을 부러뜨리고 정사에만 매진했다고 한다. 죽어서까지 왕에게 충언한 김후직이야말로 진정한 간신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이 묘를 통해 여기가 옛날에는 사냥터(숲)였음을 알 수 있다.
(간묘. 간신(충신) 김후직의 묘라 전해지고 있다. 왼쪽 비석은 경주부윤 남지훈이 충절을 기리기 위해 조선 숙종 때 세웠다.)
간묘를 지나 황성동 탑마트 근방으로 가면 또 다른 무덤 한기가 있다. 바로 황성동 고분이다. 작년까지만 해도 발굴조사가 한창이다가 최근 들어서야 공개를 했다. 아직 잔디가 제대로 자라지 않아 조금 어색한 감이 있다. 현재는 무덤 주변이 공원화되어 주민들의 휴식공간으로 이용되고 있다.
(황성동 고분. 7세기쯤에 조성된 고분이라고 한다.)
황성동 답사는 끝나고 다음 장소인 용강동으로 이동한다. 용강동은 경주에서 가장 큰 공단 중 하나인 용강공단이 자리 잡고 있는 곳이다. 특이한 건 공단이 도시 외곽이 아닌 도시 중심부에 있다는 점이다. 대체로 사람들은 황성동과 용강동이 나뉘는 지점을 기찻길로 보고 있다. 나도 그리 생각하고 있는데 확실한지는 모르겠다.
용강동에서 첫 번째로 들른 곳은 어머니의 모교인 근화여고 옆 근화여중 내 고분이다. 학교 내에 있다 보니 거의 알려지지 않은 고분이다. 학교이므로 일단 들어가기 전에 양해를 구해야 한다. 그렇게 양해를 구한 후 근화여중 쪽으로 가면 근화여중 고분이 나타난다. 1991년, 근화여중 신축공사 중에 발견되어 발굴조사에 들어갔다. 그 후 발굴조사 결과를 토대로 봉분을 복원한 것이 지금의 고분이다. 고분 정면에는 구멍이 뚫려있고 현재는 판자로 막아 놓았다. 그리고 위쪽에도 함몰된 곳이 있다. 동국대 내에도 고분이 있었는데 정말 경주는 어딜 파던 문화재가 나온다는 말이 사실인가 보다.
(근화여중 내 고분. 구멍 두 개가 고분에 나 있다.)
근화여중 답사 중 자전거가 고장 나 잠시 자전거를 고치고 다시 답사를 재개했다. 다음 목적지도 학교다. 이번에는 나의 모교인 용황초등학교로 가본다. 정확히 말하면 용황초등학교 뒤에 있는 뜰이 바로 문화재다. 사적 제419호로 지정된 용강동 원지 유적이다. 최근에 와서야 공원화되어 정비되었지 내가 초등학교 다닐 적만 해도 전부 밭이었고 팻말 하나만 밭 한가운데 서 있었다. 그래서 여기가 사적인지조차 거의 알려지지 않았지만, 정비하여 지금의 모습이 되었다. 제2의 안압지라고도 불리는 원지 유적은 인공섬, 수로 등 여러 시설이 확인되어 신라 궁지에 부속된 원지라고 추측된다. 이 원지 역시 1999년 용황초등학교 공사 중 발굴되었다. 현재는 일부 석축 터들을 복원해놓아 여기가 원지 유적임을 보여주고 있다. 이렇게 버려진 유적을 정비해 나가는 일을 더 많이 진행해야 할 것 같다.
(용강동 원지 유적. 현재는 여러 석축 터를 복원해 놓은 상태이다.)
용강동 원지 유적 내에는 큰 바위와 누군가의 민묘가 하나 자리를 잡고 있다. 초등학생 시절 학교에서는 '개구리 바위'라 불리며 몇몇 애들만이 알고 있었다. 이 개구리 바위는 바로 고인돌로 어렸을 때 가끔 와서 음식을 놓고 제사 놀이를 하기도 했다. (그때는 고인돌 쓰임을 제대로 몰라 고인돌 위에 올라가고 그랬지만) 이렇게 정비가 된 후에도 몇몇 블로거들만 여기가 고인돌이라고 알고 있다. 개구리 바위에는 별자리를 새긴 흔적이 남아 있다. 어렸을 때는 도굴꾼이 돌을 깨서 밑에 있는 보물들을 훔쳐가려고 그런 흔적이줄 알았는데 그게 별자리를 새긴 귀중한 흔적이었다는 게 실로 놀라웠다. 석장동 암각화도 그렇고 경주는 오래전부터 많은 사람이 살아서 수도로서의 기틀을 다진 것 같다.
(개구리 바위. 뒤에는 누군가의 민묘가 하나 있다. 위에는 별자리를 새긴 흔적이 보인다.)
용강동에서 마지막으로 가 볼 유적은 바로 용강동 고분이다. 용강동 롯데마트 근처에 있는데 옛날에는 개 무덤, 고려장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며 훼손이 심했다. 하지만 그 당시 경주지역 향토문화인들의 모임인 신라문화동인회에서는 이 무덤을 왕릉급 무덤으로 추측하고 당국에 계속 발굴조사를 할 것을 건의했다. 발굴조사는 5년간 무시되어 오다가 1986년 드디어 발굴조사에 착수하게 된다. 그리고 고분에서는 세간을 떠들썩하게 한 유물이 발견되었다. 바로 남북한을 통틀어서 처음으로 채색 토용이 발견된 것이다! 지금까지 발견된 토용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섬세하게 만들어졌고 특히 채색했다는 것은 고고학계에 큰 파문을 일으켰다. 이런 채색 토용은 당시 고분벽화 발견보다 더 의미 있는 발굴이었으니 말이다. 또한, 버려진 폐무덤 하나에도 관심을 기울여 주던 우리 향토문화가들의 승리라고 볼 수도 있다. 이런 문화재에 대한 관심만이 호원사지같이 버려진 유적을 살리는 힘이라고 할 수 있다. 하루빨리 다른 버려진 문화재들도 정비나 발굴을 통해 보존되었으면 좋겠다.
(용강동 고분. 우리나라 최초로 채색 토용이 발견된 역사적인 장소다.)
용강동 답사는 여기서 마치고 이제 동천동으로 간다. 동천동은 소금강산 앞에 있는 동네로 시청과 보건소 등 여러 행정적인 시설들이 많이 모여있는 동이다. 하지만 길이 조금 미로 같아서 처음 와보는 사람은 길 찾기 어려운 면이 있다. 이 점은 이번 답사해 많은 차질을 빚었다.
동천동의 대표유적 중 하나인 백률사는 저번 답사 때 갔기도 했고 시간도 없어서 넘어가고 옆에 있는 표암으로 가본다. 백률사 입구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표암은 박바위, 또는 밝은 바위를 뜻하는데 알천 양산촌 시조 이알평공이 하늘에서 내려온 곳이라고 전한다. 즉 경주이씨가 시작된 곳이다. 사실 표암도 표암이지만 여길 방문한 진짜 이유는 바로 새로 발견된 유적 때문이다. 최근 표암에서 암각화(마애사찰도)가 발견되어 큰 화제를 모으고 있다. 절벽 위에 있는데 과연 찾을 수 있을지 의문이다.
(신라 때 도로 및 왕경유구. 동천동 한 가운데에 텅 빈 공간으로 남아있다. 활용할 방법이 없을까?)
(경주 표암. 절벽에 '표암'이라고 적혀있다.)
표암과 연결된 사당인 악강묘는 올 때마다 닫혀있어 걱정이었으나 웬일인지 오늘은 문을 열었다. 문을 통해 들어갔으나 암각화는 쉽사리 보이지 않고 도깨비바늘 수백 개를 바지에 달면서 한 10분간 절벽을 헤맸다. 결국, 인터넷의 도움을 받아 위치를 알아내 간신히 찾아냈다. 절벽에 새겨진 암각화를 발견했을 때의 감격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현재 발견된 표암 암각화에는 금당과 탑, 그리고 당간이 그려져 있다. 특히 당간이 그려진 것은 우리나라 최초로 지금까지 신라시대 당간의 모습을 알 수 없었는데 이를 통해 처음으로 신라시대 당간의 모습을 알게 되었다. 현재 이 암각화에 대해 여러 주장이 일고 있지만, 박대재 고려대 교수가 그림과 함께 있는 명문을 통해 이 그림은 경덕왕의 부인인 만월 부인의 득남기원 그림이라고 주장하고 있어 주목을 받고 있다. 정말 경주는 문화재가 무궁무진하다. 그리고 고생해서 찾은 만큼 암각화에 대한 감동은 쉽사리 꺼지지 않았다. 빨리 문화재로 지정해서 보존했으면 한다.
(표암 암각화. 희미하지만 여러 그림이 보인다.)
표암 암각화는 될 수 있으면 가지 않는 게 좋다. 절벽 타는 건 크게 문제가 아니지만 의도치 않게 악강묘 옆에 있는 표암재 담도 넘어야 하고 뭔가 걸릴까 봐 불안하다. 예전에는 사다리가 있었다는데 왜 이번에는 없는지, 덕분에 표암에 올라갈 때 운동하러 오신 분들이 다 내 바지를 쳐다보고 놀라신다. 그 많은 도깨비바늘을 단 이유를 물으시기도 한다. 내가 봐도 정말 엄청나다.
표암은 꼭대기에 올라갈 수 있다. 계단을 올라가면 먼저 표암 유허비가 나온다. 표암 유허비보다 중요한 것은 그 일대 경치다. 굳이 많이 올라가지 않고 시내를 내려다볼 수 있는 곳은 표암이 제격이다. 그리고 유허비에서 더 올라가면 광림대가 나온다. 여기 광림대에는 석혈이 있는데 알평공이 하늘에서 내려와 처음으로 목욕을 한 곳이라고 한다. 근데 목욕을 하기에는 조금 작은 것 같다. 이런 유적을 가진 표암 일대는 경북기념물로 지정되어 보존되고 있다.
(표암 유허비에서 본 동천동 일대. 구름 사이로 햇빛이 신비롭게 들어오고 있다.)
(광림대 석혈. 목욕한 곳 치고는 좀 작다는 생각이 든다.)
표암 바로 옆에는 바로 그 유명한 탈해왕릉이 있다. 석씨의 시조인 탈해이사금은 유리이사금과 떡으로 왕자리 내기를 하기도 한 유명한 인물이다. 하지만 이 탈해왕릉 역시 대부분 학자들은 탈해왕릉이 아니라고 하고 있다. 기록상 토함산 근처에 탈해왕의 유해로 소상을 빚어 모셨다고 해서 무덤이 없거나 있다 하더라도 토함산 근방에 있을 가능성이 높다. 그래도 여기 탈해왕릉에는 마치 정말 왕릉인지 한 소나무가 왕릉을 향해 절을 하고 있다. 속리산 정이품송이 왕을 위해 가지를 들었다면 탈해왕릉 소나무는 감히 왕 앞에서 허리를 펼 수 없어서 절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한다.
(탈해왕릉. 오른쪽에 탈해왕릉 명물, 고개 숙인 소나무가 있다.)
(고개 숙인 소나무.)
탈해왕릉 옆에는 동천동 고분군과 신발견 마애불이 있다고는 하나 찾기가 어려워 넘어가고 숭신전으로 먼저 간다. 김씨는 숭혜전, 박씨는 숭덕전, 김유신 장군은 숭무전, 그리고 석씨는 숭신전이다. 현재 숭신전은 탈해 이사금을 모시고 있다. 여기도 문이 잠가져 있어 들어가지 못한다. 숭덕전을 지나쳐 다음 목적지로 향한다.
(숭신전. 탈해이사금을 모시고 있는 전형적인 사당이다.)
시청 근방에 유물이 있다 하여 찾아 나섰으나 이놈의 복잡한 길은 헤매기 일쑤였고 길을 여쭤봐도 도대체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평소에는 정말 쉽게 찾아지던 시청이 오늘따라 유난히 눈에 안 띈다. 일단 시청은 포기하고 다른 데부터 간다.
알천 강변도로를 따라 계속 달린다. 약속시간도 있고 해서 서두른다. 소방서를 지나 길을 따라 쭉 가다 보면 헌덕왕릉 팻말이 나온다. 아마 보문을 간다면 한 번 정도는 지나쳤을 법한 팻말이다. 그 팻말을 따라 들어가면 소나무숲 사이 헌덕왕릉이 자리 잡고 있다. 전해지는 말에 의하면 알천물이 범람하면 헌덕왕릉의 돌사자와 분황사 탑의 인왕상이 서로 자기 쪽에 오지 못하게 용써서 땀을 흘렸다고 한다. 어쨌거나 헌덕왕은 얼니 조카였던 애장왕을 죽이고 왕위에 올랐다. 당시 신라는 피비린내 나는 왕위 다툼이 계속 일어나고 있었다. 덕분에 헌덕왕 때도 김헌창의 반란이 일어나는 등 나라 안이 시끄러웠다. 헌덕왕릉은 비교적 호석상태나 여러 점을 미루어 보았을 때 상당히 호사스러움을 알 수 있다. 알천이 범람해 여러 상석이 떠내려가기 전만 해도 괘릉이나 흥덕왕릉같이 완벽한 왕릉 구조로 되어 있었다고 한다. 조카를 죽이고 왕위에 오른 왕치고는 무덤 하나는 잘 만든 것 같다.
(헌덕왕릉. 왕위에 오른 과정이 세조와 상당히 비슷하다. 혹시 세조의 롤모델?)
헌덕왕릉에서 나와 도로를 따라 조금 더 가면 작은 바위가 하나 나온다. 바로 알천제방수개기라는 이름도 어려운 바위인데 단순히 말해서 알천에 범람이 심해서 제방을 새로 고친 것을 기념해 새긴 것이다. 땅속에 묻혀 있어서 비교적 글씨가 잘 보존되어 있다. 방금 헌덕왕릉 전설도 그렇고 알천의 범람이 상당히 잦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요즘에는 경주에 비가 크게 오는 경우(이번 태풍 산바 때 조금 심하긴 했지만)가 없어 홍수는 없는 줄 알았는데 옛날에는 지대가 낮아 지금보다 피해가 더 커서 그런가 보다.
(알천제방수개기. 글씨가 정말 또렷하게 보인다.)
마지막 행선지는 방금 시청 근방에 있어 헤맸던 사면불이다. 다행히 큰길을 따라가서 이번에는 쉽게 찾았다. 이 사면불은 시청 옆 놀이터가 있는 작은 공원에 있는데 한 탑의 탑신석으로 사용되던 것이다. 오늘 정말 숨겨져 있는 문화재 많이 만난다. 탑이 완성되어 있었다면 더 멋졌을 텐데 하며 아쉬운 대로 상상이라도 해본다.
(동천동 사방불 탑신석. 기단석과 탑신석만이 여길 지키고 있다.)
기나긴 답사가 드디어 끝났다. 생각 외로 길었는데 시간 잡아먹는 데는 암각화 절벽탐험과 동천동 길이 큰 몫을 한 것 같다. 집에 가서 도깨비바늘 뽑는다고 고생했다.
이번 답사를 통해 경주가 진짜 역사문화도시라는 것을 다시 한 번 깨달았다. 대릉원이나 불국사처럼 크고 규모 있지는 않지만, 식당이나 마트 앞, 공원이나 학교 안 같이 일상생활의 평범한 곳에서 소중한 우리 문화유산을 찾는 재미가 있었다. 만약 황성동, 용강동, 동천동에 사신다면 여유가 있을 때 들러 주셨으면 좋겠다.
황성동, 용강동, 동천동 답사! 돈 내고 굳이 불국사나 다른 지역을 답사해서 경험을 쌓는 것도 중요하지만, 먼저 우리 지역, 그리고 우리 동네에도 소중하고 보존되어야 할 우리 문화유산이 있다는 것을, 그리고 소중히 보존하고 지켜나가야 하는 것도 중요하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여정-(2012. 12. 16. 日)
*황성동
황성공원(시립도서관→ 한솔 분재농원→ 호원사지→ 호림정→ 김유신 장군 동상→ 박무의공비)→ 간묘→ 황성동고분
*용강동
근화여중→ 근화여중 내 고분→ 용황초등학교→ 용강동 원지 유적→ 개구리 바위→ 용강동고분
*동천동
표암(악강묘→ 표암→ 표암 암각화→ 표암재→ 표암 유허비→ 광림대)→ 탈해왕릉→ 숭신전→ 헌덕왕릉→ 알천제방수개기→ 동천동 사방불 탑신석→ 시청
새롭게 펼쳐라!
羅新
첫댓글 그 도깨비바늘, 급하게 빼느라 뿌리는 바지에 그대로 박혀있어서 다시 다 핀셋으로 뺀다고 고생했습니다. 요즘도 그 바지를 입으면 가끔 따끔거립니다.
열심히 답사를 다니고 있구나.
장독대로 사용하는 옥개석의 층급받침을 보니 전성기때 만든 것 같은데...
그리고 나도 처음보는 사진이 몇장 있네.
답사 및 답사기 쓰느라 수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