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조 金秉祚, (1877 - 1950 ?) 목사】 "시베리아 유형장에서 세상을 떠나다."
3·1운동 민족대표 김병조 목사의 발자취
대한민국임시정부에는 두 분의 병조(秉祚)라는 이름을 가진 목사가 계셔서 때로 혼동을 일으킬 때가 있다. 한 분은 김병조(金秉祚, 1877.1.10.-1950. ?) 목사요, 다른 한 분은 송병조(宋秉祚, 1877.12.25.-1942.2.25.) 목사다. 같은 한자 이름, 같은 나이, 같은 고향(평북 용천), 게다가 두 분 다 기독교 목사로서 3·1만세운동에 참여하였던 공통점이 있다. 오늘 소개하려는 분은 김병조 목사 이야기다.
김병조는 한국교회사에서 알려지지 않은 무명(無名)의 목사이다. 더욱이 그가 3.1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이었다는 사실은 아는 사람조차 거의 없다. 그러나 그의 인생 역정을 살펴보면 평생토록 목회자의 길을 걸으면서도 3.1운동으로부터 출발하여 임시정부에서 중요한 역할을 감당한 독립운동가이다. 또한 서당의 훈장에서 출발하여 변산학교(평북 구성)와 인성학교(중국 상해) 경신학교(평북 용천) 등을 설립하고 후학을 가르친 교육자이다. 그가 목회하는 현장에는 항상 부설 학교가 존재했다. 거기에 덧붙여 박은식의 '한국독립운동지혈사'와 쌍벽을 이루는 '한국독립운동사략'을 저술한 역사가이기도 하다.
민족대표로 3·1만세운동에 서명하다
1877년 평북 용천에서 부친 김경복과 모친 김해이씨 사이의 3남 중 2남으로 출생했다. 본관은 김녕(金寧)으로 백촌 김문기의 21세손이다. 일찍이 한학을 공부하고 애국계몽운동에 뛰어들었다. 서북학회와 대한협회에서 활동하다가 장로회신학교에 입학해 목사안수를 받았다. 신학교를 다니면서 교유한 인물들이 이승훈·함태영·송병조·유여대 등이었는데 훗날 3·1만세운동 때 민족대표로 함께 참여했다. 1919년 2월경 양전백(梁甸伯) 목사의 집에는 김병조를 비롯해 유여대·양전백·이명룡 등 평북노회 소속 목사들이 모였다. 3·1만세운동의 계획을 듣고 기독교측 민족대표 선임을 위해 찾아온 이승훈의 주도하에 민족대표로 동참을 결심하는 중요한 자리였다. 김병조는 이승훈으로부터 3·1만세운동 계획을 전해 듣고 이에 찬동하여 유여대와 함께 인장(印章)을 이승훈에게 넘겨주었다. 민족대표로 서명 날인하는 모든 것을 위임한 것이다.
그는 고향에서 만세 시위를 주도하기로 하고 2월 28일 밤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를 준비, 교회와 사회단체에 통고문을 비밀리에 배포했다. 이에 따라 그는 3월 1일 서울 태화관에서 거행된 민족대표들의 독립선언식에는 참석하지 못했다. 3월 1일 서울 시위 소식에 따라 오후 1시 평북 의주의 만세 시위를 주도했던 것이다. 시위를 마친 그는 4월 13일 중국 상하이로 망명했고, 제2회 임시의정원 회의에 참석했다. 이어서 법제위원회 이사, 외교위원회 위원장 등을 지냈다.
당시 그는 조선동포들의 3.1만세시위 동참을 촉구하기 위해 '격고아한동포문(檄告我韓同胞文)'을 제작해 살포했는데 그 내용은 아래와 같다.
"슬프다, 우리 팔도의 동포여! 깊은 잠에 빠져 있음을 크게 뉘우칠지어다. 하늘의 모습을 우러러 보아라, 동방의 밝은 별이 이미 밝았다. 시국의 형편을 두루 살펴보아라. 집집마다 경종이 스스로 울리니 휘날리는 태극기는 제군들의 조국정신을 활발하게 하고, 열렬한 만세소리는 제군들의 일체 생명의 맥박을 다시 뛰게 하도다."
그는 격문을 통해 일제의 식민지 지배 하에서 깊은 잠에 빠져 있던 조선 동포들에게 깨어나 만세시위에 동참할 것을 호소하였다. 3월 7일에는 조선총독부, 경찰서 등 일제 통치기관에서 하수인 노릇을 하고 있던 부일배들에게도 각성을 촉구하는 '경고관헌문(警告官憲文)'을 만들어 배포하였다. 이 경고문은 3.1혁명 당시에 배포된 격문 가운데 가장 강렬한 것으로, 임시정부 기관지 <독립신문>에 실렸다. 그 내용의 일부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이르노니 너희 조선인으로 왜놈의 관리된 자야 양심에 따라 스스로 반성하라.… 의를 의지하고 일어선 2천만 민족이 모두 너희들을 쳐 죽일 생각임을 모르는가. 아니면 절개를 지키며 숨져간 30만 충령이 이미 너희를 죽이기로 한 결정을 모르는가. 위로는 하늘이 두렵지 않고 아래로는 사람이 부끄럽지 않느냐. 너희 할애비 너희 애비의 피가 과연 네 골수에 흐르고, 충이니 의이니 하는 마음이 아직도 네 마음속에 남았거든 북을 치고 공격할 때를 기다리지 말고 힘을 내어 무기를 거꾸로 들고 돌이켜 길을 바꿈으로써 크게 후회하는데 이르지 않도록 하여라."
그러다 돌연 임시의정원 의원을 사임했는데, 사임 이후에도 상하이 조선인교회 담임목사로 선출되어 국내교회와의 연계를 주도하기도 했다. 1923년 1월 우여곡절 끝에 열린 국민대표회의에서 그는 비서장으로 선출되어 의장 김동삼, 부의장 안창호·윤해와 함께 회의를 주재했다.
조선총독부에서는 영문판 선전물인 「Annu al Rep orts on Reforms and Progress in CHOSEN (Korea
) 」을 만들어 배포했다. 일제의 한국침략과 식민지통치의 현실을 왜곡하고 외국에 선전하기 위한 것이었다. 임시정부에서는 이에 대항해 국제연맹에 제출할 한일관계사를 편찬하고자 했다. ‘한국인의 입으로, 한국인의 사정을 세계에 알리고자 한 것’이다. 이에 따라 김병조는 이광수·김두봉·조동호 등과 조사·집필에 참여하고 마침내 「한일관계 사료집」을 완성했다. 제출 시일의 촉박으로 충분한 사료조사와 집필에 한계가 있었으나 어쨌든 임시정부가 공식적으로 정리한 최초의 3·1운동 기록이라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
김병조는 일찍부터 일제에 유린된 민족의 실상을 모아 세계에 알리고 싶다는 포부를 밝혔다. 또한 「한일관계 사료집」 편찬에 참여한 경험을 바탕으로 자신이 별도의 일제 침략과 3·1운동사를 저술하고 싶다는 열망이 있었다. 이에 따라 만들어진 책이 『한국독립운동사략 상편』이었다. 이 책을 교열한 박은식은 그 「서(序)」에서 김병조가 독립선언 대표의 한 사람으로서 3·1운동 이래 우리 민족의 유혈 참상과 일본인의 만행을 수집해 책을 만들므로 우리 민족 만대의 기념으로 독립 사업에 큰 도움이 되었다고 격려했다. 김병조는 일제 침략의 구체적 계기를 ‘청일전쟁’부터라고 보았다. 특히 3·1운동의 중요성을 부각해 ‘개국 이래 처음 일어난 민족적 혁명’이라고 인식하고 있음은 민족대표의 1인으로 3·1만세운동을 올바르게 기록해야겠다는 의지를 실현한 것으로 볼 수 있겠다. 또한 ‘상편(上篇)이라 하여 후속 사업을 계속하려는 의도가 있었던 것이나 실현되지는 못했다.
한국독립운동사략 (상편)
시베리아 유형장에서 세상을 떠나다
김병조는 1923년 4월 상하이를 떠나 만주로 거처를 옮겼다. 만주 무장투쟁 단체의 지도자로 추대되기도 하는데, 1924년 1월 김동삼과 함께 통의부 행정위원으로 선출되었고, 1925년 10월에는 육군주만참의부 고문으로 피선되기도 했다.
1933년 김병조는 만주생활 10년을 청산하고 귀국했다. 귀국 후 일제로부터의 구속은 면하였으나 요시찰인물로서 특별한 감시와 탄압을 받았다. 그는 고향인 용천지역 교회에서 해방 전까지 목사로서 시무한 것으로 보인다. 1938년 교단총회에서 신사참배를 결정하자 모든 직무에서 은퇴하고 은둔생활에 들어갔다. 해방 후에는 북한에 주둔한 소련군과 맞서 반공광복단을 조직해 대항하다가 1946년 말 소련군에 체포되어 1947년 2월 시베리아 강제노동수용소로 유형(流刑)되어 그곳에서 1950년경 사망한 것으로 전해진다. 그의 나이 73세 때였다.
김병기는 <독립신문>사장과 육군주만참의부 참의장을 지낸 독립운동가 희산 김승학 선생의 손자이자 대한독립운동총사 편찬위원장을 지낸 역사가 김계업 선생의 아들이다. 고려대 농경제학과를 졸업해 단국대 대학원에서 독립운동사를 전공, ‘참의부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는 대한독립운동사 편찬위원회 위원장과 희산김승학기념사업회 이사를 맡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