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살아난 벽시계 (1)
“꼬끼오~ 꼬옥, 꼬끼오~ 꼬옥”
새벽닭 울음소리에 잠을 깬 할머니는 캄캄한 부엌을 더듬어 아침 준비를 하신다. 부랴부랴 아궁이에 불을 지피고, 무쇠 솥에는 보리쌀 위에 겨우 한 줌의 쌀을 얹어 밥을 하신다. 솥에서 김이 나기 시작하면 할머니는 윗방에서 곤하게 자고 있는 아들을 깨운다. 아들은 채 어둠이 걷히기도 전에 아침밥을 먹고 배낭 같은 책가방과 도시락 통을 들고 집을 나선다. 그때서야 천호산 동쪽은 뿌옇게 밝아오고, 논산에서 부황역을 지나 임리(숲말) 끝자락을 돌아나오는 증기기관차의 기적소리가 “삐익~ ”하고 들린다. 그 소리를 듣고 15살 아들은 걸음을 재촉하여 기차역으로 나간다. 아들은 1943년, 그러니까 해방 전 연산에서 대전에 있는 실업계 중등학교(전, 대전공업고등학교)로 기차 통학을 하고 있었다.
할머니는 어제 온종일 벼 타작으로 몸이 몹시 고단하셨는지, 새벽닭 우는 소리를 듣지 못하고 깜박 잠이 드셨다. 희뿌연 하게 밝아오는 창호지 문을 보고서야 화들짝 놀란 할머니는, 정신이 하나도 없이 부엌으로 나가셨다. 먼저 아궁이에 불부터 지피고 아들을 깨웠다. 도대체 지금 몇 시나 됐을까? 평생 시계라는 것은 모르고 새벽닭에만 의지해 살아온 할머니는, 닭 울음소리를 못 들었으니 아침 할 시간은 물론 아들 기차 시간도 통 짐작을 할 수가 없었다. 설익은 밥이라도 먹여 보내려고 허겁지겁 서둘렀건만, 벌써 기적소리는 "삐익~ " 하고 임리 산모퉁이를 돌아 들려온다. 아들은 기차를 놓칠세라 서둘러 집을 나섰고, 할머니는 “우선 뛰어가서 기차에 타고 있어라. 벤또는 내가 바로 들고 갈 테니...” 하시며 아들 등 뒤로 소리를 치셨다. 그 때만 해도 호남선 모든 증기기관차는 연산역에서 물을 넣어야 했기 때문에, 정차 시간에 조금 여유가 있다는 것을 할머니는 알고 계셨다. 할머니는 설익은 밥을 도시락 통에 채워 연산역으로 정신없이 내달음치셨다.
기차가 떠나기 직전에 간신히 도시락 통을 넘겨준 할머니는, 팍팍한 걸음으로 집에 돌아와 그냥 안방 마루에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그러고는, “내가 어쩌다가... 내가 어쩌다가 자식 아침밥도 못 먹이고..” 를 되풀이 하시며 한동안 말을 잇지 못하셨다. 할머니께서는 그도 그럴 것이, 너무 일찍 아침밥을 지어 아들이 날도 새지 않은 연산역 대합실에서 기차가 들어올 때를 한없이 기다리게 한 적은 있었지만, 오늘처럼 아침밥을 못 먹여 보낸 일은 없었기 때문이다.
그 소란을 내내 지켜보시던 할아버지는 아침을 먹는 둥 마는 둥 조용히 집을 나섰다. 하루 종일 어디를 다니셨는지 다 저녁때가 돼서야 돌아오신 할아버지 손에는 무명 보자기에 싸인 커다란 물건이 하나 들려있었다. 연산 장터를 다녀오셨는지 아니면 논산 읍내까지 나갔다오셨는지는 모르지만, 할아버지는 벽에 거는 벽시계를 하나 구해오신 것이다. 할아버지께서는 “새 시계는 아니지만 깨끗이 사용한 것이라니 우리가 쓰는 데는 지장이 없을 것이다“라고 하시며 안방 높은 곳에 그것을 걸어놓으셨다. 태엽을 감아 밥을 주는 수동식 괘종시계로, 시계 뚜껑을 열면 가운데에 큰 추가 매달려 있고, 숫자판에는 아래쪽으로 좌우 두 개의 태엽 감는 구멍이 뚫려있었다.
그날부터 안방 벽에 걸린 벽시계는 할머니의 시간 지킴이가 되어, 하루도 빠짐없이 “땡 땡” 종을 치며 충실하게 시간을 알려주었다. 그 후 기차통학으로 무사히 대전에 있는 실업계 중등학교를 졸업한 아들은 연산국민학교 선생님이 되었고, 19살이 되자 할아버지의 뜻에 따라 이른 장가를 들어 나를 포함한 5남매의 아버지가 되셨다. 그 때까지 벽시계는 내가 태어난 시골집 안방 그 자리에서 우리의 시간을 지켜주는 지킴이는 물론, 우리 가정의 일상을 말없이 내려다보는 한 가족이 되어있었다. ♥
2020. 6. 6 1943년의 그 벽(괘종)시계
* 포토 에세이(141) : '다시 살아난 벽시계 (2)'에서 계속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