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식 : 덕에 지식을 더하라(벧후1:5-7)
2024.8.4, 김상수목사(안흥교회)
평양에서 멀지 않은 룡강(龍崗)의 한 대갓집에 올꾼이라는 머슴이 있었다. 어느 날 대감이 올꾼이에게 “너 내일 아침에 평양 좀 다녀와야겠다!”라는 말을 했다. 그런데 다음 날 아침에 올꾼이가 보이지 않자 대감은 화가 났다. 그리고 한참 만에 올꾼이가 숨을 헐떡이며 집에 들어왔다. 화나 난 대감이 “네 이놈 왜 이제 나타났느냐?”라고 물었다. 그러자 올꾼이는 “대감님의 말씀대로 평양에 다녀오는 길입니다.”라고 대답했다. “뭐라고? 다녀 올 이유도 듣지 않고 갔다 왔다는 말이냐?” 대감은 어이가 없었다. 이 이야기에서 연유되어서 평안도 일대에 “올꾼이 룡강 다녀오듯 한다”는 속담이 생겼다.
그런데 우리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지식이 없으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올꾼이 룡강 다녀오는 식의 신앙생활을 하는 수가 있다. 성격도 활발하고, 예의범절도 반듯하고, 일처리는 투명하고 열정적인데, 결정적으로 자기 생각이나 지식이 앞서는 사람이 이런 경우에 해당한다. 이런 상태에 있는 사람의 경우에는 일이 잘되면 한 없이 기분이 업(up) 되지만, 반대로 일이 잘 안 풀릴 때는 본인의 순수한 마음을 알아주지 않는 것에 대해서(실제로 순수함) 억울해 하면서 심지어 침체에 빠지기도 한다.
돌이켜 보면, 우리들이 세상의 지식이 부족한 것은 부끄러워하면서도(학력, 컴퓨터, 기술, 영어단어 등), 하나님의 말씀을 모르는 것은 부끄러움을 느끼지 못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그래서 예수님은 산상수훈의 결론 부분인 마태복음 7장에서 주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같다고 강조하셨다. 여기서 주님이 강조하신 반석은 ‘말씀의 반석’이다(마7:21-27).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마7:24)
사도 베드로도 오늘 분문인 베드로후서 1장 5절 말씀에서 성도들의 믿음에 덕을 더하고, 덕에 지식을 더하라고 권면했다(지난주일 설교에서는 “믿음에 덕을 더하라”는 말씀을 나눴다). 여기서 쓰인 “덕(아레텐)”은 ‘도덕적인 탁월함’을 뜻한다. 성도들은 믿음에 탁월한 도덕성을 갖도록 힘써야 한다. 믿음 위에 높은 도덕성과 윤리 그리고 예의범절 등이 더해지지 않으면, 그리스도의 향기는커녕 오히려 악취를 풍기게 된다.
그런데 하나님은 사도 베드로의 편지를 통해서 오늘 우리들에게, 덕스러운 모습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그 위에 지식을 더할 것을 말씀하셨다. 다같이 5절 말씀을 읽자.
“그러므로 너희가 더욱 힘써 너희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벧후 1:5)
여기서 사용된 “지식(그노시스)”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 즉 성경말씀을 뜻한다. 이 지식은 단지 머리로 이해되는 지식이 아니라, 생활 속에서 삶으로(=가슴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체험하여 아는 것까지를 뜻한다.
아무리 성격이 좋고, ‘법(法) 없어도 살 사람’이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도덕적으로 탁월해도,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무지하면, 그 사람은 영적으로 맹인과도 같다(벧후1:9, “이런 것이 없는 자는 맹인이라”). 컴퓨터를 모르는 사람을 보통 ‘컴맹’이라고 한다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모르는 사람은 무슨 맹일까?
본 설교자는 지난주일 밤에 대천교회(송천웅목사)에서 교사헌신예배 설교를 했다. 대천교회 본당에 들어갔을 때, 가장 인상적으로 눈에 띤 것이 있었다. 그것은 예배당 벽에 붙여 놓은 2024년도 표어의 내용 중에 “공부”라는 단어였다.
“2024년 표어 : 여호와를 힘써 알자(호6;3), 공부하는 교회, 공부하는 성도”
“공부하는 교회, 공부하는 성도”, 무엇을 공부하는가 하면, 여호와를 힘써 아는 것을 공부하자는 것이다. 아마 연세가 지긋하신 분들에게 “공부”라는 단어를 쓰는 것이 쉽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나이와 상관없이 다른 것은 몰라도 하나님을 알아 가는 일(=성경에 대한 지식, 말씀)에는 최소한 맹인이 되지 말자는 의미로 읽혀졌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성경이 일관되게 강조하는 바이고, 이는 오늘 우리에게도 동일하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며 믿음의 사람들은 단지 마음씨 좋고, 성격 좋은 사람이 되는 것에만 머물지 말고, 덕에 말씀의 지식을 더하기를 힘써야 한다. 이렇게 할 때, 하나님은 물론 주변 사람들의 마음까지 흡족하게 하고, 자신의 믿음도 깊어지고, 신앙의 열매도 풍성히 맺고, 실족하지도 않는다(벧후1:10-11).
성경을 펼치면 가장 먼저 처음에 나오는 창세기 1장 1절 말씀(“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에서부터 우리는 하나님에 대한 가장 근본적이고 중요한 지식을 얻을 수 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천지를 지으신 창조자시다. 그런데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쳐 주시면서, 천지를 창조하신 그 하나님이 바로 우리의 아버지가 되신다는 것을 강조하셨다(마6:9).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마 6:9)
정말 그렇다. 하나님은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이시만, 동시에 우리(나)의 생명을 이 땅에 내시고,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의 앞길을 친히 인도하시는 아버지시다. 만약 하나님이 우리에게 계시의 말씀을 주시지 않았다면,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에 대해 알 수 있겠는가? 아무리 우리의 삶이 어려워도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고, 그리스도 안에 내가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면, 우리는 어떤 고난도 이겨낼 수 있다.
우리는 성경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에 대한 지식뿐만 아니라, 우리 자신에 정확한 지식도 알 수 있다. 우리 앞에 작은 그릇이 하나 있다고 가정해 보자. 이 그릇은 자신이 어떤 목적으로 만들어진 그릇인지를 알지 못한다. 오직 주인이 그릇을 붙들고 사용하는 순간에야 비로소 자신이 만들어진 목적에 대해서 알게 된다. 이것은 우리들에게도 마찬가지이다. 사람은 누구나 하나님의 말씀 앞에 섰을 때, 내가 누구인지를 알게 된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서는 것이 곧 하나님 앞에 서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을 향해 백날 천날 이렇쿵 저렁쿵 말하는 경우가 많다(넌 별 볼일 없는 사람이야, ‘네까짓 것이 뭘 안다고?, 나 같은 것은 등). 그러나 다른 사람들의 말 때문에 우리(나)의 존재의 소중함이 결정되는 것은 아니다. 우리 자신이나 우리 앞에 있는 사람들의 외모가 노인이면 어떻고, 피부색깔이 다르면 어떤가? 모두가 가장 귀한 생명들이다. 이것이 성경의 가르침이다.
서울대학교 혈액종양내과 김범석 교수의 글에 의하면, 말기 암 환자들 중에서 임종 몇 달 전까지도 계속해서 일에 매달리는 환자들이 생각보다 많다고 한다(동아일보2022.2.18, “일을 멈추지 않는 말기 암 환자”). 일반적으로 볼 때는 이해가 가지 않는 모습이지만, 이들은 생계수단을 위해서 일하는 것이 아니라, 심리적으로 일을 통해서 사람을 만나고, 자신의 존재 이유를 찾고 싶어한다는 것이다. 심지어 중고등학생 암환자들도 암진단을 받은 후에 그 이전보다 너무 열심히 공부해서 옆에서 걱정할 정도인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김범석 교수의 글을 읽으면서 일과 존재에 대한 여러 생각을 했던 기억이 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환자나 보호자를 포함해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은 말씀 안에서 내 삶의 의미를 찾아야 한다. 성경은 사람의 생명의 가치를 일을 하고 안함이나 소유의 유무에 두지 않는다. 하나님은 우리들 한 사람 한 사람의 존재(being) 자체를 소중히 여긴다.
이런 면에서 볼 때, 우리가 궁극적으로 찾고 만나야할 대상은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며, 사나 죽으나 항상 집중해야할 것은 세상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일이다(중보기도의 노을 저는 일, 찬양, 영혼구원 등). 이것이 믿음에 덕과 지식을 더하기를 힘쓰는 성도의 모습이다.
어떤 사람은 그래도 “나 같은 늙은이가 귀하기는 뭐가 귀해요?”라고 말하고 싶을지 모른다. 그러나 성경은 젊은 사람만 귀하다고 말씀한 적이 없다. 하나님은 모든 생명을 귀하게 여기시고, 모든 사람을 사랑하신다. [진품명품]이라는 TV 프로에서 몇 일전에 공장에서 만들어진 물건을 진품명품이라고 하는 것을 보지 못했다. 오히려 잘 보존된 오래된 물건이나 작품들이 진품명품으로 인정받는다.
악기도 그렇다. 오래되고 보존상태가 좋은 바이올린일수록 소리가 깊다. 가격도 비싸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우리의 몸도 악기이다. 비록 젊은이처럼 높은 음을 내는 것이 어렵고, 음악적인 기교를 부리는 것도 쉽지 않지만, 몸과 마음에 베인 인생과 연륜으로 부터 나오는 신앙고백적인 울림은 오래된 바이올린 소리보다 더 깊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리고 이 글을 읽는 지역 주민 여러분들이여, 그러므로 우리의 믿음에 덕을, 덕에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더하기를 더욱 힘쓰자.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영적인 맹인이 되지 말자. 우리가 진짜 멈추지 말아야 할 것은 세상 일이 아니라, 말씀 안에서 하나님을 더 깊이 알아가는 일이다. 이렇게 될 수 있도록 날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고, 묵상하는 일에 더욱 힘쓰자. 그래서 우리의 삶이 더 풍성하고, 더 성숙해지고, 믿음이 더욱 굳세어 지게 하자. 주님이 우리와 늘 함께 하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