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3. 17. 주일예배설교
예레미야 30장 10~11절
나는 실패합니다. 그래도 괜찮습니다.
■ 여러분은 배짱이 있으신 편입니까? 웬만한 것에는 흔들리지 않는 담대함이 있으십니까? ‘그럴 수도 있지’ ‘그까짓 것’ 하며 흘려버리는 편이십니까? 혹시 똥배짱은 아니십니까? 속은 떨리는데, 겉으로만 괜찮은 척하는 편이십니까?
오늘 설교 제목이 <나는 실패합니다. 그래도 괜찮습니다.>입니다. 이 설교 제목에 대한 첫 느낌이 어떠셨습니까? 배짱으로 읽히셨습니까, 똥배짱으로 읽히셨습니까? 아니면?
<나는 실패합니다. 그래도 괜찮습니다.> 이 말은 배짱이나 똥배짱에서 나온 말이 아닙니다. 이 말은 믿음에서 나온 말입니다. 야곱에게, 이스라엘에게 주신 말씀에 근거해서 내놓은 말이니, 믿음에서 나온 말입니다. 10절을 읽어보겠습니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그러므로 나의 종 야곱아,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이스라엘아, 놀라지 말라. 내가 너를 먼 곳으로부터 구원하고, 네 자손을 잡혀가 있는 땅에서 구원하리니, 야곱이 돌아와서 태평과 안락을 누릴 것이며, 두렵게 할 자가 없으리라.’”
어떻습니까? 배짱인가요, 똥배짱인가요? 아닙니다. 믿음입니다. 오늘은 믿음에서 나온 말 <나는 실패합니다. 그래도 괜찮습니다.>의 의미에 대해 나누겠습니다.
■ 우리가 살면서 가장 하고 싶지 않은 경험이 있습니다. ‘실패’입니다. 예상은 하더라도, 실패를 원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실패를 목적으로 삼는 일은 없습니다. 성공을 원하고, 성공을 꿈꾸며 일을 합니다. 그런데 실패합니다.
이유가 무엇일까요? 조건이 불충분해서? 그럴 수 있습니다. 시기가 맞지 않아서? 그럴 수 있습니다. 너무 무리해서? 그럴 수 있습니다. 나쁜 사람을 만나서? 그럴 수 있습니다. 참으로 실패의 이유/원인은 다양합니다. 아무리 완벽하게 계획하고, 모든 인적·물적 조건을 완벽하게 갖췄어도 실패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유를 도무지 찾을 수 없는 실패도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원하지 않지만, 예상도 못했지만, 실패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라도 실패할 수 있습니다. 이에는 우리 그리스도인도 예외가 아닙니다. 기도도 많이 하고, 성령도 충만하고, 말씀에도 충실한 삶을 산 그리스도인이라도 결코 예외이지 않습니다. 이유가 무엇일까요? 주님은 단 한 번도 완승(完勝)을 약속하신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완패(完敗)를 허락하신다고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이렇게 완승도 완패도 아닌 이유는 주님의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완승’이 아닌 이유는, 고난과 실패를 통해 하나님을 더욱 의지하게 하시려는 뜻이 있기 때문입니다. ‘완패’가 아닌 이유는, 어떤 경우에도 포기하거나 버리지 않으시는 은혜와 사랑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결국 하나님이 우리의 삶에서 기대하시는 것은, 모든 시간이 하나님만의 시간임을 인정하기를 원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오직 우리의 시간에 하나님의 시간만 있을 뿐임을 고백하길 원하십니다.
그렇다면 우리 그리스도인은 지금 논의하고 있는 실패를 어떤 태도로 대해야 하는지를 정리해야 합니다. 그것은 실패를 축복과 연관 짓지 않아야 합니다. 물론 성공도 축복과 연관 짓지 않아야 합니다.
많은 그리스도인이 착각하는 것 중 하나가 성공은 축복이고, 실패는 저주라는 공식입니다. 이는 착각 중에도 최고의 착각입니다. 축복과 저주라는 개념을 남용하고 오용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성공과 실패는 축복과 저주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럼 무엇일까요?
■ 오늘 본문의 시간적 배경은 이스라엘 포로기입니다. 주전 587년, 예루살렘이 바빌론에 의해 함락된 후, 다수가 바빌론에 포로로 잡혀가 있는 상황이 본문의 시간적 배경입니다. 그러니 일어날 수 있는 최악의 상황이 모두 일어날 수 있는 시기였습니다.
이런 험악한 소용돌이 한가운데서 쓰인 것이 오늘 본문입니다. 그러니 본문은 실패의 한복판에 있는 이스라엘, 즉 이스라엘의 실패를 두고 쓰인 메시지입니다. 그런데 메시지는 절망과 훈계의 메시지가 아니라 정반대의 메시지입니다. “두려워하지 말라”는 메시지입니다. “놀라지 말라”는 메시지입니다. 이는 <구원>의 메시지입니다.
우리는 이를 10절과 11절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곳에 구원이라는 단어가 여러 차례 나옵니다. 몇 번인가요? 세 번입니다. 10절에 두 번, 11절에 한 번, 총 세 번입니다. “구원하고... 구원하리니... 구원할 것이라”
세상에서 가장 희망찬 말이 무엇일까요? <구원>입니다. 모든 희망이 끊어진 상황에서의 ‘구원’, 모든 가능성이 사라진 상황에서의 ‘구원’, 이 얼마나 희망찬 말입니까? 그렇습니다. <구원>은 가장 희망찬 말이자, 가장 행복한 말이고, 가장 축복된 말입니다. 바로 이러한 구원을 실패한 이스라엘, 하나님의 자녀에게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실패는 결론이 아닙니다. 구원이 결론입니다. 모든 희망과 가능성이 끊긴 실패가 끝이 아닙니다. 끝이라 여긴 여기서부터, 다 끝났다고 좌절한 여기서부터 구원의 역사가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실패했다고 희망을 포기하는 것은 결론의 주인도 아니면서 소위 나대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에게는 그 어떤 희망도 포기할 권한이 없습니다. 실패는 구원이 시작되는 은혜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실패는 나의 실패에 불과합니다. 하나님의 실패는 아닙니다. 실패는 아무것도 할 수 없고, 어쩔 도리가 없는 것인데, 실패에서 구원하시는 하나님이시니, 하나님의 실패는 없습니다. 참으로 하나님은 실패하지 않으십니다. 오직 하나님은 구원자이십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이렇게 외칠 수 있습니다. <나는 실패합니다. 그래도 괜찮습니다.>
■ 그런데 하나님의 구원은 거룩한 구원이십니다. 11절입니다. “이는 여호와의 말씀이라.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너를 구원할 것이라. 너를 흩었던 그 모든 이방을 내가 멸망시키리라. 그럴지라도 너만은 멸망시키지 아니하리라. 그러나 내가 법에 따라 너를 징계할 것이요, 결코 무죄한 자로만 여기지는 아니하리라.’”
무슨 말씀인가요? 우선, 이스라엘을 실패하게 한 모든 것을 멸망시키시겠다는 말씀입니다. 오직 이스라엘만을 위한 구원을 진행하시겠다는 말씀입니다. 이 얼마나 엄청난 구원입니까! 그런데 이 구원이 거룩한 구원인 이유는 “그러나 내가 법에 따라 너를 징계할 것이요, 결코 무죄한 자로만 여기지는 아니하리라.”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의지는 분명하십니다. ‘너희만은 멸하지 않으리라.’ 그러나 하나님의 구원이 거룩하신 이유는 ‘나는 너희가 죄 없다고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법대로 벌하였다고 하신 것입니다. 바빌론의 침공이 바로 하나님이 법대로 벌하신 것이고, 이것이 이스라엘의 실패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죄는 벌을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실패는 하나님의 처벌 중 하나입니다. 그렇다고 처벌로서의 실패가 하나님의 최종 의지는 아닙니다. 하나님의 최종 의지는 <구원>입니다. 이 구원은 모든 희망이 끊어진 상황에서의 ‘구원’이고, 모든 가능성이 사라진 상황에서의 ‘구원’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실패합니다. 그래도 괜찮습니다.>라는 외침은 배짱도 아니고 똥배짱도 아닙니다. 오히려 건강한 신앙고백입니다.
이렇게 건강한 신앙고백을 하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것은, 하나님만의 시간이 역사하시는 은혜입니다. 하나님만의 시간은 ‘카이로스’입니다. 인간의 역사인 크로노스에 개입하시는 카이로스, 바로 하나님의 시간입니다. 실패로 인해 모든 희망이 끊어진 상황에서, 그리고 모든 가능성이 사라진 상황에서 남은 것은 하나님의 시간뿐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시간만, 하나님의 손길만, 하나님의 구원만 남았을 뿐입니다. 바로 이때부터 진짜 은혜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하나님이 하나님의 일을 마음껏 하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 어떤 방해물도 다 제거된 상태이니, 모든 것이 하나님의 새창조에 돌입된 것입니다.
바로 이때가 은혜의 때입니다. 11절입니다. “이는 여호와의 말씀이라.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너를 구원할 것이라. 너를 흩었던 그 모든 이방을 내가 멸망시키리라. 그럴지라도 너만은 멸망시키지 아니하리라. 그러나 내가 법에 따라 너를 징계할 것이요, 결코 무죄한 자로만 여기지는 아니하리라.’” 이방 나라도 다 제거되고, 이스라엘도 굴복되었으니, 그 어떤 방해물도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시간만 남았을 뿐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은 역사(history)에 자유롭게 개입하시며 새창조를 이루어가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하나님의 일을 자유롭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구원의 역사입니다. “내가 너를... 구원하고... 구원하리니... 구원할 것이라”
그러니 우리가 이를 무엇이라 불러야 할까요? ‘은혜’입니다. 이러한 구원은 실패를 잊기 충분한 은혜입니다. 10절입니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그러므로 나의 종 야곱아,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이스라엘아, 놀라지 말라. 내가 너를 먼 곳으로부터 구원하고, 네 자손을 잡혀가 있는 땅에서 구원하리니, 야곱이 돌아와서 태평과 안락을 누릴 것이며, 두렵게 할 자가 없으리라.’”
구원은 은혜인데, 이 은혜가 또다시 은혜가 됩니다. 무엇 때문일까요? ‘태평과 안락을 누릴 것’이며, ‘두렵게 할 자가 없게 되는 것’ 때문입니다.
사실 우리의 실패가 이유를 모를 것도 있다지만, 그 이유가 하나님이 아닌 이상 내 문제, 내 죄의 문제일 수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은 이 실패를 끝이라고 결론을 내시지 않는 것입니다. 이 실패에서 오히려 구원의 역사, 새창조의 역사를 이루어 가십니다. 그리고 이제부터 더 이상 누구라도 두렵지 않게 하시고, 불안이 아닌 평화와 안정을 누리도록 하십니다. 그러니 이는 <은혜 위에 은혜>이지 않을까요?
■ 그렇습니다. <은혜 위에 은혜>입니다. 은혜 하나로는 이 엄청난 은혜를 표현하기가 부족하니 은혜 위에 은혜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실패합니다. 그래도 괜찮습니다.>라는 고백은 빈말일 수 없습니다. 배짱도 똥배짱도 아닌, 오롯이 믿음의 고백입니다.
바라기는 여러분 모두 <나는 실패합니다. 그래도 괜찮습니다.>라는 신앙고백으로 세상 앞에 당당하셨으면 좋겠습니다. 더 이상 실패에 주눅들지 않고, 성공에 우쭐대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우리의 실패는 주님의 새창조가 시작되는 은혜 위의 은혜입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