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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두서 ‘자화상’과 카뮈 ‘시지프의 신화’
누구나 성장 과정에서 한두 번쯤은 일기를 써본 경험이 있을 것이다. 초등학생 시절에는 그저 하루 있었던 일을 정리하는 수준이었을 것이다. 그러다가 철이 들고 무언가 삶에 대해 고민을 할 나이가 되면 그때는 일기를 쓴다는 게 힘든 일이 된다. 단지 시간의 부족 문제가 아니라 일기라는 형식의 글을 쓰는 것 자체가 적지 않은 부담으로 다가온다. 조금씩 철이 들면서 자신과 정면으로 마주하는 행위가 얼마나 힘든 일인가를 깨닫게 되기 때문이다.
화가에게 자화상은 일종의 일기와 같다. 단지 반복적으로 자신의 ‘형태’를 그리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내면을 응시하는 작업이다. 내면을 드러내고자 하는 의도를 갖고 있는가 아닌가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화가 자신은 그러한 의도를 전혀 갖고 있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일단 자화상을 그리는 과정에서 자기도 모르게 그림 속의 표정과 눈빛을 통해 내면이 드러나게 마련이다. 고흐는 극심한 가난 때문에 모델을 구하기가 마땅치가 않아 어쩔 수 없이 자화상을 많이 그렸다고 한다. 하지만 고흐의 자화상에서 우리는 모델이 없어서 어쩔 수 없이 그린 ‘형태’가 아니라 화가의 내면을 마주하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자화상은 그림을 감상하는 사람들에게 또 다른 묘미를 전해 준다.
한국을 대표하는 자화상으로 윤두서의 그림을 꼽는 데 주저할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18세기 초 조선 시대 선비 화가인 그의 자화상은 우리 회화사 최고의 걸작으로 손꼽히기도 한다. 더 나아가서 동양인의 자화상 중 최고라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이 그림은 현재 국보로 지정되어 있다.
제일 먼저 우리의 눈길을 사로잡는 것은 강렬한 기를 내뿜는 그의 눈빛이다. 일차적으로 눈썹이나 눈의 모양이 호랑이 상이어서 보는 이를 섬뜩하게 만들 정도로 안광을 뿜어낸다. 하지만 여기에 더해 마치 살아 있는 것같이 세세하고 생생한 묘사가 한층 더 강렬한 기운을 만들어 낸다. 보통 눈동자를 전체적으로 검게 처리하지만 자세히 보면 윤두서는 동공과 홍채를 구별하여 그리고 있다. 심지어 홍채의 가는 결까지 보이는 듯하다. 다음으로 그림 앞에 선 사람을 순식간에 긴장시키는 게 수염이다. 장비처럼 사방 팔방으로 뻗쳐 있는 구레나룻, 턱수염, 눈썹, 콧수염을 한 올이라도 놓칠세라 정성스럽게 그려 놓았다. 수염이 방사형으로 뻗어나가듯이 펼쳐져 있어 더욱 강한 기운을 만들어 낸다. 입술은 허튼소리는 한마디도 하지 않을 듯이 꽉 다물고 있다. 이 모든 요소가 한데 모여 강렬한 인상을 뿜어내고 있는 것이다.
언뜻 보기에 확고한 신념과 불굴의 의지로 가득 차 보이는 자화상이지만 정작 윤두서 자신은 조선 시대의 치열한 당쟁 속에서 모진 고초를 당했다. 특히 윤두서가 이 자화상을 그리고 있었을 시기는 그에게 온갖 어려움이 겹겹이 쌓여 있을 때였다. 이 그림은 윤두서가 46세인 1713년쯤에 그려졌다. 그즈음 서울 생활을 청산하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는 26세에 진사시에 합격한 이후 줄곧 불행한 일을 겪었다. 남인에 속했기 때문에 서인과의 극심한 당쟁에서 정치적으로 소외될 수밖에 없었다. 셋째 형 윤종서가 귀양 중에 사망했고, 윤두서 자신도 큰형 윤창서와 함께 모함에 연루돼 죽을 고생을 했다. 온갖 풍파에 시달리다 출세의 뜻을 꺾고 고향으로 내려온 터였다.
그래서인가 강인한 인상 뒤로 언뜻 쓸쓸함이 스친다. 우리가 윤두서의 삶을 이미 알고 있는 상태에서 그림을 보기 때문일까? 쓸쓸함과 고독이 언뜻 비추어지기는 했을지언정 자화상에서 절망이나 동요의 그림자는 전혀 찾아볼 수 없다. 자신의 삶을 뒤돌아보면서 눈빛이 흐려진 기억이라고는 조금도 없었을 것 같은 완강한 인상이다. 실제로 그는 자기 절제와 극기에 있어서 남다른 의지력의 소유자였다고 한다. 자존심이 강했고 그림에서도 숨김없이 드러나듯 성격적으로 치밀했다고 한다. 여기에 조선 시대 사대부의 엄숙함까지 더해 한 치의 흔들림도 없는 인상을 만들어 내고 있는 게 아닐까 싶다. 그리고 화가 스스로도 의식적으로 당당한 모습을 그대로 표현하고자 했던 것 같다.
한국 회화에서 윤두서를 꼽듯이 서양 회화에서 자화상으로 유명한 화가는 단연 렘브란트(Harmensz van Rijn Rembrandt)이다. 근대 서양 회화에서 자화상은 너무나 익숙한 주제였다. 많은 화가들 중에서도 렘브란트만큼 많은 자화상을 그린 이는 없을 것이다. 렘브란트가 그린 자화상만 약 100여 점에 이를 정도이다. 그의 수많은 자화상 중에서도 단연 눈길을 잡아끄는 것은 〈웃는 자화상〉 또는 〈쾰른 자화상〉이라고 불리는 그림이다.
그림을 보면 먼저 너무나 선명한 주름이 보인다. 이마 위나 눈가의 주름은 고목의 나이테처럼 켜켜이 박혀 있다. 주름 사이로 총기를 잃은 눈이 마치 또 하나의 주름인 것처럼 뚫려 있다. 거무튀튀해진 눈가의 그늘은 고통스럽게 인생의 황혼기를 보내고 있는 화가의 그늘을 보여 준다. 칠했다고 말하기보다는 덕지덕지 붙였다고 해야 어울릴 것 같은 물감의 각질층은 수분이 거의 말라 버린 노인의 거친 피부를 그대로 보여 주는 듯하다. 구부정한 허리를 느끼게 하는 굽은 몸은 화가가 이즈음 거동이 불편했으리라는 예상을 하게 만든다. 웃는 것인지 우는 것인지 모를 어정쩡한 입 모양은 자신감을 상실한 노인의 감정을 드러내 보인다.
이에 비해 청년기의 렘브란트 자화상은 자신감에 가득 찬 도전적인 모습이다. 눈빛도 캔버스를 꿰뚫을 것처럼 초롱초롱하다. 활기찬 인생을 즐기는 듯 활짝 웃는 모습의 자화상도 있다. 장년기의 자화상은 완숙한 장인의 기품을 느끼게 한다. 성공한 화가로서의 거만함까지 느껴질 정도로 꼿꼿한 이미지를 보여 준다. 아무도 넘볼 수 없는 자신의 위상을 자화상을 통해 확인시키려는 듯하다.
하지만 노년기의 자화상, 그중에서도 특히〈웃는 자화상>은 몸도 마음도 푸석푸석해져서 손을 갖다 대면 부스러기처럼 바스라질 것 같은 느낌으로 다가온다. 실제로 1660년대 이후 렘브란트의 말년은 비참했다. 엄청난 빚더미에 시달리다가 가난한 장인들의 거주 지역에 있는 작은 집에서 죽는 날까지 파산자로 살았다. 1663년, 유럽을 휩쓴 흑사병으로 부인과 아들이 죽음을 맞이한 이후에는 심한 우울증에도 시달려야 했다. 그리고 남은 몇 년은 극도로 쪼들리는 생활 속에서 그림을 그리다 1669년에 세상을 떠났다.
렘브란트는 〈죽은 아내를 그리며 쓴 편지〉에서 이렇게 말했다.
“글쎄, 내가 채권자들에게 빚을 독촉받고 있는 지금의 상황 때문인지는 몰라도, 젊은 날의 야망을 꿈꾸던 내가 아니오. 이제는 보다 조용한 분위기로 귀결되는 나의 그림을 보며 스스로 마음의 평안을 얻고자 하오. 예전의 카라바지오나 루벤스의 영향을 수용하는 자세를 폐기하고 깊은 나만의 사색을 통해 작품을 제작한다오. 내가 젊었을 때에는 명성을 갈구했소. ··· 외부적인 경제 환경이 어려우면 어려울수록 나의 정신적 성숙과 표현의 힘은 날로 더해지는 것 같소. 이러한 상황 속에서 좌절하기보다 회화적으로 소생하려고 발버둥치고 있는 것이오.”
윤두서와 렘브란트는 적어도 외적으로는 절망적인 상황 속에 있는 자신의 모습을 자화상의 형식으로 그렸다는 점에서 비슷하다. 하지만 두 개의 자화상이 주는 느낌은 아주 다르다. 당당함과 초라함이 극적으로 대비되었다. 위축되고 초라해 보이는 렘브란트보다는 자신감에 가득 차 있는 윤두서의 자화상에 더 호감을 느끼는 사람들이 많을 것 같다. 하지만 찌들대로 찌든 렘브란트의 자화상도 사람의 마음을 끄는 매력이 있다.
클림트(Gustav Klimt)의 제자이자 표현주의의 대가 중 한 사람인 오스카 코코슈카(Oskar Kokoschka)는 렘브란트의 〈웃는 자화상〉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나는 렘브란트의 마지막 자화상을 보았다. 추하고 부서진, 소름끼치며 절망적인, 그러나 그토록 멋지게 그려진 그림을. 그리고 갑자기 나는 깨달았다. 거울 속에서 사라지는 자신을 들여다볼 수 있다는 것, 스스로를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그릴 수 있다는 것, 인간임을 부정하는 것. 이 얼마나 놀라운 기적인가, 상징인가?”
렘브란트의 〈웃는 자화상〉에 대해 많은 화가와 미술 평론가들이 감상평을 내놓았지만 코코슈카만큼 강한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글은 없다. 그가 본 그대로 외면적으로는 “추하고 부서진, 소름끼치며 절망적인” 렘브란트의 모습이 느껴진다. 하지만 그 그림이 다른 누군가가 렘브란트의 모습을 그린 작품이거나, 그림이 아닌 사진이었다면 우린 이와 같은 느낌을 받지 못했을 것이다. 자화상은 자신에 대한 일기이자 자서전이다. 누구나 자서전은 꾸미고 싶어 한다. 어느 정도 반성적인 모습이 나타나겠지만 일반적으로 부끄러운 내면을 타인에게 알몸 그대로 드러내고 싶어 하지는 않는다. 그래서 반성에 대한 변명이 뒤따르게 마련이고 전체적으로는 자신에 대해 사람들의 이해를 구하는 쪽으로 가곤 한다.
차라리 고흐처럼 광기로 자신의 일그러진 모습을 그대로 드러내는 것이라면 조금은 더 수월할지 모르겠다. 광기는 타인의 시선을 두려워하거나 그것에서 제한을 받기보다는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자신을 폭발적으로 드러내는 특징을 그 자체에 갖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성이나 감성은 강한 자기 보호 본능을 갖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의 초라한 모습을 숨김없이 솔직하게 만인 앞에 드러내기 위해서는 오히려 용기가 있어야 한다. 현재의 자신을 회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마주 대하는 용기 말이다. 그래서 “이 얼마나 놀라운 기적인가, 상징인가?”라고 했던 코코슈카처럼 찌들 대로 찌든 렘브란트의 초라함 속에서, 당당함을 볼 수 있는 것이다.
아내의 죽음을 볼 때도 자신에게 엄습해 오는 죽음을 느끼면서 진솔하게 스스로를 돌아볼 수 있었던 것이다. 죽음이 두려운 만큼 인간은 그 앞에서 가장 솔직해질 것이기 때문이다. 카뮈(Albert Camus)가 죽음을 통해 진정한 철학적 성찰을 강조했듯이 말이다. 카뮈는 《시지프의 신화》에서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참으로 진지한 철학적 문제는 오직 한 가지뿐이다. 그것은 자살이다. 인생이 살 만한 가치가 있느냐 없느냐를 판단하는 것, 이것이 철학의 근본 문제에 답하는 것이다. 그 나머지의 것, 세계가 세 개의 차원을 가지고 있는가, 정신이 아홉 아니면 열두 개의 범주를 가지고 있는가 하는 것은 다음의 일이다. 그것은 장난이다. ··· 인생이 살 만한 가치가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죽어 가는 것을 나는 본다. 그중에는 그들에게 살아가는 이유를 부여해 주고 있는 관념이나 환상을 위해 역설적으로 자진해서 죽음을 구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래서 삶의 의미란 많은 문제 중에서 가장 절박한 것이라고 나는 판단한다. ···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나날의 삶에 있어서는 시간이 우리를 싣고 간다. 그러나 그 시간을 싣고 가야 할 그러한 순간은 언제나 오게 마련이다. 우리는 미래를 향해 살고 있다. ‘내일’ ‘좀 더 후에’ ‘네가 어떤 위치를 차지하게 될 때’ ‘나이가 들면 이해할 수 있을 거다’ 하며. 이러한 모순은 감탄할 만하다. 결국에 가서는 죽는다는 것이 문제가 되기 때문이다.
카뮈는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그러한 자살이 아닌 철학적인 차원에서 자살의 문제를 검토하고 있다. ‘인생이 살 만한 가치가 있느냐 없느냐’에 대해서 고민하는 것, 이게 바로 자살, 즉 죽음에 대한 사고라는 지적이다. 사람들은 살아가면서 자신의 죽음에 대한 질문을 던지는 경우가 거의 없다. 그냥 주어진 일상에 쫓겨서 하루하루를 이어 간다. 일상의 삶만이 지배하는 상태에서 철학적인 고민과 철학적인 삶은 끼어들 자리조차 없을 게 뻔하다. 철학은 그렇게 앞을 향해 달려가는 것밖에 모르는 삶을 잠시 멈추고 자기 삶의 의미와 가치에 대해 되돌아볼 때 시작된다는 의미이다.
자신의 죽음에 대한 고민은 기계적인 반복 행위만이 있는 일상의 삶에서 벗어나 ‘생각하기 시작’함을 의미한다. 아주 작은 출발일 수 있지만 자기 인생에 대해 근본적으로 고민하기 시작하는 것이 진정으로 소중하고 이러한 사고의 끈을 부여잡고 깊이 파고들어가야 한다는 얘기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또한 죽음을 생각한다는 것은 철학의 입구라는 주장이다.
렘브란트도 죽음 자체에 대해 아무런 생각이 없었던 때에는 미래에 대한 희망과 열망으로 가득 차 있었을 것이다. 오늘의 하루하루가 내일의 행복을 준비하는 시간이라 여겼을 것이다. 자신감으로 가득한 젊은 시절의 자화상들이 이를 잘 보여 준다. 카뮈가 지적했듯이 렘브란트도 ‘내일’을 위해, ‘좀 더 후에’는 더 나은 미래가 기다린다는 기대감으로 살았을 것이다. 하지만 시간의 흐름 속에서 나이를 먹어 가고 신체적으로 하루하루 늙어 가고, 그리하여 죽음을 눈앞에 두었을 때 렘브란트는 불현듯 자신의 존재가 유한하다는 사실을 현실로서 깨닫고 누구나 그러하듯이 허둥댔을 것이다. 고통스러운 시간이 흐르고 죽음에 대한 성찰이 깊어질 때 초라한 자신의 모습까지도 덤덤하게 인정하고, 그러한 자신을 고스란히 자화상으로 드러낼 수 있었던 게 아닐까.
모래를 손에 가득 쥐고 강하게 힘을 주면 줄수록 모래는 더 빠르게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간다. 그리고 결국 허전하게 빈손만 남는다. 손을 느슨하게 펼쳐야, 손에 빈 공간이 있어야 모래를 쥘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빈 공간은 단순히 비어 있는 게 아니다. 가득 찰 준비를 하고 있는 의미 있는 공간이다. 인간의 마음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비어 있을 때 채울 수 있다. 스스로 부끄러울 수 있을 때 당당할 수 있다. 스스로 초라해질 수 있을 때 새로운 도약도 가능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