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15세기 이후 師承과 인물
1) 출사 단념의 情緖 정착
조선건국 이후 계유정란 등 왕자의 란과 무오(戊午)․갑자(甲子)․기묘(己卯)․을사(乙巳) 등 4대 사화와 기축옥사․임진왜란과 병자호란․예송논쟁 등 잇따른 내우외환의 정변을 거치면서 전라도 출신 인재들은 출사를 접는 정서가 자리 잡게 된다. 이런 지역정서를 반영하듯 고산(孤山) 윤선도(尹善道) 이후 중앙정계에서 영향력을 발휘한 명망 있는 인물은 배출되지 않았다. 대부분의 사림들은 임천(林泉)에 은거(隱居)하며 평생 동안 학문을 하며 생애를 마친다. 그렇다고 대단한 학자가 배출되지도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금남(錦南) 최부(崔溥․1454~1504)가 사림의 종장인 김종직(金宗直)의 문하생이라는 이유로 죽임을 당한 이후 고산(1587~1671)이 예송논쟁 등으로 14년이나 귀양살이를 하고 타계할 때까지 167년간 정계에 진출한 선비들은 피해를 입지 않은 인물이 없을 정도이다. 그 중에서도 금남(錦南) 임형수(林亨秀․1514~1547) 같은 이는 소윤 윤원형(尹元衡) 주도의 을사사화와 양재역과 나주벽서사건으로 사약을 받으면서 10세아들에게 벼슬하지 말라는 유언을 남기면서 타계했다.
따라서 17세기 이후에 남도가 배출한 인물은 열손가락으로 꼽을 정도에 불가하다. 15,6세기 약 200여 년 간 그렇게 많이 배출되던 인물이 일시에 전멸된 사실은 지금 생각해도 불가사의할 일이다. 아무리 정계진출의 입지를 접은 정서가 형성됐다고는 하지만 17세기로 접어들면서 마치 칼로 자르듯 동강이가 난 형국이다. 이때부터 호남에서는 실학자 몇몇이 나왔을 뿐이다. 그래서 이후 사승은 인물을 내세울 수 없으며, 그저 어느 스승의 문하로 들어가 배웠느냐는 사승관계를 알아보는 것이다.
학문을 잇는 사승(師承)형태도 이전과는 현격하게 달라진다. 예전의 사승은 주로 유배인이나 벼슬아치가 제자들을 가르쳤던 형태였다. 그러나 17세기부터는 예외가 있지만 유배인에게 배운 것을 제외하면 임천에서 학문에 전념하는 유학자(儒學者)의 문하생으로 들어가 배우는 풍토가 조성됐다. 그러나 그들의 제자들이 과거시험에 합격한 경우는 매우 드물었다. 지역출신 선비들의 실력이 없어서 일까? 이는 조선의 관료사회가 부패해 엽관적인 연줄이 아니면 벼슬을 할 수 없는 풍토였기 때문이다.
실력이 있어도 과거에 응시하자면 비용이 적지 않게 소요된다. 기본적으로 이것저것 잔심부름을 해줘야 할 하인이 필요하다. 서울까지 가자면 말(馬)도 부려야 한다. 남도 응시생들의 경우는 편도만 보름 이상 걸려야 닿을 수 있다. 그러자면 여관에 묵어야 한다. 당연히 숙박비용이 적지 않게 소요된다. 서울에 도착해도 여관에서 여러 날 묵으면서 시험에 대비해야 한다. 그 비용이 만만치 않아 웬만한 농가에서는 응시 자체가 불가능하다. 한두 번도 아니고 수년간 응시하자면 살림이 기울기도 했다. <필자 주>
2) 留學에 의한 집단적 師承
조선 후기로 접어들면서 교육의 형태도 크게 달라져갔다. 조선 전기의 소수의 엘리트를 지도하던 형태를 벗어나 제자의 숫자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 것이 특징이다. 그만큼 인구가 늘어나고 교육에 대한 관심이 많아졌기 때문으로 보인다. 그런 연유로 명망 있는 스승의 문하에는 많게는 수 백 명, 적게는 수 십 명의 제자가 모여들었다. 일종의 사립학교와 같은 집단적인 교육방식이 나타난 것이다. 제자들의 출생지도 특정 지역에 그치지 않고 전국적인 규모로 변화되는 추세를 보였던 것이다.
인사는 만사라고 하는데 출사를 단념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은 실력있는 선비의 등용이 막히고 결국 나라에 피해를 가저오는 결과를 가져 왔습니다. 안타갑습니다.
오늘도 원산형님 덕분에 조선시대의 역사공부를 하게 되는군요.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