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기행45- 제주도 추사 김정희 유배지
11월27일 추사 김정희 유배지에 갔습니다.
김정희(金正喜)(정조10년 1786년6월3일-철종7년 1856년10월10일)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서예가, 금석학자, 고증학자, 화가, 실학자입니다. 본관은 경주이고, 자는 원춘(元春), 호는
완당(阮堂)·추사(秋史)·예당(禮堂)·시암(詩庵)·과파(果坡)·노과(老果)·농장인(農丈人)·
보담재(寶覃齋)·담연재(覃硏齋)·천축고선생(天竺古先生) 등입니다. 노론 북학파 실학자이며
화가 서예가였습니다.
김정희(金正喜) 은 한국 금석학의 개조(開祖)로 여겨집니다. 금석학(金石學, Epigraphy),
비문학(碑文學), 금석 문학은 금석문을 연구하는 학문입니다. 한국 중국의 옛비문을 보고
만든 추사체가 있습니다. 그는 또한 난초를 잘 그렸습니다.
1809년(순조 9) 생원이 되고, 1819년 식년시(式年試) 병과(丙科)에 급제하고 세자시강원설서,
예문관검열을 지냈습니다. 그뒤 삼사의 언관을 거쳐 효명세자의 사부로써 보도하였으며 ,
1823년 규장각대교가 되었다가 충청우도 암행어사로 되었습니다. 그뒤 의정부의 검상(檢詳),
1836년(헌종 2년) 성균관대사성과 병조참판, 이조참판 등을 역임하였다.
1830년 생부 김노경이 윤상도의 옥사에 연루되어 고금도(古今島)에 유배되었다가 순조의
배려로 풀려났으나 헌종이 즉위 초, 김정희 자신도 윤상도의 옥사에 연루 1840년(헌종6년)에
제주도로 유배돼었다가 1848년 석방되었습니다. 1851년(철종 2)에 헌종의 묘를 옮기는
문제에 대한 영의정 권돈인의 예론(禮論)으로 예송 논쟁이 벌어지자 이에 연루되어 함경도
북청으로 유배되었다가 1853년 풀려났습니다.
추사와 완당이라는 호를 많이 사용했으나 그밖에 100여개 넘는 별호를 사용했습니다.
당색으로는 노론으로 외척이었지만 벽파나 탕평당에 들지않고 북학파가 되었습니다.
영조의 계비정 순황후의 의 친족이었고, 양어머니 남양홍씨를 통해 남연군과 과 이종사촌간이
됩니다. 실학자 박제가의 문인으로 연암 박지원의 학통을 계승하였으며 홍선대원군과
박규수, 효명세자는 그의 문인들이었습니다.
바로 이곳에서 머물렀고 이집 밖으로는 나가지 못하는 유배생활을 하였습니다. 추사 김정희는
안동김씨에 의한 세도정치에 휩싸여서 유배를 당하게 되었습니다.
제주도 유정읍에서 8년3개월동안 위리안치로 유배를 살았으며 이곳에서 그림과 추사체가
완성되었습니다. 위리안치란 집주위의 울타리를 치거나 가시덤블을 쌓고 그안에 유배인을
유폐시켜 죄인이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하는 형벌입니다.
추사 김정희의 유배지는 당시 살았던 가옥구조와 생활모습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고 합니다.
김정희는 충청도 예산현 (예산군)에서 병조판서를 지낸 김노경(金魯敬)과 유준주(兪駿柱)의
딸 기계 유씨(杞溪兪氏) 사이에서 맏아들로 태어났으나 아들이 없던 큰아버지 노영(魯永)의
양자가 되어 한성부로 상경하였습니다. 그의 가문은 멀기는 했으나 왕실의 이중 외척으로
그가 문과에 급제하자 조정에서 축하를 할 정도로 세력가였습니다.
당색으로는 노론으로 그의 집안은 서인 중진인 김홍욱의 의 후손이었습니다. 노론의 당원이
된 뒤에는 고조부 김흥경이 영조때의 재상이었고, 증조부 김한신은 영조의 서녀 화순옹주의
부마가 되어 월성위가 되었다. 또한 증조부 김한신과 10촌 형제간인 김한구의 딸은 영조의
계비인 정순왕후 김씨였습니다. 그의 집안은 노론의 외척 계열이었지만 고조부 김흥경과
증조부 김한신은 당파에 초연했고, 추사 역시 벽파나 탕평당에 들지않고 북학파에 가담하였
습니다. 7세 때 그는 입춘대길이라 쓴 글을 문앞에 붙여 놓으니 지나가던 채제공이 보고는
김정희에게 장차 명필이 되겠다고 칭찬했다고 한다. 서얼 출신으로 시, 서, 화에 모두 능했던
박제가에게 어려서부터 가르침을 받았고 박제가를 통해 북학파 박지원의 학문을 계승하였습니다.
영조의 딸 화순옹주가 출가한 월성위 집안에서 태어난 김정희의 집안에는 대대로 명필이
많았다고 합니다. 그의 어머니 기계 유씨가 임신한 지 24개월 만에 출산했다는 전설이
있습니다. 어려서부터 글을 잘 지었습니다.
큰아버지 김노영이 귀양가고, 둘째 큰아버지 김노성,할머니,할아버지 등이 죽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가문을 이어야 한다는 집안의 뜻에 따라 김노영의 양자로 입적된 뒤 15세의 나이로
동갑인 한산이씨와 결혼을 합니다. 결혼하던 그해 정조가 승하하고(1800년) 그의 증대고모뻘
인 김대비(정순왕후)가 수렴청정을 하였으며, 그 연고로 친부인 김노경은 은 종3품까지
벼슬이 오릅니다. 양어머니 남양홍씨를 통해 남연군과 이종사촌간이 됩니다. 이러한 인연으로
후에 흥선대원군이 이 김정희의 문하에서 글을 배우게 됩니다. 생모가 34세로 세상을 떠나자,
비탄과 허무감에 고향 예산으로 내려가 한때 불교에 심취하기도 합니다.
스무살 되던 해(1805년)대왕대비가 승하하고, 그 다음달에는 부인 한산 이씨가 죽었습니다.
이 무렵 스승 박제가가 유배에서 풀려났다가 집에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죽었습니다.
양어머니도 얼마 뒤 죽었습니다. 양어머니의 삼년상을 치른 뒤 한 살 아래인 규수와 재혼
합니다. 이듬해인 1809년 (순조 9) 생원시에 장원급제하여 생원이 되고 성균관에 들어가
수학하게 됩니다.
제주도의 돼지키우는 우리 돗통시입니다. 제주시의 가정마다 있는 돗통시는 돼지키우는
우리도 되지만 화장실로 사용을 합니다.
인분을 먹고 키우는 돼지인분은 퇴비로 다시 밭에 뿌려 이용하는 방법으로 지혜로운
농법입니다. 그래서 제주도하면 똥돼지라고 부르고 맛있있다고 합니다.
옛날에 외지인이 제주도에서 화장실에 가면 돼지들이 꿀꿀거리고 몰려들어 인분을
받아먹으려고 준비하여 기겁을 하였다는 얘기가 있었습니다.
추사 김정희 와 함께
이병철부부는 김정희가 손님들과 대담을 나누던 곳에서 사진을 찍었습니다.
친구사이의 매우 두터운 우정을 '금란지교"라 합니다. 추사 김정의(1786-1856)와 초의
의순 1786-1866)의 우정이 그러했습니다. 1815년 처음 만난 추사와 초의 이후 추사는
초의에게 걸명시(乞茗詩)를 보내고, 그의 대한 답례로 글씨를 보내곤 했는데 대표적인 글씨가
"명선(茗禪)'입니다. 1840년 제주도로 유배 온 추사는 차를 마시며 쓸쓸한 마음을 달랬
습니다. 1843년 초의는 제주도에 내려와 6개월간 추사와 함께 시간을 보내기도 하였습니다.
추사는 초의에게 '일로향실(一爐香室)"이란 글씨를 써주었으며 이것은 현재 해남 대둔사
일지암에 걸려 있습니다.
16세 때 북학파의 대가이자 3차례 이상 청을 오가며 학문의 폭을 넓히고 있었던 박제가
(朴齊家)의 제자가 되면서 그로부터 북학파사상을 배우고 연암 박지원의 학통을 계승하였
습니다. 이에 따라 그는 청나라의 고증학(考證學)에도 흥미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1809년
(순조 9) 24세 때 동지사(冬至使) 겸 사은사(謝恩使)의 일행이 서울을 떠날 때 그도 부사
(副使)인 부친 김노경을 따라 자제군관의 직책으로 연행(燕行) 길에 올랐습니다
당시 연경의 학자 옹방강(翁方綱)과 완원(阮元)을 만나 이후 학문 활동에 큰 도움을 받게
되었다. 옹방강은 일찍이 〈사고전서 四庫全書〉의 편찬에 관여했으며, 경학(經學)에 정통
하고 문장·금석·서화·시에 능한 학계의 원로였다.
당시 청의 학풍은 한대의 학문을 숭상하고 송나라 명나라의 성리학을 관념적이라며 배척하는
것이었는데, 옹방강은 한나라와 송나라의 학문의 절충을 주장하고 있었다. 청나라 중기의
경학의 대가였던 완원은 실사구시설(實事求是說)을 비롯한 고증학 의 학문적 체계수립에
영향을 주었다. 연암 박지원의 북학사상과 청나라의 고증학 사상의 영향을 받은 그는
성리학만이 진리라는 생각은 버리게 되었다
옆의 추사관에는 그의 글시체와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그의 삶을 요약한 연표와
세한도 사본을 비롯하여 추사 김정희의 연대별 글씨 변화를 관람할수 있습니다
24세 때인 1810년(순조 10) 아버지 김노경이 청나라에 동지사 겸 사은사로 사신행을 떠날 때
아버지의 시중을 드는 자제군관으로 따라갔습니다. 6개월 동안 청나라에 머물면서 청나라
제일의 학자 옹방강(翁方綱), 완원(阮元) 등에게 재능을 인정받아 고증학을 배우게 됩니다.
완원은 자기가 지은 "소재필기"((蘇齋筆記)》를 처음으로 김정희에게 기증까지 하였으며,
김정희가 조선에 돌아온 뒤에도 그들과 서신을 주고받았습니다. 조선에 돌아온 뒤 한동안
벼슬에 나가지 않았습니다. 그때 〈실사구시설〉 등을 발표하여 북학((北學)의 학문적 수준을
높이는 한편 성리학적 관념론을 비판했습니다.
김정희는 그밖에도 《주역》에도 조예가 깊었으며, 전각(篆刻)을 예술의 경지로 끌어
올렸습니다. 차(茶)를 좋아하여 한국의 다성(茶聖)이라 불리는 초의 스님, 백파 스님과
친분을 맺었습니다. 1811년 조선통신사와 면담중이던 코가세이리(古賀精里)의 청으로
특별히 일본 화가 타니분초((谷文晁)의 그림 부사산도(富士山圖)에 찬을 썼습니다.
타니 분초의 다른 그림 산수도(山水圖)에는 태화 이현상이 찬하였습니다.
1819년(순조19년) 식년시((式年試) 병과(丙科)로 합격하여 권지세자시강원, 예조 참의를 거쳐
세자시강원설서로 효명세자를 보필하였고 예문관 검열을 거쳐 삼사의 언관을 두루 역임한
뒤 승문원검교, 1823년 규장각대교 암행어사 등까지 올랐습니다.
예산 화엄사의 무량수각 탁본입니다.
무량수각 탁본에 대한 설명
제주목사께 삼가 답장 드리는 글
그가 그린 세한도
추사 김정희의 귀향비
예부터 제주에는 물이 귀했다..그러므로 제주의 마을은 봉천수가 솟아나는 바닷가를
중심으로 생겨났으며,
그 귀한 물을 길어 나르는 물동이를 '물허벅'이라고 불렀습니다.
물허벅은 둥그런 항아리로 주둥이가 좁아 물이 출렁거려도 넘치지 않습니다.
그리고 물허벅을 지고 다닐 수 있게 대나무로 만든 바구니를 '물구덕'이라고 하는데
물구덕 밑바닥에 대나무를 대었고 짊어지는 밧줄은 '물배'라고 부릅니다.
추사 김정희 선생과 함께
이호테우 해변을 가는중 유명한 봄날카페를 찾아가다 바닷가에 어선들이 불이 켜서 작업을
하는것을 보았읍니다.
억새풀에서 사진을 찍었습니다.
억새풀의 키는 1~2m, 잎은 줄모양으로 끝이갈수록 뽀족하고 까슬까슬합니다. 억새풀의
꽃은 9월에 부채꼴모양이나 산방꽃차례로 달립니다. 억새풀의 뿌리는 약재로 망경초,
두영이라 불리며 잎과 줄기는 가축의 먹이나 지붕잇는데 쓰입니다.
약으로 쓰일때는 탕으로 쓰이고 부인과,호흡기질환등을 다스리는데 감기,대하증,소변불통,
이뇨,진해,해수.해열에 도움이 됩니다
동화같은 이야기 백마전설이 전해지고 있는데요
한 아이(홍경래)가 태어났는데 칼로 베어도 탯줄이 잘리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때 산파가
억새풀로 탯줄을 잘랐다고 합니다. 그렇게 자란 아이는 세상을 구하기 위한 반란을 일으
키는데 활을 맞아도 칼을 맞아도 멀쩡하였다고 합니다. 난감해진 관군은 아이의 고향에서
탯줄에 관한 이야기를 전해듣게 되지요. 그래서 활촉대신 억새풀을 꽂아 쏘아 죽였다고
합니다 억새풀은 민초를 상징하고 어떠한 왕과 영웅도 민초의 힘 앞에선 굴복할 수 없음을
뜻하는 전설입니다
오동도에서 전해지는 이야기인데요. 옛날에 자산에 사는 토끼가 오동도를 구경하고
싶었답니다. 바닷가에 가 거북이를 만난 토끼는 "나를 태워 오동도를 구경시켜 주면 귀한
보물을 주겠노라" 하며 거북이를 꾀었답니다. 거북은 토끼를 태워 오동도를 구경시켜 주었고
토끼는 주겠노라 한 선물을 주지 않았지요. 화가 난 거북은 토끼를 오동도에 실어다 놓고
가죽을 홀라당 벗겨버렸답니다. 이 때 이곳을 지나선 토신이 가엾은 토끼를 보고는
측은지심에 억새풀밭에 가 딩굴라고 했지요. 도끼는 토신이 일러준대로 억새풀밭에서
뒹굴었고 억새풀이 온 몸에 달라붙어 전 보다 더 고운 옷을 입게 되었지만 이때부터 토끼는
거짓말도,참말도 할 수 없는 말을 할 수 없는 벙어리가 되었다지요.
억세풀과 이태완 부부
아름다운 바닷가에서 Lee Brothers(이병철, 이태완, 이풍원)
제주 동문 시장으로 오기전에 김밥집에 들렀는데 예약하고 오는 사람들이 많이 있어 즉석에서
주문하니 20분후에 오라고 해서 가니 김밥을 사서 옆집의 커피집에서 먹어보니 환상적인
김밥이더군요. 제주에 오면 꼭 김밥을 추천합니다.
동문시장의 먹거리 거리 "전복버터밥"에 줄이 길게 늘어서서 기다려서 30분만에 먹어보니
전복, 돼지고기로 볶아서 주는 볶은밥인데 왜 사람들이 늘어섰는지 알게 되었어요..너무
맛있고 또 3명의 젊은이가 싸줄때 "감사합니다. 맛있게 드셔요"라는 말과 동시에 허리굽혀
인사를 합니다.ㅎㅎ
꼭 추천하는 전복버터밥입니다.
기다리기 힘들다고 나만 줄서서 먹고 일행을 찾으러가니 순대집에서 쇠주를 들고 있었습니다.
이 젊은이는 땅콩으로 아이스크림으로 만들었는데 내가 대만에서 먹어본 맛이라고 하니
젊은이가 대만가서 배워서 하는것이라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