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브라함과 사라의 웃음
창세기 17:15-22
웃음은 행복의 상징입니다. 웃을 수 있다는 것은 그만큼 행복하다는 것입니다. 웃음소리가 나는 가정은 행복한 가정입니다. 그런데 요즘 가정에서 웃음소리를 듣기 어렵습니다. 웃음이 없는 가정은 사막합니다. ‘웃어라’고 하지만 웃어야 할 일이 있어야 웃지요, 웃을 일도 없는데 웃는 것은 제정신이 아닙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가정에도 웃음이 없었습니다. 왜 아브라함의 가정에 웃음이 없습니까? 아이가 없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의 집에도 아이가 없기 때문에 웃음이 없어졌습니다. 아이가 있는 가정은 웃음이 넘칩니다. 아이가 있어면 온 가족이 웃고 즐깁니다. 온 가족이 그 아이 때문에 웃습니다. 아브라함과 사라는 아이를 낳지 못하여 웃음도 없는 한숨만 쉬고 살아왔습니다. 많은 종들은 매일같이 아이를 낳았다는 말을 들었지만 그것이 행복한 웃음이 되지를 못했습니다. 수많은 짐승도 매일 새끼를 낳지만 그것이 행복한 웃음이 되지를 못했습니다. 아브라함의 가정에 웃음이 사라진지 오래 되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어느 날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셔서 웃음의 복을 주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아내의 이름을 사래라 하지 말고 사라라고 개명하여 주셨습니다(15). ‘사라’란 이름은 ‘여주인’, 또는 ‘열국의 어머니’란 뜻입니다. 그리고 “내가 그에게 복을 주어 그가 네게 아들을 낳아 주게 하며 내가 그에게 복을 주어 그를 여러 민족의 어머니가 되기 하리니 민족의 여러 왕이 그에게서 나리라”(16)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브라함에게 일찍 언약 맺어 주실 때 하신 말씀을 다시 하셨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그 말씀을 믿고 기다렸습니다. 아브라함에게는 최고의 복된 말씀입니다. 간절히 바라고 바라던 소원입니다. 그렇게도 기다리던 복을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그 아들로 통해서 큰 민족을 이룰 것이며 여러 왕이 그에게서 나올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아브라함에게 이 보다 더 큰 복된 말씀은 없습니다.
아들의 이름까지 ‘이삭’이라고 부르라고 하셨습니다(19). ‘이삭’이란 난하주에 ‘웃음’이라고 하였습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웃음을 주시겠다는 말씀입니다. 웃음이 없었던 아브라함에게 웃음을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이제 아브라함은 웃을 수가 있게 되었습니다. 행복한 가정이 될 수가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할례를 행하라고 말씀하시고 떠났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자신과 온 가족들, 그리고 열세 살이 된 이스마엘(26)에게까지 할례를 행하였습니다. 그 후 얼마가 지나서 또다시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셨습니다.
아브라함이 상수리나무들이 있는 장막 문에 앉아 있을 때 여호와께서 두 천사와 함께 나타나셨습니다(18:1).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보니까 한낮에 세 사람이 지나가는 것을 보고 달려나가 영접하였습니다. 여호와께서 사람의 몸을 입으신 육신의 모양으로 두 천사와 함께 나타나신 것입니다. ‘날이 뜨거울 때’(2)는 나그네들이 길을 갈 수 없는 무척 뜨거운 한낮이므로 아브라함은 나그네들을 영접하여 쉬어 가도록 했습니다.
그리고 종들에게 송아지를 잡아 요리를 하게하고 떡을 구워서 시원한 나무그늘 아래에 상을 차려 대접하였습니다. 그때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에게 “네 아내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18:10). 사라가 장막 뒤에서 그 소리를 들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사라에게 아들이 있을 것이라는 말씀은 며칠 전에 들었던 말씀입니다(17:16). 아브라함과 사라에게 가장 축복이 되는 말씀을 불과 며칠 사이에 하나님이 두 번이나 나타나셔서 말씀하셨습니다.
아브라함과 사라는 그렇게도 바라고 기다리던 축복의 말씀을 여호와 하나님으로부터 두 번이나 들었습니다. 그렇다면 아브라함이나 사라가 그 말씀을 듣고 ‘아멘’이라고 화답하며 기뻐했어야 마땅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이나 사라는 자신들에게 가장 복된 말씀을 듣고 웃었습니다.
17:17절에 아브라함이 엎드려 웃었으며, 18:12절에 사라가 속으로 웃었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마땅히 기뻐 감사가 넘치는 행복한 웃음이어야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이나 사라의 웃음은 행복한 웃음이 아니었습니다. 복된 말씀을 들었지만 아브라함과 사라는 행복하게 웃지 않았습니다. 아브라함과 사라의 웃음은 어떤 웃음입니까?
먼저 아브라함의 웃음을 봅시다. 아브라함은 엎드려 웃으며 마음속으로 ‘내가 백 세 된 사람이 어찌 자식을 낳을까 사라는 구십 세니 어찌 출산을 하리요’하고 엎드려 웃었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17:17). 아브라함의 이러한 웃음은 아무리 봐도 감사하는 행복한 웃음이 아닙니다. 그렇게도 간절히 바라고 기다리던 복을 주신다는 말씀을 들었음에도 감사하고 기뻐하는 웃음이라고는 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 사라의 웃음은 어떻습니까? ‘내가 노쇠하였고 내 주인도 늙었으니 내게 무슨 즐거움이 있으리요’ 라고 하며 속으로 웃었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18:12). 사라의 웃음 역시 기뻐서 감사하는 웃음이라고는 볼 수가 없습니다. 누가 봐도 아브라함과 사라의 웃음은 행복한 웃음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웃음도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기뻐서 웃는 행복한 웃음이 있는가 하면, 별로 좋지 않은 일이 있을 때 웃는 허탈한 웃음도 있습니다. 감격해서 웃는 웃음도 있고, 웃을 수 없을 때 웃는 쓴 웃음도 있고, 기대했던 것이 수포로 돌아갔을 때 실망스러운 웃음도 있습니다. 슬픈 일이 있어서 웃는 슬픈 웃음도 있고 부정적인 웃음도 있습니다. 네로 황제의 끔찍한 살인적인 웃음도 있습니다. 웃는 얼굴 표정을 보면 그 사람이 어떤 마음으로 웃는가를 알 수가 있습니다.
얼마 전에 길 가던 사람이 자신을 보고 웃었다고 해서 그 사람을 때려 중상을 입혔다는 뉴스가 있었습니다. 자신을 보고 비웃었다는 것입니다. 비웃음은 자존심을 상하게 하는 웃음입니다. 상대방을 행복하게 해 주는 웃음이 있는가 하면 상대방을 기분 나쁘게 하는 웃음도 있습니다.
그럼 본문에 기록된 아브라함과 사라의 웃음은 어떤 웃음입니까? 부정적이고 불신앙적인 웃음입니다. 아브라함은 ‘백 세 된 사람이 어찌 자식을 낳을까 사라는 구십 세니 어찌 출산하리요’라고 마음속으로 생각하며 웃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불신하는 부정적인 웃음이었습니다.
그리고 사라도 ‘내가 노쇠하였고 내 주인도 늙었으니 내게 무슨 즐거움이 있으리요’라고 속으로 생각하며 웃었기 때문에 역시 하나님의 말씀을 부정한 불신앙적인 웃음입니다. 아브라함과 사라가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부정적이고 불신앙적으로 웃었다는 말씀입니다.
이렇게 부정적이고 불신앙적으로 웃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축복해 주신 그 말씀이 현실적으로 자신들에게 합당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18:11절에 “아브라함과 사라는 나이가 많아 늙었고 사라에게는 여성의 생리가 끊어졌는지라”는 말씀에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이 현실적으로는 자신들에게는 합당한 말씀이 아니라서 웃었다는 것입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과 사라도 이처럼 자신들에게 있어서 현실적으로 맞지 않은 말씀을 들었을 때 그 말씀을 믿음으로 받아들이지를 못했습니다. 그래서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에게 “사라가 왜 웃으며 이르기를 내가 늙었거늘 어떻게 아들을 낳으리요 하느냐”(18:13)라고 그들의 불신앙적인 웃음을 책망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전지하시므로 아브라함과 사라가 마음속으로 웃는 것까지도 아셨습니다.
아브라함과 사라의 불신앙적인 것은 하나님의 능력을 믿지 못 했던 것입니다. 이미 늙어서 생리가 끊어져서 아이를 잉태할 수 없는 자연적인 현실 앞에서 아이를 낳으리라는 말씀을 믿음으로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는 말씀입니다. 그렇게도 기다리고 바라던 축복의 말씀을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말씀을 믿음으로 받아들이지를 못한 것입니다. 그 말씀을 진작 해 주셨더라면 좋았을 것인데 이제는 너무 늦었다는 것입니다. 지금은 그 말씀이 자신들에게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입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과 사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고 절대적으로 믿었던 믿음의 사람들입니다. 특별히 언약을 맺어주신 말씀인고로 그 말씀에 대한 믿음을 가졌습니다. 하나님의 전지하심과 전능하심을 믿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하나님께서 너무나도 어이없는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이미 사라에게는 생리가 끊어졌고 너무 늙어 아들을 낳을 수가 없게 되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그 말씀을 믿음으로 받아들일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히브리서는 사라를 ‘이미 죽은 자와 같은 ’사람이라고 했습니다(히11:12). 사라는 아이를 낳을 수가 없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로마서에서는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이라고 했습니다(롬4:18). 사라에게는 아들을 낳을 수 있는 가능성이 전혀 없는 자연적인 현상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하시는 말씀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너무나도 어이가 없는 말씀이기에 아브라함은 속으로 ‘백 세 된 사람이 어찌 자식을 낳을까’ 하며 웃었습니다. 사라도 역시 ‘내가 노쇠하였고 내 주인도 늙었으니 내게 무슨 즐거움이 있으리요’ 하며 속으로 웃었습니다. 이러한 자연적인 현실 앞에서 하나님으로부터 엄청난 축복의 말씀을 들었지만 믿음으로 받아들이지를 못하고 마음속으로 웃었던 것입니다.
축복의 말씀을 듣고서도 부정적이고 불신앙적으로 웃는 웃음은 아브라함에게와 사라에게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우리도 말씀을 듣고 이러한 부정적인 웃음으로 웃고 있습니다. 어쩌면 말씀을 들을 때마다 우리는 아브라함과 사라와 같은 부정적인 웃음으로 웃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마다 감동이 되고 은혜를 받습니다. 그러나 그 말씀이 현실적으로는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속으로 웃고 있지 않습니까? 어쩌면 오늘도 여러분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은혜는 받았지만 속으로 웃으며 돌아가지는 않습니까?
그 말씀을 10년 전에 해 주셨다면 축복이 될 수가 있었을 것인데, 지금은 아니라고 생각하며 웃고 있지는 않습니까? 아브라함이나 사라도 그 말씀을 좀 일찍 하셨더라면 그때는 ‘아멘’으로 화답하고 감사할 수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와 같은 말씀은 아이를 낳을 수 있는 젊었을 때 해 주셨더라면 정말로 좋았을 것인데, 지금은 아니라는 생각으로 아브라함과 사라는 웃었습니다.
그런데 여호와께서 사라가 속으로 웃는 것을 보시고 아브라함에게 “사라가 왜 웃으며 이르기를 내가 늙었거늘 어떻게 아들을 낳으리요 하느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라는 아무도 모르게 속으로 웃었지만 여호와는 다 아셨습니다. 오늘 우리가 아무도 모르게 마음속으로 웃는 것까지도 여호와는 다 아십니다. 여러분이 말씀을 듣고 속으로 웃는 것을 하나님은 다 아십니다.
그리고 “여호와께 능하지 못한 일이 있겠느냐 기한이 이를 때에 내가 네게로 돌아오리니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18:14)고 재차 말씀을 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이 나이가 많고 사라에게 생리가 끊어졌을지라도 여호와께서 하시지 못할 일이 어디 있겠느냐’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사라가 아이를 잉태할 수 없는 열악한 조건에만 집착하고 있는 불신앙적 태도를 불식시키기 위한 하나님의 지극한 배려의 말씀입니다. 불신앙적인 아브라함과 사라에게 능치 못함이 없으신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다시 가르쳐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것까지도 못하실 것이 없는 전능하신 하나님이심을 오늘도 우리에게도 말씀하십니다.
사라는 나그네들이 자신의 속마음을 완전히 아시는 전지하신 하나님과 천사임을 깨달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권능과 언약을 의심하고 웃었던 것을 크게 당황하고 얼떨결에 “내가 웃지 아니하였나이다”라고 변명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여호와께서는 “네가 웃었느니라”(18:15)고 말씀하시고 태를 열어 잉태 할 수 있는 복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일 년이 지나서 사라는 아들을 낳았습니다. 아이의 이름도 하나님께서 지어 주신 대로 이삭이라고 하였습니다(21:3). 이삭을 낳으므로 아브라함과 사라는 웃을 수가 있었습니다. 이삭을 낳으므로 아브라함의 가정은 웃음이 넘치는 행복한 가정이 되었습니다. 사라는 “하나님이 나를 웃게 하시니 듣는 자가 다 나와 함께 웃으리로다”(12:6)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웃게 하셨다고 사라는 고백했습니다. 이제 아브라함과 사라의 집에는 하나님께서 주신 이삭을 통해서 웃음이 넘치는 행복한 가정이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 오늘도 여러분에게 웃을 수 있는 복된 말씀을 하십니다. 그런데 그 말씀이 지금 나에게는 합당하지 않다는 부정적인 생각으로 속으로 웃고 돌아가는 불행이 없기를 바랍니다. 복된 말씀을 듣고 은혜를 받았으면 그 말씀이 이루어질 것을 믿읍시다. 그리고 그 말씀이 주는 복을 받고 웃을 수 있는 복을 받기를 바랍니다. 능하지 못하심이 없는 그 말씀을 아멘으로 받아들이고 마음껏 웃을 수 있는 복된 삶이되시기를 진심으로 부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