뜻을 정한 자
단1:8-16
하나님께서 당신을 위하여 축복의 새역사를 시작하셨습니다. 아멘
제가 새해 신년예배를 드리고 거의 두달 만에 예배를 집례하게 되니 너무나도 감격스럽고, 그동안 분명 어려운 시간이었을텐데 변함없이 교회와 예배를 지켜주신 성도님들께 감사드립니다. 로마서 말씀에 사랑의 빚 외에는 지지 말라 했는데 제가 요즘 엄청난 빚쟁이로 되었습니다. 빚 갚을 날이 하루라도 빨리 오기를 소원합니다.
오늘은 다니엘의 이야기로 말씀을 나누겠습니다. 전에도 말씀 드렸지만, 구약 역사서는 항상 배경을 말씀 드려야 하는데 전하는 저도 힘들지만, 듣는 여러분도 힘들 것입니다. 그래도 고개를 끄덕이면서 들어 주시기 바랍니다.
다니엘은 주전 600년 중반에 남유다에서 출생합니다. 그 당시 유다의 주변은 3개의 강대국들, 애굽, 앗시리아, 바벨론이 전쟁을 벌이고 있던 때였습니다. 저희의 조국 대한민국이 주변 강대국들 사이에서 당하는 고통과 비슷했다고 보시면 됩니다다. 남유다는 20명의 왕들이 있었는데, 16대 왕이었던 요시야은 남유다의 3대 선왕으로 뽑힐 만큰 신앙으로 나라를 잘 다스리고 있었지만, 주전 609년에 있었던 애굽과 앗시리아의 전쟁 때에, 애굽과의 전투에서 전사를 당하고 맙니다. 이때부터 남유다는 멸망의 길로 급격하게 넘어갑니다. 주전 605년, 603년 587년, 세 차례에 걸쳐 바벨론의 공격을 받았고, 결국은 마지막 왕 시드기야 때인 주전 587년에 멸망하게 됩니다. 이때에 바벨론은 예루살렘에 살고 있던 왕족들과 귀족들 그리고 잘생기고 똑똑한 소년들을 포로로 잡아 가게 됩니다. 다니엘은 주전 605년 1차 포로기에 잡혀갔던 사람입니다.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은 그러한 포로 중에서 왕궁에서 쓸만한 사람들을 뽑아, 그들의 이름을 바꾸고, 왕이 먹는 음식을 먹이고, 왕이 입는 옷을 입히도록 했습니다. 느브갓네살 왕이 포로들에게 잘해주는 이유는 그들이 좋아서가 아닙니다. 남유다의 미래를 책임질 젊은이들의 마음과 영혼, 그들의 신앙을 깨드리고 빼앗고자 하는 교묘한 술책이 그 안에 담겨 있었던 것입니다.
세상은 기독교인의 신앙과 마음을 빼앗기 위하여 강하게 달려들기도 하지만, 느브갓네살의 정책처럼 달콤한 유혹으로 다가올 때가 있습니다. 이러한 유혹 앞에 서 있는 다니엘은 그 강렬한 유혹을 이긴 자가 되었습니다. 다니엘의 결단과 승리를 보면서, 신앙인으로써 세상을 살아갈 지혜, 그리고 그 결과로 주어질 행복을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첫째, 그는 뜻을 정하였습니다.
8절에 “다니엘은 뜻을 정하여 왕의 진미와 그의 마시는 포도주로 자기를 더럽히지 아니하리라 하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굉장한 유혹이 다가 올 때에 다니엘은 뜻을 정했다고 했습니다.
다니엘이 정한 뜻은 왕궁의 엄청난 음식을 거부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단순하게 음식을 안먹겠다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가 뜻을 정했다는 것 안에는 엄청난 싸움이 담겨 있습니다.
아브라함 매슬로우(Abraham H. Maslow)의 욕구 5단계설[ hierarchy of needs]이란 이론적인 측면에서 분석해 보았습니다. 욕구 5 단계설에 의하면 사람의 가장 일차적인 욕구이며 본능은 먹고 자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식욕은 인간이 가진 가장 일차적인 본능이고, 인간은 누구나 이 본능에 충실하게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정말 죽을 것 같이 힘든 일이 와도 사람은 자야 하고요, 먹어야 합니다. 그것이 사람입니다. 다니엘도 인간입니다. 그에게도 우리와 같은 똑같이 맛난 것을 먹고픈 욕구가 있는 사람입니다. 기름진 음식의 냄새가 코를 자극하면 배가 불러도 먹어야 하는 유혹을 느꼈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니엘은 가장 일차적은 본능인 식욕을 제한했습니다. 인간의 욕구 두번째는 생명을 지키고자 하는 욕구입니다. 안전을 추구하는 것이 사람의 본능입니다. 그러나 다니엘의 결정은 안전의 추구와는 거리가 먼 결정이었습니다. 다니엘은 포로입니다. 포로에게는 하고 싶다고 하고, 하기 싫다고 하지 않는 자유가 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에게는 선택의 자유가 없습니다. 그가 선택한다는 것은 목숨을 거는 행위입니다.
다니엘은 이와같이 인간의 가장 일차적인 본능을 억제하고, 부정하면서 그 뜻을 세웁니다. 그 이유는 그들이 먹는 음식과 화려한 왕궁의 옷들은 자신에게서 하나님을 향한 신앙과 정신을 빼앗을 것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먹지 못하는 것보다, 죽는 것보다 더 귀한 신앙을 지켜내는 것이 다니엘에게는 먼저였습니다. 그래서 다니엘은 뜻을 정했던 것입니다.
제가 2014년도 9월에 아보츠포도 좋은교회를 개척했습니다. 교회 이름이 좋은 교회가 된 것은 교회가 시작 되고나서 친교 시간에 교회 이름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어습니다. 그때에 하이스쿨 남학생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우리 교회는 “좋은교회”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것입니다. 사실 그 말을 들었을 때에 제 마음이 찢어질 것처럼 아팠습니다. 어린 나이에 교회의 안타까운 모습을 보았던 그 친구의 마음이 이런 표현을 했고, 그것이 교회 이름이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성도님이 운영하는 까페에서 예배를 드리다가 어렵게 렌트해 들어간 교회의 첫달 렌트비가 600불이었고, 교회재정은 거의 없었습니다. 그때 제가 버섯 농장에서 일했습니다. 11월쯤 야외에서 일을 하는데, 눈과 비가 섞여 내려옵니다. 우비도 없고 아무런 준비 없이 눈비가 내리는 곳에서 맨손으로 일을 하는데, 그 추위와 고통이 얼마나 끔찍했던지 지금도 기억이 납니다. 그런데 견디고 일했습니다. 제가 교회 첫달 렌트비를 내기로 기도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시작된 교회가 당시 개척했던 교회들 중에 유일하게 성장했고, 지금까지 유지되며, 제가 떠난 후에도 성장하여 이제는 지방 내에서 손가락 안에 드는 교회로 성장했습니다. 뜻을 정하면 고통도 오지만 하나님의 백성은 뜻을 정하는 존재가 되어야 합니다.
행13:36 “다윗은 당시 하나님의 뜻을 쫒아 섬기다가 잠들었다.”
엡5:7 “그러므로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오직 주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하라.”
예수님도 눅22:42에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시며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거든 이 잔을 내게서 옮겨 주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나님의 뜻을 묻고 그 뜻을 따라 살아갔습니다. 성도는 뜻을 정하는 자입니다.
둘째, 뜻을 정하면, 마음이 평안합니다.
오늘 설교 제목이 뜻을 정한 자가 누릴 행복입니다. 사실 다니엘과 세 친구들은 뜻을 정하는 순간부터 고통이 왔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일차적인 욕구들이 제한당하면 인간은 고통스럽습니다. 먹고 싶은 것을 먹지 못하고, 죽음의 위협을 받으며 살아가는 하루하루가 얼마나 힘들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다니엘은 오히려 마음이 평안했을 것입니다. 뜻을 정하여 그의 신앙을 지키고, 마음을 지키니 그는 먹지 못해도 마음과 영혼은 평안했고, 행복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왕궁의 고기를 먹으며, 왕궁의 화려한 옷을 입으며, 육신의 쾌락과 기쁨을 누리며 살아갔던 다른 포로들은 어떠했을까요? 다니엘서를 보면 다니엘은 다른 포로들에 대하여 말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느브갓네살 왕의 뜻대로 먹고 마시며, 화려한 옷을 입으며 그들의 마음과 영혼, 신앙을 잃어가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때에 그들의 마음이 정말로 행복했을까요? 그들은 아마도 엄청난 죄책감에 시달려야 했을 것입니다. 그들이 어려서부터 듣고 배우고 마음에 새긴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신앙은 순간순간 그들의 양심을 흔들고 일깨우며 그들로 하여금 죄책감에 시달리게 했을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는 선악과는 먹고 난 후에 동산 나무 사이에 숨어버립니다. 그들이 하나님을 향한 뜻을 포기하고 선악과를 먹음으로 인하여 그들은 죄책감을 얻게 되었던 것입니다. 행복할 줄 알았는데, 그들은 불행해졌습니다. 사울은 하나님께 선택을 받아 왕이 되었지만 그 마음이 하나님께로부터 멀어지자 그 마음에 악신이 들어와 싸우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 안에 거하던 그가 하나님과 멀어지자 마음에 괴로움이 들어온 것입니다. 삼상16:23에 “하나님이 부리신 악신이 사울에게 이를 때에 다윗이 수금을 취하여 손으로 탄즉 사울이 상쾌하여 낫고 악신은 그에게서 떠나더라”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뜻한 포기하니, 그의 삶이 불행해 졌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이 잡히던 날 밤에 예수님을 세 번이나 배신하고는 그 죄책감으로 대성통곡을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이 하나님을 벗어나면 행복해질 수 없습니다. 죄책감이 마음을 괴롭게 하기 때문입니다. 양심이 요동치기 때문입니다. 겉으로는 아닌척 할지라도, 그 마음은 견딜 수 없는 고통이 따르게 됩니다. 행복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다니엘은 육적으로는 괴로움을 당할지라도 그 마음이 편안하니, 채소만 먹고도 그는 다른 이들보다 얼굴에 빛이 났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충만하니, 그럴 수 있었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성도는 뜻을 정함으로 행복해 질 수 있습니다.
셋째, 뜻을 정한 곳에 길이 있음을 확신합시다.
다니엘이 뜻을 정하고 환관장에게 자신의 뜻을 알립니다. 그러나 환관장은 그의 뜻을 받아들이지 않으려 합니다. 1) 자신은 왕을 두려워하는 사람이며, 2) 왕은 이미 너희 먹을 것과 입을 것을 지정하였고 3) 너희가 굳이 초췌하게 보일 까닭이 없다고 말하며 4) 너희 까닭에 내 머리가 왕 앞에서 위태하게 될 것이라고 회유합니다.
그럼에도 다니엘은 그의 회유와 만류와 설득 앞에 굴복하지 아니합니다. 그리고는 환관장이 세운 감독에게 찾아갑니다. “우리를 시험해 주십시요. 그리고 비교해 주십시요. 우리가 반드시 다른 이들과 비교하여 절대로 뒤지지 않을 것입니다. 만일 그렇게 된다면 우리에게 주어진 모든 특권을 빼앗아도 좋습니다.”
다니엘은 뜻을 이루고자 최선을 다합니다. 자신에게 불이익이 온다 해도, 모든 특권을 빼앗긴다 해도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기로 작정한 것입니다.
이에 감독은 허락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러한 결과에 일어날 수 있었던 이유가 있습니다. 9절에 “하나님이 다니엘로 환관장에게 은혜와 긍휼을 얻게 하신지라” 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는 어떤 의미입니까? 뜻을 정하니, “하나님이 역사하시더라”라는 말씀입니다.
성경의 말씀을 정리하며, 제가 지나온 몇 개월의 삶을 나눠보고자 합니다.
저는 지난해 10월 말쯤, 벤츄라 교회로부터 걸려온 저녁 늦게 걸려온 전화 한통으로 삶의 많은 변화들이 일어났습니다. 뜻하게 않게 시작된 사업, 이왕 하는 것 열심히 했고, 10년을 바라보면서 투자했고, 그러면서도 목사로서 나를 찾는 곳, 불러주는 곳이 있다면 돌아가겠다는 마음과 입술의 소망을 두었는데, 그 전화 한통으로 벤츄라 교회를 향한 뜻을 정하게 된 것입니다. 뜻을 정하고 나니, 다니엘이 겪었던 어려움처럼 참 많은 일들이 일어났습니다. 전화 이후로 새벽이면 3시에도 깨고, 4시도 깼습니다. 낮에는 시간이 없기 때문에, 깨면 기도하고 설교준비하고, 고민도 합니다. 제일 힘든 일은 시간들이 지연되면서 전임 목사님을 비롯한 벤츄라교회의 모든 성도님들에게 미안한 마음과 죄인된 마음으로 살고 있습니다. 질문을 받아도 대답할 수 없는 상황의 반복이 주는 마음의 어려움은 얼마나 어려운지 모릅니다. 사업을 시작하며, 아이들의 교통사고 보상금이 들어가 있는데, 그것도 포기하면서 매매를 진행하고 있는데, 제가 세상에 대한 경험이 없어서 그런지, 참 교활하기도 하고,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많이 겪어봅니다. 그 와중에 교회를 위하여 할 수 있는 것들을 찾아보고자, 몇 가지 장비를 구입하고, 일을 마친 늦은 밤중에 동영상 설교를 찍고 새벽이면 일어나 기도하고 설교를 준비합니다. 저만이 어렵겠습니까? 담임자없이 벌써 몇 개월을 보내는 여러분도 얼마나 힘드시겠습니까?
사람의 생각이나, 계산으로는 할 수 없는 일들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제가 뜻을 정했기 때문입니다. 벤츄라 교회를 향한 마음을 정해졌기 때문입니다. 뜻을 정하니 힘들고 어려운 과정들이 함께 왔지만, 성도님들을 생각하고, 기도의 제목들을 기억하면서, 함께 모여 예배드리고, 섬길 날을 기대하면서 견디고 있습니다. 그래서 정말로 힘들면서 정말로 행복한 시간입니다.
부임하기도 전에 성도들로부터 이런 사랑을 받는 목사가 어디 있나? 자랑하고 다니지는 못하지만, 속으로는 외치면서 행복해 합니다. 여러분들께 받은 사랑이 태산과 같다했습니다. 그리고 이제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일들이 이루어지기를 소망하고 기도할 뿐입니다.
이와같은 과정이 저와 여러분에게 큰 체험과 간증이 되리가 믿고, 여러분의 기도를 요청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