엇갈리는 지점 1
국무 총리와 헤어진 노범호 회장은 자택으로 돌아오자마자, 자신의 사위인 허열에게 전화부터 걸었다.
허열. 약관의 나이 스물네 살에 사법 고시에 수석 패스한 전법무 장관의 아들.
오래 전부터 사윗감으로 점찍어 놓았고, 적당한 기회에 정계에 데뷔시켜
장래 대통령으로 진출시키려는 야심을 가지고 밀어 주는 천재형의 인물이다.
한국 물산이라는 대재벌의 사위이며, 지금은 정계에서 은퇴하여 시골 농장에서
조용히 남은 여생을 즐기고 있지만, 한때 법무장관을 지낸 아버지의 후광까지 있어,
허열 검사는 만만치 않은 야심을 가지고 있었다.
허열의 아버지 허경만 전 장관과 노범호 회장은, 마치 케네디 전 미 대통령이 훈련받았듯이,
오래 전부터 그에게 장래 대권을 노릴 수 있도록 훈련을 반복시켜 왔다.
이후락, 박성철 회담을 파괴하려는 한 테러리스트를 체포하는데
허열을 투입시키려는 의도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
그리고 이번 테러 방어 작전을 통해 허열의 인상을 박정희 대통령에게 강렬하게 심어 놓고 싶었다.
적어도 서른세 살까지는 치안국장 자리에까지 올려놓아야 한다.
"때르릉, 때르릉"
전화 벨 소리가 요란하게 울려 왔다.
밤 12시.
허열은 딸 미라(美羅)의 연주 파티를 조선 호텔에서 성대하게 열어 준 뒤, 막 집으로 돌아온 참이었다.
허열의 아내 노옥진이 수화기를 들었다.
"누구세요? 어머, 아빠. 저예요. 그렇지 않아도 걱정했는데, 왜 미라 피아노 연주회에 오시지 않았어요?"
"그래, 미라에겐 미안하게 되었구나. 아범 있냐?"
노옥진이 남편 허열에게 손짓했고, 그가 수화기를 받아 들었다.
"접니다, 아버님. 오늘"
"힘들더라도 당장 내 집으로 좀 와라. 중대한 일이 생겼으니까."
"알겠습니다."
이유를 물을 필요도 없다. 노 회장이 오라면 새벽에라도 지체없이 달려가야 한다.
그는 아내에게 미안하다는 말 한 마디도 없이 집을 떠났다.
"부르릉--."
엔진음이 적막한 거리에 요란스럽게 뿌려지고 있었다.
허열이 그의 장인 노범호 회장을 찾아가던 시간은,
백수웅이 부산역 화장실에서 훔쳐 온 소주를 혼자 마셔 대고 있었던 시간이다.
허열은 노범호 회장의 지시를 묵묵히 듣고 있었다.
"이건 네 먼 장래와 직결되는 문제다.
백수웅이라는 한 테러리스트가 일본에서 입국한 것이 틀림없다. 그를 책임지고 체포해라.
그의 목적이 무엇인지는 아직 모르지만, 아무튼 너는 그 녀석을 잡아야 한다.
내일 아침이면 내무부와 국방부에, 네게 무조건 협조하라는 지시가 청와대에서 내려질 것이다.
모든 방법도 네가 생각하고 네가 처리해라.
잘못하면 대통령 각하께 치명적인 손상을 입힐 그런 테러 분자다.
내용은 묻지 말고 체포에만 전념해라. 네 아내 옥진이에게도 절대 비밀에 부쳐라.
테러리스트가 입국했다는 사실도, 네가 그 체포 임무를 가지고 있다는 것도, 모두가 특급 비밀이다.
실패하면 너와 나는 자살 한다는 각오로 그 녀석을 찾아라."
노범호 회장은 백수웅에 대한 메모를 허열에게 넘겨 주었다.
그 자료를 장인 어른이 어떻게 입수했는지에 대해서도 묻지 않았다.
그가 할 일은 오직, 박정희 대통령을 위해하려는 테러리스트 백수웅을 제거하는 것뿐이었다.
백수웅.
1964년 6월, 한.일 굴욕 외교 회담 반대 데모에 앞장 섰던 학생운동 주모자로,
데모가 진정된 뒤 갑자기 실종되었던 인물이다.
실종 당시 21세였으니, 1972년 3월 현재 그는 29세가 된다.
소위 6.3사태의 주동자로 몰렸고, 체포되었다가 석방된 후 어느 날 갑자기 연기처럼 증발한 백수웅.
그가 8년의 세월을 흘려보낸 뒤 일본에서 테러리스트로 변해 서울을 향해 돌진해 오고있다.
테러리스트 백수웅 체포 명령을 받은 즉시 그가 학적을 가지고 있던 성균관 대학에 연락해 보았으나,
그에 대한 자료는 이상하게 하나도 남아 있는 것이 없었다.
사람만 증발한 것이 아니라 행정상의 자료도 모두 실종되어 버린 것이다.
벌써 아침 10시가 되었다. 학교측으로부터 아무런 도움도 받지못한 허열은,
치안국과 출입국 관리국에 연락하여 최근 일 주일 이내에 입국한
일본인에 대한 조사를 의뢰해 놓고 라디오 다이얼을 돌렸다.
뉴스를 듣던 그가 머리를 갸우뚱했다.
순찰대 순경 하나가 지난 새벽 동백섬 한 해안에서 정체를 알 수 없는 사람에 의해 피살되었으며,
용의자 한 명을 체포, 수사 중이라는 뉴스가 나온 것이다.
'순찰 순경이 새벽에 해안에서'
그는 즉시 부산 시경으로 전화를 걸었다.
부산 시경에는 대학 동창 하나가 대공과에 근무하고 있었다.
그러나 부산에서의 대답은 신통치 않았다.
"오랜만일세. 뭐 대단한 사건은 아냐.
동백섬 해안에서 새벽 3시경 어떤 녀석이 순찰 순경을 칼로 찌르고 도망쳤는데,
용의자 한 녀석이 부산역 검문에서 체포되어 조사 중이야.
간첩이나 테러리스트라고는 보기 어렵지. 원한에 의한 단순 살인 사건이 분명하다구."
그러나 허열 검사의 생각은 조금 달랐다.
"동백섬 해안에서 새벽 3시경? 이건 의문점이 많은데. 통금시간 중이고,
또 순찰대원이 해안까지 제 발로 이유 없이 걸어갈리도 없고 ,"
무서운 예감이었다. 어쩌면 백수웅은 대마도를 통해 부산에 잠입해 들어왔는지도 모른다.
새벽 3시경, 동백섬에 도착한 백수웅이 마침 순찰 중인 순경과 마주쳐
그를 살해하고 도망친 것은 아닐까. 조사받고 있는 용의자는 35세의 부산 사람으로,
부산에서 작은 철물점을 경영하고 있다고 했다. 그렇다면 그는 백수웅이 아니다.
허열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그의 지시에 따라 경찰용 헬기가 준비되었고,
3분 내에 헬기 사용 승인 지시가 청와대에서 날아왔다.
치안국 광장을 떠난 헬기는 잠자리 날개를 휘돌리며 하늘로 날아올라 부산을 향해 달려가기 시작했다.
헬기가 구로동 하늘 위를 날고 있을 때, 부산을 떠난 통일호 첫 차가 숨을 헐떡이며
서울로 진입해 오고 있었다. 열차와 헬기가 엇갈리며 지나갔다.
열차와 헬기는 백수웅과 허열을 태운 채 이렇게 엇갈리며 지나가 버렸다.
부산에 도착한 허열은 시경 강력계 반장과 함께 순찰대원의 시체가 발견된 동백섬 해안을 조사했다.
도로에서 10여 미터의 급경사 아래 지점이었는데, 해안에는 소폭의 모래밭이 있고,
주위는 험악한 바위들과 나무들이 빽빽이 들어차 있었다.
살해된 순경의 동료가 그 날 새벽의 상황을 다시 한 번 설명했다.
"순찰을 마치고 이 길을 가고 있었습니다. 오줌이 마렵다며 먼저 가라고 했는데,
도무지 뒤따르는 기색이 없어 다시 와 보았더 니, 저 아래 해변에서 죽어 있었죠.
너무 놀라 본부에 무전을 쳐서 보고한 겁니다."
허열은 팔짱을 낀채 묵묵히 서 있었다. 왜 이 해변에서 살해 되었을까. 눈을 들었다.
동백섬 앞바다가 아무 일 없다는 듯 바람에 일렁이고 있었다.
파도를 응시하던 허열이 천천히 고개를 끄떡였다.
"백수웅은 대마도에서 건너왔어."
그러나 헤엄을 쳐서 건너오지는 못할 것이다. 틀림없이 배를 이용했을 것이다.
밀수선이나 소형 어선을 이용해 이 곳에 상륙한 것이다. 새벽 3시 전후에 그는 도착했고,
때마침 순찰 중이던 순경과 맞닥뜨려 살해하고 도주한 것이다.
허열은 부산 시경 사람들과 함께 해양 경찰대로 달려가,
사고가 있던 3월 7일의 새벽 순찰 함정 일지를 조사하기 시작했다.
해양 순찰함 27호의 업무 일지 속에서 마침내 엄청난 단서를 발견할 수 있었다.
'당일 새벽 2시 50분경, 레이더에 이상한 물체가 포착되었으나 추격 도중 사라져 버렸고,
동백섬 3킬로 전방 지점을 순회 정찰하였으나 이상이 없어 철수함.' 이라는 기록이 있었다.
허열의 추리는 적중했다.
백수웅은 1972년 3월 7일 새벽 2시 50분경, 대마도에서 쾌속선을 타고 부산으로 잠입,
잠입 도중 순찰 순경과 조우, 그리고 살해.
이것이 추정 가능한 그의 발자국이다. 그렇다면 그는 지금 어디 있을까.
백수웅을 체포하라는 지시를 받은 지 24시간도 되지 않아 그의 잠입 루트가 드러났다.
이것만으로 엄청난 수확이 아닐 수 없다.
이 곳으로 침입한 자가 백수웅인지 아닌지는 더 추적해 보아야 알겠지만,
순경까지 살해하고 도망쳐 버렸다면 단순한 범죄자는 아닌 것이 분명하다.
벌써 오후가 되었다.
허열은 부산 시경에 구금되어 있는 순경 살해 용의자를 만나 보고 싶었다.
어쩌면 그에게서 백수웅을 추격할 실마리를 찾게 될지도 모른다.
허열은 해양 경찰대를 떠나 부산 시경으로 갔다.
그는 음산한 취조실에서 순찰 순경 살해 용의자를 만났다.
상당히 키가 큰데다가, 얼굴에 상처 자국까지 있는 고약한 인상의 사내였다.
얼마나 얻어맞았는지 얼굴이 퉁퉁 부어올랐고, 코가 비틀어져 있었다.
허열 검사는 사내에게 담배를 권하는 등, 사내의 마음을 가라앉히기 위해 무수히 노력했다.
사내는 흥분에 들떠 금방 혀라도 물고 자살이라도 할 것 같았다.
엉망이 된 얼굴로 담배 한 대를 다 피우고 난 사내가 고개를 들어 허열 검사를 바라보았다.
젊은 검사는, 깨끗하지만 당차게 생긴 얼굴을 가지고 있었다.
거친 인상의 사내는 담배 석 대를 순식간에 태워 버렸다.
그리고 허열 검사를 향해 억울함을 호소하기 시작했다.
"검사님이라고 하셨죠? 정말 억울합니다. 인상이 더럽다고 살인 누명까지 써야 합니까?
서울에 물건 계약할 것이 있어 올라 가는중에 생긴 일입니다."
사내는 부산시 동구 수정동에 위치한 작은 상가에서 철물점을 경영하고 있다고 했다.
"통일호 첫 차를 타려고 하는데 헌병과 순경이 검문을 하더군요. 주민등록증을 보자구요.
그런데 당연히 있어야 할 지갑이 보이지 않았어요. 날치기당한 거라구요.
어떤 녀석이 주머니를 턴 게 분명해요. 글쎄, 어떤 술 취한 녀석이 ,"
그는 새벽에 부산역에서 있었던 일들을 자세히 말해 주었다.
"글쎄, 귀신 곡할 노릇이지, 있어야 할 지갑은 없어지고 난데없이 칼이 나올 게 뭐예요.
세상에, 변명할 사이도 없이 이렇게 얻어터지다니
나더러 경찰관을 살해한 범인이라지 뭡니까?"
사내는 두 손을 휘저으며 변명했다. 그는 지난 밤, 그러니까 순경이 피살되던 날 밤,
임신한 아내를 친정에 보내고 혼자 집을 지키고 있어서 알리바이조차 만들 수 없다며 하소연했다.
허열 검사는 경찰서에서 제공한 문제의 칼을 들여다보았다.
날이 날카롭게 서 있는 짧은 단도였는데, 손잡이는 가죽으로 잘 감겨져 있었다.
칼날 구석에 '메이드 인 저팬' 이라는 글자가 선명하게 보였다.
경찰에서 이 사내에 대해 신원 조회를 해 보았지만, 더러운 인상에 비해 과거가 깨끗했고,
얼굴의 상처도 군에서 안전 사고를 일으켜 생긴 것으로 확인되었다.
그러나 지난 밤 그의 행적이 불투명했고, 부산역 검문 당시 신분증 대신
일제 단검을 꺼내 경찰이 부득이 폭력을 행사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했다.
일제 단검!
술 취한 사내의 접근.
이제 더 생각할 필요도 없다.
IQ 160을 자랑하는 허열의 두뇌는 컴퓨터처럼 팽팽 돌아가고 있었다.
허열은, 이 억울한 사내가 동백섬에 상륙한 미지의 사나이(허열은 백수웅이라고 단정했는데)에 의해
이용당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미지의 사나이는 이 사내의 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고 대신 칼을 집어 넣은 것이다.
이 사내를 체포하는 아수라판 속에서 미지의 사나이는 부산을 빠져나와 서울로 올라갔다.
그렇다면 지난 새벽 동백섬에 단독 상륙했던 순경 살인범은,
오늘 새벽 통일호 첫 차로 서울을 향해 떠났다는 계산이다.
통일호 첫 차가 서울에 도착하는 시간은 오전 11시 30분.
그렇다면 부산으로 내려올 때 보았던 그 열차가 틀림없다.
허열의 추리는 여기서 끝이 났다. 이 사내는 억울하게 당한 것이 틀림없다.
"제가 책임지고 풀어 드리겠습니다. 몇 대 얻어맞은 건 재수가 없었다고 생각하십시오.
보상은 국가에서 충분히 해 줄 겁니다. 그 대신 오늘 있었던 일은 잊어버리십시오."
이제 목표물은 서울로 이동되었다. 키가 작아 보이고 체격이 단단해 보인다는 그 술주정뱅이,
그 녀석은 틀림없이 백수웅일것이다. 허열은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었다.
서울역에서 낚아첼 수 있었는데
허열 검사는 헬기를 이용해 다시 서울로 올라왔다. 어느 새 하루가 다 가 버렸다.
경찰용 헬기는 치안국 광장에 내렸고, 허 검사는 한시를 지체하지 않고 노범호 회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접니다. 단서가 잡혔습니다."
"벌써?"
백수웅의 침투를 통보한 것이 지난 밤, 그러니까 시간으로 따져 꼭 18시간 만에 첫 번째 보고가 올라왔고,
그 보고는 노범호 회장 에게 희망을 안겨 주었다.
"네, 자세한 건 "
"좋아. 거기가 광화문이지? 그럼 30분 후 반도 호텔(현 롯데 호텔) 레인보우 바에서 만나자. 그리로 가겠다."
허열은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백수웅의 침투 경로와 서울 잠입까지는 확인된 셈이다.
그러나 문제는 지금부터다. 8백만 인구가 들끓어 대는 서울 거리.
백수웅 그 녀석은 지금 어디에 은신하고 있으며, 언제 그 악마의 이빨을 드러내기 시작할 것인가?
그는 어떤 녀석이며, 테러의 목적은 무엇인가?
총리 각하와 장인 어른은 왜 하필 자신을 투입시켰으며,
장인 어른은 왜 이 테러 방지에 목숨까지 거는 것일까?
허 검사는 승용차도 이용하지 않은 채 광화문 치안국에서 을지로를 향해 천천히 걷고 있었다.
그 때가 밤 9시였다.
한편, 부산을 탈출하는 데 성공한 백수웅은 무사히 서울을 향해 가고 있었다.
그러나 걱정은 또다시 시작되었다.
'서울의 검문 상황은?'
부산의 그 인상 고약한 사내가 순경 살인범이 아님은 금세 알려 질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즉시 서울로 연락했을 것이다. 살인범이 부산을 탈출해 서울로 향하고 있다고.
두려웠다. 다시 돌아오는 서울. 그러나 기쁨보다는 불안과 슬픔이 더 가슴을 압박하고 있었다.
열차가 마침내 서울역에 도착했다. 그는 가방을 단단히 움켜쥐고 개찰구를 향해 천천히 걸어갔다. 그
는 만약 자신이 체포당하게 될 경우 자살하리라고 작정했다.
그러나 그런 걱정은 쓸데없는 기우에 불과했다. 검문은 없었다.
가슴을 쓸어내리며 서울에 첫발을 내디뎠다. 서울역 광장은 옛날보다 훨씬 더 붐볐고,
높은 빌딩들이 하늘을 찌를 듯 치솟아 있었다.
그는 감격에 떨며 한동안 서울 거리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몸을 돌렸다.
지금부터는 하루하루가 목숨과 직결되는 시간이다.
부산역의 그 혼란한 틈을 이용해 훔쳐 낸 손목시계가 12시를 가리켰다.
서울역 맞은편의 창녀촌 일대에는 수많은 싸구려 여인숙이 있다.
깊은 골목에 위치한 한 여인숙에 숙소를 정해 놓고 거리로 나섰다.
순댓국으로 배를 채운 후, 일찍 쏟아져 나온 석간 신문 한 장을 사서 펴 들었다.
잡다한 사건들 속에 부산 순찰대원 피살 사건이 보도되었고,
유력한 용의자 한 명이 체포되었다는 기사가 나 있었다.
백수웅은 다시 여인숙으로 들어가 날이 어두워지기를 기다렸다가 밖으로 나섰다.
가 보고 싶었다. 8년 전, 데모 진압대와 격렬히 싸웠던 광화문 네거리에 가 보고 싶었다.
버스에 몸을 싣고 광화문으로 달려갔다.
밤 9시가 되었는데도 수많은 사람들이 거리를 메우고 있었다.
그는 우두커니 서서 거리를 바라보았다. 8년 전 그 날이 손에 잡힐 듯 머릿속을 스쳐 갔다.
백수웅은 눈을 감았다.
964년 6월. 한일 굴욕 외교 반대의 깃발을 휘날리던 그 함성이 귀에 들려 오는 것만 같았다.
그리고 8년이 지난 오늘, 그는 남북회담을 파괴하려는 테러리스트가 되어 다시 광화문에 서 있다.
8 년, 8년의 세월 동안 백수웅은 이 광화문을 한 번도 잊어버린 일이 없었다.
저 쪽에 보이는 빨간 벽돌 건물의 치안국과 함께.
허열 검사는 반도 호텔을 향해 걸어가며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냈다.
담배를 입에 물고 라이터를 찾던 그는 책상 위에 라이터를 놓고 그냥 나왔다는 것을 비로소 깨달았다.
긴장 때문인지 불이 없어서인지 더욱 담배가 피우고 싶었다.
허열의 눈에 길에서 서성이는 한 젊은이가 보였다. 허름한 작업복을 입고 키가 작아 보이는 사내였다.
"미안하지만 불 있으면 좀 빌립시다."
사내가 깜짝 놀라 허열을 바라보았다. 허열은 조금 미안한 생각까지 들었다.
"죄송합니다. 마침 성냥이 떨어져서"
허열은 담배를 입에 문 채 사내를 바라보았다.
"네, 전 담배를 피우지 않아서"
"미안하게 되었습니다."
백수웅은 가슴을 쓸어내리며, 등을 돌리는 사내를 바라보았다.
두어 살 위로 보이는 잘생긴 남자였다. 사내가 갑자기 말을 걸어왔을 때,
백수웅은 자신을 불심 검문하려는 사복 형사인 줄 알고 기겁을 했던 것이다.
사내의 모습이 사람들 틈에 쓸려 보이지 않게 되자, 백수웅은 서둘러 어디론가로 모습을 감추었다.
허열은 담배를 거리의 재떨이에 그냥 버린 채 반도 호텔 레인보우 바로 들어갔다.
여.야의 정치인들이 들끓는, 반도 호텔 지하의 한구석에 위치한 양주 전문 바였다.
노범호 회장이, 막 들어서려는 허열을 3층 306호로 데리고 갔다.
깨끗하게 정돈된 사무실이었는데, 놀랍게도 거기에는 이후락 정보부장이 와 있었다.
허열은 깜짝 놀라 허리를 굽혔다.
"각하, 오랜만입니다."
허열은 정보부장을 각하 라고 불렀다.
이후락 정보부장은 각하라고 불릴 만큼 완벽한 2인자 위치를 확보하고 있었다.
정보부장이 손을 내밀자, 허열은 감동한 듯 두 손으로 잡았다.
"앉지."
"네, 각하."
허열은 노범호 회장을 힐끗 바라보았다.
노범호 회장은 김종필 국무 총리와 이후락 정보부장 사이를 오가며 교묘한 줄타기를 하고 있었다.
경제 수석의 막강한 자리에 앉아 박 대통령의 총애도 한몸에 받고 있었다.
노범호 회장은 대견스러운 듯 허열을 바라보았다.
백수웅 침투정보를 받은 지 불과 18시간 만에 꼬리를 잡아 낸 장한 사위다.
"단서가 잡혔다구?"
이미 내용을 들었는지, 정보부장이 허열을 바라보며 물었다.
"네, 각하. 녀석은 대마도에서 쾌속정으로 부산에 상륙했고,
거기서 부산 시경 순찰대원 한 명을 살해했습니다.
그리고 어디선가 하룻밤을 보낸 후 오늘 새벽 통일호를 이용, 서울에 잠입해 들어 왔습니다.
이제부터 그 녀석의 경력을 뒤져, 기필코 체포하든 사살하든 책임지고 제거하겠습니다."
노범호와 정보부장이 무거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무거운 침묵이 홀렀다. 허열은 중압감을 느끼는 이 침묵의 뜻을 알지 못했다.
이윽고 노범호 회장이 입을 열었다.
"극비 사항이지만, 자네에게만은 말하지 않을 수 없네.
만일 이 극비 사항이 외부에 알려지면 자네는 살아 남을 생각을 하지 말아야 될 거야."
허열은 가슴이 섬뜩했다. 전에 없는 살벌한 발언이었다.
"지난 2월 2일(1972년)부터 5일까지 3박 4일 동안 정보부장께서 평양에 다녀오셨다."
"뭐, 뭐라구요?"
허열은 깜짝 놀라 정보부장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평양 얘기가 나오자,
정보부장은 상기되는 듯 시거를 꺼내 입에 물었다.
허열이 재빨리 테이블 위의 라이터를 집어 들었다.
"거기 가서 박성철과 만나 요담을 나누었고, 돌아오는 5월 말이 나 6월 초,
박성철이 서울로 와서 부장님과 2차 서울 회담을 열게 되어 있다.
정치적인 협상을 위한 남북 회담이지."
"그럼, 백수웅은 박성철을?"
"아니."
노범호가 고개를 가로 저었다.
"그가 원하는 인물은 두 분 모두야. 거기에 나까지 포함되어 있어. 나 하나야 문제가 아니지.
두 분은 곧 남북을 대표하는 만큼, 백수웅이 노리는 건 곧 남북 모두라고 할 수 있어."
"저는 아직 무슨 말씀이신지,"
"그럴 테지. 그래서 부른 거야. 잘 들어. 백수웅은 위험 인물이야. 이상한 운명이지만,
그는 북한으로부터 치욕적인 오물을 뒤집어쓴 셈이고,
남한에서는 개 취급 받고 쓰레기처럼 버려진 녀석이지. 더 자세한 건 알려고 하지 마.
녀석이 만일 회담장을 습격해 테러한다면, 하루도 못 가서 남북 전쟁이 또 터져.
만일 회담이 성공한다면 통일될 수 있는 발판이 마련되고
이쯤 되면 이번 회담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겠지?"
"네."
"백수웅이 침투한 건 틀림없어. 어제 도쿄에서 CIA 책임자 브라운이 그 문제로 왔다 갔고,
일본의 자민당 거물 요네조오 의원에게서 전화가 왔어. 그 두 사람 모두 백수웅과 깊은 관계가 있지.
이제 우리 나라 운명은 모두 네 손에 달려 있는 거야. 아까도 말했지만,
남북 회담은 우리 정부에서 대통령을 비롯, 불과 열 명내외만 알고 있고,
일본 수상과 미국의 대통령에게만 통보했어.
그 외에는 모두가 비밀에 부쳐 두고 있거든. 특급 비밀이라고 말한 건 그 때문이야.
만일 언론이나 국민이 알면 일이 뒤틀려."
"그럼 백수웅은 어떻게 그걸?"
"브라운이 도쿄의 요정에 있는 히데코라는 여자를 사랑했는데, 히데코는 또 백수웅을 사랑했던 모양이야.
자, 됐어. 이건 백수웅에 대한 기초 자료니까 체포에 활용하라구. 그리고 이건"
노범호 회장이 한 통의 서류 봉투와 묵직한 가죽 케이스를 넘겨주었다.
"이건 정보부장께서 선물하시는 거야."
허열이 가죽 케이스를 받아 열어 보았다. 은빛 콜트 코브라 권총이었다.
탄환이 두 케이스, 별도로 지급되었다.
"전국 수사 기관을 모두 활용하도록 조치해 놓았다. 치안국, 헌병대, 중앙정보부
그러나 가능하면 그들의 힘을 빌리지 마라. 극비에 조용히 낚아채는 것이 가장 현명한 방법이다."
반도 호텔 306호는 백수웅 체포를 위한 허열의 개인 사무실로 활용하도록 해 주었다.
이후락 정보부장과 노범호 회장이 돌아갔다. 커다란 사무실에 홀로 남은 허열은
이후락 정보부장이 선물한 콜트 코브라 은빛 권총을 서랍 깊숙이 넣은 다음,
백수웅에 대한 자료가 들어 있는 봉투를 꺼냈다.
백수웅은,
1964년 국교 정상을 위한 한일 회담을 굴욕 외교라며 반대한 대학생들의 격렬했던 데모,
즉 6.3사태 때 주모자의 일원으로 앞장 섰던 인물로,
1964년 12월 24일 갑자기 서울에서 행방 불명되었다.
당국에서는 그를 찾기 위한 노력보다는 그의 국민 학교 시절부터의 모든 학적부 자료를 소멸시켰고,
그의 가족들에게는 미궁 사건으로 통보해 버렸다.
현재 그의 모친은 서울을 떠나 충청 북도 괴산의 한 시골에서 살고 있으며,
그의 부친은 백수웅이 일곱 살 되던 해에 사망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었다.
백수웅은 대학교 2학년, 즉 서울에서 증발하던 해까지
성동구 금호동의 초라한 한옥집에서 모친과 함께 세들어 살았다.
그러나 그가 왜 실종된 뒤 도쿄에 모습을 나타냈는지,
일본의 거대 여당인 자민당의 중요 간부로 있는 요네조오 의원이
백수웅과 어떤 관계인지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이 없었다.
허열은 백수웅에 대한 보다 완벽한 자료가 필요했다.
그 자료 보완을 위해서는 1964년 6월 당시 성균관 대학의 6.3사태 주모자였던
인물들을 찾는 방법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그는 한 손으로 턱을 괸 채 커튼을 열고 창 밖을 바라보았다.
아직도 날씨는 쌀쌀했고, 통금이 가까워 오는 시간이어서인지 사람들의 발걸음이 한결 바빠 보였다.
허열은 백수웅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했다. 그리고 자신의 어깨가 얼마나 무거운지를 느끼고 있었다.
단순한 대통령 저격범 정도로 알았던 그 녀석은 남북 모두를 쑥대밭으로 만들 작정이다.
'도대체 알 수 없는 일이야. 남북 모두를 증오하다니...잡으면 그 이유부터 물어 보아야겠어.'
허열은 안타까워 견딜 수가 없었다. 백수웅에 대한 자료는 고작 이 정도뿐이었고,
아직 사진조차 입수하지 못한 형편이었다.
내일부터는 녀석에 대한 자료부터 입수할 작정이었다. 남북 회담은 아직도 석 달 정도 남아 있다.
녀석을 체포하기엔 충분한 시간이다.
다시 빗발을 뿌리기 시작하는 거리 저 쪽에서 아까의 키 작은 사내가
잔뜩 웅크린 채 바쁜 모습으로 뛰어가고 있었다.
그 사내를 바라보며 또다시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담뱃불 사건으로 혼이 난 백수웅은 치안국 건물을 뒤로 두고 시청 앞으로 달려갔다.
주머니에 있는 8백 달러를 바꿔야 한다.
반도 호텔과 조선 호텔 주변에 암달러 장사를 하는 여인들이 있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
몇 명의 달러 암매상 중 하나를 골라, 반도 호텔 맞은편 골목에서 8백 달러를 환전했다.
1달러에 9백 원씩, 모두 72만 원이 들어왔다. 일반 회사의 중간 간부 월급이 5만 원 하던 때이다.
그 돈은 엄청난 거금이었다. 백수웅은 소주를 한 잔 걸친 뒤
빗방울 뿌려 대는 거리를 웅크린 채 뛰기 시작했다.
다음 날부터 백수웅의 움직임은 몰라보리만큼 빨라졌다.
그는 먼저 자신이 정보 기관에 의해 체포되던 당시 함께 운동했던 동지들을 찾아 나서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법과 출신으로 가장 열렬히 앞장 섰던 한 동료의 소재를 파악하는 데 성공했다.
이성구(李成求). 그는 고등 고시에 1차 합격한 후 데모 전력이 들통나 법관의 꿈을 포기한 채,
지금은 서울 지방 법원 영등포 지원의 서기로 근무하고 있었다.
이성구는 낡은 잠바 차림으로 퇴근하고 있었다. 옛날의 패기는 도무지 찾아볼 길이 없었다.
그가 버스를 타려고 정류장에서 서성 일 때 백수웅이 다가갔다.
백수웅은 낡은 작업복에 모자까지 눌러 쓰고 있었고,
열흘이나 면도를 하지 않아 턱에 검은 수염이 거칠게 나 있었다.
이성구는 백수웅을 알아보지 못했다.
"저, 이성구 씨 맞죠?"
"그렇습니다만"
이성구는 이 낯선 사내의 출현을 의아하게 생각했다.
"성대 출신이시죠? 법과 출신의 "
"네, 그런데요. 누구시죠, 댁은?"
"한 30분 시간을 내 주실 수 있겠습니까?"
두 사람은 영등포의 한 허름한 다방으로 들어갔다.
값싼 유행가가 귀를 찢는 듯했다. 두 사람은 구석에 자리잡고 앉았다.
이성구는 사내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낮이 무척 익기도 했고,
때로는 평생 처음 보는 얼굴 같았다.
"8년 전, 그러니까 1964년 6.3사태를 기억하고 있습니까?
그때 이성구 씨가 앞장 서서 데모를 주도해 나갔었죠."
"그렇습니다만....당신은, 당신은?"
그의 기억이 곰실곰실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철학을 전공하던 키 작은 사내, 문리 대학의 선봉장이었던,
그리고 어느 날 갑자기 연기처럼 사라졌던 그'독종'이라던 사내... 이름이 뭐였더라?
그래, 이 사내가 다쳤을 때 치료해 주었던 1학년 여대생이 한 번 찾으러 왔었고,
술집 여자라며 이 사내를 지독하게 사랑했다던 또 다른 여인도 찾아온 일이 있었지.
정보 기관에 체포되어 갔다는 소식을 들은 후 단 한 번도 모습을 볼 수 없었던 그 때 그 학생
"혹, 댁은 백 수웅?"
백수웅. 그는 침통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내가 백수웅이오!"
"도대체 어떻게 된 겁니까? 그 때 우리는 당신이 실종된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아무것도 묻지 마시오. 당신을 찾아온 데는 특별한 이유카 있으니까. 사람 하나를 찾고 있소."
" "
" 그 때 , 아마 당신도 기억하고 있을 거요.
광화문에서 경찰 곤봉에 맞아 머리가 깨어졌을 때 날 간호해 주었던 여학생
언젠가 당신도 그녀와 함께 내 집을 찾아온 적이 있었죠.
노옥진 혹 그 여인이 어디 있는지 알 수 있나 해서 이렇게 찾아온 겁니다."
"노옥진 , 그 때 그 여학생 모릅니다. 당신이 실종되었다는 것이 확인된 후
한 달 동안 당신의 어머니는 당신과 그녀 를 미친 듯이 찾아다녔죠.
그 뒤, 그녀의 소식도 사라져 버렸습니다.
그리고 당신을 애태우며 찾던 여인이 한 명 더 있었소. '
서지아'라는 여인이었죠. 나는 그녀가 어디에 있는지 알고 있소.
옛날에 그녀가 일하던 술집 근처에서 카페를 경영하고 있죠."
서지아. 백수웅은 가슴이 뭉클 치밀어 올라왔다. 지난 8년 동안 잊을 수 없었던 여인 노옥진,
그리고 서지아가 있었지. 6.3 데모를 모의할 때 우리는 무교동 한 대폿집을 이용했고,
거기서 자신보다 네 살이나 많았던 서지아의 도움을 많이도 받았지.
경찰에 쫓길 때면 삼양동 달동네 그녀의 집에 숨겨 주기도 했던 서지아.
그녀가 자신을 찾아 헤매고 다녔다니,
그리고 지금은 무교동에 새로 지은 호텔 스타다스트에서 양주 코너를 얻어 경영하고 있다니,
왜 그토록 많은 신세를 지고도 그녀 생각을 하지 않고 있었지?
첫댓글 노옥진 남편 허열 백수웅 기막힌 인연이네요!
와우......허열의 부인 노옥진이 바로 백수웅이 사랑했던 여자?
즐감요 ~~
잘 읽고갑니다~~
얽혀버렸네..
감사
좋아요.
감사합니다.
ㅈㄷ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