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수 하다가 잘린 뒤에 코치로 임명된 경우는 아마 제가 처음일 걸요.”억센 부산 사투리의 이동욱은 계면쩍은 미소를 짓는다. 11월 10일 이동욱은 롯데에서 자유계약선수로 공시됐다. 필요없으니 방출한다는 통보. 그리고 11월 13일 오후 2군 코치직을 제의받았고 11월 14일 계약했다.
“지옥과 천당을 오간 느낌”이라는 이동욱의 야구인생은 “극적이었다”는 말로 집약된다. 방출통보 후 사흘은 야구를 했던 20년보다 더 길게 느껴졌다. 야구인생이 끝났다고 생각하니 막막했다. ‘가출’을 결행하며 아마추어팀 지도자와 체육교사, 다른 팀 입단테스트 등을 놓고 고민했지만 어느 것 하나도 ‘내 길’처럼 보이지 않았다.
야구인생의 극적인 전환은 처음이 아니었다. 부산 배정초등학교 4학년 때 처음 글러브를 잡았지만 작은 키 때문에 도무지 가능성이라고는 없어 보였다. 줄곧 반에서 10등 안에 들던 대천중학교 시절 “공부를 시키라”는 담임선생님과 부모님을 설득해야 했고 오라는 학교가 없어 친분있는 감독에게 사정해 겨우 동래고등학교에 진학했다.
팀 성적이 안좋아 대학행도 불가능한 상황. 지역예선이 없는 봉황기와 대붕기에서 모처럼 4할 가까운 타율을 기록해 간신히 막차로 동아대학교에 입학했다. 대학에서도 청소년대표 출신 동기에게 밀렸다. 2학년 때 원광대학교와의 경기에서 잘 나가던 동기가 조진호(SK)에게 4연타석 삼진을 먹은 것을 계기로 주전으로 뛸 수 있었다.
“친구한테는 미안했지만 그게 인생인 것 같다”는 게 이동욱의 해명이다. 대학 4학년 때인 1996년 태극마크를 달고 애틀랜타 올림픽에도 나갔다. 물론 처음엔 예비멤버였고 중도에 탈락했다가 6월 천마기에서 최우수선수상을 받은 뒤 대표팀에 재합류했다. 이듬해 꿈에 그리던 롯데 유니폼을 입었지만 기라성같은 선배들이 버티고 있어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었다. 게다가 무릎부상 때문에 시즌 내내 뛸 형편도 못됐다. 그저 그런 선수로 6년을 보냈지만 롯데는 그를 코치로 낙점한 것이다.
막연했던 앞으로의 목표가 확실해졌다. 각광받는 선수는 아니었지만 훌륭한 야구지도자로 거듭나는 것이다. 팀 훈련이 끝나면 곧바로 컴퓨터학원으로 달려간다. “미래는 준비하는 사람의 몫”이라며 웃는 이동욱의 모습에서 2004년 시즌 재도약을 다짐하는 롯데의 희망이 드러나는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