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 학 수*
〈目次〉 1. 머리말 2. 가계 3. 학문의 연원과 사우관계 4. 「己巳山林」이현일 1) 징소와 입조의 배경 2) 정치적 난맥상 3) 산림으로서의 위상 4) 갑술환국과 정치적 보복 ―名義罪人· 護逆· 伸寃― 5. 맺음말
1. 머리말
이 논문은 17세기 중후반 영남의 대표적인 유학자이며 정치가로 활동한 葛庵이현일의 山林政治家로서의 활동과 의의와 구명하는 데 목적이 있다. 이현일은 17세기 영남남인의 政治的인 침체 속에서도 숙종조에 산 림으로 징소되어 정치적인 현달을 구가한 대표적 인물이었다. 그는 자파의 집권기에 징소되어 특대를 누린 영남산림의 처음이자 마지막 인물이기도 했다. 이현일이 정치사적으로 주목되는 이유도 바로 여 기에 있다. 지금까지 산림에 대한 연구는 주로 기호산림을 대상으로 하여 진
* 한국정신문화연구원 한국학대학원 박사과정.
행되어 왔다. 이 지역은 다른 지역에 비해 산림을 양산하였고 또 정 치적인 비중이 높은 산림이 많이 배출되었다는 점에서 연구자의 관 심이 쏠리기 마련이었다. 덕분에 기호지방 산림의 존재형태와 정치 적인 역할과 성격에 대해서는 적지 않은 성과를 볼 수 있었다. 이처럼 산림연구가 비교적 활발하게 진행되는 동안에도 영남 산림 은 그다지 주목되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산림은 기본적으로 정파의 부침과 운명을 같이하는 특성이 있다. 인조반정 이후 남인이 집권한 것은 숙종조의 두차례에 불과하기 때문에 남인을 표방하고 있던 영 남에서 산림을 배출하기는 그만큼 어려웠다. 이렇게 볼 때 영남 산 림에 대한 연구가 활성화 되지 못한 것은 산림이 극히 제한되어 있 다는 데 기인한다. 그러나 영남은 남인의 본거지로 인식될 정도로 거대한 정치집단을 보유한 지역이었다. 조선후기 이래로 권력의 실 세로 대두된 적은 없었지만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정치집단이 형성된 곳이었다. 후일 노론과 소론들이 영남을 자파로 끌어 들이기 위해 치열한 공방전을 전개했고, 특히 노론들이 영남의 노론화에 부심했 던 것은 바로 이러한 면을 의식했기 때문이었다. 본고에서 이현일을 연구 대상으로 삼은 것은 그가 조선후기를 통 틀어 영남 산림으로서는 가장 전형적인 인물로 인식됐기 때문이다. 인조조에 장현광이 산림으로 발탁되어 우찬성에까지 승진한 전례가 있었지만 당시는 서인정권이었고, 김장생․박지계의 발탁에 따른 구 색을 맞추려는 성격이 농후하였다. 따라서 자파의 집권기에 징소되 어 특대를 누리고 정치적인 영향력을 끼친 인물은 이현일이 유일하 다고 해도 무리는 아닐 듯 싶다. 그리고 이현일 이후 영남에서 산림 으로 징소된 인물이 부재했던 상황을 고려할 때, 영남 산림의 전형 으로서의 면모는 더욱 선명해진다. 지금까지 이현일에 관한 연구는 ‘四端七情論’, ‘人心道心說’ 등 주로 사상적 차원에서 전개되어 왔다.1) 그리고 이현일의 정치활동에 대해
1) 지금까지 李玄逸에 관한 硏究는 아래와 같이 대체로 사상적 차원에서 진행되었다. 玄相允,『朝鮮儒學史』, 民衆書館, 1949.
서는 山林硏究의 일환에서 일각의 연구가2) 진행되는기는 했지만 정 치활동의 전반을 구명하는 데는 미진한 점이 없지 않았다. 따라서 본 논문에서는 이현일이 산림으로 발탁됨에 있어 토대가 되었다고 생각되는 가문의 배경, 학문의 연원, 사우관계를 우선적으 로 검토한 다음 산림정치가로서의 활동을 고찰하여 그 의의를 구명 하고자 한다.
2. 가계
이현일(1627-1704)은 17세기 중후반에 주로 활동한 유학자이며 정 치가로서 학문적으로는 退溪學의 正統을 계승하였고, 정치적으로는 숙종조 남인집권기에「己巳山林」으로 활동한 인물이다. 그의 字는 翼升, 號는 葛庵․南嶽, 본관은 載寧이다. 그는 진사를 지낸 李時明 (1590-1674)과 安東張氏사이의 셋째 아들로 1627년(인조 5) 寧海府 仁良里(世稱나라골)에서 출생하였다. 안동장씨는 金誠一의 적전으로 일컬어지는 張興孝(1564-1633, 敬堂)의 女息으로서 이현일 형제가 학 문적으로 대성하는 데 절대적인 영향을 미치게 된다. 이현일의 선대는 여말선초까지 영남의 密陽․咸安등지에 세거하 였는데, 고관이나 석학의 배출은 비교적 적었다. 다만 이현일의 7대 조 午(進士)가 고려말에 不事二君의 충절을 지킨 節士로서 鄭逑의 『咸州誌』에 수록되어 있는 정도이다. 이러한 가운데 재령이씨의 성 장에 전기를 마련한 인물은 이오의 손자이며 이현일의 5대조인 李孟
裵宗鎬,『韓國儒學史』, 연세대학교 출판부, 1983. 劉明鍾,『朝鮮後期性理學』, 以文出版社, 1988. 琴章泰,「葛庵李玄逸의 四七論」,『제2회 동양문화국제학술회의 논문 집』, 1980. 이애희,「이현일의 사단칠정론」,『사단칠정론』, 1992. 정호훈,「17세기 후반 영남남인학자의 사상-이현일을 중심으로-」,『역 사와 현실』13, 1994. 2) 禹仁秀,「朝鮮肅宗代政局과 山林의 機能」,『國史館論叢』43, 1993. 李秉甲,「政策過程에 있어 儒林의 利益表出」,『安東文化』5, 1984.
賢(1426-1487)이다. 이맹현은 1459년(세조 5) 문과에 壯元하여 세조 의 총애를 받은 인물이다. 당시 미혼이던 그는 세조의 배려에 힘입 어 훈신 尹三山의 사위가 되기에 이른다. 이 혼인은 이맹현에게 宗 室의 외손서라는 영광을 안겨다 줌으로써 혼반이 상승하여 재령이씨 의 문호가 확충되는 전기가 되었다. 이맹현은 1466년(세조 12)에 文科重試에도 합격한 수재로서 경사 에 해박하여 10년 동안 경연관으로 활동하는 가운데 1467년에는 鄭 麟趾, 姜希孟, 梁誠之, 成俔과 함께『詩經』의 口訣을 교정하였고, 1469년에는 김해부사로 재직하면서 경상감사 金從舜과 함께『慶尙道 續纂地理誌』를 편찬했다.3) 이런 가운데 당대의 석학 徐居正, 金守溫 에 비견되었고, 영남사림파의 영수 金宗直과도 교분이 두터웠다. 이 런 맥락에서 그는 재령이씨 가문의 중흥조이며 家學의 淵源으로 인 식되었다. 한편 재령이씨 가운데 영해에 입향한 인물은 이맹현의 아들 李璦 (1480-1561)이다. 그는 영해부사로 부임한 중부 李仲賢을 시종하는 과정에서 이 지역의 大姓이던 大興白氏와 혼인하여 영해에 정착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애는 무과 출신이었던 만큼 학문적인 기반이 견고 하지 못하였고 관직도 현령에 그침으로써 사회적인 기반도 확고하지 못했다. 더욱이 당시는 입향 초기로 재지적인 기반이 미약한 데다 중년 이후에는 영해를 떠나 서울로 돌아가려는 계획까지 세우는 등 정착 과정에서 다소 어수선한 면이 있었다. 그러나 이애는 병환으로 還京하지 못하고 영해에서 병사함으로써 재령이씨 일문은 영해에 정 착하게 되고 자신은「寧海派」의 派祖가 되었다. 재령이씨는 입향 2대인 李殷輔(1520-1580)에 이르러 다소 활기를 띄고 있었다. 그는 관직에 오르지는 못했지만 好文의 선비로서 수많 은 서적을 구비하여 자손들이 학문할 수 있는 여건을 조성해 가고 있었다. 이러한 가운데 그는 영남사림파의 주요 가문들과 통혼하면 서 재지사족화의 길을 재촉하고 있었다. 李殷輔代에 마련된 통혼권
3)『密庵集』卷23,〈密庵自序〉․〈家世故事〉. 이하 이 부분을 참고한 서술은 각주를 생략한다.
을 살펴보면 安東金氏(金光粹系)․全義李氏(李純應系)․英陽南氏(南 慄系), 全州崔氏(崔睍系) 등 영남의 명망가문으로 확산되었는데, 이는 통혼의 범위가 영해권에서 안동권으로 확대되었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때만 하더라도 혼반의 상승에 비해 학문적인 기반은 다 소 취약한 것이 사실이었다. 이런 가운데 이은보의 아들 李涵이 黃 應淸(1524-1605)․金誠一兄弟를 종유하며4) 학연을 넓혀 가고 명사 와의 교유를 통해 사회적인 기반을 강화하면서 家格의 신장과 학문 적인 번성을 예견할 수 있었다. 황응청은 평해 출신으로서 趙穆의 지우를 입은 문인이었고, 김성일 형제는 안동의 명문 의성김씨 출신 으로 6형제 모두가 이황의 문인이었다. 이함은 유년기부터 황응청에 게 수학하여 1588년(宣祖21)에는 진사시에 합격하였다. 이후 30세를 전후한 시기부터는 김성일을 종유하였다. 이는 그의 사우관계가 영 해․평해일대에서 안동일대로 확장되었음을 의미한다. 이후 이함은 1609년(光海君1) 문과에 급제하여 유풍을 진작함으로써 유학의 불 모지이던 영해에 文運을 일으킨 인물로 평가되었다. 이함의 역할에 있어 간과할 수 없는 것은 자손들이 학문을 할 수 있는 토대를 강화한 점이다. 그는 경제적 기반을 확충하는 가운데 부 이은보 이래 심화된 가문의 학문적 분위기를 더욱 고조시키게 된 다. 이것을 가능하게 해 준 것은 역시 풍부한 경제력이었다. 그는 임 진왜란 당시 관군에 군량미를 제공할 정도로 풍부한 경제력의 소유 자였다. 이러한 사실은 재령이씨 종택에 소장되어 있는 고문서자료 에서도 확인되고 있다.5) 이런 가운데 그는「大訓」․「遺戒」․「論學 說」(『雲嶽先生文集』卷二)을 지어 자손들을 면려하고 무안박씨(朴 毅長系)․진성이씨(李希顔系․李河系)․안동장씨(張興孝系)와의 혼인 을 통해 학문적 기반과 사회적 기반을 동시에 강화해 가고 있었다. 특히 진성이씨․안동장씨와의 통혼은 재령이씨가 영남학파의 주요가 문으로 편입될 수 있는 전환점이 되었다.
4)『雲嶽先生文集』卷3,〈行狀〉. 5) 文叔子,「載寧李氏寧海派家門의 分財記分析」,『淸溪史學』9, 1992.
바로 이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재령이씨는 학문적인 번창을 예견하 며 李時淸․李時明과 같은 학자를 배출하게 된다. 이시명은 이미 유 년기에 부친 이함의 宜寧임소에서 郭再祐를 만나 절조를 인정받았 고, 정경세가 자신의 사위 송준길과의 교유를 주선하는 등 사림에서 의 명성도 높았다. 그는 前娶처부 金垓와 後娶처부 장흥효의 학문 적인 영향을 받으면서 퇴계학의 정통을 접하는 가운데 학문적, 사회 적 입지도 강화되어 영해․안동일대에서 상당수의 문인을 배출하였 고, 영남사림을 대표하여「牛栗陞廡反對疏」를 찬하기도 했다.6) 그리고 혼맥에 있어서도 이시명 이전에는 영남학파 주요 가문과의 간접적인 통혼에 그쳤다면 이시명의 경우는 김성일의 高弟장흥효의 사위가 되었다는 점에서 종전과는 양상을 달리하고 있었다. 이는 후일 재령이씨가 영남사림파의 일원으로 당당하게 행세하는 기반이 되어 이현일 형제의 학문적인 성장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이상 의 언급과 관련하여 이현일가문의 가계도를 작성하면〈圖1〉과 같다.
〈圖1〉李玄逸家系圖
6)『石溪集』卷2,〈論牛栗從祀〉.
3. 학문의 淵源과 士友關係
1) 학문의 연원
일반적으로 이현일의 학문은 김성일의 고제이며 자신의 외조인 장 흥효에게서 淵源하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으며,『葛庵集』(「年譜」 〈二十六年戊子〉)의 기록도 이러한 인식체계를 반영하고 있다. 이는 부친 이시명이 장흥효의 사위로서 敬堂門下의 고제로 평가되었고, 이현일은 중형 이휘일과 함께 家學을 철저히 계승했다는 인식에 기 초한다. 그러나 엄밀히 말해서 李時明의 학문에 우선적으로 영향을 미친 쪽은 장흥효보다는 前娶妻父金垓(1555-1593)였다. 김해는 영남사림 파의 대표적인 가문인 光山金氏禮安派출신으로 父富儀· 伯父富 弼․從叔富仁․富信․富倫모두 이황의 문하를 출입하여 永川李氏 (李賢輔․德弘系列)․奉化琴氏(琴蘭秀系列)․橫城趙氏(趙穆系列)와 더 불어 예안을 대표하는 退溪淵源이었다. 특히 그의 부친 김부의(1525 -1582)는 이황의 초기 문인으로 학문과 행실을 인정받았으며, 易東書 院건립시에도 적극적으로 협조하는 등 斯文의 현양에도 주력하였 다. 이렇듯 김해는 이황의 학문을 가장 잘 체득할 수 있는 여건을 갖 춘 가문의 자제였다. 그는 禮學에 능통하였고, 弱冠에 이미 유림의 중망을 입어 學行으로 천거되기도 했다.7) 특히 그는 이황의 문하에서 직접 수학하지 못한 것을 통탄하였으며, 李珥가 李滉의 理氣說을 비 판하자「理氣說」을 지어 재비판할 정도로8) 퇴계학의 충실한 계승자 이며 우호자였다. 이시명은 김해의 사위가 되어 光山金氏一門에 출입하는 과정에서 이황의 道學을 실질적으로 체험할 수 있었다.9) 따라서 이시명에 있어 광산김씨는 단순히 처가로서의 차원을 넘어 학문적인 모태로 이해할 수 있다. 이시명의 장자 이휘일이 장흥효의 사후에 김해의 아들 金 光繼를 종학하였고,10) 김해의 손자 金이 이휘일․이현일형제를 도 산서원에 초대하여『退溪集』의 강의를 주선하였으며, 이현일이 김해 의 墓誌銘을 찬한 사실에서도 학연과 혼맥에 따른 世誼의 지속성을 발견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관계는 김해의 현손 金岱가 이현일 의 문인이며 사위가 되는 단계로 진전되기에 이른다. 그러나 광산김씨가 장자 尙逸을 두고 사망한 뒤 장흥효의 딸 안동
7)『光山金氏禮安派譜』〈金垓條〉. 8)『近始齋集』卷3,〈理氣說〉. 9)『石溪集』卷5 附錄,〈行狀〉. 10)『葛庵集』卷26,〈李徽逸行狀〉.
〈圖2〉光山金氏禮安派家系圖
장씨를 두번째 부인으로 맞이하는 과정에서 학문적인 흐름이 선회한 것이 사실이다. 안동장씨는 名儒의 女息답게 사덕을 겸비한 정숙한 여성이었으며, 학식과 문장이 출중하고 필법에도 상당한 조예를 지 닌 지성이었다.11) 안동장씨의 이러한 자질과 소양은 자손들의 훈육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치게 되는데, 이휘일․이현일 형제에 대한 관심 과 기대는 물론이고 손자 栽에게 眞儒의 바램을 담은 면려의 詩를 증여한 사실에서도12) 자손들의 교육에 쏟은 그녀의 정성을 짐작할 수 있다. 결국 이시명은 광산김씨로부터의 학문적 영향이 적지 않았지만 장 흥효의 사위가 된 이후부터는 후자와의 관계가 더욱 중시되는 경향 이 있었다. 이는 이휘일․이현일의 형제들이 안동장씨의 외손이라는 사실을 반영하는 것으로 후대로 갈수록 이러한 인식은 더욱 심화되
11)『張夫人實紀』附錄,〈行實記〉․〈壙誌〉. 12)『張夫人實紀』〈贈孫聖及栽小字〉.
었다. 혈연적인 유대에 더하여 김성일의 적전이던 장흥효의 위상이 金垓보다는 장흥효쪽으로의 귀속성을 심화시켰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그리고 광산김씨의 외손 尙逸에게 아들이 없어 아우 隆逸 (張氏出)의 아들로 계후하는 과정에서 광산김씨와의 실질적인 혈연 성이 단절된 감도 있다. 한편 이현일의 학문연원과 관련하여 결코 간과할 수 없는 인물은 黃應淸이다. 그는 이함․이시명부자가 사사한 인물이기 때문이다. 이 함은 황응청의 고제였고, 아들 이시명 또한 그의 문인임을 자처하였 다.13) 후일 이시명이 황응청의 행장을 찬하고 鄕社의 奉安文과 常享 祝文을 지은 사실에서도 양측의 돈독했던 학연을 실감할 수 있다. 그러나 황응청과의 학연 역시 장흥효의 명망에 가려 부각되지 못했 다. 한편 장흥효는 흔히 김성일․유성룡 두 문하의 고제로만 알려져 있지만, 정구의 문인이기도 했다.14) 김성일에게서는 학문의 방법을 배 웠으며, 김성일의 사후에는 유성룡의 문하에서 理氣와 存心養性의 要訣을 배웠다고 한다. 정구와의 사제관계는 김성일의 行狀을 촉탁 하는 과정에서 이루어졌는데,15) 김성일․유성룡에 비해 단시적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비록 짧은 기간이었지만 적지 않은 문답이 있었 으며, 이후 여러 차례에 걸친 問目은 매우 심도있는 내용들이었다.16) 따라서 학문적인 관계로 본다면 김성일․유성룡에 못지 않게 밀접하 였다. 이처럼 장흥효는 이황의 3고제인 김성일․유성룡․정구의 문 하를 두루 출입한 인물이었다. 그러나 당대의 상황과는 달리 시간이 지날수록『葛庵集』(「年譜」) 의 기록과 같이 김성일․유성룡의 고제라는 사실이 중시되었고, 그 중에서도 김성일과의 관계가 더욱 부각되었다. 이 과정에서 정구와
13)『石溪集』卷3,〈大海堂黃先生鄕社奉安時記〉. 14)『寒岡全書』「檜淵及門諸賢錄」卷2,〈張興孝條〉;『敬堂集』卷2, 附錄〈行 狀〉. 15)『敬堂集』卷1,〈南行錄〉. 16)『敬堂集』卷1,〈答寒岡先生書〉;『敬堂集』「續集」卷1,〈上寒岡先生問 目〉.
는 종유관계로 인식되기도 했다.17) 이는 김성일․유성룡을 절대적으 로 추중하던 安東圈의 인식을 반영하는 것으로서 이휘일이 지은 장 흥효의〈行狀〉에서도 그 일단을 살필 수 있다.18) 그러나 이현일은 『敬堂集』의 발문에서 이황→김성일→장흥효로 이어지는 학통을 부 각함으로써 김성일 계열의 학통을 자처하였다.19) 이는 후일 재령이씨 가 의성김씨와 더불어 김성일 계열을 대표하는 가문으로 인식되는 실질적인 계기가 되었다. 한편 장흥효의 학문을 보다 직접적으로 계승한 인물은 이현일보다 는 이휘일이었다. 이는 이현일을 중심으로 하는 사림 전반의 인식이 기도 했다. 특히 이현일은 이휘일을 장흥효의 학문을 확충시킨 인물 로 평가하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20) 바로 이점에서 이휘일이 지니는 학통상의 입지를 충분히 가늠할 수 있다. 이휘일은 장흥효의 사후에 는 權益昌(1562-1645)․金光繼․金應祖를 종유하였는데, 권익창으로 부터는 ‘傳經刻苦’, 김광계로부터는 ‘博洽溫雅’, 김응조로부터는 ‘淸修 簡靜’의 칭송을 듣는 등 당시의 명유들로부터 학문과 덕행을 인정받 았다.21) 조부 이함이 자손들을 면려하기 위해 지은「大訓」도 사실상 이휘일에게 증여된 것이었으며,22) 병환 중에 어머니 안동장씨 장씨로 부터 받은 서한에는 자식의 병환을 우려하고 학문의 완성을 기대하 는 慈情이 넘쳐 흐르고 있었다.23) 이처럼 이휘일은 일찍부터 가문의 기대를 받았으며, 이후 장흥효를 사사하고 명사들과 교유하는 과정 에서 學德을 온축할 수 있었다. 특히 그는 유년에 장흥효를 사사한 이래 장흥효의 心法을 체득하고 학문을 확충시킴으로써 外祖-外孫의 차원을 넘어 학통의 전수관계로 발전하여 당대에 이미 이황→김성일
17)『敬堂集』〈敬堂先生文集序〉. 18)『存齋集』卷6,〈敬堂先生行狀〉. 19)『葛庵集』卷21,〈書外大父敬堂張公遺集後〉. 20)『存齋集』卷8, 附錄〈李徽逸行狀〉. 21)『存齋集』卷8, 附錄〈李徽逸行狀〉. 22)『雲嶽集』卷2,〈大訓〉;『石溪集』卷3,〈書先君子贈徽逸五倫說後〉;『葛 庵集』卷20,〈惇典祽語序〉. 23)『張夫人實紀』,〈寄兒徽逸〉.
→장흥효→이휘일로 이어지는 學統이 시사되고 있었다.24) 장흥효의 유문를 정리하여『敬堂集』을 편집한 이도 바로 이휘일이었다. 결국 이휘일은 장흥효의 직계 자손이 번창하지 못한 상황에서 외 손으로서의 혈연적인 입지를 바탕으로 학통의 계승자로 대두될 수 있었던 것이다. 이현일의 幼長年의 학문활동과 사림활동도 거의 이 휘일의 영향 아래에서 이루어졌으며, 20대에서 30대에 이르는 약 10 년 동안은 본격적인 從學期에 다름 아니었다. 이처럼 두 사람은 형 제인 동시에 지기였으며 학문적으로는 사제관계에 방불하였다. 그러 나 이휘일은 가문의 기대와 사림의 여망 그리고 출중한 학문적 자질 에 비해 일찍 사망하였으며, 문인기반도 견고하지 못했다. 더욱이 아 들까지 없어 이현일의 차자 李檥가 계후하는 등 학문 외적인 기반이 취약하였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이현일은 이황의 三傳弟子로서 영남사림을 광 범위하게 규합하여 退溪學의 수호와 정립에 기여하였고, 정치적으로 도 현달함으로써 어느 면에서나 이휘일의 입지를 상회하였다. 더욱 이 아들 李栽(1657-1730)가 자신의 학문을 충실히 계승하여 명유로 성장함으로서 이현일의 입지는 더욱 강화되었다. 특히 이재는 이황 의 主理論을 더욱 강화하는25) 한편 權斗經(1654-1725)과 더불어 이황 의 현양과 영남학파의 외연 정비에도 주력하여『朱書講錄刊補』․『陶 山言行通錄』․『陶山及門諸子錄』의 편찬을 주간하기도 했다. 이재의 이 모든 행적들은 李玄逸→李栽로 이어지는 도통의 전수관계를 보다 선명하게 하였다.
2) 사우관계
이현일의 사우관계는 그의 학문적, 정치적 명성에 걸맞게 경향에 걸쳐 광범위하게 형성되어 있었다. 30대까지는 주로 영해․안동을 중심으로 한 영남일대에 집중되어 있었지만 40대 이후에는 근기지역
24)『存齋集』卷8, 附錄〈權尙精祭存齋文〉. 25)『密庵集』卷10,「錦水記聞」.
으로까지 확대되었고, 50대 이후에는 중앙의 官僚群과의 교류가 활 성화 되었다.『葛庵集』에서 확인되는 근기남인과의 교유상을 대략적 으로 정리하면 아래와 같다.
〈표 1〉近畿南人과의 交遊關係
이제 趙絅의 방문으로 시작된 근기인사들과의 관계부터 개략적으 로 살펴보기로 한다. 1668년(현종 9) 조경의 방문은 親命에 의한 것이었고, 과거를 위해 상경했다가 고향으로 돌아오는 길에 이루어졌다. 李時明은 병자호란 의 치욕을 경험하면서 점차 세상과 절연하고 있었는데, 1653년에 지 은「石溪記」는 은거의 의지를 천명한 것이었다. 조경은 일찍이 監試 官으로서 영남에 왔다가 이시명의 文才를 알고 허교하는 사이가 되 었다. 그런데 병자호란 이후 이시명이 세상과 인연을 끊자 서한을 보내 처세를 높이 평가하고 이현일 형제의 출중함을 아울러 칭송한 일이 있었다.26) 이시명은 평소 존경하던 조경이 자신을 知己로 대우 26) 趙絅의『龍洲集』에는 이 서한이 수록되어 있지 않다. 그러나 이현일의 아들 李栽의『密庵集』에는「跋龍洲趙文簡公手帖」(卷14)이라는 제목으로 이 서한의 내력을 설명하고 全文을 부기할 정도로 매우 중시하고 있 하는 것에 감동하여 사례 차 이현일을 보내 문안토록 한 것이었는 데, 조경이 사망하기 한해 전이었다. 조경이 워낙 노쇠하여 필답에 그치기는 했지만27) 조경의 방문은 근기남인과의 최초의 교유이며 남 인 원로와의 접촉이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가 있다. 그리고 조경 과의 관계는 아들 趙威鳳까지 지속되어28) 이현일의 입지를 향상하는 데 적절한 기반이 되었다. 근기남인과의 교류에 있어 간과할 수 없는 인물은 허목과 尹鑴이 다. 허목은 남인의 이론가로 활동하는 과정에서 元老로서의 입지를 굳히는 한편 숙종초기 남인집권기에는 청남의 영수로 활동한 인물이 다.29) 그는 숙종의 예우와 사림의 추중을 한몸에 받으면서 숙종초기 남인정국을 영도하였다. 그런데 그가 예기치않게 이현일을 천거한 것이다. 허목은 1677년(숙종 3) 이현일을 천거하는 과정에서 眞儒로 극찬하며 경연의 적임자로 부각시켰다.30) 양인의 교류는 바로 이 천 거 과정에서 비롯되었고 종전까지 면식이 없던 두 사람은 이를 계기 로 상면의 기회를 가지게 된다. 후일 이현일이 허목의 아들 許咸羽에 게 보낸 서한에는 허목의 지우와 장려에 대한 감사의 마음이 감동적 으로 서술되어 있다.31) 허목은 이현일의 학행을 깊이 신뢰하고 있었 기 때문에 천거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이현일에 있어 허목 의 천거는 京鄕모두에서 입지의 상승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이런 선상에서 이현일은 숙종 8년 허목의 사망에 즈음하여 世道의 쇠퇴를 우려하였고,32) 1703년 허목의 檜原書院(昌原所在) 입향을 두고 논란이 제기되자 配享의 정당성을 표명하는 등 그에 대한 존경은 각별하였 다.33) 다만 한가지 의아스러운 것은 이들은 당시 근기와 영남을 대표 다.
27)『葛庵集』卷8,〈上趙龍洲〉. 28)『葛庵集』「別集」, 卷3,〈答趙子羽威鳳〉. 29) 金駿錫,「許穆의 禮樂論과 君主論」,『東方學志』54․55․56 합집, 1987. 30)『肅宗實錄』卷6, 3年5月癸卯;『葛庵集』「年譜」,〈三年丁巳〉. 31)『葛庵集』卷14,〈與許安峽咸羽〉. 32)『葛庵集』卷10,〈答權春卿壬戌〉. 33)『葛庵集』卷11,〈答權天章癸未〉.
할 만한 학자였던 만큼 학문적인 접촉이 있었을 것으로 짐작되지만 확인되는 것이 없다. 굳이 학문적인 관계로서 결부시키자면 허목의 예설을 비판한 이현일의 服制疏가 유일할 뿐이다. 한편 윤휴와 이현일은 성향에 있어 공감되는 부분이 많았다. 이현 일는 복제소에서 윤휴와 예학적인 입장을 같이하였고,34) 조야로부터 용인되지 못하던 윤휴의 북벌론을 국가의 안위를 위한 중대사로 평 가하며 그 구체적인 방안에 대해 관심을 표명하기도 했다.35) 그리고 端宗의 복위와 사육신의 복관에 있어서도 두 사람의 인식은 동일한 맥락으로 파악되고 있다. 윤휴는 단종 복위의 정당성을 강변하며 허 목의 동참을 촉구하였으나 허목이 거절함으로써 관계가 미편해지고36) 끝내 성사되지 못한 일이 있었다. 그런데 이현일은 숙종 17년 사육 신의 복관치제를 적극 찬성하였는데,37) 이는 단종의 복위를 주장했던 윤휴와 인식의 틀을 같이하는 것이다. 더욱이 이들은 출처관에 있어서도 공통점이 많았다. 윤휴는 소명 을 거절하고 도도하게 구는 태도는 군신의 의리를 自斷하는 것이며 자신의 주가를 높이려는 처사로 비판하는38) 등 출사에 있어 적극적인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이현일도 일찍이 아들 李栽가『尙友編』을 편 찬하자, “君子란 道가 있으면 나타나고 道가 없으면 숨는 법이지만, 속히 나가려 하거나 처음부터 숨으려 해서는 안되는 것”39)이라 경계 한 바 있는데, 이는 출처의 신중성을 강조한 것이지만 그 이면에는 출사에 대한 적극성이 내포되어 있다. 기사환국 이후 이현일이 윤휴의 致祭를 적극적으로 건의하고40) 윤 휴의 3자 尹夏濟가 이현일의 문인이 되어 활발한 問答을 가질 수 있 었던 것도 양인의 각별했던 관계와 인식의 동질성에 기반한다.
34)『葛庵集』卷2,〈擬論大王大妃服制疏〉. 35)『葛庵集』卷8,〈與尹白湖〉. 36)『記言』「別集」卷6,〈與權監司脩〉. 37)『葛庵集』卷5,〈六臣復官致祭賜額議〉. 38)『白湖全書』卷16,〈與韓仲澄〉. 39)『密庵集』「年譜」,〈十三年壬子條〉. 40)『肅宗實錄』卷21, 15年10月戊辰.
이러한 정황을 종합할 때, 윤휴와 이현일 모두 갑술환국 이후 청 남계의 기피 인물로 인식된 것도41) 단순히 우연만은 아닐 것이다. 그 리고 양인간의 관계가 여기에 그쳤다고 한다면 무언가 석연찮은 점 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왜냐하면 예론과 북벌론에 있어 입장을 같 이한다는 것은 당시로서는 상당한 교감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두 사람 사이에는 지금까지 서술한 내용 이상의 교류가 있었을 것으로 짐작되지만『白湖全書』와『葛庵全書』에는 이 이상의 관계는 확인되 지 않는다.42) 다음은 이현일의 사우관계를 영남일대를 중심으로 하여 개략적으 로 살펴보기로 하겠다. 이현일의 청년기 사우관계에 있어 주목할 인물은 金應祖(1587- 1667)이다. 그는 유성룡․장현광의 문인으로 정경세의 사후에는 영남 사림의 영수로 인식된 인물이다.43) 김응조는 본래 유성룡의 문인이었 지만 仲兄金榮祖가 김성일의 사위이며 문인이었고, 자신은 김성일 의 孫婿라는 점에서 김성일과도 매우 밀접한 관계에 있었다. 김응조와의 만남이 이루어진 것은 1648년(인조 26)으로 이현일은 22세의 청년이었고 김응조는 62세의 노령이었다. 일찍이 김응조는 이시명과 함께 陶山書院에서 독서한 인연이 있었고, 중형 이휘일은 妻叔인 그를 사사하다시피 했다. 이휘일․이현일 형제는 김응조를 존경하여 ‘先生’으로 칭하였고, 후학의 정신적 지주이며 유림의 원로 로 평가하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44) 김응조에게 보낸 서한에 나타난 정중한 범절은 師弟의 禮에 방불한 것이었다.45) 더욱이 이현일의 학 문은 이휘일을 從學하는 과정에서 완성되었던 바, 김응조와는 간접
41) 李樹健,「朝鮮後期‘嶺南’과 ‘京南’의 提携」,『碧史李佑成敎授停年紀念 論叢』, 창작과 비평사, 1990. 42) 아마도 이는 두 사람 모두 노론의 철저한 탄압을 받는 상황에서 의도 적인 삭제가 수반된 것 같고, 문집 또한 이러한 흐름을 그대로 반영하 는 것으로 이해된다. 43)『龍洲集』卷13,〈誄金大司諫應祖文〉. 44)『存齋集』卷1,〈輓鶴沙先生〉;『葛庵集』卷8,〈答金鶴沙應祖〉. 45)『葛庵集』卷8,〈答金鶴沙應祖〉.
적인 사승관계가 형성된 셈이었다. 그리고 김응조는 당시 유성룡계 열을 대표하는 인물이었던 만큼 이러한 관계는 이현일이 유성룡계열 과도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는 데 영향을 미치게 된다. 한편 이현일은 40세에 服制疏의 소본을 찬하는 과정에서 영남사림 에서의 위치를 보다 확고하게 다졌다. 洪汝河(1621-1678)는 복제소를 매개로 교유한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홍여하는 유성룡의 문인 洪鎬 의 아들로서 그 역시 유성룡 계열의 인사였다. 그는 사환시에는 在 京嶺南人의 구심점을 이루었고, 1666년 복제소(소위 柳世哲의 복제 소) 추진여부를 두고 논란이 제기되자 모든 반대 논의를 완강히 거 부하고 疏事를 강행할 정도로46) 사림에서의 위상이 확고하였다. 홍여 하는 이현일의 疏本에 감동하여 교제를 허락함으로써 약 8년에 걸친 교유가 시작된다. 이현일은 그를 유림의 영수로 예우하며 자신의 出 處를 자문할 정도로47) 깊이 신뢰하였다. 홍여하 또한 이현일에게 尙 州士林(道南書院)과의 교유를 주선하는48) 등 양자의 관계는 상당히 돈독하였다. 홍여하가 이현일의 외조 장흥효의 墓碣銘과 이휘일의 墓誌銘을 撰하고 이현일이 홍여하의 行狀을 찬하는 한편 숙종 15년 경연에서 홍여하의 포증을 적극 주선한 것도49) 이런 맥락이었다. 한편 이현일의 사우관계에 있어 간과할 수 없는 인물은 丁時翰과 李惟樟이다. 수십년에 걸친 지속적인 종유관계는 흡사 Trio를 연상 하게 했다. 정시한은 후일 丁若鏞으로부터 정구와 장현광 이후의 유일한 眞儒 로 칭송된50) 근기남인계열의 학자였다. 그는 原州(法泉)에 살면서 영 남의 인사들과 폭넓게 교류하였는데, 이현일에게는 학문적으로나 인 간적으로 일생의 知己였다. 양인이 논쟁에 가까울 정도로 집착했던 부분은 四端七情論과 人心
46)『木齋集』卷11, 附錄〈行狀〉. 47)『葛庵集』附錄卷1,「年譜」〈八年丁未條〉;『葛庵集』卷8,〈與洪百源〉. 48)『葛庵集』卷8,〈答洪百源汝河〉. 49)『葛庵集』卷6,〈經筵講義〉己巳十月戊辰晝講. 50)『與猶堂全書』〈旁親遺事〉.
道心說이었다. 1688년 정시한은 이현일을 방문한 자리에서『洪範衍 義』와「四七說」에 대해 극찬하였는데, 특히「四七說」은 증거가 명확 한 定論으로 평가하기도 하였다.51) 그리고 각기 四端七情論에 관한 著述를 남겼는데, 이현일의「栗谷李氏論四端七情書辨」과 정시한의 「四七辨證」․「壬午錄」이 그것이다. 양인간에 이루어진 학문교류는 17세기 중후반 남인학자 내부에서는 가장 활발했던 학문토론의 하나 로 평가할 수 있다. 한편 이유장은 중형 이휘일과 心經․近思錄을 강론하는 과정에서 道義之交를 맺은 이래 점차 이현일과도 교류하게 되었다. 그는 타지 역 출신으로서는 최초로 陶山書院長을 지낼 정도로 士林의 명망이 있었다. 이유장은 이현일의 정치적 불우에 대해 누구보다 우려하는 입장이었다.52) 그리고 평소 이유장의 학행을 높이 평가하고 있던 이 현일은 숙종 20년 이조판서 재직시에 시강원 咨議에 천거하는53) 등 배려가 각별했다. 이유장은 1699년(숙종 25) 이현일이 해배되자 노령 에도 불구하고 위로방문하여54) 老年의 情理를 다졌으나 1년만에 날아 온 이유장의 訃音은 견디기 힘든 슬픔이었다. 이들 세 사람은 막역한 친교를 유지하고 있었지만 출처에 있어서 는 차이가 있었다. 정시한과 이유장은 ‘難進’의 태도를 취함으로써 정치적 여파를 피할 수 있었지만 이현일은 적극적인 입장을 보임으 로써 혹독한 정치적 희생을 감수해야 했다. 이외에도 이현일의 사우 관계에 있어 중요시되는 인물로는 金光繼(梅園)․金(黙齋)․金啓光 (鳩齋)․金學培(錦翁) 등이 있으며, 아우 嵩逸․靖逸․隆逸역시 사 우관계와 다름이 없었다.
51)『愚潭集』年譜,〈肅宗戊辰〉;『愚潭集』卷4,〈與李翼昇玄逸辛巳〉. 52)『孤山集』卷4,〈與丁君翊〉. 53)『肅宗實錄』卷26, 20年3月甲辰. 54)『葛庵集』附錄卷1,「年譜」〈二十六年庚辰條〉.
4.「己巳山林」이현일
1) 징소와 입조의 배경
이현일은 숙종 4년(1678) 환향한 이래 약 10년 세월을 향리에서 보내게 된다. 입사기의 경험은 자성의 계기가 되어 출사에 대해 신 중을 기하게 했다. 환향 직후 두차례에 걸쳐 사헌부지평에 임명되었 으나 부임하지 않았고, 숙종 5년 周易에 해박하다는 명목으로 아우 李嵩逸과 함께 천거되었으나55) 과감히 단념한 것도 이 때문이었다. 그러나 조정의 정치를 완전히 외면한 것은 아니어서 숙종 5년에는 「進御製舟水圖說發揮疏」(『葛庵集』卷2)를 올려 치도에 대한 숙종의 의지를 환기시키고, 숙종 9년에는「應旨疏」(『葛庵集』卷3)를 올려 시정의 득실을 예리한 논조로 비판하기도 했다. 이 응지소는 옥사의 과중함을 논하고 척리의 폐단을 지적하는 데 골자가 있었다. 그런데 이 상소는 실세한 남인들이 이현일을 부추겨 숙종의 의중을 탐지하 기 위한 공작으로 파악되어 화를 당할 소지가 있었지만 응지소라는 이유로 간신히 모면할 수 있었다.56) 그러나 이 시기에 이현일이 무엇보다 주력한 부분은 학문활동과 후학양성이었다. 1686년(숙종 12)에는『洪範衍義』를 脫稿하였으며, 1688년(숙종 14)에는「栗谷李氏論四端七情書辨」을 저술하여 이황의 主理說을 재천명하였다.『洪範衍義』는 이휘일․이현일의 經世觀이 집약된 역작이다. 청년기에 이휘일을 종학하는 과정에서 經濟之務에 착안하여 일부 篇目을 정하는 단계로까지 진전되었으나 이휘일의 사 망으로 중단되었다가 이때에 와서 완성을 본 것이다. 기사환국 이후 조정에서 제시한 정책 중에는『洪範衍義』에 근간한 것이 많았다. 이 러한 가운데 이현일은 60을 넘긴 老儒로 변모하여 문인기반도 강화 되었으며, 영남사림을 대상으로 한 학술고문으로서의 탄탄한 입지도 굳히게 된다.
55)『葛庵集』「年譜」,〈五年己未條〉. 56)『肅宗實錄』卷14, 9年6月丙子.
숙종 15년 원자정호를 계기로 발생한 己巳換局은57) 서남인간의 정 권교체를 수반하여 남인이 10년만에 재집권하게 되었다. 이즈음 남 인들은 청탁분기와 영남세력의 배제에 기인한 庚申換局을 경험하는 과정에서58) 영남인사에 대한 조용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되었다. 이러 한 필요성은 기사환국 이전부터 영남남인의 등용에 관심을 표명하던 숙종의 의지와59) 적절히 부합하여 이현일의 징소로 표출되어 갔다. 산림의 징소는 정권의 정당성을 확보하는 데 일차적인 목적이 있 었기 때문에 정권의 당국자들은 산림의 선정에 부심하기 마련이었 다. 그러나 당시는 영남과 근기를 불문하고 허목과 윤휴에 필적할 만한 인물이 부재한 상황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이황→김성일→장 흥효로 이어지는 영남학통의 계승자로 인식되며 영남사림의 구심점 으로 부상하고 있던 이현일의 존재가 자연 부각될 수 밖에 없었다. 이현일은 숙종 3년에 이미 유일로 천거되어 입조한 경험이 있었 고, 사우관계에서 언급한 것처럼 남인 당국자들과의 교류도 활성화 된 상태였다. 그리고 경신환국 이후 10년 동안 향리에 은거하는 과 정에서 연령적인 성숙과 학문적인 온축을 기하면서 조야의 인망이 증폭되고 있었다. 더욱이 그는 영남일대를 중심으로 상당한 문인을 규합하고 있었는데, 이들의 대부분은 영남학파의 주축을 이루는 명 망가문의 자제들이었다. 이러한 배경은 이현일이 영남학파의 영수로서 입지를 확고하게 다 지는 토대가 되었다. 따라서 이현일의 징소는 영남사론을 우익으로 끌어들일 수 있는 부가적인 이익이 있었다. 이는 근기와 영남의 정 치적인 제휴라는 차원에서도 대단히 중요한 요소였는데, 인조~현종 조의 영남유소는 이를 입증하고 있다.60) 후일 ‘己巳當局者’로 지목된
57) 李羲煥,「肅宗과 己巳換局」,『全北史學』8, 1984. 58)『黨議通略』〈肅宗朝〉. 59)『肅宗實錄』卷18, 13年12月己巳. 60) 17세기 후반에 이르면서 嶺南儒疏도 자체적인 반성이 촉구되고 있었다. 유생이 시정의 득실을 논란할 수 없다는 원칙적인 이유 외에도 각 고 을에 통문을 보내 사론을 선동한 데 따른 각종 무리와 폐단에 대한 반 성이 일어난 것이다. 이들은 명종조「請斬普雨疏」에 즈음하여 유소행
〈표 2〉李玄逸門人의 지역적분포
睦來善, 金德遠, 權大運, 權大載가 이현일의 징소를 적극적으로 주선 한 배경도 여기에 있었다. 한편 이현일은 경신환국~기사환국에 이르는 약 10년의 세월을 자 신의 淪落期로 표현할 정도로61) 정치에 대해 깊은 관심을 표명하고 있었다. 그리고 문인 권두경도 이현일의 정치에 대한 남다른 포부를 언급하고 있는 점에서도62) 평소 이현일이 정치 참여를 깊이 요망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숙종 9년 각종 비난을 감수하면서까지「應旨 疏」를 올려 시정의 득실을 과감하게 논한 것도 정치에 대한 적극적 인 관심 때문이었다. 그러면 이현일이 정치 참여를 갈망한 근본적인 이유는 무엇이었을 까? 이는 쉽게 단정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다. 개인적인 영달 차원 에서 정치적인 진출을 원했다고 한다면 이는 너무도 단순한 논리일 것이다. 아마도 그가 정치 참여에 대해 남다른 포부를 가지게 된 것 은 영남의 정치적인 침체를 회복하고 학문하는 과정에서 온축된 자 신의 경세관을 실현하는 데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숙종 15년 소명 에 부응한 이래 집권남인과의 갈등을 노정하면서도 거취를 단호하게 결정하지 못하였고, 일시적으로 환향하는 경우에도 항상 재입조의
위의 부당성을 지적했던 이황의 입론을 충실히 수용하고 있었는데, 李簠 의「儒疏說」(『景玉集』卷2)과 李栽의「道疏議」(『密庵集』卷12)에는 이러한 인식이 잘 반영되어 있다. 61)『葛庵集』卷10,〈答權天章庚午〉. 62)『蒼雪齋集』卷8,〈上葛庵先生己巳〉.
여운을 남긴 것도 바로 이 때문이었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이현일 은 숙종 15년 4월 산림으로 징소된 지 3개월 만에 기대와 우려가 교 차되는 가운데 입조하게 된다.
2) 정치적 난맥상
(1) 보도직의 강요
재입조 이후 이현일에게 맡겨진 가장 중요한 임무는 經筵官으로서 국왕을 輔導하는 일이었다. 그가 발탁된 명분도 학문적인 명성에 있 었기 때문에 경연의 적임자로 부각되는 것은 당연하였다. 睦來善․ 金德遠․權大載․權大運은 이현일의 경연 입시를 강조한 대표적인 인물이었다.63) 특히 권대운은 이현일을 두고 ‘博學君子’로 극찬하기도 했다.64) 儒臣으로 예우을 받으며 경연에 참가한다는 것은 분명 영광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문제는 집권남인들이 이현일을 경연관에 한정하려는 데 있었다. 이현일을 두고 직책에 구애될 필요없이 예우만 하면 된 다는 논의는65) 유신에 한정하여 요로에는 등용하지 않겠다는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 심지어 권대운은 이현일의 이조참의 사직에 즈음해 서는 의례적인 사직이 아니라 경학에 전념하겠다는 의지의 표명으로 誤導하기까지 하였다.66) 권대운은 당초 이현일의 징소를 주청하였고, 이현일이 조정을 떠나면 누구보다 적극적으로 환조를 주선한 인물이 라는 점에서 그 양면성이 노출되고 있다. 즉 집권남인들은 이현일이 경연에 출입하여 국왕을 보도하고 성균 관 좨주를 겸직하여 선비의 모범이 되어 주기만을 기대했을 뿐 국정 에 깊이 간여하는 것은 원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이현일의 입 장은 이와는 판이하여 자신을 경연관에 한정하려는 의도에 대해 상
63)『肅宗實錄』卷20, 15年3月庚午;『葛庵集』「年譜」,〈十五年己巳〉. 『肅宗實錄』卷20, 15年윤3月甲寅. 64)『肅宗實錄』卷21, 15年6月戊辰. 65)『葛庵集』「年譜」,〈十五年己巳六月〉. 66)『肅宗實錄』卷21, 15年6月戊辰.
당한 불만을 피력하게 된다. 권대운의 오도에 즈음하여 자제들에게 보낸 서한에는 보도직에 한정하려는 집권남인들의 의도를 용인할 수 없었던 이현일의 불만과 고충이 너무도 절실하게 드러나 있다.67) 물 론 李鳳徵, 李雲徵같이 이현일의 입장을 이해하는 부류도 있었지만68) 소수에 불과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이현일의 불만은 환향이라는 구체적인 형태로 표 출되었다. 그러나 이는 항변의 성격이 강했기 때문에 언제든지 기회 가 닿으면 입조하겠다는 여운을 남기고 있었다.69) 이에 집권남인들은 대사헌, 이조참판 등의 요직을 알선하며 무마책을 펼치게 되었다. 그 러나 막상 조정으로 돌아와도 상황이 변화되지는 않고 오히려 불신 감만 가중시킬 뿐이었다.70) 이런 선상에서 이현일은 자신을 천거한 영의정 권대운에게 장문의 서한으로 항의의 뜻을 피력하게 된다. 이 서한은 이현일 자신의 출처관, 조정의 기강, 시정의 득실을 적나라하 게 피력한 것이었다. 그러나 주안점은 역시 자신의 정치적 소신을 은연중에 묵살하는 조정의 당국자들에 대한 반감을 역설하는 데 있 었다. 그는 여기서, “君子가 出身하여 임금을 섬기는 의리는 章句를 외워 학술고문이나함으로써 주어지는 관직을 차지하여 세상에 영합 하는 것이 아니라 官職이 있으면 그 직책을 다하고 言責이 있으면 그 말을 다해야 한다”는 입장을 분명히 하였다.71) 이는 곧 유자라고 해서 ‘輔導之務’에 국한될 것이 아니라 정치와 시무에 관여할 필요성 을 강변한 것이며, 회유와 무마책으로 일관해 온 집권남인에 대한 반발이었다. 나아가 그는 이제 더이상 입조하지 않고 은거하겠다는 의지를 밝히기도 했는데, 이는 은거보다는 처우의 개선을 역설적으 로 표현한 성격이 강하다. 왜냐하면 그는 이후로도 계속적으로 재조 하였기 때문이다. 사실 이현일은 자신의 출처에 있어 단안을 내리지
67)『葛庵集』卷17,〈寄諸子〉. 68)『葛庵集』卷17,〈寄諸子〉. 69)『肅宗實錄』卷21, 15年9月癸亥. 70)『葛庵集』「續集」卷1,〈答權皆玉〉. 71)『葛庵集』卷8,〈答權相國大運壬申〉.
못하고 불분명한 태도를 취할 때가 많았다. 숙종 15년 10월의 환향 시에도 재입조의 여운을 강하게 남기고 있었다.72) 이현일의 환향과 재입조는 이후에도 대체로 이러한 형태로 전개되었다. 이현일의 환 향을 두고 일시적인 변통책으로 비난한 것도73) 이 때문이었다. 어쨌든 집권남인을 향한 항변이 다소나마 경종이 된 것은 사실이 다. 숙종 19년에는 이조판서에 제수된 것도 이러한 항변의 결과였다. 비록 인사업무를 총괄하는 이조판서가 되었지만 유자라는 근본적인 선입견은 좀처럼 해소되지 않았다. 숙종 20년 이현일이 환향을 결심 하자 성균관 유생들이 경연․서연․성균관에 이현일이 없어서는 안 되는 세가지 이유를 들어 만류소를 올린 점에서도 이러한 면이 분명 하게 드러나고 있다.74) 이는 이현일의 징소를 주선했으면서도 이현일 이 관작에 집착하는 태도를 은근히 조롱하는 이율배반적인 입장을 고수한 집권남인들의 이중성에 기인하는 것으로75) 甲戌換局직전까지 이러한 상황은 여전히 존속되었다.
(2) 정치적 창구화
山林은 상례에 구애되지 않고 擢用되는 것이 관행이지만 이현일의 경우는 더욱 이례적이었다. 성균관사업이 된 지 3개월만에 사헌부장 령, 공조참의를 거쳐 이조참의가 되었다. 그리고 다소의 논란 속에서 도 師儒의 직책인 成均館祭酒와 元子輔養官을 겸함으로써76) 山林으로 서의 위상을 확고하게 다지게 되었다. 집권남인들이 이현일의 징소를 주선하고 관직을 알선한 데에는 그 만한 이유가 있었다. 유현을 예우하는 차원도 있었겠지만 보다 중요 한 것은 자신들이 발론하기 곤란한 현안들을 이현일을 통해 달성하 려는 의도가 다분하였다.77)
72)『肅宗實錄』卷21, 15年10月甲子. 73)『肅宗實錄』卷26, 20年3月癸卯. 74)『肅宗實錄』卷26, 20年3月癸卯. 75)『肅宗實錄』卷26, 20年3月癸卯. 76)『肅宗實錄』卷21, 15年7月丙辰.
이러한 흐름 속에서 경신환국에 피화된 남인인사들의 신원문제가 가장 우선적인 사안으로 대두되었다. 이는 남인정권의 정당성과 유 관한 문제였기 때문에 집권남인에 있어서는 초미의 관심사였다. 당 시 이현일은 숙종의 지우를 입어 발언권이 강화되어 있었으며, 嶺南 人이라는 처지는 신원 문제의 발론에 있어 다소 중도적인 입장으로 보여질 수 있도록 했다. 이현일이 신원의 적임자로 대두될 수 있는 소지도 바로 여기에 있었다. 이러한 선상에서 이현일은 庚申獄을 伸雪하여 木垔(福平君)․煥(陽 原君)․爀(義原君)의 連坐를 풀고 李尙眞․吳斗寅의 신원을 강력히 건의하게 된다. 경신옥은 서인의 私怨에 따른 정치적인 보복이며 誣 獄에 불과하다는 입장을 개진하는 가운데 허적의 서자 許堅의 죄는 용서할 수 없지만 왕족인 木垔․煥․爀에게 연좌의 율을 적용할 수 없 음을 강조하였다.78) 나아가 경신환국에 피화된 허새의 신원을 주청하 고79) 의원군 혁으로 하여금 경신환국에서 피화된 종실 李楨의 후사로 삼을 것을 건의하는80) 등 경신옥과 관련한 사안들을 총체적으로 거론 하여 허새의 경우를 제외하고는 대체로 허락을 얻어 냄으로써 일차 적인 목적을 달성하게 되었다. 경신옥의 신설문제는 비교적 순탄하게 해결되지만 후자의 경우는 사정이 달랐다. 이들은 인현왕후의 폐출을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 가 吳斗寅은 국문 도중에 사망하고 子婿姪이 금고되기에 이르렀으 며, 李尙眞은 원찬되었다.81) 당시는 仁顯王后에 대한 어떠한 언급도 逆律로 다스리겠다는 嚴命이 내려져 있었기 때문에 이들에 대한 변 호는 숙종을 자극할 소지가 있었다. 李觀徵․金德遠이 처벌된 것도 바로 이 때문이었다.82) 따라서 大臣조차도 감히 발론하지 못하는 상
77)『肅宗實錄』卷21, 15年10月癸亥. 78)『肅宗實錄』卷21, 15年5月丁未. 79)『肅宗實錄』卷21, 15年7月乙卯. 80)『肅宗實錄』卷21, 15年10月戊辰. 81)『肅宗實錄』卷21, 15年5月壬寅․丁酉․戊戌. 82)『肅宗實錄』卷20, 15年4月癸巳.
황이었다. 비록 엄명이 내려진 상황이기는 했지만 이현일을 조신들 과 동일하게 처우할 수는 없었다. 이에 이현일은 上疏와 面對를 통 하여 오두인의 망언을 인정하더라도 子婿姪의 금고는 지나치며, 이 상진의 경우는 대신을 예우하는 차원에서 관용을 베풀 것을 주장하 며 숙종을 설득하게 된다. 이에 숙종도 처음에는 강경하게 나왔지만, 결국은 오두인의 자서질의 금고를 풀고 李尙鎭에게는 中道付處를 허 락하는 단계로까지 입장을 완화하고 말았다.83) 남인들이 吳斗寅․李尙眞등의 구호에 적극적인 입장을 보인 것은 이들이 인현왕후를 구호하다 죄를 입었기 때문이다. 남인들은 표면 적이나마 인현왕후의 폐출을 막지 못하였고, 폐비를 반대하는 정청 또한 이틀만에 그만둠으로써 군주를 옳바르게 인도하지 못하여 국모 의 폐출을 방관했다는 名分上의 하자를 피할 수 없는 입장이었다. 史臣도 이점을『肅宗實錄』에 특서하여 남인의 명분적인 하자를 분명 하게 지적하고 있었다.84) 결국 이는 국모의 거취가 걸린 중대한 문제 였기 때문에 후일의 쟁점으로 대두되어 남인정권의 기반을 위협할 소지가 있었다. 吳斗寅․李尙眞의 구호는 자신들의 명분적 하자를 감소하기 위한 변통책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남인들이 폐비 민씨 에게 음식을 제공하고 수직을 강화하게 하여 안전의 도모를 주선한 것도85) 이 때문이었다. 이에 이현일은 자의반와 타의반으로 이 일에 개입함으로써 집권남인들의 의도에 적절히 부응하게 된다.86) 이상진 의 죄가 경감되자 金德遠이 이현일의 노고를 치하한 사실에서87) 이러 한 면은 더욱 분명해 진다. 결국 이현일은 본의든 본의가 아니든 집권남인들의 당면 문제를 해결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담당해 가고 있었다. 한편 이현일은 王子의 新生에 즈음하여 嫡庶의 分義를 분명히 할
83)『肅宗實錄』卷21, 15年5月乙卯. 84)『肅宗實錄』卷20, 15年4月壬辰. 85)『肅宗實錄』卷21, 15年11月乙巳. 86)『肅宗實錄』卷21, 15年7月乙卯. 87)『葛庵集』卷8,〈答金相國德遠〉.
것을 건의함으로써 남인정권의 입지를 강화하는 데 또 다시 기여하 게 된다. 禧嬪張氏所生의 王子(후일의 景宗)가 世子에 책봉된 상태 에서 숙종 18년 淑媛崔氏가 王子(후일의 英祖)를 생산하자 남인들은 불안을 느끼게 된다. 비록 남인이 후원하는 왕자(경종)가 世子가 되 었지만 숙종의 겉잡을 수 없는 성격은 불안감을 조성하기에 충분했 다. 따라서 世子의 위상이 재확인될 필요가 있었다. 그러나 이는 워낙 기휘스런 사안이라 함부로 발론할 수 없없다. 그런데 때마침 적자와 서자는 問安의 절차와 의절에 있어 등급을 달리해야 한다는 입장, 즉 嫡庶의 分義를 분명할 것을 주장한 世子侍講院贊善이현일의 건 의는88) 집권남인의 의중에 그대로 부합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는 이현일의 독자적인 견해이기보다는 집권남인들의 의중을 적절히 반 영한 것이라는 점에서 문제가 있었다. 이 건의는 후일 閔黯과 李義 徵의 사주에 의한 것으로 간주되어 갑술환국 이후 혹독한 대가를 치 뤘기 때문이다.89) 한편 이현일이 재입조한 이래 집요하게 주장해 온 것은 척리의 폐 단을 척결하는 것이었다. 이미 숙종 4년의「五條疏」와 숙종 9년의 「應旨疏」에서도 강경한 논조로 지적하였듯이 척리에 대한 경계는 이현일의 정치적인 지론이기도 했다. 그러나 재입조 이후 척리에 대한 경계는 이전에 비해 훨씬 더 강 경성을 띄고 있었다는 데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 시기 비판의 대상 은 민정중이었다. 그는 인현왕후의 숙부로서 당시 척신을 대표하던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이현일이 민정중의 논죄를 발론한 이래 집요할 정도로 이 문제에 집착한 이유는 무엇인가? 근본적인 해답은 역시 척리의 폐단을 좌시 할 수 없었던 그의 정치적인 지론에서 구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 것만으로는 충분한 대답이 되지 않는다. 이 점에서 또다시 집권남인
88)『葛庵集』卷7,「經筵講義」〈癸酉十月十三日癸未〉. 89)『肅宗實錄』卷26, 20年5月庚申.
의 사주설을 재론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척리의 발호를 경계하고 자 했던 이현일의 지론에는 의문이 없다. 전후 15년 동안 척리에 대 한 이현일의 인식은 일관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재입조 이후 자신의 거취를 걸고 집요하게 거론한 데에는 집권남인들과의 모종의 관계를 배제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유명현의 사주설을 특서하고 있 는 실록의 기사를 무시할 수 없는 것도 이 때문이다.90) 갑술환국 이후 이현일이 노론의 철저한 정치적인 보복을 감수하게 된 가장 표면적인 이유는 국모에 대한 불경에서 야기된 의리죄인이 라는 명목 때문이었다. 그러나 민정중의 처벌을 강력하게 주장한 것 역시 노론의 반감을 사기에 충분했고, 이것이 정치적인 보복을 더욱 가중시켰음에 분명하다. 어쩌면 이현일이 의리죄인으로 낙인되고 신 원이 지연된 데에는 민정중을 위시한 훈척 여흥민씨에 대한 강경론 에 보다 근본적인 이유가 있는지도 모른다. 만약 이러한 강경론이 이현일의 순수한 의지이기보다는 집권남인의 사주라고 한다면 이현 일의 정치적인 희생은 너무도 값비싼 댓가였다.
3) 산림으로서의 위상
이제 노론과 남인 양측의 인식을 통해 이현일의 산림으로서의 위 상을 가늠해 보기로 한다. 노론측의 평가가 부정적인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그러나 문제는 남인 내부에서도 이현일의 출사와 처세를 부정적으로 인식하는 부류가 적지 않았다는 점이다. 우선 노론의 인식부터 살펴보기로 한다. 노론들은 이현일의 학술을 부정함으로써 산림으로서의 위상을 격 하시키고자 했다. 이는 학문과 덕행을 바탕으로 하는 산림 징소의 명분과 배치되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는 이현일 개인은 물론 영남학 파를 전체의 위상과도 직결된 문제였다. 이는「栗谷李氏論四端七情 書辨」으로 대표되는 이현일의 학문성향, 즉 이이의 학설을 비판하고 이황의 주리설을 재천명하고자 했던 일련의 작업과 무관하지 않다.
90)『肅宗實錄』卷24, 16년 4월 壬辰.
玄相允도『朝鮮儒學史』에서 “율곡의 설을 공격하고 퇴계의 說을 옹 호하기 시작한 것은 퇴계 몰후 약 백여년 이후의 일인데, 현저하게 大聲疾虎格으로 드러난 것은 李葛庵에게서 처음으로 보게 된 것이 다.”91)라고 하였듯이 이현일은 분명 李珥說의 비판에 있어 기폭제의 역할을 했다. 이현일 자신도「栗谷李氏論四端七情書辨」의 서두에서 밝히고 있듯 이「栗谷李氏論四端七情書辨」은 이이의 주기론을 반박하여 이황의 주리론을 재천명하여 기호지방에서 신봉되던 주기설의 원류를 차단 하는데 저술의 동기가 있었다.92) 기호학파의 입장에서 볼 때 이는 곧 학문적인 위협이며 도전이었다. 따라서 그들이 이러한 측면을 지니 고 있던 이현일을 달갑게 생각할 이유가 없었고 요주의 인물로 지목 하기에 충분했다. 따라서 그들은 이현일의 학술을 철저하게 폄하할 필요가 있었다. ● 이현일는 학술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사람인데 전에 지평을 지 냈다는 것 때문에 장령으로 승진시켰다.(『肅宗實錄』卷20, 15年4月 乙亥) ● 이현일은 스스로 선비의 이름을 칭탁하여 아름다운 벼슬을 차 지하고 부름이 있으면 곧 행하였다.(『肅宗實錄』卷21, 15年5月庚 戌) ● 이현일은 학문이 보잘 것 없고 지식이 허술한데도 마침내 허명 을 얻어 외람되게 유현이라고 일컬어 수개월 사이에 亞卿에 뛰어 올 랐다.(『肅宗實錄』卷21, 15年11月壬子) ● 이현일은 講席에 자주 들어 갔으나 奧旨를 개진하는 것이 하나 도 없고 오직 時論에 부회하여 그릇되고 어리석은 말이 많았다.(『肅 宗實錄』卷22, 16年8月丙寅) 학술을 부정함에 있어 구체적인 근거를 제시하기보다는 의도적인 폄하의 성격이 농후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영남학파의 영수에 대
91) 玄相允,『朝鮮儒學史』, 民衆書館, 355쪽. 92)『葛庵集』卷18,〈栗谷李氏論四端七情書辨〉.
한 평가치고는 너무도 어색한 면이 있다. 바로 이 점에서 의도적으 로 폄하할 필요가 있었던 서인들의 의도가 감지된다. 더욱이 서인들 은 이현일의 학술을 부정하는 한편 그를 시론에 부회하고, 허명을 얻은 인물로 몰아가고 있었다. 결국 이현일은 서인들로부터 학술을 부정당하고 정치적인 소신없이 권력에 부화한 산림으로 윤색되고 있 었다. 그러면 이제 이현일의 징소와 관련하여 근기남인들의 반향에 대해 살펴보기로 한다. 이현일은 권대운, 김덕원, 목래선 등 남인 당국자의 주선으로 조정 에 들어오게 되었다. 그러나 얼마되지 않아 근기남인의 일각에서 부 정적인 여론이 표출되고 있었는데, 주로 유생층을 중심으로 제기되 었다. 그 대표적인 인물은 李瀷의 형 李潛이었다. 이잠은 이현일의 持論 이 공평하지 못함을 비판하며 초야로 되돌아 가는 편이 좋을 것으로 논평하는93) 등 이현일의 입조 자체를 매우 부정적으로 평가하고 있었 다. 더욱이 京中의 사림들도 이현일의 지론을 의심하는 가운데 기휘 스러운 사안에 대해서는 언급을 회피한다는 반응을 보임으로써94) 이 현일은 입조 초기부터 경중사론의 지지를 받지 못하고 있었다. 특히 李潛․李漵형제, 李萬敷, 曺君敘의 忠州集談에서 드러난 남 인유생들의 인식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다. 이서는 이현일이 초야에서 기용된 지 1년이 못되어 亞卿에 이르고, 有道한 인물로 대 우받고 있지만 시행하는 것은 전혀 볼 만한 것이 없다는 입장에서 신랄하게 비판하였다.95) 더욱이 이들과 동석에 있던 조군서는 한단계 더 나아가 이현일을 ‘盜名者’로 치부함으로써 극도의 혹평을 가하기 도 했다.96) 이에 이만부가 이현일을 변호하였지만 座中의 인식에는 변함이 없었다. 이는 비록 단순한 기사에 불과하지만 적지 않은 의
93)『蒼雪齋集』卷8,〈上葛庵先生己巳〉別紙. 94)『蒼雪齋集』卷8,〈上葛庵先生己巳〉別紙. 95)『息山集』卷12,〈中原講義〉. 96)『息山集』卷12,〈中原講義〉.
미를 담고 있다. 즉 이잠․이서형제, 조군서의 견해를 통해 이현일에 대해 냉소적이고 조소적이던 근기남인유생 전반의 인식을 간파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잠․이서는 남인 명가 여주이씨 출신으로 아우 이 익과 더불어 후일 근기남인의 구심점을 이룬 인물이라는 점에서 중 요성이 배가된다.97) 여기서 한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이잠․이서가 이 현일을 극도로 비판한 반면 이현일은 이들 형제를 높이 평가했다는 점이다. 더욱이 이현일은 이들과의 교유가 성사되지 못한 아쉬움을 피력할 정도로98) 깊이 신뢰하고 있었다. 물론 이들의 인식이 근기남인유생 전체의 입장을 대변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현일의 출사와 처세에 대한 근기남인유생 전반의 여론을 살피는 데 적지 않은 시사가 된다. 한편 조신 중에서도 이현일의 출사를 벼슬이나 탐내는 헹위로 간 주하여 조소하는 부류가 있었는데, 민창도는 그 대표적인 인물이었 다.99) 이처럼 이현일은 근기남인유생들과 일부 조신들로부터 지지를 얻 고 추중되기보다는 외면당하고 조소받는 처지에 있었다. 따라서 산 림으로서의 정치적인 기반도 그만큼 약화되고 위태로울 수 밖에 없 었다. 이와 관련하여 이현일 자신도 주위로부터 비방을 받고 있다는 사 실을 모르지 않았다.100) 누차에 걸쳐 환향을 결심한 것도 이러한 분위 기를 감지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는 ‘難進易退’에 충실하 지 못했고, 자신의 표현대로 분수를 헤아리지 못하고 경솔하게 세상 에 나아가 현저한 업적도 남기지 못한 채 결국은 죄인으로 전락하고 말았던 것이다. 知舊․門人間에 전달된 서한에는 여기에 대한 아쉬 움과 후회 그리고 체념이 절실하게 표현되어 있다.101)
97) 李成茂,「星湖李瀷의 生涯와 思想」,『朝鮮時代史學報』3, 1997. 98)『葛庵集』卷10,〈答權天章庚午〉. 99)『肅宗實錄』卷26, 20年3월 癸卯. 100)『葛庵集』卷8,〈答金相國庚午〉. 101)『葛庵集』卷8,〈與丁君翊〉; 卷9,〈答李厦卿丙子〉; 卷10,〈答金彦兼台重 乙亥〉.
이상의 논지를 요약할 때, 결국 이현일의 산림으로서의 위상은 대 체로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그는 숙종으로부터 표면적으로는 사림의 영수로 추중되고 유현으로 예우되면서 제반 건의도 수용되는 경우가 많았지만 본질적이고 절실했던 문제들은 제대로 시행된 것이 없었다. 더욱이 그는 자신의 징소를 주선했던 집권남인들과 갈등을 빚는 가운데 근기남인 유생으로부터도 사림의 영수로 존경되기보다 는 비난의 대상이 됨으로써 정치적 기반을 확보할 수 없었다. 이러한 정황을 놓고 볼 때 이현일은 역대 산림 가운데 가장 지지 기반이 약하였고 운신의 폭이 좁았던 경우에 해당한다. 송시열의 경 우는 절대적인 권력의 값을 죽음으로써 치루게 되었지만 이현일은 그나마 목숨을 보전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위안을 삼을 수도 있지만 후일 전개되는「綱常罪人」․「名義罪人」으로서의 오욕을 감안한다면 송시열 이상의 댓가를 치른 셈이었다.
4) 갑술환국과 정치적 보복 ―名義罪人․護逆․伸寃―
숙종 15년~20년에 이르는 이현일의 재조기는 한마디로 갈등과 집 착으로 점철된 기간이었다. 그가 최종적으로 조정을 떠난 것은 1693 년 3월이었다. 그 다음달인 1694년(숙종 20) 4월 향리에서 이조판서 를 사직하는 상소를 준비하던 차 갑술환국을 맞아 吏曹判書에서 교 체되는 동시에 趙嗣基를 구호했다는 이유로 관작이 삭탈되고 洪原으 로 유배되었다. 철저한 보복의 시작이었다. 장령 안세징이 인현왕후의 보호를 주장한 이현일의 상소를 흉소로 지목하며 붙잡아 국문할 것을 요청함으로써 이현일의 생애는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된다. 숙종 16년의 仁顯王后保護疏(因災異言事疏)가 도리어 국모에 대한 不敬으로 간주된 것이다. 安世徵(安邦俊의 族後 孫)은 이현일의 上疏가운데 “不循壼彛, 自絶于天,………爲設防衛, 謹 其糾禁”의 네 구절을 들어 국모 침해 首犯으로 규정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102) 당초 이현일이 인현왕후 보호소를 준비한 것은 숙종 15년
102)『肅宗實錄』卷26, 20年5月戊申.
4월이었으나 승정원에서 기각당하여 이듬해인 숙종 16년 災異求言에 편승하여 상달하였다. 그는 상소에서 閔氏(仁顯王后)가 비록 中殿으 로서의 도리를 다하지는 못했지만 은혜를 베풀 것을 주장하여103) 일 시적으로 허락되기도 했다. 그리고 이 상소는 그야말로 全恩을 주장 하며 인현왕후를 보호하는 데 목적이 있었지 국모를 침해하려는 의 도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안세징이 이를 흉소로 단정하고 국문을 요청함으로써 사태는 심각한 양상으로 전개되어 갔다. 여기 에 鄭澈의 현손 鄭澔가 이현일의 처벌을 극력 주장함으로써104) 논의 는 한층 격화되었다. 안세징과 정호는 이현일의 건의에 의해 관작이 추탈되고 사우가 훼철된 정철, 안방준의 후손들이었다는 점에서 이 미 예정된 수순과도 같았다. 이에 이현일은 국문 과정에서 인현왕후와 관련한 상소는 禍心을 가지고 국모를 침범하려는 것이 아니라 경비를 신중히 하여 중궁의 체모를 높이기 위한 조처였음을 극력 주장하였지만105) 설득력 있게 받아들여질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더욱이 이현일이 閔黯과 李義 徵의 사주를 받고 淑媛崔氏의 王子생산에 즈음하여 숙종의 의중을 탐지하려 했다는 말까지 나옴으로써106) 입장은 더욱 난처해졌다. 여기 에 대해서도 이현일은 왕자 탄생에 따른 문안의 절차를 古義에 근거 하여 진달한 것일 뿐 사주설은 부당하다고 항변하였다.107) 이와 관련 하여 민암은 적서의 분의를 분명히 해야 하다는 말은 ‘老儒의 常談’ 으로 자신도 심상하게 들었을 뿐이며 누구에게 전한 일도 없음을 강 조하며 사주설을 근본적으로 부인하기에 이른다.108) 그러나 숙종은 이 현일의 건의가 자신의 의중을 탐지하기 위한 조처로 인식함으로써109) 변명의 여지를 남기지 않았다.
103)『葛庵集』卷3,〈因災異言事疏〉. 104)『肅宗實錄』卷26, 20年閏5月, 丁丑. 105)『肅宗實錄』卷26, 20年5月戊辰. 106)『肅宗實錄』卷26, 20年5月庚申. 107)『肅宗實錄』卷26, 20年5月戊辰. 108)『肅宗實錄』卷26, 20年5月戊辰. 109)『肅宗實錄』卷26, 20年5月庚申.
따라서 이현일은 극형을 면하기 어려운 상황에 처해지고 말았다. 그러나 당시는 노론 정국이 아니고 소론 정국이라는 점에 주목할 필 요가 있다. 만약 노론에 의해 정국이 주도되었다면 남인들에 대한 처벌도 한층 격화되었을 소지가 있었지만 少論들은 남인들의 처벌에 있어 완론을 편 것이 사실이다. 특히 소론 정국을 주도하던 南九萬 이 이현일에 대해 사뭇 同情論을 전개함으로써110) 극형을 면하고 유 배형에 그침으로써 사태는 일단락되는 듯 했다. 이 과정에서 남구만 은 죄인(남인)을 구호하기 위해 인륜을 무너뜨린 인물로 낙인되고 있었는데,111) 이는 노론의 입장에서 본다면 護逆과 다를 바 없었다. 그러나 이현일의 유배형을 두고 극도의 失刑으로 기록한 史官의 평은112) 노론의 목적이 극형에 있었고, 이후 이현일에 대한 처우가 여 기에 그칠 수 없음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었다. 이현일이 점차 ‘綱常罪人’․‘名義罪人’113)으로 낙인되었으며, 후대로 갈수록 이현일의 존재가 仁穆大妃폐출의 장본인 鄭仁弘․李爾瞻에 비해지게 된 것 도114) 이러한 인식의 연장이었다. 이현일이 終身토록 신원되지 못하고 사망한 이후 200년 동안 罪籍에 있었던 이유도 분명 여기에 있었다. 종성에 유배된 이후 이현일은 정국의 동향에 따라 숙종 23년 3월 에는 위리가 제거되고 호남의 光陽으로 이배되었다. 숙종 25년에는 방귀전리의 명령이 내려졌으나 노론의 반대가 심하여 석방과 환수가 반복되는 곡절이 있었는데, 그때마다 구실이 된 것은 名義罪人․綱 常罪人따위였다. 숙종 27년에는 석방이 논의되기도 했지만 반대론 은 여전하였다. 이현일은 숙종 26년 안동의 錦陽으로 돌아 온 이후 士林之事와 후 학의 양성에 전념하다 1704년(숙종 30) 78세로 질곡의 생애를 마감 하였지만 放歸田里의 罪籍은 여전한 상태였다. 그리고『肅宗實錄』의
110)『肅宗實錄』卷27, 20年7月庚午. 111)『肅宗實錄』卷28, 21年6月庚子. 112)『肅宗實錄』卷28, 21年3月壬午. 113)『肅宗實錄』卷28, 21年3月壬午;『肅宗實錄』卷48, 36年2月辛亥. 114)『哲宗實錄』卷7, 6年8月乙卯.
찬자는 李玄逸의 卒記에 인현왕후에 대한 불경을 기록하여 의리와 강상을 어긴 죄인임을 분명하게 규정함으로써115) 죄인으로서의 생애 는 끝나지 않았다. 이러한 가운데 숙종 후반에서 경종․영조조를 거치면서 이현일에 대한 처우는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된다. 숙종 36년에는 全釋과 동시에 직첩을 환급하라는 명이 내려지게 된다. 비록 인현왕후의 사 망으로 인해 환수되기는 했으나 고무적인 현상임에 분명했다. 이런 선상에서 景宗1년에 내려진 職帖환급의 조처는 門人들을 자극하기 에 충분했다. 이에 신원운동이 본격화되어 안동의 虎溪書院을 중심 으로 1721년(景宗1, 金聖欽疏首), 1723년(景宗3, 李守寅疏首), 1724 年(景宗4, 羅學川疏首) 등 모두 3차에 걸쳐 신원소가 올려지게 되었 다.116) 비록 노론의 거두 金昌集, 李頤命의 저지로 인하여 실질적인 진전을 보지는 못했지만 신원을 거론할 수 있었다는 데에 중요한 의 미를 부여할 수 있다. 그러나 英祖의 즉위는 이현일의 신원에 있어 분명한 장애 요소였 다. 숙종 19年신생 왕자의 탄생에 즈음하여 건의한 적서분별의 대 상자가 바로 영조이기 때문이다. 이런 사실을 영조가 모르지 않음으 로써 자손의 금고에까지 논의가 미치면서117) 상황은 반전되어 갔다. 이런 흐름 속에서 趙顯命이 이현일의 아들 李栽를 천거하는118) 이 례적인 상황이 연출된다. 더욱이 吳光運까지 이재를 천거하게 되자 노론의 반대가 더욱 거세게 일어났다.119) 결국 조현명과 오광운의 배 려는 노론을 반발을 초래하여 신원운동도 소강 상태를 보이게 된다. 그런데 英祖12년 嶺南進士申金憲의 상소로 이현일의 신원운동은 일대 위기를 맞이하게 된다. 申金憲은 송시열·송준길의 문묘종사를 청 하는 상소에서 인현왕후와 관련한 사안을 거론하여 이현일을 비방하
115)『肅宗實錄』卷40, 30年11月3日己亥. 116)『葛庵全書』「己甲辛癸錄」. 117)『英祖實錄』卷2, 卽位年11月己未. 118)『英祖實錄』卷21, 5年2月乙酉. 119)『英祖實錄』卷21, 5年3月癸亥.
였다. 즉 이현일이 鄭經世의 墓碑(碑陰記)를 찬하면서 고의로 인현왕 후를 자손록에서 삭제했다는 것이다.120) 그렇지 않아도 적서분별의 건 의 때문에 신원이 늦어지던 차에 申金憲의 상소는 찬물을 끼얹는 꼴이 되었다. 당시 嶺南에는 老論化정책에 의해 이른바 新舊鄕의 갈등이 유발되고 있었고, 金尙憲書院의 설립 과정에서 심각성을 더하게 되 었다.121) 申金憲은 대사헌을 지낸 신민일의 후손으로 이 가문은 영남내 노론을 대표하던 세력이었다. 영조 13년 이현일의 문인 홍문관 교리 金聖鐸의 변호상소는 이에 대한 직접적인 반발이었다. 이에 좌의정 金在魯가 엄형을 주장하는 가운데 영조 또한 김성탁의 상소를 護逆으로 간주하여 친국을 명령 하였다.122) 이에 김성탁은 영조의 친국을 받고 절도로 유배되고 말았 다.123) 노론측에서 김성탁의 처벌에 부심했던 것은 이를 기화로 영남 을 징계하려는 의도 때문이었다. 당시는 무신란의 여파로 영남에 대 한 의혹이 사실상 가시지 않은 상태였다. 물론 소론들이 무신난의 진압과 처리를 전담하는 과정에서 노론의 비난에도 불구하고 영남의 인심을 수습한다는 차원에서 처벌보다는 무마와 보호에 노력하였고, 이른바 ‘憂嶺南說’을 주창하는 과정에서 영조와 노론의 대영남 강경 책의 예봉을 저지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영조 10년(1734)을 전후 하여 노론의 우월권이 확보되면서 노론들의 대영남 대처 방식은 종 래의 유화책에서 강경책으로 선회하고 있었다. 이런 선상에서 영조 11년 李麟至등의「兩宋文廟從祀反對疏」는 이를 더욱 부채질함으로 써 영조와 노론의 대영남 인식을 매우 악화시키고 있었다.124) 이러한 흐름 속에서 김성탁의 상소는 시범적인 케이스로 걸려들기 에 충분했던 것이다. 헌납 김상로가 김성탁을 극형으로 다스려 영남 을 징계할 필요성을 제기하자 영조와 노론대신이 여기에 동의하였
120)『英祖實錄』卷42, 12年8月辛巳. 121) 鄭萬祚,「英祖14年의 安東金尙憲書院建立是非」,『朝鮮時代書院硏究』, 『朝鮮時代史學會硏究叢書』1, 집문당, 1997. 122) 위와 같음. 123)『英祖實錄』卷44, 13年6月己未. 124) 鄭萬祚, 같은 책, 212~221쪽.
고,125) 좌의정 김재로가 조정을 경시하는 영남인들의 풍조를 징계할 필요성을 강하게 제기한 사실에서도126) 이러한 면이 잘 드러나고 있 다. 한편 김성탁의 처벌에 누구보다 강경론으로 나온 병조판서 閔應 洙와 정언 閔宅洙가127) 민정중의 從孫과 族孫이라는 사실도 단순히 우연만은 아닐 것이다. 김성탁의 유배가 사태의 종결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洪啓禧 가 김성탁을 極刑에 처하고 김성탁과 이재의 薦擧者들을 삭직할 것 을 주장하고 나선 것이다.128) 이 과정에서 趙顯命은 김성탁의 구호자 로 지목되면서 ‘護逆’으로 치부되는 수난을 겪게 되었다.129) 결국 영조조의 신원운동은 노론의 반발심만 자극한 채 신원이 진 전되기는 커녕 노소론의 공방전을 수반하는 가운데 영남에 대한 노 론의 감정만 악화시킨 채 무산되고 만다. 영조 13년 이휘일․이현일 을 제향하는 仁山書院이 훼철된 것도130) 바로 그 여파였다. 이런 상황은 이후 정조조까지 지속되었다. 그런데 순조조에 이르 러 신원운동은 또 다른 난관에 봉착하게 된다.『葛庵集』을 불태우고 간행자를 유배하는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131) 그러나 哲宗朝에 오면서 이현일의 처우는 새로운 양상으로 전개되 게 된다. 柳致明(1777-1861)이 신원운동을 주선하여132) 철종 3년(1852) 에는 직첩을 환급받는 단계로 진전되었다.133) 그러나 마찰도 적지 않 았다. 철종 6년 8월에 吳爀을 소수로 하여 八道유생 3천여명이 연명한 유소가 상달되었는데, 尹宣擧, 尹拯, 윤휴의 관작을 推削하고 이현일
125)『英祖實錄』卷44, 13年5月乙卯. 126)『英祖實錄』卷44, 13年6月戊午. 127)『英祖實錄』卷44, 13年7月甲寅;『英祖實錄』卷44, 13年8月壬戌. 128)『英祖實錄』卷44, 13年6月己未. 129)『英祖實錄』卷45, 13年8月壬戌. 130)『英祖實錄』卷45, 13年8月壬戌. 131)『純祖實錄』卷13, 10年12月乙巳. 132)『定齋先生文集』附錄, 卷4〈語錄〉. 133)『哲宗實錄』卷4, 3年9月癸丑.
의 관직을 追奪할 것을 요청한 상소였다.134) 이현일의 경우는 국모를 침해한 의리죄인으로서의 명목 외에 송시열, 김수항, 민정중을 핍박 한 사실이 중요하게 거론되었다. 이 상소의 내용은 매우 중요한 의 미를 담고 있다. 전자의 경우는 표면적이고 명분적인 이유에 불과한 반면 후자의 이유는 이현일이 신원되지 못한 실질적인 이유로 판단 되기 때문이다. 이때까지 노론들은 이현일을 의리죄인으로 몰아가며 명분적인 결 함을 부각시킴으로써 신원을 방해하는 구실로 삼았지만 보다 근본적 인 이유는 노론의 영수들을 논죄했다는 반감에 따른 조처였음이 이 상소에서 극명하게 드러나고 있는 것이다. 이현일이 민정중의 처벌 에 적극적인 태도를 견지한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송시열과 김수항 과는 직접적인 마찰을 빚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론들은 이현일을 송시열, 김수항, 민정중을 폄박한 인물로 간주하여 철저히 배척했던 것이다. 19세기 이후 안동김씨 중에서도 김수항계열에 의해 세도정권이 이 어지는 선상에서 이현일의 신원이 호전될 가능성은 더욱 희박할 수 밖에 없었다. 철종 6년(1855) 吳爀등의 유소도 이러한 흐름을 반영 하는 것임에 분명하다. 결국 이현일의 신원은 노론정권이라는 현실 적인 장벽을 넘지 못하고 소강 상태를 보일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난맥상은 고종조까지 되풀이되다 純宗2년(1908)에 가서야 관작이 회복되고 ‘文敬’의 시호를 받으면서 종결되었다.135) 여기서 한가지 주목할 사실은 노론에게 있어 이현일과 윤휴는 거 의 동일한 인식 선상에서 취급되고 있다는 점이다. 두 사람 모두 산 림으로 활동하였지만 윤휴는 ‘防西之用’ 즉 서인에 대응하는 차원에 서 집권남인들에 의해 조용된 일면이 있었고,136) 이현일은 영남세를 끌어들여 자신들의 입지를 강화하고 對國王창구로 활용하기 위해 조용되었다는 점에서도 양인은 유사성이 있었다. 더욱이 신모복설을
134)『哲宗實錄』卷7, 6年8月壬辰. 135)『葛庵集』「年譜」,〈太上八月辛未三月〉. 136)『肅宗實錄』卷4, 元年9月己酉.
주장했던 윤휴의 예설과「복제소」에서 드러난 이현일의 예설은 그 맥락을 같이함으로써 서인과 입론을 달리한 점도 이들이 역적에 비 견될 정도로 서인들의 맹공을 받고 나아가서는 남인(淸南)으로부터 도 기피되는 인물로 전락하는 데 일정한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여겨 진다.
5. 맺음말
근기남인과 영남남인의 학문적 정치적 제휴관계는 갑인예송을 계 기로 하여 남인정권의 창출이라는 결실을 맺게 된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영남에 대한「慰悅之邦」의 차원에서 일부 인사에 대한 조용 론이 대두되기에 이르다. 이현일의 천거도 바로 이러한 상황 속에서 이루어졌다. 이현일의 천거 사유는 학행이 뛰어나다는 것이었고, 그가 실제로 출사한 것은 숙종 3년이었다. 그러나 이때는 재야의 남인인사에 대 한 의례적인 천거가 이루어지던 시기였고, 허목․윤휴와 같은 남인 의 원로들이 건재하던 시기였기 때문에 이현일의 존재가 그다지 부 각되지는 못했다. 도리어 이옥과 유명천의 알력에 강경론으로 대응 하다 민감한 정치 현실을 경험하는 과정에서 출사를 재고하게 되는 부정적인 면도 없지 않았다. 다만 이때의 출사가 허목, 윤휴, 홍우원 등 남인의 명사들과 교유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고, 후일「기사산 림」으로 재입조하는 데 적절한 토대가 되었던 것은 사실이다. 한편 숙종 15년의 기사환국은 이현일의 정치적 생애에 있어 분명 일대 전기였다. 숙종초기 남인 산림으로 활동하던 허목과 윤휴가 사거한 상황에서 이현일의 존재가 부각되기 시작한 것이다. 당시 이현일은 학문적인 역량에 더불어 이황→김성일→장흥효로 이어지는 학통의 계승자라는 탄탄한 기반을 바탕으로 영남사림을 영도하는 처지에 있었다. 이에 근기남인들은 산림을 중용하여 정권의 정당성을 확보한다는 취지 외 에도 이현일을 조정으로 불러들일 경우 이현일을 중심으로 결집되어 있던 영남사론까지도 아울러 포섭할 수 있다는 의도에서 이현일의 징소를 적극적으로 주선하게 되었다. 이에 정치참여에 대해 남다른 포부를 지니고 있던 이현일은 조정의 소명에 부응하여「己巳山林」으 로 화려하게 재입조하게 된다. 그러나 재입조 이후 이현일에게 다가온 정치 현실은 자신의 이상 과는 너무도 괴리가 있었다. 숙종 15년에서 갑술환국 직전까지 보여 준 그의 정치적 생애는 집권남인들과의 갈등으로 점철되었다. 집권 남인들은 이현일을 보도직에 한정하면서도 그의 위망을 빌어 당면 문제들을 해결하고자 했다. 이 과정에서 이현일은 자의반 타의반으 로 현안 문제에 개입하게 되는데, 이는 노론으로부터 요주의 인물이 되어가는 과정이었다. 그가 갑술환국 이후 국모를 침해했다는 이유 로 10년에 가까운 세월 동안 유배생활을 해야 했고, 사망한 뒤에도 200년 동안 명의죄인으로서의 오명을 지닌 채 노론들의 철저한 보복 을 감수해야만 했던 것도 이 때문이었다. 더욱이 그는 이러한 흐름 속에서 점차 윤휴와 더불어 청남계열로부터도 기피되는 인물로 전락 되는 곡절을 겪기도 한다. 여기서 우리는 조선후기 산림의 왜곡된 면을 발견하게 되고, 영남남인과 근기남인의 전통적인 제휴관계를 재고하게 된다. 결국 이현일은 영남 산림으로서는 전례없이 조야의 전폭적인 지지 를 받으면서 화려하게 중앙의 정치 무대에 진출한 인물이었지만 정 계에서 노정된 집권남인과의 갈등 그리고 숙종의 표면적인 예우는 이현일의 정치적 소신과는 동떨어진 것이었다. 이러한 곡절 속에서 도 그가 끝내 거취를 분명하게 결정할 수 없었던 것은 자신의 경세 론을 구현하는 데 있었지만 이 또한 제반 장벽에 부딪혀 수포로 돌 아가고 말았다. 그러나 이후에 제기된 명의죄인으로서의 죄목은 평 생의 족쇠가 되는 한편 사후 200년 동안 노론들이 이현일 자신은 물 론 영남사림 전반을 압박하는 좋은 구실이 되고 말았다. 노론들은 이현일을 윤휴와 동일한 범주로 인식하여 누구보다 철저하고 장기적 인 탄압을 가했던 것이다. 표면적인 이유는 이현일이 노론의 거두 송시열, 김수항, 민정중을 탄압했다는 데 있었지만 노론들은 이현일 을「名義罪人」․「의리죄인」으로 몰아감으로써 영남사림 전반에 명분 적인 하자를 짐지우고자 했던 것이다. 이러한 정황을 놓고 볼때 이현일은 역대 산림가운데 가장 운신의 폭이 좁고 또 가장 적실하게 이용된 경우인 동시에 가장 철저한 정 치적 보복을 감수해야만 했던 인물이었다. 그러나 이현일에 대한 정 치적인 보복이 강화되면 될수록 영남사림에서의 입지는 더욱 강화되 는 추세를 보이면서 그는 이황에 의해 형성된 영남학파를 재정립한 인물로 평가된 나머지 영남학파의 도통체계에서 확고부동한 위치를 점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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