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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12월의 시작입니다.
정말 바빴던 이름하여 ‘마의 11월’도 끝났겠다, 이제는 좀 여유를 가지고 이런저런 일을 해도 되지 않을까 기대하고 있습니다.
집에서 교정하는 게 아니라 느긋하게 독서를 한다든가, 맞춤법이나 단어 뜻을 인터넷으로 찾는 게 아니라 취미로 연재하는 꽃 이야기를 찾는다든가...... 그것도 아니면, 지난 10월 말에 사회를 맡았던 행사의 후기를 정리해서 쓴다든가.
한 달, 아니지 이제 두 달이군요. 아무튼 후기 정리할 짬도 없어서 여태껏 미루었더랬습니다.
다른 거 하기 전에, 오랜만에 책 감상부터 올리고 시작하죠. 이번 작품은 역사책입니다.
도서명: 조선의 살림하는 남자들
저자: 정창권
* 이 도서는 시각장애인을 위한 재활통신망 아이프리 도서관에 10번 역사 코너에 데이지도서로 제작되어 있습니다.
* 소개글 서평
일단 제목부터가 남다른 책이었다. 조선의 살림을 하는 게 여자도 아닌 남자들이라고 하지 않는가. 자고로 내가 아는 조선은 가부장제가 주가 되는 사회로, 남존여비니 하는 사상이 있던 국가로 인식하고 있었기에, 이 제목은 대체 뭔가 싶었다. 그런데 이 책은 내 인식에 물음표를 던졌다. 아주 대형 사이즈로 말이다.
“과연 조선은 철저한 남존여비 사회, 엄격한 가부장제 사회였을까?”
대개 이런 물음으로 시작하면, 답은 ‘아니다’가 맞기 마련이다. 문제는 어떤 근거로 ‘아니다’가 나왔는가 하는 점이다. 호기심에 이끌려 오랜만에 역사서를 펼치게 됐다.
그림 설명: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된 유은홍의 풍속도. 농가의 길쌈하는 모습.
* 출처: 책 《조선의 살림하는 남자들》
《조선의 살림하는 남자들》, 부인을 뒷받침하는 외조의 달인들 이야기
책은 말한다. 물론 조선은 가부장제 나라였으나, 그것은 지나치게 오늘날의 관점에서 바라본 것이라고. 또 한편으로 정치권력을 기준으로 바라본 또 다른 남자 중심적인 시각이라고.
또 이 책은 말한다. 조선은 16세기까지만 해도 여권이 제도적으로 보장된 남녀 공존의 시대였고, 이는 여러 문헌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고. 조선이 남자 중심의 가부장제 사회였다고 주장하지만, 정확한 남녀의 관계와 전통시대 여성상을 알기 위해서는 집안을 둘러싼 실질 사회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무엇보다 이 책은 어필하고 있다. 살림은 주부, 여자들만의 일이 아니었다고. 조선의 남자들, 그중 양반 남자들이, 정말 의외롭게도 집안의 ‘살림꾼’이었다고 말이다. 이 책은 그 증거물로 실제 생활의 기록인 일기나 편지, 그리고 개인 문집의 다양한 기록 등을 제시하고 있다.
그림 설명: 미암 오희문이 쓴 생활 일기, <쇄미록> 모습.
* 출처: 책 《조선의 살림하는 남자들》
- 어디에 소장 중인지는 책에도 명기되어 있지 않음.
“1596년 10월 4일. 아침에 아내가 나보고 가사를 돌보지 않는다고 해서 한참 동안 둘이 입씨름을 벌였다. 아! 한탄스럽다.”
문체는 분명 조선시대 풍이건만, 어째 내용은 오늘날 현대와 다르지 않다. 나만 집안일 하냐, 분담하기로 하지 않았느냐, 너도 신경 좀 써라, 뭐 이런 식의 아내님의 자막이 깔릴 것만 같다. 아니, 나는 이 대목을 읽으면서 실제 머릿속에서 이 가정 드라마를 연상하기도 했다. 쿠사리 먹는 남편님, 한탄하며 어쩔 줄 모른다. 답답함을 개인 일기장에나 토로할 수밖에 도리가 없다. 그런데 이게 조선시대 사대부 양반 신분 남편, 오희문(1539~1613)이 쓴 <쇄미록>이란 일기 내용이란다.
아내는 살림에 무관심한 남편 오희문이 원망스럽고, 남편 오희문은 집안일에 나름 열심인 자신을 몰라주는 아내가 무척 서운하다. 남자가 살림을 등한시한 게 부부싸움의 빌미가 된 셈인데, 이 부분만 보면 조선 아니라 현대판 같다. 오, 놀라워라!
발췌해 소개한 내용만 봐도 알겠지만 이 책은 조선 양반가의 생활을 들여다보고, 그들이 영위한 나름대로의 남녀 공존의 역사를 찾아보는 것을 목적으로 집필되었다. 책의 서두에 밝히고 있듯 조사 대상이 조선 시대 양반가 남자로 한정된 데는, 애석하게도 남아 있는 자료 대부분이 양반 남자들의 기록물이기 때문이다. 하기사, 훈민정음이 보급되었다고 하지만, 먹고살기 바쁘고, 농사짓기에도 바쁜 일반 백성들이 이런 기록을 남길 여유가 있었을까.
비록 기록이 소수이고, 또 한정된 계층의 기록일지라도 그 속에서도 유의미한 부분은 존재한다. 그것은 우리가 여태껏 알아왔던, 혹은 알고 있다고 여겼던 역사 인식에 돌을 던지며 ‘과연?’이란 의문의 파문을 그리게 했다는 점이다.
하기야, 생각해보면 조선 건국 이전 삼국․후삼국시대의 여자들은 남자와 같이 말도 타고 필요한 교윢도 받았다. 예컨대 신라의 화랑은 남자만 있지 않았고, 여자도 소속되어 있었다. 고려의 바보 온달과 평강 공주 전설도 여자가 한몫 단단히 하지 않던가.
삼국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조선이 건국되어 새 나라가 들어섰다 해도 이런 사회 풍속이 순식간에 확 바뀌었을 것 같지는 않다.
책에 의하면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남성우위의 가부장적 사회는 적어도 17세기 이전 우리 땅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모습이 아니었다고 한다. 저 멀리 고구려의 데릴사위제, 고려시대 남녀균분상속과 자유로운 재가까지 가지 않더라도 조선 중기 양란 이전까지만 해도 우리 사회는 남자의 사회활동을 제외하고 최소한 가정에서만은 남편과 부인이 동등한 위치에서 집안을 경영하고, 함께하는 인생의 파트너 관계였단다. 책은 그 근거로 ‘장가들다’는 표현과 조선 중기까지 우리가 아는 유명한 인물들 중 외가에서 태어난 사람을 흔하게 볼 수 있었다는 점 등을 소개한다. 또 조선시대 만들어진 가장 오래된 족보 중 하나인 <안동권씨 성화보>에는 사위와 외손이 더 많을 정도로 남녀에 대한 구분이 미미했고, 신사임당이나 난설헌, 임윤지당 등 여성 문인들이 배출되었던 배경도 여성 역시 가족의 일원으로 존중받으면서 배움에 있어서도 소외받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물론 이 책 《조선의 살림하는 남자들》에 나온 설명들이 일반적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어디까지나 그 시대의 한 단면이었을 것이다. 섣불리 일반화하기에는 기록의 양이 많치도 않을뿐더러, 여성 문인들의 숫자도 내 기준에서는 ‘좀 적지 않나?’ 싶은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그러나 조선이 생각보다도 남녀가 화합하며 살았던 시대라는 것은 새롭게 조명할 만한 사실이다.
어쩌면 의외로 다정다감하고 가정적이었을지도 모르는 조선의 남자들. 어쩌면 당당하게 내 권리 요구하고 능력을 발휘하며 살았을지 모를 조선의 여자들. 그렇다면 우리는 왜 조선의 남자들은 바깥일만 하고 권위적이며, 여자들은 남편이나 아들의 뜻에 군말없이 순종하는 현모양처라고 생각하게 되었을까?
그림 설명: 서울대학교규장각 한국학연구원에소장된 여남 박지원이 아들들에게 보낸 편지 <여남선생서간첩>
* 출처: 책 《조선의 살림하는 남자들》
“고추장 작은 단지 하나 보낸다. 사랑방에 두고서 밥 먹을 때마다 먹으면 좋을 게다. 내가 손수 담근 건데, 아직 푹 익지는 않았다. 전후에 보낸 쇠고기 장볶이는 잘 받아서 아침저녁 반찬으로 먹고 있니? 왜 한 번도 좋은지 나쁜지 말이 없니? 무심하다, 무심해. 나는 그게 포첩(말린 고기)이나 장조림 같은 반찬보다 나은 듯하더라. 고추장 또한 내가 손수 담근 것인데, 맛이 좋은지 어떤지 자세히 말해 주면 앞으로도 계속 두 가지를 인편에 보내든지 말든지 하겠다.”
책에서 발췌한 이 글은 어머니가 자식들에게 보내는 편지가 아니다. 여남 박지원이 타지에서 관직 생활을 하며 자식들에게 보낸 편지 내용이다. 고추장 담갔다고 맛보라 보내고, 쇠고기 장볶이에 대한 평가가 왜 없느냐고 한소리 전한다. 이게 갓 쓰고 도포 입고 팔자걸음 걷는, 그 사대부 양반 남정네가 쓴 거 맞아?
생각보다 더 어머니스러운 양반가 부친 및 조부들의 모습이 독서하는 내내 좀 당혹스러웠다. 그러나 책은 지금껏 제대로 조망하지 않아서 그렇다고 말한다. ‘가화만사성’이나 ‘수신제가치국평천하’라는 글들만 봐도 집이 나라보다 앞서 있지 않았느냐고, 옛날에는 국가보다 집안을 우선시했고, 남자의 모든 바깥 활동은 궁극적으로 여자의 안살림을 지원하는 차원에서 이루어진 것이라고 말이다.
조선에서는 남자들의 역할이 말하자면 ‘아내의 외조’였던 셈이다. 아내님이 집안일에, 이를테면 길쌈이나 침선, 찬거리 마련, 임신․출산 등에 차질이 없도록 농사를 짓든 관직에 나가 녹봉을 받든 해서 예산 확보하고, 식량도 확보하고, 원단도 마련해주는 것.
그뿐 아니라 자녀 교육도 아버지가 신경 썼다. 요즘 들어서야 가정 내 아빠의 역할이 대두되었지, 비교적 최근까지만 해도 가사 및 육아는 어머니에게 일임하는 양상을 보였던 우리네 가정상과는 꽤나 거리가 있다. 내가 좀 연세 있으신 중장년 아버지들께서 <우리 아이가 달라졌어요>와 같은 TV 프로그램 상황을 빗대면서 “엄마 역할이 80%니, 아빠 역할보다 역시 엄마가 중요하네, 집안 단속은 부인 몫이지”라고 말하는 경우를 종종 봤다. 그 프로에서 상담사님이 아빠의 역할을 배제시키는 것도 아니요, 꼭 아빠도 동석시켜서 컨설팅을 해주는데 말이다. 그런 사고 방식을 어쩌다 접할 때마다 아직 멀었군 하는 생각에 혀가 차진다. 그런데 옛날 풍경이 의외로 현대 양육과 비슷한 것 같으니 참 기가 막힌다. 그것도 무려 사대부의 나라 조선인데 말이다.
그림 설명: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된 필름 사진. 황해 신천의 길쌈하는 모습인데, 일제강점기 때의 자료임.
* 출처: 책 《조선의 살림하는 남자들》
《조선의 살림하는 남자들》이 제시한 아직도 버젓한 일제치하의 그림자, ‘현모양처’가 뭐시 어드래?
지금껏 나는 오로지 독서에만 골똘했던 <허생전>의 주인공 허생을 양반 남자의 대명사라고 여겼다. 하지만 그 구조는 잘못된 것이었다. 하기사, 가만 생각해보면 여남 선생은 당시의 사회상을 비난하기 위해 소설을 썼다. 그런데 그 문장 안에 국정 세태만 담겨 있었겠는가. 양반 남자들의 잘못된 행태, 집안일은 나 몰라라 책만 파는 그 무능력한 가장의 부덕함도 담겨 있었을 법하다.
이 책 《조선의 살림하는 남자들》에 따르면, 조선시대 양반가는 그 규모만 해도 오늘날의 중소기업체와 맞먹을 정도였고, 신발, 옷, 쌀, 술 등 의식주에 필요한 생활 필수품을 집안에서 다 마련했으며, 자녀 교육, 질병 치료, 종교
활동도 집안에서 이루어졌다고 한다. 이건 뭐, 집안이 아니라 그냥 사회로 봐도 무방할 지경이다. 시대 관념상 크게 안살림과 바깥살림으로 나누어 여자는 내치를, 남자는 외치를 담당해 집안 경영을 했지만 남녀의 직위는 거의 동등했다는 게 설명이다. 예부터 집안 열쇠 꾸러미는 아비가 아들에게 물려준 것이 아니라 시어머니가 며느리에게 물려주었던 걸 보면 합리적인 관점으로 보이긴 한다. 그렇기에 도돌이표처럼 다시 이런 의문과 마주하게 된다. 그랬던 조선이 왜 이렇게 가부장적인 사회, 남존여비 사상이 있던 사회로 변했는가 하는 의아함 말이다.
우리가 흔히 아는 조선의 가부장적 사회, 장손우대, 남존여비는 조선 중기 이후 임진왜란 및 정묘, 병자호란을 거치면서 조선의 위정자와 사대부들(남자들)의 입지가 좁아지며 생겨났단다. 솔직히 국난의 순간에도 붕당정치 일삼아, 왜란 이후에 겉멋만 들어서 사대사상에 빠져, 아주 나라 말아먹을 짓은 골고루 해놓고 입지가 넓어지길 바라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된다. 자업자득, 자연스러운 결과물이다. 그래놓고 자기들 위신 회복한답시고 들고 나온 방책이 예학의 강화 및 성리학 일색의 사상적 독재였다. 떨어진 체면을 어떻게든 세우겠다고 괜히 여자들만 단속한 셈이다. 종로에서 뺨 맞고 한강에서 화풀이한다고, 이거야말로 얼척!
솔직히 이때 영웅 하나 나타나서 나라를 영혼까지 탈탈 털었으면 악습이 많이 사라지지 않았을까 싶다. 한마디로 조선 역사에서 집권층 남자들의 무능함을 보여준 대표적인 사례인 셈이다.
또한 전후 처리 과정에서 뼈아프게 여겨야 할 진실이 있으니 바로 '환향녀'이다. 자신들의 무능으로 국가를 지키지 못해서 백성들은 청나라의 끌려가야 했다. 사랑하는 딸을, 며느리를, 누이를, 또 아내를 청나라에 볼모로 보낸 것도 모자라 천신만고 끝에 돌아온 여자들을 '환향녀'라는 이름으로 다시 한 번 지켜주지 않고 궁지로 몰아넣었다. 심지어 피해 여자들의 자식은 관직에 나서지 못하게 막는 등 국가가 조직적으로 미친 행위를 벌이기도 했다.
마치 일제치하의 피해 할머님들, 위안부 내지는 성착취 노-예로 끌려갔다가 겨우 돌아온 분들을 쉬쉬하며 꺼리고 피하고 터브시하던 것처럼 말이다. 우리나라 이런 거 보면 싹수가 아주 제대로 글러먹었다.
이런 사상적 상흔은 일제치하의 암흑기 및 자본주의 산업화를 겪으며 더 윤색되고 심하게 변질되었단다. 책은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여성상 ‘현모양처’부터가 내재적, 자발적으로 형성된 것이 아니라 근현대의 식민지와 전쟁, 자본주의 산업화에서 비롯된 외재적이고 타의적인 주입이었다는 점을 예시로 한다. 나는 이 대목에서 뒤통수 후려맞은 충격을 받았다.
1910년 이후 35년 동안 일본의 철저한 탄압으로 우리 민족 문화는 말살 직전까지 갔다. 1945년 광복 후 그놈의 사상적 대립으로 미군정의 지배가 이어졌다. 1950년 북한이 밀고 내려오며 한국전쟁이 터졌다. 그거 어찌저찌 수습하고 나니까 이제 1970년대 경제개발의 기치 아래 신문물․신사상을 마구마구 받아들였다. 그에 따라 전통적인 모든 가치가 헌신짝이 되면서 급속도로 자본주의 산업사회로 편입되었다. 놀라운 건 이 모든 사건이 채 한 세기도 되지 않은 기간에 일어났다는 부분이다.
변화가 크면 진통도 큰 법이다. 남녀 역할이 구분된 현대 가부장제의 정착은 바로 이 시기, 일제치하의 1910년부터 경제성장 외치던 1970년대에 뿌리를 박았다. 물론 그 씨앗은 조선의 무능력한 남자들이 뿌렸으나, 그것을 완전히 고착시킨 건 일제와 현대 국가 지도층이라는 것이다. 일제는 우리의 정신을 억압하기 위해 일본 메이지 시대에 만들어진 자기네 현모양처 사상을 끌어와 우리 문화에 이식했단다. 조선시대에 ‘양처’는 ‘양민 신분의 처’라는 신분적 개념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일제는 이를 비틀어서 가사 노동의 전담자로 만들었단다. 또 ‘현모’는 조선 때만 해도 ‘어진 어머니’ 정도의 의미에 지나지 않았단다. 그런데 일제는 그것을 비비 꼬아서 여자의 역할로 바꾸었단다. 그리고 우리는 현모양처 개념이 있었고 하니, 그것을 원래부터 우리 전통인가 봐 하면서 우리 것으로 받아들였고 말이다. 이런 망할!
우리는 여성 문인 신사인당조차 현모양처의 상으로 받아들였다. 하지만 이제 그놈의 현모양처를 좀 재조망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우리도 존심이 있지, 일제치하의 그림자 따위, 언제까지 싸안고 있을 수 없지 않은가.
그림 설명: 간송미술관에 소장된 김득신의 작품. 고양이가 병아리를 스리슬쩍하는 모습을 담은 그림 <야묘도추>
무려 양반이 집안 생계를 위해 키우는 양계업 병아리인데 이 고양이는 번번이 병아리를 훔쳐갔다고 한다.
* 출처: 책 《조선의 살림하는 남자들》
역사에 오늘의 답이 있다, 적어도 실마리는 있다, 《조선의 살림하는 남자들》의 의의
“축시(01~03시), 잠에서 깨기. 전날 일 반성하기. 인시(03~05시), 일어나기. 부모님께 새벽 문안드리기. 노비에게 집안일 분담하기. 묘시(05~07시), 부모님께 아침 문안드리기. 자식에게 공부 가르치기. 진시(07~09시), 아침 식사. 독서하기. 자식에게 글씨 숙제 내기. 사시(09~11시), 자식의 독서 단속. 독서하기. 손님 접대. 오시(11~13시), 부모님께 오후 문안드리기. 노비의 일 점검하기. 자식의 독서 검사. 벗과 토론하기. 편지 답장하기. 미시(13~15시), 명상하기. 산책하기. 의례 강습하기. 시 낭송하기. 셈 익히기. 신시(15~17시), 저녁 식사. 자식의 독서 내용을 암송시키기. 유시(17~19시), 부모님 잠자리 마련하기. 집안사람의 맡은 일 확인하기. 자식의 독서 내용 중 의문점 강론하기. 술시(19~21시), 등불 들고 집안 돌아보기. 일기 쓰기. 자식의 독서 내용 복습시키기. 해시(21~23시), 잠자리에 들기. 그날 일을 반성하기. 자시(23~01시), 깊이 잠자기.”
조선시대에는 남자가 오히려 여자보다 훨씬 많은 살림을 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고 한다. 이 책 《조선의 살림하는 남자들》에서 따로 발췌한 양반 남자들의 일과표를 보면 아주 그냥 과로사로 단명하기 딱 좋게 생겼다. 아니 무슨, 고3이냐고요! 왜 기상 시간이 3시인데? 그것도 새벽 3시! 게다가 숙면 시간은 또 왜 그 모양인데. 무슨, 해 뜨기 전부터 일어나! 조선시대 양반들은 다 올빼미족이었던 건가?
덧붙여 이 정신 나간 것 같은 일과표는 <사부일과>라고, 1800년 전후 퇴계 이황의 후손으로 추정되는 인물이 작성한 선비의 하루 일과표라고 한다. 하루를 십이지로 구분해 시간대별로 선비가 수행해야 할 사항을 자세히도 기록했다. 그런데 이거대로 따르다가는 스트레스로 단명 확정이다. 게다가 내가 부림받는 하인 입장이라면 하루 세 번 업무 체크하는 상사에게 좀 불만 많을 듯. 솔직히 일하는 것도 바쁜데 조회를 세 번이나 한다는 거잖아. 자식 입장에서도 무슨 공부며 복습을 수시로 한다냐. 부모 시점에서도 새벽부터 찾아와 잠 깨우는 자식놈이 마냥 달갑지만은 않을 듯?
내가 뭐, 옛날에는 이랬는데 오늘은 왜 이 모양이냐, 최소한 자식들 학습은 남편이 담당한 전례가 있다, 그러니 이 시간표를 오늘에 부활시키자는 뜻으로 발췌한 건 아니다. 그저 옛날 조선의 아버지들도 바깥일 뿐 아니라 자식 교육에도 신경을 많이 썼구나 하는 발견의 의미로 적었다. 오늘날의 ‘육아에서의 아빠의 역할’이 전혀 새로운 개념이 아니고, 예부터 있었던 우리네 역사였다는 사실을 기억하며 가정 내 역할 분담 갈등 생길 때 참고하라는 취지로 말이다.
여하튼 《조선의 살림하는 남자들》 덕분에 새로운 관점을 접할 수 있었다는 부분에서는 이번 독서가 꽤나 만족스러웠다.
문득 요즘 열심히 타오르고 있는 ‘젠더 감수성’ 문화가 생각난다. 내가 젠더 감수성에 타오른다는 뜻은 아니다. 운이 좋은 건지, 살면서 딱히 남녀 차별이니 하는 걸 느껴본 적 없다. 그냥 관련 내용이 점역 의뢰물로까지 들어와 내가 교정을 본 적 있고, 이 젠더 감수성이 언제부터인지 이슈화가 되었다는 걸 말하고 싶었을 뿐이다. 그리고 내 기준에서 그 ‘젠더 감수성’이라는 것이 좀...... 어떤 부분에서는 공감이 가지 않고, 약간 억지처럼 느껴졌을 따름이다.
지금도 기억이 난다. 화장실 남녀 그림 표시에 관한 젠더 감수성 운운한 내용이 말이다. 남녀 화장실을 나타내는 남녀 표지는 대개 남자는 파란색으로 표현된 동그라미와 네모 혹은 사람 그림이, 여자는 빨간색으로 표현된 동그라미와 세모 내지는 치마 입은 사람 그림이다. 나는 처음 이 대목에서 어디에 남녀 성 차별이나 인식, 젠더 감수성에 문제가 되는 부분이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설명 보고도 잘 납득이 안 갔다.
의뢰물에 나온 요지는 이렇다. 빨간 사람으로 표현해도 되지 않느냐, 왜 굳이 여자라는 이유로 치마를 암시하는 도형 및 그림을 사용하느냐.
개인적으로 우리나라에 아직도 가부장적 인식이나 사고가 있다는 건 인정한다. 그런데 아무리 그래도 이 화장실 표지 건은 공감이 가지 않았고, 솔직히 시비 거는 용도로밖에 안 보였다. 그래서 내게 ‘젠더 감수성’은 여차하면 핑계로 써먹기 좋은 테마 정도로 자리잡아 버렸다. 그 논지에 맞춰 화장실 표시를 색깔만 다르게 한 형태로 바꾼다 한들, 빨간색이 왜 여자를 의미하느냐고 시비 걸 것 같다. 반대로 보자면 남자는 왜 파란색 표시를 써야 한단 말인가? 분홍색이 취향인 남자도 있을 텐데.
솔직히 글자로 쓰면 문맹자나 외국인은 알아보기 힘드니까 약식화한 그림으로 표현한 거고, 여자들이 치마를 입으니까 보기 편하게 세모 넣은 것일 뿐인데, 뭘 그거 갖고 난리인가 싶다. 난 그런 걸로 남녀차별이니 젠더 감성이 없니 떽떽거릴 만큼 프라이드가 약하지 않다.
물론 유모차를 유아차로 바꿔 말하는 등 젠더적인 대안을 제시하거나 젠더 감성을 떠나 그쪽 의견이 더 좋은 경우도 있다. 하지만 화장실 표지 건처럼 정말 웬말인가 하는 시비 주장도 있는 게 사실이다. 그런 건 오히려 여성 혐오를 부추기고, 젠더 감수성에 대한 인식을 추락시킬 따름이다.
당연히 극성스러운 여자들도 문제지만 애꿎은 시비를 거는 남자들도 문제 있기는 마찬가지라 하겠다. 아니, 남녀를 떠나서 이상한 데서 꼬투리 잡는 건 인격적으로 수준 떨어지는 짓이다. 단적인 예로 양궁선수 안산의 헤어스타일과 얽힌 시비를 들 수 있겠다. 그냥 숏커트가 편해서 잘랐나 보지 하고 넘기는 게 정상인데, 무슨 그걸 가지고 남성 비하니 젠더 감수성이 부족하니 하는 분쟁으로 이어지는지 원. 뜨신 밥 먹고 참 할 짓들이 없구나, 끌끌!
누가 조장이라도 하는 건지 어째 나날이 갈수록 젠더 감수성 논란이 심심치 않게 들려온다. 서로 이해하려고, 존중하려고 하는 논쟁은 필요하다. 그러나 너와 나를 나누고, 남과 여를 나누고, 우위에 서려고 하는 언쟁은 지양해야 할 방향일 것이다. 그 옛날 조선시대에도 최소한 집안에서만큼은 남녀가 공동 CEO로 가정 경영했다고 하지 않는가.
진보는 못할 망정 퇴보해서는 안 될 노릇이다. 물론 여자가 내치하고 남자가 외치하던 그 옛날과 오늘은 같지 않다. 여자도 밖에 나가 사회활동을 하고 남자도 밖에서 사회활동을 한다. 또 남자가 가사를 전담하기도 하고, 여자가 사회활동에 적극적이기도 하다. 혹은 둘이서 안팎으로 활동하는 맞벌이가 대세 아닌 필수인 세상이기도 하다. 이때 필요한 건 서로를 이해하려는 마음가짐이지, 집안일은 네 영역, 경제활동은 내 영역 나누는 게 아니다. 가족이 사는 집안은 혼자 꾸리는 게 아니라 남녀 공동으로 꾸리는 것이라는 사실, 되새길 때가 아닐까? 그 옛날에도 남녀 공동으로 했던 거, 아무리 밥솥이니 청소기니 세탁기가 있다 한들 혼자 감당하는 건 어불성설이니까. 더구나 여자도 사회활동하지 않는가.
PS. 데이지도서에 첨부된 이미지 파일들 안에서 해당 그림들을 골랐는데, 각각의 그림 설명과 맞게 배치했는지는 모르겠다. 데이지도서 이미지 파일들은 '이미지 1' 이런 식으로 숫자만 매겨져 있지 그림이나 사진 제목은 없다. 내가 시각장애인인지라 옆에서 누군가의 눈을 빌려 설명 듣고 대충 어림한 거라서 내가 직접 설명을 쓴 그림 설명과 실제 발췌한 그림이 틀릴 수도 있다. 이 점 감안해주시길 바란다.
첫댓글 요즘 살림하는 남자들이란 방송이 생각 난다.
각자 잘 하는 분야에서 가정을 위해 노력하는 모습을 보여 주려 했으나 책 내용을 알고 난 후
서로에게 존경과 배려를 다하지 못한 모습이 아쉽다는 생각이 듭니다.
현모양처의 뜻이 직책이 아닌 직분인 것 처럼.
오늘도 좋은 공부하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