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엠마오로 가는 길에서 (2016.01.18.)
추천사
엠마오 여정의 감동과 기쁨
우리가 기도하고 전례에 참석하고 성경을 읽는 것도 궁극적으로는 우리 삶의 모습이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과 같아지기 위함입니다.
2006.8.20. 전 부산교구장 고 정명주 주교
서문
엠마오로 가는 길에서
여기에 수록된 153편의 글은 필자가 캐나다에서 교포 사목을 하던 시절인 2003년부터 2006년까지 일주일에 한 번씩 미주 평화신문에 연재했던 칼럼을 모아 엮은 것입니다.
제1장 예수님께 그들에게 다가가서 나란히 걸어가셨다(루카 24,15)
내가 대신해서 죽겠소!
사실 그리스도인은 세례성사를 받으며 이미 죽기로 작정한 사람입니다. 즉 세상에 대해 죽고, 내 육체에 대해 죽고, 자신에 대해 죽기로 약속한 사람들입니다. 바보처럼 죽어 있으면 그곳은 평화와 사랑으로 충만해집니다. 자기만 살려고 하는 자는 반드시 남을 죽이고, 자기를 죽이는 자는 주위 사람들을 살립니다.
어떻게 처리하실 겁니까?
참회와 성찰과 고해를 가까이 한다면 천사의 찬송가가 울려 퍼질 것이다.
뉘우치고 다시 왔습니다!
참된 공동체는 상대의 불신과 배신까지도 참아 받습니다. 그럼으로써 서로를 의지하며 함께 더불어 살아갑니다. 혼자서는 결코 갈 수 없는 곳이 있으니 그곳이 바로 천국입니다.
몇 알씩 흘려주지요!
작은 죄들이 비록 하찮아 보여도 언젠가는 죽음에 이르게 합니다. 처음에는 사소한 것에 불과한 작은 죄가 계속 쌓이면 마귀가 삶 전체를 지배하게 됩니다. 침묵 속에서 하느님의 말씀과 양심의 소리에 귀기울이면 무엇을 해야 할지 알게 될 것입니다. 기도와 성경의 콩, 선행과 겸손의 콩, 용서와 사랑의 콩을 쫓아 가십시오.
능률이 오르지 않습니다!
기도하며 일하라. 기도하지 않는 자는 숨을 곳을 찾아 땅을 파는 두더지와 같다.
버릴 줄 알았던 자
예수님의 제자에서부터 오늘날의 성인에 이르기까지 그들은 모두 세상의 거짓 행복을 버렸습니다. 죽음과 멸망의 길 대신 생명과 구원의 길을 찾아 나섰던 것입니다.
나는 그리스도를 위해 모든 것을 잃었고 그것들을 쓰레기로 여기고 있습니다.(필리3,8)
등대라 부른다네!
성경에 의하면 죽을 각오로 뛰어든 이들은 한결같이 구원을 얻었습니다.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내 모든 것을 드러낼 때 구원의 빛줄기가 쏟아집니다.
저것이 성인인가?
외적 행위는 그 안에 담긴 근본정신을 구현해야 제 기능을 다하는 것입니다. 격식을 갖춘 선심 해위 자체가 아니라 취지와 목적을 추구해야 합니다. 형식만 있고 내용이 없다면 그의 신앙은 뇌사상태와 다름없습니다.
“삐뚤어질 수가 없지!”
하느님의 말씀과 교회의 가르침이 우리 삶의 수준기란다. 그것을 기준으로 삼으면 영혼이 삐뚤어질 수가 없지!
성경과 성전이야말로 우리 인생의 방향타요 영생의 비결입니다.
어서 나가거라!
부활의 희망을 지닌 이에게 죽음은 영원한 생명으로 통하는 문입니다.
여관과 다를 바가 없지 않습니까?
교황 요한 23세는 어느 날이든 태어나기 딱 좋은 날이고 어느 날이든 죽기 딱 좋은 날이라 했습니다. 그는 세상에 아무런 애착도 없었기에 죽음 앞에서도 자유로웠던 것입니다.
어서 치도록 하여라!
만일 그분께 똑같은 사랑으로 응답하지 않는다면 그는 자신을 단순히 지배받아야 하는 대상으로 전락시켜버리는 꼴이 될 것입니다.
그토록 무서웠던가?
우리는, 육신은 죽여도 영혼은 죽이지 못하는 이들을 두려워 말고, 영혼과 육신을 함께 멸망시킬 분을 두려워해야 합니다.(마태10,28)
왜 밭을 갈고 있습니까?
하느님의 구원 역사에는 항상 인간의 협력이 필요합니다. 세상의 주도권은 그분에게 있지만 인간의 협조가 있어야 합니다. 내가 주님의 손과 발이 되어 그분의 자비와 사랑을 실천해야 합니다. 주님의 가슴과 입이 되어 그분의 위로와 희망을 전해야 합니다. 내 시간과 돈, 재능과 열정이 요구될 때 기꺼이 예라고 응답해야 한다.
그래, 자네 왔는가?
충고와 조언은 예의를 잃지 않는 가운데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충고에 선행되어야 할 점은 사랑과 겸손,그리고 용서입니다. 사랑어린 권고만이 상대의 생각을 바꾸게 만들고, 겸손한 조언만이 상대의 가슴을 녹일 수 있습니다.그리고 용서를 전제한 충고만이 상대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습니다.
모조리 내게 넘겨라!
이제 여러분은 모든 죄의 멍에와 상처를 하느님께 맡기십시오. 아프고 무겁고 추악한 것들을 모두 그분께 떠넘기십시오.그리고 여러분은 세상에 갓 태어난 어린아이처럼 순수한 존재로 살아가십시오. 이것이 바로 자애로우신 하느님이 원하시는 바입니다.
감사하게 생각한다!
인간의 가장 이상적인 마음은 깊은 연못과 같아야 한다고 했던가요. 성모님이 그러하셨듯 우리도 마음속에 깊은 연못을 하나씩 만들어봅시다.
꼭 만나고 싶습니다!
죽는 날까지 세상 것 대신에 천상 것을 애타게 구해야 합니다.
윷판의 의미
신앙인은 자기 인생의 주인이요 자기 생명의 소유주가 하느님이심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분이 언제 어디서 어떻게 부르시든 기쁘게 떠날 수 있도록 그렇게 살아야 합니다.
씨앗만을 팝니다!
신앙인은 부질 없는 잡초들에 속지 말아야 합니다. 동시에 자신의 모든 능력과 정성과 열정을 다해 기필코 구원의 열매를 얻어야 합니다.
깨어짐의 영성
넘어짐을 통해 겸손을 배우고 기도를 배우며 끝내 주님께로 다가섭니다. 깨어짐은 자신의 한계를 자각시키고 새로운 도양그로 이끄는 디딤돌이 됩니다. 그 시기를 인내하며 끝까지 견디는 자만이 하느님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그 아이의 엄마입니다!
인간 생명은 하느님의 선물이요, 그분의 모상입니다. 인간은 발명품이 아니며 상품도 아닙니다. 이 생명의 유일한 주인은 하느님으로서 인간이 마음대로 조작해서는 안 될 영역입니다.
내가 알지 못한 예수님
예수님의 부활을 가슴 가득 안고, 자신의 부활을 향해 거침없이 달려가야 하겠습니다.
어릿광대 춤밖에 없습니다!
신앙은 세상의 눈을 의식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눈을 의식하는 것입니다. 믿음은 남에게 보이는 삶이 아니라 하느님께 보이는 삶입니다. 신앙생활은 대중 앞에서의 행동이 아니라 하느님 앞에서의 행동입니다.
쓰레기통처럼 보였소!
아쉬움이 없고 갈증이 없는 사람은 하느님의 도움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은 그처럼 자신만만하고 도도한 사람은 그대로 내버려두십니다.
제2장 눈이 가려져서 그분이 누구신지 알아보지 못하였다(루카 24,16)
돌을 씻어오게나!
우리는 언제나 자신의 삶으로서 말해야 합니다. 내 삶이 곧 내 생각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하여 하느님의 모습을 내게서 환히 꽃피워야 합니다. 마음과 말과 지식으로만 신상생활을 하지 말고 행동과 실천으로 완성해야 합니다. 영혼이 없는 몸이 죽은 것과 마찬가지로 행동이 없는 믿음도 죽은 믿음이기 때문입니다.
더 짧게 만드시오!
신앙의 기본 법칙은 실망에 사로잡히지 않고 내 곁에 현존하시는 주님을 직접 만나고 체험하는 일입니다. 그것은 엠마오의 제자들이 그랬던 것처럼 성경과 성체성사 안에서 가능합니다. 성경은 삶의 이정표요 성체는 구원의 양식입니다.
힘들어 죽겠는데 왜?
첫 그리스도인이셨던 성모님 역시 모든 것을 굳게 믿었으나 삶의 고통을 면하지는 못하셨습니다.
여전히 가난한 인간이다!
내 희생과 용서와 봉헌의 사랑은 바로 그곳에서 보석처럼 빛날 것입니다.
오로지 폐하의 은혜로 이루어졌습니다!
내가 원하기에 앞서 하느님의 선택이 먼저 있었습니다. 믿음은 자기 능력에 따른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계시와 은총으로 가능한 것입니다.
우리는 단지 주님의 부르심에 자유로이 응답했을 뿐입니다. 그 결과로 주어인 이 소중한 믿음은 내 모든 죄를 사해주었고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하고 있습니다.
제가 하느님을 버릴 줄 아세요?
우리는 명예와 자존심, 탐욕과 시기 등을 내걸고 하느님과 끈질기게 대항하고 있습니다.
나를 길들인 것 같아!
하느님께 길들여지십시오. 천국에서 살아가는 삶의 법칙에 길들여지십시오. 하느님을 사랑하고 그분께 길들여지는 방법이 여기에 있습니다. 내 계명을 받아들이고 지키는 사람이 바로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다.(요한 14,21)
더 참된 사실은 없다!
죽음을 넘어선 예수님의 부활 사건입니다. 부활의 종교는 그리스도교를 가리키는 대표적인 표현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유다인들은 기적을 요구하고 그리스인들은 지혜를 찾지만 우리는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선포할 따름입니다.(1코린 1,22-23)
아무것도 없습니다!
예물 봉헌은 진지한 믿음의 표현입니다. 믿음은 물질적으로도 자연스럽게 표현되기 마련입니다. 보이지 않는 그분을 향한 믿음 없이는 세상 재물을 내놓을 수 없습니다. 더구나 하느님 앞에 소중한 것은 올곧은 봉헌입니다. 러시아 왕처럼 삶 전체를 봉헌할 수 있어야 합니다.
무엇을 두려워하겠습니까?
가난, 질병, 사람, 고독, 죽음 에 대한 두려움
마음속에 숨겨둡시다!
인간은 하느님의 모상이기에 천상적 행복이 아니고서는 도저히 그 무한한 욕망을 채울 수 없습니다. 신앙생활의 궁극적인 목표도 주님 안에서의 완전하고 영원한 행복, 곧 구원을 얻어 누리기 위함이 아닙니까.
죽어도 용서할 수 없습니다!
신앙인에게 있어서 용서는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하느님의 절대적인 지상 명령입니다.
그때의 아들이 보고 싶어요!
하느님은 자포자기하려는 죄인에게 용서라는 선물을 통해 끊임없이 기회를 주십니다.
코터네 집의 토요일 밤
예수님을 가정안에 모셔야 합니다. 온 가족이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 가정에 주님을 모시는 비결이요, 가족들이 함께 기도하는 것이 성가정을 이루는 비법입니다.
하느님이 가르쳐주셨네!
성경을 읽으면 읽을수록 우리의 삶은 반드시 변해갑니다. 성경을 규칙적으로 읽는 사람들은 한결같이 성경이 자기 삶을 변화시켰다고 말합니다. 하느님이 천국에 들어가는 비법을 성경 안에 다 기록해놓았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우리가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 마련된 것입니다.(성 보나벤투라)
커다란 손
성령의 실체는 보이지 않지만 우리를 이끌어 주고 있습니다.
어찌 불가능하겠습니까?
30년4월6일, 최후 만찬에서 남기신 예수님의 유언을 이어받아 가톨릭은 2000년 동안 성체성사를 거행해오고 있습니다. 성체성사는 가톨릭 전례의 핵심이며 모든 은총의 샘이요, 교회의 심장이며 교리의 요약입니다.
성체성사는 인간 구원을 위한 예수님 삶의 완성이었지만 우리에게는 완성을 향한 시작입니다. 그렇게 때문에 우리는 미사 때마다 그분의 현존을 실제로 받아 모시고 있습니다.
그다음엔 어떻게 될까?
우리 인생이 피폐해지는 것은 추락한 명예나 부족한 지식 때문이 아니라 도저히 채워지지 않는 허기진 영혼 때문입니다. 신앙을 통해서만이 인간의 근원적인 허기를 채울 수 있습니다.
톱으로 자른 십자가
믿음에는 고통의 십자가와 천상 영광이 동전 양면처럼 하나로 새겨져 있습니다. 고통없이 영광에 오를 수 없으며 죽음 없이 부활할 수 없습니다. 십자가야말로 구원의 열쇠요 자유와 해방의 관문입니다. 또한 진실한 믿음은 시험을 거치지 않고서는 제대로 알 수 없습니다. 그러기에 시련과 고통은 자기 신앙을 확인시켜주는 리트머스 시험지 와도 같습니다.
하느님이 해주셨습니다!
하느님의 구언 역사 안에는 반드시 인간의 협력이 요구됩니다. 하느님은 언제나 연약하고 보잘 것 없는 이들을 통해서 위대한 일을 하십니다.
내가 세상의 왕이야!
내 행동은 친절과 용서와 순결과 겸손으로 예수님을 닮아가고 있습니까. 아니면 거짓과 위선과 음란과 교만으로 악마의 모습에 가까워지고 있습니까.
고향이 없었기 때문이다!
하느님의 존재와 영생을 부정한 자는 죽음 앞에서 더 이상 갈 곳이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은 눈에 보이는 세상이 전부가 아니요, 그것은 단지 영원한 시간 안에서 찰나에 불과함을 깨달았습니다.
동가식서가숙
현세와 내세에 양다리를 걸치고 있는 자는 아무것도 얻지 못할 것입니다.
요리를 먹기 바란다!
나는 너희가 요리를 보고 사색하기보다는 요리를 먹기 바란다!
영적인 체험을 아무리 많이 했어도 거룩한 삶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면 무슨 소용입니까.
신앙안에서의 배움과 체험은 언제나 실천을 위한 것입니다.
생각만 할 뿐이다!
행복은 신(神)과 함께 있는 것이고 거기에 미치는 힘은 영혼의 울림인 용기입니다.-그림(J.Grimm)
제3장 이스라엘을 구원해주실 분이라고 희망을 걸고 있었습니다
(루카 24,21)
왜 모자를 벗지 않으세요?
타인에게 줄 수 있는 가장 큰 선물은 순수한 관심뿐이라는 것을 기억하라.
그게 다 무슨 소용인가?
순간적인 즐거움 대신에 영원한 행복을 추구합니다. 이것이 신앙의 궁극적인 목표요 희망입니다.
우연히 생겨날 수 있겠나?
학문의 힘은 의심함으로써 얻고 종교의 힘은 믿음으로써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종교를 하나의 학문으로 취급하려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다 세파에 시달리고 지쳐 쓰러질 때면 하느님의 존재 자체를 거부합니다.
그리스도의 몸을 만졌어요!
사랑에 굶주리고 관심과 도움이 필요한 이웃은 참으로 많습니다. 다만 우리가 외면하기 때문에 눈에 보이지 않을 뿐입니다. 신앙인은 무언가를 받아서 행복한 것이 아니라 무언가를 줄 수 있어서 행복한 것입니다.
세이레네스와 오르페우스
그리스신화에 보면 남자들을 유혹한 여신 세이레네스가 등장합니다. 원정선에 몸을 실은 음악가 오르페우스는 세에레네스가 유혹하는 노래보다 더 큰 소리로 노래를 불러서 그 유혹을 극복했던 것입니다.
인간에게 주어지는 전형적인 세 가지 유혹, 즉 물질의 유혹, 명예의 유혹, 그리고 권력의 유혹은 그리스도인에게도 예외가 아닙니다.
하느님으로 자신을 채우면 채울수록 구원이라는 완전한 세상으로 더욱 다가서게 됩니다. 마침내 내 존재안에 하느님으로 온전히 충만해질 때, 그러면 하느님께서 여러분에게 가까이 오실 것입니다.
5분 후에 어디로 갈까?
1849년12월, 28세의 러시아 작가 도스토예프스키는 사형 선고를 받아 형장으로 끌려갔습니다. 그는 사회주의와 무신론에 반대했고 일평생 부활 신앙을 간직하며 살았습니다.
부활은 우리 믿음의 결실이자 삶의 목적입니다. 영생과 부활에 대한 확신이 없다면 신앙이나 종교는 하나의 정신 수양이요 사교모임에 불과할 뿐입니다.
누가 가장 행복합니까?
그리스도교 신앙은 처음부터 하느님처럼 되는 비법을 간직해왔습니다. 이웃 앞에 낮추지 않는 한, 결코 하느님과 같아질 수 없습니다. 주님 앞에 무릎을 꿇지 않는 한, 구원에 이를 수는 없습니다. 겸손한 사람은 자신을 비워 가장 행복한 하느님으로 가득 채우기 때문입니다. 그분처럼 자신을 무한히 낮추어 밑으로 내려가야 합니다.
일주일을 버티기 어렵죠!
기도와 성경은 활동의 준비요 활동은 기도와 성경의 연장이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영적인 힘을 얻어 하느님의 뜻을 펼쳐나가는 신앙적 행위가 될 수 있습니다.
배추를 거꾸로 심으시오!
무엇 때문에 세상과 반대 방향으로 살아야 합니까. 그것은 예수님을 따라 세상을 이기고 하늘로 오르기 위해서가 아닙니까. 신앙은 교리나 이론을 배우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삶을 실천하는 일입니다.효도가 예식이 아니고 행동이듯 믿음도 예식이 아니라 실천입니다.
기억나는 강론이 없소!
구원의 계단이 지루하다면 그때야말로 인내와 용기가 필요한 시기입니다. 참고 기다리며 마음을 굳게 하십시오, 이미 그분이 저 앞에 서 계시지 않습니까.
저만 쩔쩔맸단 말입니까?
십자가는 분명 눈물과 시련의 길이자 처절한 죽음의 길입니다.하지만 예수님은 오직 이 길을 통해서 부활에 이를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고통을 통한 고통의 해결은 중요한 진리 하나를 가르쳐 줍니다.
예술가의 마음이지요!
아무것도 자신에게 돌리지 말고 어떤 것도 높이 평가하지 마세요. 다만 모든 것을 하느님께 돌리도록 하세요. 그분의 도구로 사용되었다고 해서 자만할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크레도
Credo 나는 믿는다. 구원이란 언제나 믿는 이들의 몫입니다. 세상의 오해와 비난에도 퇴색되지 않을 황금빛 Credo를 각자의 가슴 깊이 새겨야 하겠습니다.
잡고 있는 나무를 놓아라!
하느님을 믿는 다는 것은 가진 바에 대한 애착을 넘어서서 자신에 대한 애착까지도 버려야 하는 일입니다. 내 것을 버리면 버릴수록, 움켜진 손을 펼치면 펼칠수록 주님은 그만큼 당신 것으로 채워주시지 않을까요.
아무것도 못 보았습니다!
큰 잔에다 기름을 가득 붓더니 이것을 들고 한 시간 안에 마을을 한 바퀴 돌고 오게. 단 기름을 흘리거나 제 시간에 맞춰서 오지 못하면 더 이상의 가르침은 없네.
갈릴래아 사람들이 아닌가!
성령은 이미 각자에게 와 계시지만 제대로 활동하지 못한다는 사실입니다. 그것은 자신 안에 성령의 활동을 방해하는 장애물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 장애물이란 하느님을 향한 죄의식과 타인을 향한 증오심 때문입니다.
땅을 드립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느님께 다시 돌아가야 한다는 사실을 한시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저는 못 갑니다!
모든 것을 감수하면서도 기꺼이 주님을 따르는 것이 그리스도교 신앙입니다.
지팡이를 받으십시오!
사람이 먼 일을 생각하지 않으면 반드시 눈앞에 우환이 있게 마련이다.
무엇을 잃는단 말입니까?
봉헌하고 봉사한 것에 대한 보상을 이 세상에서 다 얻으려고 한다면 보험에 가입하는 편이 더 현명합니다.
너와 함께 잔 예수다!
그리스도교는 인간이 신을 찾아간 것이 아니라 하느님이 인간을 찾아오셨습니다. 인간을 구원하고자 인간이 되어 이 세상에 오셨던 것입니다.
궁전처럼 변했습니다!
헛된 욕심과 집착은 행복을 잃어버리게 하는 원흉입니다. 하느님의 자녀라면 물질적 탐욕에서 온전히 벗어나야 하고 자기 주장만을 내세우는 고집도 버려야 합니다. 남에게서 인정받고 사랑받으려는 욕망까지도 던져버려야 합니다. 다만 하느님께 인정받고 하느님께 사랑받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산불에 포위된 자
죽음을 정복하는 길, 곧 부활의 길은 죽어야만 가능한 일입니다. 자신을 다 태워버려야만 죽음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매일매일 자신을 끊임없이 태워나갈 때 마침내 죽음을 정복할 수 있습니다.
가야지, 가고 말고!
역사상 최고의 신학자로 꼽히는 토마스 아퀴나스 성인은 구원을 받으려면 다음 세 가지를 알아야 한다고 제시했습니다. 첫째, 무엇을 믿어야 할 것인가? 둘째 무엇을 희망해야 할 것인가? 셋째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결국 믿음 자체만으로 구원을 얻는 것이 아니라 믿음을 통하여 믿음 안에서 구원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일정대로 미사를 드립시다!
우리가 하느님으로 충만해질 때 주님은 우리가 상상치도 못한 일들을 성취시켜 주십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지상에서 신앙의 승리를 거두며 구원으로 한걸음 더 다가설 수 있을 것입니다.
제4장 너희는 어리석기도 하다! 그렇게도 믿기가 어려우냐?
(루카 24,25)
하느님, 어찌 이렇게?
기도에 있어 중요한 점은 소망을 실현시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 앞에 끈질긴 믿음을 표현하는 데 있습니다.
가까이 다가와야 해!
하느님께로 올라가는 구원의 길은 어려운 신학 이론이나 복잡한 성경 해설로는 완성되지 않습니다. 궁극적으로 사랑을 통해야만 구원의 사다리를 오를 수 있습니다. (소금인형)
칼을 잘 갈아주세요!
313년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밀라노 칙령에 의해 한국은 1886년 한불수호조약에 의해 종교의 자유가 주어졌습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니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라(로마 6,8)
아직도 하느님을 믿습니까?
고통의 때는 불행과 절망의 시기가 아니라 오히려 하느님을 체험하는 은혜로운 시간으로 바뀌게 될 것입니다.
이 사람을 데리고 갑시다!
하느님의 말씀을 읽고 듣는 것만으로는 이해되지 않습니다. 오로지 그 말씀을 실제로 행할 때에만 온전히 이해하게 되며, 또 그래야 그분을 믿는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지 않을까요.
내 인생 내가 책임질게!
1955년-디즈리랜드 미국의 경영학자 링크레트 박사의 설계로 완성 -구원의 주도권은 언제나 생명의 주인이신 하느님께 주어져 있습니다.
어떻게 생포하나요?
잡히는 그 순간까지도 손을 움켜쥐고 있는 원숭이의 모습은 현대인의 슬픈 자화상입니다.
벤허
성경은 하느님이 당신을 보여주시는 계시의 원천이자 인간 역사를 구원으로 이끄는 이정표입니다.
내리막길에서 만났다!
인간이란 내리막길을 갈 때 더욱 성숙해진다. 나는 오르막길에서는 예수님을 만날 수 없었는데 내리막길을 걸으면서 평화의 예수님을 만날 수 있었다.
하느님 손에 매여 있소!
가톨릭 교회의 최고 목자요 세계의 정신 지도자인 교황. 신자들은 이러한 교황을 위해 늘 기도해야 합니다. 그것은 교황을 신성시하거나 미화시키려는 것이 아니라 그가 예수님을 본받아 자신에게 맡겨진 직무를 더욱 충실히 이행할 수 있도록 주님의 도움을 청하는 것입니다.
그가 어떻게 갔습니까?
신앙인의 잣대는 자신의 판단력이나 세상의 가치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하느님이어야 합니다.
희망을 닦고 있답니다!
각자의 십자가 앞에서 예스라고 대답해야 합니다.
의심나는 사람은 가시오!
프랑스의 왕 루이 9세(1214-1270)는 성인이 되었다. 보지 않고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
극장에 불이 났습니다!
갖가지 재난 안에는 하느님의 경고가 담겨 있었던 것입니다.
나그네를 위한 편지
신앙인은 세상 지식이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을 존중해야 합니다.
자루 안의 모래와 같네!
남들은 자주 용서하고 자신은 결코 용서하지 말아야 합니다. 자신의 부족함을 알고 자신이 죄인임을 깨달아 주님의 자비를 구한다면, 그는 하늘 위로 올라갈 것입니다.
그거면 충분하지 않소?
사람은 가지면 가질수록 불행해지고 버리면 버릴수록 행복해진다오.
기적의 십자가
십자가는 구원의 보증이요 천국 문을 여는 열쇠입니다.
딴 사람이 될 걸세!
사람은 누구나 죽게 마련이지만 부활을 통해 영원히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진리 조각을 발견했어!
자신에 대한 신뢰가 강하면 하느님을 향한 믿음을 대신하게 됩니다. 자신에 대한 애착이 강하면 하느님의 사랑을 가로막는 장벽이 되어버립니다.
가장 큰 진리는 무엇이죠?
믿음은 하느님의 구원이 드러나는 자리와도 같습니다.5 믿음은 불가능을 가능하게 만듭니다.
이 나무를 뽑아보게!
좋은 습관을 길들여야 비로소 올바른 생활이 가능하다네! 처음에는 하나의 작은 행동에 불과하지만 반복적으로 쌓이다 보면 자신의 삶 전체를 지배하게 됩니다. 성인이 되는 것은 하루아침에 기적과 같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끊임없는 영적 습관이 축적된 결과입니다. 행동이 바뀌면 습관이 바뀌고, 습관이 바뀌면 성격이 바뀌고, 성격이 바뀌면 운명이 바뀐다.-나폴레옹
발 없는 사람을 만났다!
행복한 사람은 가장 좋은 것을 소유한 사람이 아니라 자신이 가진 바를 최고의 것으로 만들 줄 아는 사람입니다. 아무리 힘들어도 그리스도인은 하느님을 향한 믿음을 저버릴 수는 없습니다. 결국 이 믿음을 통해서 구원을 얻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공동묘지로 만들겠다!
주님의 집인 성당에서만큼은 오로지 그분과 만나야 합니다.
동물이 될 수는 없지 않은가?그리스도의 율법이 하느님을 섬기기 위한 것이라면, 하느님을 사랑하고 인간을 사랑하는 것이 그 정신에 해당합니다.
제5장 그제서야 그들은 눈이 열려 예수님을 알아보았다(루카 24,31)
펄펄 끓는 물인데요?
나환자를 사랑해서 스스로 나환자가 된 성자 다미안 신부. 하느님이 인간을 닮아 세상에 오셨듯이 인간도 하느님을 닮아 하늘로 올라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도 그분을 닮아 거룩하고 뜨거운 열정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당신처럼 살고 싶소!
너희가 내 말을 마음에 새기고 산다면 진리를 알게 될 것이며,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요한 8,31-32)
벌을 받아 마땅한 죄인입니다!
인간이 하느님 앞에서 바칠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고백은 자신의 부족함과 죄를 인정하는 것입니다. 스스로 부족한 존재임을 인정할 때 이미 모든 것을 알고 계시는 주님이 그 나머지를 채워주십니다. 하느님을 알고 그분을 닮기 위해서는 내 자신을 똑바로 아는 것에서 시작해야 합니다.
무엇이 보이느냐?
유리에 은이 칠해져 있을 때는 밖을 볼 수 없고 오직 자신만 보인다네. 독선과 편견이라는 은을 벗겨내야 이웃을 볼 수 있고 그때에야 비로소 자네 삶에 기쁨이 있을 것이네.
최고의 행복을 맛보았네!
그리스도인에게 특권이 있다면 그것은 하느님 안에서 온전한 안식을 누릴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영적이고 내면적인 수액, 곧 주님이 주실 은총과 축복은 우리의 활동이 빗나가지 않고 온전한 결실을 맺도록 이끌어줍니다.
사랑의 말(馬)입니다!
우리는 영성체를 통해 주님으로 모심으로써 이미 구원을 보증받고 있지 않습니까.
그들 중 한 명이 구세주가 될 것이오!
세상에 가장 없어서는 안 될 것은 가정이고, 세상에서 가장 필요한 사람은 부모이다.
네 죄를 잊었노라!
남의 허물을 용서하고 조건 없이 사랑할 때 그는 이미 보상을 받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사랑을 통해서 하느님을 만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교황 바오로 6세
이슬과 같습니다!
일연의 삼국유사에 나오는 조신의 꿈이라는 설활- 지금 모든 사람들이 속세의 즐거움만 찾아 얻으려 애쓰지만 그것은 다만 하룻밤 꿈에 지나지 않습니다.
복음이 무엇을 했소?
많은 이들이 교회에 나오게 된 연유는 신앙 이론에 설득되어서가 아니라 그리스도인의 사랑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또한 많은 이들이 교회를 다시 떠나는 이유는 성경 내용이나 하느님을 믿을 수 없기 때문이 아니라 신자들의 불친절과 추한 모습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바클레이
굽히는 법을 잊었네!
가정과 성당과 사회 안에서 내가 먼저 굽히고 내가 앞장서서 낮아져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주님을 만날 수 있는 최선의 길입니다.
가장 귀한 것을 바치노라!
단식으로 절제한 것을 이웃과 나눔으로써만이 비로소 결실을 거둘 수 있습니다. 곧 자선은 회개와 보속의 증거가 되는 셈입니다. 많이 소유한 자가 부자가 아니라 많이 베푸는 자가 부자입니다.
나를 따라라!
나는 병사들의 맨 앞에 나섰습니다.그리고 선두에서 내가 지휘한 명령어는 단 한마디 나를 따라라! 뿐이었습니다.
이제 여섯 시간밖에 없구나!
사람은 죽음 앞에서 비로소 세상의 진리를 깨닫습니다. 무엇이 헛된 것이고 무엇이 소중한지를 알게 됩니다. 그래서 생의 가장 위대한 만남은 종말에 이루어진다고 했던 모양입니다.
왜 놀러오지 않으세요?
회개는 새 출발을 위한 뉘우침이어야 하고 다시 시작하기 위한 통회가 되어야 합니다.
건너가리라 믿습니까?
혼신의 힘을 다해 하느님을 부르는 사람만이 하느님을 만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마음의 가난을 되찾아 영적인 눈을 뜨기 위해서는 자만과 오만을 버려야 합니다. 그래야 자신이 얼마나 부족한 존재인지 알게 됩니다.
이 재산이 무슨 의미인가?
전 세계 인류의 행복 이라는 슬로건 아래, 그 유명한 록펠러 재단을 세워 전 재산을 자선 사업에 사용했습니다.
가진 바를 이웃과 하느님 나라를 위해 사용할 줄 알아야 합니다. 땅에 쌓은 재물은 우리 것이 되지 못합니다. 오로지 하늘에 쌓은 것만을 훗날 주님으로부터 되돌려 받습니다.
제 목숨을 드리죠!
하느님이 계획하시고 인간이 동의한 결혼은 두 인격이 하나로 결합하는 아름다운 탄생이며 주님께서 친히 머무시는 거룩한 터전입니다.
야훼의 이름을 믿고 나왔다!
복음전파와 봉사활동과 정의실현 등은 주님과 함께해야 비로소 완수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자신의 뛰어난 능력이나 좋은 환경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하느님의 능력에 대한 굳건한 믿음입니다. 하느님께 신뢰하고 의탁하기를 주저하는 것, 그것은 겸손이 아니라 오히려 교만과 자만의 결과입니다.
왜 가게 문을 닫습니까?
안식일의 법이야말로 인간다운 삶과 구원을 위해 세워진 만고불변의 진리입니다. 하느님은 우리를 축복하심으로써 주일을 거룩하게 하시고, 우리는 하느님께 헌신함으로써 그날을 거룩하게 합니다.
항공료는 있나요?
신앙은 배움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배움에 온몸을 던지는 일입니다. 신앙은 실천해야 비로소 힘이 될 수 있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생활속에서 행해야만 그분이 내 삶 안에 들어오실 수 있습니다. 그저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사람이 되지 말고 말씀대로 실천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야고 1,22)
전 언제 죽나요?
인류는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으로 말미암아 생명의 양식과 구원의 음료를 얻었습니다, 이로써 우리는 영원한 생명을 지니신 하느님을 받아 모시게 되어 다시금 영생의 길을 걷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성모님의 장례식
신앙인은 구원 역사 안에 묻혀 있는 성모님의 순명과 고통의 삶을 자신의 인생 안으로 끌어들여야 합니다. 한낱 인간에 불과했던 성모 마리아에게는 더 없는 영광의 순간이요 세상에 남아 있는 우리에게는 구원을 보증해주는 사건이 성모 승천입니다.
지금도 살아 계십니까?
담는 그릇에 따라 담기는 것의 모양이 달라진다.
그 무대가 그립지 않니?
지상에 있는 것들에 마음을 두지 말고 천상의 것들에 마음을 두어야 합니다. (콜로 3,2)
기뻐하는 모든 것은 순간일 뿐이다. 고통받는 모든 것은 찰나일 뿐이다. 중요한 것은 오직 영원이다.
제6장 우리가 얼마나 뜨거운 감동을 느꼈던가!(루카 24,32)
태양을 쳐다보시오!
눈에 보이지 않는 성령은 하느님의 영적인 기운으로 교회를 살아 움직이게 하는 생명의 원천입니다.성령을 체험하기 위해서는 전제되어야 할 것이 있으니, 곧 기도와 용서입니다.
기도의 결과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가장 좋은 휴식은 주님과 함께 머무는 것이며, 이로써 우리는 그분의 은총과 사랑에 흠뻑 젖을 수 있습니다. 이는 그분 말씀이 내 안에 스며들어 나를 인도하시도록 맡겨드리는 일입니다.
그리스도인은 기도를 통해서 하느님과 함께 머물 수 있습니다. 게다가 영혼의 안식과 영적인 힘까지도 얻게 됩니다. 기도는 아침의 열쇠이며 밤의 자물쇠라 했던가요.
예수님보다 위대합니까?
신앙인은 거룩하신 주님을 모시고 거룩히 살아야 합니다. 사랑의 삶을 살아가신 주님을 모시고 사랑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나무가 내 스승이었네!
인간의 운명은 하느님 안에 있으며 사람의 미래는 주님의 것입니다. 인간 이성이 촛불의 빛이라면 신앙은 태양의 빛과 같습니다.
내 옷을 입으시오!
현대 그리스도인은 신앙 선조의 박해와 순교라는 은인 덕택에 이토록 고귀한 신앙의 유산을 물려 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기에 순교 성인들은 단순히 죽음이라는 차원에서 끝난 것이 아니라 이천 년의 가톨릭교회 역사 속에 여전히 살아 숨쉬고 있는 셈입니다.
바닷물을 옮길 거예요!
하느님은 인간의 이성과 감각을 초월하시는 분입니다. 오직 믿음을 통해서만이 그분께 다가갈 수 있습니다. 신앙은 본질적으로 인간의 사고 체계를 깨뜨리고 무한한 신비에 마음을 여는 일입니다.
나르키소스의 죽음
수선화는 죽음 혹은 죽어야 할 자의 운명을 상징합니다. 그리고 여기에서 유래한 영어 나르시시즘은 자기 용모나 재능을 과대하게 평가해서 자신에게 빠져버리는 자아 도취증을 일컫게 되었습니다.
자신에 대한 사랑은 죽음의 시초이며 신과 만인에 대한 사랑은 삶의 기초다.-톨스토이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탄생과 더불어 주어진 그 순수한 사랑을 회복해야 합니다. 우리의 위대한 사랑 앞에 미움과 탐욕, 이기와 교만은 제 힘을 잃어버립니다.
성냥이 얼마나 필요한가?
절망하지 않았던 베드로 사도는 예수님으로부터 용서를 받았을 뿐 아니라 사도의 으뜸으로도 높여졌습니다.
왜 마리아를 섬기죠?
겸손과 순종으로 하느님께 일생을 봉헌하신 성모님의 삶은, 그 자체로 신앙인의 모범이요 구원의 표징입니다.
엄마는 빚이 있어요!
주님의 사랑으로 내 안을 가득 채우는 일, 이것이 바로 신앙의 시작입니다.
기적을 본 사람 있소?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의 부활을 믿고 고백하는 희망의 증인입니다. 그런데 부활하신 주님을 보여달라는 사람들에게 우리가 보여 줄 수 있는 것은 오로지 복음 말씀에 따라 사는 모습입니다.
영원히 함께할 걸세!
사랑이라는 거룩한 양식이 없다면 인간 삶은 지옥과 다를 바가 없을 것입니다.
머리가 이상한 것 아냐?
중세 유럽의 민담에 따르면, 악마가 인간을 유혹하기 위해 채택한 최고의 방법은 뒤로 미루는 마음이라 했습니다. 내일이면 너무 늦습니다. 지금 당장 시작해야 합니다.
공동묘지에 들어가게나!
그리스도인은 하느님의 계시에 눈을 돌림으로써 고통의 근본적인 의미를 찾을 수 있습니다.
미련한 여인이여!
새는 죽는 순간에 슬픈 소리를 내고 사람은 가장 착한 말을 한다.-칸트
그리스도인은 세속적 애착과 물질적 탐욕에서 벗어나 천상의 재물을 추구해야 합니다.
빈 무덤밖에 없지요?
예수의 부활은 그리스도교 신앙의 핵심이자 본질입니다. 그리스도인이란 부활을 믿는 사람이며 부활을 준비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부활은 죽음에 대한 생명의 승리요, 미움에 대한 사랑의 승리요, 죄에 대한 은총의 승리입니다. 부활하신 주님께 모든 희망을 둘 수 있다면 비록 현실이 어둡고 고통스러워도 절망하지 않습니다.
내 힘으론 어쩔 수 없어!
신앙 안에서 결실을 맺는 것은 이 세상에서 가능한 일이 아닙니다.
배에 불을 질러라!
그리스도인은 이 세상에 매여서는 안 됩니다. 현재에 갇혀서는 안 됩니다. 우리의 가능성은 저 멀리 희망과 기쁨의 깃발로 다가오는 하늘나라에까지 뻗어나가야 합니다.
바람의 존재를 어떻게 아느냐?
인간은 자신이 내린 결단을 통해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를 세상에 드러냅니다. 진리를 따라 사는 사람은 언제나 빛이 있는 데로 나아갑니다. 주님과 함께 진리의 빛 속으로 걸어가서 영생을 누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저를 죽일 순 없습니다!
신앙은 이 세상을 초월하는 일입니다.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믿는 이의 특권은 보이는 세상의 장애와 조건을 뛰어넘는 데 있습니다.
텐트에 걸린 손수건
그 손수건은 고든 장군의 기도 시간을 알리는 표시였습니다. 그는 생애 마지막 순간까지, 그곳이 어디든 매일 매일 어김없이 하느님께 기도했습니다.
기도는 영혼을 지키는 성채다.-아우구스티노 성인
기도는 세속의 어두운 그림자로 드리워진 우리 영혼을 빛이신 하느님께로 인도하여 맑게 정화시켜줍니다.
제가 가진 전부입니다!
인도의 민족운동을 이끌었던 간디는 다음과 같은 일곱 가지의 사회악을 지적한 바 있습니다. 원칙 없는 정치, 도덕 없는 상업, 노동 없는 재산, 인격 없는 교육, 인간성 없는 과학, 양심 없는 쾌락, 그리고 마지막 한 가지는 봉헌과 희생 없는 신앙이었습니다.-송현 신부의 『엠마오로 가는 길에서』중에서
우리는 바보들이죠!
바보 같은 순명으로 하느님의 뜻을 실현시켜나가셨던 것입니다.
단 한 명도 없었다!
우리는 그들을 생명의 주인이신 하느님께로 인도해야 합니다.
죄의 무게는 얼마죠?
당신이 지은 죄로 인해 이미 당신 영혼이 죽었기 때문입니다. 죽은 시체위에 100파운드 되는 돌을 얹어놓는다 해서 그 시체가 무게를 느낄 수 있겠습니까?
왕관을 벗어던진 왕
하느님은 오로지 인간에 대한 사랑 때문에 스스로 인간이 되셨습니다. 인간과의 직접적인 만남을 통해 자연스런 사랑을 나누고 싶으셨습니다. 더불어 당신이 마련해둔 소중한 선물, 곧 영원한 생명을 전해주려는 것이었습니다.
셔츠만을 갖고 갔다!
하루하루를 자기 인생의 마지막 날처럼 지내야 하겠습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명백히 드러난 하느님 나라는 현세의 시간 안에서 그리스도인의 분명한 결단을 요구합니다. 그 선택에 따라서 미래는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습니다. 현재의 순간 순간은 자신의 운명을 좌우하는 구원의 시간입니다.
하루만 했을 뿐입니다!
신앙은 이 세상을 중심으로 살아왔던 삶에서 하느님을 중심으로 산는 삶으로 변화하기를 요청합니다.
저자후기: 날개 달아주기
따지고 보면 연재된 글의 으뜸 수혜자는 필자 자신이었습니다.
미주 독자들이 전한 사연
주제가: 엠마오로 가는 길에서
저자 송현(로마노)신부
2000년에 사제품을 받은 부산 교구 사제로, 미국 유학과 캐나다 교포 사목 등을 거쳐 현재 로마에서 유학 중이며 2005년부터는 벨기에 바뇌 성모 성지 국제 지도 신부로 활동해오고 있다. 교계내에서 광주 가톨릭대학교 대건문학상(1995년), 부산 가톨릭 문예 작품 공모(1996년, 1997년), 서울 대교구 환경상 공모(1997년)등에서 입상했으며 한국 천주교회 2000년 대희년 주제가(1999년)를 작사한 바 있다.
그림 하삼두(스테파노) 화백
동아대와 홍익대 대학원에서 동양화를 공부하였고, 현재 부산에서 작품 활동을 하면서 부산 교구 주보인 가톨릭 부산과 월간 사목에 그림 칼럼을 연재 중이다. 부산대, 동아대, 동의대에서 동양화를 지도했으며 부산 교구 좌동성당을 비롯하여 일곱 곳의 교회 관련 시설에 성미술 관련 작품을 남겼다. 9회의 개인전을 열었으며 명상 그림집 지금 여기
엠마오로 가는 길에서
2007년9월3일 교회 인가
2008년6월9일 초판 1쇄 펴냄
2008년7월28일 초판 2쇄 펴냄
지은이 송현
그린이 하삼두
펴낸이 정진석
펴낸곳 가톨릭출판사
값 9,8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