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정육의 그림 / 불교 30. 김윤겸, ‘장안사’
불법 배우는 그곳이 바로 법당,
깨달음 구하는 그것이 곧 출가
“꼭 삭발염의를 해야 출가하는 것이 아닙니다.”
유마경
▲ 김윤겸, ‘장안사’(금강산화첩 중), 1768년, 종이에 연한 색,
27.7×38.8cm, 국립중앙박물관.
“개량한복 입고 가방 메고 절에 가는 사람들을 보면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어요.
얼마나 복이 많으면 저런 복을 누리고 사나 싶기도 하고….”
“저도 그래요. 가능하다면 지금 하는 일 다 때려치우고 절에 다니면서 살았으면 좋겠어요.”
자로 잰 듯 그린 정선과는 달리
부드러운 필치로 묘사한 김윤겸
그림 속 숲에 앉아있지 않아도
깨달음 발원하는 그 자리가 법당
환갑이 넘어서도 여전히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는 선배를 만나 주고받은 얘기다.
일도 열심히 하고 신심도 장한 선배는 세속적인 욕심이 많지 않은 사람이다.
그런 사람이 마음속에 품은 아쉬움을 얘기한다.
어쩔 수 없이 일을 해야 하는 상황 때문에 신앙생활을 충분히 할 수 없는 것이 안타깝단다.
그 점은 나도 마찬가지다. 예전에는 일할 때가 가장 행복했다.
일중독에 걸린 사람처럼 일을 해야 즐거웠다. 그런데 지금은 다르다.
경전 읽고 참선하고 염불할 때가 가장 행복하다.
책을 읽으며 감동받는 것도 좋지만 경전을 읽을 때와 비교해보면 모두 부질없지 싶다.
그저 절에 간다는 사실만 생각해도 기분이 좋다. 병이 들어도 깊이 들었다.
김윤겸(金允謙:1711-1775)이 그린 ‘장안사’는 금강산에 있는 절이다.
절에는 듬직한 산을 배경삼아 여러 채의 전각이 들어서 있다.
절 안의 전각들은 계곡 옆에 긴 다리를 늘어뜨리고 선 누각에서부터
맨 안쪽에 늠름하게 좌정하고 있는 이층 대웅전까지
원래부터 그 자리에서 나고 자란 듯 넉넉하고 스스럼없다.
떨어져 있되 한 몸인 듯 자연스럽다.
산세에 맞춰 건물의 방향을 정하고 높이를 배치했기 때문이리라.
절집의 살림살이가 짐작되는 자연스러움이다.
바라만 봐도 번뇌에 찌든 속인의 마음을 누그러뜨려주는 절이다.
시끄러운 삶터를 벗어나 일주문에 들어설 때의 설렘과
풍경소리와 솔잎향기가 절로 연상되는 절이다.
넉넉한 인심을 짐작할 수 있는 절 앞에는 무지개다리가 놓여있다. 홍예교다.
불국사에 가면 만날 수 있는 청운교, 백운교가 무지개다리다.
선암사의 승선교, 흥국사의 홍교도 한 번 보면 잊을 수 없는 무지개다리다.
백양사, 통도사, 월정사에도 무지개다리가 있다.
얼마 전까지 우리 아들이 근무했던 22사단 옆 건봉사에도 무지개다리가 떠 있다.
무지개다리는 차안에서 피안으로 건너가는 아름다운 다리다.
무지개다리 밑으로 계곡물이 콸콸 흐른다.
세속에서의 상처받은 마음은 계곡물에 헹구고 피안의 세계로 들어오라는 가르침이다.
많은 청춘들을 죽음으로 몰고 간 억울하고 안타까운 마음도 잠시 내려놓고
절집에서 쉬었다 가라는 위로의 다리다.
우리가 생을 마칠 때도 이런 무지개다리를 건널까.
그 다리를 건너면 더 이상 마음 아프지 않는 평안의 세계로 들어갈 수 있을까.
이런 편안함은 단지 전각의 배치에서만 비롯된 것이 아니다.
전각이 들어앉은 풍경을 그린 김윤겸의 솜씨에 기인한 바가 크다.
김윤겸은 건물과 건물 사이가 너무 복잡하다 싶으면 적당히 생략하는 묘를 잊지 않았다.
대신 그 자리에 나무를 그렸다. 여백을 목적으로 그린만큼
이름표를 떼고 존재감을 드러내지 않았다. ‘나무’라는 보통 명사로만 그렸다.
보통 명사라도 명사는 명사다. 한 눈에 봐도 나무의 신분이 전나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하늘을 향해 곧은 나이테를 쌓아가는 지조 있는 가문의 후손이다.
그러나 아무리 좋은 가문의 나무라 해도 필요할 때면 보통 명사 속에 묻혀야 한다.
아니, 무명씨가 되어야 한다. 절은 그런 곳이다. 아니 그림은 그런 것이다.
무명씨는 이름이 없어도 실재하지만
아예 나무 자체를 지워버리고 구름과 안개를 덮어버린 곳도 있다.
지붕 위로 하얗게 여백을 남겨둔 곳이 그러하다.
그 덕분에 뒷산 무릎을 휘감은 구름은 장안사 건물 지붕 위를 휘감더니
마당 속으로 고즈넉하게 스며든다.
김윤겸이 절을 그리면서 건물이 아닌 절집의 분위기를 전해주기 위해
얼마나 신경 썼는지 알 수 있다.
똑같은 장소를 그린 정선(鄭敾:1676-1759)의 ‘장안사’를 보면 더욱 그 차이를 느낄 수 있다.
정선은 선이 굵은 작가다. 강약이 분명하다.
그러나 ‘장안사’가 들어 있는 ‘풍악도첩(楓嶽圖帖)’을 그리던
37살 때의 정선은 자로 잰 듯 정확했다. 꼼꼼하다 못해 칼날 같았다.
정선이 그린 ‘장안사’는 건물의 규모는 물론
건물 칸 수와 석축과 지붕 종류까지 구분할 수 있다.
그는 비홍교(飛虹橋) 건너편에 얼음기둥처럼 서 있는 흰색 봉우리까지
사실 그대로 그리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는 사내였다.
물론 그도 나이 들어서는 버릴 것은 버릴 줄 아는 사람으로 바뀌었다.
58세의 김윤겸이 ‘장안사’를 그릴 때처럼 말이다.
흔히 김윤겸은 정선의 영향을 받은 겸재화파(謙齋畵派)로 ‘일괄’ 분류된다.
정선처럼 금강산을 비롯한 조선 산하를 진정성 있게 그렸으니
일견 타당한 분류로 생각할 수도 있다.
또한 김윤겸의 집안과 정선과의 관계를 생각해도 추측 가능한 얘기다.
호가 진재(眞宰), 산초(山樵), 묵초(默樵)인 김윤겸은 문벌 좋은 안동 김씨의 후손이다.
그는 당시 세도가였던 김창업(金昌業:1658-1721)의 서자로 태어났다.
김창업은 정선이 화가로써 명성을 이어갈 수 있도록 물심양면으로 도움을 준 후원자였다.
이쯤 되면 김윤겸이 정선을 따라 진경산수를 그리게 된 필요충분조건이 성립된다 하겠다.
▲ 정선, 장안사, 1711년, '풍악도첩', 비단에 옅은 채색, 36×37.4cm,
국립중앙박물관.
그러나 김윤겸이 정선의 영향을 받아 진경산수를 그렸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그림은 정선의 그림과 다르다.
김윤겸은 ‘장안사’에서 오른쪽에 병풍처럼 둘러선
산을 그릴 때 산의 형태만 선으로 표현했다.
나머지 산 표면은 푸르스름한 색을 풀어 연하게 적셨다.
뒷산에 칠한 색은 앞산과 나무와 지붕을 지나 계곡에 놓인 둥글둥글한 바위에도 물들어있다.
앞산 일부에는 연한 황토색을 풀어 땅의 질감을 느끼게 했다.
그림 전체에서 맑고 산뜻한 느낌이 우러나는 것은 바탕을 적신 연한 색 덕분이다.
마치 수채화 같다.
정선의 ‘장안사’는 그 반대다. 각각의 요소들은 독립적이다.
소나무는 소나무대로 전나무는 전나무대로 그 자리가 아니면
서 있을 자리가 없을 정도로 적재적소에 사물을 배치했다.
같은 바위를 표현해도 대상을 끄집어내는 특징은 다르다.
김윤겸이 형태만 그리고 푸르스름한 색으로 적신 바위표면을
정선은 수직준(垂直皴)으로 죽죽 내리그었다.
거친 바위의 질감을 살리기 위한 기법이다.
김윤겸이 살을 취했다면 정선은 뼈를 취했다.
그래서 정선의 그림은 빈틈이 없어 보인다. 딱 부러진 느낌이다.
너무 정확해서 보는 사람이 질려버릴 수 있는 그림이 정선의 ‘장안사’다.
정선도 감상자의 심정을 짐작한 것 같다.
계곡물을 사이에 두고 오른쪽이 날카로운 바위라면 왼쪽은 부드러운 숲이다.
바위에는 거친 수직준을 썼다면 숲에는 부드러운 미점(米點)을 썼다.
오른쪽이 양이라면 왼쪽은 음이다. 양이 굳세고 강하다면 음은 연하고 너그럽다.
서로 다른 성질의 대비된 세계가 한 화면에 들어있다는 점에서
정선의 ‘장안사’는 ‘금강전도’의 축소판이다.
두 그림 모두 빈틈을 허락하지 않는 단단한 그림이다.
치밀한 계산속에서 탄생된 과학적인 그림이다.
반면 김윤겸의 ‘장안사’는 전체적으로 부드럽다.
조금 부족한 사람이 가도 그 넓은 마음을 열어 무조건적인 연민으로 품어줄 것 같다.
만약 내가 진로를 선택할 수 있다면
정선이 아니라 김윤겸의 그림 속으로 걸어들어가고 싶다.
김윤겸이 그린 ‘장안사’는 ‘봉래도권(蓬萊圖卷)’에 들어 있는 작품이다.
‘봉래도권’은 장안사, 명경대, 원화동천, 정양사, 내원통, 보덕암, 마하연, 묘길상 등
금강산의 명소를 8장면으로 그린 화첩이다.
원래는 12폭이었을 것으로 추정되나 현재는 4폭이 결실되었다.
장자의 아들이 유마거사(維摩居士)에게 물었다.
“부처님 말씀에 ‘부모가 허락하지 않으면 출가할 수 없다’고 하는데,
어떤 것이 참다운 출가입니까?”
유마 거사가 답했다.
“꼭 삭발염의를 해야 출가하는 것이 아닙니다.
만일 위없는 바른 깨달음을 발원한다면 그것이 곧 출가하는 것이고,
그것이 바로 구족계(具足戒:비구, 비구니가 지켜야 할 계율)를 받는 것입니다.”
‘부모가 허락하지 않으면 출가할 수 없다’는 표현에서
‘부모’ 대신 ‘현재 상황’을 넣으면 딱 내 처지다. 지금 내 상황이 출가할 상황이 아니다.
그런데 출가는 하고 싶다. 출가까지는 아니더라도 절에 자주 가서 살다시피 하고 싶다.
문제는 현재 처지가 내 뜻대로 움직여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럴 때 유마거사의 가르침은 어두운 밤길을 걸을 때 환한 가로등을 만난 것처럼 반갑다.
굳이 출가하지 않아도 위없는 바른 깨달음을 구한다면 그것이 곧 출가하는 것이란다.
어디에 있든 부처님의 가르침대로 사는 것이 중요하다는 뜻이 아니겠는가.
부처님의 말씀이었다면 조금 덜 감동받았을지도 모른다.
부처님이니까. 부처님은 워낙 훌륭한 분이시니까 그렇게 말씀하실 수도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유마거사가 누구인가. 출가하지 않은 재가신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어떤 출가수행자보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깨닫고 실천하는데 탁월했다.
오죽했으면 기라성 같은 부처님의 제자들이 그가 병이 났을 때 문병가기를 꺼려했을까.
감히 대적할 수 없을 만큼 큰 수행자였기 때문이다.
그 중 한 예만 살펴보겠다.
부처님께서 제자들에게 유마거사 병문안을 보내야겠다고 생각하시고
사리불에게 병문안을 다녀오라고 하자, 사리불이 부처님께 말했다.
“부처님, 저는 그 사람에게 문병갈 수 없습니다.
제가 오래전 숲 속 나무 밑에 앉아 조용히 좌선을 하고 있을 때
유마거사가 제게 이런 말을 했습니다.”
“사리불 존자님,
무조건 앉아 있는 것만이 좌선이 아닙니다.
좌선이란 삼계에 있으면서도 몸과 마음의 작용을 나타내지 않을 때를 말하며,
번뇌가 완전히 사라진 멸진정(滅盡定)에서 일어나지 않으면서도
온갖 위의를 나타내는 것이 좌선이고,
부처님의 도법을 버리지 않고 범부의 일을 나타내는 것이 좌선입니다.”
김윤겸이 그린 장안사에 가서 수행을 하면 참 좋을 것이다.
장안사처럼 상서로운 터전에 가서 금강경을 읽으면
눈으로만 보던 구절이 가슴까지 전달되고 없던 신심도 절로 우러날 것 같다.
그러나 유마거사의 얘기를 들어보니 지금 이대로도 나쁘지 않다.
삭발염의를 하지 않아도, 숲 속 나무 밑에 앉아있지 않아도 결코 나쁘지 않다.
부처님의 법문을 배울 수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그곳이 법당이고 출가이기 때문이다.
나도 출가자다.
2014년 8월 20일
출처 : 법보 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