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래산 (2008. 8. 28)
깊으면 고였다가 막히면 돌아가고 차면 넘치는 것이 물이다. 네모난 그릇에 담으면 네모가 나고 둥근 그릇에 담으면 둥글게 되었다가도 얼리면 돌처럼 딱딱해 지는 물은, 늘 낮은 곳으로 흐르며 고요의 가슴에 숱한 생명을 끌어안고 있다. 온갖 더럽고 추한 것도 넉넉한 품으로 맑고 깨끗하게 정화 해 내기에 내 남은 삶도 물같이 살아보겠다고 다짐을 해 보지만 여태 물빛조차 닮지 못한 것이 오늘의 내 모습이 아닌가 싶다.
뒤를 돌아볼 여유조차 없는 각박한 일상 속에서 지치고 고단하면 잠시 쉬어 재충전을 해야 함에도 아직 젊음이 남아서일까? 툭하면 어거지를 부려대는 내 꼴이 우습다. 작열하는 태양의 열기가 더 식기 전에 항도 부산의 모습을 한 눈에 볼 수 있다는 봉래산을 찾아가고 싶은 마음에, 몸살로 늘어지고 무기력해진 몸을 추슬러 배낭을 챙겼다. 시원한 바다를 보며 무거운 마음을 해풍에 훌훌 날려버리고 싱싱한 회 한 사라를 먹고 나면 착 달라붙은 무기력 요괴 녀석쯤은 저절로 떨어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였다.
오늘 산행의 길동무는 아내와 평소 처제처럼 가깝게 지내는 00 이 엄마 세 사람이었다. 청명한 하늘에 피어나는 뭉게구름은 벌써 가을이 저만치 다가와 있음을 느끼게 했다. 아름답고 쓰라렸던 옛 기억 한 자락을 더듬으며 월드컵경기장과 구포를 지나 네비의 충실한 하수인이 되어 영도로 향했다. 부산에는 터널도 많고 깍쟁이 같이 돈을 내라는 곳도 많았다.
몇 차례의 진입착오 끝에 마침내 영도대교를 지나 2시간여 만에 목적지로 정한 백련사를 찾았다. 늦여름의 햇살은 따가왔다. 해안도로 옆의 좁은 길은 주차할 한 뼘 공간도 없어 한참이나 아래쪽의 골목길에 차를 세우고서야 백련사 입구의 등산로에 들어설 수 있었다. 파아란 바다에는 크고 작은 배들이 마치 군사작전을 하고 있는 모습으로 떠 있다. 오랜만에 보는 바다의 시원함이 너무 좋았다.
산행의 들머리는 좁은 숲길이었다. 가는 여름이 못내 아쉬운 듯 목 놓아 우는 싸락매미 소리와 풀벌레의 흐느낌이 한낮의 열기에 끈적댔다. 산에는 벌써 가을이 시작되고 있었다. 영선사 뒤로 오르며 발 아래로 내려다보이는 멋진 바다의 모습이 장관이다.
10여분쯤 오르자 임도와 마주했고 이정표가 있었다. 봉래산도 여느 산과 마찬가지로 정상으로 오르는 길이 많았다. 어디로 올라야 더 멋진 경관을 볼 수 있을까 하고 망설이는데 대구의 칠성동이 친정이라는 사람이 가르쳐준 왼편의 임도를 따라 체육공원으로 향했다. 정상으로 오르는 길은 이곳에서부터 가파르게 올려쳤다.
올 여름 대구사람들을 반피대기로 만들었던 강한 햇살은 금세 땀으로 흥건히 젖어들게 했다. 15분쯤 숨을 헉헉대며 가파르게 올려쳐서야 남항대교가 훤히 내려다보이는 곳에서 땀을 닦으며 아래를 내려다보는 여유를 가질 수 있었다. 길도 인생살이와 같아서 험하면 조망이 좋은 법이다. 장난감 같은 배들이 항구를 가득 메운 모습은 멋진 한 폭의 그림 같았다. 바닥까지 훤히 보일 것 같은 파아란 바다와 어우러지는 해안의 모습이 예뻤다. 멀리 가덕도와 감천 부두와 송도해수욕장이 보이고 큰 배들 사이로 하얀 선을 그으며 미끄러지듯이 달려가는 배들의 모습이 신기하고도 아름다웠다. 바다 건너 부산 시내의 크고 작은 건물들의 모습이 정겨움으로 다가선다.
혹시나 했던 우려가 현실이 되어 무기력 요괴는 집요하게 나를 괴롭혔다. 몸이 무겁고 머리가 아파 산행이고 뭐고 다 그만 두고 그냥 드러눕고 싶었다. 산행을 계속할 수 있으려나 걱정이 되었다. 산에는 어거지가 통하지 않았다.
걸음을 놓을수록 배들의 모습도 작아지고 높게만 보이던 산과 건물들도 모두가 장난감 같이 보였다. 배낭을 아내에게 맡기고 바다와 해안이 이루는 아름다움에 취하며 천천히 안간 힘을 다해 산을 올랐다. 오르다가 뒤돌아보는 바다의 모습이 멋지다. 바윗길을 지나 작은 등성이와 안부를 지나자 눈앞에 정상이 올려다보였다. 아기자기한 오솔길로 이어지는 길에는 왼편의 복천사에서 올라오는 길과 오른편의 목장원에서 올라오는 길이 합쳐졌다. 숨이 거칠어질 무렵에야 마침내 정상에 설 수 있었다.
영도의 한가운데에 우뚝 솟은 봉래산(394m)의 조망은 소문대로 지상 최고였다. 시원한 해풍이 불어오는 정상에서 바라보는 드넓은 바다와 어우러지는 해안의 모습은 단숨에 가슴을 뻥 뚫어 놓았다. 와~ 하는 소리가 절로 나왔다. 산과 바다와 도시가 어우러지는 모습이 이 보다 멋지고 아름다울 수는 없었다. 부산의 자랑인 오륙도가 수반 위의 수석처럼 반쯤 물에 잠긴 듯이 떠있다. 그 뒤로 장산이 뾰족한 봉우리를 자랑하며 해운대를 품에 안고 있다.
멀리 달음산과 거문산, 구곡산과 황령산 뒤로 철마산과 대운산이 보이고 그 옆으로 천성산, 금정산, 백양산, 구덕산, 승학산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영도다리를 중심으로 왼편은 자갈치공동어시장, 오른쪽은 수출의 관문인 크레인이 가득한 컨테이너 부두, 부산의 상징인 오륙도와 이기대, 해양대학이 내려다보이고 발 아래로 크고 작은 아파트와 건물들이 손에 잡힐 듯이 가깝다. 왼편 끝자락 멀리 흐릿하게 가덕도가 보인다. 머지않아 저곳에서 거제도까지 바닷속으로 길이 이어질 날을 기대해 본다.
엊그제 내린 비로 조망이 너무 좋았다. 파아란 바다 한가운데로 하나의 흰 선을 그으며 어디론가 가고 있는 배의 모습이 멋지다. 흑판에 백묵으로 길게 한 줄의 선을 긋고 있는 것 같았다. 황홀하도록 멋진 바다의 모습에 좀처럼 눈을 뗄 수 없었다.
거센 파도와 억센 바닷바람을 막아주는 영도의 봉래산은 부산사람들에게 어머니의 품 같은 산이었다. 영도의 한가운데에 우뚝 솟은 봉래산은 부산사람들의 자긍심도 함께 갖고 있는 듯 했다. 원추형을 이룬 봉래산은 예로부터 신선이 살고 불로초와 불사약이 있다는 상상속의 섬으로 봉황이 날아드는 산이라고 해서 봉래산으로 불렸다고 한다.
며르치, 꽁치가 팔짝 뛴다는 부산항. 꺼떡거리는 영도다리에 얽힌 숱한 애환과 이야기도 많았던 그 전설의 영도다리가 지금 눈앞에 있다. 국내 최대의 어시장인 자갈치시장과 철마의 종착역인 부산역과 부두가 내려다보인다. 봉래산에서 내려다보이는 시내의 모습과 바다가 어우러지는 모습은 멋진 한 폭의 그림이었다. 부산을 한눈에 보고 싶다면 이 봉래산에 올라볼 것을 권하고 싶다.
영도는 섬이라기보다 차라리 뭍이었다. 망망대해를 향해 섬인 듯 떠가는 한 점 원양어선들의 모습이 그저 신기하기만 하다. 먼 바다에서 불어오는 해풍이 싱그럽다. 영도의 남쪽 끝은 우리나라 최고의 해안절경을 자랑하는 태종대가 자리하고 있었다.
봉래산은 세 개의 봉우리로 이루어져 있는데 할배바위가 있는 정상이 조봉이고 서편 능선으로 자봉과 손봉이 있다. 아내는 쉽고 짧은 길로 곧장 내려가자고 했으나 능선을 타야 봉래산을 제대로 볼 수 있을 것 같아 자봉과 손봉을 거쳐 목장원으로 가자고 우겼다. 자봉으로 올려치는 길옆의 구절초에 앉은 벌과 나비의 모습이 예쁘다. 정상에서 10분여의 거리에 자봉에 있었다. 남쪽 면은 급경사이기에 왼편으로 태종대와 먼 바다를 두고 능선을 따라 해풍을 맞으며 걸음을 놓는 기분이 상큼했다.
밋밋한 자봉을 지나 손봉에 이르자 돌무더기를 제단처럼 쌓아놓았다. 이곳에서 한참을 쉬고나자 무겁던 몸이 한결 가벼웠다. 시원한 해풍에도 가을의 느낌이 있었다. 오후가 되자 먹구름이 끼고 조망이 나빠져서 시내 쪽으로는 소나기가 쏟아질듯이 흐려졌다. 바다의 날씨는 여자의 마음같이 변덕이 심했다.
하늘 빛 같은 푸른 쪽빛 바다가 너무 아름다웠다. 손봉을 지나 내려서는 길은 바다로 내리박히듯이 경사가 심했다. 봉래산이 너무 좋아 천 번도 넘게 이곳을 올랐다는 어느 교사의 비문을 돌아 목장원으로 내려서자 고기 굽는 구수한 냄새가 우릴 유혹했다. 부산에 와서는 고기보다 회를 먹어야 한다는 생각에 자갈치 시장에서 맛있는 회를 먹으려고 침을 꼴깍 꼴깍 삼키면서도 참아야 했다. 이곳에서 길을 건너 바다로 계단 길을 한참이나 내려서자 해안산책로와 마주하는 바다였다.
섬이 빚어 낸 아름다운 경관을 만끽할 수 있는 곳이 바로 이 절영 해안의 산책로였다. 쉼없이 밀려왔다가 하얗게 부서지는 파도를 바라보며 걷는 기분이 너무 시원했다. 낚시꾼과 스킨스쿠버들의 모습도 보였다. 중간지점에는 해녀촌이 있었으나 잡아놓은 것은 멍게 두 마리에 성게뿐이었다. 한낮의 햇살이 부담스러웠으나 기암 사이로 불어오는 바닷바람을 맞으며 걷는 느낌이 좋았다.
신발을 벗어던지고 물로 첨벙 뛰어들고 싶었다. 그러나 오늘은 바라보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물때여서인지 잔잔하던 바다에 파도가 높게 일었다. 피로가 쌓인 발걸음으로 걷는 2.2킬로의 절영 해안 길은 멀고도 지루했다. 대마도 전망대와 파도의 광장도 관심이 없었다. 식은 땀이 흐르고 눈앞이 몽롱할 즈음 해안길 끝에 있는 쉼터에서는 아예 의자에 길게 드러누워야 했다. 속이 울렁거리고 머리가 아파 견딜 수 없었다.
세계 3대 미항의 하나인 이탈리아 나폴리 만의 카프리 섬을 연상케 할 정도로 경관이 빼어나다는 태종대를 20년이 넘게 가보지 못했기에 태종대와 자갈치 시장을 꼭 가보고 싶다는 아내의 요구도 오늘 만큼은 들어줄 수 없었다. 평소 같으면 내가 먼저 가자고 졸라댔겠지만 오늘은 사정이 달랐다.
점심 때가 한참이나 지났기에 꼬르륵 대는 배를 채우려고 자갈치 시장으로 향하다가 동생이 왔다고 특별히 자연산 회를 준비해 두었다는 누나의 연락을 받고 어쩔 수 없이 수영동으로 향했다. 오랜만에 만나 환하게 맞아주는 누나들의 모습이 좋았다. 맛있는 회를 실컷 먹고 나자 머리가 맑아지고 눈이 뜨였다. 회를 먹지 못해 생긴 몸살이었던 모양이다. 작은 누나도 우리가 왔다는 소식을 듣고 기꺼이 찾아와 찬거리를 싸 주었다. 오랫동안 만나지 못해도 형제의 정은 끈끈했다. 역시 피는 물보다 진했다.
부산의 봉래산은 자가용을 갖고 드라이브를 삼아 찾아가도 좋겠지만 대구에서 열차를 타고 부산역에서 내려 봉래산을 올랐다가 태종대를 돌아보고 자갈치시장에서 회 한 사라에 쐬주 한잔으로 거나하게 취해 느즈막하게 돌아오기에 아주 좋은 코스였다. <2008. 08. 24>
☐ 산행코스
백련사 - 임도 왼편 길 - 체육공원 - 능선 길 - 봉래산 정상 - 자봉 - 손봉 -
임도 - 목장원 - 절영 해안도로 - 파도의 소리 (약 4시간 소요)
첫댓글 부산시내 전경을 구경잘 햇슴다 ㅎㅎ수십년을 해풍에 버티고 선 노송(老松)을 보니 우리 인생은 참으로 짧기만 느껴지네..늘 기행문 고마우이 칭구야...
살아온 날 보다, 살아갈 날이 더 짧게 남은 우리들의 인생!! 이제는 뛰지 말고 실실~ 걸어보세나. 이곳 저곳을 기웃거리며 실없이 히죽대기도 하면서 말이네......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