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거룩하고 복된 주의 날에 살아계신 하나님 앞에 나와 예배드리는 사랑하는 모든 성도님께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함께 하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말씀의 제목은 “생명의 관을 네게 주리라”입니다.
우리가 오늘과 내일에 전남 신안군 증도에 있는 문준경 전도사 순교 기념관과 영광군의 야월교회와 염산교회를 방문하게 되는데 가시는 분들에게는 미리 좀 알고 가셔야 은혜가 더할 것 같고 또 너무 가고 싶어도 사정이 있어 못 가시는 분들에게 알려드리기 위해 본문과 함께 말씀을 준비했습니다.
6.25전쟁은 교회에 큰 피해를 안겨줬습니다. 1,000여 개의 교회 건물은 파괴되거나 전소됐고, 수많은 교인들은 공산군에 의해 목숨을 잃게 되었습니다. 6.25 전쟁으로 순교한 기독교인의 수가 5만 9천여 명에 이릅니다. 그 가운데 전남에서 발생한 희생자만 4만 3천여 명인데, 그중 영광군에서 가장 많은 순교자가 나왔습니다(2만9천명). 그래서 ‘예수 믿고 망한 동네’라고 불릴 만큼 참혹했던 영광군입니다.
특히 우리가 내일 방문하는 야월교회는 1908년, 유진벨 선교사에 의해 세워졌는데 전교인 65명이 모두 순교했습니다. 공산주의자는 아이나 노인이라고 봐주지 않았습니다. 남녀를 불문하고 모조리 죽였습니다. 우리 역사에 일본 식민지하의 만행 중에 제암리 학살사건이라고 배운 게 있습니다. 1919년 4월 15일에 경기도 화성시 향남읍에 있는 제암리 교회를 일본군이 성도를 모아 나오지 못하게 문을 잠그고 불을 질러 죽인 만행입니다. 이때 29명의 성도가 학살되었습니다. 이 해는 3.1운동이 일어난 해로 지역마다 계속 만세운동이 일어날 때였고 3.1운동을 주도한 세력이 거의 교인이라는 것을 알고 일본군인들이 아예 교회와 성도를 불태워버린 끔찍한 만행을 저지른 것입니다. 이 사건은 우리나라 대부분의 역사 교과서에 실렸습니다. 일본군의 만행이기 때문에.
그런데 야월교회는 이보다 두 배가 넘는 65명의 전교인이 희생되었습니다. 염산교회는 77명입니다. 때려죽이고 돌을 매달아 바다에 빠뜨려 죽이고 생매장을 시킨 더 끔찍한 만행입니다. 같은 민족인데도 긍휼이라고는 도무지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어느 교과서에도 안 실립니다. 공산주의자나 일본군인이나 잔인하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우리는 지금도 그들의 사상과 이념이 바뀌지 않은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역사의 뼈아픈 교훈을 삼고 후손에게 바르게 알려야 합니다. 양의 탈을 쓴 이리임을 바르게 알지 못하면 이러한 역사가 또 반복되기 때문입니다. 단재 신채오 선생은 “고난의 역사를 잊은 민족은 미래가 없다.”라고 했습니다. 기억조차 하기 싫지만 잊으면 반복되기 때문에 기억해야 합니다.
야월교회는 미국인 유진 벨 선교사가 세운 교회입니다. 1895년 미국 남 장로교 소속의 유진벨(한국명 배유지) 선교사가 부인과 함께 조선 땅을 밟으면서, 이때부터 그는 물론 그의 후손들까지 한국과 인연을 맺고 있습니다. 유진벨 선교사는 먼저 들어온 언더우드 선교사와 지역이 중복되는 것을 피하기 위해 자신이 호남을 맡게 되었고, 그 이후 호남 선교를 주도하게 됩니다.
선교활동은 당시 대부분의 선교사들이 그랬듯이 교육과 의료 사역에 중점을 두었는데, 목포에 정명학교와 영흥학교, 광주에 숭일 학교와 수피아 여학교를 세웠고, 광주에 최초의 종합병원인 광주기독병원(현 제중병원)을 세웠습니다. 이분의 자녀들도 모두 한국 땅에서 선교에 힘썼는데 5대 후손이 연세대학교 의대교수인 인요한교수입니다. 이분이 119 구급차를 개발한 것입니다. 한국어를 한국인보다 더 잘하고 한국을 한국인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순교자들의 신앙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부모와 자식이 죽임을 당했는데 그런 살인을 범한 자들을 용서하고 화해한 후손들입니다. 아버지가 죽음 당한 그곳에서 양들을 돌아보며 목회를 해야 했던 아들도 있고 아들을 찔러 죽인 이웃을 용서하고 살아온 부모님도 계십니다. 악을 악으로 갚지 않고 선으로 악을 이기고 살아온 분들입니다. 우리가 정말 기억해야 할 신앙의 모습이 아니겠습니까.
우리가 아는 손양원 목사님은 두 아들을 죽인 자를 용서하고 양자로 삼았는데 영암군에 상월교회의 진성구 장로와 임상단 권사는 오로지 예수님 믿는다는 이유로 세 아들을 죽인 자들을 다 용서해주었습니다. 세 아들을 동시에 장례를 치르고 돌아오니 장로님 친구들이 범인을 잡아다 묶어 놓고 장로님에게 총을 지어주면서 복수하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장로님은 하늘을 향해 총을 세 발 쏘고 용서했습니다. 순교자 가족의 삶도 참 훌륭합니다. 다음에 가보고 싶은 곳입니다.
오늘 본문은 사도요한이 아시아의 일곱 교회에 차례대로 편지한 것 중에 두 번째인 서머나 교회에 쓴 것입니다. 사도들은 복음을 전하다가 모두 순교했지만 사도 요한은 예수님의 말씀대로 순교하지 않고 마지막까지 남아서 밧모 섬에 유배되어 있을 때 예수님께서 세상 끝에 될 일을 보여주셨는데 그때 본 것을 기록한 것이 요한 계시록입니다. 이 계시록 때문에 수많은 이단이 출현합니다. 왜냐하면 남은 자, 구원받은 자는 144,000명이라는 숫자가 나오는데 자기들 무리, 자기들의 교회, 교단만이 그 숫자라는 것입니다. 이게 성경을 해석하는데 가장 위험한 문자적 해석입니다. 단지 상징이나 비유인데 자기 주관적으로 풉니다. 마치 자신이 특별한 계시 받은 종인 것처럼. 이단들의 공통된 특징은 계시록을 통해 종말을 강조하고 자기들의 집단에 들어와야만 구원받는다고 합니다. 일반교회는 가라지이고 쭉정이라 구원이 없고 자기들만이 알곡이라고 속입니다. 본문에 말하는 대로 그야말로 사탄의 회당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것을 경계하고 경계해야 합니다.
이 서머나 교회는 바울이 전도해서 세운 소아시아 지역의 항구에 있는 교회입니다. 지금은 터키(튀르키예) 남부에 있는 이즈미르라는 이름의 도시입니다. 예수님은 9절에서 서머나 교회 성도들을 칭찬합니다. “내가 네 환난과 궁핍을 알거니와 실상은 네가 부요한 자니라 자칭 유대인이라 하는 자들의 비방도 알거니와 실상은 유대인이 아니요 사단의 회당이라” 예수님께서 서머나 교회의 환난과 궁핍을 아신다고 하십니다. 환난과 궁핍은 그리스도인들이 황제 숭배를 거절함으로 당한 경제적 제재나 적대 감정을 가진 유대인이나 다른 사람으로부터 당한 경제적 어려움입니다. 그러나 실상은 부요한 자입니다. 이 땅의 삶은 늘 가난 속에 살며 궁핍해도 그들의 영혼은 하나님으로 인해 부요한 자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평안과 기쁨이 있고 영혼이 하나님으로 만족하는 삶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가진 게 없어 불안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함께 함을 느끼지 못할 때 더 불안한 것입니다. 가진 것으로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한다는 믿음이 있을 때 만족이 있는 것입니다. 단지 사업 잘 된다고 행복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확신으로 진정 행복한 것입니다. 혹 사업은 잘 되어도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확신이 없으면 재물은 늘어나도 불안이 함께 늘어납니다. 나는 올라가는데 하나님은 내려가신다면, 나는 내려가는데 하나님은 올라가신다면 얼마나 불행한 자입니까. 하나님과 진정 동행하고 인정받는 자가 행복한 자요 진정 부유한 자입니다.
눅12장에서 예수님은 어리석은 부자를 비유하시면서 그가 많은 것을 쌓아두고 자기 영혼을 향해 이제 편히 먹고 쉬자 라고 할 때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라도 하나님이 네 영혼을 찾으시면 네 쌓은 것이 무엇이 되겠느냐 하시면서 21절에서 결론을 내립니다.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하지 못한 자가 이와 같으리라” 이 땅에서는 재물이 많아 먹을 게 많고 육신적으로는 아무리 부유할지라도 그 영혼이 하나님과 사귐이 없고 따라서 하나님 앞에 설 준비는 전혀 되지 않음을 지적한 것입니다. 하나님과 전혀 교통함이 없는 상태입니다. 어리석은 자입니다.
오늘 본문 다음 3장에 나오는 라오디게아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계3:17입니다.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외적으로는 부요하나 내적, 영적으로 궁핍했던 라오디게아 교회입니다. 서머나 교회와 반대입니다. 두 교회가 너무도 잘 비교되고 있지 않습니까. 누가 진정 부요한 자인지를!
그리고 예수님은 서머나 교회에 닥칠 환란을 미리 말씀하셨습니다. 실제로 이때 기독교 역사에 길이 남은 폴리갑 감독이 순교합니다. 로마의 역사가 유세비우스는 폴리갑 감독의 순교에 대해 상세히 기록하고 있습니다. 로마군인들이 폴리갑을 재판장에 끌고 와서 심문합니다. 총독이 말하기를 지금이라도 네가 믿는 예수를 부인하면 목숨을 살려주겠다고 했습니다. 이때 폴리갑이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나는 86년 동안 예수님을 따랐는데 그 동안 예수님은 나를 한 번도 실망시킨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내가 어떻게 지금 예수님을 부인하므로 실망시킬 수 있겠습니까?”
총독이 겁을 주면서 “나는 맹수들을 가지고 있다. 네가 마음을 바꾸지 않는다면 너를 맹수에게 던질 것이다.” 폴리갑이 대답합니다. “야수들을 부르십시오. 좋은 것에서 악한 것으로 돌이키는 것이 우리에게 있어서는 불가능한 변화입니다. 그러나 악으로부터 의로 변화되는 것은 고귀한 것입니다.” 또 다시 총독이 말합니다. “네가 야수들을 무시하니 나는 너를 불태울 것이다.” 폴리갑이 대답합니다. “당신은 오직 잠깐 태우고 잠시 후에 소멸되는 불로 나를 위협합니다. 그런데 당신은 악한 죄인들을 위하여 예비 된, 다가오는 심판과 영원한 형벌의 불을 모르고 있습니다. 당신이 원하는 것을 하십시오.” 폴리갑은 마침내 장작더미에 묶인 채로 화형되었습니다. 육신의 고통은 잠깐이지만 영혼이 누릴 안식은 영원합니다. 폴리갑은 그 영원한 것을 택했습니다.
예수님은 서머나 교회에 10일 동안 큰 환난이 있을 것을 말씀하시면서 이렇게 약속합니다.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네게 생명의 관을 네게 주리라” 이 땅에서 비록 목숨을 잃게 되더라도 영원한 생명, 영생을 약속했습니다. 그러니 두려워 말라는 것입니다. 시101:6에도 충성된 자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약속이 있습니다. “내 눈이 이 땅의 충성된 자를 살펴 나와 함께 살게 하리니 완전한 길에 행하는 자가 나를 따르리로다” 하나님은 충성된 자를 찾아 살피십니다. 왜 입니까? 함께 살게 하려고입니다. 그리고 어떤 사람이 충성된 사람인지를 말합니다. 완전한 길에 행하는 자! 그가 곧 충성된 자입니다. 우리가 주를 따르기로 했다면 우리도 완전한 길에 서려고 해야 합니다. 곧 충성된 자가 되려고 해야 합니다.
그리고 본문 11절에 약속합니다. 이기는 자는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아니하리라고 했습니다. 성경은 둘째 사망을 말합니다. 둘째 사망이 있습니다. 우리 육신이 흙으로 돌아가는 죽음이 첫째 사망입니다. 영혼이 하나님 앞에서 심판 받을 때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를 구분하시는데 믿는 자는 생명의 부활로 믿지 않는 자는 심판의 부활이 있습니다. 이것이 둘째 사망입니다. 주님이 약속한 대로 우리는 믿음을 지키고 이기는 자에게 둘째 심판의 해를 받지 않고 영생에 이를 줄 믿습니다. 우리도 그러하길 소망합니다.
오늘 우리가 꼭 기억해야 할 분들이 있습니다. 이름도 낯선 조선 땅에 와서 자신과 아내와 자녀의 목숨을 버리면서까지 복음을 전해주신 수많은 선교사님들, 그리고 우리에게 이 신앙의 유산을 먼저 받아 목숨을 걸고 전해준 우리 신앙의 선조들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감사해야 합니다. 이번 순교지 방문이 그런 계기가 되길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