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망(法網)의 허점
임병식 rbs1144@daum.net
사람이 사용하는 말 중에는 어느 시기에 많이 유행한 말이 사라지기도 하지만 반대로 새로운 말이 생겨나기도 한다. 사라진 말 중에는 ‘어쭈’나 ‘잘 났어 정말’등이 있고, 신조어 중에는 ‘법꾸라지’라는 말이 있다.
법꾸라지는 미꾸라지처럼 법망을 교묘히 잘도 빠져나가는 것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다. 이것은 비속어로서 칭찬의 뜻으로 사용하는 말은 아니다. 비위에 거슬린 나머지 못 마땅히 여겨 눈 흘기며 하는 말이다.
그것은 어찌 보면 복잡한 세상살이에서 살아남기 위해 진화한 술수라고 할 수 있다. 그런 만큼 서글픈 측면이 있다. 옛날에는 법꾸라지가 없었다. 생각을 단순하게 가지고 살아가기도 했지만 사람들 자체가 원해 영악하지 않았다.
그래서 사람들이 집단을 이루고 살기는 별다른 통제나 규범을 만들지 않고서도 살아갔다. 그러다가 차츰 사람들 사이 이해충돌이 생겨나서 서구에서는 함무라비 법전이 나오고, 우리나라 고조선에서는 ‘8조 금법(八條禁法)이 시행되었다.
그렇지만 그것은 지극히 단순한 징벌조항이었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보복의 계념과 물건을 훔친 자에 대한 몇 곱절의 보상이 전부였다. 그것을 시행하는 과정에서도 대부분 순흥하고, 머리를 써서 법망을 빠져나가려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그런데 오늘날은 그렇지 않다. 사회가 복잡해지고 사람들의 지능도 높아 지다보니 그에 법망도 촘촘해졌지만 그것을 잘 빠져나가기도 한다.
근자에는 오히려 법을 역이용하거나 법을 우롱하는 경우도 목격한다. 그 일례로 최근 크게 이슈가 된 대형개발사업과 관련하여 거액의 뇌물을 수수를 일을 들 수 있다. 한 퇴직자가 6년 근무를 하고 거금 50억 원을 퇴직금을 받은 일까지 생겨난 것이다.
그는 고발을 당했으나 결과는 무혐의가 나왔다. 크게 세상을 흔들어 놓았지만 태산명동서일필(泰山鳴動鼠一匹)’이 되어 버렸다. 이를 두고 문제를 삼지 않을 수는 없었는지, 별건으로 입건은 했지만 결과는 쥐꼬리만하게 벌금을 부과하는 선에서 그쳤다.
국민의 법감정으로 볼 때 얼마나 웃기는 일인가. 그 결과를 보고 누가 수긍을 할까마는 그렇게 매조지가 되고 말았다. 이를 보고서 노회한 법꾸라지의 장단에 놀아난 결과라고 말하지 않는 사람은 드물 것이다. 왜냐하면 뇌물죄의 입증책임은 검사에게 있는데 그 그물이 허술하기 짝이 없어서 제대로 단죄를 못했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이렇게 술수를 부리는 법꾸라지들은 도처에서 활동한다. 그들이 주 무기로 삼거나 내세우는 방패막이는 몇 가지가 있다. 즉, ‘기억나지 않는다.’ ‘매뉴얼대로 했다.‘ ’그렇게 들었다.‘ 등등이 그것이다. 거기에다 법 자체 구성요건이 허술하여 눈앞에서 놓치는 범인도 많이 있다.
먼저 ‘기억에 없다’는 말은 다분히 치매성 면피 형에 속한다. 잠시 부족한 사람, 모자란 사람으로 비난을 받더라도 죄는 피하고 보자는 뻔뻔한 생각이 자리를 잡아 이를 적극 활용한다.
이렇게 심적으로 무장을 하고 작정을 하고 나오면 제아무리 ‘증언감정에 관한 법률’을 들이대도 책임을 물을 수가 없게 된다. 인지 능력이 작동하지 않아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데야 어찌할 도리가 없다. 흔하게 주변에서 목도하는 광경이다.
두 번째는 매뉴얼대로 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참으로 편리한 자기보호 수단이다. 각 지자체, 병원들에서 널리 활용되는 것인데, 이것 뒤에 숨으면 어지간한 것은 책임이 면해진다. 사람이 죽어도 가벼운 조치로 끝난다.
이것이 우스운 것은, 형사책임은 물론 징계책임을 따질 때도 매뉴얼대로 하지 않는 것이 문제가 되지, 그대로 적용했다면 면책이 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대저 누가 만든 것이며, 누가 권능을 부여한 것인가. 병원에서는 누가 보나 의료과실이 있어 보이는 데도 이 ‘매뉴얼대로 했다’고 하면 책임을 묻지 못한다.
그 다음 것으로는 ‘그렇게 들었다’는 것이 있다. 소위 그렇게 들었다는 ‘전문증거(傳聞證據)는 법에서 문제를 삼지 않는다. 이것을 안 사람들은 그 공간을 적극 활용한다. 남의 명예를 훼손시켜놓고도 ’내가 직접 보거나 본인에게 들은 게 아니고 누가 한 말을 들었다‘는 말로 법망을 빠져나간다.
이런 경우 말고도 법 조문자체가 허술한 구석이 있는 것도 있다. 최근에 알게 된 내용이다. 우리 형법은 ‘강간죄’를 가해자의 유형력행사로 한정하고 있다. 그래서 폭행이나 협박이 없는 상태에서 이루어진 것은 강간죄로 의율하지 못한다.
그러나 현 실태는 어떤가. 강간은 교묘한 방법과 수단에 의해 이루어진다. 어느 신문에서 발표한 보도에 따르면 국민 1만 명을 상대로 한 조사에서 직접 폭행협박을 당한 것은 9.8%에 지나지 않았다. 그 외의 교묘한 방법으로 당한 경우가 많았다. 상대를 믿게 하여 부비불식간에 저질은 구루밍 범죄가 많았다. 이에 따라 여성계에서는 ‘비동의 강간죄’도 동일하게 처벌하자는 논의가 활발해지고 있다.
합법을 가장해 저질러지는 범행을 막고자 함이다. 이렇듯 도처에서는 남을 속이면서 미꾸라지처럼 빠져나가는 일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난다. 이를 근본적으로 제재할 방법은 없을까.
죄를 부인하는 것은 자기 행위가 고의가 아니라고 부정하고 싶어서 한 것이지만, 옛날처럼 죄인을 불러 ‘네 죄는 네가 알렸다!’하고 마구잡이식으로 문초를 할 수 없는 세사에서는 다른 방법을 강구해야 하지 않을까 한다. 지은 죄가 확실해 보이는데도 빠져나가게 하는 것은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하여 생각할 때 불가에서 전하는 우치(愚痴)가 떠오른다.
탐욕, 진애와 함께 삼독(三毒)의 하나인 어리석음은 '모름'에 다름 아니다. 그런데 자칭 모른다고 부정하는 것은 그 어리석음을 가장하는 속에 숨어든 것이 아닌가. 이렇듯 행동하면서도 ‘몰랐다’ ‘기억이 안 난다’고 하는 행위를 어떻게 볼 것인가. 무턱대고 감싸주고 옹호만 할 것인가.
손쉽게 '모른다'는 방패막이 뒤에 숨어서 양심 따위는 헌 신짝처럼 내팽개친 가운데 무죄를 이끌어낸 신통방통한 판결소식을 접하면서 가슴 밑바닥으로 부터 밀려오는 허무감을 떨쳐버릴 수가 없다. (2023)
첫댓글 법꾸라지의 탄생 비결이네요
노회한 변호사의 재주? 검사의 봐주기 수사? 판사의 정실? 그것들의 복합적 산물일 수도 있겠군요 교묘하게 빠져나갔다기 보다는 교묘하게 빼내주었다는 표현이 더 적절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요즘 좀 답답합니다 죄 지은 자가 수사를 받아야 할 텐데 진술한 녹취록이 있는데도 당국의 입맛에 맞춰 수사를 하는 느낌이 영 찝찝합니다
법은 별로 빈틈이 없는데 유튜브 등 sns를 보면 수사의 그물코가 다르거나 터진 그물 아닌가하는 의심이 들기도 하네요
이번에 내려진 50억 관련 판결은 국민들의 가슴에 대못을 박는 일이 아닌가 합니다.
물론 뇌물죄의 입증책임이 검사에게 있기 때문에 검사의 수사가 부실하여 어쩔수 없다손 치더라도
모양내기 식으로 가벼운 다른죄를 벌금형 부과을 한 것은 속보이는 모양새가 아닌가 합니다.
신뢰가 무너지면 나라가 바로 설수가 없다고 했는데, 이런 판결은 국민의 신뢰를 떨어뜨릴 뿐 아니라
법을 비웃는 사태로 나아가지 않을까 심히 저어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