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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28;1-10. 새벽 미명에 2021, 4. 4.
주님께서 죽음의 권세를 이기시고 안식 후 첫날 새벽 미명시간에 무덤에서 살아 나셨습니다. 부활하셨습니다. 이는 세상의 모든 상식과 기준이 무너졌습니다. 여러분, 오늘 우리의 상황이 어떻습니까? 전 세계가 코로나19로 비명을 지르고 있습니다. 그래서 삶이 팍팍하고 한숨만 나오고 대안이 없고 암울한 이 때입니다. 하지만 이 부활의 아침에 부활하신 주님을 소망하면서 간절한 믿음으로 예배를 드립니다. 왜냐하면 부활 하신 주님께서 어두움이 깔려있는 오늘 우리에게 부활의 그 때, 그 시간의 은혜를 다시 받고 경이로움을 체험하고 그래서 다시 소망을 갖는 그런 부활의 아침이 되시기를 소원합니다.
오늘 본문에 막달라 마리아와 또 다른 마리아가 무덤에 이르렀을 때에 이미 주님은 무덤에 계시지 않았습니다. 여인들의 이야기를 듣고 요20장에서는 시몬 베드로와 사랑하는 제자, 요한이 먼저 도착을 했고 곧 이어 다른 제자들도 도착을 합니다. 주님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오늘 본문 6절에 천사가 이르기를 예수님이 여기 계시지 않고 전에 말씀을 하시던 대로 살아 나셨다. 그리고 여기 무덤을 보라고 확인을 시켜줍니다. 여러분, 주님의 시신은 보이지 않고, 주님의 모습은 없는데 그 상황에서 이들이 얼마나 놀라고 얼마나 무서웠을까요? 한편으로는 얼마나 기뻤을까요? 그런데 이런 와중에 사람들을 향하여 새벽 미명에 부활하신 예수님은 3마디 표현, 3마디 메시지를 말씀합니다. 물론 무덤을 찾은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와 여인들에게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9절에 평안하냐? 10절에 무서워하지 말라, 가서 내 형제들에게 갈릴리로 가라 하라 거기서 나를 보리라. 이 내용은 막16장에서도 거의 같은 표현입니다. 이들은 두려웠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먼저 갈릴리로 가겠다. 거기서 나를 보리라. 눅24장에서는 여인들이 두려움 때문에 먼저 베드로에게 전하는데 베드로는 그 무덤으로 갔고 예수님의 무덤을 철저하게 확인을 합니다. 세마포만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에게 부활하신 예수님의 모습을 드러냅니다. 요20;15, 여자여 어찌하여 울며 누구를 찾느냐? 17절에 나를 붙들지 말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아니 하였노라 너는 내 형제들에게 가서 이르되 내가 내 아버지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 하라. 19절에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21,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22-23절에 성령을 받으라.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누구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 이 것이 부활하신 주님께서 이 사람들에게 말씀하신 모든 내용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중요한 3마디 표현과 세 가지 메시지는 평안과 갈릴리와 성령입니다. 귀중한 말씀입니다. 왜냐하면 부활하신 이후에 직접 바로 주신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서는 평안과 갈릴리 두 마디 단어입니다. 성령에 관한 부분은 요한복음에 나옵니다. 이 세 가지 표현은 다 연결이 되어있고 또 연결이 되어야 결과가 만들어집니다. 그러면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왜 이 중요한 세 마디, 세 메시지를 말씀 하셨을까요? 여러분, 얼마나 반갑고 얼마나 무섭고, 얼마나 기뻤겠습니까? 내가 살아난다. 몇 번 씩이나 말씀을 하셨는데 귀담아 듣지 않고 마음에 두지 않았고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평안하뇨? 너희에게 평안이 있을지어다. 내가 먼저 갈릴리로 가겠다. 요20;22에 이 말씀을 하시고 저희를 향하사 숨을 내쉬며 가라사대 성령을 받아라. 이 세 가지 표현을 합니다. 여러분, 보고 싶었던 사람 만나면 어떻습니까? 예수님은 가장 사랑했던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 그리고 베드로와 사랑하는 제자 요한과 또 다른 제자들을 만나서 전혀 다른 표현을 합니다. 새로운 의미의 메시지를 줍니다. 왜 그럴까요? 다 연관이 있고 그 한 표현에 중요한 의미가 담겨있기 때문입니다. 무엇입니까?
1. 부활하신 예수님의 첫 메시지는 평안입니다. 세상이 알 수도 없고 세상이 줄 수도 없는 평안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메시지입니다. 그러면 무엇에 대한 평안일까요?
1-1. 시작과 매듭의 평안입니다. 여러분, 지금 얼마나 힘이 들고 걱정이 되고 아픔이 있습니까? 풀 수도 없고 미래가보이지 않습니다. 하지만 시작도 평안이고 매듭도 평안이고, 언제나 평안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어느 곳에 있든지 어느 집을 들어가든지 그 집의 평안을 위해서 기도하라고 합니다. 모든 것의 시작과 매듭이 평안이어야 합니다. 시작이 평안이면 주안에서 마침도 평안입니다. 오늘 본문은 시작의 평안을 말씀하고 요한복음은 아침과 저녁의 평안을 말씀합니다. 누가 복음에는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두 여인에게 나타나고, 베드로를 만나시고, 슬픔에 잠겨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와 함께하고 떡을 잡수시면서 부활하신 주님을 보여주십니다. 그런데 낙심하여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에게 평안을 말씀하셨습니다. 제자들과 여인들을 처음 만날 때마다 너희에게 평안이 있을지어다. 저녁에 제자들이 웅성거리면서 문을 단단하게 잠그고 모여 있는 장소에 들어오셔서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여러분, 주님께서 부활의 첫 선물이 평안입니다. 왜 평안입니까? 제자들이, 사람들이 얼마나 두려웠을까요? 장차 다가올 그들의 앞날과 무슨 일이 일어날 줄 모르는 불안과 피해와 현실과 내일의 문제 때문에 안절부절 하던 때입니다. 유대인들의 적대감 때문에 모여서 향후 진로를 생각하던 때입니다. 그런데 새벽 미명의 소식 때문에 다시 모였지만 그래도 놀라움과 걱정과 두려움만이 있습니다, 불안해서 문도 열어 드리지 않았는데 주님이 직접 들어오셔서 너희에게 평안이 있을지어다. 언제 어디서나 평안입니다. 그런데 부활 하신 주님의 첫 멧세지의 평안과 살아생전에 제자들과 친밀한 대화 속에서 하시던 내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하시던 말씀의 의미가 다릅니다. 여러분, 이 불안한 상황에서 우리에게 가장 먼저 있어야 할 축복이 무엇입니까? 바로 평안입니다. 그 평안을 부활한 직후 첫 번째로 주셨습니다. 오늘 at the end와 같은 불안한 현실 가운데서 모두에게 우선은 평안입니다. 두려움을 몰아내는 평안이고, 불안과 걱정, 근심을 거두는 평안입니다. 두려움 때문에 스스로 닫고 걸어 잠근 그 불안함에서의 평안입니다. 여러분, 오늘 현실이 단단히 닫아놓은 삶의 문이 아닙니까? 닫아야만 하는 불안 아닙니까? 내일과 미래의 불안 아닙니까? 저는 한주간의 격정이 지나가고 이번 주는 그래도 마음의 안정이 되고 평안이 찾아왔습니다. 주님만 바라봅니다. 그런데 부활하신 주님의 위로와 용기와 격려가 있는 아침과 저녁의 평안이었습니다. 여러분들에게도 평안의 살롬이 충만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1-2. 목적이 있는 평안입니다. 두려움 이상의 평안으로 삶의 현장에서 무엇인가 하도록 부르심을 받는 일에 대한 용기와 격려와 목표에 대한 평안입니다. 그래서 요20;21절의 평안 뒤에 덧 붙여서 나도 너희를 이 땅에 보낸다는 말씀을 하십니다. 다시 보냄입니다. 제자들은 이미 주님 안에서 할 일이 있었습니다. 이 것을 알고 보냄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모두 내려놓았습니다. 다시 3년 이전으로 돌아갑니다. 여러분, 목표와 목적과 문제를 어떻게 처리해야 할까요? 삶의 목표를 어떻게 이루어 갈까요? 제자들은 주님이 안 계신 것 때문에 모든 목표를 내려놓고, 목적을 내려놓았습니다. 해야 할 일을 내려놓았습니다. 그래서 부활하신 주님이 먼저는 두려움과 의문 속에서 평안을 주시고, 두 번째로 소망과 목표 속에서 이루어 갈 것에 대하여 평안을 주시고, 이제 새 하늘과 새 땅의 축복을 위하여 사명을 부여받는 평안을 주십니다. again start입니다. 여러분, 신종 코로나19의 확산으로 삶의 활동이 위기를 맞았습니다. 지루한 싸움입니다. 하지만 다시 스타트해야 합니다. 함께 극복하고자 다시 시작해야 합니다. 비전교회가 다시 시작해야 합니다. 개척교회를 다시 시작하면 평안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코로나19로 스스로 고립이 되었습니까? 어떻게 해야 하나요? 주님으로부터 19절 평안으로 복을 받으시고, 21절의 평안으로 새롭게 전진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2. 부활하신 주님이 중요한 표현의 2번째는 먼저 갈릴리로 가시는 것 입니다. 여러분, 평안이 있어야 하는데 평안으로만 삶의 영역이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갈릴리가 눈에 들어와야 참 평안이 됩니다. 보이는 현상이 끝나고 새로움이 보여야지요. 주님은 제자들에게 내가 갈릴리에 갈 것이니까 갈릴리로 오라고 합니다. 무슨 말씀일까요?
2-1. 갈릴리는 시작을 하던 곳의 장소의 개념입니다. 꿈을 가졌던 그곳, 그러나 살아가면서 실패한 곳, 그 곳에서 다시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 곳이 어디입니까? 부활하면 갈릴리로 가시겠다고 하지 않았느냐 제자들에게 빨리 알려서 갈릴리로 가서 거기서 주님을 만나라, 그런데 새벽 미명에 부활하신 예수님을 경험한 여인들은 이 모든 일을 받아들이고 이해할 경황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여인들은 자기들에게 있었던 일을 제자들에게 알리는데 제자들은 삶의 터전이었던 갈릴리에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납니다. 그러면, 왜 하필 부활하신 주님은 평안을 말씀하시고 갈릴리에서 제자들을 만나기 원하셨을까요? 갈릴리와 부활은 어떤 연관이 있을까요? 왜 예루살렘이 아니고, 왜 여리고가 아니고 왜 사마리아가 아니고 왜 갈릴리입니까? 부활의 신앙이 의미를 갖기 위해서는 이것이 삶 속에 녹아져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먼저 현재 있는 자리에서 시작하는 것이 갈릴리입니다. 장소 개념입니다. 지금 내가 있는 곳이 실패의 자리이기도 하고, 낙심의 자리이고, 마지못하여 있는 자리일 수 있지만 그러나 바로 그 자리에서 내 자신의 삶을 수용하고 시작해야 합니다. 여러분, 제자들은 갈릴리로 가기 전에 적어도 한 번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러면 만난 그 자리에서 무엇인가를 시작해야 되는데, 예수님과 제자들 사이에 갈릴리에서 만나기까지 공백이 있습니다. 그러면 왜 제자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서도 그대로 그들의 삶의 현장일까요? 누구보다도 예수님의 부활을 기뻐했어야 할 제자들이 왜 이렇게 의기소침해 있을까요? 부활하신 예수님 때문에 사람들 앞에서 큰 소리를 치고 의기양양해야 하지 않습니까? 대제사장과 서기관들과 빌라도와 군중들 앞에서 당당하게 무엇인가 해야 되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런 것은 없고 오히려 제자들의 모습은 침울하고 믿지 못합니다. 그래서 3년 전에 하던 어부 일을 다시 시작합니다. 왜 그랬을까요? 바로 예수님이 돌아가시기 전 자기들의 잘못 때문입니다. 그렇게 예수님과 함께 생사고락을 같이 했지만, 예수님이 잡혀 가는 그 자리에서 모두 도망을 갔습니다. 고난당하시고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실 때까지 모두 떨고 숨었습니다. 바로 그런 때에 돌아가셨던 예수님이 직접 나타나시니까 기쁨보다는 양심의 가책과 면목이 없습니다. 이미 제자로서 자격을 잃었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런 제자들을 갈릴리에서 만나 주셨습니다. 바로 그들의 되돌아간 삶의 현장으로 주님이 직접 찾아오셨습니다. 그들의 하던 어부 일을 도와주시고 함께 식사를 하시며, 용서하고 허물을 덮어주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역시 실패와 실수와 아픔을 딛고 있지만 지금 있는 자리에서 다시 시작해야 합니다.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증인이 되라 하셨지요? 바로 그 땅 끝의 시작이 갈릴리입니다. 여러분, 아무리 아픔과 고통이 있어도 아무리 위대한 꿈을 품었어도 시작은 언제나 현재의 자리이고 답은 지금 있는 자리에 있습니다. 갈릴리는 지금 이 자리입니다. 저는 처음의 비전교회에서 주님의 음성을 듣고 다시 시작하려고 합니다. 아무리 어렵고 고통이 엄습하고 낙심이 다가오지만 비전교회를 상상하고 만드셨던 주님을 보면서 이 곳에서 다시 시작을 합니다. 힘드십니까? 어렵습니까? 혼자이십니까? 예수님의 음성을 들으시고 이 자리에서 시작을 하십시오. 이 것이 평안 다음에 오는 은혜입니다.
2-2. 갈릴리는 인생 밑바닥입니다. at the end입니다. 저나 여러분이나 늘 자책하는 것이 있지요? 시대를 읽어내는 판단미스와 게으름과 무능 때문에 언제나 계획했던 대로 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속상함이 있고 후유증이 있고 아픔이 있고, 괴로움이 있습니다. 악순환으로 이어지고 낙심하지요. 그런데 신앙과 부활이 가장 크게 적용되어야 할 부분이 바로 이 부분입니다. 여러분, 어제 못했던 일을 억지로 하지 마시고, 안 된 것 주님께 드리십시오. 억지로 돌려놓으면 무엇인가 한 것 같은데 나중에 보면 이루어 놓은 것이 없습니다. 여러분, 새 날이 있고, 새 달이 있고, 새 해가 있는 것은 다 이유가 있습니다. 만약 오늘 못한 것이 있다면 다시 시작하면 됩니다. 새 날은 어제 일을 잊고 다시 시작하는 날입니다. 새 달은 지난달을 잊고 다시 시작하는 것이고, 미래를 향하여 나아가면 됩니다. 그런데 이 사실을 알지 못하면 과거에 얽매이게 되고, 지금의 현실에 머물게 되어 한 치 앞으로 나갈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세상의 방법을 찾고, 우선순위를 잃어버립니다. 자기 상황에 합리적 해석을 가미해서 이것이 하나님이 주신 복이고 은혜라고 자위합니다. 밑바닥에서 해야 할 일을 감당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평안을 주셨지만 진정한 평안이 유지되지 못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그러면 어떻게 시작을 해야 할까요? 밑바닥부터 다시 시작을 하고, at the end에서 시작하면 됩니다. 갈릴리는 인생 밑바닥입니다. 자존심이 무너지고, 수치가 드러나고, 아픔의 고통이 이중 삼중으로 오는 그 밑바닥입니다. 갈릴리와 나사렛은 밑바닥입니다. 종교지도자들이 비웃고 돈 많고 권력있는 사람이 비웃던 곳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거기서 다시 시작하게 하시려고 갈릴리로 오래요. 여리고로 가지 말고 예루살렘으로 가지 말래요. 인생 구렁텅이고 일어날 수 있다고 생각이 들지 않는 때이고, 죽는 때입니다. 내 모습이 다 드러나는 때입니다. 그런데 부활하신 주님은 갈릴리로 오래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어떻게 할까요? 갈릴리의 인생 밑바닥에서 다시 시작하고, 갈릴리의 비전교회에서 다시 시작하는 평안을 위하여 갈릴리로 부르셨습니다.
2-3. 갈릴리는 처음 원칙으로 다시 시작하는 것입니다. 초심의 마음과 믿음으로 again입니다. 갈릴리는 처음의 장소입니다. 꿈을 심고, 비전을 가졌던 곳이 갈릴리입니다. 예수님께서 3년간 먹이시고 입히시고 기적을 보이시고 살렸던 곳입니다. 인생 풍랑을 잔잔케 하신 갈릴리입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의 역사가 갈릴리바다, 게네사렛 호숫가, 벳세다 광야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시작을 했으면 결과는 예루살렘이어야 하고, 하나씩 차지해야 되잖아요? 그런데 된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면 주님이 부활 하셔서 제자들과 함께 예루살렘으로 들어가고 여리고로 가시면 이해가 됩니다. 그런데 갈릴리로 오래요. 왜 그럴까요? 답은 처음 원칙에서 더 큰 것을 보고 이루기 위함입니다. 여러분, 갈릴리에서 제자들을 부르셨고, 그물을 씻었습니다. 바다 깊은 곳입니다. 그런데 주의 말씀에 의지하여 그물을 내렸더니 배에 가득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고 제자가 되고,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부활하신 예수님이 오늘 갈릴리에서도 제자들에게 배 오른편을 말씀합니다. 그물이 찢어지도록, 그래서 다른 배에 옮겨 싣는 경험을 합니다. 153이 여기서 나옵니다. 배 3척이 동원이 됩니다. 갈릴리, 처음 원칙에서 다시 시작을 하니까? 처음 갈릴리보다 더 큰 놀라운 역사를 경험합니다. 진정한 사람을 낚는 제자가 되고 오늘 이후로 가르쳐 지키게 하는 능력자가 갈릴리에서 만들어집니다. 여러분, 어디로 가시렵니까? 처음 원칙의 갈릴리입니까? 말씀을 의지해서 순수하게 순종했던 그 신앙과 그 믿음입니다. 처음 원칙의 갈릴리로 부르셨는데, 그 갈릴리에서 부르짖으면 됩니다. 렘29;11-13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은 내가 아나니 재앙이 아니라 곧 평안이요 너희 장래에 소망을 주려는 것이라. 너희가 내게 부르짖으며 와서 내게 기도하면 내가 너희를 들을 것이요 전심으로 나를 찾고 찾으면 나를 만나리라. 여러분, 비전교회로 오시랍니다. 처음과 초심의 은혜로 다시 소망을 갖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는 지난 화요일에는 교회 현관을 아름답게 도색을 했습니다. 그리고 수요일부터 교회의 오래된 부분이 나타나는 곳에 페인트칠을 했습니다. 아침 5시 반부터 새벽 기도와 묵상이 끝나면 바로 시작을 했습니다. 저녁과 밤에도 일을 했습니다. 별이 웃어주고 달이 비쳐주는 그 옥상에서 교우들을 보고 주님을 보았습니다. 교회건물을 구입했던 2007년에 하지 못했던 옥상 바닦 120평과 난간과 난간 밑과 누런 부분에 페인트칠을 했습니다. 화요일부터 금요일 저녁 7시에 끝이 났습니다. 구니꼬와 겐코 전도사님께서 목요일과 금요일에 아침 9시 반부터 오후 4시까지 힘겹게 도와주었습니다. 점심시간도 아끼기 위해서 스시 도시락으로 간편식을 했습니다. 그런데 페인트칠하는 갈릴리인 비전교회에서 주님을 다시 만났습니다. 어떤 어려움과 고난이 온다하더라도 처음 갈릴리를 잊지 않는 것입니다. 18리터짜리 4통과 10리터짜리 2통과 5리터짜리 4통과 1리터짜리 4통의 페인트칠을 했습니다. 힘들고 몸이 아프고 머리가 팅 하지만 거기서 새로운 갈릴리의 각오를 했습니다. 건설의 현장에서 다짐했던 초심을 잃지 말고 주님을 향한 헌신의 마음을 다시 되 새기고, 이 현장을 찾고 비전교회를 찾으시는 오직 부활하신 주님만 바라보자. 이 어두운 세상에서 몸부림을 치시는 분들과 방황하는 불쌍한 영혼들과 상처받고 가난하고 소외된 주님의 사람들이 있는 비전교회 성도들 입니다. 이 분들을 위로하고 내일의 소망을 갖게 해 주어야 하는데 열과 성을 다 바치라고 뜨거웁게 섬기라고 합니다. 이 것이 스스로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시고 그 많은 고난을 받으시고 부활하신 그리고 갈릴리를 먼저 찾아오신 그리고 저를 부르시고 구원하신 그 주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을 향한 초심의 마음을 일편단심으로 변치 말고 목숨 걸고 충성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처음 원칙의 갈릴리에서 다시 부르짖는 그래서 능력이 나타나고 소망이 이루어지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2-4. 갈릴리는 내가 살아야 하는 사명을 다시 발견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에 이 땅에 계셨던 것은 40일 입니다. 그런데 훨씬 더 큰 권능으로 힘 있게 일하실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았습니다. 대신 제자들에게 모든 민족으로 제자로 삼아 세례를 주고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고 유언하시며 승천하셨습니다. 주님의 하실 일을 제자들에게 모두 위임하셨는데, 이 위임하신 일을 하는 것이 사명이고 부활신앙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원래 죄인이고 죽었던 존재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우리를 살리셨고 소명하여 불러 주셨고 거기에 사명이 주어졌습니다. 저나 여러분 모두는 사명이 있습니다. 사명이 무엇입니까? 사명은 오늘 살아야 하는 이유이고, 오늘 존재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저나 여러분에게 살아야 할 이유가 있고, 나 때문에 살아나는 사람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살린다는 것은 쉽지 않고, 너무나 부담스럽습니다. 나 때문에 어떤 사람이 예수 믿고 영생을 얻는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나 때문에 주변이 조금이라도 변하고 공동체가 바뀌면 얼마나 좋습니까? 그런데 이 살리는 일은 관심과 격려와 용기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직분이 무엇입니까? 왕 같은 제사장, 거룩한 나라와 그의 소유된 백성입니다. 이 것을 어디서 확인하나요? 갈릴리입니다. 여기서 다시 시작할 수 있고 사명 따라 살 수 있습니다. 아직 끝이 아니고, at the end가 아닙니다. 세상 사람들은 at the end 라고 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인생은 주님 앞에 설 때에 결론이 나고 거기서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갈릴리에서 매듭을 만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갈릴리에서 사명을 재발견하시고, 힘 있게 감당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2-5. 갈릴리는 언제나 갈릴리입니다. 실패하고 죽을 수밖에 없는, 주님에게 십자가를 다시 지게 했더라도 중요한 것은 갈릴리입니다. 죽어도 갈릴리입니다. 왜냐하면 부활하신 주님이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엠마오 도상에서 두 제자와 베드로를 비롯한 모든 사람들이 갈릴리에서 주님을 만납니다. 그런데 한 사람이 빠져 있습니다. 누구일까요? 가롯 유다입니다. 가롯 유다는 새로운 갈릴리에 없습니다. 주님이 오시는 그 자리에 없습니다. 무슨 말씀입니까? 혹시 지금 하시고 있는 그 일이 잘못으로 드러나고, 가롯 유다와 같다하더라도 낙심하지 마시고, 자포자기하지 마시고, 자학하지 마시고, 갈릴리를 기억하고, 갈릴리로 가야 합니다. 왜냐하면 부활하신 이후의 갈릴리는 전혀 새로운 갈릴리입니다. 처음의 갈릴리는 한 사람이 낙오 했지만 새로운 갈릴리와 소망의 갈릴리는, 부활의 주님이 계신 갈릴리입니다. 거기에는 낙오자가 없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비전교회 교우들은 어떤 경우에도 부활의 갈릴리를 찾으시는 그래서 주님이 주신 평안이 사역으로 나타나는 복된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3, 세 번째 중요한 표현은 성령 받는 것 입니다. 여러분, 새로운 갈릴리에서 새롭게 인식을 하고 새롭게 보아야 합니다. 부활하신 주님이 내 곁에 있는 것을 확인해야 합니다. 그래야 시대를 읽고, 사람을 읽어 내고, 사건과 일을 해석합니다. 맡기신 세상을 향하여 나아가야 되잖아요? 그런데 문제는 주님이 지금까지는 함께 하셨지만 이제는 육체의 주님이 안 계십니다. 보이지 않습니다. 육체는 공간의 제한을 받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3-1. 성령의 조명입니다. 성령의 조명에 따라 목표를 향하여 순간순간 바라보고 헤쳐 나갈 수가 있습니다. 인도하심과 이끄심이 성령입니다. 분별과 기적을 이루는 것도 성령입니다. 여러분, 삶의 현실과 현장은 관계 아닙니까? 그런데 그 관계하는 일로 비전을 이루기도 합니다만 실패를 하고 아픔을 겪습니다. 피해를 주는 현실과 나를 넘어뜨리는 사람들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광명 성으로 위장하고 다가오는 사탄과 세상 어두움을 어떻게 가려내고 이겨 낼 수가 있을까요? 이런 것들을 어떻게 다루고 어떻게 해야 목표한 삶을 이룰 수가 있을까요? 성령을 받아야 다시 주어지고, 성령을 받아야 평안이 이어지고 성령을 받아야 갈릴리에서 시작하고 성령을 받아야 주어진 사명을 실천할 수가 있습니다. 요20;21절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보냄을 받는데 실천을 못합니다. 왜 그럴까요? 자아가 죽지 않았기 때문이고, 중생하지 않았기 때문이고, 그래서 평안이 없기 때문인데 여기에 성령을 받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평안과 갈릴리와 성령을 받는 이 3가지가 충족될 때에 보냄과 열매가 이루어집니다. 그래서 20;22, 이 말씀을 하시고 그들을 향 하사 숨을 내쉬며 이르시되 성령을 받으라. 지금 필요한 것은 바로 성령입니다. 성령을 받아야 평안이 지속되고 성령을 받아야 전도할 수 있고, 성령 받아야 죽을 수가 있고 성령을 받아야 비전을 이룰 수가 있습니다. 성령을 받지 않으면 평안은 이어지지 않고, 불평과 분노가 사라지지 않습니다. 원망과 불평이 없어지지 않고, 비교가 끊이지 않습니다. 여러분, 용서하고 용납을 해야 시온의 대로가 열릴 것이 아닙니까? 그래서 성령을 받아야 합니다. 여러분,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살아있는 내 자아를 죽는 것인데, 죽어야 거듭납니다. 내 자신의 힘과 능력으로 내 안에 있는 자아를 죽일 수 없습니다. 롬8;2,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성령이 임해야 참된 평안을 누리며 나의 삶을 위대하게 만들 갈릴리가 보이고, 거기서 결과를 만들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성령을 주시는 목적을 20;21절에 보냄과 파송, send로 말씀을 합니다. 어디로 보냅니까? 오늘의 혼란스러운 세상가운데의 보냄입니다. 예루살렘과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의 보냄입니다. 여러분, 영역은 널려있습니다. 세상 끝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을 받고 주님과 함께 세상이 감당치 못하는 믿음의 사람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3-2. 새로움과 안내를 위해서 성령입니다. 오늘 날 정확한 분별이 필요합니다. 여러분, 거짓 정보가 얼마나 무섭습니까? 지금 거짓 뉴스가 판을 칩니다. 그런데 우리 중 누구도 이런 위험으로부터 면제된 사람이 없습니다. 거짓 교리와 거짓 교사들의 뒤에 마귀, 사탄이 있습니다.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습니다. 그래서 마귀와의 싸움을 위하여 늘 정신을 차리고 경계를 하고 늘 깨어있어야 합니다. 어떤 때는 정면 공격해 오고, 어떤 때는 은밀히 공격을 하고, 어느 때는 가장 가까운 사람들과, 달콤한 말로 다가옵니다. 문제를 해결해 준다고 합니다. 돌이 떡덩이 되게 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것들을 접할 때 지혜롭게 분별할 줄 알아야 하는데 무엇으로 분별을 할까요? 성령으로 합니다. 그래서 부활하신 주님께서 성령을 받으라고 하셨습니다. 성령이 조명하면 새로움과 정확한 안내를 받습니다.
3-3. 나의 죄악과 허물의 문제 때문에 성령입니다. 요20;23절 너희가 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 여러분, 구원을 위하여 선결되어야할 문제가 허물입니다. 그런데 성령께서 이 문제를 친히 해결하십니다. 죄에 대하여 알게 합니다. 여러분, 허물이 있어도 성령이 충만하면 문제는 해결이 됩니다. 그런데 성령이 없으면 허물은 누적이 됩니다. 누적이 되면 방향도 모르고 진실이 무엇인지 모르다가 나중에 알게 됩니다. 그런데 그 때는 이미 아픔을 겪고 난 이후입니다. 평안이 지속되지 않고 사명을 모릅니다. 여러분, 풀 수 있는 권세와 하늘과 땅을 움직일 수 있는 권세가 저와 여러분에게 있습니다. 주님이 주셨습니다. 그런데 이 사역은 성령을 받아야 용서가 되고, 용납이 되고, 하늘과 땅을 움직이게 됩니다. 이제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평안과 갈릴리와 성령을 받아라. 이제는 주님께서 때를 따라 평안과 갈릴리를 말씀하고 성령을 받게 하십니다. 평안과 갈릴리는 성령으로 연결이 되어야 합니다. 신앙인은 평안과 갈릴리와 성령으로 살아야 하고, 평안과 갈릴리와 성령으로 푯대를 향해야 나의 삶이 좌우로 흔들리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 세 가지는 같이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가시는 그 길에 부활의 주님을 만나시고 주시는 평안으로 갈릴리에 가십시오. 부활의 주님이 계신 그곳으로 가야 합니다. 거기서 주님을 뵙고 주님으로 다시 사명을 확인하고 성령의 은혜를 체험하여 성령을 의지하면서 맡기신 여러분의 삶을 승리로 이끄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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