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3.06~07] 봄봄
봄비가 내린다 했다. 흠씬 맞아도 좋을 성 싶은 봄비라 했다. 이별의 애틋함이 이리 깊은줄 진즉 알았다면 서둘지 않을 것을. 이만하면 점순이가 키 크기를 기다리는 사내의 마음도 헤아리는 것이다. 입춘 지나고 경칩인 날에 지천에 꽃향 분분하건만 그 꽃도 모자란 듯 밤을 새워 하얀 눈꽃을 연신 피워내는 조화라니.
겨울의 주저는 두렵지 않으나 미처 제 길 놓쳐 봄햇살에 눈 녹듯 사그러들까 조마조마는 한 것이며 그러다 문득, 계곡의 졸졸 흐르는 물소리에 퍼뜩 정신을 차리지만.
한 치 앞만 허락된 자욱한 안개를 벗삼아 산에 든다. 먼 눈맛을 미룬 날엔 걸음에 집중하는 분명한 기쁨이 좋다.
애초 지리 중봉을 예정하였으나 궂은 날씨에 이도 미루고 비거나 혹은 눈이거나 봄의 시샘도 그저 달가울 곳에 들기로 한다. 영원사의 고즈넉도 좋을 것이며 상무주암의 적막도 좋을 것이다.
숲은 아직은 봄의 전령을 받아들일 심사 아닌 듯 회빛의 사뭇 신비한 기운이지만 그 너머 너머 잔뜩 움츠려 도약을 준비하는 파릇하고 화사한 빛깔의 질풍이란 대체 막을 방도가 있더란 말이냐.
차분하기만한 그러나 꽃들의 임박한 모의에 잔뜩 긴장한 숲길을 거닌다. 봄비에 촉촉히 젖은 나무며 잎새며 집중의 걸음을 기쁘게 한다.그렇다. 그저 그 안과 밖으로 걸어 가는 것만이 내가 할 일. 미혹하여 의심치 말고 걸음걸음 내놓을 일이다.
맑은 날이면 저기 저만치 지리 주능의 유장함이 심금을 울렸을텐데 자욱한 운무가 그만 꽃의 봄을 샘 하는 통에 어만 길손까지 난망이다.
잘 된 일인가도 싶다. 마침 동행의 생일이라니 잠시 움츠린 꽃도 새도 모두 불러 산상 생일파티를 한다.
비가 내린다. 차츰 젖어가는 심신이 사뭇 서글프다. 떠나는 사람의 뒷모습은 언제나 슬프다 했던가. 아니 어쩌면 그리 남겨진 자들이 슬픈 것인지도 모른다.
암자 정주석에 나무기둥이 두개다. 하나, 둘, 세개의 의미는 무의미하다. 툇마루 아래 가지런한 신발과 반쯤 열린 문의 기척도 소용없다. 막힌 정낭은 승속의 세와 계를 피아의 엄연함을 일갈할 뿐. 속인에게 들어서지 말라는 엄포인 줄 기실 아는 바이나 그럴수록 고개 길게 빼고 기웃한다. 모른 체 헛기침도 두어 번. 뭐라하실라. 이제 그만 똑똑 흐르는 물보시를 하고 뒤돌아 선다.
봄비 어쩌면 겨울눈. 밤이 길 것은 틀림이 없을 것이다. 고민 끝에 내려 놓은 책 한권이 아쉬워 산에 들기 전 부러 수소문하여 마실에서 책 한권을 빌렸다. 용궁다방 2층의 살림집 먼지 쌓인 책장 한 켠, 어렵사리 찾은 책 한권. 아무 책이나 몇권이건 집어가라, 도로 가져다 놓지 않아도 좋다 하였다.
고작 맥주 한 캔을 나눈 건배와 이런 저런 대화에 밤은 살금살금 깊고 눈발은 더욱 거칠다.
이윽고 혼자의 시간. 가만히 누워 책장을 넘긴다. 가나모리 우라코의 <참으로 마음이 따뜻해지는 책> 2000년에 출간된 책은 먼지 뿐 손 때 흔적 없다. 책은 '사랑'을 이야기하는데 나는 그만 몇 장을 채 넘기지 못하고 만다. 텐트에 닿는 눈 소리가 아득했던가 보다. 커피를 한잔 마시고 싶었나 보다. '상락(常樂)'하라 한 지인의 선물이 좋다. 그럴 수 없음을 잘 알기에 이 밤, 그 말 와닿음이 절절하다.
깊은 잠이었다. 어둑하여 몇 시인지 여명인지 분간이 안된다. 부시시 기지개 하여 시계를 보니 어언 일곱시다. 아직도 타닥타닥 바람눈 내리는 소리가 기운차다. 어떤 세상일까. 아름다운 은세계의 향연일테지. 입가에 미소하여 텐트 창을 연다.
오~ 실로 눈부시다. 새하얀 설국이 고개 내민 나를 보며 방싯 웃고 있다.
누구라도 항상 즐거울 수는 없는 법이지만 이 순간의 나는 즐겁다. 사방을 휘두른다. 여전한 구름세상에 보이는 것은 내 눈앞 뿐. 그러니 더욱 좋은 것이다. 소중한 것은 어쩌면 가장 가까이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저 길, 아무도 가지 않은 저 길을 품는다. 저 숲, 아무도 손짓 않은 저 숲을 품는다. 겨울의 혼신이 피워낸 은빛 세상을 품는다. 물러나 선선히 기다려 주는 봄의 처세를 품는다.
워메~ 존거. 너무 고와. 소녀들의 연신의 감탄에 한참을 동행하여 추억을 남겨드린다. 어쩌면 내가 만난 것은 지장보살의 화신일까. 꼭 닮은 자매는 그렇게 일바지 입은 걸음도 지팡이 짚고 선 모습도 닮았다.
아랫마을 산지 3년 되었다는 자매의 신설 여행의 다양하고도 옥타브 높은 행진은 내가 구태여 빌려 온 책을 몇 장 읽지 않은 값을 해낸 것인지도 모른다.
꿈과 같은 하루였다. 꽁꽁 언 짐 꾸리기가 번거롭다와 같은 투정은 그야말로 투정. 은세계에 들어 눈꽃 타고 내려선 지장보살의 화신도 알현하였으니
상락의 기쁨에 하루를 더한 셈.
미련 깊은 겨울숲을 걷는다. 그렇구나. 그랬어. 역시 봄이 온걸.
하얀 화장으로 감춘들 졸졸 온통 아우성인 봄인걸.
가만히 바라보는 시선은 설레는 춘흥이요 봄과의 무언의 대화는 차분한 시심이다. 게다가 흐르는 것은 화사한 춘색이요 졸졸졸 소리는 포은(圃隱)의 서정이다. 봄비 가늘어 방울을 짓지 못하니 한밤에야 희미한 소리 들린다. 눈 녹아 남쪽 개울물 불어나리니 풀싹은 얼마나 돋아나겠나.
저 돌다리 건너면 봄. 봄봄.*******어느 도보여행자의 봄의 노래를 들은 참이다. 그 봄의 노래가 내게도 어렴풋히 닿아 뭉클한 참이다. 길 위에서 희망을 만나고 천국을 만난 사람. 시한부 삶 선고에 살아 있음을 증명하기 위해 여행을 떠난 사람. 코 끝 찡한 공감으로 동행한 말기암 환자 쿠르트 파이페의 166일 3350km의 여정인 <천천히 걸어, 희망으로>에 박수를 보낸다. 그는 비에 젖은 텐트와 축축한 침낭속이 병원 침대 보다 천만번 낫다고 했다. 걸을 수만 있다면 길을 잃어도 좋다고도 했다. 마침내 마음이 가벼워 졌다. 한없이 행복했다. 도착했다. 그가 남긴 책의 마지막 세문장을 도렷하게 마음에 새긴다. 하얀 설국의 봄봄. 나는 그렇게 봄을 만났다. Blueprints Of The Heart / David London 이상 행복팍팍 사랑팍팍 팬다
첫댓글 일곱분 동행에 야영은 주량 약한 3명 맥주 3캔... 그나마 2캔은 도로 가져온 봄맞이였습니다. 그래도 텐트를 연신 노크하는 잦눈 소리에 잠도 깊었네요. 모두에게 졸졸졸 흐르는 봄소리 전해드려 기쁩니더!!!
팬다님 후기는 시를 읽는거같습니다..사진도 좋구요..이래저래
과찬입니다. 따시게 봄 맞으세요^^
근데 전 왜 갑자기 알꽉찬 '봄쭈꾸미'가 먹구싶어지는것이져 ㅋ
실은 동행의 생일상 팬에 끓고 있는 것이 쭈구미입니다. 봄쭈구미라니 맛도 참 좋았네요^^
몸빼바지 소녀(^^)들의 톤높은 웃음소리가 이곳 모니터까지 전해지는 듯 하네요.
늘 잔잔한 후기로, 요즘 산에 들지 못하는 제 마음을 헤집어 놓으시는군요.ㅠ
마치 점순이의,무럭무럭 자라지 않고 감참외처럼 모로만 벌어지는 몸을 지켜보는 듯 답다~압 합니다..
멋진 산행 부러워요~
정말이지 얼마나 순수하고도 순수하게 환호고 감탄하던지요. 답답함이 얼른 나아지길 기원합니다^^
아.. 겨울속에서도 봄을 보셨군요..
좋은글.. 사진.. 너무나 잘 어울리는 음악..
잘 보고 갑니다.. 늘 그렇듯이.. ^^;
보는 내내 왜.. 눈물이 나는지..
봄속 겨울이라면 어떨까 싶어요^^ 즐거운 3월 되세요~
찡하디 찡한 여운이 오늘 날씨탓에 마음 속 오랫동안 머물듯 합니다.
7암자코스를 두어번 걸었지만 탈이 생기고 하여 이제는 그 길을 밟는다는게 두렵습니다.
가끔 도솔암이 가고 싶을땐 도솔암을 가고 영원사를 가고 싶으면 영원사를 갈 뿐이죠.
그 길을 걸을 때 길 위에서 만난 거사님과 영산 지리산에 대해 짧게 나눈 대화를 아직도 잊지 못하겠습니다.
그게 좋지 싶습니더. 칠암자라 이름되었으나 그 뿐, 꼭 한번에 돌아야할 이유도 없는 셈이지요. 산비장이님 어르신 건강은 그만하신지....
팬다님의 글을 읽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정화되는 느낌입니다 ^^ 좋은 글, 다시한번 감사드립니다~
과찬입니다. 감상만 주저리... 고맙습니다^^
설국의 봄.. 감동입니다^^
봄에 올랐더니 겨울이더만요. 그런 날도 기쁘네요^^
"꽃들의 임박한 모의에 잔뜩 긴장한 숲길.." ^^
봄비에 젖은 대지의 대음.. 숲내음이 그리운 오후입니다..
숲내음 ... 가만히 기울이면 들리는 듯 합니더~~~
자매분들 얼굴은 "소녀"맞으십니다.정말 해맑은 모습니시네요.정말 봄과 겨울을 넘나드셨군요.좋은 산행하셨습니다.
자매분들의 그 엄청난 기쁨을 고스란히 전할 수 없어 아쉬울 밖입니더^^
글을 잃고나니 마음이 편안해져요. 감사히 잘 보았습니다.
고맙습니다. 건강한 춘삼월 되세요^^
와~ 넘 멋지네요.. 감동먹엇습니다.....^^*
별 것 아닌 것인데 봄 기운 속 겨울인지라 그런가 봅니다. 고맙습니다~~~
현재 강원도에 눈이 펑펑내리고있습니다...늘 뵙지만 내가 그자리에 같이 가있는것같네요 즐감^^*
눈이라니 반갑기도 하지만 너무 많이 내리니 걱정입니다~~~~
언뜻 팀 버튼 영화의 한장면이 연상되는 장면이 보입니다....^^
봄이지만 눈이 내리는.... 눈속에 봄을 보는 참 아름다운 모습들입니다.
그런가요^^ 여튼 봄인 것은 확실합니더~~~
팬다님 너무 멋쟁이~ 세째주에 산정에서 봅시다.
허걱~ 우째 예서^^; 반갑습니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