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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4일 ( 5/18일 Africa 모로코 One Day Tour를 위하여 알헤시라스로 향하다.)
아침 8시 30분경 아침밥을 먹고 다시 Catedral을 볼 계획으로, 먼저 70번 버스를 타고 버스 터미널에 가서 13시 30분에 알헤시라스로 떠나는 버스표를 산 다음, 짐을 맡기고 성당으로 향했다.
짐을 맡길 때의 일이다.
Seville에서의 마지막 관광을 잘하려면 반드시 버스가 떠날 때까지 짐을 터미널에 맡겨야만 했다.
항상 몸에 지니고 다니는 배낭이나 손가방을 제외하면 우리들이 가지고 다니는 짐은 총 9개로 이 짐들을 끌고 다녀야 하는데 처음에는 별로 힘 드는 줄을 몰랐으나 나중에 시간이 가면 갈수록 점점 더 힘이 들고 괴로웠다.
짐 맡기는 곳에서 짐 한 개에 2유로씩(한국돈 3000원 정도)을 받으니 서너 시간정도만 맡기면 되는데 좀 비싸다는 생각이 들었으나 딴 도리가 없었다.
8개는 돈을 낼만한 크기였으나 한개는 Golf 가방정도의 크기인지라 무료로 맡아주었으면 하는 생각에서 여성단원들이 부탁했으나 종업원은 안 된다는 것이었다.
CFO가 말은 안통하고 급한 김에 두 손을 모아 살살 비는 모양을 취했다.
이때 CEO는 짐 맡기는 곳에 그 무거운 여행용 가방을 들어 올려놓고 한 숨 돌리느라 먼 곳을 바라보고 잇다가, CFO의 모습을 보고는, 고만 그게 무슨 추태냐고 핀잔을 주고 말았다.
그래서 CFO는 무엇이 추태냐? 나는 아무렇지도 않은데! 라며 약간 성질이 돋았던 일이 있다. CEO는 아무 말도 안하고....... 결국 CFO는 2유로를 절약하는데 지대한 공을 세운 것이다.
약간 서먹한 기분이 되어 그 자리를 떠났으나 워낙 가까운 사이들 인지라 별 생각 없이 그냥 넘어갔다.
어제 보지 못한 히랄타 탑과 Catedral의 내부를 보기위해 갔으나, 입장료가 1인당 8유로나 되며 우리에게 허락된 관람시간도 너무 짧아 망설이던 중, 전에 한번 와보았던 유 수자 씨의 설명도 성당 내부는 그냥 기독교적인 장식들로만 가득하다 하며 차라리 바르셀로나의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을 잘 보는 것으로 하는 것이 어떻겠느냐는 것이어서 우리는 성당 내부관광과 히랄타 탑의 내부 관광을 포기하고 대신 입장료가 무료인 Seville 대학과 Espania 광장을 보기로 했다.
다시 무리요 정원으로 나와 Seville대학으로 향했다.
어제 알카자르를 찾아갈 때 길을 잘못 들어 Seville대학 방향르로 갔던 일이 있었으므로 우리는 목적지를 쉽게 찾을 수 있었다.
여행안내서는 Seville 대학을 이렇게 소개하고 있다.
“18세기 중기에 세워진 바로크 양식의 건물, 중량감이 느껴지는 장식과 섬세한 구조의 파티오(건물 한 가운데에 있는 정원)가 압권, 원래는 담배공장이었고, 비제의 오페라 칼멘의 무대이다.
공장을 지키던 경비병 돈 호세는 이곳 파티오에서, 담배공장에서 일하는, 그 요염한 칼멘을 만나 사랑에 빠지고 만다. 그러나 해적으로 타락한 돈 호세는 결국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고.......
현재 이 비극의 장소는 법학부가 자리 잡고 있으며, 캠퍼스에는 생기 발란한 호세와 카르멘으로 넘쳐난다“
우리는 대학 건물을 가로질러 통과했다.
많은 호세와 카르멘들이 캔-틴에서 점심을 먹고 있었다.
우리도 그 캔-틴에서 점심을 먹어보고 싶어 두리번거렸으나 기다리는 줄이 너무 길어서 도리가 없었다.
대학 뒤쪽에 Espania 광장이 있을 것으로 추측했었는데, 정작 가보니 다른 곳이 나와, 다시 발길을 돌려야했다. 길가에 도로공사 인부가 있어서 그에게 길을 물어 Espania 광장으로 가는 길을 알 수가 있었다.
광장은 다행히 버스터미널로 가는 방향에 있어서, 버스 출발시간에 늦지 않겠다 싶어 다소간 마음을 놓을 수가 있었다.
Espania 광장은 Seville Expo 때 행사장으로 건축했다는데 그 규모가 웅장할 뿐 아니라 건물의 모습도 아주 아름답다. 그리고 광장을 에워싸고 있는 숲은 시민들의 휴식처로 쓰이고 있어 더욱 보기에 좋았다.
Expo에 참가했던 스페인 각 지방과 여러 나라들이 자기네의 특징을 소개하고 있었으나 우리나라는 빠져있어서 못내 섭섭했습니다. 국력이 모자라서 그랬던 것인지 아니면 집권자들의 생각이 모자라서 그랬던 것인지............
광장을 한바퀴 돌아보고는 바로 버스 터미널로 향했는데, 도착해 시간을 보니 점심식사를 하기에는 좀 빠듯한 것 같았으나 식당이 바로 터미널 옆에 있었으므로 어떻게 되겠지 하는 생각으로 식당 안으로 들어갔다.
피자와 스파게티를 주문했으나 예상외로 스파게티가 시간이 많이 걸려 버스 출발시간에 맞추지 못할까? 하여 마음이 조렸다.
단장이 종업원에게 시계를 보여주며 독촉했으나 그 후에도 한참 있다가 식사가 나오는 바람에 안절부절 이었다.
다행히 시간에 늦지 않게 식사를 끝낼 수 있어서, 버스를 타는 데는 지장이 없었으나, 좀 시간여유를 갖고 움직이는 것이 좋지 않겠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13시 30분, 지브럴터르와 아프리카의 모로코를 보기 위해, Algeciras 행 버스를 탔다.
우리들에게 배정된 좌석이 길가 경치를 구경하기에 아주 좋은 앞자리여서 모두들 기분이 좋았다.
관광버스 같은 아주 쿠션이 좋은 버스를 타고 남쪽으로 향해 떠났다.
아마 세 시간 정도는 걸릴 것이다.
잠깐 눈을 붙일 수도 있다 생각하니 졸음과 피로감이 몰려오는 것 같다.
모두들 편안한 자세로 창밖을 내다본다.
마드리드 서북 방향과는 그 모습이 판이하게 다르다.
작은 구릉이 연속되었는데 무슨 밭 같은 농토가 있는가하면, 올리브 농원도, 그리고 소를 방목하는 상당히 큰 목장도 보인다.
대체로 토양의 색깔이 밝은 베이지색을 하고 있어 별로 비옥할 것 같지는 않다.
하지만 그 위에서 콩으로 보이는 검푸른 색의 작은 작물이 자라고 있으며, 어떤 곳에서는 밀 같은 작물도 보인다.
길가에는 각양각색의 들꽃과 함께, 보는 이로 하여금 포근함을 느끼게 하는 노란 꽃들이 여기저기 피어있었는데 우리들 중 아무도 그 이름을 아는 이는 없었다.
남쪽으로 가면 갈수록 길가에 선인장이 많이 보였으며, 어떤 곳에서는 꽃이 핀 “손가락 선인장”도 보였다.
얼핏 평지처럼 보이는 작은 구릉위에 집들이 옹기종기 모여 마을을 이루고 있다.
하얀 색의 벽과 붉은 색의 지붕을 한 집들이 남쪽의 밝은 햇빛 아래 아주 밝고 맑은 모습을 하고 있다.
북쪽의 어둠침침한 분위기와는 너무나 대조적이다.
글쎄! 어쩌면 세잔느의 남 프랑스 풍경화 같다고나 해야 할는지....... 하도 밝은 빛 이라......!
도중에 Jerez라는 곳과 Alcala라는 마을을 거처 16시경 우리는 알헤시라스의 페리 터미널에 도착했다.
사무실 문 닫을 시간이 되었는지 아프리카를 마주하고 있는 페리터미널의 여행사 사무실들은 거의 비어 있고 일 하는 사람이 몇 사람 없었다.
Ferry Terminal로부터 Hotel Husa(우리가 묵을 호텔)까지는 300m 밖에 안 되는 것으로 소개 되어 있지만, 그 위치를 물어 볼만한 사람도 없고, 사무실들도 문을 닫아 지도를 구할 수도 없어서, 터미널 안을 헤매다가, 할 수 없이 단장이 호텔에 전화를 걸게 되었는데, 호텔 종업원의 말이, “갖고 있는 짐이 많으면 택시를 타는 편이 좋겠다.”라고 하여 우리들은 택시를 타기로 결정했다.
오후 4시경이 되었는데도 남부의 햇빛은 너무나 강렬하고 더웠으며, 짐이 많아 택시 두 대에 분승하여 짐을 실으려니 보통 힘든 것이 아니었다.
뿐만 아니라, 300m 만 가면 된다는데, 물론 짐이 있기는 하지만, 택시 한대 값으로 6유로를 내라하니 엄청 비싸게 느껴졌다.
그러나 별 도리가 없었다.
보통 택시를 탈 경우, 기사에게 먼저 주소를 보여주며, OK? 하고 물으면, 대부분 다 안다고 하는데 그 기사를 믿고 가면 목적지에 정확히 갈 수 있었다.
스페인에서는 택시 기사에게 팁을 준 일이 없는 것 같다.
Hotel Husa 는 Two Star급으로 방이 비좁고 Shower Booth와 변소가 같이 있는 겸손한 곳 이었으나, 값이 아주 저렴했으며, 방은 매우 깨끗했고, 호텔 관리도 아주 잘되고 있어서 기분이 아주 상쾌했다.
더구나 형편 없었던 Seville에서의 한국 민박집을 생각하면 더더욱 상쾌한 것이다.
단원들은 한 시간 정도의 휴식을 취했으며, 단장은 그 사이에 내일 모로코 One Day Tour를 예약했다.
지브럴타르를 보기위해, 현지 시간 오후 5시 반경에 호텔을 나와 알헤시라스 기차역 근처에 있는 버스정거장에서 출발하는 La Linea행 버스를 탔다.
호텔 Reception Desk에서 터미널의 위치를 물어 대략 알고 난 다음에 갔는데도 정작 터미널 근처에 도착해서는 한 참을 헤매어야 했다. 말도 안통하고, 버스터미널 표시도 없어 나감하기 짝이 없었으나, 어떤 백인 배낭 여행객을 만나게 되어 그를 따라 La Linea행 버스를 타게 되었다.
알고 보니 사실은 몇 발작 밖에 안 떨어져 있는 것을 그렇게 헤맨 것이다.
La Linea는, 비행장(지브럴타르)을 사이에 두고, 지브럴타르와 마주 하고 있는 스페인의 작은 마을이다. 시내버스가 알헤시라스와 이 마을을 오가고 있었으며 주민들도 여행객들도 다 같이 이 버스를 이용하고 있었다.
버스가 알헤시라스 시의 외곽도로로 보이는 길을 달렸는데, 길 오른쪽 해변 가에 무슨 정유공장 같은 공장이 보여, 우리는 알헤시라스가 스페인의 대서양.아프리카 관문 역할만 하는 것이 아니라, 산업적으로도 상당히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는 도시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다.
지브럴타르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양쪽 Border Police에게 여권을 제시해야 했으며, 한국 여권을 별로 보지 못했던 것인지 스페인의 Border Police가 우리의 여권을 갖고 시간을 끌어 약간 불쾌한 생각이 들었었다.
물론 다른 것은 EU 각국의 국경을 통과하는 것과 다를 것이 없었다.
거리가 짧아 걸어가는 사람들도 있을 것 같았지만 시간이 없어 우리는 국경을 통과 하자마자 Market Place로 가는 버스를 탔다.
이미 시간이 상당히 되어 영국 수비대는 하기식(혹은 근무교대식인지를)을 하고 있었고,
길가의 상점들도 거의 문을 닫을 채비를 하고 있었으며 다만 선물의집 이나 식당 몇 군데만 문을 열고 있었다.
카메라 Memory Chip이 Full이어서 혹 전자제품점이 문을 열고 있는가? 물어 보았으나 시간이 이미 늦어 문을 닫았을 거라는 것이 경비대원으로 보이는 사람의 답이었다.
여왕의 나라여서 그런지 경비대들은, 키가 아주 작고 볼품없어 보이는, 그러나 총영사 아니면 시장쯤으로 보이는 한 민간 여성에게 충성을 다짐하면서 하기식 같은 것을 하고 있었다.
우리는 그것을 끝까지 구경하고 나서 영국식의 식사를 해보려고 바로 옆에 있는 식당에 들어갔다.
분위기가 완전히 달랐다.
영국냄새가 풀풀 나는 것이다.
그 유명한 Fish & Chips와 Chicken & Chips를 시키고 맥주를 10병이나 마셨다.
식사 메뉴에 가격이 파운드로 표시되어 있었지만 그동안 유로 화에 익숙해진 우리들은 그 사실을 알지 못하고, 음식 값이 의외로 상당히 싸다고 생각했다가 나중에 그렇지 않음을 알고는 실소를 금할 수 없었다.
물건 값이 싸다고 소개되어 있어서 이곳에서 손자손녀들 선물이라도 살까? 했는데 시간이 늦어 상점들이 문을 닫는 바람에 지브럴타르의 외부 모습을 보는 것으로 만족하기로 했다.
La Linea에서 버스를 타고, 알헤시라스 버스 터미널에 도착한 다음, 도보로 숙소까지 왔다.
숙소로 오는 도중에 우리네의 동네 수퍼 같은 곳에서 스페인 산 쌀(흡사 우리네의 것과 모양이 같다)을 샀다.
그 모양이 우리네의 쌀과 비슷하다.
내일 아침 준비를 위해 여성 단원들 특히 부단장이 애를 많이 쓴다.
모로코여행을 위해 일찍 취침하다.
오늘은 여행 떠난 지 15일째인 5월 19일.
아침식사로 어제 사온 스페인 산 쌀로 지은 쌀밥을 거하게 차려먹었다.
밥맛이 우리네의 것과 거의 같다.
아침 8시 30분경 가벼운 차림으로 호텔을 나와 Mariner Center로 향해 걸었다.
9시 40분경 여행사 직원으로부터 Sticker를 받아 가슴에 붙이고 승선한 우리의 페리는 10시가 되자 접안했던 부두를 천천히 떠나기 시작했다.
움직임을 전혀 느끼지 못했는데, 어느새 뱃머리는 지브럴타르 해협을 향하고 있다.
배는, 모로코 국경과 접해있는 항구인 스페인 령 세우타(Ceuta)와 스페인의 알헤시라스를 오가는, 1000명 이상이 승선 할 수 있는 큰 쌍동선으로, 물속에 잠기는 부분이 둘로 나뉘어 있는 배다.
물론 자동차도 많이 싣는다.
High Season이 아닌데도 거의 만석인 것으로 보아 제철에는 항해 편수도 많을 뿐 아니라 승객도 초만원을 이룰 것 같다.
모로코를 One Day Tour로 관광하는 사람들이 아주 많은 것이다.
등 뒤로 페리의 가속을 느끼는 사이에 배는 이미 항구를 벗어나 지브롤터 해협을 가로지르기 시작했다.
바다는 맑고 잔잔했다.
가두리 양식장이나 미역밭 같은 것은 보이지 않는다.
다만 왼쪽에 보이는 영국령 지브롤터르(바위산 임)가 지난날의 역사를 말해주고 있을 뿐, 우리를 맞이하는 것은 전방에 말없이 우뚝 솟아, 검은 대륙의 해안선을 이루고 있는 산맥뿐이다.
얼마 안가서 우리는 하얀 집들을 보았고, 곧 CEUTA에 도착했다.
불과 30 - 40분 만에 배가 해협을 횡단한 것이다.
그러나 페리가 접안할 때, 꽤 많은 시간이 걸렸다.
스페인 사람과는 그 모습이 달라 보이는 모로코 가이드가 검은색의 Robe(별로 깨끗해보이지는 않았지만)를 걸치고 와서 우리들의 출입국카드와 여권을 수거한다.
그리고 인원수를 확인하고 나서 우리 팀을 버스로 안내 탑승시킨다.
CEUTA는 아주 작은 항구였으며 버스가 움직이는가 싶더니 바로 모로코 국경에 도착, 입국 수속을 위해 정차한다.
스페인 령인 CEUTA는 늘 보던 스페인의 작은 도시와 같은 느낌을 주었는데 반해, 모로코 국경 너머로 뵈는 모습은 우선 사람들의 옷매무새가 가난해 보였으며 얼굴이 햇볕에 많이 타서 그런지 어딘가 모르게 촌티가 나는 것 같고 주위환경이 약간 삭막해 보였으며, 도로에는 한 50(?)년 전쯤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는 벤츠들이 (합승도 승용차도 트럭도 대부분 벤츠이고 가끔 중고 일본차들이 보였다.) 내연기관의 불완전 연소로인한 희뿌연 연기를 내뿜으며 힘겨운 속도를 내고 있다. 자동차들은 모두 폐차장에서 끌어내온 것같이 색이 낡았고 골동품 같은 느낌을 주었는데 작은 충격을 주어도 곧 부서질 것 같았다.
스페인과는 너무나 다른 것이다.
가끔 좀 괜찮아 보이는 차도 있어, 보면, 그것은 대부분 일제 아니면 프랑스, 이태리제 로 보였으며 그것 역시 처음부터 충고차를 수입한 것 아닌가 생각되었다.
(모로코에는 자동차를 Knockdown 상태로 수입 조립하는 공장이 있고 신차와 중고차를 수입하는 것으로 소개되어있다. 연간 7만대정도의 자동차가 공급되는데 그중 조립생산과 신차수입이 70%정도이고 중고차의 수입은 연간 1만 5천대 정도로 소개되어 있다.)
도보로 국경을 통과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Ceuta에서 구입한 물건들을 갖고 있다.
한참 후 입국수속을 끝낸 가이드가 돌아오자, 버스가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으며, 다음의 말과 함께 가이드의 안내방송이 시작되었다.
Welcome to Africa, and Welcome to Morocco !
차창 왼쪽으로 우리네 봉고 스타일의 벤츠가 말을 안 듣는지 뒤에서 몇몇이 힘을 다해 미는데도 도통 발동이 걸리지 않는 모양이다.
모로코는 언제는 페니키아로부터, 언제는 로마로부터 언제는 어디 어디로부터 모두 침략을 받아 식민지로 살았는데, 근세에 와서 몇몇 부족 왕조시대를 거친 후 1912년에 프랑스가 점령했으며, 1956년 프랑스로부터 독립했다고 여행안내서는 소개하고 있다.
그러니까 BC 몇 세기 전부터 대부분 다른 나라의 식민지로 있다가 1956년에 독립을 하게 된 것이다.
안내서는 1957년 모하매드 5세가 왕위에 올랐으며 4년 뒤 하산 2세에게 왕위를 물려주었고 지금은 입헌군주제이지만, 하산 2세가, 사하라 사막에 대한 영유권 문제가 생겼을 때, 사하라사막을 지키기 위해, 30여만을 이끌고 西사하라까지 평화행진을 함으로써 모로코인의 가슴 속 깊이 새겨져있을 뿐 아니라 아직도 실질적인 절대군주의 위치에 있다고 소개한다.
여행 안내서에는 입헌군주인 현재의 모로코 왕은 모하메드 6세라고 소개되어있다.
하여튼 인구는 3천만정도이고 수도는 라바트, 화폐교환율은 10대1(유로화)정도인데, 노동자의 하루 일당은 5 유로 정도밖에 안되며, 해안선은 지중해와 대서양의 해안선( 대서양에 임한 해안선이 더 길다 )을 합쳐 2000Km가 되고 수산물이 풍부하며(정어리는 비료로 쓸 정도다) 국토는 고도(Altitude)가 4500m(?)나 되는 High Atlas부분(알제리와 국경을 이루고 있다함)과 Middle Atlas부분 그리고 서남쪽 사하라 등등으로 나뉘어 있으며, 인 (Phosphorus 세계매장량의 70%), 동 등 광산물이 풍부하고 인구의 70%정도가 농업에 종사하고 있으며 포도 도마도 오렌지 올리브 등등 안나오는 것이 없는 Great Country 이다.
인종은 아랍족 과 베르베르(Berber)족, 유태, 그리고 외국인으로 나뉜다. 모두 사이좋게 살고 있다.
특히 14세기(1942)에 스페인으로부터 유태인과 이슬람이 함께 추방당하자, 모로코에 와서 정착했는데, 2차대전 때에, 나치 독일의 히틀러가 유태인을 모두 인도하라고 모로코에 요구한 일이 있었으나, 그 당시 모로코 왕( 현 국왕의 조부 ? )은“그들 역시 나의 모로코 국민이다. 받아들일 수 없다.”고 호통(?)을 쳐서 무사하게 넘긴 후 지금까지 잘 살고 있으며, 더욱 강조할 것은 그로 인하여, 유태인은 종교가 다르지만, 이슬람을 국교로 하는 모로코를 은혜롭게 생각하며 아무 문제없이 서로 사이좋게 지내고 있다는 것이다.
말을 듣는 순간 가슴이 뭉클해 옴을 느꼈다.
버스는 어느새 테투안을 바라보고 있다. 왼편 지중해연안에는 하얀 집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어 얼핏 영화“카사불랑카”를 생각하게 한다.
버스가 말없이 정차하여 무슨 일인가 했다.
서양 사람들 몇몇이 버스를 내렸고, 차창너머로는 몇몇 서양 여성들이 그 더러워 뵈는 낙타 등에 올라타고 즐거워하는 것이 보였다. 관광의 한 코스다. 동양인은 다리가 짧아서 엄두를 낼 수 없을 것 같다.
버스가 다시 움직이기 시작하고 가이드는 해안선을 따라 이따금씩 호텔 같은 하얀 집들이 보일 때 마다 그것은 무슨 호텔이고 어떤 것은 미국사람 것이고 하면서 분주하게 읊어댄다.
누렇게 말라붙은 밭을 가리키며 이곳은 겨울에도 농사를 짓는 곳인지만 지난겨울에는 너무나 추워서 농작물이 모두 얼어 죽었다고 한다.
아무리 이상기후라 하지만 그럴 수도 있나 싶었다.
알 수 없는 일이다.
여행의 목적지는 카스바다.
카스바에 대해 안내서의 소개내용을 요약한다.
미로처럼 복잡하게 얽힌 좁은 골목, 북적대는 인파, 그 양편에는 스파이스, 빵, 올리브, 옷가지 등 다양한 물건을 내다 판다. 그 다음은 뱀 장수가 나오는 광장으로 간다.
중략
이어서 카펫 상점에 들렀다가 점심을 먹게 된다.
시슈케바브, 쿠시쿠시, 민트 티가 정해진 메뉴다. 배부르게 점심을 먹은 후 탕헤르로 향한다.
탕헤르에서도 같은 카스바를 돌아보고 세우타로 돌아와 알헤시라스로 향하는데 도착시간은 오후 8시 30분 정도가 된다.
우리는 카스바 앞 입구에서 가이드로부터 주의사항을 들은 후 카스바로 들어갔다.
변소를 가고 싶으면 저 사람(가이드보조)에게 말하라.
길을 잃지 않도록 붙어 다녀라, 행상이 따라붙을 때 물건을 안 사려면 아무 말도 하지 말라, 그러면 한참 따라오다 그만 둔다 등등의 이야기들 이었다.
고개를 들어 봐도 하늘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좁은 길이 꼬불꼬불 서로 얽혀있다.
그 좁은 길 양옆으로 상점이 있고, 조금이라도 빈 공지가 있으면 반드시 그 곳에는 노점상이 있었으며, 어떤 곳에는 과일, 빵, 옷, 잡화 가게들이 있는가하면, 고기 파는 집, 생선 파는 집, 유태인이 만든 치즈를 파는 집( CEO가 한 조각 맛을 보았는데 맛이 조았다.) 등등이 보이고, 옷을 수선하는 집, 옷을 만드는 집 등 모두 실 생활에 직결된 상품을 진열하고 있었으며, 한 곳에서는 유태인 신부의 전통의상으로 생각되는 옷으로 아름답게 (옷감그대로 온 몸을 휘 감은 듯) 성장한 여자가 우리의 눈길을 끌기도 한다.
얼핏 6.25 사변 직후 서울 남대문시장의 모습이 연상된다.
기록자가 중학교 교복을 입은 채 남대문 시장 골목 어느 길모퉁이에 서서 채소(파)를 팔았던 일이 얼핏 생각났다.
그때 여학생으로 보이는 처녀들이 얼마나 많이 와서 팔아주든지.........!
아마 학생이라 많이 생각해주었던 것 아닐까.......? 학생이라는 동류의식에서......)
그때의 우리네 시장과 다른 점이 있다면, 이곳 카스바에는 아프리카 냄새가 나는 가죽제품, 양탄자, 그리고 동제품등이 좀 보인다는 것일 뿐이다.
얼마를 더 갔을까? 여성단원들께서 체리를 한 보따리 사들고 무척 싸다고 탄성을 올린다.
모두 같이 체리를 즐기면서 카스바를 구경하던 중, 어느 골목인가에서 가이드가 유태인들의 표지라 하며 길 양 옆을 연결하여 만들어 놓은 좁은 골목길의 천정(?)을 가리킨다.
이스라엘 국기의 별 모양을 이루고 있는 6개의 모서리 (ㅅ 자 )부분을, 우리네의 한옥 용마루(?)처럼, 서까래 크기의 나무를 양 옆 벽에 걸쳐놓고, 석회석을 이용해 천정을 만들어놓은 것이 보였다. 얼핏 보기에는 골목으로 내려 쪼이는 햇빛을 가리기 위한 것처럼 보였지만, 이것이 바로 이스라엘의 표지라는 것이다.
서까래 6 쌍이 일정한 간격으로 걸쳐져있는데, 서까래 하나가 한 지파를 가리킨다 한다. 그런데 그 중 마지막 하나는 회칠로 덮여 있는 것처럼 보인다.
아마도 원래의 12 지파 중, 어느 날 갑자기 사라졌다는 한 지파를 가리키는 것 아닐까? 하고 혼자 상상해본다.
어린아이로부터 노인에 이르기까지 헤아릴 수 없는 행상들이 끈질기게 따라붙는 그 좁은 골목길을 그들과 함께 뒤엉켜 한참동안 구경한 후, 우리는 한 음식점으로 안내되었다.
음식점에는 정해진 메뉴밖에 없었다.
시슈케바브, 쿠시쿠시 라는 모로코 토속 음식인데, 빵, 스프, 닭고기꼬치, 조밥( 불면 날아갈 것 같이 생겼음) 비슷한 밥, 민트 차 등등이 나온다.
맛은 그런대로 좋았다.
모두 의외로 만족해하는 것 같았다.
서기 600년경, 예언자 무함마드가 계시를 받고난 후 추종자들이 이슬람제국을 건설하는 과정에서 우마이야 칼리프(왕조)가 약 1세기를 걸쳐 왕조의 기틀을 세우게 되는데 이 우마이야 칼리프가 후반에 부패 타락하게 되어 부족의 불화, 군대의 불만 분열이 심해졌으며 이때 불만에 싸인 부류들이, 예언자의 대리자(칼리프)는 예언자 무함마드와 혈통을 같이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 무함마드의 삼촌 알 압바스의 후손인 압바스가의 아부 알 압바스를 칼리프에 추대하고, 우마이야 군대를 연패시켜 750년 그들이 세운 압바스 칼리프(왕조)가 시리아에 있던 우마이야 왕조를 몰아낸다고 한다.
(계시를 받은 무함마드는 사도 예언자이며, 칼리프는 예언자 무함마드의 대리자라고 함)
축출된 우마이야 왕조는 그때 아프리카 지중해 연안에 살던 용맹스러운 베르베르족을 앞세워 스페인을 침략, 식민지로 만들며 후기 우마이야 왕조를 건설 Cordoba에 수도를 정한다. 약 700년 간 스페인을 다스리는 이슬람은 카스티야 왕국에 밀려 수도를 옮기는 등 수세에 몰리게 되지만, 그래도 1323년에는 그라나다에 알함브라 궁전을 완공 하는 등, 그간에 스페인의 문물을 크게 발전시킨다 한다. 십자군 전쟁에 힘입은 기독교도들의 레콘키스타 운동이 끝내 성공함에 따라 1492년에 후기 우마이야 왕조가 스페인에서 축출되고, 그때까지 스페인에서 살던 무슬림 과 유태인 그리고 베르베르족이 함께 스페인에서 추방된다.
1492년 스페인에서 추방당하여 중동으로 가게 되는 이슬람과 유태인은 이미 발명된 유럽의 인쇄술을 중동지방에 전수시키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는데, 일부는 중동으로 귀환하지 않고 베르베르족과 함께 모로코 땅에 남아서 현재까지 살게 된다 한다.
베르베르족은 아직도 그들 고유의 언어를 갖고 있으며,.............. 생략
그때 모로코에 남게 된 유태인들이 남의 나라 한 모퉁이에서 서로 도와가며 지금까지 살아온 생활터전이 바로 이 카스바 아니겠나? 싶어 마음이 약간 무거움을 느낀다.
우리 일행이 카스바의 좁은 골목길을 돌아 나와 어느 지점에 다다르니 지중해의 맑고 밝은 해와 푸른 바다가 우리를 맞이한다.
하늘은 온통 Turquoise Qlue로 가득한데, 해안선을 따라, 5월의 신록위에, 하얀 집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어 그 신선함이 우리의 뇌리를 깨끗이 씻어내는 것 같다.
잠시 후 우리는 버스에 올랐다.
버스는 탕헤르(Tanger)로 향하고 있다.
식사 후여서 그런지 몸이 나른해지며 졸음이 온다.
백인들도 졸고 있는지 조용하다.
얼마를 갔을까?
가이드가 “Siesta is Over! Siesta Time is Over!”하면서 그때까지 조용하던 버스 안의 분위기를 확 바꾸어 놓는다.
“탕헤르 시는 근세 열강들의 식민지 정책과 2차 대전의 영향으로 인하여 미 영 불 그리고 스페인 등 네 불록으로 나누어지게 됐으며, 각 불록마다 그 나라의 특색을 느낄 수 있는 국제도시이다. 사정이 그렇기 때문에 과거에는 성매매가 성했던 곳이며, 지금도 그 흔적이 남아있다”.......... 고, 소개되어있는 곳이다.
우리는 테투안에서 보았던 카스바를 이곳에서도 다시 본다.
아마도 관광자원이 별로 없어서 그런지 아니면 백인들이 역사 깊은 옛날 시장을 구경하기를 너무나 좋아해서 그런지 알 수는 없지만, 아무튼 우리는 테투안에서 본 것 과 똑 같은 시장 골목을 또 다시 보아야하는 것이다.
처음 테투안에서 카스바 골목을 기웃거릴 때 보다는 훨씬 감흥이 덜하다.
하지만 모로코의 냄새를 만끽하기에는 충분한 것 같다.
이곳도 역시 식료품 골목이 번창한 것 같고, 간혹 다른 것이 있다하더라도 대부분 생필품 들이다. 공산품이라 해야 가죽제품(무두질이 아주 잘되어 있다함) 과 잘 짜여진 양탄자, 선물용 잡화 같은 것들이 눈에 뜨일 뿐이다.
테투안의 카스바와 탕헤르의 카스바 모습이 뒤범벅이 되어 어디서 무었을 보았는지, 무엇을 사야 했는지 어리둥절한 상태로 카스바를 나와 버스에 올랐다.
행상들은 버스 타는 곳까지 따라 왔는데, 버스 떠나기 직전에 몇몇 행상으로부터 물건을 사는 백인들의 모습도 보였다.
탕헤르를 떠나 세투아로 가는 해안도로는 그 주변이 무척 아름다웠으며, 한 곳에는 새로운 항구를 건설 중에 있었고 버스가 산등성이에 도착하자 지브롤터 해협 너머로 보이는 스페인의 해안선이 인상적이었다.
내륙 쪽으로 길게 뻗은 능선을 따라 한 30 -40대는 되어 보이는 풍력 발전기가 상당히 빠른 속도로 움직이고 있는 것이 보였는데, 파란 하늘 아래 우뚝 솟아, 하얀 색을 하고, 신록의 산등성이를 따라 줄을 서서 돌고 있는 날개의 모습이 장관 이었다.
대서양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100% 잘 이용하고 있는 것이다.
능선을 오르는 승용차들도 처음 모로코에 들어 올 때 보았던 것들 보다는 상당히 잘 달렸으며 그래도 어느 정도는 쓸만한 것들 이었는데, 이 모든 것이 모로코를 다시 생각하게 하는 장면들이었다.
풍력발전기의 가동 장면이 볼만하였으므로, CFO에게 사진 찍을 것을 부탁했다.
그야말로 대서양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잘 이용하고 있는 모로코의 모습을 보고 우리도 풍력발전을 대대적으로 할 방법이 없을까? 하는 생각에 자못 부러움을 느꼈다.
세투아에서 페리를 탄 우리는 배 안에서, 준비했던 빵과 계란 등으로 저녁식사를 때우고, 9시쯤 되어 알헤시라스 (Algeciras) 부두에 도착했다.
COO 임 종수 단장은 부단장과 CFO의 부인 유수자씨와 함께 내일 아침준비를 위한 시장을 보기위해 택시를 타려고 먼저 가고, 뒤에 남은 CFO와 CEO는 호텔로 가는 길을 놓고 약간 신경을 돋운 끝에 각자 호텔로 갔다.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된다.
“이 길로 가는 것이 빠르다.” “아니다 그 길은 인도가 없다.” “차들만 다니는 길이다.” 어쩌구 저쩌구 ....... “너는 왜 내가 하는 일은 자꾸만 안 된다고 그러나?” “너는 왜 자꾸 고집을 세우나?” 어쩌구 저쩌구....... “좋아! 그럼 네 맘대로 해라! 나는 이 길로 간다!”
그리고는 헤어져서 CFO는 CFO대로 CEO는 CEO대로 그 부인과 같이 호텔로 갔다.
호텔에 돌아 온 둘은 서로 말도 안하고 있다가, 얼마 후 시장을 보고 돌아온 임 단장의 호출을 받고, 고만 끝내 단장 앞으로 불려나가고 말았다.
단장한테 기합을 받을 것이다.
어느 팀의 이야기인데, 여행 도중 올리브를 어떻게 딸까? 하는 말을 누가 했는데, 그 문제를 가지고, 하나는 “사람이 직접 딴다.” 또 한 사람은 “아니다 기계로 딴다. 그 많은걸 어떻게 손으로 따나? 서로 옥신각신 하다가 그만 감정이 상하게 되고, 그것이 도가 넘치게 되자 급기야 한사람이 “난 너하고는 같이 여행을 못한다.” 비행기표 주라 나는 간다 하고 화가 나서 서울로 혼자 돌아 온 일이 있다. 그들은 친구였으나 여행을 끝낸 후에도 서로 말도 안하는 사이가 됐다. 지금은 어떻게 되었는지 모르지만! 괜히 쓸데없는 것 갖고 신경질 내지 말라! 올리브를 어떻게 딴들 무엇이 문제인가? 그런 시시한 것을 가지고....... 여행을 망치다니.......! 우리들도 그런 경우가 나올까 두렵다 는 단장의 경고를 듣고 여행을 떠난 것인데, CFO와 CEO가 고만 일을 벌린 것이다.
단장 앞에 불려나간 CFO와 CEO는 어디 할 말이 있어야지! 그냥 딸아 주는 위스키만 한잔 잘(?) 마시고, 너희들 또 다시 그러면 비행기표 다 나눠주고 각자 뿔뿔이 헤어지는 거다. 알간?
대략 이런 기합을 받은 것으로 기억됩니다.
아마 단장이 택시를 타고 가다가 우리가 함께 가지 않고 따로따로 가는 것을 보았던 모양이다.
몇 마디의 말을 나누고 나서 방으로 가는데, CFO가 CEO에게 작은 소리지만, 험악한 얼굴로 “너! 따라와” 하는 바람에, 제 2 라운드가 시작되었죠.
길 건너엔 아직도 문을 열고 있는 바르가 있었습니다.
술을 좋아하는 둘은 아무리 급해도 술을 한잔 안 할 수가 없었죠.
맥주를 두잔 쯤 마시고나서, 서로 말을 시작하는데, 여행 중 서로 쓸데없는 자질구레한 감정이 쌓여 있었던 것입니다.
“아까 그게 뭐야? 넌 왜 자꾸만 고집을 세우나 ?”
“야! 너는 고집 안 세웠나 ? 내가 뚜르에서 여기는 포도주가 싸다 하니까, 아니다 맥주가 더 싸다 라면서 안 그랬나?”(사실 맥주가 더 비쌌다 CEO가 착각한 것임)
그리고 “넌 내가 무엇을 잘 못해서 눈을 이상하게 뜨고 그러나? 오늘 뿐이 아니야 ! 짐 맡길 때도 그게 뭐야?” “늙은 놈이 추태부리니까 그렇지!” “그게 무슨 추태야? 말은 안 통하고 그래서 그런 건데 ! 그게 무슨 잘 못이야?” “그래 ! 좋다 그럼 그건 내가 잘 못했다.........!” “그런데 그런 네 모습을 보니 내 자신이 화가 나더란 말야!” “그건 그럴지도 모르지 !”
CEO가 무슨 말 끝에 그만 CFO의 감정을 건드렸다. 그랬더니 “너 서울 가서 보자 가만 안 둘 거다 ! “맘대로 해라 ! 누가 떠나 ?”
제법 씩씩대면서 한 컵씩 더 마셨다.
아마 상점 주인은 우리들을 보고 뭘 그렇게 다정하게 말하고 있나? 생각 했을 것이다.
늦은 시간이었다.
술을 한잔 하니까, 둘은 아마도 그런대로 분이 풀리는 모양인지.......
뭐 대단한 거라고.........!
CFO가 계산을 끝내고 나오다가 2차를 해야 하지 않겠나 싶어 CEO가 어떤 음식점을 기웃거려 보았으나 이미 문을 닫는 중이라서 포기하고 각자 호텔 방으로 들어갔다.
아무리 가까워도 긴 여행 중에는, 별것 아닌 것을 가지고도, 알게 모르게 감정이 상할 때도 있고, 마음 씀씀이가 못마땅할 때도 있어서, 서로 조심해야 하지 않을까? 싶기도 하고, 여러 사람이 함께 여행할 계획을 세우는 분들에게 혹 참고가 되지 않을까 ? 싶어서 우리들의 이야기를 올립니다.
반드시 서로의 마음을 터놓는 태도가 좋다고 생각되기도 하고요.
물론 두 사람 사이의 우정이 변함없었음은 물론이고, 서울에 돌아 온 후에도 CEO가 CFO에게 혼나지 않고 여전히 정답게 지내고 있음을 보고합니다..........
내일은 우리 여행의 꽃이라 할 수 있는 그 유명한 알함브라 궁전이 있는 그라나다로 가는 날, 아침 일찍 출발해야 한다.
스페인 광장의 위용 ( CEO의 부인)
그당시 Expo에 참가 했던 바르셀로나의 소개 자연
지브로터, 한개의 바위산에 불과하다. 섬 같이보이나 육지오 연결되어 있음
첫댓글 술친구끼리 다투어봤자 칼로 술 베기지, 뭐. 그런데 여행기를 반년이나 지나서 올리니 연내로 다 읽을 수 있을까요?
점점 재미 있어지내! 아이들이 소꼽작난하다 종종 상을 둘러 엎는 수가 있지, 그러다가 어느 한쪽이 다시 놀자고 졸라대지..... 그런데 연재가 늦어저서 잊는 경우가 있읍니다. 언제 끝나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