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지훈趙芝薰씨와 그 주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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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훈·왕학수·정한숙·황산덕·한태연·정비석·한창우·이관구·민재정·오종식·김광주·유호·
안의섭·박기원·김진찬·이한직·조영암·이하윤·이헌구·이명온·조경희·조애실·양주동·김광섭·
김환기·박연희·한노단·이봉구·이해랑·윤용하·이진섭·박인환·이인범·전봉초·김광수·김송·
박재삼·정한모·백철·이무영·한무숙·정종화·천상병·주요섭·김성한·전숙희·송지영·오영수·
조풍연·박계주·모윤숙·김동리·조연현·곽종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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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일론 정한모(鄭漢模) 시인도 있다. 조지훈과 아주 단골이었다. 정한모 시인도 집이 성북동이어서 자주 조지훈씨와 동반해서 우리 집 문을 차고 찾아드는 심야의 방문객이었다. 물론 나도 그 무렵이면 명동에서 어지간히 술에 취해 들어와 자리에 누울 때였다. 그러나 통금시간에 걸린 주객을 그냥 보낼 수도 없어서 춥고 귀찮긴 하지만 하는 수 없이 문을 따주곤 했다. 양주는 이럴 때 참 좋은 술이다. 한두 시간, 경계망을 피하고 있는 시간, 마침내 공범들이 한곳에 모여 탈출구를 모의하고 있는 풍경 같았다.
그러나 조지훈도 가고, 통행금지 시간도 없어지고, 이제 이러한 정답던 광경도 다시 볼 수가 없게 되었다. 문을 차고 들어오자 “술 가져 와.” 하는 우정어린 벗도 없어지고,
한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 1955년이던가, 1954년 처음으로 우리 한국이 비엔나 PEN대회에서 국제 PEN에 가입이 되고, 이건 순전히 모윤숙(毛允淑) 시인의 힘이었지만, 다음 해 런던에서 열렸던 1955년 PEN대회에 처음으로 한국 대표(김광섭·백철·이하윤·이무영)를 파견했다. 대표들이 돌아와서 그 환영회가 문총(지금의 예총, 그 사무실이 남대문 네거리에 있었던 빌딩에 있었다) 회의실에서 있었다. 술은 물론 막걸리와 소주, 그리고 안주는 빈대떡과 돼지머리, 기타 나물들, 참으로 가난한 시절의 막걸리, 소주의 칵테일 파티였다.
주호 이하윤 시인(당시 서울사범대학 교수)에게 다가갔다. “그래, 연포(漣圃) 선생, 술의 고향인 영국에 가서 좋은 술 많이 드셨습니까?” 이하윤 선생은 호를 연포라 했다. “웬걸, 술값이 비싸서 맥주만 마시다 왔어.” 이것이 대답이었다. 그 당시만 해도 우리나라에선 양주가 흔하지 않았었다. 그때 마침 나에겐 ‘화이트 호스’라는 양주가 하나 집에 있었다. 이웃에 사는 한무숙(韓戊淑) 여사가 준 것이다. “그럼 이 파티가 끝나면 저의 집으로 갑시다. 집도 가깝고 하니, 양주가 한 병 있습니다.” 했다. 이하윤씨의 댁은 동숭동 문리과대학(지금의 문예진흥원 미술관) 뒷편에 있었다. 그러니 나의 집하곤 불과 500 미터 거리였다.
이층 서재 마루방으로 안내했다. 양주를 땄다. 마시기 시작을 했다. 각자 술을 따르기로 했다. 그런데 이하윤씨는 술을 따를 때마다 술이 철철 넘도록 컵에 따랐다. 넘치는 술은 마룻바닥에 뚝뚝 떨어졌다. 떨어질 때마다 내 마음은 아팠다. 첫째는 마룻바닥에 칠한 니스가 까지기 때문이었고 둘째는 술이 아까워서였다. 술이 비싸서 런던에서 맥주 만 마셨다는 사람이 이게 무슨 꼴인가, 생각한 끝에 “이선생, 그 술 남는 거 선생이 가지고 가는 겁니다. 드리는 겁니다. 병째로.” 한마디 했다. 그 말을 듣고선 한 방울도 술을 흘리지 않았다. 무슨 심보인가. 그리고 이제 그만 술을 하자는 눈치였다. 나는 하도 그 행동에 몹시 마음을 상해서 “그럼 그만 가시지요.” 했다. 물론 그 남은 술은 잘 싸서 이하윤씨에게 드렸다. 그날 밤 나의 포켓에 꽂고 다니던 손수건이 없어졌다. 다음날 아침 나는 동숭동 이하윤씨 댁으로 갔다. 그 습관을 들은 일이 있어서, 대문 밖에서 “연포선생, 그 손수건 주세요.” 대뜸 이렇게 문을 두드렸다. 멋적은 목소리로 “술을 사야지.” 했다. 술은 어제도 내가 사고, 그저께도 내가 사고, 번번이 만날 때마다 내가 산 게 아닌가. 이건 너무 심한 농담이다. 물론 손수건을 되돌려받자마자 되돌아와 버리고 말았다. 이상한 버릇도 다 있구나 생각하며.
그 무렵 우리 술꾼들은 자주 혜화동 건너편 명륜동에 있는 소설가 한무숙씨 댁에 자주 들렀었다. 김환기·조지훈·정한모·이진섭·정종화·천상병, 지금은 벌써 잊었지만 실로 많은 문인, 예술가들이 출입을 했다. 나는 더군다나 집이 가까와서 거의 단골로, 갈 때마다 좋은 술을 마셨다. 좋은 문학적인 분위기에서, 한무숙씨 부군되시는 분을 별명으로 GMC라고 불렀다. 몸집이 크고, 단단하고, 건장했기 때문이다. 유명한 은행가였다. 술을 많이는 하지 않았지만 우리들이 그렇게 떠들고, 늦게까지 소란을 피워도 하나 언짢은 기색없이 같이 자리를 해주었다. 이런 분위기 지금 다시 어디서 찾으랴. 참으로 좋은 벗들, 좋은 술, 좋은 분위기, ‘말라르메의 화요일 밤’ 같은 밤들이었다. 책에서 읽은, 한무숙씨에겐 이러한 점, 많은 신세를 졌다. 참으로 나에겐 외롭던 시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