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승-대승 모두 하나의 강일 뿐
바다에 이르면 결국 물이요 불법
맹목적 殺佛殺祖는 대단한 착각
成佛作祖에 마음두고 공부해야
1938년 전남 장성에서 태어난 아이는 어려서부터 총명해 한학에 밝았다. 1954년 ‘오천년조선역사’라는 책에서 우연히 이율곡이 산사에서 공부를 했다는 대목에 ‘나도 입산하겠다’며 네 살 연상의 벗과 함께 만암 스님이 주석하던 백양사를 찾았다. 그의 얼굴을 살핀 만암 스님은 시 한수를 지어주며 입방을 허락했다.
“어린 나이에 중이 되려는가?…. 봄바람은 무슨 힘으로 사람들을 즐겁게 하는가? 물의 넋은 천연해서 어디든 맑아지네.(春風何力人人樂 水魄天然處處澄)/ 불법은 결코 속세의 문턱이 아니라 소심한 뜬 생각으로 오르기 어려워라.(佛法決非塵俗境 小心泛想必難登)”
그러나 며칠 후 동행한 도반이 “못 있겠다”며 하산해 함께 산문을 나섰다. 그는 이듬해인 1955년 7월 다시 해인사를 찾아 도원 스님을 은사로 사미계를 수지한 후 1956년 당대 선지식이었던 고봉 스님에게 가르침을 받기 위해 부산 범어사로 향했다. 그를 한 눈에 본 고봉 스님은 시 한수를 지어 보였다.
“속세에서도 승가에서도 구하지 말라.(不求於俗不求僧)/ 부처와 중생 원래 별것 아니네.(生佛元來無一能)/ 개중에 기특한 일을 알려면(欲識箇中奇特事)/ 바위 밑의 맑은 물만을 보아라.(但看岩下水澄澄)”
사미승도 시 한수로 화답했다.
“속세를 버리고 출가한 이 사미승은(捨俗出家求寂僧)/ 유능하면서도 또한 무능합니다.(多能中有亦無能)/ 구름 일고 먼지바람 불음 말할 것 없나니(莫言雲起塵風動)/ 지혜 달이 비출 때 마음 바다 맑으오이다.(慧月照時性海澄)”
이 사미승이 원조(圓照) 각성(覺性) 스님이다. 각성 스님은 만암 스님과의 첫 만남에서 ‘물의 넋은 천연해서 어디든 맑아진다’고 들었고, 고봉 스님과의 첫 만남에서도 ‘바위 밑의 맑은 물만을 보아라’는 가르침을 받았다. 이에 스님은 ‘먼지바람이 일지만 언젠가는 마음 바다를 맑게 할 것’이라며 겸손하면서도 당찬 의지를 내어 보였다. 이 속에는 ‘맑다’라는 ‘징(澄)’이 관통하고 있다. 각성 스님은 이후 지금까지 법호 법명에 걸맞게 ‘성품’을 관조하며 맑게 닦아가고 있다.
한 때 모르는 사람들이 ‘교를 버리고 선에 들어오라(捨敎入禪)’는 뜻을 잘못 이해해 교를 폄하한 적이 있었다. 이러한 교학경시 풍토는 승가는 물론 암암리에 불자들에게까지 스며들어 부처님 말씀을 경청하지 않았다. 그 여파인지 지금의 교학풍토도 제자리 잡으려면 갈 길이 멀기만 하다. ‘사교입선’이라는 말이 정말 있기는 있는 것일까?
“사교입선은 서산 대사의 선가귀감에 나오는 ‘방하교의 참상선지(放下敎義 參詳禪旨)’ 즉, ‘교를 잠시 내려놓고 선의 종지를 참구’하라는 뜻과 일맥상통합니다. 교를 버리라 한다 해서 필요 없다는 말은 아니지요. 교를 공부하면서 일대사를 마치면 구태여 선으로 들어갈 필요가 없다 하겠지만 교리만 알고 자기 주인공을 깨닫지 못했다면 교를 잠시 내려놓고 실참수행을 해 보아야 합니다.”
누가 지어 낸 ‘사교입선’인지는 분명치 않지만 차라리 ‘사교입선’ 대신 ‘방교입선(放敎入禪)’이라고 했으면 그나마 교학경시가 덜했을까! 당시 선가는 왜 ‘교에 의지해 선을 깨닫는다’는 ‘자교오종(藉敎悟宗)’ ‘의교오선(依敎悟禪)’을 심도 있게 가슴에 담지 않았을까! 각성 스님은 조주 스님의 무(無)처럼 『벽암록』에 나오는 공안만 참구하는 화두로 알고 있는 것도 큰 문제라고 본다.
“육조 혜능 스님도 『금강경』에 나오는 ‘머무는 바 없이 마음을 내어라’는 소리를 듣고 한 소식 했습니다. 임제종의 중봉 선사 역시 같은 경의 ‘여래의 위없는 바른 깨달음을 짊어진다(卽爲荷擔如來阿多羅三三菩提)’는 소리에, 규봉 스님도 『원각경』을 읽다 깨달아 『원각경소초』를 지었고, 천태지자도 『법화경』을 읽던 중 깨달았지 않았습니까? 이처럼 경을 공부할 때 돈오해 일대사를 마치면 되는 것입니다.”
경을 공부하다 막히는 일구일구도 화두가 된다는 설명이다.
“사람을 많이 죽여 손가락으로 꽃타래를 만들고 걸어 다녔다는 앙굴리마라가 발우를 들고 어느 장자집 문턱에 섰을 때, 집 주인 장자의 아내가 난산의 고통을 겪는 찰나였습니다. 그 집의 주인인 장자가 아내의 순산을 도와달라 간청했지요. 앙굴리마라는 ‘내 능력으로는 안 된다’며 부처님께 달려와 이 일을 전하니 부처님이 말씀하십니다. ‘나(앙굴리마라)는 성현의 법에 귀의한 이래 살생을 한 적이 없다 해라.’
앙굴리마라가 그대로 말하자 산모는 순산했습니다. 그 살인마가 살생을 안 했다 해서 죽을 뻔한 아이가 살아난 연유와 그 속에 담긴 부처님 도리를 단박에 알아차릴 수 있습니까? 모르면 참구해야지요. 그러니 이 경전의 일구도 화두입니다. 『선문염송』에도 나와 있지 않습니까? 역대 조사의 화두는 모두 부처님 말씀에 근거하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부처님이 열반회상에서 제자들을 향해 “만약 내가 멸도했다 한다면 나의 제자가 아니요, 내가 멸도하지 않았다 해도 내 제자가 아니다”고 했는데, 『능가경』에서도 ‘여래가 이 세상에 온 것도 아니고, 열반하신 것도 아니다’고 했다. 이 속에 담긴 의미도 생사불이(生死不二)와 공(空)을 이해하지 않고서는 헤아리기가 어렵다. 각성 스님은 그러나 삼매를 경유해야 하며 경전을 통한 삼매 역시 확실히 있다고 말한다.
“화엄삼매, 법화삼매, 유식삼매 등 많은 삼매가 있습니다. 그러나 단지 글자만 해석하려 들고, 소설 보듯 재미삼아 보며 아는 것으로는 삼매경지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산란심을 잠재우며 경전의 일구와 하나가 되어 참구해야만 가능한 일입니다.”
지난 40여 년 동안 대중들에게 강론을 펼쳤던 강백이 가장 중요하게 손꼽는 경전은 무엇일까? 아니, 어떤 경전부터 보는 것이 순서일까.
“불법을 하나씩 증득해 가는데 있어 첫 번째는 5계를 받으면서 그 속에 담긴 계의 의미를 가슴에 담아두는 일입니다. 이후 5계10선과 4선8정을 닦으며 인과법과 4제법, 12인연법, 나아가 구차대정까지 수행을 한 연후에 육바라밀 등의 보살 수행법을 닦아야 합니다. 이에 걸맞게 경전으로 말한다면 『아함경』부터 시작해 『해심밀경』과 『원각경』, 『능엄경』을 거쳐 『금강경』, 『화엄경』 등의 대승경전을 공부해 간다면 아주 유용할 것입니다.”
각성 스님은 불자들이 『해심밀경』과 『능엄경』을 소홀히 하는데 안타까움을 토로했다. 대승부에서는 법상종의 경전이라 해서 『해심밀경』을 좀 낮춰보는 경향이 있는데 그와 달리 이 경은 중도사상을 담은 요체로써 선교의 지침이 되는 하는 경전이라는 것이다.
“일심을 발한 자에게 『해심밀경』을 설한다 했습니다. 세속법에서 보면 우주만유 현상계는 물질과 정신의 이분법적 세계로 따로 각각 존재한다고 생각합니다. 이 경에서는 모든 경계는 공했고, 있다면 의식뿐이라는 일체유식(一切惟識)을 통해 아(我)를 철저하게 깨부수며 주관과 객관의 대립도 끊어지는 ‘아법이공(我法二空)’의 진리를 설하고 있습니다. 대승불교에 들어서기 전에 유식을 꿰뚫는다면 공(空)에 대한 이치를 자연스럽게 터득할 것입니다. 『해심밀경』은 우주만유를 보는 잣대요 나침반입니다.”
각성 스님의 『능엄경』 예찬론은 더욱 힘 있게 이어졌다. 수행을 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이 경을 보고 싶어 하지만 ‘소화엄경’이라는 별칭까지 갖고 있는 이 경의 방대함에 놀라고 그 경의 난해함에 또 한 번 놀라 몇 페이지 넘겨보지도 못하고 경을 덮는 경우가 허다하다. 각성 스님도 이 경의 정해(正解)본 10권을 내놓았는데 역작 중의 역작이다. 솔직히 400여 쪽 밖에 안 되는 요약본만 본 터라 이 경의 진수가 궁금하기만 했었다.
“어렵다 체념 말고 인내심을 갖고 공부해 보세요. 육도삼계, 수행50종변마사(五十種辨魔事·수행 과정 중 침해하는 50가지의 마장)와 10번의 견성도 밝히고 있습니다. 부처님 경지도 『화엄경』에서는 55위를 보이지만 이 경에서는 57위를 보이고 있고, 『금강경』에서는 9류중생을 말하지만 이 경은 12중생을 설하고 있습니다. 『법화경』「보문품」에서는 관세음보살 32응신에 대한 이야기만 하지만 이 경에서는 관세음보살의 이근원통(耳根圓通) 부분에서 32응신을 얻은 원인까지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화엄의 원융무애까지도 통찰할 수 있는 능엄경은 불교의 현문(玄門)을 여는 열쇠입니다.”
혹여, 우리는 경전을 접하는 순서조차 모르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해심밀경』과 『능엄경』을 뒤로 한 채 『금강경』과 『화엄경』을 이해하겠다는 것이 혹, 주객이 전도된 상황에서 역주행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불교에 입문한 초학자가 지금 말한 경전을 차례로 읽으면 그만큼 유용한 것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어느 경전을 먼저 보았다 해서 잘되고 못된 것은 아닙니다. 육조 혜능 스님이 『능엄경』을 보고난 후 『금강경』 일구에 개오하신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금강경』도 ‘여래가 대승을 발심한 자를 위해 설한 것이요, 최상승을 발심한 자를 위한 설 한 것’이라 했습니다. 『금강경』도 ‘공’이고, 『화엄경』도 ‘공’이요, 『해심밀경』, 『능엄경』 모두 ‘공’을 말하고 있습니다. 모두 부처님 말씀입니다. 소승경전, 대승경전 모두 하나하나의 강일 뿐, 바다에 이르면 결국 물이요 불법입니다.”
경전 택함에 순서가 그리 큰 문제가 없다면 경전보다 선어록에 치중하는 문제에 대한 스님의 견해가 또 다시 궁금했다. 사실, 방대한 팔만사천법문 보다는 선지가 출중하다는 선어록에 먼저 손길이 가는 것은 사실이기 때문이다.
“자신의 성향이 조사 일구에 닿아 있다면 경전 보다 선어록에 마음이 가는 것은 당연지사입니다. 그러나 맹목적이어서는 곤란합니다. 선어록에 적시된 문자에만 빠져 집착하면 부처님도 조사님도 죽여야 한다며 안하무인격의 사람이 되고 맙니다. 이쯤되면 착각도 이만저만이 아니어서 백약이 무효입니다. 물론 살불살조(殺佛殺祖)도 맞는 말이지만 어떤 경계에서 이런 소리를 하는지에 따라 다른 겁니다. 일단, 성불작조(成佛作祖)에 마음을 두고 병행할 수 있어야 합니다. 반대로 경전공부를 한 사람이 총정리 차원에서 선어록을 보는 것도 좋은 방법 중 하나라 봅니다. 선어록에는 분명 부처님과 역대 조사들이 전한 선지가 펄펄 살아 있거든요. 무엇이든 제대로만 하고 있다면 일정기간 동안 경전과 선어록 중 어느 한 곳에 치중한다 해서 큰 문제가 될 것은 아닙니다. 수행을 하며 선어록을 본다 해서 교학을 폄하하며 경전을 소홀히 하는 무지를 범하지 않으면 됩니다”
각성 스님은 경전공부나 참선수행을 함에 있어 궁극에 있어서는 삼매를 경유해야 한다는 사실만은 잊지 말아야 한다는 당부와 함께 어느 때든 ‘염불수행’도 하라고 권했다. 그 이유를 묻자 이렇게 답했다.
“역대 선사가 그러했듯이 우리도 선지식께 법을 묻고, 심지법문을 듣지요? 아미타부처님 회상에서 설해지는 법문은 어느 정도이겠습니까!”
선교일치를 확연하게 내어 보이고 있는 스님의 일구가 지금도 귓가에 잔잔한 파문을 던지고 있다.
채한기 상임 논설위원 penshoot@beopbo.com
각성 스님은
각성 스님은 18세에 출가해 관응, 운허, 고봉, 탄허, 효봉 등 고승대덕의 가르침과 공부를 통해 제자백가와 구류철학은 물론 유불선을 회통했다. 1960년 영천 은해사 강주를 시작으로 한글대장경 250여 권을 번역하고 대장경 300여 권을 증의(證義)했으며 『능엄경정해』(10권), 『화엄경론회석』(7권), 『입능가경』(10권), 『법화경』(7권), 『열반경』(40권), 『대도직지』, 『중용직지』, 『불조직지심체요절』, 『유식론』, 『노자도덕경감산해』, 『장자남화경』 등 이루 헤아릴 수 없는 많은 저서를 내보인 한국불교의 대강백이자 수행에도 매진하고 있는 선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