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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헌 홍대용, 우주를 사유하는 자연철학자
노론 명문가의 후예, 홍대용
과거를 포기하고 우주를 사유하다
독특한 이력의 소유자 홍대용!
청나라의 문인이자 홍대용의 친구 '엄성'(嚴誠)이 그린 홍대용
홍대용(洪大用, 1731-1783)이라는 이름 석 자를 듣는 순간 우리들의 머릿속에는 ‘천애지기(天涯知己)’와 ‘천문과학’이 떠오른다. 청나라 북경의 유리창에서 우연히 만나 밤새 이야기를 나눈 일을 계기로 평생 우정을 주고받았던 담헌(홍대용의 호)과 그의 중국인 친구 엄성, 육비, 반정균!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바, 국경을 가로질러 인종과 언어의 장벽을 넘어 이토록 진한 우정을 나눈 조선의 선비를 또 찾아보기는 힘들 것이다. 그리고 과학사(科學史)상 가장 긴 과학서(1만 2천자)라는 칭송을 듣는 『의산문답』을 통해 지원설(地圓說)·지전설(地轉說)·우주무한설을 증명했고, 천문대인 농수각을 짓고, 천체를 관측하는 혼천의와 자명종 같은 기구를 만들어 정밀한 측정을 시도했다. 뿐만 아니라 『주해수용』에서 산수·기하에 관한 논증을 통해 일상의 편리를 추구했던 것이다.
18세기 지성사에서 담헌 홍대용만큼 독특한 이력의 소유자가 또 있을까? 18세기 지식인들은 정치가나 문장가 혹은 경학가로 이름을 알리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런데 홍대용은 이들과는 다른 분야에서 자신의 존재성을 드러냈다는 점에서 독보적이다. ‘자연철학자’라 명명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존재에다, 청나라 사행 경험을 하나의 사건으로 만든 거의 최초의 존재라는 점에서 그렇다.
기실 담헌의 학문적 관심과 문제의식은 매우 포괄적이면서 총체적이다. 18세기 담헌만큼 다방면의 지식과 기술을 가진 지식인은 거의 찾아보기 힘들다. 그의 관심사는 이기, 심성 문제에서부터 경학, 사론(史論), 산수, 천문, 율력, 직관(職官), 전부(田賦), 교육, 용인(用人), 병제, 성제(城制), 병법 등의 문제에 걸쳐 있다. 음악에 대한 관심 또한 남달라서 애호하는 정도가 아니라 전문가 수준으로 연주 실력을 뽐냈다. 거문고, 퉁소 연주에 뛰어났을 뿐만 아니라 서양금은 스승 없이 혼자 연주법을 터득했다. 북경에서 천주당을 방문했을 때 처음 본 파이프오르간을 연주할 정도로 뛰어난 실력자였다. 마테오 리치는 기하가를, 사물의 분한을 전문적으로 고찰하는 사람이라고 정의하면서, 수효와 크기 중에 어떤 것을 다루냐에 따라서 산법가(算法家), 양법가(量法家), 율려악가(律呂樂家), 천문역가(天文曆家)로 나뉜다고 했는데, 담헌은 그야말로 이 네 가지를 모두 아우른 기하가였다. 수학과 음악은 한 분야! 이 말대로 담헌은 수학, 천문, 음악에 있어서 뛰어난 전문가였던 것이다.
그러나 여러 학문을 망라했던 담헌은 경제(經濟)와 의리(義理)의 학문을 중시한 까닭에 사장(詞章)에 대한 관심은 보이지 않았다. 시에 흥미가 없었는지 시 쓰기에 재주가 없었는지 분명치는 않지만, 시를 짓는 일도 꺼렸고 시로 응답하는 일도 드물었다. 문장도 거의 실용적인 목적에 의해 지었지 예술적 차원에서 글쓰기를 갈고닦지는 않았다. 혜환 이용휴가 남인 중에 유독 사장에 관심을 가진 존재로 독특한 포지션을 갖고 있었다면, 담헌은 노론 중에서 유독 사장에 관심을 갖지 않은 존재로 독특한 포지션을 지닌다.
내 뜻대로 살리라!
담헌 홍대용은 노론 명문가의 후예다. 조부 홍용조는 승지, 대사간, 충청도 관찰사를 역임했고, 아버지 홍력도 나주목사를 지내는 등 벼슬살이의 부침 없이 순탄한 일생을 보냈다. 담헌이 천안 수촌에 농수각을 짓고 호남의 실학자 나경적에게 의뢰하여 혼천의를 제작할 때, 그리고 연경으로 여행갈 때도 그 비용을 아버지가 지원해주었다. 넉넉한 가정 형편에, 나름 지명도를 갖춘 집안에서 태어났음에도 불구하고 담헌은 벼슬에 뜻을 두지 않고 백수 학자로서 살았다.
담헌은 12살에 노론 산림으로 낙론의 종장이었던 미호 김원행(金元行, 1702-1772)의 제자로 들어간다. 김원행은 몽와 김창집의 손자요, 농암 김창협의 질손으로 그 학문을 계승했으며, 담헌의 종조(從祖)인 홍귀조의 사위였다. 즉 담헌에게 5촌 고모부가 된다. 담헌은 김원행이 원장으로 있던 석실서원에서 과거를 위한 공부가 아니라 자기실현을 위한 학문을 연마했다.
홍대용이 지은 자연관 및 과학사상서 『의산문답』
담헌은 일찍부터 천문역학에 경도되었는데, 낙론계 일각의 학풍이었던 김석문(金錫文) 계통 상수학의 영향이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김석문(1658-1735)은 김창흡의 문인으로 『역』과 『성리대전』를 연구하고, 태양·지구·달이 공중에 떠있으며 지구도 달처럼 회전한다는 삼대환공부설(三大丸空浮說)이란 획기적인 천문학 이론을 수립하여 김원행에게 크게 인정받았다. 김원행의 제자로 담헌과 교유했던 황윤석도 상수학에 일가를 이루었으며, 김원행은 상수학 연구를 장려했다고 한다.
담헌은 몇 차례 과거를 보기는 했지만 수험생으로 공부한 적이 없었던 까닭에 번번이 낙방했다고 한다. 애초에 시험에 뜻이 없었으니 급제하는 게 더 이상하지 않았을까? 담헌은 다만 우주의 이치를 관측하여 세상의 이치를 탐구하고, 거문고를 연주하면서 자족적인 삶을 살았다. 정자를 건곤일초정(乾坤一草亭)이라 이름하여 하늘과 땅을 한낱 띠풀로 엮은 정자처럼 여기며, “아! 물아(物我)가 이뤄졌는지 않은지도 모르는데, 귀천(貴賤) 영욕(榮辱)인들 논해 무엇하랴? 잠시 살다 죽는 것은 부유(蜉蝣)의 생애보다 못하도다. 아서라, 내 뜻대로 즐기며 이 정자에 누워서 이 몸을 조물(造物)에 맡겼다.”(<건곤일초정주인>,「내집」3권, ,『담헌서』)
담헌은 농암 김창협이나 성호 이익처럼 당쟁의 아픔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특별히 신산한 경험을 한 것도 아니며, 가난에 시달리지도 않았다. 그런데도 세상에 대해 다른 뜻을 품었다. 담헌은 하고 싶었던 공부가 따로 있었기 때문이다. 시험을 준비하고 관직에 나아가면 자신이 즐기고 싶은 학문을 할 수 없었던 것. 담헌은 출세에 크게 연연해하지 않았다. 아마도 관직생활이 아니더라도 자신을 실현할 길을 보았기 때문이리라. 농암이나 성호와 같은 선배들이 그 길을 닦아놓아서였을까? 세상의 이치를 꿰는 학문에 뜻을 두며 평생을 유유자적 살기로 작정한 담헌은, 어찌할 수 없어서 백수를 선택한 선배들보다 훨씬 더 자유로운 영혼으로 18세기를 유영했다고 할 수 있다.
훈고와 돈오의 사이에서 길찾기
담헌의 학문 경향이 천문과학과 상수학으로 기울었다고 그가 탈성리학, 탈유학을 주창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어떤 순간은 성리학자였고, 어떤 순간은 양명학적이고, 육구연적이고, 장자적이었다. 그 어떤 경지이든 담헌이 강조한 삶의 자세와 학문의 태도는 ‘지행합일(知行合一)’이자 ‘격물치지(格物致知)와 실천’이었다. 그러나 현실은 달랐다. 담헌 당대에 주자학을 신봉하는 이들은 너무 자구 해석에만 매달리거나, 아니면 형이상학의 관념으로만 달려갔다. 둘 다 현실을 외면한다는 점에서는 다르지 않았다.
독서는 장차 진리를 밝혀 행사에 실현하려는 것입니다. 진실로 능히 정밀하게 읽고 익숙하게 강구하며, 적실하게 보고 참되게 알게 된다면, 저 책이란 것이 소용없는 휴지에 불과할 것이니, 묶어서 다락에 집어 넣어두어도 좋은 것입니다.…비록 그러나 지행(知行) 두 가지 일은 진실로 어느 한 쪽도 폐할 수 없는 것이요, 본말과 경중의 구분 또한 크게 차등과 구별이 있는 것이어서, 여기에 있어서 잘못이 있게 되면, 돈오(頓悟)에 빠져들지 않으면 반드시 훈고(訓詁)로 돌아가고 마는 것이니, 두렵게 여기지 아니하여 되겠습니까?
- <항전척독>,「외집」1권, 『담헌서』
상산 육구연의 학설이 한창 성행하였던 까닭에 주자는 늘 격물치지하는 공부를 강조하여 마지 않았으니 그 형세가 그러했습니다. 다만 이 때문에 주자학을 배우는 후학들이 훈고에만 빠진다면 그 폐단이 육구연의 학문보다 심할 뿐 아니라 도리어 주자와 어긋나게 됩니다. 주자를 배우고자 하는 후학들은 먼저 격물치지에 힘쓰고 이어서 함양과 실천의 공부를 하여 지와 행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은 연후에야 비로소 주자의 본뜻을 잃지 않는 것입니다.
- <계방일기>,「내집」2권,『담헌서』
앎과 행의 일치. 담헌에게 아는 것은 알기만 하는 게 아니라 적용하는 행위로써 완성되는 것이었다. 시험공부는 앎과 행의 불일치요, 앎과 행을 멀게 하는 지름길이었다. 담헌은 지행의 실천을 위해 과거를 단념했던 것이다. 담헌에게 학문은 궁리하고 실천하는 과정을 모두 포함한 것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사물이나 경전의 뜻을 궁구하는 ‘훈고’만을 강조하지 않았다. 경전의 의미 파악만 강조하면 자구 해석에만 매달려 이치를 내면화하거나 실천하는 행위는 사라지기 때문이다. 또 그런 의미에서 돈오의 경지만을 강조하지도 않았다. 깨달음만 강조하면 행위의 경계나 판단 근거가 없어 허우적거릴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담헌은 훈고와 돈오의 그 사이에서 학문의 길 찾기를 시도한다. 그것은 바로 격물치지와 현실에의 적용 능력을 말하는 것이었다. 사물의 이치와 세상의 이치를 궁구하고 깨우치고 실천하는 것! 이것은 격물치지의 내면화이자 현실화라 할 수 있다. 그러니 이 길은 가장 주자적이면서 현실의 주자학과 가장 멀어지는 방식이었다.
그들이(중봉 조헌, 토정 이지함) 그러한 성취를 이룬 것은 모두 실심으로 실학을 하였기 때문입니다. 진실로 실천하지 아니하고 다만 빈말에만 힘썼다면 당시 그런 일을 성취하지 못했을 것이고 후세에 그와 같은 이름을 남길 수 없었을 것이니 학문이라 말할 수도 없었을 것입니다.
- <계방일기>,「내집」2권,『담헌서』
자신의 학문이 공허한 말이나 관념이 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 담헌은 실학을 주장했다. 현실화될 수 있는 학문, 그것은 자연과학과 상수학만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었다. 성리학도 실학이 되게 하려면, 심성론의 논쟁에만 빠져서도 안되고 현실의 인간 삶을 변화시켜야 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제도적 개선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었다. 세계를 다르게 볼 수 있는 의식 혁명까지 포함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담헌은 행정, 제도의 변화와 더불어 인식지평의 전환을 가능케 하는 지식과 경험의 세계에 뛰어들었다.
준비된 자, 궁리의 현장으로 길을 떠나다!
담헌에게 궁리의 현장은 책이기도 했지만 우주였고, 세계였다. 이런 담헌에게 돌이킬 수 없는 사건이 일어났다. 청나라라는 궁리(窮理)의 현장을 마주하게 된 것이었다. 담헌의 나이 36살 때인 1765년(영조41년), 숙부 홍억이 동지사의 서장관으로 임용된 덕분에 그 자제비장으로 북경에 다녀오게 된다. 이 여행을 계기로 담헌의 세상은 완전히 변전한다. 마주침 자체가 중요한 게 아니라 누가 누구와, 누가 무엇을 만났는지가 참으로 중요할 텐데 담헌과 청나라의 만남이 그런 것이었다. 그 공간이었기 때문에, 그리고 그 사람이 갔기 때문에 매우 다른 시공간과 사유가 만들어진다는 것! 청나라라는 공간과 청나라 사람들과 마주침으로써 담헌은 완전히 다르게 세상을 바라보게 되고, 담헌과의 마주침으로 인해 청나라와 그 사람들이 매우 다른 공간과 사람들로 조선에 받아들여지게 된 것이었다.
담헌이 청나라로 여행을 갈 수 있었던 것을 뜻밖의 행운만은 아니었다. 담헌은 이미 여행을 떠날 준비가 된 자였다. 담헌은 떠나기 몇 해 전부터 이미 노가재 김창업의 『연행록』을 읽었으며, 중국어를 익히고 있었다. 노가재는 청나라에 다녀와서 연행의 여정에서 마주친 문물제도, 산수자연, 사람들을 자세히 기록한 『연행록』을 썼다. 노가재의 여행기는 조선의 선비들에게 청나라의 풍광과 문화에 대한 신선함과 호기심을 자극하여 노론계열 젊은이들에게 한번쯤은 청나라 외유를 꿈꾸게 만들었다. 그 이후 연행을 가는 사신들은 노가재의 『연행록』을 읽고, 그가 보았던 것을 보고자 노력했다. 담헌도 마찬가지였다. 호기심도 많았고, 서양의 천문역학 기구를 직접 관찰하고 싶었던 담헌은 이미 외유할 뜻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노론 명문가의 자제로, 충분히 갈 수 있었던 여건을 갖추었기에 담헌은 한어를 배우며 써먹을 기회만 노리고 있었던 것이다.
내가 오래 전부터 한번 외유할 뜻을 가지고 있었기에 여러 가지 역어를 보면서 말을 익힌 지도 여러 해가 되었었다. 그런데도 책문에 들어갔을 때, 비록 보통으로 하는 말까지도 전연 알아듣지 못하여 당황하고 답답하였다. 이때부터 수레를 타게 되면 왕문거와 하루 종일 이야기를 주고받았고, 여관에 들어서는 주인 남녀와 억지로 말머리를 끄집어내어 끝없이 이야기해 왔으며, 심양에 이르러서는 조교 부자와 별별 이야기를 다하면서도 필담은 하지 않았다. 북경에 있을 때에는 거리를 두루 돌아다니면서 일이 닥치는 대로 이야기를 주고받아, 말의 억양이 더욱 익숙해졌었으나 오직 문자나 깊은 말, 그리고 남방 사람들 말에는 망연하여 귀머거리나 벙어리 같았다.
- <연로기략>, 《연기》, 「외집」8권, 『담헌서』
그리고 기다리던 그 때가 왔을 때 담헌은 준비했던 중국어를 시험했고, 그 길 위에서 중국어 배우는 여정을 그치지 않았다. 마부 왕문거와 대화하고, 길에서 만난 사람들과 닥치는 대로 이야기를 나누며 말을 익히고 중원 땅의 사람살이와 그 문화의 속살을 들여다보았다.
준비된 여행객 담헌은 능동적이고 적극적으로 청나라와 만났다. 만주사람을 만나면 만주말을 한두 마디라도 익히고, 몽고사람을 만나면 몽고말을 한두 마디라도 익혔다. 위축되거나 자만한 모습이 전혀 없었다. 오랑캐라는 선입견으로 미리 깔보고 지나치는 것이 없었다. 담헌은 “무슨 일이든 결론을 서둘러서는 안 되며”, “책을 읽으면서 먼저 자기 견해부터 세우려는 마음을 갖는다면 생각이 이미 바깥으로 질주하는 것이”라고 했는데 실제 현장에서도 그랬다. 담헌은 청나라에 대한 어떤 선입견도 없이 그들의 문명과 접속했다. 뭐든 물어보고 확인하며 청나라의 모습을 새롭게 발견해갔다. 그리고 그 현장에서 보고 듣고 깨달을 것을 그대로 전했다. 그것이 바로 북경 여행을 기록한 《연기》이다. 담헌이 쓴 《연기》는 청나라를 편견 없이 바라본 최초의 여행기라는 점에서 그 의미가 남다르다.
글_길진숙(남산강학원)
홍대용이 나경적으로 하여금 만들게한 <혼천의>의 일부. 이 <혼천의>는 홍대용이 청에서 보고 온 것을 똑같이 만든 것이다. 숭실대학교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