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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걸 6 - 로마 율리아 대비와 백제 왕비 은고에 베트남을 망하게한 규씨 왕비!
1,2 편에서는 전쟁에서 나라를 구한 여성으로 카르타고 디도 여왕과 프랑스 잔다르크와 영국의 엘리자베드
여왕 그리고 주나라를 세운 여제로 당나라의 측천무후와 3만 5천 대군을 한반도에 보내 백제를 재건
하려했던 왜국 여왕 스이코와 베트남의 쭝짝 자매에 대해 썼는데 이번에는 나라를 망하게 한 여인들 입니다.
(1) 율리아 마마이아는 황제를 마마보이로 만든 결과 50년 내란시대가 열리다!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로마 황제의 황후는 시리아 출신인 율리아 돔나였는데 아들 카라칼라 황제가 암살
되자 자결했으며, 가문이 탄압을 받자 그녀의 여동생 율리아 마이사는 왼손주를 카라칼라 황제의
사생아라며 반란을 일으켜 마크리누스를 죽이고 외손주를 황제로 올리니 엘라가발수스인데, 폭정과
기행을 벌이자 살기위해 첫 외손주를 죽이고 둘째딸의 아들을 올리니 세베루스 알렉산데르 황제입니다.
세베루스 알렉산데르의 어머니 율리아 마마이아는 야망이 큰 여인이니 아들을 일찍 부터 로마식 교육을
시켰고 언니의 아들 엘라가발루스가 황제가 되자 유심히 관찰하면서 기회를 기다리는데, 이종사촌형
엘라가발루스가 상식밖의 행동으로 세베루스 왕조를 파멸로 몰고가자 그녀에게 기회가 찾아온 것입니다.
어린 황제는 세금을 인하하고 민생 안정책을 시행했으며 수로, 도서관, 가도 건설에 네로가 만든 목욕탕을
자신의 이름이 들어간 건축물로 바꿔 호화롭게 재건했으며 번개를 맞고 손상된 콜로세움 복구하고
교사, 학자들에게 장려금을 지급했으며 속주까지 초등교육을 보급하는 한편 식료품 배급을
확대하고 농민에 무이자로 농지 구입자금을 빌려줬으며 포도주, 올리브유, 제빵, 제화 길드를 장려합니다.
어머니 율리아 마마이아는 시어머니 율리아 마이사 보다 부족함에도 권력욕이 강했으며 능력을
과신하면서 위엄과 명예를 드높이려고 했고 허세가 심했으니.... 딸의 단점을 알던 율리아
마이사는 지식인, 학자 등을 후원하고 교류하면서 뒤에서 조용히 보필하는 방법을 가르쳤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친정을 시작한 아들 알렉산데르를 자신의 분신으로 생각해 황제의 일거수일투족을 통제
하는 경향을 보였는데, 힘을 보탠 이는 근위대장 울피아누스였으니.... 세베루스
알렉산데르는 마마보이고 우유부단한 나머지 불만이 있어도 소극적으로 대처하는 단점이 뚜렷했습니다.
알렉산데르 황제는 엄청난 미인인데다 훌륭한 명문가 규수 오르비아나를 사랑했으며, 마마이아
역시 만족스러워 했지만 오르비아나는 16살 나이에도 당돌하고 한 성격 했던터라
시어머니 마마이아의 전횡을 참고 있지 않았으며 더욱 그녀는 당돌함 이상으로 야심이 많았습니다.
그녀는 남편 알렉산데르 황제가 어머니 마마이아의 영향에서 벗어나 독자적으로 울피아누스
등을 제어하게 하니.... 마마이아는 며느리가 황제를 조종한다며 분노했고
알렉산데르는 아내와 장인에게 호의적인 모습을 보이니 고부갈등과 알력 다툼으로 이어집니다.
어머니 마마이아는 며느리 오르비아나가 자기만 가져야 한다고 생각한 아우구스타(황후) 칭호를
받았다면서 불만을 표출하고 핍박하니, 오르비아나와 세이우스 살루스티우스는 갈수록
히스테리를 부리는 마마이아에게서 목숨을 구하기 위해 근위대와 황제에게 보호를 요청합니다.
모후가 근위대 수장들을 이용한후 처형하자 근위대는 불만이 폭발했으니 228년 프라이토리아니 장교와
병사들은 울피아누스에게 불만인 황궁 관료의 도움 아래 대낮에 황궁을 쳐들어가니, 울피아누스는
황제 모자 앞에서 살해당했는데 경호대 병사들은 무기 들고 난입한 병사들에게 대항하지 않고 방치합니다.
황제와 아우구스타는 부글부글 끓고 있다가 자제력을 잃고 폭발한 프라이토리아니를 두려워했고,
16인의 콘실리움 위원중 울피아누스를 잃은 15명의 위원들은 벌벌 떨었으니 이들이 겁먹은
이유는 특정 병사, 장교의 일탈이 아닌 프라이토리아니 전체가 내보이는 분노를 봤기 때문입니다.
그후 황제는 시리아 전선으로 출진해 파르티아와 전쟁을 치루었고 로마로 귀환후 게르마니아 전선으로 달려
갔는데 “결단력도 없는 겁쟁이”, “전투도 수행할줄 모르는 애송이” 라고 비난을 받는 중에 전쟁 초기에
우세한 상황에서 군사적인 역량이나 경험이 없는 알렉산데르는 시간벌기로 적에게 휴전을 제안하게 됩니다.
로마군 병사들은 게르만족과 피를 흘려가면서 싸웠고 초기에 승리를 거두었던 입장에서는
당연히 “황제가 싸울 생각도 안하고, 이기고 있는데 마마보이인지라 어머니 말만
듣고 게르만족에게 돈을 주면서 회유하려 든다” 고 불만을 가지게 되면서 반발하게 됩니다.
게르마니아 군단병들과 근위대는 반란을 일으켜 모군티아쿰(독일 마인츠) 병영
에서 235년 3월 19일, 막시미누스 트라쿠스를 황제로 옹립했으니,
이때 옹립된 막시미누스는 "나는 나약한 겁쟁이와 다르다" 라고 선언합니다.
우직하고 근본 없는 촌놈 막시미누스는 병사들을 이끌고 황제 막사로 쳐들어가 황제와 어머니
마마이아에 그 자리에 있던 장군, 원로원 의원들까지 살해하고 황제에 오르니....
로마 제국은 이후 50년간 악명높은 군인황제 시대가 열려 피비린내 나는 내란이 일상화 됩니다.
(2) 자기 아들을 태자로 세우다가 망국에 이른 백제 의자왕의 왕비 은고!
드라마 '계백' 에서 백제가 쇠락해 가는 모습이 나오는데..... 극중 백제의 상황은 왕후 은고가
최고의 권력을 누리고 있음에도 당나라로 부터 황후로 인정받지 못하자 좌평
임자와 조미압을 시켜 김춘추와 내통하고 연개소문과 계백의 움직임을 신라에 전하고 맙니다.
은고는 태자 부여융을 폐하고 자신의 소생인 부여효를 태자로 올리며 또 자신의 부정을 알게된 흥수
와 성충도 사서에 적힌 것 처럼 제거해버릴 수 있는 무서운 여인으로 돌변 하는데, 권력에
눈이 먼 크고 작은 세력들의 균형이 한번에 깨지면서 둑이 무너지듯 한번에 붕괴하는 모습입니다.
소설 같은 이야기이긴 한데... 일본서기 계명천황(일왕) 6년조 에는 백제 멸망의 원인으로 하시카시
(大夫人) 은고(恩古) 기사가 나오며 그녀가 성충과 흥수의 죽음에 관련이 있고 또 백제가
망한후 좌평 천복과 국변성에 손등 등이 당나라로 끌려갔다는 기사가 일본서기 26권에 나옵니다.
백제왕 의자(義慈), 처 은고(恩古), 아들 융(隆) 등, 신하 좌평 천복(千福), 국변성 (國辨成), 손등(孫登)
등 모두 50여 명이 가을 7월 13일에 소장군(蘇將軍, 소정방) 에게 사로잡혀 당(唐)에 보내졌다.
《일본서기》 권 26 天豐財重日足姬天皇 齊明天皇. 추가 하자면 의자왕과 은고는 태자
부여효, 왕자 부여태, 부여융, 부여연 및 대신과 장수 88인, 백성 12,087명과 함께 당나라로 끌려갔다.
백제부흥운동에 풍왕자가 5천 왜군을 데리고 나와 백제왕에 오르고 663년 왜군 3만이 1천척 배로 나오지만
백강에서 당나라 수군의 화공에 패해 물러가니 백제인들도 왜국으로 망명했으며, 668년 고구려 멸망후
당나라는 고구려인 거의 대부분을 중국 땅으로 잡아갔으니... 몇백년후 고려 왕건이 평양으로 진출하니
사람의 인적이라고는 없는 황무지로 변한지라 전투 없이 공짜로 목책을 치고 남쪽 사람들을 이주시킵니다.
소정방이 정림사지 오층석탑에 새긴 <대당평백제국비문> 에 '안으로는 요사스러운
부인을 믿으니 형벌이 미치는 곳은 오직 충량 (忠良) 에 있었다' 라는 기록이 있다.
《일본서기》 의 <제명기> 6년 7월조에는 "백제는 스스로 망하였다. 하시카시 (대부인, 大夫人)
가 요사스럽고 간사한 여자로서, 무도하여 마음대로 국가의 권력을 횡탈하고
훌륭하고 어진 신하를 죽였기 (誅殺賢良) 때문에 이러한 화를 자초했다." 라고 기술하고 있다.
의자왕이 즉위하면서 장남 부여융을 태자로 세운 바 있었으나 650년대 말에 갑자기 태자를 대부인의 아들인
부여융에서 부여효로 교체하고는 이 과정에서 반발한 성충과 흥수 등의 신료들을 내치는 사태가 벌어졌다.
문제는 '과연 은고 = 대부인인가?' 라는 의문이 생긴다. 왕건도 그렇듯
왕의 부인이 두 명 이상일 가능성도 있기 때문이다.
《일본서기》 에서 은고를 의자왕의 처라고 기록했으니 정실 왕후였을 가능성이 높다.
至庚申年七月。百濟遣使奏言。大唐。新羅幷力伐我 旣以義慈王。々后。太子爲虜而去
경신년 7월에 이르러 백제가 사자를 보내, 당과 신라가 힘을 합해 우리를 공격하여
이미 의자왕, 왕후, 태자를 포로로 하여 갔다고 아뢰었다. - 《일본서기》 <제명 천황> 6년, 660
한서 <왕망전> 에 따르면 '대부인(大夫人)' 은 정실 부인, 그것도 '태자를 둔 부인' 을 말한다. 의자왕의 정실
부인은 은고니까 대부인 (大夫人), 즉 임금의 대부인은 은고가 된다. 거기에다 대부인은 태자 효를 두었다.
의자왕이 655년 무왕의 부인 태후가 죽은후 친위 쿠데타를 일으켰고 이 과정에서 태자가 부여융에서 부여효로
교체되었으며, 집권 세력이던 좌평 성충, 흥수등이 내쳐진 것이라고 보며 군대부인이 요녀라고 기록된 것이다.
그렇다고 은고 왕비에게만 망국의 책임이 있는 것은 아니고 백제 멸망의 가장 큰 책임은 자식들을 무려
40명씩이나 1등 관직인 좌평에 앉혀 국인들을 소외시킨데다가..... 국사를 팽개치고 술과 여자
에다가 유흥에 탐닉하면서 충신들의 간언을 물리치고 유배 보내서 죽인 의자왕에게 있음은 물론 입니다.
(3) 베트남을 한나라에 망하게 만든 왕비 규씨
한 (漢) 나라는 장안에 입조한 남월국 (베트남) 태자 영제에게 남월에 부인이 있는 것을 알면서도 미녀
규씨를 접근시켜 결혼시켜 아들 흥 (興)이 태어나니 남비엣(남월) 을 접수할 계획을 세우는데,
부왕 문제가 죽고 귀국한 태자는 3대 명왕에 올라 한 (漢) 나라 여인의 아들 흥을 태자로 책봉합니다.
명왕이 12년만에 죽고 태자가 즉위하니 4대 애왕으로 중국 여인 태후 규씨는 섭정이 되었는데 한나라는
규씨의 옛 중국인 연인 소계를 남비엣에 보내 마음을 사로잡게한후 간대부 종군과 용사 위신을
보내 태후를 호위케하고 노박덕 장군에게는 군사를 이끌고 국경 계약에 주둔시켜 남비엣을 압박합니다.
옛 연인과 부정한 관계가 소문이 나자 태후 규씨는 더욱 한나라에 의존할수 박에 없는 궁지에 몰리니
그녀는 아들인 애왕과 신하들에게 한나라의 속국이 되자고 조르는데.... 섭정의 자격으로
중원의 제후들 처럼 국왕이 3년에 한번씩 입조하고 국경 관문을 없애 달라고 한(漢) 나라에 청원합니다.
한무제는 이를 허락하고는 남비엣(남월) 의 승상 르기아에게 은인(임명장) 을 보내면서
남비엣의 모든 법률을 폐지하고 한 (漢) 나라 법으로 대신하며 사신으로 간 한나라
관리들이 남비엣을 접수하도록 하자 애왕과 태후는 한나라에 입조할 행장을 꾸립니다.
그러자 르기아등 백월족 귀족들은 반발하니 남비엣 조정은 친한파와 반한파로 나뉘게 되자 태후는 연회를
열어 르기아등 대신들을 죽일려고 음모를 꾸며 태후가 르기아와 논쟁을 벌였는데, 이때 르기아의
동생이 군대를 왕실에 배치한지라 수하들이 어쩌지 못하자 태후가 직접 창을 들었으나 애왕이 만류합니다.
이에 한무제는 한천추에게 병사 2천명을 주어 르기아를 체포하게 하자 르기아는 반란을 일으켜
대궐로 쳐들어가서 애왕과 태후를 목베고는..... “왕과 태후가 우리 보물들을 모두
한나라에 바치고 남비엣 백성들을 장안으로 끌고가 노예로 팔고 있다” 라고 민족감정 을 자극합니다.
그리고 선왕인 명왕이 베트남인 첫 부인과 사이에서 낳은 장남 건덕을 왕으로 추대하고는 남비엣
수도 번우 40리까지 내려온 한천추의 한나라 군대 2천명을 기습해 몰살시키니....
한무제는 대노해 죄인들과 강회 (江淮) 이남의 수군 10만명에게 남비엣을 침략할 것을 명합니다.
한나라는 오랜 준비 끝에 기원전 133년에 시작한 북쪽 흉노와의 전쟁은 만리장성 너머 내몽골 지역까지
차지하는 대성과를 거두었지만 흉노를 전멸시키려는 한무제의 무리한 욕심에 나라 전체가 피폐해
지고 있었으니, 가면 돌아오지 않는 북방 원정은 한나라의 인적, 물적 자원을 블랙홀처럼 고갈시켰습니다.
한(漢) 무제는 흉노족과의 오랜 전쟁에 남비엣과의 전쟁, 고조선과의 전쟁에다가 대완국에
대한 침략 전쟁등으로 무제 치하 40년간은 전쟁으로 얼룩진 기간이니 오랫동안
소모전이 계속된지라..... 한나라 인구는 4천만에서 불과 2천만으로 줄어들었다고 합니다.
남비엣(남월) 을 정벌하는 한 (漢) 나라 군대 10만은 다섯 갈래로 나뉘어 남진했으니 복파장군 노박덕은
계양에서 회수로 내려가고, 누선장군 양복은 예장을 거쳐 횡포로 내려가며 치의후는 사천의
파와 촉에서 죄수들을 모은뒤 장가강으로 내려가 다섯 부대가 남비엣의 수도 번우에 집결하기로 합니다.
1군(軍) 복파장군 노박덕은 강서성의 포양호에서 수십척의 소형 선박을 거느리고 남하하다가
공주(贛州) 에서 공수(贡水) 를 경유해 도강(桃江) 으로 갈아타고 남하해
광둥성의 옹원현(翁源縣)에서 베이장강(北江)에 진입하여 남월 수도 번우(番寓) 로 향했습니다.
2군(軍) 누선장군(樓船將軍) 양복(楊僕)은 포양호에서 수십척의 누선함대를 이끌고 장창(長江)을 타고 안휘성
(安徽省)의 안칭(安慶)을 지나고 장쑤성(江蘇省)의 난징(南京), 양저우(陽州)를 지나 상하이(上海) 로
빠져 남해안(南海岸) 을 끼고 해안가로 순항하다가 광동성 주강만(珠江灣)으로 진입해 번우로 향했습니다.
3군(軍) 치의후(馳義侯) 유(遺)는 귀주성(貴州省) 지나 광서성 홍수하(紅水河)를 타고 남진해 창오(蒼梧)에서
광둥성 서강(西江)으로 진입하고, 귀순한 월후(越侯) 과선장군(戈船將軍)과 하려장군(下厲將軍)이 별동대
로써 영릉 (零陵) 에서 출병하여 리강 (灕江) 을 타고 계림을 거쳐 서강(西江) 으로 진입하여 번우로 향했습니다.
그런데 죄수를 군대로 편성하는 작업은 시일이 지체된지라 준비된 부대부터 남진을 시작했는데 누선장군 양복의
5만명은 삼협과 석문을 함락해 남비엣의 전함과 식량을 빼앗았지만 기일을 넘겨 도착한 노박덕은 수천명을
거느리고 왔는데 죄수들이 행군중 달아난 것이며 치의후(馳義侯) 유(遺) 등 나머지 3개 부대는 감감 무소식이라?
더 이상 기다릴수 없었던 두 장군은 남비엣의 수도를 향해 진군하니 르기아가 지휘한
남비엣(남월) 군은 번우성문을 굳게 닫고 저항하는데.... 양복이 우세한 군세로
적군을 강타했다면 노박덕은 뛰어난 전술로 적을 자멸시키고 아군의 피해를 최소화 합니다.
노박덕은 저녁에 서북쪽 성문에 도착했는데 진을 치면서 한군의 병력이 마치 대군인 것처럼
위장했고 백전노장 노박덕의 명성에 위축이 된 남비엣 병사들이 항복하면 관직을
주겠다고 회유한 후에 다시 번우성으로 들여보내 다른 병사들에게 항복을 권유하도록 합니다.
한밤중에 양복의 대군이 불화살로 번우성을 공격하자 남비엣 병사들은 힘껏 싸웠지만 전세가 불리해지자 목숨
을 구해 서북쪽 노박덕 장군의 진채로 찾아가 항복하니 승상 르기아와 남비엣 왕은 바닷가로 달아나
배를 탔지만 이후 체포됐으며 한군은 오늘날 광동성과 광서성 지역인 창오군과 구월, 낙월을 손에 넣었습니다.
한군은 오늘날 베트남 영토로 진입해 쟈오찌(교지)군과 끄우전(구진) 군에 이르자 남비엣 군수들은 호적으로
항복하니 한나라는 다시 태수로 임명해 예전처럼 다스리게 하고 토착 지배계층인 락장과 락후들의
권한도 인정해 쉽게 평정하니 남비엣(南越 남월) 은 93년만인 기원전 111년에 망하고 9개 군이 설치됩니다.
남월을 멸망시킨 두 장군중 노박덕은 곽거병 등과 함께 흉노를 정벌하는데 큰 공을 세운 장군이었고,
누선장군 양복은 3년 후인 기원전 108년에 좌장군 순체와 함께 함대를 이끌고 발해만을 건너
고조선을 멸망시키고 한4군을 설치하는데..... 이때 한나라 병력은 3만 (5만?) 정도 였다고 합니다.
남비엣의 지배계층은 기득권을 유지했지만 베트남 백성들은 천년동안 중국의 지배 아래 모진 수탈을 당해야
했는데.... 왕건이 토착 호족들의 권한을 모두 인정한 것이나, 일본이 조선 지배층에게 은사금을 주고
귀족 작위에 중추원 의원을 시켜주며 또 양반 지주들의 토지등 재산과 지위를 인정한 것과 매우 유사합니다.
베트남은 중원에서 멀리 떨어져 있고 기후와 풍습이 낯설어 한나라 관리들이 오기를 꺼려하니 관리
들의 질이 낮을 수밖에 없었는데 그들은 권세가들에게 뇌물을 주어 자리를 얻고는 베트남인
들을 착취해 몇배로 주머니를 채운 후에는 중앙에 뇌물을 바쳐 근무지를 바꾸어 달라고 청탁합니다.
조선에서 정조 임금 사후 안동권씨의 세도정치가 시작되니 과거시험을 치르기도 전에 합격자 명단이
작성되고 과거 급제자 중에 군수나 현령으로 가려면 뇌물을 바쳐야 했으니..... 3가지를
긁어 모으는데 먼저 빚을 내서 바친 뇌물, 두 번째는 3년후 임기가 만료되어 해직되면
다시 벼슬 자리를 얻기위한 뇌물 그리고 가족이 평생 먹고살 재산 이렇게 긁어 모은 것과 유사합니다.
중국인 관리들이 베트남에서 주로 뺏어간 물품은 금과 은, 동, 진주, 루비, 상아, 꼬뿔소 뿔,
거북 등껍질에 생강과 계피등이었는데 이것을 생산하는 주민들은 식량과
교환해야 할 특산물을 중국인 관리들에게 빼앗기자 자연히 여기 저기서 반란이 일어납니다.
조선에서 지방에 사또로 나간 관원 중에 가장 노련한 자는 백성들을 착취하지만 폭동이 일어나기
직전에 멈추는 절제력을 발휘하는 자들이니, 만약에 폭동이 일어나면 관아로 쳐들어와 사또를
업어다가 군의 경계밖에 가서 버리는데.... 그럼 사또는 파직되고 주동자들은 몇명 사형을
시키는 선에서 수습하면 다음에 오는 사또는 2~3년간 착취 규모를 줄여야 하니 죽을상을 짓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