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덕은 영화감독이다.
그는 이미 열 편의 영화를 만들었으며, 그의 열 번째 영화 ‘사마리아’는 세계 3대 영화제 중의 하나로 불리는 베를린에서 감독상을 받았다.
그럼으로써 한국영화는 이제 칸(‘취화선’으로 임권택), 베니스(‘오아시스’로 이창동)에 이어서 그 세 개의 영화제에서 모두 감독상을 받은 것이다.
기쁜 일이라고? 물론 그렇다.
그런데 한국영화 언론들은 그 사실을 매우 불편하게 생각하고 있다.
뒤에 모여 앉으면 모두 이렇게 말한다.
드디어 한국영화가 3대 영화제에서 모두 상을 받았다.
기쁘다. 그런데 하필이면 김기덕이!
여기에는 질투가 아니라 증오와 경멸이 담겨 있다. 도대체 왜 그런 일이?
사실 김기덕의 영화는 시종일관 사람들을 불편하게 만들어 왔다.
누구나 그의 영화를 보고 찬반 양론에 설 수는 있지만, 아무도 그의 영화를 보고 무시하지는 못한다.
그래서 한 번 보고 나면 치를 떨든지, 아니면 그의 영화에 대한 힘겨운 지지를 표명한다.
아마도 ‘섬’은 그 논쟁의 절정에 있을 것이다.
‘나쁜 남자’는 거기에 기름을 부은 격이다.
심지어 영화 평을 쓰는 내 ‘여성’ 동료 중에는 그의 이름을 듣는 것도 싫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그래서 그의 영화를 보기 위해 시사를 하는 영화관에 가면 이상한 긴장감마저 감돈다. 그 사실을 김기덕 자신도 알고 있다.
그래서 그에게 물어 보았다.
“혹시 그런 걸 즐기십니까? 사람들의 그 불편함이 즐겁습니까?”
김기덕은 단호하게 대답했다.
“아니요.” 그래서 반문했다. “그런데 왜 그렇게 만듭니까?”
김기덕은 약간 슬픈 표정으로 대답했다.
“나는 다른 방식으로 말하는 것을 배운 적이 없는 사람입니다.”
나는 이 말이 이상하게 사무쳤다.
그 대답은 아주 구체적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우리들은 대한민국에서 지금 마흔 다섯 살 된 남자의 최종학력이 초등학교라는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안다.
그는 내내 집을 떠나기 위해 몸부림쳤다.
그래서 자기 학력을 속이고 해병대에 자원 입대했다.
그가 해병대를 선택한 이유는 병역 기간이 가장 길기 때문이라고 덧붙였다.
그런 다음 미군 부대 근처에서 초상화를 그렸다.
우리는 그걸 ‘이발소 그림’이라고 부른다.
거기서 모은 돈을 들고 프랑스에 갔다.
물론 학교를 다닌 것은 아니다. 그 다음에는 거리에서 살았다.
다시 서울로 돌아와서 시나리오를 썼다.
내가 알고 있는 한 그는 띄어쓰기와 맞춤법을 그냥 자기 방식으로 쓰는 사람이다.
그는 어느 지연의 도움도 없고, 이력서도 없이 그냥 세상과 부딪치면서 살았다.
우리는 배운 것도 없이, 돈도 없이, 거리에서 산다는 것이 무엇을 말하는지 안다.
김기덕의 영화를 보면 거리의 증오와 배고픔의 교양이 정말 온몸으로 스며든다.
그래서 그 속에서 살아가기 위해 결국 세상이 약육강식이라는 것을 배운 한 남자의 싸움이 담긴다.
그는 인간이 살코기와 뼈로 이루어진 짐승으로 취급받을 때 거기서 자기가 버텨 온 삶의 기억을 보는 사람이다.
김기덕은 우리에게 매우 고통스러운 존재이다.
왜냐하면 그는 평소에 우리들이 잊고 사는 저 밑바닥으로부터 슬금슬금 기어 올라와서 마침내 우리들의 교양에 도전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마도 그것이 사람들은 두렵고 불편할 것이다.
김기덕에게 물어보았다.
“당신이 세상을 미워한다고 해서 세상이 부서지지는 않을 것입니다.
결국 부서지는 것은 당신 아닙니까?”
김기덕은 평화스러운 얼굴로 대답했다.
“네, 물론이지요. 그리고 그것이 제가 바라는 것입니다.
세상은 저 같은 사람이 없을 때 행복해지는 것입니다.
나는 이런 영화를 만드는 대한민국의 마지막 감독이어야 합니다.”
적어도 그 말을 하는 김기덕의 얼굴은 천진난만하게 보였다.
그는 짧게 덧붙였다.
“저는 해병대에서 많은 것을 배우고 왔습니다.
저는 영화가 아니어도 할 줄 아는 것이 많습니다.”
나는 자기를 부정하면서 세상의 행복을 이야기하는 사람은 김기덕 이외에 알지 못한다.
그리고 거기에 그의 소중함이 있다.
그는 세상을 부정하는 사람이 아니다.
그가 부정하는 것은 버림받은 자의 존재론이다.
그는 질문한다.
왜 세상에서는 가진 자의 영혼만이 축복받는가?
김기덕은 알고 있다.
모든 사람이 행복한 세상은 결코 오지 않는다는 사실을.
그렇다면 그는 차라리 함께 배고프고, 함께 부서지는 세상의 평등함을 원한다.
심술궂다고? 그럴 지도 모른다.
하지만 만일 김기덕이 괴물이라면, 그 괴물은 가진 자의 위선과 거기에 빌붙은 우리들의 교활함이 만들어낸 것이다.
그러므로 그의 존재론은 우리들의 긍정을 통해서만 이루어질 것이다.
김기덕의 영화는 함께 살 수 있는 마음을 호소하는 영화이다.
당신은 세상의 모순에 대해서, 세상이 만들어내는 증오에 대해서 긍정할 용기가 있는가?
미루어지는 만큼 우리는 더 많은 김기덕과 거리에서 마주쳐야 할 것이다.
정성일 영화평론가 |
첫댓글 ~ 읽어 내려가면서 연신 제 마음이 두근거렸네요..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