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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 18:1-14
▣ 교회와 천국에 대한 가르침-마태복음 18장-
1. 큰 자에 대한 교훈(18:1-14)
1)제자들의 질문(1절)-이 질문은 최근에 있었던 베드로, 야고보, 요한의 변화산 상의 경험이나 성전 세금과 관련된 베드로의 경험에 자극을 받아 하게 되었을 것이다. 다른 제자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편애“를 하며 자기들을 무시한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물론 우리들은 제자들에게 왕국이 임할 것이며 그들도 왕국에 있게 될 것이라는 주님의 말씀을 믿으라고 권하고 싶다. 하지만 높은 지위와 위대해질 것을 추구하는 것은 영적인 것이 아니다(롬 12:10/롬 12:16).
2)실물 교습(2-6절)-그리스도는 어린 아이를 위대함의 예증으로 삼으신다. 명예는 겸손에서 온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올리시기 전에 우리는 낮아져야 한다(벧전 5:5-6). 위대한 성도들은 모두 겸손한 성도들이었다. 어린 아이가 죄가 없거나 완전한 것은 아니지만 마땅히 이루어져야 할 그리스도인의 생활의 특성들을 보여 준다.
즉, 어린 아이는 잘 배우며 요구하는 것이 단순하다. 또한 기대하는 마음을 가지며, 그는 자기의 필요를 해결하기 위하여 아버지를 의존한다. 물론, 우리가 어린 아이들이 되는 유일한 길은 거듭나는 것이다(요 3장).
3)경고(7-10절)-“이 소자 중의 하나“라고 하실 때 어린 아이들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들을 뜻하는 것이다. 다른 신자를 걸려 넘어지게 하는 것은 무서운 일이다(롬 14:1-23/고전 8:1-13). 몸의 지체들이 죄를 짓게 할 때는 “잘라 버리라“고 그리스도께서 명령하시는 것은 문자 그대로 말씀하고 계신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죄는 손이나 발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서 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잘라 버리라“는 명령에서 주님은 죄를 철저하고 완전하게, 무자비하게 다루라는 말씀을 하고 계신다. 우리는 “죄를 가지고 놀아서는 안 된다.“ 또는 오랜 시간을 두고 제거하려고 노력해서는 안 된다. 우리의 죄를 정직하게 직면하고 고백하고 버려야 한다.
4)비유(11-14절)-11절을 누가복음 19장 10절과 비교한다면 “구한다“(to seek)는 말이 빠져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는 어린 아이들에 대하여 말씀하고 계시며 어린 아이들은 책임 있는 나이가 된 후 잃어진 영혼이 되기는하지만, 어른들처럼 멀리 방황하는 경향이 있지는 않다. 이들 역시 선한 목자에게 구원을 받아야만 한다.
이 전체 구절은 어린 아이들의 감정을 상하게 하지 말 것(6절), 업신여기지 말 것(10절), 그리스도 밖에서 멸망받지 않게 할 것(14절)을 경고한다.
주님은 어린 아이들이 왜 중요한지 몇 가지 이유들을 말씀하신다. 이들은 참된 위대함의 본보기이며(4절), 그리스도를 대리한다(5절). 천사들이 아버지 하나님 앞에 그들을 대신한다(10절). 그리스도는 그들을 구원하시기를 원하시며(11절), 그들이 구원을 받는 것이 아버지 하나님의 뜻이다(14절).
부모들이(또는 다른 어른들이) 자녀들에게 거침이 되어 구원의 길을 잃게 하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가정에서 좋은 본보기가 되는 것은 얼마나 중요한 일인가. 타락하는 부모들이나 세상적인 마음을 가진 어른들이 심판 때에 많은 것으로 책임추궁을 받을 것이다."
2. 용서에 대한 교훈(18:15-35)
그리스도는 “가족의 문제“를 다루시며 이제 어린 아이로부터 형제 사이의 관계로 옮겨 가신다. 만일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완전하다면 이러한 교훈을 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우리는 실패하며 죄를 짓기 때문에 교회라는 가정을 행복하고 거룩하게 유지해 나갈 방법을 알아야 할 필요가 있다.
1)교회의 징계(15-20절)-권징의 형식이 명백하게 나와 있다. 먼저 개인적으로 면담을 하고, 다음으로 두 세 증인을 데리고 가며, 다음으로 그 문제를 교회에 상정한다.
“네 형제를 얻는다“는 목적에 유의하자. 교회의 징계의 동기는 사랑이다. 우리는 죄를 범하는 형제를 도와야 한다.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중심에 계시기 때문에(20절) 교회가 순종적이고 순전해야 한다는 것은 중요하다. 우리의 태도는 체포하려고 나온 경찰의 태도와는 달라야 한다. 의사가 그리스도의 몸의 상처를 치료하려는 것같아야 하며, 이 상처를 그냥 두면 병과 죽음을 퍼치게 될 것이다.
18절은 “매고 푸는 일“이 이 징계의 문제에 하나님의 말씀을 적용하는 일과 관계가 있음을 나타낸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5장에서 고린도의 범죄한 형제를 “매고“, 고린도후서 2장에서 그가 자신의 태도를 표명한 후에 “푼다“ 이것은 영혼의 영원한 운명과는 관계가 없는 일이다.
19절은 기도가 교회의 징계의 중요한 요소임을 암시하고 있다. 물론 우리는 위반자와 우리 자신들을 위해 기도함으로써 영적으로 그를 지원하기를 원한다(갈 6:1). 교회의 징계에 대한 다른 구절들을 위해서는 로마서 16장 17절과데살로니가후서 3장 14절, 그리고 고린도전서 5장을 보자.
2) 마음으로부터의 용서(21-35절)-베드로는 일곱 번 용서한다는 말을 함으로써 영적으로 특출하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유대의 랍비들은 세 번으로 충분하다고 말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용서에 제한이 없다고 말씀하셨다. 왜냐하면 참 용서는 사랑하는 마음에서 오며, 사랑은 잘못한 일들을 기록해 두지 않기 때문이다(고전 13장).
비유가 주는 교훈은 명백하다. 왕이 그 종의 천 이백만 달러의 빚을 탕감해 주었으면 그 종은 친구의 15달러 정도는 탕감해 줄 수 있어야 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용서해 주셨기 때문에 우리도 다른 사람들을 용서한다(엡 4:32/골 3:13).
이 문제는 구원과는 아무 관련이 없다는 것을 명심하자. 이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된 사람 사이의 용서에 관한 문제이며 하나님과 죄인 사이의 문제가 아니다. 34절을 지옥이나 영원한 저주로 보지 말자. 하나님은 물론 용서하지 않는 마음을 숨기고 있는 신자를 처리하실 것임은 물론이다.
어떤 사람이 구원을 받았다는 증거 중의 하나는 그가 형제를 사랑하는 것이다(요일 3:10-17). 다른 사람들을 용서할 수 없는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께서 그들을 위하여 십자가에서 행하신 일들을 잊어버린 사람들이다. 교회는 조용히 자라나 전체의 친교를 타락시키는 “괴악하고 악독한 누룩“을 삼가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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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가적 연구
1) 18장 3절의 “돌이켜“라는 말은 회심한다(converted, to turn)는 뜻이다. 그리스도인조차 돌이켜야만 한다! 예수께서는 베드로에게 사단을 따르는 데서 돌이켜 주님을 따르라고 말씀하셨다(눅 22:32). 죄인들이 죄로부터 돌이켜 그리스도께 합할 때 그는 회심하는 것이다.
2) 천사들은 하나님의 성도들을 위하여 특별한 사역을 한다(마 18:10/히 1:4/시 34:7/시 91:11 참조). 죄인들이 구원받으면 천사들이 기뻐한다(눅 15:7-10). 사도행전 12장 15절과 더불어 마태복음 18장 10절은 “보호하는 천사들“(수호 천사)이라는 개념의 기초가 되어 왔다.
천사들이 신자들을 보호한다는 사실은 하나님의 말씀에서 명백하게 가르치고 있다. 그러나 각 신자들에게 할당된 특별한 천사들이 있다는 말은 명확하게 나와 있지 않다."
▣ 이혼과 부자들에 대한 가르침-마태복음 19장-
1. 결혼과 이혼(19:1-15)
바리새인들은 결혼에 대한 질문을 했는데, 이 문제는 그 시대에 있어서 격심하게 논의되고 있는 문제 중의 하나였다. 그들은 그리스도가 꼼짝하지 못할 곤경에 빠지고, 사람들이 주님을 떠나 흩어지게 되기를 원했다.
랍비인 힐렐을 따르는 사람들은 신명기 24장 1절을 어떠한 이유에서라도 아내와 이혼할 수 있다고 해석하였고, 랍비 샴마이의 추종자들은 결혼은 간음 사건이 있을 때에만 파기될 수 있다고 엄격한 해석을 했다. 예수께서는 랍비의 가르침도, 모세의 가르침도 초월하여 에덴 동산에서 설정된 결혼의 근본 법칙을 상기시키셨다. 이 구절은 결혼의 세 가지 “법칙“을 논의한다.
1)에덴에서의 본래의 법칙(19:4-6/창 1:27-28/창 2:18-25)-하나님은 결혼을 모세의 율법이 있기 오래 전에 에덴에서부터 창설하셨다. 성경은 최소한 네 가지의 결혼의 이유와 목적을 제시한다.
-경주를 지속하기 위하여(창 1:28)
-동반자 관계와 즐거움(창 2:18)
-간음을 피하기 위하여(고전 7:1-6)
-그리스도와 그의 교회와의 관계를 예시하기 위하여(엡 5:22-23).
하나님의 본래 목적은 한 남자가 한 여자와 결혼하는 것이며, 죽음만이 결합을 깨뜨릴 수 있다(롬 7:1-3). 결혼이란 근본적으로 육체적인 결합이다(“둘이 한 몸이 될찌니“). 물론 마음과 정신의 결합이 되어야 하는 것이기도 하다. 결혼을 통한 결합은 가족보다도 더욱 강하게 묶여진다. 왜냐하면 남자가 부모를 떠나 아내에게로 가서 결합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신성한 결합이다. 예수께서는 남자와 여자를 짝지우시는 분이 하나님이심을 말씀하셨다.
2)임시적인 모세의 율법(19:7-8/신 24:1-4)-죄인들은 언제나 핑계들을 찾아내는데, 바리새인들은 신명기 24장 1절을 적용하여 그리스도는 모세와 서로 대립된 것을 나타내려고 하였다. 모세가 왜 이런 법을 주었으며 율법에는 실제로 어떻게 언급되어 있는지를 알아보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모세는 이혼을 명령하지는 않았다. 그리스도는 하나님께서 “인간의 마음의 완악함을 인하여“ 허용하셨다고 말씀하셨다. 모세가 이혼한 여성에게 이혼 증서를주라고 명령한 것은 그녀를 보호하며, 변덕스러운 이유로 이혼하려고 할 때 이 일을 좀 더 어렵게 하기 위함이다. 그녀가 첫 남편에게 돌아오는 것은 금지되지만 다른 남자와 결혼할 수는 있음에 주목하자. 이 구절(수치되는 일)의 문자적인 뜻은 “노출의 문제“라는 뜻인데 여자 편에서의 부도덕을 암시하고 있다.
이 법은 이스라엘을 위한 임시적인 것이었으며 모든 사람들을 위한 연속적인 것은 아니었다.
3)결혼에 대한 그리스도의 법(19:9-12)-그리스도는 음행의 경우에만 이혼이 허가된다고 말씀하신다. 이것은 몸에 대하여 죄를 짓는 것이며(고전 6:15-18) 결혼을 통하여 하나가 되는 일, 곧 육체의 결합에 대한 범죄가 된다.
성경에서 사용된 “음행“이란 단어는 여러 가지 성적인 죄들을 포함하고 있는 듯하다. 마가복음 7장 21절에는 “음행들“(복수)이라고 되어 있으며, 사도행전 15장 20절과 로마서 1장 29절, 고린도전서 6장 13절은 “음행“이 일반적으로 성적인 죄들을 말하는 것으로서 대체적으로는 결혼하지 않은 사람들에 의해 저질러 지는 죄, 또는 결혼한 사람들의 간음을 말할 때 사용된다고 보고 있다. 어떤 경우이든 예수께서는 다른 이유로 이혼을 하고 쌍방이 다시 결혼하는 것이 간음의 죄가 된다고 말씀하신다(마 5:27-31/눅 16:18/막 10:1-2). 그러므로 결혼의 결합을 깨뜨릴 수 있는 두 가지 길은 죽음과 음행뿐이다.
제자들의 반응을 보아서는 그들이 결혼에 관한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지 못한 것같다(10-12절). 성경은 독신 생활을 가르치는 것은 아니지만 모두가 결혼을 해야 할 것으로 보지는 않고 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7장 7절에서 이러한 뜻을 비친다. 바울은 하나님께 더 잘 봉사하기 위하여 결혼을 절제한 것 같다. 그러나 이것은 주님의 모든 종들에 대한 하나님의 뜻은 아니다. 사람은 자기 삶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발견해야만 하며, “주님 안에서 결혼해야 함“(고전 7:39)을 명심해야 한다."
2. 부자와 구원(19:16-30)
이 구절들은 다섯 개의 질문들과 이 질문들에 대한 그리스도의 답변을 맴돌고 있다.
1)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하리이까?(16-17절)-이 부유한 관리가 겸손하고, 정직하며, 영적인 진리를 갈망하고, 용기가 있음을 칭찬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스도의 응답은 주님 자신의 신성에 강조를 두는 경향이 있었다. “나는 선하다. 그렇지 않으면 나는 하나님이 아니다.“ 주님은 이런 뜻으로 말씀하신 것이다. 주님은 그 젊은이가 지금 하나님을 상대하고 있으며, 단순히 인간으로서의 율법선생을 대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기를 원하셨다.
2)어느 계명이오니까 ?(18-19절)-그리스도께서 그에게 율법을 지키라고 하신 것은 율법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기 때문이 아니라, 은혜로 구원을 받아야 하겠다는 생각이 들기 이전에 율법으로 말미암아 죄를 깨달아야 하기 때문이다. 이 젊은이는 율법을 알았는데, 그 율법은 그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몽학선생으로서 작용하였다(갈 3:24). 이제 율법은 거울로서의 역할을 하여(약 1:22-25) 젊은이에게 참으로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보여 준다.
그리스도께서 안식일을 지키는 문제에 대해서는 아무 말씀이 없으셨던 것에 유의하자. 십계명 중에서 아홉 계명은 신약에 반복되고 있으나 안식일에 대한 계명은 없다. 이 계명은 의식을 위한 율법으로서, 도덕률이 아니다.
3)아직도 무엇이 부족하니이까?(20-22절)-이 젊은이가 적어도 외적으로는 계명들을 지켰음을 의심할 만한 아무런 이유가 없다. 하지만 하나님의 완전한 율법에 직면하여 “탐내지 말라“, “내 앞에 다른 신을 두지 말라“는 크신 계명에 대하여 생각해 보았어야 할 것이다. 그에게 있어서 부유함은 그의 신이었다. 그런데 그는 그것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예수께서 그에게 모든 것을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라고 말씀하신 이유는 무엇인가? 이렇게 하여 구원을 받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이 질문은 그의 참된 문제를 지적해 내었다. 그는 욕심이 많았다. 그리스도는 범죄한 우물가의 여인에게 남편을 불러오라고 말씀하셨다. 이 명령이 그녀로 하여금 고백과 회개의 자리에 이르게 한 것이다. 유감스럽게도 젊은 관리는 죄를 고백하거나 마음을 고치지 않았다. 그는 슬프게 떠나갔으나, 요한복음 4장에 나오는 여인은 기쁨으로 떠나갔다.
4)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으리이까?(23-26절)-제자들은 놀랐다. 부자가 구원을 받을 수 없다면 누가 구원을 받을 것인가? 그들은 부유함이란 삶에 대한 하나님의 축복을 의미한다는 구약적 사상에 사로잡혀 있었다. 마가복음 10장 24절은 부자들이 자신의 부를 의지하기 때문에 구원받기 어렵다는 것을 시사한다.
디모데전서 6장 6-10절에 있는 사도 바울의 권고를 보자. 하나님은 부자가 하나님을 믿고 신뢰할 때에 그를 구원하실 수 있다. 하나님은 부자인 아브라함을 구원하셨고 니고데모와 아리마대 요셉을 구원하셨다.
5)우리가 무엇을 얻으리이까?(27-30절)-베드로는 자신과 부자 관원을 재빨리 비교하였다. 그리고는 자신이 스스로 희생하였음을 지적한다. 예수께서는 자기에게 속한 자들에게 그들이 왕국시대(“재생“/ 이 땅이 “다시 태어나는 때“)에 보상을 받게 될 것임을 부드럽게 확신시키신다.
그러나 스스로 “첫째“가 되려 하지 말 것을 조심시키신다. 왜냐하면 “처음된 자“는 “나중된 자“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주님은 이에 대해 다음 장에 나오는비유를 예로 들어 봉사의 동기가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임을 보여 주신다.
만일 베드로가 약속된 상급 때문에 그리스도께 봉사한다면 마음과 동기를 검토해 볼 필요가 있다. 다행스럽게도 베드로는 19장의 “나는 얼마나 얻을까?“라는 태도에서 사도행전 3장 6절의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의 태도로 성장하였다. 우리도 그러해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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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 20:1-16
▣ 일꾼에 대한 비유-마태복음 20장-
이 비유와 그 다음에 나오는 사건들은 19장 16-30절에 나오는 젊은 부자와의 만남에서 생겨난 것이다. 이 비유는 처음과 나중에 대한 주님의 역설적인 언급을 주께서 설명하시는 것이다(19:30/20:16).
1. 포도원의 비유(20:1-16)
1)배경-부자 관원은 자기 소유를 포기하고 그리스도를 따를 것을 거절하였다. 그래서 주님은 부유함의 위험에 대하여 제자들을 경계하신 것이다. 베드로는 자신과 그의 동료들이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좇은 것을 자랑하며 담대하게 물었다. “우리가 무엇을 얻으리이까 ?“
이 질문은 동기가 잘못되었음을 드러내었다. 그가 그리스도를 섬긴 것은 무엇을 얻을 수 있기 위함이었고 충성과 사랑의 동기에서 나온 것이 아니었다. 그리스도는 사람들이 보기에 “처음된 자“들은 최종적인 계산에서 “나중된 자“가 될 것이라고 경고하셨다.
2)의미-이 비유에 나와 있는 모든 것이 무엇인가를 의미한다고 해석해서는 안된다.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시려는 주된 영적인 진리는 하나님께서 그의 종들에 대하여 그 봉사의 동기에 따라서 하나님의 뜻하신 대로 다루실 권한이 있다는 것이다.
이 비유는 구원에 관한 것이 아니라 봉사에 관한 것이다. “데나리온“은 구원이나 영생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구원이란 공로에 의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엡 2:8-9/딛 3:5-6 참조).
그리스도는 봉사에 대한 상급을 말씀하신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에게 그들의 섬김에 따라 다르게 보상하실 것이다(고전 3:8/요 4:36). 만약 “데나리온“이 상급을 나타내는 것이라면, 하나님은 공정하지 못한 분이시다. 모든 일꾼들이 동일한 보상을 받았기 때문이다!
20장 10절을 19장 27절에서의 베드로의 말과 연관시키면 이 비유의 교훈을 알 수 있다. “첫번째 온 사람들“, 즉 처음된 자들은 그들이 더 많이 받게 되리라고 생각하였다. 베드로가 하려는 말이 그것이 아닌가? 그는 “우리가 모든 것을 버렸는데, 우리는 무엇을 얻게 됩니까?“라고 말했다. 그는 분명히 자신에게 “우리는 더 받을 것이 분명해!“라고 말했을 것이다. 그리스도는 베드로에게 다음의 사실을 가르쳐 주셨다. “하나님은 그의 종들에게 자신이 기쁘신대로 대할 권리가 있으시며, 그릇된 동기(악한 소견 / 15절)는 죄이다.“
3)생활-그리스도는 우리를 불러 주님을 위해 일하게 하셨다. 해야 할 일이 많이 있는데도 하루 종일 빈둥거리고 서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있다는 것은 참으로 잘못된 일이다. 이 비유는 우리가 상을 위해서가 아니라 사랑과 충성에서 그리스도를 섬겨야 함을 상기시킨다. 상을 받는다는 것은 죄가 아니다. 하나님은 충성스러운 종들에게 은혜로 상을 주실 것이다(고전 3:12-15). 우리의 마음에 상 자체가 아니라 상 주시는 이가 채워져야 한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의 봉사 사역을 위한 우리의 동기를 살펴보아야 하겠다. 잘못된 동기가 있으면 일이 잘 되었다고 해도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우며 우리에게서 축복을 훔쳐간다. 우리가 칭찬하는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의 심판대에서 최종적인 계산을 할 때에 그들의 동기가 잘못되었기 때문에 “나중된 자“가 될 것을 생각할 때 숙연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우리는 동기를 판단할 수는 없다(마 7:1-3). 그러나 우리의 마음을 판단할 수는 있다. 이 모든 일들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자. 우리는 주님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2. 명예를 구하는 기도(20:17-28)
1)알림(20:17-19)-이 구절은 그리스도께서 그의 제자들에게 십자가를 지실 일에 대하여 세번째로 알리는 구절이다(마 16:21-/마 17:22-23). 주님은 예루살렘에서 맞이하게 될 위기에 대처하여 그들을 준비시키셨다. 주님이 첫번째로 십자가에 대하여 말씀하셨을 때 베드로가 주님을 힐책했었다. 그런데 이번 경우에는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가 이기적인 기도를 가지고 나왔다. 우리는 십자가의 멧세지를 이해하는 데 얼마나 느린가!
2)요청(20:20-21)-이 여인의 주님께 대한 믿음과, 또한 마태복음 19장 28절에 나오는 왕국의 약속을 믿고 신뢰하는 것은 칭찬할 만하다. 그러나, 그녀의 동기는 옳지 않았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영광을 위하여 구하지 않고 자기 자신을 위하여 구했기 때문이다.
3)응답(20:22-23)-예수께서는 그 어머니에게 말씀하시지 않고 제자들(야고보와 요한)에게 말씀하셨는데 이것은 그들이 어머니를 졸라서 구하게 한 것임을 암시해 준다. 물론, 그들은 예수께서 “잔“과 “세례“(침례)라고 말씀하실 때 무슨 뜻인지 몰랐다. 잔과 세례(침례)는 갈보리에서의 주님의 고난과 죽음을 가리키는 것이었다(26:39-42/눅 12:50 참조).예수께서는 그들도 주님의 잔과 세례(침례)를 맛볼 것이라고 약속하신다. 또한 맛본 것이 사실이다. 야고보는 첫번째로 순교한 제자였다(행 12:2). 요한도 참혹한 박해를 받고 밧모섬에 유배당하였다(계 1:1-).
우리는 어떻게 기도해야 하는지, 주께서 어떻게 응답하시는가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주께서 우리가 했던 말 앞에 우리를 세우실 것이다(전 5:1-6).
4)결과(20:24-28)-“작은 불이 어떻게 많은 나무를 태우는가!“라고 야고보서 3장 5절은 말한다! 신자 한 사람의 입장에서 나온 이기심이 다른 사람의 삶에 괴로움을 끼치는 원인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이 기회를 사용하여 제자들에게 겸손에 대하여 가르치셨다. 진실로 위대한 사람은 다른 사람들을 섬긴다. 그리스도 자신은 이 교훈의 본보기이셨다(빌 2:1- 참조). 이 세상의 사람들처럼 “주인 정신“을 행사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생활 정신에 있어서는 이질적인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지도자들이 “감독의 역할“을 하지만(행 20:28/벧전 5:2), 그들은 자기 뜻과 교만으로 다스리지 않고 “목자들 밑에 있듯이“ 겸손하게 치리한다."
3. 병고침의 기적(20:29-34)
마가복음 10장 46-52절은 소경이 한 명이었음을 시사하는 반면, 마태복음은 두 사람이라고 언급한다. 두 사람 중에서 바디매오(마가복음에 언급된)가 더 잘 알려진 사람이었던 것 같고, 그가 예수께로 인도되어진 사람인 듯하다.
이 기적은 구원의 아름다운 상징이다. 그들은 눈먼 소경들이었으며 모든 잃어버려진 죄인은 소경이다(고후 4:1-6). 이들은 가난한 거지들이었으며, 잃어버려진 죄인들은 그리스도를 떠나 빈곤으로 괴로워하고 있다. 그들은 인간의 눈을 뜨게 할 유일한 분이신 그리스도께 외쳤으며, 주님은 그들에게 자비를 나타내 보이셨다. 그들이 고침을 받은 것은 기도를 했거나 소리를 질렀기 때문이 아니었다. 군중들은 그렇게 하지 못하도록 막으려고 했다. 오늘날 세상은 죄인들이 그리스도께로 오지 못하게 하려고 한다. 그리스도께서 손을 대심으로 그들을 고치셨다. 이들은 그리스도를 따름으로써 삶이 변화된다는 것을 입증하였다.
여기 경륜적인 한 교훈이 있다. 소경들은 예수께서 다윗의 자손이심을 알고 있었으나, 이 민족은 바로 다음 장에서 주님을 거부한다. 이 나라는 소경이었고(고후 3:14-16/롬 11:8-10) 왕을 거절함으로써 소경으로 남아 있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