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진관 시인의 본 53 선지식 19차. 8, 6월은 잔인한 달
6월은 잔인한 달
살아있는 것들이 모두 죽었고
잔인한 나라에 살아남았다는 것
그것만으로도 나에게 주어진 소임
그리하여 죽음에 군부독재에 저항하였다,
나는 1984년에 국민회의란 조직
참여함에 군부독재란 무엇인가를 알았다
그날부터 민주화란 말을 사용할 수 있다
그날에 만난 인사 문익환 목사 김승은 신부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 인권위원장
불교계에 민 불편 결성 부의장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 평화위원장
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본부 총무분과 위원장
민주주의민족통일전국연합
세계 유일한 불교인권위 창립
범민련 남측본부 결성
민주화란 말에 대하여 알지 못했지만
민주화에 참여한 것은 나를 일깨운
나를 일깨운 날의 몸이다.
어딘가에서 들어오는 소리
박종철 열사가 세상을 떠남에
박종철을 살려내라고 외친 시민
그날에 나는 광교에서 연행
영등포구치소에 수용되었다.
전국에서 1천 명이 연행
구속 40여 면이었는데
그날에 나는 구속된 수다
전두환 정권에 연행되었는 것이야말로
내가 그토록 꿈에 그리던 시대의 시인
나는 참으로 행복했다
조선 망국 시기에 백용성
만해가 저항했던 약사를
전승한다는 의미였다
전두환 정권에서 구속되었다는 것이야 말로
나를 민중이 주인이라는 가르침을 실천할 수 있는
그리하여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에 참여했다,
그리하여 명동에 있는 향린교회에서 결성식
나는 그날에 그 장소에서 알았다
그것이 바로 나의 저항운동이다,
그날에는 노태우가 대통령 후보로 선출되는 날
우리는 성공회에 잠입하기로 약속하고
1987년 6월 9일에 성공회에 들어가는 시간
그날은 불교계에 고승인 영암 노사 다비 날인지라
불교계는 핑계 삼아 밤 11시 50분에 진입했다
그런데 이미 경찰들이 완전히 봉쇄하여
성공회 담장을 넘어 들어갔다
무사히 민주인사들과 함께했다.
그날에 이한열 열사가 최루탄을 맞았던
그날에 우리는 성공회 안에 있었다.
무시하기만을 기도했다
1987년 6월 10일 저항이 시작되고
전국에서 반대에 참여한 인원은 수백만
우리는 성공회에서 10시에 외쳤다
노태우는 대통령 후보 무효라고
목이 터져 라고 외치었다.
그날에 우리는 목이 부었다.
우리 일행은 3일간 성공회 안에서
전국의 상황을 진두지휘했다.
3일이 지난 이후에 우리 일행은
성공회 안에서 나오는데 경찰들은
우리 일행을 남대문경찰서로 연행
그러나 밤이 깊어지나 분리
눈을 가리고 어딘가로 갔다.
가는 곳이 어딘지는 모르고
눈을 가린다는 그것은 무엇인가?
최고의 악법 흉악범이다
박종철 열사를 살려내라는 것이
민족에 반역자인가?
반역사 반역과 반역사
박종철이를 살려내라 살려내
이렇게 외친 일이 반역자인가?
우리는 밤중에 눈이 풀리었는데
조사원들이 정해졌는지 말했다
조사 용지를 꺼내어 묻기 시작했다
묻는 자들은 참으로 무식했다
민주화에 대한 역사성을 모르니
조사하는 조사원은 불교 승려라고 했다.
승려가 환속하여 조사 웜이 되었다는 것
그날부터 민가협 회원들이 외치는 소리가 들린다.
그런데 명동에 있는 향린교회에서 결성했을 때
나는 성명문을 낭독했는데 이름이 다르다
그래서 아니라고 했는데 조사원은
윽박지르면서 계속 인정하라고 말했다
아니라고 해도 믿지 않는 조사원
갑자기 조사를 중단하더니 눈을 가리지 않고
방을 교체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알았다
모두 이 장소에서 조사받고 있다는 것을
알고부터는 진술을 거부했다.
7일이 지난 후에 우리는 동대문으로
우리는 이동하였는데 동아일보에
수갑이 채인 모습으로 등장했다.
경찰서 유치, 장안에서 저항하기 위하여
혀를 깨물겠다고 하니 경찰이 물러났다.
그리고 이후에 경찰이 왔을 때
머리를 쇠창살에 머리를 찍겠다고 하니
경찰이 물러났는데 다음날에는
경찰이 유치장 안으로 들어와
강제로 연행해 갔을 때
나는 경찰들을 발로 차고
경찰들은 나에게 수갑을 차는 동안
나의 손목은 수갑에 조여
피가 날 정도였다
서울 구치소에서는 이상한 소문이 등장했는데
서울 구치소에서 석방한다는 소문이다
우리는 사형을 당할 수도 있다고 하던
그러한 소식과는 다름이다
전국에서 수백만 명이 반정부데모
그날에 노태우는 6, 29선언을 발표
그로부터 우리는 서울 구치소에서 석방
그날에 이한열 열사의 장례일이다.
우리는 연세대학으로 갔다.
그리고 이한열 어머니를 만났다.
그런데 이한열 어머니도 세상을 떠나!
망원동에 누워있으면서 아들
열사들을 만나고 있다
나의 민주화운동을 통해서 오늘에
나의 가는 길이 험난해도 그날처럼
나는 묵묵히 걸어갈 것이며
나위 길이 진흙밭일지라도 간다.
나는 간다. 나의 길이 험난해도
아 나는 간다고 불길 속이라도 간다.
어떤 후배들은 말한다. 지금까지
지금까지 무엇 했느냐고
무엇했느냐고 아 나는 웃었다
나는 민주화운동에 참여했기에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고
2023년 1월 10일
출처: 불교평화연대 원문보기 글쓴이: 진관 스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