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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12월 4일(주일) 출애굽기 5:22~6:13 '나는 여호와라' 예산수정교회 이몽용 목사
오늘은 출애굽기 5:22~6:13 말씀을 중심으로 '나는 여호와라'는 제목으로 함께 은혜를 나누기를 원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모세는 자신이 애굽의 바로를 찾아간 일로 인해 이스라엘 백성이 더 학대를 받게 되자 “어찌하여 나를 보내셨나이까 어찌하여 이 백성이 학대를 당하게 하셨나이까”라고 하나님께 하소연합니다. 그러자 하나님이 “나는 여호와이니라”고 하시며 “이스라엘의 신음소리를 내가 듣고 나의 언약을 기억하노라”고 하시며 언약을 성취하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모세는 자신은 ‘입이 둔한 자’여서 바로가 듣지 않을 것이라고 합니다. 모세가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바로에게 하나님의 뜻을 전하게 됩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하여 ‘나는 여호와라’라는 의미를 분명히 알고 저와 여러분의 삶에도 모세에게 말씀하시는 그 음성을 통해 힘과 용기와 소망을 발견하는 시간이 되기시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1. 침묵하시는 하나님(5:22~23절)
5:22~23절을 보시면, 지금 애굽으로부터 학대받는 이스라엘 백성의 눈에는 자신들을 괴롭히는 애굽의 왕 바로 밖에는 보이지 않지만, 모세의 눈에는 하나님이 마치 침묵하시는 것처럼 보입니다. 우리는 이런 질문을 해 봅니다. 과연 하나님은 ‘침묵하시는 하나님’이신가? 우리는 가끔씩 침묵하시는 하나님을 생각하고 또 경험하게 됩니다. 기도해도 응답이 되지 않고, 세상을 살아가면서 나의 일이 잘 안될 때, 불의의 사고나 질병이 나를 덮칠 때 그렇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그럴 경우에 사람탓을 하고, 환경탓을 하고 운명탓을 하지만, 하나님께 대한 믿음을 가진 사람들 중에도 일부분은 자신을 하나님 앞에 돌아보고 주님의 뜻을 찾기보다는 당장은 눈 앞의 현실의 문제를 보면서 ‘왜 나를 이대로 두느냐’ ‘하나님 이럴수가 있냐’하고 하면서 하나님께 섭섭해 하고, 하나님을 원망하고 심지어는 하나님을 떠나는 경우도 가끔은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생각을 가끔씩 합니다. 내가 주님 앞에 충성하는 데도, 하는 일마다 얽히고 꼬여서, 실패만이 연속되고, 그에 더하여 가정의 문제도 생기고 질병도 찾아오고 아픔과 고난과 역경이 계속되는데도 불구하고, 믿는 자신에게 하나님은 왜 아무 것도 하지않고, 내 삶에 개입하지 않으시고, 그냥 가만히 계실까, 왜 그냥 침묵하고만 계실까 하고 생각하게 되는 것이 우리가 일상에서 대하는 침묵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이 아닌가 싶습니다.
성경에도 갑작스런 고난이 찾아온 대표적인 인물이 욥입니다. 믿음으로 하나님만 섬기던 욥에게도 어느날 갑자기 고난이 찾아왔습니다. 엄청난 부자였고, 8명의 자식도 있던 욥이었지만, 어느날 갑자기 자식을 잃게 되고, 재산도 다 날라가고 또한 자신에게 욕창과 같은 병도 동시에 찾아오게 됩니다. 그런 중에서도 욥은 믿음의 고백을 합니다. 욥1:21,22 “이르되 내가 모태에서 알몸으로 나왔사온즉 또한 알몸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 이도 여호와시오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이다 하고 이 모든 일에 욥이 범죄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향하여 원망하지 아니하니라” 욥의 지금 신앙은 참으로 모범적인 신앙입이다. 아무리 극심한 고통과 고난이 다가와도 하나님을 향한 절대적인 신뢰의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믿음의 고백을 합니다. 참으로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아주 모범적인 신앙인의 모습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따라야 할 참 신앙의 모델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런 욥의 고난과 역경 중에서도, 욥의 친한 친구들이 찾아와 욥의 마음을 상하게 할 때에도 하나님은 여전히 침묵하시는 하나님이었지만, 결국 하나님은 욥에게 갑절의 축복을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나 그 과정 과정 속에 욥의 침묵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고백이 나옵니다. 욥23:8,9 “그런데 내가 앞으로 가도 그가 아니 계시고 뒤로 가도 보이지 아니하며 그가 왼쪽에서 일하시나 내가 만날 수 없고, 그가 오른쪽으로 돌이키시나 뵈올 수 없구나” 하나님께서 침묵하신다고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하면 그런 것 같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침묵하신다고 하는 생각은 하나님의 응답과 나타나심을 기다리지 못하는 조급한 사람들의 미련한 생각일 뿐입니다. 하나님은 욥과 같이 하나님을 바라보고 신뢰하고 기다리는 자에게 반드시 응답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침묵하시는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다만 나의 모든 형편과 사정을 모두 다 보고 계시고 합당한 때에 역사하실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나 사람은 하나님의 때를 잘 분별하지 못하고 조급하기에 하나님을 마치 침묵하시는 하나님으로 생각하고 원망하고 불평하는 어리석은 행동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것조차도 어여쁘게 봐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오늘 본문에 모세의 기도인 ‘어찌하여’라는 호소를 하나님은 다 듣고 계십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즉시 응답해주시지 않고 기다리십니다. 그 이유는 바로 우리의 불신앙을 드러내기 위함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십자가 상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본문의 말씀은 십자가 상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네 번째 말씀인데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인류의 죄를 홀로 지시고 십자가에 달리신 독생자 에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아버지를 향하신 철저한 부르짖음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의 처절한 간구를 외면하심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자신의 죄가 전혀 없으시지만, 인류의 죄를 뒤집어 쓰셨기 때문에, 그 분의 부르짖음에 대한 응답은 어둠과 사망이었습니다. 죄에 대한 저주가 바로 어둠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인간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 해도 빛을 잃고 말았습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 없는 삶에 대한 어둠의 심판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상에서의 ‘어찌하여’는 죄에 대한 철저한 하나님의 심판과 그 죄의 값이 얼마나 무서운지를 보여주신 것입니다. 적용의 말씀)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했는데도 오히려 고난이 가중되어 지금 모세와 같이 ‘어찌하여’를 외치고 있는 일이 있으십니까? 하나님은 그 모든 과정을 통해서 나의 믿음없음을 드러내시고, 그 과정 속에서 우리가 하나님만을 전적으로 의지하게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모든 것이 나의 능력과 열심히 아닌 오직 전능하신 하나님의 뜻에 나의 삶이 달려있음을 보여주고자 이런 침묵의 시간, 이런 ‘어찌하여’의 시간을 허락하고 계시는 것임을 우리가 알아야 할 것입니다.
2. 나는 여호와라(6장 1~8절)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 바로의 손이 아무리 크고 강해도 자신은 그 보다 훨씬 큰 존재임을 말씀하십니다. 그러면서 자신의 이름을 ‘여호와’라고 알려주십니다. 3절 말씀에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전능의 하나님으로 나타났으나 나의 이름을 여호와로는 그들에게 알리지 아니하였고”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게 무슨 의미입니까? 3절에 나타난 ‘전능의 의 하나님’이라는 말은 ‘엘로힘’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과 이삭이나 야곱에게는 엘로힘으로 불려졌으나, 여호와로는 불려지지 않았다는 의미인가요? 그런데 창13:4을 보니 아브라함에 관해서 말하면서 “그가 처음으로 단을 쌓은 곳이라 그가 거기서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라고 기록합니다. 또한 창세가 26:25에서도 “이삭이 그곳에 단을 쌓아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고 거기 장막을 쳤더니 그 종들이 거기서도 우물을 팠더라”고 기록합니다. 그런에 왜 하나님은 그들에게 ‘엘로힘’으로는 알려졌으나 ‘여호와’로는 알려지지 않았다고 말씀하시는 것일까요? 이 말씀의 의미는 과거에는 ‘전능하신 하나님’, 곧 ‘약속을 체결하시는 하나님’이셨지만, 지금은 그 ‘언약을 지키시는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즉 과거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는 ‘전능하신 엘로힘 하나님’으로 알려졌던 그 하나님께서 이제는 자신이 ‘약속하신 약속을 친히 실천에 옮기시는 여호와 하나님으로 나타나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세에게 바로의 핍박과 백성들의 불신앙에도 믿음을 잃지 말고 소망을 잃지 말고 용기를 잃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모세 이후의 후계자인 여호수아도 가나안 입성을 앞두고 두려워 할 때 하나님께서 힘을 주시는 말씀을 해주시지 않습니까? 여호수아 1:7~9 “오직 강하고 극히 담대하여 나의 종 모세가 네게 명령한 그 율법을 다 지켜 행하고 우로나 좌로나 치우치지 말라 그리하면 어디로 가든지 형통하리니 이 율법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여 그 안에 기록된 대로 다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네 길이 평탄하게 될 것이며 네가 형통하리라 내가 네게 명령한 것이 아니냐 강하고 담대하라 두려워하지 말며 놀라지 말라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너와 함께 하느니라 하시니라” 하나님은 약속에 신실하신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변개치 않으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사람이 아니시니 거짓말을 하지 않으시고 인생이 아니시니 후회가 없으시도다 어찌 그 말씀하신 바를 행하지 않으시며 하신 말씀을 실행하지 않으시랴" (민수기 23:19) 하나님은 사람과 같이 당신의 말씀을 바꾸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인생들처럼 마음을 쉽게 바꾸시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항상 반드시 약속하신 말씀을 끝까지 지키시는 하나님, 실천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가장 지혜로운 신앙생활을 하는 성도는 신실하신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붙잡고 소망으로 인내하며 또한 그 말씀을 이루실 줄을 믿고 믿음으로 나아가는 자들입니다. 이것이 ’말씀에 근거한 신앙생활‘입니다. 일부 평신도들이 말씀을 토대로 생활하기보다는 ’감정‘을 토대로 살아가기 때문에 실패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하루에도 일곱 번씩 변하는 칠면조와 같은 ’감정‘을 의지하지 말고 변함없는 성경의 가르침을 믿고 따르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기독교 신앙은 단순한 고백이 아니라 실제적인 삶입니다. 우리의 삶 속에서 실천할 수 없는 성경적 원리란 하나도 없고, 우리가 순종할 수 없는 명령이란 하나도 없습니다.
또한 여호와는 어떤 하나님이십니까? 구원하시는 여호와이십니다. 6~8절 말씀을 보시면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의 무거운 짐 밑에서 빼내어 주시고, 노역에서 건지시며 편 팔과 여러 심판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속량하여, 그들을 자신의 백성으로 삼으시고 하나님이 그들의 하나님이 되실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또한 그들에게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을 선물로 주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 일의 결국이 어떻게 될 것을 알고 계십니다. 그러나 출애굽의 역사에 부름 받은 당대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거기까지 바라볼 믿음도 능력도 없습니다. 이스라엘의 지도자 모세도 마찬가지 입니다. 하나님의 사람 모세는 ‘나는 여호와라’고 말씀하시는 하나님 앞에서 다시 힘을 내어서 사역을 시작하려고 합니다. 그런데 애굽의 바로에게까지 가기도 전에 백성들까지도 반대를 하고 나선 것입니다. 9절 말씀입니다. “모세가 이와 같이 이스라엘 자손에게 전하나 그들이 마음의 상한과 가혹한 노역으로 말미암아 모세의 말을 듣지 아니하였더라” 믿음의 눈이 없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현실의 문제로 인해 모세의 말을 듣지 않습니다. 당장 눈앞에 보이는 현실이 어렵기 때문에 원망하고 불평합니다. 하나님의 역사하심에 대해서 마음의 문을 닫습니다. 이 때 현실을 초월할 수 있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성도들을 믿음으로 사는 의인들이라고 말씀합니다.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고 하십니다(롬1:17) 또한 그래서 성도들은 현실의 벽을 뛰어넘으려면 하나님께 대한 믿음이 필요합니다. 히11:6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예수님은 마태복음 17장에서 제자들이 귀신들린 한 아이를 고치지 못하고, 결국 주께서 그를 고치셨을때, 제자들이 조용히 와서 ‘왜 자신들은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였는지?’를 물었을때 주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르시되 너희 믿음이 작은 까닭이니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너희에게 믿음이 겨자씨 한 알 만큼만 있어도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겨지라 하면 옮겨질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마17:20) 만약 우리 안에 ‘겨자씨 만한 하나님께 대한 믿음’이 있더라도 그 믿음대로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이 믿음을 통해 ‘이 산더러 바다에 던지우라’ 할지라도 그 말한 대로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하게 될 것이요, 기도 응답이라고 하는 기적의 삶을 체험하게 될 것이라고 주님을 우리에게 도전하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구원하시는 ‘여호와의 이름을 믿는 믿음’이 그런 기적을 가능케 합니다.
하나님은 오늘 본문 6장 10~13절에 모세에게 말씀하십니다. “들어가서 애굽 왕 바로에게 말하여 이스라엘 자손을 그 땅에서 내보내게 하라” 모세가 처한 상황은 좋지 않지만, 모세 자신도 이 일에 자신이 없어서 “이스라엘 자손도 내 말을 듣지 아니하였거든 바로가 어찌 들으리이까 나는 입이 둔한 자니이다”라고 말하지만, 하나님은 모세의 말에는 아랑곳 하지 않고 ‘너는 네 일을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이렇게 모세가 할 수 있는 근거는 “내가 여호와이고, 내가 너희를 구원하는 여호와이며 내가 그들을 내 백성으로 삼으시는 여호와이며 내가 그들을 인도하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주기로 맹세한 약속의 땅으로 가게 할 것이고, 그것을 그들의 기업으로 삼게 하시는 여호와”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연말이 되면 마음이 분주합니다. 눈 앞의 현실의 문제에 급급합니다. 그래서 자꾸 주님의 일을 내려놓기를 원하고, 믿음으로 행하기를 주저하는 모습이 우리 가운데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나는 여호와라’는 주님의 말씀을 믿어야 합니다. 모세와 같이 현실의 난관에 봉착해 있다하더라도 ‘나는 여호와라’는 말씀을 믿고 믿음으로 전진해야 합니다. 가나안으로 가는 길은 ‘꽃 길’만이 아닙니다. 믿음으로 사는 길에 반드시 ‘평탄한 길’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말씀을 따라 성도가 가는 길은 ‘좁은 문’이요, ‘좁은 길’입니다. 우리가 가는 길은 넓고 평탄해서 많은 이들이 찾는 길이 아닙니다. 외로울 수도 있습니다. 아무도 박수 쳐주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때로는 착각합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니 모든 것이 다 잘될거라고 말합니다. 그 말도 맞습니다. 우리에게는 전능하신 여호와, 우리는 구원해주시고 인도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에 다 잘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그 과정 속에서 넘어야 할 산들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의 성화를 위해 경험해야 할 광야가 많이 있습니다. 욥과 같이 신실하게 살아도 의도치 않은 난관을 만나게 됩니다. 자식을 잃고, 재산이 한 순간에 날아가고, 자신의 몸은 욕창으로 고통당합니다. 그럴 때 조차도 욥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욥 23:10 “그러나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 같이 되어 나오리라” 하나님은 나의 믿음의 연약함을 아시고 그에 합당한 광야의 훈련과정을 준비하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이 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바로 여호와 하나님께 대한 믿음입니다. 힘든 상황조차도 하나님의 선하시고 완전하신 계획 속에 있음을 믿는 믿음입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8:28)는 말씀을 믿고 나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것 때문에 오늘도 모세에게 몇 번이나 반복해서 ‘나는 여호와라’고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나는 약속을 체결할 뿐 아니라 그것을 지키는 여호와이다. 나는 너희를 구원하는 여호와이다라고 반복적으로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이스라엘 백성들과 같이 애굽의 노예생활을 벗어나기 위해 새로운 믿음의 세계로 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고난의 터널을 극복하고 통과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나는 여호와라’는 주님의 말씀을 믿는 ‘믿음이 필요함을 강조하십니다. 광야생활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나는 여호와라’는 확신을 가지고 믿음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나는 여호와라’는 말씀을 믿고 모세는 다시 애굽의 왕 바로에게 나아갑니다. 우리도 모세와 같이 ‘나는 여호와라’는 말씀을 믿고 여전히 복잡하고 힘든 난관에 휩싸여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낙담하거나 좌절하지 말고, 뒤로 물러나지 말고 삶의 현장인 애굽으로 나아가며, 푯대를 향해서 힘차게 전진해 나아가시지 않겠습니까? ‘나는 여호와라’ 찬송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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