헉헉! 숨이 턱 밑까지 차올랐다. 너무 고된 나날, 내 삶에 쉼표가 필요했다. ‘인생이라는 승부가 힘들 때 작전타임을 갖는 게 여행이다.’라는 서울역 출입구 벽에 내걸린 문구가 떠 올랐다. 일에 지치고 사람에 시달린 내 몸뚱이와 마음 뉠 곳이 절절했다. 무작정 상경을 했다. 아들을 찾아갔다. 그는 지난봄에 군 제대한 대학 4학년 복학생이다. 졸업과 취업, 제 앞 감당하기에도 버거울 녀석의 처지를 헤아리는 것은 뒷전이었다. 잠시 순간만이라도 아들의 위로를 받고 싶었다.
이른 시각, 서울역 대합실에서 만난 아들은 말없이 나를 꼭 안아주었다. 비누 냄새가 물씬 나는 녀석의 가슴팍이 그렇게 넓을 수가 없었다. 나를 자취방으로 데리고 간 아들은 지친 어미를 일단 재웠다. 두어 시간쯤 단잠을 잤다. 아들이 좋아하는 계란찜이라도 해서 따뜻한 집 밥을 먹여야 한다는 생각에 눈을 뜨니, 아들이 서울은 이미 아침밥 외식 문화가 정착되었다면서 바깥 밥을 먹자고 했다. 곤히 등걸잠 자는 어미 모습에서 고단을 읽었나 보다. 어미의 수고를 덜어주는 녀석이 대견스러워 못이기는 척 따라나섰다
저들이 힘들고 지칠 때 쉼터가 되어야 할 곳이 부모인데…, 오히려 내가 더 지쳐 있었으니, ‘그래 오늘은 내가 너에게 기대 마.’ 아들이 하자는 대로 했다. 늦은 아침 식사 후 테크아웃 커피 한잔을 들고 자취방으로 다시 왔다. 녀석은 침상을 가리키며 더 쉬라는 말만 되풀이했다. 하지만, 아들의 위로를 받고 마냥 머물 수만은 없었다. 내가 저질러놓은 일터가 걱정되었다.
서울역까지 배웅 나온 녀석이 자리를 잡아 주고 가방을 얹어 주더니 가만히 나를 안아 주었다. ‘엄마 제 걱정 마세요. 제가 잘 할게요’라는 무언의 약속이었을까. ‘엄마 고생이 많아요. 조금만 더 기다리세요.’ 하는 위로의 인사였을까?
돌아오는 기차 안에서 하염없이 눈물이 흘렀다. 회한과 그리움이 밀물처럼 밀려들었다. 바깥일을 한다는 핑계로 옳게 챙겨 주지도 못했던 아들이었다.
그즈음, 덩치가 제법 큰 어린이집 하나를 인수한 게 사건의 시발이 되고 말았다. 앞뒤 사정도 재보지 않았다. 겉 번지르르하니 속 곪은 줄 몰랐다. 남편의 퇴직이 가까워져 온다는 강박감이 덜컹 사고를 치게 한 것이었다. 돌아보면 모든 것이 나의 덤벙대는 성격, 우매한 소견 탓이었다. 그만한 것을 담을 그릇이 못 되었다. 관리자로서 인품도 역량도 갖추지 못했었던 것 같다. 시작부터 힘에 겨웠다. 머리 따로 손 따로 움직였다. 몸에 맞지 않은 옷을 입으니 태(態)는커녕 웃음거리가 되는 듯했다. 넘어지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썼지만 역부족이었다. 연이어 터지는 예기치 못한 사건 사고, 해결의 실마리를 찾을 수가 없었다. 무장무장 끝 모르는 블랙홀 같은 것에 빨려 들어가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매스컴에서는 이곳저곳 어린이집 비리가 연일 보도 되고 있었다. 우리라고 예외는 아니었다. 전임자가 저질러 놓은 것 수습하느라 행정관서 문을 드나들고 학부모를 만나는 일에 신물이 날 정도였다. 몸도 마음도 지쳐 나락의 문턱에서 아들의 취업 최종 합격 소식은 막혀있던 숨구멍이 터지는 것 같았다. 첫 출근을 하던 날 “엄마 이제 일 그만 하세요.”란 말에 또 한 번 눈물을 쏟았다.
남편 명퇴를 이태 앞둔 때였다. 남편은 퇴직이 다가오자 인생 이모작을 노란 버스 운전기사로 남길 원했었다. 가장 어긋난 퍼즐, 고개가 절로 저어졌다. 사람들은 나를 원장이라 부를 것이고 남편은 운전기사? 상상도 하기 싫은 조합, 이때다 싶었다. 시작도 그랬지만, 그만둔 것도 순식간이었다.
어정쩡하게 집으로 돌아온 중년여성을 안아줄 곳은 아무 데도 없었다. 친구들은 이미 짜인 자기 일정에 맞추어서 잘살고 있었다. 평소 일과 가사를 핑계로 챙기지 않았던 친구들이라 그들 사이에 나는 이방인이었다. 아픔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갱년기 증세와 더불어 엄습해온 섬유근육통은 내일 삶을 예측할 수가 없었다. 불행은 꼬리에 꼬리를 물 듯 이어졌다. 어느 날 야외에 나갔다가 조그마한 내(川)를 건너면서 생각하기도 뭐한 끔찍한 일이 벌어졌다. 징검돌 위를 딛는 순간 다리에 힘이 풀리는가 하더니 두 발짝도 내딛지 못하고 앞으로 고꾸라지고 말았다.
무릎뼈가 깨어지는 큰 사고, 구급차를 타고 응급실로 실려 갔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치료하던 병원의 실수로 상처가 덧나 장기간 병원 신세를 지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이런 아픔을 아들에게는 알리지도 못했다. 서너 달이 지나고 연말 휴가를 얻어 내려 온 아들이 절룩이는 어미를 보고는 깜짝 놀랐다.
‘아무 일 없다. 어머니는 건강하다’라는 듯 저녁 산책 겸 아들을 데리고 인근 운동장으로 갔다. 녀석은 철봉이며 평행봉 기구 운동을 하고 나는 언 땅을 맨발로 걸었다. 무탈함을 보여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아들이 지켜보고 있어서일까. 평소보다 훨씬 걸음이 가벼웠다. 늘 제자리에서 운동장 한 모퉁이를 지키고 서 있는 늙은 목련 나무는 다 알고 있다는 듯 오늘따라 더 늠름해 보였다. 살을 에는 추위 속에도 봄 채비를 하느라 분주히 아홉 장 꽃잎 접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우리 모자는 달빛 아래서 서로의 몸동작에 열중하고 있었지만, 마음은 각자의 자리를 잘 지키겠다는 무언의 약속을 하고 있었다.
“엄마! 왜 이런 추운 날까지 걸으세요. 발 시리지 않으세요?”
“응, 너희에게 짐이 되지 않으려고”
“아!”
웃는 아들 녀석의 입안에서 하얀 덧니 하나가 달빛에 반짝이고 있었다. 동짓달 밤바람이 하나도 차갑지가 않았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내내 열여드레 밤 환한 달빛이 우리 모자를 포근히 안아주고 있었다.
녀석은 이튿날 차에 오르기 전 엉거주춤 서 있는 나를 또 말없이 안아주었다.
어떤 비타민이 그보다 더 효험이 있을까? 나는 그때부터 매일 맨발걷기를 하고 단잠을 잤다. 갱년기 졸업을 했다. 졸업장속의 직인은 아들의 포옹이었다.
첫댓글 아이구야 세상의 여인들이
겪는 일을 서선생도 피하진
못했구려. 그래도 최고의
명약인 아들의 포옹이 있는데 뭔 걱정을...
맨발의 청춘인 그대여
오래도록 건강하게 잘 지내시기를...ㅎ
네, 선생님 무얼 꾸준히 해 본적이 없었습니다.
맨발걷기는 중독성이 있네요.
이제 186일 째
오늘은 해인사 소리길을 갑니다.
남평 선생님도 인근 운동장 걷기를 한 번 시도해 보셔요.
학산운동장에는 날마다 걷는이가 늘어나고 있습니다,
'아들' 과 '포옹'.
이걸 이해하는 독자가 얼마나 될 지 갑자기 궁금합니다.
따로 혹은 함께인 두 단어가 모든 엄마들의 로망인 것을요.
좋은 아들을 두셨습니다요. 굿!
회장님의 아들에 비하겠습니까만,
제게 과분한 녀석이지요.
너무 일찍 집을 떠나 있어서 늘 짠합니다.
함께 있을 때도 일을 한다는 핑계로 살갑게 챙기지도 못했습니다.
행여 제 글쪼가리가 책으로 만들어질까 싶어
녀석에게 보너스를 준다는 생각으로 한 편 써 봤습니다.
응원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