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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내고향 안동 원문보기 글쓴이: 도산선비
不遷位 祭祀
退溪 李滉
1. 祭祀準備
문순공(文純公) 퇴계(退溪) 이황(李滉) 선생의 불천위 제일은 음력으로 12월 8일이다. 금년은 양력으로 1월 2일이 선생의 제일이며, 또 탄신 500주년을 맞이하는 해여서 제일을 맞이하는 후손들은 제사준비에 한 치의 소홀함이 없도록 정성을 다하였다.
제사의 전반적인 준비는 소임이라 부르는 유사가 있어서 준비한다. 유사의 선출은 매년 도산서원(陶山書院)의 추향(秋享)을 마친 후 문중사람 중에서 선정한다. 소임에는 별유사 3명과 재유사 2명이 있는데, 별유사는 제사에 필요한 재정을 관리하고 지출하며 재유사는 장보기와 제물의 장만을 담당한다. 올해 재유사는 이종호(李宗鎬)씨와 이원문(李源文)씨가 선정되었다.
드는 날 아침에 재유사와 별유사는 제수를 구입하기 위해 안동의 신시장으로 간다. 장보기를 마치면 돌아오는 길에 퇴계선생을 모신 도산서원에 들려 구입한 제수를 근봉(謹封)하고, 제수물목인 단자(單子)를 작성하며 종택에 도착하면 오후 3시쯤 된다. 먼저 사랑마루에 돗자리를 깔고 상을 놓은 뒤 별유사 한 사람이 마루 위에서 단자에 적힌 제수물목을 하나씩 낭독하면 마루 아래에서 재유사가 해당되는 품목을 상위에 올린다. 제물을 확인할 때 별유사와 재유사는 제수를 경건하게 받들기 위해 유건과 도포로 의관을 정재한다. 단자의 물목과 제물의 수량을 확인하여 이상이 없으면 사랑방의 종손에게 “제수가 다 되었읍니다”라고 아뢴다. 종손이 상위의 제수와 단자를 살펴보고 유사들에게 “안으로 모시게”라고 지시하면 재유사는 제물을 안채 마루로 옮겨놓고 사당에 참배를 올린 후 정자방에서 휴식을 취한다.
제물과 손님의 음식상 준비는 종택에 종부(宗婦)와 차종부(次宗婦)가 없는 관계로 웃마을(양평)에 사는 종동서인 줄포댁과 종손의 막내며느리를 중심으로 하여 집안의 부녀자들이 한다. 불천위제사는 큰제사이기 때문에 제사에 참여하는 사람들도 많아서 기제사 때보다 음식을 더 많이 준비한다. 불천위제사 때는 어물과 육류등 대부분의 음식을 익히지 않고 날 것으로 사용하므로 기제사에 비해 제물장만이 비교적 쉬운 편이다. 제물 가운데 정성과 시간이 많이 요하는 음식이 떡인데, 떡은 본편인 시루떡만 방앗간에서 만들어오고 본편을 장식할 웃기떡은 부녀자들이 드는 날 아침부터 부지런히 장만한다. 웃기떡이 만들어지면 정성을 들여 편대 위에 떡을 괴는데, 먼저 편대 맨 아래에는 시루떡을 13불 정도로 쌓고 그 위에 무마구설기와 당귀떡과 녹두거피찰떡을 각각 1불씩 깐 다음에 다시 쑥 경단, 부편, 깨구리, 작과편, 전, 조약 등을 각각 1불씩 차례로 놓는다. 떡을 괴는 작업은 숙련된 솜씨와 정성이 들어가므로 경험이 많은 사람이 맡아서 한다. 종손의 막내며느리가 주가 되어 떡을 쌓고 경험 많은 줄포댁이 작년에 이어서 올해도 수고를 하였다. 떡 괴기가 끝나면 흩트려지지 않도록 비닐로 싸서 한켠에 둔다. 저녁에 재유사들이 어물과 고기류를 손질하여 적(炙)을 장만한다. 적은 도적(都炙)으로 쌓는데 도적이란 어적(魚炙), 육적(肉炙), 계적(鷄炙)을 하나의 적틀에 담은 것이다. 도적을 괴는 순서는 우모린(羽毛鱗)의 원칙을 적용하여 먼저 적틀의 맨 아래에 토막을 꼬지에 꿴 방어, 상어, 가오리, 청어, 문어 등의 어물을 차례로 놓고 그 위에 육류인 쇠고기를 놓고 맨 위에는 닭 1마리를 올린다.『사례편람(四禮便覽)』에 따르면 제왕은 7탕, 대부는 5탕, 서인은 3탕을 쓴다고 하는데, 선생의 불천위제사에는 5탕을 쓴다.
채[蔬]는 흰색, 검은색, 푸른색의 3채소를 기본으로 한다. 뿌리나물인 도라지와 무, 줄기나물인 고사리, 잎나물인 시금치 등을 채취해 삶은 뒤 건조시켜 놓았다가 데쳐 하나의 그릇에 담는다. 실과는 대추, 밤, 배, 감, 사과, 귤 등의 과일류를 두미하여 진설하고, 유과와 약과 등의 조과류는 쓰지 않는다. 유밀과를 제사에 쓰지 않는 이유는 청빈과 검약을 중요히 여긴 퇴계선생이 유밀과는 기름이 많이 들어 낭비가 심하다하여 제사에 쓰지 못하도록 하였다고 한다. 이와 같은 연유로 선생의 제자인 서애 류성룡 선생의 종택 등에서도 제사 때 유밀과를 사용하지 않는다. 포는 대구포를 사용하며, 김치는 백김치를 사용한다.
2. 祭儀
드는 날 오후가 되자 퇴계종택은 원근에서 모여든 후손들과 문도(門徒)의 후예들로 입추(立錐)의 여지가 없을 정도였다. 올해는 선생의 탄신 500주년이어서 작년보다 참제자가 더 많았다. 종택에 도착한 참제자들은 우선 종손어른께 인사를 하고 사랑방에 마련된 시도소에서 이름과 주소를 등재한다. 제사 직전까지 시도기에 등재된 인원은 67명이었다.
제사는 새벽 1시가 가까워지면 지내는데, 그전에 헌관과 축관 등을 선정하여 둔다. 헌관이나 축관 등을 공개적으로 뽑는 절차는 없고 종손이 시도기를 보고 정해 당사자의 수락을 받아낸다. 제주인 종손이 초헌관이 되며, 아헌관은 퇴계선생의 손자 3형제 중에서 둘째 집의 주손이나 문장이 맡게 된다. 올해도 작년에 이어서 ‘한실양반’으로 불리는 이원식(89세)씨가 아헌관을 맡았다. 이 분은 도산서원 원장을 지내신 분으로 제사를 지내러 온 후손 중에서 나이도 많고, 항렬도 높다. 종헌관은 문중사람 중에서 선정할 수도 있고 타 문중 사람 중에서 정할 수도 있는데, 올해는 남평문씨(南平文氏)인 문수정(文守政)씨가 종헌관에 선정되었다. 문수정씨는 퇴계선생의 문도인 풍암(楓庵) 문위세(文緯世) 선생의 후손으로 문장(門長)어른 11명과 같이 전라남도 장흥군에서 왔다. 축관은 가문에서 학식과 덕망이 높은 분이 맡게 되는데, 올해는 치암(恥巖) 이만현(李晩鉉)선생의 후손인 이원봉씨가 역할을 맡았다.
저녁 9시경에는 떡과 회로 야화를 먹은 후에 헌관과 축관, 문장어른들은 사랑방에서 머무르며, 재유사와 비교적 젊은 분들은 정자방에서 제사시간을 기다린다. 제사를 봉행할 장소인 추월한수정은 정면 5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마루에는 ‘도학연원방(道學淵源坊)’이라는 편액이 걸려 있다. 또 정자로 들어오는 대문에는 퇴계선생의 문인이자 충재(冲齋) 권벌(權橃) 선생의 5대손인 창설재(蒼雪齋) 권두경(權斗經)공이 쓴 ‘추월한수정(秋月寒水亭)’이란 현판이 걸려있다.
자정이 넘어 가자 유사들은 정자 마루에 자리를 깔고 병풍을 친 후 향상, 향로, 향합을 놓고, 제상 뒤에는 신주를 모시기 위해 교의를 놓는다. 그리고 제상 위의 허공에는 진설한 제물의 청결함을 위해 청색 천으로 앙장(仰帳)을 친다.
제반준비가 다되면 12시 20분쯤에 재유사와 젊은 사람들이 제수를 안채에서 제청으로 옮겨온다. 퇴계종택에서는 단설로 봉행하는데, 그것은 퇴계선생의 유지를 따라서 그렇게 행한다고 한다. 선생은 합설로 제사를 올리는 것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고 한다.
“사람들이 제삿날에 항상 고위(考位)와 비위(妣位)를 함께 제사지내지만 그것은 예(禮)가 아니다. 고위 제사에 비위를 제사하는 것은 정(情)으로 옳다고 하겠으나 비위 제사에 고위를 함께 지내니 어찌 감히 높은 이를 대접하는 의리가 있다 하겠는가? 우리 문중에서도 늘 이렇게 하고는 있으나 나는 종자(宗子)가 아니기 때문에 감히 마음대로 고쳐 하도록 못하는 것이다. 다만 내가 죽은 뒤에는 이런 풍속을 따르지 말도록 할 따름이다.”
이런 연유로 인해서 안동지방에서는 선생의 후손뿐만 아니라 문도의 집안에서도 단설로 제사지내는 집이 많다.
12시 30분에 진설을 맡은 집사들이 제상에 제수를 진설한다. 진설시에는 모든 제수를 한꺼번에 올리지 않고 과일과 채소류 등 식지 않는 음식을 먼저 진설하며, 강신례를 한 후에 탕과 편과 도적 등을 비롯하여 나머지 음식을 올린다. 진설시에는 과일은 조율이시(棗栗梨柿)로 쓰고, 포는 과일 줄의 중간에 놓아 중포로 진설한다. 메와 갱은 산사람과 반대로 하여 우리가 보는 쪽에서 메는 왼쪽, 갱은 오른쪽에 차린다.
메 술잔 시접 갱 국수 계란탕 명태탕 문어탕 쇠고기탕 닭탕 도적 편청 편 촛대 조기 편적(천엽) 간장 채소 육회 물김치 촛대 밤 감 귤 대구포 사과 배 대추 |
퇴주기 향상, 향로 술병
모사
(진설도)
진설하는 동안 사랑방과 정자방에서 기다리던 참제자들은 도포와 유건으로 의관을 정제하고 제청인 정자마루로 나와서 기다린다.
진설을 마치면 종손은 촛불을 든 집사를 앞세우고 사당에 가서 오늘이 기일임을 고하고 신주를 모셔오는데, 이를 출주(出主)라 한다. 출주는 종손(李東恩, 93세)이 연로해서 종친 가운데 1명이 대신하였다. 신주가 제청으로 들어오면 참제자들은 신주를 향해서 일제히 읍을 올린다. 이어서 신주를 교의 위에 모셔 놓고 본격적인 제의를 진행한다. 제사는 홀기를 부르지 않고 진행하는데, 3~40년 전에는 홀기를 부르면서 진행하였다고 한다.
집사 중 한사람이 주독의 뚜껑을 열면 참제자는 일제히 참신(參神) 재배를 한다. 제주가 향상 앞에 꿇어앉아서 향을 세 번 사르면 좌집사가 제상에서 술잔을 내려 제주에게 준다. 우집사가 제주의 잔에 술을 채워 주면 이것을 모사에 3번 나누어 붓는다. 좌집사가 제주의 잔을 받아 제상에 올려놓으면 제주는 재배한다. 강신을 마치면 탕과 도적, 편을 비롯한 나머지 음식을 제상에 올린다. 이어서 초헌례를 올린다. 집사가 메와 갱의 뚜껑을 열면 제주가 초헌관이 되어 신위에게 재배하고 꿇어앉는다. 좌집사가 제상에서 술잔을 내려 초헌관에게 주면 우집사가 초헌관의 술잔에 술을 채워준다. 좌집사가 초헌관의 잔을 받아 메와 갱 앞에 놓고, 탕, 채소, 국수그릇의 뚜껑을 벗긴다. 이어서 축관이 초헌관의 좌측에서 동향으로 앉아서 축문을 낭독한다.
축문은 다음과 같다.
維歲次庚辰十二月戊午朔初八日乙丑孝十五代孫東恩
敢昭告于
顯十五代祖考崇政大夫判中樞府事兼知 經筵春秋館事
贈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領議政兼領 經筵
弘文館藝文館春秋館觀象監事諡文純公府君歲序遷易
諱日復臨追遠感時不勝永慕謹以淸酌庶羞恭伸奠獻 尙
饗
축문 낭독이 끝나면 모두 일어나고 초헌관은 재배하고 물러난다. 이어서 아헌례를 행한다. 아헌관은 초헌례 때와 같은 방법으로 헌작을 한 후에 재배한다. 아헌례 후에는 마지막 술잔을 드리는 종헌례를 올린다. 종헌례 때에는 종헌관이 아헌례 때와 같은 식으로 헌작하고 재배를 하는데 이 때 다음 순서인 첨작(添酌)을 위해 집사가 채워준 술잔을 퇴주그릇에 3번 나누어 부어버리고 조금만 담아 제상에 올린다. 종헌례가 끝나고 초헌관이 다시 신위 앞으로 나아가 꿇어앉으면 집사가 메뚜껑을 초헌관에게 건네주고 우집사는 술병을 들어 술을 따른다. 이것을 좌집사가 받아 종헌례 때 헌작한 잔에 첨잔한다. 이어서 좌집사가 메에 숟가락을 꽂고 젓가락을 국그릇에 놓고 난 후에 초헌관은 재배한 후에 물러난다. 다음은 합문(闔門)의 절차로 신이 음식을 흠향하실 동안 후손들은 방문을 닫고 나간다. 그러나 사당이 아닌 정자 마루에서 치러지는 관계로 제상 뒤에 친 병풍을 앞으로 둘러서 제상을 가린다. 모두 부복한 후에 2~3분쯤 기다리다가 축관이 헛기침을 3번하면 모두 일어난다. 이어서 집사가 병풍을 걷은 후에 수저를 거두고 국을 내린 후 숭늉을 올린다. 집사가 숟가락으로 메를 조금씩 3번 떠서 숭늉그릇에 말면 모두 국궁(鞠躬)한다. 국궁을 하고 나면 좌우 집사가 숭늉그릇의 숟가락을 거두고 그릇뚜껑을 닫고 참제자 모두는 사신(辭神) 재배를 한다. 집사는 제상에서 술잔과 수저를 내려 술은 퇴주그릇에 붓는다. 이어서 출주 때 신주를 모시고 온 집사들이 신주를 사당의 감실에 봉안하러 가면, 집사는 제상에서 제물을 내리고 축문을 불살라 향로에 넣는다.
4. 其他
새벽 1시 15분쯤에 제청에서의 절차가 끝나면 집사들은 제청의 병풍과 자리를 걷고, 젊은이들은 제물을 안채로 옮긴다. 음복 준비는 소임이 주가 되어 부녀자들이 준비한다. 음복상은 사랑방에 있는 손님상을 먼저 준비하는데, 헌관에게는 독상을, 축관을 비롯한 그 밖의 제관은 겸상을 준비한다. 음복을 할 때 의관을 흩트리지 않고 음복에 임한다. 이는 음복까지를 제사로 보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음복을 할 동안 안채의 부녀자들은 음복봉게를 준비한다. 음복을 마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집으로 돌아가고 멀리서 온 손님들은 종택에서 하루를 묵는다.
西厓 柳成龍
1. 祭祀準備
풍산류씨(豊山柳氏) 문중에서는 현재 서애(西厓) 류성룡(柳成龍) 선생을 포함하여 여섯 분의 조상을 불천위로 모시고 제사를 올리고 있다. 이 중 하회마을에서 올리는 불천위로는 입암․귀촌․겸암․서애 선생 등 네 분이 있고, 이웃 광덕리에는 파산선생을 모시고 있으며 상주시 중동면 우물리에는 수암 선생의 불천위를 모시고 있다.
문충공(文忠公) 류성룡 선생의 불천위 제일은 음력으로 5월 6일이며, 비위(妣位)는 음력 7월 26일이다. 풍산류씨 문중에서는 제사를 단설(單設)로 지낸다.
서애 선생의 불천위 제일이 되자 충효당 종가는 제사에 참여하기 위해 원근에서 온 후손들과 문도들의 후예로 붐볐다. 후손들은 종손 류영하씨와 인사를 나누고 충효당 사랑마루에서 이야기꽃을 피웠다. 저녁이 되자 원근에서 온 참제자들의 수는 60여 명을 헤아렸다. 풍산류씨 서애파는 여러 지파(支派)로 갈라지는데, 맏집은 종파인 찰방공파이다. 둘째 집은 의성 세물에 세거하고 있는 세물파, 셋째 집은 우천파로 상주 우물에 살고 있다. 넷째 집은 류천파로 문경에 살고 있으며, 다섯째 집은 권근제파인데 예천과 인천에 후손들이 살고 있다.
저녁 6시 반에 식사를 하고 충효당 사랑채와 안채에서 담소하다가 8시경에 충효당 사랑마루에서 문회(門會)가 열렸다. 문회는 종손이 주관하여 안건을 발표하고 중지를 모으는 형식으로 진행되었다. 주요 안건은 풍산류씨의 가계(家系)문제와 능골재사의 보수문제, 농환재(弄丸齋) 유허비 건립 경과 및 부조 내역 보고, 옥연정사(玉蓮精舍) 관리문제 등이 거론되었다. 문회가 끝나고 참제자들은 제사 때까지 담소하면서 휴식을 취하였다.
불천위 제사의 비용은 인근의 풍산읍 수리에 있는 20여 두락의 위토에서 충당된다. 제물은 제사 하루 전에 문중의 유사 2명과 산보(山保) 1명이 안동 신시장에서 구입하고, 편은 제사 당일에 중리 떡방앗간에서 만든다. 이곳에서 편을 만드는 것은 주변에 안동권씨, 안동김씨 등의 동성마을이 산재하고 있어서 의례용 떡을 만든 경험이 많기 때문이다. 유사는 취회(取會)라는 파문회에서 결정하는데 활동력을 고려하여 장년층 가운데서 선정한다. 올해의 유사는 류시주씨와 류시활씨이다. 산보는 고직이를 높여 부르는 말로 타성에서 뽑는다.
불천위 제사는 큰제사이기 때문에 기제사 때보다는 음식을 더 많이 준비한다. 아침부터 10여 명이 제수 준비에 동원되어 떡도 하고 전도 부치는데, 고기와 어물류 등은 남자들이 만진다.
떡은 기제사 때의 2배인 1말을 하는데 본편인 시루떡은 방앗간에서 시켜서 만들며, 웃기떡은 방앗간에서 떡가루를 내어 와서 집에서 만든다. 불천위 제사에 쓰이는 떡의 종류는 기제사에 비해 양도 많고 다양하다. 본편류가 5종류로 모두 합하여 17불로 괸다. 제일 밑에 콩고물시루떡을 놓고 차례로 팥고물, 녹두준주고물시루떡, 백편, 나물떡을 괸다. 그 다음에는 웃기떡을 1불씩 괴는데 그 순서는 경단을 맨 아래에 깔고 차례로 증편, 송구송편, 모시송편, 녹두송편, 작과편, 전, 조약, 깨꾸리 등을 차례로 놓는다. 떡을 괴는 작업은 숙련된 솜씨와 정성이 필요하므로 하회마을과 인근에 사는 솜씨 좋은 일가친척 할머니들이 맡았다. 오후 2시에 시작한 작업이 4시 반에서야 끝이 났다. 떡 괴임은 밑에는 좁게 하면서 위로 올라가면서 넓게 쌓아야 하므로 허물어지지 않도록 하는 것이 기술이다. 떡을 다 쌓으면 한지로 곱게 싸서 놓는데 그것을 ‘편봉한다’고 한다. 편봉은 종부가 하는데 한지 2장으로 주위를 둘러싸고 윗부분에 랩 비닐을 덮고 끈으로 묶는다.
저녁 10시경에 야화를 먹은 후 11시경에 준비한 제물을 제청으로 가져와 유기로 만든 제기에 담아 제청 한켠에 마련한 상 위에 올리면서 제물을 점검한다. 계적(鷄炙), 육적, 어적을 하나의 적틀(俎)에 담은 것을 도적(都炙)이라 한다. 어물과 고기를 낮에 장만하였다가 저녁 늦게 적틀 위에 우모린(羽毛鱗)의 순으로 괸다. 즉, 하늘, 땅, 바다에서 나는 제물을 차례로 괸다. 적틀 제일 밑에는 바다에 사는 비늘 있는 어물(鱗)을 놓는데, 맨 아래에 마른명태를 깔고 그 위에 고등어, 청어, 상어, 방어, 가오리, 문어 등을 놓는다.
어물류 위에는 털(毛)있는 가축인 쇠고기 편육을 놓고, 그 위에는 깃털(羽) 조류인 닭을 배가 하늘로 가도록 놓는다. 도적을 제상 위에 놓을 때는 동두서미(東頭西尾)로 한다. 도적에 올라갈 제물들은 날 것으로 쓰는데, 문어는 제사 후 음복용으로 쓰기 위해 살짝 데쳐서 올린다. 이처럼 생고기를 올리는 것은 ������예기(禮記)������에서 말한 혈식군자(血食君子)라는 데 근거하고 있다. 즉, 군자는 날 것을 먹는다는 것이다. 도적과 비슷한 것으로 제상에 올리는 자반이라는 것이 있다. 서애 종가에서는 기제사 때에는 자반으로 조기 한 마리만 쓰지만 불천위 제사 때는 도적보다 규모를 약간 적게 해서 쓴다. 자반은 적틀 맨 아래에 마른명태를 깔고 그 위에 고등어, 청어, 상어, 가오리, 방어, 쇠고기를 차례로 고이고 맨 위에 조기를 놓는다.
면 메 잔 시접 갱 편 편청 육 탕 탕 도적 탕 탕 탕 포 편적 초 초 자반 김 청채 백채 간장 교채 침채 부침 식혜 대추 배 딸기 사과 중계 조과 수박 참외 귤 감 밤 |
(진설도)
탕은 5탕으로 육탕, 어탕, 계탕, 민물고기탕, 소탕 등을 쓴다. 포는 우포로 쓰며, 대구포를 쓴다. 술은 종부가 집에서 만든 청주를 쓴다. 실과류는 조율이시를 쓰는데 대추와 배를 제상의 좌측에 놓고 우측에는 곶감과 밤을 쓰며 실과줄의 중간에는 시절과와 조과를 놓는다. 조과 중에서 다른 집안에서는 볼 수 없는 특이한 중계라는 밀가루로 만든 과자가 있다. 이 과자는 서애 선생이 생시에 즐겨 드시던 것인데 유밀과보다는 꿀과 기름을 적게 넣어 종부가 직접 만든다.
2. 祭儀
새벽 1시가 가까워지면 제사가 시작된다. 제청에 백병풍을 치고, 그 앞에 제상을 놓는다. 제상 앞에는 초석자리를 깔고 향상(香床)과 향로와 향합을 놓고, 제상 뒤에는 신주를 모시기 위해 교의를 놓는다. 참제자들은 의관을 정제하고 방에서 나와 제청 앞뜰에 도열하고 제관들은 제청 마루에 선다. 참제자들의 복식은 도포에 유건 차림인데 초헌관인 종손과 축관은 유건 대신에 흑립을 쓴다. 만일 참제자가 복장을 제대로 갖추지 못했을 경우에는 비록 항렬이 높다 해도 제상 가까이에 서지 못하고 제일 뒤에 선다. 제상 위의 촛대에 불을 밝히고 제관들이 참관하는 가운데 유사 2명이 제상 위에 편과 도적을 제외한 제물을 진설한다. 편은 진설도상 다른 제물들과 같이 제상 위에 올려야 되지만 떡이 너무 무겁고 편봉한 것이 흐트러질 염려가 있어 제상 아래에 작은 상을 놓고 편을 따로 진설한다. 도적은 강신례에서 진찬(進饌)을 올릴 때 진설한다.
진설을 마치면 제주는 촛불을 든 집사를 앞세우고 사당에 가서 오늘이 기일임을 아뢰고 신주를 제청으로 모셔오는데 이를 출주(出主)라 한다. 사당에 도착하면 제주와 집사는 신발을 벗고 사당으로 들어가 서애 선생의 영정을 배알한다. 이어서 벽감실 문을 열고 축관이 주독의 뚜껑을 연다. 제주가 향상 앞으로 나아가 분향하고 엎드려 기일이 돌아왔음을 신위에게 아뢰는 고사(告辭)를 하고 일어난다. 이어서 축관이 신주를 받들어 서쪽 계단으로 내려오고 제주는 사당문을 닫고 모두 제청으로 온다. 신주를 제청으로 모셔오면 새벽 1시 정각에 제사가 시작된다. 이어 집례의 창홀에 따라 제사가 진행된다.
忌祀笏記
主人以下序立再拜○盥帨○祝啓櫝○主人詣香案前跪○焚香○告辭○俯伏興○平身○祝奉主降自西階就正寢○主人以下復位○祝開櫝○參神再拜
○行降神禮
主人盥帨○詣香案前跪○焚香○酹酒○俯伏興○再拜○復位○進饌
○行初獻禮
主人詣神位前跪○斟酒○祭酒奠酒○執事者受盞奠于故處○啓飯蓋○主人以下皆跪○讀祝 祝執板跪於主人左讀祝○主人俯伏興再拜○復位
○行亞獻禮
亞獻盥帨○詣神位前跪○斟酒○祭酒奠酒○執事者受盞奠于故處○亞獻俯伏興再拜○復位
○行終獻禮
終獻盥帨○詣神位前跪○斟酒○祭酒奠酒○執事者受盞奠于故處○終獻俯伏興再拜○復位○侑食○主人執注就添盞中酒○揷匙正箸○主人詣香案前再拜○復位○祝闔門○主人以下皆出俯伏○祝啓門 祝進當門北向噫歆三乃啓○進茶○鞠躬○平身○落匙○祝閉櫝○告利成○主人以下再拜辭神○祝焚祝文○送主○徹饌○禮畢
<행강신례>
제주는 마루 한쪽에 마련된 관세대 앞에 꿇어앉아 소반 위에 마련된 대야물에 손을 씻고 수건에 손을 닦는다. 이어 제상 앞에 놓인 향안 앞으로 나가 꿇어앉는다. 이어서 주인이 향합에서 향을 집어 향로에 넣고 향불을 피운다. 향불은 3번 사른다. 이어 집사가 제상에서 술잔을 내려 주인에게 주면 주인은 꿇어앉은 자세로 잔을 받는다. 이어 집사가 제주를 술잔에 채워주면 주인은 술잔을 받아 모사에 3번 나누어 부어 혼백을 모신다. 빈잔을 집사에게 주면 집사는 받아서 제상 위에 올린다. 이어 몸을 굽혀 엎드렸다가 일어나 두 번 절 한 다음 제자리로 돌아간다. 이어서 집사들이 제상 아래의 도적과 나머지 음식을 제상에 올린다.
<행초헌례>
제주는 신위 앞으로 나가 무릎을 꿇고 앉으면 집사가 술잔을 건네주고 다른 집사가 술을 가득 부어 준다. 제주는 술잔을 향불 위를 통하여 집사에게 주면 집사는 술잔을 받아 메와 갱 사이에 놓는다. 이어 집사가 밥그릇 뚜껑을 연다. 이어 제주를 비롯한 모든 이들이 꿇어앉으면 축관은 축판을 가지고 제주의 좌측으로 와서 꿇어앉아 축문을 읽는다. 축 읽기가 끝나면 제주는 몸을 굽혀 엎드렸다 일어나 두 번 절하고 제자리로 간다. 축문은 제사 전 날에 작성하는데 정해진 서식에 따라 종손이 자필로 쓴다.
維歲次庚辰五月辛卯朔初六日丙申 孝玄孫寧夏
敢昭告于
顯先祖考輸忠翼謨光國忠勤貞亮効節協策扈聖功臣
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領議政兼領 經筵
弘文館藝文館春秋館觀象監事世子師豊原府院君
贈諡文忠公府君歲序遷易諱日復臨追遠感時
不勝永慕謹以淸酌庶羞祗薦歲事 尙
饗
<행아헌례>
두 번째 술잔을 올리는 것으로 서애 불천위 제사에서 아헌관과 종헌관은 서애파의 지파 종손들이나 문장 가운데서 정해진다. 아헌관은 이웃 마을인 광덕리에 살고 있는 종파의 류시수씨가 맡았다. 아헌관은 관세대에서 손을 씻고 닦은 뒤 신위 앞으로 가서 꿇어앉는다. 이어 초헌관처럼 술잔을 올리고 두 번 절한 다음 정해진 자리로 간다.
<행종헌례>
세 번째 잔을 올리는 것으로 종헌관은 의성 세물에서 온 지파 주손인 류종하씨가 맡았다. 종헌례는 잔을 올리는 제관만 다를 뿐 아헌례와 절차가 같다.
종헌례가 끝나면 유식(侑食)이 있다. 제주는 술병을 들어 술잔에 가득히 차도록 첨잔하고 숟가락을 메에 꽂는다. 이어 제주는 향안 앞으로 나가 두 번 절하고 원래의 자리로 돌아간다.
이어 축관이 합문 절차를 행한다. 합문 절차에서 제주와 모든 이들은 부복한다. 이 때 축관이 제청의 전등불을 끈다. 이어 계문(啓門)의 절차를 행한다. 축관이 북쪽을 향해 3번 기침을 하고 불을 켠다. 이어 갱을 물리고 숭늉을 올린 뒤 메를 조금씩 떠서 숭늉에 말고 모두 국궁했다가 몸을 바로 하고 숟가락을 숭늉그릇에서 내리고 메그릇을 덮는다. 축관은 주독의 뚜껑을 덮는다. 이 때 집사 중 하나가 제사가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다고 ‘이성(利成)’이라고 한다. 제주와 모든 사람들은 신위 앞에서 두 번 절함으로써 신을 떠나보낸다. 축관은 축문을 불살라 향로에 넣고 신주를 사당으로 봉안한다. 집사들은 제상에서 제물을 내리고 이로서 제사를 마친다.
3. 其他
제사가 끝나면 제관과 참제자들은 제청에 앉아서 조상과 일가 이야기로 담소를 나누며 음복을 기다린다. 홀기상으로는 제사의 절차를 마쳤으나 실제로 음복까지 제사의 과정에 포함되므로 제관과 참제자들은 의관을 벗지 않고 음복을 행한다. 부녀자들은 제상에서 내린 음식으로 음복 준비를 한다. 음복상에는 제수로 쓰인 떡과 문어, 과일을 올린다. 밥은 제사상에 올랐던 나물을 한꺼번에 밥과 비빈 후 사람마다 한 그릇씩 퍼서 음복상에 올린다. 많은 사람들의 음복을 준비해야 하므로 국과 탕을 비롯한 나머지 음식들은 제사 1시간 전부터 주부들이 부지런히 준비해야 한다. 약 100인분의 음복을 주부 10여명이 준비해야 하는데, 종손과 지파 종손에게는 독상으로 음복상을 올리고 나머지 분들에게는 겸상으로 차린다.
음복이 끝나면 곧바로 집으로 가시는 분들이 많기 때문에 음복상 차림과 더불어 집으로 가져갈 음복인 봉게도 함께 준비한다. 이번 서애 선생 불천위 제사에서는 봉게를 약 100여 개 준비했다. 이 봉게는 제상에 올라갔던 과일과 떡을 비롯해 도적을 토막 내어 꼬지 형태로 만들어 1개씩 넣는다.
安東地方 不遷位 47位
具鳳齡
□ 位置 : 安東市 臥龍面 池內里 131番地
백담(栢潭) 선생의 종택은 보존되지 못하고 현재 안동시 와룡면 가구리 132번지에 종손이 살고 있다. 선생의 불천위(不遷位)를 모신 묘우(廟宇)는 출생지인 와룡면 지내리에 있다.
□ 神主
◦ 考位
顯先祖考贈資憲大夫吏曹判書兼知經筵義禁府事弘文館大提學藝文館大提學知春秋館成均館事世子左賓客五衛都摠府都摠管行嘉善大夫吏曹參判兼同知經筵成均館事藝文館提學五衛都摠府副摠管諡文端公府君神主
◦ 配位
顯先祖妣贈貞夫人咸昌金氏神主
□ 諱日
◦ 考位 : 7月 2日
◦ 配位 : 7月 25日
□ 略歷
선생의 본관(本貫)은 능성(綾城)이고 중종(中宗) 21년(1526)에 태어나 선조(宣祖) 19년(1586)에 몰(歿)하였다. 자(字)는 경서(景瑞)이고 호(號)는 백담(栢潭)이며 증이조참판(贈吏曹參判) 겸(謙)의 아들이다. 퇴계(退溪) 선생의 문인으로 의리(義理)를 강독(講讀)하여 그 골수(骨髓)를 터득(攄得)하였다. 생원시(生員試)와 문과(文科)에 급제(及第)하여 호당(湖堂)을 거쳐 벼슬이 이조참판(吏曹參判)에 이르니 세칭(世稱) “당우(唐虞)의 인물이요, 한송(漢宋)의 문장(文章)”이라 불렸다.
공(公)은 율곡(栗谷) 이이(李珥)와 함께 동서당론(東西黨論)을 조절하려고 했으나 여의치 않자 고향으로 돌아왔다. 서애(西厓) 류성룡(柳成龍)은 그를 일러 “강하지윤(江河之潤)이요, 산구지중(山丘之重)”이라고 칭찬하였다. 이조판서(吏曹判書)에 증직되었고, 저서로는《백담문집(栢潭文集)》및《속집(續集)》이 있다. 시호(諡號)는 문단(文端)이며, 주계서원(周溪書院)에 제향(祭享)되었다.
權榘
□ 位置 : 安東市 豊川面 佳谷里 415番地 時習齋
□ 神主
◦ 考位
顯先祖考贈資憲大夫吏曹判書兼成均館祭酒侍講院贊善府君神主
◦ 配位
顯先祖妣贈貞夫人載寧李氏神主
□ 諱日
◦ 考位 : 1月 28日
◦ 配位 : 6月 3日
□ 略歷
선생의 본관(本貫)은 안동(安東)으로 현종(顯宗) 13년(1672)에 태어나 영조(英祖) 25년(1749)에 몰(歿)하였다. 자(字)는 방숙(方叔)이고 호(號)는 병곡(屛谷)이다. 아버지는 선교랑(宣敎郞)을 지낸 정곡(井谷) 징( )이다. 갈암(葛庵) 이현일(李玄逸)의 문인으로 학문이 넓고 깊었다. 벼슬에 뜻을 두지 않고 사창(社倉)을 열어 굶주림을 건지고 향약(鄕約)을 세워 양풍(良風)을 진작(振作) 시켰으며 시습재(時習齋)를 지어 후학을 양성하였다.
澄 |
忄 |
철종 10년(1859) 지평(持平)에 증직(贈職)되고 고종 28년(1891)에 이조판서(吏曹判書)에 추증(追贈)되었다. 저서로 《병곡집》 10권 5책이 있고, 대산(大山) 이상정(李象靖)이 행장(行狀)을 쓰고 성재(性齋) 허전(許傳)이 묘명(墓銘)을 지었다.
노동리사(魯洞里祠)에 제향(祭享)되었다.
□ 時習齋
이 집은 도승지(都承旨)․경상도관찰사(慶尙道觀察使) 등을 역임한 화산(花山) 권주(權柱,1457~1505)공의 옛집이다. 연산군(燕山君) 11년(1505) 갑자사화(甲子士禍)에 연루되어 세상을 떠나자 가족이 예천으로 이주하여 빈집으로 방치되었으나 18세기 중엽에 후손들이 들어와 다시 살게 되었다고 전한다. 지금의 건물은 약 150여 년 전에 건립된 것으로 시습재란 당호를 쓴다. 경상북도문화재자료 제370호로 지정되어 있다.
權 宇
□ 位置 : 安東市 臥龍面 伊上里 557番地 松巢宗宅
□ 神主
◦ 考位
顯先祖考贈通政大夫承政院左承旨兼經筵參贊官行王子師傳奮順副尉府君神主
◦ 配位
顯先祖妣淑夫人全州柳氏神主
□ 諱日
◦ 考位 : 3月 26日
◦ 配位 : 2月 12日
□ 略歷
선생의 본관(本貫)은 안동(安東)으로 명종(明宗) 7년(1552)에 태어나 선조(宣祖) 23년(1590) 몰(歿)하였다. 자(字)는 정보(定甫)이고 호(號)는 송소(松巢)이며 인재(忍齋) 대기(大器)의 장자(長子)이다. 공은 퇴계(退溪) 선생의 문인으로 맑은 인품에 지조 또한 남달리 높았다. 선조 6년(1573)에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고 경릉참봉(敬陵參奉)․집경전참봉(集慶殿參奉)을 거쳐 왕자사전(王子師傳)에 제수되었다.
통정대부(通政大夫) 승정원(承政院) 좌승지(左承旨)․경연참찬관(經筵參贊官)에 증직되었다. 저서로는 《송소집(松巢集)》 2책이 있으며, 옥봉(玉峯) 권위(權暐)가 행장(行狀)을 썼다.
權 徵
□ 位置 : 安東市 臥龍面 佳野里 754番地 藤巖宗宅
□ 神主
◦ 考位
顯先祖考通善郞行工曹佐郞兼司憲府持平府君神主
◦ 配位
顯先祖妣恭人花山權氏神主
□ 諱日
◦ 考位 : 5月 10日
◦ 配位 : 11月 19日
□ 略歷
선생의 본관(本貫)은 안동(安東)이며 호(號)는 등암(藤巖)이다. 세종(世宗) 8년(1426)에 태어나 세조(世祖) 13년(1467)에 몰(歿)하였다. 수의부위(修義副尉) 가후(可後)의 아들이다. 세종 29년(1447)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고 세종 32년(1450)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승문원(承文院) 정자(正字)에 임용된 후에 여러 벼슬을 거쳐 세조 13년 병마평사(兵馬評事)로 이시애(李施愛)의 난을 토평(討平)하는데 앞장서서 싸웠다. 그러나 고군(孤軍)으로는 반란군(叛亂軍)을 감당할 수 없게되자 “나라의 두터운 은혜를 입은 몸으로 반적(叛賊)을 무찔러 난을 평정하지는 못할망정 어찌 적의 손에 죽겠느냐”하며 스스로 자결하였다.
일찍 학문을 이루어 22세에 이기설(理氣說)을 저술하였으며, 참판(參判) 류태좌(柳台佐)가 행장(行狀)을 지었고, 집의(執義)에 증직(贈職) 되었다.
權 寏
□ 位置 : 安東市 臨河面 臨河里 587番地 二愚堂宗宅
이 건물은 안동권씨 부정공파(副正公派) 임하지파(臨河支派) 이우당(二愚堂) 권환의 종택으로 조선 인조 18년(1640)에 건립된 것이다.
□ 神主
◦ 考位
顯先祖考通訓大夫行成均館直講兼春秋館記注官府君神主
◦ 配位
顯先祖妣淑人聞韶金氏神主
顯先祖妣淑人奉化琴氏神主
顯先祖妣淑人全州柳氏神主
□ 諱日
◦ 考位 : 8月 11日
□ 略歷
선생의 본관(本貫)은 안동(安東)으로 선조(宣祖) 13년(1580)에 태어나 효종(孝宗) 2년(1652)에 몰(歿)하였다. 자(字)는 택보(宅甫)이고 호(號)는 이우당(二愚堂)으로 부솔(副率) 굉(宏)의 제(弟)이다. 한강(寒岡) 정구(鄭逑)의 문인으로 5형제가 모두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니 문장(文章)과 학식(學識)으로 이름을 드날려 ‘권씨오현자(權氏五賢者)’라는 칭찬을 받았다.
정묘호란(丁卯胡亂)에 창의(倡義)하여 의병부장(義兵副將)으로 활약하였다. 인조(仁祖) 13년(1635)에 천거되어 참봉(參奉)이 되고, 인조 17년(1639) 식년문과(式年文科) 병과(丙科)에 급제하여 직강(直講) 봉례(奉禮)를 지냈다. 저서로는 《이우당문집》 4권이 있으며, 간옹(艮翁) 이헌경(李獻慶)이 묘명(墓銘)을 지었다.
琴蘭秀
□ 位置 : 安東市 禮安面 浮浦里 444番地 惺惺齋宗宅
□ 神主
◦ 考位
顯十三代祖考贈通政大夫承政院左承旨兼經筵參贊官行通訓大夫奉化縣監府君神主
◦ 配位
顯十三代祖妣贈淑夫人橫城趙氏神主
□ 諱日
◦ 考位 : 10月 17日
◦ 配位 : 2月 12日
□ 略歷
선생의 본관(本貫)은 봉화(奉化)이며 중종(中宗) 25년(1530)에 태어나 선조(宣祖) 37년(1604)에 몰(歿)하였다. 자(字)는 문원(聞遠)이고 호(號)는 퇴계선생께서 성성재(惺惺齋)라 지어주었으며 또는 고산주인(孤山主人)이다. 선생은 타고난 자질이 후중(厚重)하고 일찍이 퇴계선생의 문인이 되었다. 아버지는 첨지중추부사 헌(憲)이며 어머니는 영양남씨로 교수 식(軾)의 딸이다.
명종(明宗) 16년(1561)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였다. 임진년(壬辰年)에 고을의 수장이 되었다. 때마침 천병(天兵,명나라 군사)이 남하함에 따라 군량미를 비축하는데 힘을 기울였다. 원종훈(原從勳)에 책록(冊錄)되고 좌승지(左承旨)에 증직되었다. 예안의 동계서원(東溪書院)에 배향되었다. 저서로는 《성재집》이 전한다.
□ 惺惺齋宗宅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264호로 지정된 이 건물은 조선 태종(太宗) 때 관령도정(官令圖正) 경상도 안찰사(按察使) 금숙(琴淑)공이 지은 것으로 전한다. 그 후 그의 현손(玄孫)인 금난수선생이 중건하였다. 원래는 부포리에 있던 것을 안동댐의 건설로 인하여 수몰될 처지가 되자 1976년 4월에 현 위치로 이건하였다. 종택 앞에서 도로를 사이에 두고 선생의 정자인 성재(惺齋)와 성성재종택이 마주하고 있다.
金 侃
□ 位置 : 安東市 豊山邑 五美里 273番地
□ 神主
◦ 考位
顯先祖考通政大夫掌隸院判決事府君神主
◦ 配位
顯先祖妣淑夫人全義李氏神主
□ 諱日
◦ 考位 : 6月 15日
◦ 配位 : 3月 2日
□ 略歷
선생의 본관(本貫)은 풍산(豊山)으로 효종(孝宗) 4년(1653)에 태어나 영조(英祖) 11년(1735)에 몰(歿)하였다. 자(字)는 사행(士行)이고 호(號)는 죽봉(竹峯)이다. 아버지는 진사(進士) 필신(弼臣)이며, 어머니는 통덕랑(通德郞) 천표(天標)의 딸이다.
숙종(肅宗) 19년(1693)에 사마시(司馬試), 36년(1710)에 문과(文科), 37년 황산도찰방(黃山道察訪)에 등용되었다. 그 후 예조정랑(禮曹正郞)․병조정랑(兵曹正郞)․사헌부장령(司憲府掌令)을 지냈다. 영조(英祖) 8년(1732)에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오르고 장예원판결사(掌隸院判決事)․호군판결사(護軍判決事)가 되었다. 영조 무신년(戊申年, 1728) 정희량(鄭希亮)의 난에 수창의(首倡義)로 공을 세웠다.
안동 낙연서원(洛淵書院)에 봉향되었다. 대사간(大司諫) 청대(淸臺) 권상일(權相一)이 행장(行狀)을 지었고, 저서로《죽봉문집》2책이 전한다.
金係行
□ 位置 : 安東市 吉安面 黙溪里 705番地 寶白堂宗宅
□ 神主
◦ 考位
顯先祖考通政大夫弘文館副提學知製敎兼經筵參贊官春秋館修撰官贈資憲大夫吏曹判書兼知經筵義禁府春秋館事弘文館大提學藝文館大提學知成均館事五衛都摠府都摠管諡定獻公府君神主
◦ 配位
顯先祖妣贈貞夫人利川徐氏神主
顯先祖妣贈貞夫人宜寧南氏神主
□ 諱日
◦ 考位 : 12月 17日
□ 略歷
선생의 본관(本貫)은 안동(安東)으로 세종(世宗) 13년(1431)에 태어나 중종(中宗) 12년(1517)에 몰(歿)하였다. 자(字)는 취사(取斯)이고 호는 보백당(寶白堂)이다. 아버지는 비안현감 삼근(三近)이며 풍산현 남불정촌(南佛頂村)에서 출생하였다. 17세에 생원시(生員試)에 합격하였으나 과운(科運)이 따르지 않아 50세 되던 성종 11년(1480)에 식년문과에 급제하여 고령현감으로 나가 청렴공직으로 치적을 거두었다. 그 후 내직으로 옮겨 홍문관부수찬(弘文館副修撰)으로 들어와 정언(正言)과 직언(直言)으로 시폐(時弊)를 논박(論駁) 함에 권신들의 미움을 사서 파직(罷職) 되었다. 그 후 4년 뒤 다시 헌납(獻納), 장령(掌令) 등 6조(曹)의 관직을 거쳐 대사간(大司諫), 대사성(大司成), 대사헌(大司憲)이 되었다.
이조판서(吏曹判書), 양관(兩館) 대제학(大提學)에 증직(贈職) 되었으며 시호(諡號)는 정헌(定獻)이고 묵계서원(黙溪書院)에 봉향되었다.
金
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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宏 |
宏
□ 位置 : 安東市 一直面 龜尾里
귀와종택(龜窩宗宅)과 묘우(廟宇)는 1950년 한국전쟁 당시 폭격으로 소진(燒盡)된 후 복원하지 못하였으며, 자운정(紫雲亭)만 인근에 보존되고 있다. 따라서 불천위제사는 지방행사(紙榜行事)하고 있다.
□ 神主
◦ 考位
顯八代祖考嘉善大夫行禮曹參判兼同知經筵春秋館事義禁府事五衛都摠府副摠管府君神位
◦ 配位
顯八代祖妣貞夫人眞城李氏神位
顯八代祖妣貞夫人碧珍李氏神位
□ 諱日
◦ 考位 : 6月 26日
◦ 配位 : 眞城李氏 5月 1日
碧珍李氏 6月 29日
□ 略歷
선생의 본관(本貫)은 의성(義城)으로 영조(英祖) 15년(1739)에 태어나 순조(純祖) 16년(1816)에 몰(歿)하였다. 자(字)는 자야(子野)이고 호(號)는 귀와(龜窩)이다. 오우당(五友堂) 근(近)의 후(后)이며, 아버지는 생원(生員) 광헌(光憲)이다.
대산(大山) 이상정(李象靖)의 문인으로 심학(心學)을 전수하였다. 35세 때 생원시에 합격하고 정조(正祖) 때에 문과에 급제하였다. 풍도(風度)가 엄정(嚴整)하고 골상(骨象)이 준위(俊偉)하며 학문과 행검(行檢)이 뛰어나 사림의 추중(推重)을 받았다.
관(官)은 예조참판(禮曹參判)을 지냈으며, 저서로 문집 7책과 속집 4책이 있다.
金大賢
□ 位置 : 安東市 豊山邑 五美里 233番地 悠然堂宗宅
□ 神主
◦ 考位
顯先祖考贈嘉善大夫吏曹參判兼同知義禁府事行朝奉大夫山陰縣監晋州鎭管兵馬節制都尉府君神主
◦ 配位
顯先祖妣贈貞夫人全州李氏神主
□ 諱日
◦ 考位 : 3月 11日
◦ 配位 : 2月 3日
□ 略歷
선생의 본관(本貫)은 풍산(豊山)으로 명종(明宗) 8년(1553)에 태어나 선조 35년(1602) 몰(歿)하였다. 자(字)는 희지(希之)이고 호(號)는 유연당(悠然堂)이다. 공은 청백리(淸白吏) 양진(楊震)의 증손(曾孫)이고 문정공(文靖公) 의정(義貞)의 손자(孫子)이며 증좌승지(贈左承旨) 농(農)의 아들이다.
유연당은 우계(牛溪) 성혼(成渾)의 문인으로 선조 15년(1582) 사마시에 합격하였다. 선조 27년 성현도찰방(省峴道察訪), 31년 예빈시주부(禮賓寺主簿), 34년(1601) 산음현감(山陰縣監)에 제수되었다. 슬하의 8형제가 진사에 이르고 그 가운데 5형제는 문과(文科)에 급제하자 인조 임금께서 “팔연오계(八蓮五桂)”라 하고 마을 이름을 “오미(五美)”라 지어 하사하였다.
선생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안집사(按集使) 김륵(金玏)과 함께 고향에서 향병(鄕兵)을 모아 왜적과 싸웠다. 구호서원(鷗湖書院)에 제향(祭享) 되었으며 우복(愚伏) 정경세(鄭經世)가 묘명(墓銘)을 짓고 저서로 《유연당집(悠然堂集)》이 있다.
金誠一
□ 位置 : 安東市 西後面 金溪里 856番地 鶴峰宗宅
□ 神主
◦ 考位
顯先祖考嘉善大夫行慶尙道觀察使兼巡察使兵馬水軍節度使贈資憲大夫吏曹判書兼知經筵義禁府春秋館成均館事弘文館大提學藝文館大提學五衛都摠府都摠管諡文忠公府君神主
◦ 配位
顯先祖妣貞夫人永嘉權氏神主
□ 諱日
◦ 考位 : 4月 29日
◦ 配位 : 4月 1日
□ 略歷
선생의 본관(本貫)은 의성(義城)으로 중종(中宗) 33년(1538)에 태어나 선조 26년(1593) 몰(歿)하였다. 자(字)는 사순(士純)이고 호(號)는 학봉(鶴峰)이며 청계(靑溪) 진(璡)의 넷째 아들로 퇴계(退溪) 선생의 문인이다. 퇴계선생께서 선생의 행고학정(行高學精) 함을 칭찬하여 심학연원(心學淵源)을 병명(屛銘)으로 써 주었다.
선생은 진사(進士)에 합격하고 선조(宣祖) 원년(元年,1568)에 증광문과(增廣文科)에 급제하여 관(官)은 관찰사(觀察使)에 이르렀다.
일본에 사신으로 가서는 직절불굴(直節不屈) 하였으며 임진란(壬辰亂) 때에는 경상도초유사(慶尙道招諭使)로 유공(有功)하여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 1등에 책록(冊錄)되고 숙종(肅宗) 2년에 이조판서(吏曹判書)에 증직(贈職) 되었으며, 시호(諡號)는 문충(文忠)이다.
저서로 문집 11책이 있고 임천서원(臨川書院)과 사빈서원(泗濱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 雲章閣
운장각은 의성김씨학봉종택 내에 있는 유물전시관이다. 이 전시관에는 보물 제905호로 지정되어 있는 학봉김성일종손가소장전적(鶴峰金誠一宗孫家所藏典籍) 56종 261점과 보물 제906호 학봉김성일종손가소장고문서(鶴峰金誠一宗孫家所藏古文書) 17종 242점이 일괄 지정되어 전시되고 있다.
金聖鐸
□ 位置 : 安東市 臨河面 川前里 霽山宗宅
□ 神主
◦ 考位
顯九代祖考中直大夫行弘文館校理知製敎經筵侍讀官春秋館記注官府君神主
◦ 配位
顯九代祖妣淑人務安朴氏神主
□ 諱日
◦ 考位 : 4月 30日
◦ 配位 : 2月 27日
□ 略歷
선생의 본관(本貫)은 의성(義城)으로 숙종(肅宗) 10년(1684)에 태어나 영조(英祖) 23년(1747)에 몰(歿)하였다. 자(字)는 진백(振伯)이고 호(號)는 제산(霽山)이다. 약봉(藥峯) 극일(克一)의 후(后)요, 표은(瓢隱) 시온(是榲)의 증손(曾孫)이며 갈암(葛庵) 이현일(李玄逸)의 문인(門人)이다.
귀록(歸鹿) 조현명(趙顯命)의 천(薦)으로 어전(御前)에서 강론(講論)하고 유일(遺逸)로 단성현감(丹城縣監)에 제수되었으나 상소사퇴(上疏辭退)하고 영조(英祖) 11년(1735) 증광문과(增廣文科)에 응시하여 을과(乙科)로 급제하여 주부(主簿)․전적(典籍)이 되고 후에 교리(校理)가 되었다. 화산풍우오룡비(花山風雨五龍飛) 중 한 사람이다. 갈암(葛庵)의 신원소(伸寃疏)를 청(請)하였으나 불윤(不允)되고 제주(濟州)에 유배(流配)되었다. 제주에서 광양(光陽)으로 이배(移配)되어 적소(謫所)에서 몰(歿)하였다.
선생은 문장가로 조정의 총애를 받았으며 성리학에 조예가 깊어 퇴계의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을 지지하였다. 저서로 문집 9책을 남겼다.
金楊震
□ 位置 : 醴泉郡 虎鳴面 稷山里 大枝齋舍
□ 神主
◦ 考位
顯先祖考嘉善大夫工曹參判府君神主
◦ 配位
顯先祖妣貞夫人陽川許氏神主
□ 諱日
◦ 考位 : 9月 16日
◦ 配位 : 11月 11日
□ 略歷
선생의 본관(本貫)은 풍산인(豊山人)으로 세조(世祖) 13년(1467)에 태어나 중종 30년(1535)에 몰(歿)하였다. 자(字)는 백기(伯起)이고 호(號)는 허백당(虛白堂)이며 아버지는 진산군수(珍山郡守) 휘손(徽孫)이다. 사가(四佳) 서거정(徐居正)에 사사(師事)하였다. 성종 20년(1489)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하고, 연산군(燕山君) 3년(1497) 별시문과에 급제하여 승정원주서(承政院注書)가 되고, 연산군 9년(1503)에 홍문관부수찬(弘文館副修撰), 중종(中宗) 원년(元年,1506)에 병조좌랑(兵曹佐郞), 4년(1509)에 홍문관교리(弘文館敎理), 12년(1517)에 홍문관부제학(弘文館副提學), 15년(1520)에 대사간(大司諫), 17년(1522)에 우승지(右承旨), 20년(1525)에 예조참의(禮曹參議)와 경주부윤(慶州府尹), 24년(1529)에 황해도관찰사(黃海道觀察使), 26년(1531)에 공조참판(工曹參判), 30년(1535)에 송도(松都) 유도재상(留都宰相)으로 숙위(宿衛)에 임하다가 향년 69세에 서세(逝世) 하였다.
선생은 청백리(淸白吏)에 녹선(錄選)되고 안동의 물계서원(勿溪書院)에 제향되었다. 학문은 역학(易學)․음양(陰陽)․복서(卜筮)에 통달하였으며 문집 2책을 남겼다. 호음(湖陰) 정사룡(鄭士龍,大提學)이 찬(撰)하고, 여서(女婿) 동고(東皐) 이준경(李浚慶,領議政)이 서(書)한 신도비(神道碑)가 있다.
□ 大枝齋舍
허백당(虛白堂) 김양진 선생을 제향하기 위하여 지은 재사이다.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173호로 지정되어 있다.
金彦璣
□ 位置 : 安東市 臥龍面 佳邱里 613番地
□ 神主
◦ 考位
顯先祖考成均生員府君神主
◦ 配位
顯先祖妣宜人英陽南氏神主
◦ 継配位
顯先祖妣宜人永川李氏神主
□ 諱日
◦ 考 位 : 3月 15日
◦ 配 位 : 12月 5日
◦ 継配位 : 8月 17日
□ 略歷
선생의 본관(本貫)은 광산(光山)으로 중종(中宗) 15년(1520)에 태어나 선조 21년(1588) 몰(歿)하였다. 자(字)는 중온(仲昷)이고 호(號)는 유일재(惟一齋)이다. 담암(潭庵) 김용석(金用石) 선생의 손자로서 구담(九潭)에서 출생하여 이계(伊溪)로 옮겼다가 만년에 가야(佳野)로 터전을 잡았다. 백담(佰潭) 구봉령(具鳳齡), 후조당(後彫堂) 김부필(金富弼), 회곡(晦谷) 권춘란(權春蘭), 송암(松巖) 권호문(權好文), 지산(芝山) 김팔원(金八元) 등 제현(諸賢)과 도의교(道義交)를 맺고 강학(講學)에 힘썼다.
명종(明宗) 22년(1567) 48세로 생원시에 합격한 뒤 다시는 진취(進取)할 생각을 갖지 않고 평생 진사로서 오로지 후진양성에 힘써 많은 인재를 배출하였으므로 화산문학(花山文學)을 융성(隆盛)시킨 주축으로 칭송되었다. 선생의 문인록(門人錄)에 오른 문도(門徒)만 189인에 달하는데 비지(賁趾) 남치리(南致利), 지헌(芝軒) 정사성(鄭士誠), 북애(北厓) 김기(金圻), 옥봉(玉峯) 권위(權暐), 장곡(藏谷) 권태일(權泰一) 등 현달한 분이 많다. “안동에 뒷날 도학이 성하게 된 것은 공의 공로가 크다(花山後來道學之盛 公之功爲多)”라는 평가를 받았다. 선생이 지은 많은 문적(文籍)이 아깝게도 회신(灰燼)되고 시서(詩書) 수 편이 《용산세고(龍山世稿)》에 전하고 있다. 용계서원(龍溪書院)과 옥계서원(玉溪書院)에 제향되었다.
金 坽
□ 位置 : 安東市 龍上洞 1189-6番地
계암(溪巖) 종택은 원래 안동시 와룡면(臥龍面) 오천리(烏川里)에 있었으나 안동댐 건설로 인하여 수몰되자 구 건물은 보존되지 못하고 14대 종손 김영탁(金永倬)이 1975년 안동시 용상동으로 이주하면서 신주(神主)를 이봉(移奉)하였다. 계암선생을 제향하던 백봉서원(白峯書院)도 복원되지 못하였다.
□ 神主
◦ 考位
顯先祖考贈資憲大夫吏曹判書兼知經筵義禁府事弘文館大提學藝文館大提學知春秋館成均館事世子左賓客五衛都摠府都摠管行通訓大夫司諫院司諫兼世子侍講院輔德贈諡文貞公府君神主
◦ 配位
顯先祖妣贈貞夫人南陽洪氏神主
□ 諱日
◦ 考位 : 3月 21日
◦ 配位 : 9月 5日
□ 略歷
선생의 본관(本貫)은 광산(光山)으로 선조(宣祖) 10년(1577)에 태어나 인조(仁祖) 9년(1641)에 몰(歿)하였다. 자(字)는 자준(子峻)이고 호(號)는 계암(溪巖)이다. 설월당(雪月堂) 부륜(富倫)의 아들로 한양에서 출생하였다.
광해군(光海君) 5년(1613)에 문과에 급제하여 정자(正字)․주서(注書)․사간(司諫)을 거쳤다. 광해군의 난정(亂政)을 보고 벼슬을 버리고 귀향하였다. 인조개옥(仁祖改玉) 후에 지평(持平)․정랑(正郞)․의주판관(義州判官)․장령(掌令)․집의(執義) 등을 제수 받았으나 불사이군지의(不事二君之義)로 불취(不就)하니 문간공(文簡公) 정온(鄭蘊)이 “탄왈오왕조계암공(嘆曰吾王朝溪巖公)은 무왕조(武王朝)에 백이(伯夷)와 같다” 하였으며, 병자난(丙子亂)에는 가재(家財)를 털어 군비를 보조하고 이후 축불서향좌(逐不西向坐)하였다. 존주록(尊周錄)에 척화제1등(斥和第一等)으로 재록(載錄)되었으며 약관시절(弱冠時節)에는 지지(地誌)를 모아 천하지도(天下地圖)를 만들었다.
숙종(肅宗)께서 지조지확(志操之確)과 풍절지고(風節之高)는 위사림긍식(爲士林矜式)이라 하고 도승지(都承旨)의 증직을 내렸다. 영조(英祖)께서 지절을 가상히 여겨 은(殷)나라 삼인(三仁)에 비하였고, 정조(正祖)께서 김계암(金溪巖)의 사실이 심(甚)히 탁연(卓然)하니 후손을 녹용(錄用)하라는 교지(敎旨)를 내렸다.
순조(純祖) 계유년(癸酉年)에 자헌대부이조판서겸양관대제학(資憲大夫吏曹判書兼兩館大提學)을 추증하고, 갑술년(甲戌年)에 문정공(文貞公)의 시호(諡號)가 내리니 도덕박문왈(道德博聞曰) 문(文)이요 청백수절왈(淸白守節曰) 정(貞)이라.
저서로 문집(文集) 6권 4책과 39년간의 일기(日記) 8책이 전한다.
金 涌
□ 位置 : 安東市 臨河面 川前里 279番地 龜峯宗宅
□ 神主
◦ 考位
顯先祖考通政大夫兵曹參議知製敎贈資憲大夫吏曹判書兼知經筵義禁府春秋館事弘文館大提學藝文館大提學知成均館事府君神主
◦ 配位
顯先祖妣贈貞夫人李氏神主
□ 諱日
◦ 考位 : 10月 19日
◦ 配位 : 10月 9日
□ 略歷
선생의 본관(本貫)은 의성(義城)으로 명종(明宗) 12년(1557)에 태어나 광해군(光海君) 12년(1620) 몰(歿)하였다. 자(字)는 도원(道源)이고 호(號)는 운천(雲川)이다. 귀봉(龜峯) 수일(守一)의 아들로 일직(一直) 귀미(龜尾)에서 출생하였다.
선생은 의표(儀表)가 준수(俊秀)하고 총명(聰明)하여 일찍이 학문에 정진함으로써 조부(祖父) 진(璡)으로부터 전해오던 보검(寶劍)을 수상(受賞)하였다. 숙부(叔父) 학봉(鶴峰)에게 수업(受業)하여 선조 23년(1590) 문과에 급제하고 관(官)은 병조참의(兵曹參議)이다. 임진왜란의 호종공(扈從功)으로 이조판서(吏曹判書)에 증직 되었다.
선생이 기록한 “호종일기(扈從日記)”는 임진왜란이 발발한 뒤 의주로 몽진한 선조를 수행하며 쓴 것으로 당시의 모든 정사를 자세하게 기록하여 사료로써의 가치가 높아 보물 제484호로 지정되어 보존되고 있다. 또한 옥적(玉笛), 매화연(梅花硯), 연하침(烟霞枕) 등의 유품을 후손에게 남겼다. 저서는 문집 9권 5책이 있다.
□ 龜峯宗宅
경상북도 민속자료 제35호로 지정된 이 건물은 현종(顯宗) 원년(元年, 1660)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며 내앞 작은 종가로 알려져 있다. 조선 중기의 전형적인 종가(宗家)의 건축양식을 잘 보여주는 것으로 고종(高宗) 25년(1888) 선생의 12세손인 김주병(金周秉) 공이 중수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金 璡
□ 位置 : 安東市 臨河面 川前里 280番地 義城金氏宗宅
□ 神主
◦ 考位
顯十六代祖考贈資憲大夫吏曹判書兼知義禁府事成均生員府君神主
◦ 配位
顯十六代祖妣贈貞夫人驪興閔氏神主
□ 諱日
◦ 考位 : 4月 23日
◦ 配位 : 6月 14日
□ 略歷
선생의 본관(本貫)은 의성(義城)으로 연산군(燕山君) 6년(1500)에 태어나 선조 13년(1580)에 몰(歿)하였다. 자(字)는 영중(瑩仲)이고 호(號)는 청계(靑溪)이다. 아버지는 임하현(臨河縣) 천전리에 정착한 증(贈) 승지(承旨) 예범(禮範)이다. 중종(中宗) 20년(1525)에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였다. 공은 어려서부터 성행(性行)이 엄정(嚴正)하고 후진교도(後進敎導)에 진력하여 전암서당(傳巖書堂)과 임천서당(臨川書堂)을 창건하였다.
선생은 시속(時俗)에 구애(拘碍)받지 않고 직정(直情)으로 행의(行義)하여 다섯 아들에게 “사람이 차라리 곧은 도(道)를 지키다 죽을지언정 무도(無道)하게 사는 것은 옳지 않으니, 너희들이 군자가 되어 죽는다면 나는 그것을 살아 있는 것으로 여길 것이고, 만약 소인으로 산다면 그것을 죽은 것으로 볼 것이다.”라고 훈계하였다. 이와 같은 선생의 가르침으로 아들 3명이 문과에 급제하고, 2명이 소과(小科)에 급제하여 천전파(川前派)의 문호(門戶)를 크게 열어 유림대가(儒林大家)의 터전을 닦았다.
관직은 자헌대부이조판서겸지의금부사(資憲大夫吏曹判書兼知義禁府事)로 증직(贈職) 되었으며, 안동의 사빈서원(泗濱書院)에 제향되었다.
□ 義城金氏宗宅
이 집은 16세기에 불타 없어졌던 것을 학봉(鶴峰) 김성일(金誠一,1538~1593) 선생이 재건한 것이다. 16세기 말 학봉 선생이 명나라 사행길에 북경에서 그 곳 상류층 주택의 도본을 그려다가 완성했기 때문에 배치나 구조에 있어서 독특한 점이 많다. 건물은 ‘ㅁ’ 자형 안채와 ‘-’ 자형의 사랑채가 행랑채와 기타 부속채로 연결되어 전체적으로 ‘巳’ 자형의 평면을 이루고 있다.
□ 靑溪先生影幀
보물 제1221호로 지정된 영정은 제작 연도와 작가는 알려지지 않았으나 청계선생이 72세 경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며 섬세(纖細)한 마포(麻布)에 그려졌다. 종택 내 사당에 영정실이 따로 마련되어 보관되고 있다.
□ 遺物展示館
청계선생과 그 후손들의 교지(敎旨), 책판(冊版) 등 많은 유물을 소장하여 전시하고 있다.
柳景深
□ 位置 : 安東市 豊川面 河回里
귀촌(龜村)선생의 종택은 보존되지 못하고 묘우(廟宇)만 하회리에 남아 있어 아쉬웠으나 2000년에 서애(西厓) 선생의 6대 손인 류성오(柳聖五)의 아들 임여재(臨汝齋) 류규(柳 )의 고택이던 임여재(臨汝齋)를 매입하여 귀촌종택이라 편액하고 선생의 묘우를 옮겨와 새롭게 단장했다.
□ 神主
◦ 考位
顯先祖考嘉善大夫司憲府大司憲府君神主
◦ 配位
顯先祖妣貞夫人裵氏神主
□ 諱日
◦ 考位 : 6月 2日
◦ 配位 : 7月 21日
□ 略歷
선생의 본관(本貫)은 풍산(豊山)으로 중종(中宗) 11년(1516)에 태어나 선조(宣祖) 4년(1571)에 몰(歿)하였다. 선생의 자(字)는 태호(太浩)이고 호(號)는 귀촌(龜村)이다. 선생은 하회 입향조인 공조전서 종혜(從惠)의 현손(玄孫)이며 공조정랑을 지낸 공권(公權)의 아들이고 입암(立巖) 류중영(柳仲郢)의 종제(從弟)이다.
중종(中宗) 32년(1537) 생원(生員), 진사(進士) 양시에 합격(合格)하였으며, 갑진년(甲辰年, 1544) 별시문과(別試文科)에 급제(及第)하였다. 이어서 명종(明宗) 1년(1546) 중시문과(重試文科)에 장원급제(壯元及第)하여 옥당대사헌(玉堂大司憲)에 제수(除授)되었다. 그 후 병조(兵曹)․호조(戶曹) 참판(參判)을 두루 거쳐 북병사(北兵使)를 역임(歷任)하였다. 선조 4년(辛未年, 1571)에 평안감사(平安監司)로 재직 중 지병이 악화되어 체임(遞任)을 상소하여 중추부사가 되어 돌아오던 도중 6월 2일 장단(長端)에서 졸(卒)하였다.
국왕(國王)이 관(棺)을 하사(下賜)하였으며 귀장(歸葬)하게 했다. 부조전(不祧奠)을 명(命)하였다.
柳成龍
□ 位置 : 安東市 豊川面 河回里 650番地 忠孝堂
충효당은 졸재(拙齋) 류원지(柳元之)가 건립(建立)하였고 그 후 서애 선생의 증손(曾孫)인 익찬(翊贊) 류의하(柳宜河)가 확장중수(擴張重修)하여 52칸(間)이며 현판(懸板)은 미수(眉叟) 허목(許穆)이 썼다.
□ 神主
◦ 考位
顯先祖考輪忠翼謨光國忠勤貞亮効節恊策扈聖功臣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領議政兼領經筵弘文館藝文館春秋館觀象監事世子師豊原府院君贈諡文忠公府君神主
◦ 配位
顯先祖妣貞敬夫人李氏神主
□ 諱日
◦ 考位 : 5月 6日
◦ 配位 : 7月 25日
□ 略歷
선생의 본관(本貫)은 풍산(豊山)으로 중종(中宗) 37년(1542)에 태어나 선조(宣祖) 40년(1607)에 몰(歿)하였다. 자(字)는 이현(而見)이고 호(號)는 서애(西厓)이다. 입암(立巖) 중영(仲郢)의 아들이고 겸암(謙菴) 운룡(雲龍)의 제(弟)이다.
퇴계(退溪) 선생의 문인(門人)으로 태어날 때부터 영수(瑩粹)하여 퇴계는 “이 아이는 하늘이 낸 사람이다”라고 칭탄(稱歎)을 아끼지 않았다. 퇴계의 가르침이 강명천리(講明踐履)로 선생의 연원정맥(淵源正脈)이 되었다. 명종(明宗) 19년(1564)에 생원과 진사시(進士試)에 합격(合格)하고 명종 21년(1566) 별시문과에 급제(及第)하여 호당(湖堂)과 대제학(大提學)을 거쳐 광국(光國)과 호성(扈聖) 양훈(兩勳)에 봉해졌고 풍원부원군(豊原府院君)이 되었다. 관직(官職)은 영의정(領議政)으로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출장입상(出將入相)하여 경세대업(經世大業)이 당시(當時) 제일(第一)로 사림(士林)에서는 태산북두(泰山北斗)와 같이 추앙하였다.
시호(諡號)는 문충(文忠)이고 문집(文集) 20책(冊)과 징비록(懲毖錄) 6책(冊)이 전하며 병산서원(屛山書院) 외 5개 서원에 제향(祭享)되었다.
柳升鉉
□ 位置 : 龜尾市 海平面 一善里 慵窩宗宅
이 건물은 숙종(肅宗) 36년 안동시(安東市) 임동면(臨東面) 박곡리(朴谷里)에 세워졌으나 임하댐 건설로 인하여 현 위치로 이건(移建)되었다. 원래 불천위(不遷位) 묘우(廟宇)가 따로 없고 위패(位牌)는 외당(外堂)에 벽감(壁龕)으로 모시고 있다. 현재 불천위 제사는 5월 5일 정일로 행사한다.
□ 神主
◦ 考位
顯先祖考通政大夫工曹參議贈嘉善大夫吏曹參判兼同知經筵義禁府事弘文館提學同知春秋館成均館事五衛都摠府副摠管府君神主
◦ 配位
顯先祖妣貞夫人金氏神主
□ 諱日
◦ 考位 : 3月 28日
◦ 配位 : 12月 27日
□ 略歷
선생의 본관(本貫)은 전주(全州)로 숙종 6년(1680)에 태어나 영조(英祖) 22년(1746)에 몰(歿)하였다. 자(字)는 윤경(允卿)이고 호(號)는 용와(慵窩)이다. 선생은 기봉(岐峰) 복기(復起)의 후(后)이고 봉시(奉時)의 장자(長子)이다.
숙종 45년(1719) 증광문과(增廣文科)에 급제(及第)하여 성균관(成均館) 전적(典籍)에 임용(任用)되고 양사(兩司)를 거쳐 공조참의(工曹參議)를 지냈다. 또 이인좌(李麟佐)의 난(亂) 때 의병대장(義兵大將)에 추대(推戴)되어 진충(盡忠)함에 왕(王)으로부터 궁시(弓矢)를 하사(下賜)받고 녹훈(錄勳)되었다. 종성부사(鍾城府使)를 물러나 향리로 돌아와서는 화죽(花竹)을 심고 시서(詩書)를 읽으며 유연자적(悠然自適)하였다. 그 후 다시 풍기군수(豊基郡守)가 되어 관직(官職)에서 순직(殉職)하였으며 이조참판(吏曹參判)에 증직(贈職)되었다. 저서로 문집 2책(二冊)이 있다.
柳雲龍
(花川書院) |
□ 位置 : 安東市 豊川面 河回里 729番地 養眞堂
□ 神主
◦ 考位
顯先祖考贈資憲大夫吏曹判書兼知義禁府事成均館祭酒世子侍講院贊善五衛都摠府都摠管諡文敬公行通政大夫原州牧使兼原州鎭管僉節制使府君神主
◦ 配位
顯先祖妣貞夫人鐵城李氏神主
□ 諱日
◦ 考位 : 3月 5日
◦ 配位 : 9月 16日
□ 略歷
선생의 본관(本貫)은 풍산(豊山)으로 중종(中宗) 34년(1539)에 태어나 선조(宣祖) 34년(1601)에 몰(歿)하였다. 자(字)는 응현(應見)이고 호(號)는 겸암(謙菴)이며 입암(立巖) 중영(仲郢)의 맏아들이다.
처음으로 퇴계(退溪) 선생의 문하(門下)에 오르게 되자 여러 제자(弟子)들이 따라 왔다. 퇴계 선생이 돌아가시기 전일(前日)에 “孔聖猶箴擇里人 曾云文會輔成人”이라는 시(詩)를 지어주어 더욱 학문(學問)에 힘쓰게 했다.
인동현감(仁同縣監)으로 있을 때는 법(法)으로 백성(百姓)을 공평(公平)하게 다스렸고 오산서원(吳山書院)을 창건하고 지주중류비(砥柱中流碑)를 세워 고을에 충절의 기풍을 진작시켰다. 임진왜란(壬辰倭亂) 때에는 풍기군수(豊基郡守)로서 멀리 의주(義州)의 행재소(行在所)에 정조문안사(正祖問安使)를 보냈고 국군편의소(國軍便宜疏)를 올렸다. 관(官)은 원주목사(原州牧使)에 제수(除授)되었으나 오래지 않아 사임(辭任)하였다. 이조판서(吏曹判書)로 추증(追贈)되었고 시호(諡號)는 문경(文敬)이다.
선생은 우곡서원(愚谷書院)과 화천서원(花川書院)에 제향(祭享)되었으며 문집(文集) 5책(五冊)이 있다.
柳正源
□ 位置 : 安東市 禮安面 舟津里 830番地 三山宗宅
이 건물은 삼산(三山) 류정원(柳正源) 선생의 종택으로 영조(英祖) 26년(1750)에 건립하였으며 경상북도 민속자료 제36호로 지정되어 있다. 건물은 대문채․사랑채․안채와 사당으로 구성되어 있다. 사당에 모셔오던 신주는 6․25 전쟁으로 종손이 행방불명되고 혼란 중에 종택과 묘우를 지키기 어려워 위패를 장주(藏主)하고 현재는 지방(紙榜)으로 제향(祭享)하고 있다.
□ 神主
◦ 考位
顯先祖考通政大夫司諫院大司諫知製敎府君神位
◦ 配位
顯先祖妣淑夫人宣城李氏神位
顯先祖妣淑夫人務安朴氏神位
□ 諱日
◦ 考位 : 9月 30日
◦ 配位 : 宣城李氏 1月 20日
務安朴氏 11月 19日
□ 略歷
선생의 본관(本貫)은 전주(全州)이며 숙종(肅宗) 29년(1703)에 태어나 영조(英祖) 37년(1761)에 몰(歿)하였다. 자(字)는 순백(淳伯)이고 호(號)는 삼산(三山)으로 석구(錫龜)의 아들이다.
선생은 생원시(生員試)를 거쳐 영조 11년(1735) 증광문과(增廣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及第)하여 관(官)은 대사간(大司諫)을 지냈다. 경연(經筵)에 입시(入侍)하여 장헌세자(莊獻世子)에게 진강(進講)했다. 선생이 고을 수령으로 있을 때에는 선정(善政)을 베푼 일이 목민(牧民)의 의절(儀節)이라 《목민심서(牧民心書)》에 그 치적(治績)을 적고 있다.
선생의 학문(學問)은 경학(經學)과 이학(理學)에 더욱 깊은 연구(硏究)가 있었다. 공은 문장(文章)이 뛰어나고 법도(法度)가 있었음으로 눌은(訥隱) 이광정(李光庭)이 평(評)하기를 “당대(當代)에 문학(文學)을 하는 선비로 비견(比肩)할만한 사람이 드물다.”라고 하였다.
저서(著書)에《역해참고(易解參攷)》10책,《하락지요(河洛指要)》1편,《삼산집(三山集)》4책이 있다.
柳仲淹
□ 位置 : 安東市 豊川面 廣德1里 111番地 巴山宗宅
□ 神主
◦ 考位
顯先祖考巴山處士府君神主
◦ 配位
顯先祖妣儒人永川李氏神主
□ 諱日
◦ 考位 : 12月 24日
◦ 配位 : 4月 7日
□ 略歷
선생의 본관(本貫)은 풍산(豊山)으로 중종(中宗) 33년(1538)에 태어나 선조(宣祖) 4년(1571)에 몰(歿)하였다. 자(字)는 희범(希范)이고 호(號)는 파산(巴山)이다. 선생은 참봉(參奉) 공석(公奭)의 아들로 숙부(叔父)인 공계(公季)에게 출계하였기 때문에 겸암(謙菴)과 서애(西厓)의 종숙부(從叔父)가 된다. 입암(立巖) 중영(仲郢)의 종제(從弟)이다.
공은 퇴계(退溪) 선생의 문인(門人)으로 종질(從姪)인 겸암(謙菴), 서애(西厓)와 동문수학(同文修學)하여 위기지학(爲己之學)에 전심(專心)하였으나 34세에 조몰(早歿)하였다. 선생은 비지(賁趾) 남치리(南致利) 선생과 함께 세칭(世稱) ‘공자(孔子) 문하(門下)의 안자(顔子)에 견주어 계문(溪門)의 안자(顔子)’라고 칭했다.
선생은 분강서원(汾江書院)과 타양서원(陁陽書院)에 제향(祭享)되었으며, 저서는 거의 난리에 유실되고 몇 편의 글이《파산일고(巴山逸稿)》로 남아 있다.
柳仲郢
□ 位置 : 安東市 豊川面 河回里 729番地 立巖古宅(養眞堂)
□ 神主
◦ 考位
顯先祖考贈純忠積德補祚功臣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領議政兼領經筵弘文館藝文館春秋館觀象監事世子師豊山府院君行通政大夫守黃海道觀察使兼兵馬水軍節度使府君神主
◦ 配位
顯先祖妣貞敬夫人金氏神主
□ 諱日
◦ 考位 : 7月 13日
◦ 配位 : 8月 21日
□ 略歷
선생의 본관(本貫)은 풍산(豊山)으로 중종(中宗) 10년(1515)에 태어나 선조(宣祖) 6년(1573)에 몰(歿)하였다. 자(字)는 언우(彦遇)이고 호(號)는 입암(立巖)이다. 군수(郡守) 공작(公綽)의 아들이고 이향례(李享禮)의 외손(外孫)이며 서애(西厓) 류성룡(柳成龍)의 아버지이다.
공은 중종 35년(1540) 문과(文科)에 급제(及第)하여 성균관(成均館) 박사(博士)가 되고 전적(典籍), 감찰(監察), 정랑(正郞) 등 여러 벼슬을 거쳐 목사(牧使)와 황해도관찰사(黃海道觀察使)를 지냈다. 아들 서애(西厓)의 귀(貴)로 대광보국숭록대부의정부영의정(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領議政)에 추증(追贈)되고 풍산부원군(豊山府院君)에 추봉(追封)되었다. 문집(文集)이 있다.
柳 㮨
□ 位置 : 安東市 臨東面 高川里 百拙庵宗宅
□ 神主
◦ 考位
顯十二代祖考成均進士府君神主
◦ 配位
顯十二代祖妣儒人安東權氏神主
□ 諱日
◦ 考位 : 10月 20日
◦ 配位 : 1月 10日
□ 略歷
선생의 본관(本貫)은 전주(全州)이며 선조(宣祖) 35년(1602)에 태어나 현종(顯宗) 3년(1662)에 몰(歿)하니 향년 61세이다. 자(字)는 정견(廷堅)이고 호(號)는 백졸암(百拙庵)이다. 선생은 이조참판(吏曹參判)에 증직된 기봉(岐峰) 복기(復起)의 손(孫)이고 도헌(陶軒) 우잠(友潛)의 2남(二男)이다. 선생은 어려서부터 영오(穎悟)하고 기상(氣象)이 빼어났으며 효성(孝誠)이 지극(至極)하였다.
인조(仁祖) 8년(1603) 사마시(司馬試)에 합격(合格)하고 꾸준히 학문(學問)에 정진(精進)하여 유림(儒林)의 중망(重望)이 높았다. 인조 11년(1635)에 황해도(黃海道) 유생(儒生)들이 율곡(栗谷) 이이(李珥)를 문묘(文廟)에 배향(配享)하려는 논의(論議)를 일으키자 일부 조신(朝臣)들이 우계(牛溪) 성혼(成渾)도 함께 배향(配享)하기를 소청(疏請)하였는데 인조가 이를 허(許)하지 않았다.
그 후 효종 1년(1650)에 성균관(成均館)에서 또다시 그 주장을 들고 나와 사론(士論)이 모아지기에 이르렀다. 이에 영남(嶺南) 선비들이 반대(反對)하여 소(疏)를 올릴 때에 소수(疏首)로 추대(推戴)되어 그 부당(不當)함을 주장(主張)하여 저지(沮止)시켰다. 이에 반대편(反對便)의 미움을 사게 되어 황첨(黃籤)에 붙여서 유적(儒籍)에서 빠지게 되고 과거(科擧)에 응시(應試)할 자격(資格) 마저 잃게 되었다.
선생은 그 후에 향리(鄕里)에 서재(書齋)를 지어 백졸암(百拙庵)이라고 하고 학문에 전심(專心)하면서 후학양성(後進養成)에 심력(心力)를 바쳤다. 문집(文集) 2책이 있다.
柳致明
□ 位置 : 安東市 臨東面 水谷里 1037番地 定齋宗宅
이 건물(建物)은 안동시(安東市) 임동면(臨東面) 수곡리(水谷里) 대평(大坪)마을에 있었으나 임하댐 건설로 인하여 1987년 현 위치(現位置)로 이건(移建)하였다.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25호로 지정되어 있다.
□ 神主
◦ 考位
顯六代祖考嘉義大夫行兵曹參判同知義禁府春秋館事府君神主
◦ 配位
顯六代祖妣貞夫人金氏神主
顯六代祖妣貞夫人申氏神主
□ 諱日
◦ 考位 : 10月 6日
◦ 配位 : 金氏 1月 2日
申氏 1月 10日
□ 略歷
선생의 본관(本貫)은 전주(全州)이며 정조(正祖) 1년(1777)에 태어나 철종(哲宗) 12년(1861)에 몰(歿)하였다. 자(字)는 성백(誠伯)이고 호(號)는 정재(定齋)이다. 선생은 형조참의(刑曹參議) 양파(陽坡) 관현(觀鉉)의 증손(曾孫)이며 생원(生員) 성휴(星休)의 손자(孫子)이고 진사(進士) 한평(寒坪) 회문(晦文)의 아들이다.
선생은 어려서는 지둔(遲鈍)하였으나 자라면서 재주가 뛰어나 증숙조(曾叔祖)인 동암(東巖) 장원(長源)에게 수학하였다. 동암 사후에는 손재(損齋) 남한조(南漢朝)의 문인(門人)으로 들어가서 퇴계(退溪) 선생의 연원적전(淵源適傳)이라 일컬어졌다. 대산(大山) 이상정(李象靖) 선생의 학문(學問)을 강명(講明)하여 후진을 계몽하였다.
순조(純祖) 5년(1805) 증광문과(增廣文科)에 급제(及第)한 후 지평(持平), 수찬(修撰), 대사간(大司諫) 등 여러 관직(官職)을 거쳐 병조참판(兵曹參判)에 이르렀다.
저서(著書)로는《가례집해(家禮輯解)》,《주절휘요(朱節彙要)》,《대학동자문(大學童子問)》,《태극도해(太極圖解)》,《대산실기(大山實記)》,《정재문집(定齋文集)》27책 등이 있다.
柳徽文
□ 位置 : 龜尾市 海平面 一善里 好古窩宗宅
이 건물(建物)의 건축시기(建築時期)는 확실(確實)하게 알 수 없으나 순조조(純祖朝)에 호고와(好古窩) 류휘문(柳徽文) 선생이 지은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원래 안동시(安東市) 임동면(臨東面) 마령리(馬嶺里)에 있었으나 임하댐 건설로 인하여 1987년 현위치(現位置)로 이건(移建)하였다. 불천위 위패는 묘우(廟宇)가 따로 없이 외당(外堂)에 벽감(壁龕)으로 모시고 있다.
□ 神主
◦ 考位
顯先祖考從仕郞行莊陵參奉府君神主
◦ 配位
顯先祖妣恭人寧海申氏神主
顯先祖妣恭人東萊鄭氏神主
□ 諱日
◦ 考位 : 12月 1日
◦ 配位 : 寧海申氏 1月 29日
東萊鄭氏 4月 25日
□ 略歷
선생의 본관(本貫)은 전주(全州)이며 영조(英祖) 49년(1773)에 태어나 순조(純祖) 27년(1827)에 몰(歿)하였다. 자(字)는 공회(公晦)이고 호(號)는 호고와(好古窩)로 삼산(三山) 정원(正源)의 손(孫)이요 만휴(萬休)의 아들이다.
선생은 어려서부터 동암(東巖) 장원(長源)에게 수학(修學)하였고 후에 손재(損齋) 남한조(南漢朝) 선생과 입재(立齋) 정종로(鄭宗魯) 선생을 사사(師事)하여 성리학(性理學)을 탐구(探究)하였다. 또 선생은 선기옥형(璿璣玉衡)을 만들어 일월성신(日月星辰)의 운행(運行)을 보았다.
선생은 추천(推薦)으로 후릉참봉(厚陵參奉)에 제수(除授)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저서로는 《소학장구(小學章句)》,《소학동자문(小學童子問)》,《계몽익요(啓蒙翼要)》,《창랑문답(滄浪問答)》,《염락풍아보유( 洛風雅補遺)》,《주역통편(周易通篇)》 등 수많은 저술(著述)을 남겼다. 문집(文集) 10책이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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裵三益
□ 位置 : 安東市 松川洞 1017番地 臨淵齋宗宅
□ 神主
◦ 考位
顯十四代祖考通政大夫守黃海道觀察使兼兵馬水軍節度使府君神主
◦ 配位
顯十四代祖妣貞夫人英陽南氏神主
□ 諱日
◦ 考位 : 7月 1日
◦ 配位 : 4月 11日
□ 略歷
선생의 본관(本貫)은 흥해(興海)이다. 중종(中宗) 29년(1534)에 태어나 선조(宣祖) 21년(1588)에 몰(歿)하였다. 자(字)는 여우(汝友)이고 호(號)는 임연재(臨淵齋)이다. 아버지는 백죽당(栢竹堂) 배상지(裵尙志)의 7대손 천석(天錫)이다. 퇴계 선생의 문하에 나아가 크게 칭찬을 받았는데 선생께서 “임연재도목촌(臨淵齋桃木村)”이라는 6대자(大字)와 경재잠(敬齋箴)․숙흥야매잠(夙興夜寐箴)을 써주었다.
명종(明宗) 13년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고, 동(仝) 15년 문과에 급제하여 성균관학유(成均館學諭) 박사(博士)를 거쳐 호조좌랑(戶曹佐郞)이 되었다. 그 후 부사(府使)․교리(校理) 등 내․외직을 역임하고 승지(承旨), 판결사(判決事)를 지낸 후 황해도관찰사(黃海道觀察使)가 되었다.
진사사(陳謝使)로 명나라에 가서 종계(宗系)를 바로 잡고 회전개정초본(會典改正草本)을 받아왔으며 신종황제(神宗皇帝)로부터 여러 진귀한 보물을 수상하였다.
저서로는 문집 4책이 있으며, 도생서원(道生書院)에 제향되었다.
邊中一
□ 位置 : 安東市 西後面 金溪里 162番地 簡齋宗宅
□ 神主
◦ 考位
顯先祖考通政大夫僉知中樞府事府君神主
◦ 配位
顯先祖妣淑夫人東萊鄭氏神主
顯先祖妣淑夫人信川康氏神主
□ 諱日
◦ 考位 : 10月 20日
◦ 配位 : 東萊鄭氏 8月 20日,
信川康氏 2月 11日
□ 略歷
선생의 본관(本貫)은 원주(原州)이며 선조(宣祖) 8년(1575)에 태어나 현종(顯宗) 1년(1660)에 몰(歿)하였다. 자(字)는 가순(可純)이고 호(號)는 간재(簡齋)이다. 문과(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及第)하여 상의원정(尙衣院正)을 지낸 동호(東湖) 영청(永淸)의 손자이다.
선조조(宣祖朝)에 건원능참봉(健元陵參奉)이 되고 효종조(孝宗朝)에 수직(壽職)으로 통정계(通政階)에 올랐다. 어려서부터 재주가 남달리 뛰어났으며 특히 출천지효(出天之孝)로 세인(世人)을 감동시켰다. 18세 때에 임진왜란(壬辰倭亂)으로 사직(社稷)이 위급(危急)함을 당하자 “비록 초야(草野)의 백성이지만 이렇듯 나라가 위태로운 고비에 마땅히 몸을 바쳐야 한다”면서 사재를 털어 군량미(軍糧米) 백석(百石)을 상주진(尙州鎭)에 실어보내고 형(兄) 희일(喜一)과 함께 진주(晋州)의 김학봉(金鶴峰) 진중(陣中)으로 달려갔으나 그때는 이미 학봉이 진중에서 몰(歿)한 후였으므로 홍의장군(紅衣將軍) 곽재우(郭再祐)의 진(陣)을 찾아가 기무(機務)에 참여했다.
선조(宣祖) 30년에 왜병(倭兵)이 다시 침입하자 화왕산성(火旺山城)과 도산전지(島山戰地)에서 국담(菊潭) 박수춘(朴壽春), 벽절(碧節) 심청(沈淸) 등 여러 의병과 함께 적을 물리치는데 사력을 다하였다. 충효정각(忠孝旌閣)을 세웠으며 금고서원(琴皐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로 《간재집》이 간행되었으며, 참판(參判) 이돈우(李敦雨)가 행장(行狀)을 찬(撰)하였고 사림의 공의(公議)로 불천위(不遷位)가 되었다.
李繼陽
□ 位置 : 安東市 陶山面 溫惠里 604番地 老松亭宗宅
□ 神主
◦ 考位
顯先祖考贈吏曹判書兼知義禁府事成均進士府君神主
◦ 配位
顯先祖妣貞夫人英陽金氏神主
□ 諱日
◦ 考位 : 5月 16日
◦ 配位 : 9月 18日
□ 略歷
선생의 본관(本貫)은 진성(眞城)으로 세종(世宗) 6년(1424)에 태어나 성종(成宗) 19년(1488)에 몰(歿)하였다. 자(字)는 달보(達甫)이고 호(號)는 노송정(老松亭)이다. 진보현인(眞寶縣人)으로 고려 말 공민왕(恭愍王) 10년(1361) 홍건적(紅巾賊)을 토벌(討伐)한 공훈(功勳)으로 송안군(松安君)에 봉(封)해지고 벼슬이 판전의(判典儀)로서 처음으로 안동으로 이거(移居)하였던 자수(子脩)의 증손(曾孫)으로 단종(端宗) 계유년(癸酉年,1453)에 진사(進士)에 합격하고, 갑술년(甲戌年,1544)에 봉화훈도(奉化訓導)가 되었다. 정축년(丁丑年,1457)에 노릉동뢰지변(魯陵冬雷之変)이 있었는데 이로 인하여 문을 닫고 자정(自靖)하였다. 단종 임금이 왕위를 빼앗기자 집 뒤 국망봉(國望峯)에 제단(祭壇)을 마련하고 정자 곁에다 만년송(萬年松)을 심고 노송(老松)으로 자호(自號)를 삼으니 세한지의(歲寒之意)에 우의함이었다.
신용개(申用漑)가 지은 공(公)의 묘명(墓銘)에 “공은 수양이 높고 효우(孝友)가 도타웠으며 세사(世事)가 뜻에 어긋나 유연히 세상 밖에 소요하니 고대일민(古代逸民)의 풍도가 있었다”고 했다. 이조판서(吏曹判書)에 증직되었으며, 향현사(鄕賢祠)에 배향(配享)되었다.
李德弘
□ 位置 : 安東市 祿轉面 元川里 艮齋宗宅
□ 神主
◦ 考位
顯先祖考贈嘉善大夫吏曹參判兼同知義禁府事行通訓大夫永春縣監府君神主
◦ 配位
顯先祖妣貞夫人英陽南氏神主
□ 諱日
◦ 考位 : 2月 19日
◦ 配位 : 6月 21日
□ 略歷
선생의 본관(本貫)은 영천(永川)으로 중종(中宗) 36년(1541)에 태어나 선조(宣祖) 29년(1596)에 몰(歿)하였다. 자(字)는 굉중(宏仲)이고 호(號)는 간재(艮齋)이다. 습독(習讀)을 지낸 현우(賢佑)의 손자이며, 효절공(孝節公) 농암(聾巖, 賢輔)의 종손자이다. 조선 중기의 성리학자로 퇴계(退溪) 선생의 문인(門人)이다.
공은 모든 학문에 뛰어났으나 특히 역학(易學)에 밝았다. 스승 퇴계의 명으로 선기옥형(璇璣玉衡, 渾天儀)를 제작하였으며 선생께서 돌아가실 때 서적을 맡으라는 명을 받았다. 선조 때에는 9현(賢)에 천거(薦擧) 되었으며 영춘현감(永春縣監)을 지냈다.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육전(陸戰)에는 학익진도(鶴翼陣圖)와 장사진도(長蛇陳圖)를 해전(海戰)에는 귀갑선도(龜甲船圖)와 침수진목전도(沈水眞木箭圖)를 첨부한 상소를 올려 왜적을 물리치는 방책(方策)을 개진(開陳)하였다.
관직은 호종1등공신(扈從一等功臣)으로 이조참판(吏曹參判)에 추증(追贈)되고, 오계서원(迃溪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계산기선록(溪山記善錄)》, 《주역질의(周易質疑)》, 《사서질의(四書質疑)》, 《심경질의(心經質疑)》, 《고문질의(古文質疑)》, 《가례주해(家禮註解)》, 《주자서절요강록(朱子書節要講錄)》, 《주자서절요기의(朱子書節要記疑》, 《심경표제(心經標題)》등이 규장각(奎章閣)에 소장되어 있고, 문집으로 《간재집(艮齋集)》이 전한다.
李溟翼
□ 位置 : 安東市 祿轉面 元川里 334番地
종택은 종손이 여러 곳으로 이거(移居)하였으므로 보존되지 못하였다. 묘우(廟宇)는 현 소재지에서 화재로 소진(燒盡) 되었던 것을 1985년에 재건하여 불천위를 봉안하고 있다.
□ 神主
◦ 考位
顯九代祖考通政大夫行司諫院大司諫府君神主
◦ 配位
顯九代祖妣贈貞夫人安東權氏神主
顯九代祖妣贈貞夫人高敞吳氏神主
□ 諱日
◦ 考位 : 12月 11日
◦ 配位 : 安東權氏 2月 5日
高敞吳氏 1月 29日
□ 略歷
선생의 본관(本貫)은 진성(眞城)으로 광해군(光海君) 9년(1617)에 태어나 숙종(肅宗) 13년(1687)에 몰(歿)하였다. 자(字)는 만리(萬里)이고 호(號)는 반초당(反招堂)이다.
인조(仁祖) 27년(1649) 별시문과(別試文科)에 급제하고 검열(檢閱), 설서(說書)를 거쳐 효종(孝宗) 8년(1657) 대교(待敎)로 임명되어 실록(實錄)을 태백산(太白山) 사고(史庫)에 봉안했다. 숙종(肅宗) 때 정언(正言), 사간(司諫), 집의(執義), 지평(持平)을 역임하고 숙종 2년(1676) 대사간(大司諫)에 이어 충청도관찰사(忠淸道觀察使)가 되었다. 관찰사 재직 중 영남에서 거둬들인 세곡(稅穀)을 가흥창(可興倉)으로 수송하는 것을 단양에서 배편으로 운반하게 함으로써 백성들의 부담을 크게 덜어주었다. 또한 영남의 부세(賦稅)는 정한 기준이 없어 백성들의 피해가 심했는데, 공이 판서(判書) 이원정(李元禎)과 함께 건의하여 충청․전라도에서 시행하고 있는 대동법(大同法)을 확대 실시하여 조세부담에 공정을 기하였다.
저서로 문집이 전하고 있으며, 번암(樊巖) 채제공(蔡濟恭)이 묘갈(墓碣)을 찬(撰) 하였다.
李山斗
□ 位置 : 安東市 豊山邑 下里 3番地
난졸재(懶拙齋) 선생 종택은 보존되지 못하고 선생의 7대조인 병조판서(兵曹判書) 양정공(襄靖公)의 별묘(別廟)와 입향조(入鄕祖)인 전농정(典農正) 웅(雄)이 소요하던 침류정(枕流亭)이 이웃하고 있다. 묘우에 난졸재 선생의 영정(影幀)과 위패(位牌)가 봉안되어 있다. 구 종택 자리에 양옥으로 집을 지어 제향을 받들고 있다.
□ 神主
◦ 考位
顯先祖考正憲大夫知中樞府事兼五衛都摠府都摠管贈諡淸憲公府君神主
◦ 配位
顯先祖妣貞敬夫人安東權氏神主
□ 諱日
◦ 考位 : 4月 19日
◦ 配位 : 2月 2日
□ 略歷
선생의 본관(本貫)은 전의(全義)이다. 숙종(肅宗) 6년(1680)에 태어나 영조(英祖) 48년(1772)에 몰(歿)하였다. 자(字)는 우앙(宇昻)이고 호(號)는 난졸재(懶拙齋)이다. 세조(世祖) 때 병조판서(兵曹判書)를 지낸 양정공(襄靖公) 화(樺)의 7대손이다.
공은 강의청개(剛毅淸介)하고 학가전적(學邃專積)하여 영조 9년(1733)에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관(官)은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이다. 기노사(耆老社)에 등입(登入)하니 왕이 화가2폭(畵家二幅)을 그리게 하여 친필(親筆)로 ‘지중추이산두(知中樞李山斗)’ 6자를 써주었다. 또한 원손(元孫)인 정조(正祖)에게 명하여 “九十歲像”이라는 4자를 휘호(揮毫)케 하였다.
시호(諡號)는 청헌(淸憲)이며 문집 2책이 전한다. 풍암서원(豊巖書院)에 제향되었으며, 어필영정각(御筆影幀閣)이 있다.
李象靖
□ 位置 : 安東市 一直面 望湖里 大山宗宅
□ 神主
◦ 考位
顯先祖考通政大夫行禮曹參議贈資憲大夫吏曹判書兼知經筵義禁府事弘文館大提學藝文館大提學知春秋館成均館五衛都摠管諡文敬公府君神主
◦ 配位
顯先祖妣贈貞夫人長水黃氏神主
□ 諱日
◦ 考位 : 12月 9日
◦ 配位 : 12月 16日
□ 略歷
선생의 본관(本貫)은 한산(韓山)이며 숙종(肅宗) 37년(1711)에 태어나 정조(正祖) 5년(1781)에 몰(歿)하였다. 자(字)는 경문(景文)이고 호(號)는 대산(大山)이다. 선생은 수은(睡隱) 홍조(弘祚)의 현손(玄孫)이며 밀암(密庵) 이재(李栽)의 외손(外孫)이다. 밀암의 문인(門人)으로 퇴계(退溪) 선생의 학문(學問)을 강명(講明)하여 유림종사(儒林宗師)가 되었다.
영조(英祖) 10년(1734)에 문과(文科)에 급제(及第)하여 관(官)은 예조참의(禮曹參議)이다.
저서(著書)에는 《퇴계서절요(退溪書節要)》, 《경재잠집설(敬齋箴集說)》, 《이기휘편(理氣彙編)》, 《제양록(制養錄)》, 《약중편(約中篇)》, 《병명발휘(屛銘發揮)》 등이 있다. 고종조(高宗朝)에 증이조판서(贈吏曹判書)를 받았으며 시호(諡號)는 문경(文敬)이다.
고산서원에 제향(祭享)되었으며 문집(文集) 27책(冊)이 있다.
李詠道
□ 位置 : 安東市 陶山面 土溪里 251番地 東巖宗宅
□ 神主
◦ 考位
顯先祖考通訓大夫行原州牧使兼原州鎭兵馬僉節制使贈嘉善大夫吏曹參判兼同知義禁府事五衛都摠府副摠管府君神主
◦ 配位
顯先祖妣貞夫人永嘉權氏神主
□ 諱日
◦ 考位 : 2月 26日
◦ 配位 : 7月 23日
□ 略歷
선생의 본관(本貫)은 진성(眞城)으로 명종(明宗) 14년(1559)에 태어나 인조(仁祖) 15년(1637)에 몰(歿)하였다. 자(字)는 성여(聖與)이고 호(號)는 동암(東巖)이다. 황(滉)의 손자이며 군기시첨정 준(寯)의 아들이고 순도(純道)의 제(弟)이다. 조부(祖父) 황(滉)이 일찍이 말하기를 “훗날 우리 집안을 이어갈 소목은 바로 이 아이다.(異日錦吾家者此兒也)”라 하였다. 약관(弱冠)에 부친상을 당하여 여묘(廬墓)를 살았다. 이와 같은 효심이 널리 알려지자 특별히 관직에 임명되었다.
공은 음보(蔭補)로 군자감참봉(軍資監參奉)을 거쳐 제용감봉사(濟用監奉事)를 역임하고, 임진년(壬辰年, 1592)에는 고향 안동에서 의병을 모집하여 왜적과 싸웠다. 특히 명나라 병사에게 군량(軍糧)을 보급하며 왜적의 정벌에 계책(計策)을 세워 변론하니 명나라 장군이 크게 기이하게 여겼다.
광해군(光海君) 때에는 거듭 벼슬을 내렸지만 나아가지 아니하였고, 인조(仁祖) 때에는 여러 군읍을 다스려 벼슬이 목사(牧使)에 이르렀다. 선무원종훈(宣武原從勳)에 책록(冊錄)되고 승지(承旨)에 증직(贈職)되었으며 순조(純祖) 계유년(癸酉年, 1813)에 도에서 묘당을 청하는 글을 올리니 선비 집안의 훌륭한 자손으로 성인(聖人)의 묘정(廟庭)에 절의(節義)를 온전히 하였다고 보고되었다. 이조참판(吏曹參判)에 증직되었다.
李 堣
□ 位置 : 安東市 玉井洞 423番地 松齋宗宅
이 종택은 원래 도산면 온혜리에 있었다. 송재선생이 안동부사 재직 당시 종택 부근에 건립하였던 애련정(愛蓮亭)이 6.25전쟁 때 폭격으로 소진된 것을 후손들이 그 정자를 이곳에 복원함과 동시에 정자 뒤편에 종택을 재건하고 종택 후정에 묘우와 영정각(影幀閣)을 이건하였다.
□ 神主
◦ 考位
顯十六代祖考嘉善大夫行戶曹參判兼五衛都摠府副摠管府君神主
◦ 配位
顯十六代祖妣貞夫人月城李氏神主
□ 諱日
◦ 考位 : 11月 18日
◦ 配位 : 1月 8日
□ 略歷
선생의 본관(本貫)은 진성(眞城)으로 예종(睿宗) 1년(1469)에 태어나 중종(中宗) 12년(1517)에 몰(歿)하였다. 자(字)는 명중(明仲)이고 호(號)는 송재(松齋)이며 퇴계(退溪)선생의 숙부(叔父)이다. 성종 23년(1492) 생원시(生員試)에 합격하고 연산군 4년(1498)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봉교(奉敎), 대교(待敎), 한림(翰林), 전랑(銓郞), 지제교(知製敎), 사간(司諫), 수찬(修撰), 이조좌랑(吏曹佐郞)을 역임하였다. 중종반정(中宗反正)에 공을 세워 정국공신(靖國功臣) 4등에 녹훈되고 청해군(淸海君)에 봉해졌다. 우부승지(右副承旨)를 거쳐 중종(中宗) 3년 진주목사(晋州牧使)로 나아가 선정(善政)에 표리(表裏)를 하사(下賜) 받았고 이듬해 호조참판(戶曹參判)이 되었다.
1511년에는 특진관(特進官), 형조참판(刑措參判)을 역임하고 외직(外職)으로 강원․경상도 어사(御使)를 지내고, 안동부사(安東府使), 강원도관찰사(江原道觀察使)를 지냈다.
공은 시문(詩文)에 뛰어났으며, 공의 시문 중 「隣蹄南江을 건너면서������라는 시와 「딱다구리������라는 시는 우리나라 2000년 한시사(漢詩史)에서 명시(名詩)로 꼽히고 있다. 공은 정신과 기골(氣骨)이 청수(淸秀)하고, 운치(韻致)가 고원(高遠)하며 온량두제(溫良愷悌)하여 효도(孝道)와 행의(行誼)에 돈독(敦篤)하였다. 특히 재질(才質)이 뛰어나 조정(朝廷)에서 밝게 드러났다.
1512년 관직에서 물러나 장남(長男) 황해도찰방(黃海道察訪) 수령(壽苓), 조카 온계(溫溪) 해(瀣), 퇴계(退溪) 황(滉) 등의 교육에 정성을 기울이는 한편, 시집 《귀전록(歸田錄)》과 《동국사략(東國史略)》2권을 저술하였다. 묘갈(墓碣)은 퇴계선생께서 찬(撰)하였고, 유택(幽宅) 입구에 신도비가 세워졌다. 예안의 청계서원(淸溪書院)에 제향(祭享)되었다.
李 禎
□ 位置 : 安東市 臥龍面 周下里 634番地 慶流亭宗宅
□ 神主
◦ 考位
顯先祖考贈嘉善大夫戶曹參判兼同知義禁府事任中直大夫善山都護府事府君神主
◦ 配位
顯先祖妣贈貞夫人安東金氏神主
□ 諱日
◦ 考位 : 8月 15日
◦ 配位 : 5月 2日
□ 略歷
선생의 본관(本貫)은 진성(眞城)이다. 공은 진보현인(眞寶縣人)으로 고려말 공민왕(恭愍王) 10년(1361) 홍건적(紅巾賊)을 토벌(討伐)한 공훈(功勳)으로 송안군(松安君)에 봉(封)해지고 벼슬이 판전의(判典儀)로서 처음으로 안동으로 이거(移居)하였던 자수(子脩)의 손(孫)이며 군기부정(軍器副正) 운후(云侯)의 아들이다.
선생은 타고난 자질이 개제(愷悌)하고 민첩용감(敏捷勇敢)하여 일찍이 말타기와 활쏘기에 남보다 뛰어났다. 세종조(世宗朝)에 북적(北狄,오랑캐)이 자주 변경을 침입하였으므로 이 때 조정에서는 영변진(寧邊鎭)과 약산성(藥山城)을 구축(構築)하여 오랑캐의 침입을 제압하기로 하였는데, 그 때 공이 판관(判官)으로서 이 중난(重難)한 역사(役事)를 감독하는데 큰 공을 세우고 다시 최윤덕을 따라 북적정벌(北狄征伐)에 유공(有功)하여 작위(爵位)를 하사(下賜) 받았으며 한산(韓山)과 선산부사(善山府使)를 역임(歷任)하여 치적(治績)을 남겼다.
후에 손자(孫子) 우(堣)의 귀(貴)로 통정대부(通政大夫) 병조참의(兵曹參議)를 증직(贈職) 받았고, 증손(曾孫) 황(滉)의 귀(貴)로 인하여 가선대부(嘉善大夫) 호조참판(戶曹參判)에 가증(加贈)되었다. 안동김씨 지보주(知甫州) 김정(金挺)의 딸을 부인으로 맞아 아들 3형제를 두었는데 우양(遇陽)은 인동현감(仁同縣監), 흥양(興陽)은 훈련참군(訓練參軍), 계양(繼陽)은 진사(進士)이다.
李宗洙
□ 位置 : 安東市 一直面 松里 298番地
구종택(舊宗宅)은 보존되지 못하고 있으며 일직면 송리에 후산정사(后山亭舍)만 보존되고 있다. 신주(神主)는 7대종손(七代宗孫)인 이봉기(李奉基)의 양옥(洋屋) 내에 벽감(壁龕)으로 모시고 있다.
□ 神主
◦ 考位
顯先祖考后山處士府君神主
◦ 配位
顯先祖妣儒人聞韶金氏神主
□ 諱日
◦ 考位 : 11月 16日
◦ 配位 : 1月 7日
□ 略歷
선생의 본관(本貫)은 진성(眞城)으로 경종(景宗) 2년(1722)에 태어나 정조(正祖) 21년(1797)에 몰(歿)하였다. 자(字)는 학보(學甫)이고 호(號)는 후산(后山)이다.
선생은 학천(鶴川) 봉춘(奉春)의 후(后)이며 덕삼(德三)의 아들이다. 대산(大山) 이상정(李象靖)의 문인(門人)으로 적전(嫡傳)을 이어받아 호문삼로(湖門三老) 중의 한사람이다. 저서는 《구경려적(九經蠡的)》, 《근사록집유(近思錄輯遺)》등 많은 저서(著書)를 남겼다. 대산 선생이 《병명발휘(屛銘發揮)》와《제양록(制養錄)》을 선생에게 써 주었다. 문집(文集) 9책(九冊)이 있다.
李 瀣
□ 位置 : 安東市 陶山面 溫惠里 1022番地
온계(溫溪)선생 종택은 원래 도산면 온혜리 노송정(老松亭) 옆에 있었다. 선생의 13대손인 병칠(炳七)의 숙부(叔父)가 의병대장(義兵隊長)으로 활약한 혐의(嫌疑)로 1920년 왜병의 방화로 소진되고 후손들은 계속되는 탄압을 피해 청송(靑松), 예천(醴泉), 문경(聞慶) 등지로 전전(轉轉)하다가 14대손 동기(東簊)가 환고(還故)하여 이 정자를 짓고 위패는 벽감(壁龕)하였다.
□ 神主
◦ 考位
顯十七代祖考嘉善大夫禮曹參判兼同知春秋館事五衛都摠府副摠管贈吏曹判書諡貞愍公府君神主
◦ 配位
顯十七代祖妣貞夫人延安金氏神主
□ 諱日
◦ 考位 : 8月 14日
◦ 配位 : 11月 6日
□ 略歷
선생의 본관(本貫)은 진성(眞城)으로 연산군(燕山君) 2년(1496)에 태어나 명종(明宗) 5년(1550)에 몰(歿)하였다. 자(字)는 경명(景明)이고 호(號)는 온계(溫溪) 또는 취미헌(翠微軒)이며 노송정(老松亭) 계양(繼陽)의 손(孫)이다.
공은 개결(介潔)한 인품과 높은 절조(節操)를 지녔으며 문장(文章)과 글씨에 탁월(卓越)하여 그의 6형제 중 아우인 퇴계와 함께 금곤옥계(金昆玉季)라 불려진다. 8세 때 숙부(叔父) 송재(松齋)공께 수학(修學)하였다. 중종(中宗) 20년(1525)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하고 이듬해 성균관에 유학하여 중종(中宗) 23년 33세에 문과에 급제하여 도승지(都承旨), 대사헌(大司憲), 대사간(大司諫), 예조참판(禮曹參判) 등의 관직을 거쳐 황해도관찰사(黃海道觀察使), 한성부우윤(漢城府右尹), 충청도관찰사(忠淸道觀察使)에 이르렀으나 이기(李芑)와 권간(權奸)들의 무고(誣告)에 얽혀 온갖 고문을 받고 갑산(甲山)으로 유배(流配)되는 길에 양주(楊州)에서 일생을 마쳤다.
숙종(肅宗) 17년(1691) 이조판서(吏曹判書)에 증직되고, 정조(正祖) 8년(1748)에 정민공(貞愍公)이라는 시호(諡號)가 내렸다.
퇴계(退溪) 선생이 묘갈(墓碣)을 지었으며 번암(樊巖) 채제공(蔡濟恭)이 신도비명(神道碑銘)을 찬(撰)하고 눌은(訥隱) 이광정(李光庭)이 행장(行狀)을 지었다. 예안(禮安) 청계서원(淸溪書院)과 영주(榮州) 삼봉서원(三峰書院)에 배향되었다. 저서로 《온계집(溫溪集)》이 있다.
李賢輔
□ 位置 : 安東市 陶山面 雲谷里 168-3番地 肯構堂
농암(聾巖)선생의 종택(宗宅)과 묘우(廟宇)는 영천이씨 600년 세거지(世居地)인 도산면 분천리(汾川里,부내)에 있었으나 안동댐 건설로 수몰되어 1976년 종택의 일부는 안동시 옥정동으로 이건하였으며, 묘우는 도산면 운곡리에 위치한 분강서원과 서원 앞에 있는 긍구당으로 이건하였다.
□ 神主
◦ 考位
顯先祖考崇政大夫行知中樞府事贈諡孝節公府君神主
◦ 配位
顯先祖妣貞夫人安東權氏神主
□ 諱日
◦ 考位 : 6月 13日
◦ 配位 : 5月 10日
□ 略歷
선생의 본관(本貫)은 영천(永川)으로 세조(世祖) 13년(1467)에 태어나 명종(明宗) 10년(1555)에 몰(歿)하였다. 자(字)는 비중(棐仲)이고 호(號)는 농암(聾巖)이다. 허백당(虛白堂) 홍귀달(洪貴達)의 문인으로 연산군(燕山君) 4년(1498)에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한 후 경상도관찰사 등의 관직을 두루 거쳐 호조참판(戶曹參判)과 중추부사(中樞府事)에 이르렀다.
선생은 천성이 순의(純懿)하고 효우(孝友)에 지극(至極)하여 부모봉양(父母奉養)에 극진하였다. 선생이 46세 때에는 부모봉양을 위하여 고향에서 가까운 영천군수로 부임하여 애일당(愛日堂)을 지었다. 이는 부모님을 가까이 모시는 기쁨과 한편으로는 어버이의 늙어감에 대한 두려움이 교차하여 ‘나날이 가는 것이 너무나 안타깝고 아수하여, 하루하루의 날도 사랑하고 아낀다’는 뜻에서 당호마저 애일당이라 지었다. 또한 70세 때에는 부모님이 생존해 계셨는데 우리 고을의 구노회(九老會)는 공으로부터 위시하였다고 할 만큼 효행이 남달랐다.
관직에서는 강직(剛直)하여 권세가(權勢家)들에게 뜻을 꺾이지 아니하여 당시 공을 일컬어 도병소주(陶甁燒酒)라 하였다. 대대로 도산면 분천(汾川)에 세거하였으며 89세로 졸(卒)하였다.
명종(明宗) 12년 시호(諡號)를 받았으니 효절(孝節, 慈惠愛親曰孝 好廉自克曰節)이다. 분강서원(汾江書院)에 제향(祭享)되었다.
李弘祚
□ 位置 : 安東市 一直面 望湖里 睡隱宗宅
□ 神主
◦ 考位
顯先祖考通訓大夫行懷仁縣監府君神主
◦ 配位
顯先祖妣淑人英陽南氏神主
□ 諱日
◦ 考位 : 3月 13日
◦ 配位 : 5月 23日
□ 略歷
선생의 본관(本貫)은 한산(韓山)으로 선조(宣祖) 28년(1595)에 태어나 현종(顯宗) 1년(1660)에 몰(歿)하였다. 자(字)는 여확(汝廓)이고 호(號)는 수은(睡隱)이다. 목은(牧隱) 색(穡)의 후(后)이고 서애(西厓) 류성룡(柳成龍)의 외손(外孫)이다.
관직은 인조(仁祖) 때에 회인현감(懷仁縣監)을 지내고, 병자호란(丙子胡亂) 때에는 안동에서 의병을 규합하여 의병장(義兵將)이 되어 남한산성(南漢山城)으로 향발(向發)하였으나 이미 강화(講和)한 소식을 듣고 돌아왔다. 그 후 사포서별제(司圃署別提)가 되었다.
밀암(密庵) 이재(李栽)가 행장(行狀)을 지었다. 서산서원(西山書院)에 배향되었다.
李 滉
□ 位置 : 安東市 陶山面 土溪里 468-2番地 退溪宗宅
□ 神主
◦ 考位
顯十五代祖考崇政大夫判中樞府事兼知經筵春秋館事贈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領議政兼領經筵弘文館藝文館春秋館觀象監事諡文純公府君神主
◦ 配位
顯十五代祖妣貞敬夫人金海許氏神主
顯十五代祖妣貞敬夫人安東權氏神主
□ 諱日
◦ 考位 : 12月 8日
◦ 配位 : 金海許氏 11月 7日
安東權氏 7月 2日
□ 略歷
선생의 본관(本貫)은 진성(眞城)으로 연산군(燕山君) 7년(1501)에 도산면 온혜리 노송정(老松亭) 종택에서 7남 1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진사(進士) 식(埴)이고 어머니는 춘천박씨이다. 어머니 박씨 부인이 ‘공자가 대문 안으로 들어오는 꿈을 꾸고 퇴계를 낳았다.’하여 노송정 종택의 출입문을 성림문(聖臨門)이라 부르게 되었으며, 선생이 종택의 돌출된 방에서 태어났다하여 이 방을 “퇴계태실(退溪胎室)”이라 부른다.
선생의 자(字)는 경호(景浩)이고 호(號)는 퇴계(退溪), 퇴도(退陶), 도옹(陶翁)이다. 6세 때부터 천자문(千字文)을 배우기 시작하였고, 12세 때는 숙부(叔父)인 송재(松齋, 堣)에게 논어(論語)를 배웠다. 20세 경에 주역(周易) 등을 공부하였는데 침식(寢息)을 잊으며 독서와 사색에 잠겼다. 중종(中宗) 22년(1527) 향시(鄕試)를 비롯하여 1532년에는 소과(小科)에 합격하고, 1534년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했다. 그 해 승문원(承文院) 권지부정자(權知副正字)가 되고 이어 박사(博士), 전적(典籍), 지평(持平) 등을 거쳐 세자시강원문학(世子侍講院文學), 충청도어사(忠淸道御使) 등을 역임하였다. 1543년 성균관사성(成均館司成)에 이르렀다. 이 때 낙향(落鄕)하려고 하였으나 윤허(允許)되지 않았다.
1546년 퇴계의 동암(東巖)에 양진암(養眞庵)을 짓고 토계(兎溪)의 지명을 퇴계(退溪)로 고치고 아호(雅號)로 삼았다. 그 후 대사성(大司成), 형조(刑曹)․병조(兵曹) 참의(參議), 부제학(副提學), 공조판서(工曹判書)를 거쳐 선조(宣祖) 1년에는 우찬성(右贊成)을 역임하고 양관(兩館) 대제학(大提學)에 이르렀다. 선생은 관직에 무려 140여 회나 임명되었으나 79회를 사임하였으며 높은 관직보다는 낮으면서도 자연과 더불어 학문을 할 수 있는 외직을 주로 봉행(奉行)하였다. 뒤에 영의정(領議政)에 추증되고 1576년 문순공(文純公, 道德博聞曰 文 中正精粹曰 純)의 시호(諡號)를 받았다. 문묘(文廟)와 도산서원(陶山書院)을 비롯하여 전국의 40여 서원에 배향되었다.
저서로는 《퇴계전집(退溪全集)》외에 《주자서절요(朱子書節要)》, 《이학통록(理學通錄)》, 《계몽전의(啓蒙傳疑)》, 《상례문답(喪禮問答)》, 《성학십도(聖學十圖)》, 《심경석의(心經釋疑)》, 《자성록(自省錄)》, 《수정천명도설(修正天命圖說)》등이 있다. 최근 저술들은 계명대학교에서 《퇴계문헌대전집(退溪文獻大全集)》으로 정리되어 나왔으며, 중국인민대학에서는 장립문(張立文) 교수를 주축으로 《퇴계서절요(退溪書節要)》를 간행하고 있다. 그 외에도 이성호(李星湖)의 《이자수어(李子粹語)》나 정다산(丁茶山)의 《도산사숙록(陶山私淑錄)》등의 저술을 볼 때 퇴계 선생을 사숙(私淑)한 학자 또한 헤아릴 수 없을 정도임을 알 수 있다.
현재 퇴계학은 우리나라 이외에도 국제퇴계학연구원(國際退溪學硏究院) 뿐만 아니라 일본․중국․미국․독일 등 세계적으로 전파되어 그 연구가 활발하게 진행 중이다. 또한 우리나라 1,000원권 화폐와 문화관광부에서 선정하는 1992년 1월의 문화인물로 선정되기도 하였다.
李後榮
□ 位置 : 安東市 法興洞 20番地 臨淸閣
청옹(淸翁) 선생의 불천위는 선생의 10대손인 석주(石洲) 이상룡(李相龍)이 한일합방(韓日合邦)이 되자 구국(救國)의 일념으로 독립운동을 하기 위하여 만주로 떠날 때에 선생의 위패를 장주(藏主)하여 현재 묘우에 모시지 못하고 있다.
□ 神主
◦ 考位
顯先祖考兵曹正郞府君神主
◦ 配位
顯先祖妣淑人眞城李氏神主
□ 諱日
◦ 考位 : 1月 8日
◦ 配位 : 5月 11日
□ 略歷
선생의 본관(本貫)은 고성(固城)으로 효종(孝宗) 원년(1649)에 태어나 숙종(肅宗) 37년(1711)에 몰(歿)하였다. 자(字)는 사구(士久)이고 호(號)는 청옹(淸翁)이며 선교랑(宣敎郞) 분(賁)의 아들이다. 세종(世宗) 때 영의정을 역임한 용헌(容軒) 원(原)의 후(后)이며 충청도관찰사(忠淸道觀察使) 반초당(反招堂) 이명익(李溟翼)의 외손자이다.
현종(顯宗) 14년(1673)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고 숙종(肅宗) 10년(1684)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고성군수(高城郡守), 병조정랑(兵曹正郞)을 지냈다. 그 후 당쟁으로 어지러운 정국을 꺼려 벼슬을 버리고 물러와 임천(林泉)에 자적(自適)했으며, 학문과 덕행이 출중하여 사림의 추중(推重)을 받았다.
□ 臨淸閣 君子亭
임청각(臨淸閣)은 중종(中宗) 때 이명(李洺)이 영남산 기슭에 지은 건물이다. 건물의 당호(堂號)는 도연명(陶淵明)의 귀거래사(歸去來辭) 구절 중 ‘동쪽 언덕에 올라 길게 휘파람 불고(登東皐以舒嘯), 맑은 시냇가에서 시를 짓노라(臨淸流以賦詩)’에서 따온 것이다. 정침(正寢)은 일(日)․월(月)이 합한 용(用)자 형으로 건축하여 하늘의 정기(精氣)를 받아들이고자 하였다.
외당(外堂)인 군자정은 평면의 구성이 정(丁)자형인 누각 집으로 조선 중기의 건축양식을 잘 보여주는 것으로 보물 제182호로 지정되어 있다.
張興孝
□ 位置 : 安東市 西後面 城谷里 264番地 敬堂宗宅
□ 神主
◦ 考位
顯先祖考贈通善郞司憲府持平行將仕郞昌陵參奉府君神主
◦ 配位
顯先祖妣恭人安東權氏神主
顯先祖妣恭人安東權氏神主
□ 諱日
◦ 考位 : 2月 7日
◦ 配位 : 安東權氏 9月 25日
安東權氏 10月 10日
□ 略歷
선생의 본관(本貫)은 안동(安東)으로 명종(明宗) 19년(1564)에 태어나 인조(仁祖) 11년(1633)에 몰(歿)하였다. 자(字)는 행원(行原)이고 호(號)는 경당(敬堂)이다. 공은 태사(太師) 정필(貞弼)의 후(后)요, 전력부위 팽수(彭壽)의 아들이다.
학봉(鶴峯)과 서애(西厓) 양(兩) 선생의 문인(門人)으로 천자(天姿)가 순수(純粹)하여 심학(心學)을 전수(傳受)받았다. 공은 평생을 관직에 나아가지 않고 오로지 위기지학(爲己之學)과 제자교육에 힘쓴 학자이다. 그러나 인조 때에 선생의 뛰어난 학문(學問)과 행의(行誼)로 참봉(參奉)에 추천(推薦)되었으나 직첩(職牒)이 도착(到着)되기 전에 운명(殞命)하였다.
선생은 역학(易學)을 깊이 연구(硏究)하여 호방평(胡方平)의 《역학계몽통석(易學啓蒙通釋)》중 분배절기도(分配節氣圖)의 오류를 지적하고 이를 고증하고 연구하여 십이권도(十二卷圖)를 추연하였다. 공은 당대의 저명한 학자들과 같이 저술이나 심오한 이론서를 남기지는 않았으나 『인수변(人獸辨)』, 『일원소장도(一元消長圖』, 『십팔목도(十八木圖)』, 『무극태극유무변(無極太極有無辨)』과 같은 나름대로 특색 있는 논술을 남겼다.
숙종(肅宗) 때 사림의 소청(疏請)으로 통선랑(通善郞) 사헌부(司憲府) 지평(持平)에 증직(贈職)되었고, 문집(文集) 4책(冊)이 전한다. 백죽당 배상지, 용재 이종준과 함께 경광서원(鏡光書院)에 제향(祭享)되었다.
鄭 枓
□ 位置 : 安東市 臥龍面 台2里 864番地 竹軒宗宅
□ 神主
◦ 考位
顯十五代祖考贈嘉善大夫漢城府右尹府君神主
◦ 配位
顯十五代祖妣貞夫人安東權氏神主
□ 諱日
◦ 考位 : 1月 14日
◦ 配位 : 3月 10日
□ 略歷
선생의 본관(本貫)은 청주(淸州)이며 자(字)는 대임(大任)이며 호(號)는 죽헌(竹軒)으로 지헌(芝軒) 사성(士誠)의 아버지이다.
선생은 음보(蔭補)로 조봉대부(朝奉大夫) 사섬시(司贍寺) 첨정(僉正)이 되었으며 한성부우윤(漢城府右尹)에 증직(贈職)되었다. 퇴계(退溪) 선생이 그의 대인(大人)다운 자질(資質)을 칭찬(稱讚)하였다.
趙 穆
□ 位置 : 釜山廣域市 釜山鎭區 田浦洞 589番地
선생의 종택(宗宅)과 묘우(廟宇)는 고향(故鄕)에 보존되지 못하고 위패(位牌)는 현(現) 16대종손인 조동주(趙東冑)가 거주(居住)하는 부산의 자택(自宅)에 벽감(壁龕)으로 모시고 있다. 다만 현재(現在) 안동시(安東市) 도산면(陶山面) 동부리(東部里) 539번지(番地)에 월천서당(月川書堂)이 있다. 이 서당은 중종(中宗) 34년(1539)에 건립(建立)되었으며 선생은 여기서 후진(後進)을 가르쳤다. 서당의 현판(懸板)은 퇴계(退溪) 선생의 친필(親筆)이다. 서당은 경상북도(慶尙北道) 지방기념물(地方記念物) 제41호로 지정 되었다.
□ 神主
◦ 考位
顯十六代祖考嘉善大夫工曹參判兼同知義禁府事府君神主
◦ 配位
顯十六代祖妣貞夫人安東權氏神主
顯十六代祖妣貞夫人宣城金氏神主
□ 諱日
◦ 考位 : 10月 29日
◦ 配位 : 安東權氏 1月 23日
宣城金氏 7月 16日
□ 略歷
선생의 본관(本貫)은 횡성(橫城)이다. 자(字)는 사경(士敬)이며 호(號)는 월천(月川), 동고(東皐), 부용산인(芙蓉山人)으로 중종(中宗) 19년(1524)에 태어나 선조(宣祖) 39년(1606)에 몰(歿)하였다. 증(贈) 참판(參判) 대춘(大春)의 아들이다.
선생은 어려서부터 남달리 영민(潁敏)하여 12세(歲) 때에 이미 경서(經書)를 모두 배웠고 15세 때에 퇴계 선생에게 수학(受學)하여 문인(門人)이 되었다. 28세(歲) 때에 사마시(司馬試)에 합격(合格)하여 성균관(成均館)에 입관(入館)하였다. 그러나 당시(當時) 대소윤(大小尹)의 파쟁(派爭)이 치열(熾熱)하여 조정(朝廷)이 혼란(混亂)함으로 과거(科擧)를 단념(斷念)하고 부용산 아래에 은거(隱居)하면서 잠심역학(潛心力學)하여 드디어 대유(大儒)가 되었다. 43세 때 학행(學行)으로 천섬(薦剡)되어 공릉참봉(恭陵參奉)에 제수 됨을 비롯하여 여러 관직과 공조참판(工曹參判) 등 46차의 소명(召命) 또는 제수 되었으나 부임(赴任)한 것은 다만 봉화현감(奉化縣監)과 합천군수(陜川郡守) 등 일곱 차례이고 재관기간(在官期間)은 모두 합해 4년 미만이었다. 선생은 관직을 마치 병처럼 싫어하여 관직에 임명되면 곧바로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와 학문에 열중하였다. 향년 83세이다.
1613년 도산서원(陶山書院)에 종향(從享)되었고 1615년에는 예천(醴泉)의 정산서원(鼎山書院)에 제향되었다. 1617년 9월 5일 봉화(奉化)의 창해서원(昌海書院)에 퇴계선생을 배향하고 종향되었다.
河緯地
□ 位置 : 安東市 西後面 敎里 273番地 彰烈書院
□ 神主
◦ 考位
顯先祖考贈資憲大夫吏曹判書兼經筵義禁府事弘文館大提學藝文館大提學知春秋館成均館事世子左賓客五衛都摠府都摠管行嘉善大夫禮曹參判諡忠烈公府君神主
◦ 配位
顯先祖妣贈貞夫人金氏神主
□ 諱日
◦ 考位 : 6月 8日
◦ 配位 : 6月 8日
□ 略歷
선생의 본관(本貫)은 진주(晉州)이다. 공의 자(字)는 천장(天章)이며 호(號)는 단계(丹溪)로 태종(太宗) 12년(1412)에 태어나 세조(世祖) 2년(1456)에 몰(歿)하였으며 군수(郡守) 담(澹)의 아들이다.
선생은 세종 때에 문과(文科)에 장원(壯元)으로 급제(及第)하여 호당(湖堂)에 들어갔으며 벼슬이 예조참판(禮曹參判)에 이르렀다. 선생은 문종(文宗) 때에 명을 받아 『역대병요(歷代兵要)』와 병서(兵書)의 수찬에 참여하였다. 이에 단종(端宗) 1년(1453)에 수양대군(首陽大君)이 가자(加資)할 것을 왕에게 제청(提請)하였으나 극력(極力) 사직(辭職)하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김종서(金宗瑞)가 피주(被誅)된 후 선생은 좌사간(左司諫)으로 천거(薦擧)되었으나 응하지 않았다.
선생은 세조가 즉위하자 성삼문(成三問) 등과 단종복위(端宗復位)를 도모(圖謀)하다가 발각(發覺)되어 화를 입었다. 그 후 숙종(肅宗) 때에 복관(復官)되었고 영조(英祖) 때에 이조판서(吏曹判書)에 증직(贈職)되었다. 또 충렬(忠烈)이란 시호(諡號)를 받았으며 정려(旌閭)되었다. 선생은 창렬서원(彰烈書院)에 제향(祭享)되었으며 문집(文集)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