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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410. 묵상글 들 ( 부활 8부 토요일 - 영적인 의젓함.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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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410.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부활 8부 토요일 - 영적인 의젓함
오늘 사도행전은 사도들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병자를 치유하자
더 이상 예수의 이름으로 그런 짓을 하지 말라고 경고하는 내용인데
이에 사도들은 영적인 의젓함으로 이렇게 얘기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여러분의 말을 듣는 것이
하느님 앞에 옳은 일인지 여러분 스스로 판단하십시오.
우리로서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사도들이 영적으로 의젓한 것은 사도들의 말대로
사도들이 사람 앞에 있지 않고 하느님 앞에 있었기 때문이고,
사람들의 말보다 하느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이에 비해 유다의 원로들과 지도자들은 백성의 지도자들이고,
백성들에게 하느님 말씀을 가르치는 위치에 있는 자들임에도
오늘 사도행전의 표현대로 "무식하고 평범한 사람들"인 사도들보다
의젓하지 않고 사도들한테 밀리는 듯 보이는데 그것은 왜 그렇게 됐습니까?
물론 이들이 영적으로 사도들에게 밀리는 것은
하느님 앞에 있지 않고 하느님의 말을 듣지 않기 때문인데
이 말은 이들이 왜 그렇게 되었냐는 말이지요.
그것은 이들이 사람들 위에 있었기 때문이지요.
사람들 위에 있다 보면 위를 보지 않게 되고,
눈에 뵈는 것이 없게 되는 것이 보통의 인간입니다.
사람들 위에 있다 보면 올려다보기 보다는
내려다 보는 것에 시선이 굳어지게 되고,
더 교만하게 되면 자기밖에는 아무것도 보지 않게 된다는 말이지요.
이것은 제 경험에서 나온 말이고 저를 반성하며 하는 말인데
그러기에 우리는 사람들 위에 있지 않고 프란치스코처럼
작은 자와 낮은 자의 위치에 있도록 근원적인 노력을 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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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 '1'
김레오나르도김찬선 3 분 전
부활 후 약 2주간 제게 좀 바쁜 일들이 있고, 살던 곳에서 이사도 가야 합니다. 그래서 당분간, 아마 다음 주 목요일까지, 새로운 강론을 올리지 못하고 이전 강론을 또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죄송하고 양해애 주시기 바랍니다. 복된 주말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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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410. 부활 팔일 축제 토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수사신부님.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라.”
오늘 <알렐루야 환호송>에서 이렇게 노래합니다.
“이날은 주님께서 마련하신 날, 이날을 기뻐하며 즐거워하세.”(시 118,24)
그렇습니다. 오늘, 이날은 제가 만든 날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마련하시고 건네주신 날입니다. 더구나 이 날은 인간에게 가장 큰 사랑이 베풀어진 날입니다. 곧 당신의 죽음으로 부활생명을 선물로 주신 날입니다. 하늘이 열리고 새로운 창조가 이루어진 날입니다. 이 날의 아름다움을 교종 프란치스코께서는 <복음의 기쁨>에서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드러난, 구원하시는 하느님 사랑의 아름다움”(36항)이라고 표현합니다.
여기에는, ‘주님의 사랑을 볼 수 있는 능력’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막달레나 마리아도, 엠마우스의 두 제자들도, 모여 있던 열 한 제자들도 부활하신 예수님을 알아보지는 못 하였습니다. 그 아름다움을 보지 못 하였던 것입니다. 맑고 투명한 ‘믿음의 눈’이 열리지 않은 까닭입니다. 이미 듣고 보았지만, 믿지를 않은 까닭입니다. 이를 믿게 되면 놀라운 일이 벌어집니다. 이를 우리는 요즈음 <제1독서>인 <사도행전>을 통해서 계속해서 듣고 있습니다. 부활을 믿는 이들 안에서 어떠한 어마어마한 일들이 일어나는지 말입니다.
이처럼, 부활은 오직 믿음 안에서 체험하게 되는 신비라 할 수 있습니다. 부활은 믿음이 삶이 될 때, 비로소 깨닫게 되고 증거 됩니다. 믿음이 삶이 될 때란 예수님이 십자가에 당신의 몸을 매달 듯, 그렇게 자신을 내어놓고 죽음을 받아들이는 것을 말합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제자들에게 복음 선포의 사명이 주어집니다.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라.”(마르 16,15)
여기에서, 먼저 알아들어야 할 것은 우리는 온 세상에로 “가라”는 파견을 받았다는 사실입니다. 곧 자신 안에만 머물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타자에게로 나아가라는 말씀입니다. “향하여 나아가는 존재”, 이것은 바로 그리스도인의 신원임을 말해줍니다. 마치 당신께서 우리에게 그렇게 향하여 먼저 다가오셨듯이 말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먼저 “파견 받은 자”가 되어야 할 일입니다. 그것은 파견하신 분의 뜻을 사명으로 받아들이는 일입니다. 곧 그분의 부활을 믿고 따르는 제자가 되는 일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파견 받았으되, “온 세상 모든 피조물”에게 파견되었다는 사실입니다. 곧 유다민족이나 이방민족이나. 우방이나 적국이나, 남녀노소 빈부귀천을 가리지 않고 모든 민족 온 인류에게로 가라는 것이요, 또한 인간뿐만이 아니라 “모든 피조물”에게로 가라는 파견입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복음”을 선포하라고 하십니다. 모든 피조물과 더불어 이웃이 되고, 형제가 되고, 한 가족이 되라는 말씀입니다.
그것은 세상에 살되 세상의 힘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힘으로 살라는 말씀입니다. 땅을 딛고 걷되 하늘을 바라보며 걸으며, 동료와 손을 잡고 걷되 다름 아닌 당신과 함께 걸으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프란치스코 교종께서는 회칙 [찬미를 받으소서](Laudato Si, 2015,6,18)에서, 우리가 더불어 사는 집인 지구가 “우리와 함께 사는 누이이며, 두 팔 벌려 우리를 품어주는 어머니”(1항)라는 사실을 상기시키면서, 피조물에 관한 책임을 성경의 전승에 비추어 설명해주고 있습니다(제2장 피조물에 관한 복음).
그런데 오늘, 나는 내 형제에게 모든 피조물에게,
이웃이 되고 형제가 되고 한 가족이 되어주고 있는가? 아멘.
-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라.”(마르 16,15)
주님!
제 자신 안에만 머물러 있지 않게 하소서.
세상에로, 이웃형제들에게로, 모든 피조물들에게 나아가게 하소서.
먼저 다가가게 하소서. 먼저 사랑하게 하소서.
자국민이나 이주민이나, 부유하거나 가난하거나, 친구이거나 적이거나
사람이거나 자연이거나, 모든 피조물과 더불어 형제가 되게 하소서
세상에 살되 세상의 힘이 아닌, 복음의 힘으로 살게 하소서.
함께 걷되 손을 잡고 걸으며, 땅을 딛고 걷되 하늘을 바라보기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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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410. 부활 팔일 축제 토요일.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르 16,9-15: 말을 듣고도 믿으려 하지 않았다
“이날은 주님께서 만드신 날 우리 기뻐하며 즐거워하세.”(시편 118,24) 주님께서 부활하신 날은 주간 첫날이며 바로 주일이다. 만물이 빛에 휩싸인 날이다. 이날 주님께서는 죽은 이들 가운데서 부활하셨다.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마리아 막달레나에게 처음으로 나타나셨다. 여인은 부활의 첫 번째 목격자가 되며 은총의 전달자가 된다. 그러나 그들은 그 말을 믿지 않았다. 예수님께서 전에 미리 말씀하신 것을 들은 제자들이었지만, 그녀의 말을 믿지 않았다. 스승이 힘없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자 크게 실망하여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가 빵을 떼어 나누면서 예수님을 알아보고 체험한 일을 전하였는데도 그 말도 믿지도 않고 받아들이지도 않았다. 자기들의 눈으로 확인하기 전에는 믿지 않는 그런 완고함을 보인다.
수난 하시기 전, 그들과 함께 계실 때 당신은 고난을 겪으시고 돌아가신 다음 부활하시리라는 것을 다 알려 주셨지만, 그분의 죽음이라는 충격적인 사건은 그들의 기억을 송두리째 없애 버렸다. 십자가에 매달리신 그분을 보고 너무나 혼란스러운 나머지, 그분의 가르침도 잊어버리고 부활을 기대하지도 못했다. 주님께서는 그들의 완고한 마음을 꾸짖으신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이 음식을 먹을 때, 당신을 나타내 보이심으로써, 사도들이 스승님의 부활을 받아들이게 해 주셨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신앙이 없음을 책망하신다. 예수님과 그토록 가깝다고 하는 제자들까지도 아마 주님의 부활을 믿기가 어려웠던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예수께서 승천하시는 그 순간까지도 계속되고 있음을 복음사가는 전하고 있다.
이렇게 부활 사건은 하나의 지식이나 이해가 아니라 현실적인 삶이었기 때문에 제자들의 불신과 주님의 책망이라는 과정을 통해서 제자들의 삶 속에 자리 잡게 된 것이다. 이러한 과정을 통하여 받아들인 부활의 신비를 이제 전하도록 선포 사명을 주님으로부터 받는다. 제자들의 신앙이 비록 약하였으나 주님께서는 이 제자들에게 당신 부활의 신비를 온 세상에 전하라고 사명을 주신다. 이제 제자들은 자신들의 삶 속에서 고통과 죽음을 불사하면서 이 부활의 신비를 전하기 시작했으며, 이것이 우리의 신앙의 핵심이 되었다.
신앙이 약한 제자들이었음에도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그 제자들을 교회의 초석이 되게 하시고 구원을 전하게 하셨다. 이제 그러면 우리들의 신앙은 어떠한가? 우리는 예수님의 부활에 대하여 어떠한 믿음을 가지고 어떻게 감사하면서 사는가를 살펴보아야 하겠다. 비록 나 자신의 신앙이 강하지는 못하지만, 주님께서는 제자들과 같이 나를 당신의 도구가 되기를 원하신다. 이제 부활하신 예수님을 우리의 삶 속에서 발견하도록 노력하며 구원을 선포하는, 비록 어떤 어려움이 있더라도 주님의 말씀을 용감히 전할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하겠다. 부활의 신비를 알고 있는 우리는 이제 우리의 삶이 언제나 부활의 신비를 체험하고 그 기쁨을 증언하며 살아가는 기쁘고 복된 신앙인의 삶이 되도록 노력하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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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410. 부활 팔일 축제 토요일. 한상우 바오로신부님.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마르 16, 15)
우리를
살리는
복음이다.
복음은
이미 여기에서
힘차게
시작되었다.
피조물의
허무를
사랑으로
채워주시는
생명의 참된
복음이다.
생명이 있기에
복음이 있다.
복음 선포는
부활의
선포이다.
복음의 핵심은
다름아닌
부활의 참된
진리이다.
부활은
제자들의 삶을
송두리째
바꾸어 놓았다.
우리 신앙인은
부활의
산증인들이다.
부활의 선포는
믿음에서
시작한다.
부활은
믿음의 삶이다.
힘찬 삶이
힘찬 부활이다.
부활하신
예수님과
함께 사는
우리들 삶이
복음의 삶이다.
우리가
삶으로
복음을
믿을 때
복음은
강력한
생명이 된다.
모든 사람을
살리는
복음이다.
우리가
전해야 할
것은
복음이다.
복음으로
모든 피조물의
새로운 삶이
시작되었다.
새로운 삶은
하느님 나라의
빛나는 시작이다.
매일의 삶이
복음이고
매순간의
나눔이
복음 선포이다.
우리를 위한
복음 선포임을
진실로 믿는다.
새 삶이
새롭게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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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410. 부활 팔일 축제 토요일. 서철 바오로 신부님.
오늘의 묵상
부활 신앙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시어 사람들에게 나타나셨기에, 그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이들의 증언을 받아들이고, 예수님께서 돌아가셨다가 다시 살아나셨음을 받아들이며, 예수님의 전 생애를 받아들이고, 그분 삶의 모습대로 살고자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고, 무덤에 묻히신 지 사흘 만에 살아나셔서 사람들을 만나십니다.
주간 첫날 새벽에 예수님께서 마리아 막달레나에게 나타나셨습니다. 그래서 마리아는 제자들에게 달려가 자신이 본 것을 말하지만 그들은 믿지 않습니다. 그날 오후 예수님께서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 그들도 다른 제자들에게 와서 알리지만 그들의 말도 믿지 않습니다. 마침내 열한 제자가 식탁에 앉아 있을 때 예수님께서 나타나십니다. 그리고 제자들의 불신과 완고한 마음을 꾸짖으십니다.
불신과 믿음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믿음은 예수님을 받아들이는 것으로, 예수님께서 보여 주시는 사랑의 하느님을 받아들이고, 우리를 죽기까지 사랑하신 그 사랑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도 그 사랑을 따라 살겠다고 약속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죽음과 사랑이 마침내 승리한다는 것은 받아들일 만하고 누리고 싶으나, 삶에 그 고난을 받아들이기에는 우리가 아직 완고한 것은 아닐까요?
어느 신부님이 마르코 복음서에 관한 글에서 예수님의 사랑은 ‘길’이라고 표현하였습니다. 그 길은 정해 놓고 몇 년만 고생하면 끝나는 것이 아닌 힘든 길이라고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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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410. 부활 팔일 축제 토요일. 이기우 사도요한 신부님.
사람들이 달라진 이유: 발현과 기적 그리고 담대한 믿음
하느님께서는 사람을 지어내시며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우리와 비슷하게 우리 모습으로 사람을 만들자.
그래서 그가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집짐승과 온갖 들짐승과
땅을 기어 다니는 온갖 것을 다스리게 하자”(창세 1,26).
그리고 당신을 닮은 모습으로 세상을 다스릴 수 있도록, “흙의 먼지로 사람을 빚으시고,
그 코에 생명의 숨을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명체가 되었”(창세 2,7)습니다.
어둠의 혼돈(창세 1,2)과 뱀의 유혹(창세 3장) 속에서,
하느님께서 당신을 가장 비슷하게 닮은 사람을 마리아를 통해 세상에 내보내셨습니다.
“성령께서 내려오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힘이”(루카 1,35) 마리아를 덮음으로써 그 사람,
예수님께서 다윗의 후손으로 세상에 오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뒤덮고 있던
‘어둠의 혼돈’과 ‘뱀의 유혹’을 몸소 겪으시며 하느님 나라가 다가왔다고 선포하셨습니다.
서른 살이 되실 무렵부터 3년 동안 갈릴래아와 예루살렘에서 그리 하신 결과,
열두 명 남짓한 제자들을 얻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죽음으로 ‘어둠의 혼돈’을 없애시고 ‘뱀의 유혹’도
이겨내시고 부활하셔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서 말씀하셨습니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
이렇게 이르시고 나서 그들에게 숨을 불어 넣으며 말씀하셨습니다.
“성령을 받아라”(요한 29,22). 예수 부활로 완성된 창조의 과정이 한 마디로 이러하였습니다.
하지만 제자들은 아직 ‘어둠의 혼돈’ 속에 머물러 있었고, ‘뱀의 유혹’도 여전하였습니다.
그 결과로 그들은 ‘불신과 완고한 마음’(마르 16,14)을 씻어내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결국 그것을 씻어내게 한 힘은 발현하신 예수님께서 복음선포의 사명을 주신 말씀이었습니다.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마르 16,15). 모든 유다인도,
모든 사람들만도 아니고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라고 주신 사명은
결국 새 하늘과 새 땅과 새 사람으로 창조하시겠으니, 그 일꾼이 되라는 뜻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제자들을 달라지게 한 힘은 예수님의 발현이고,
그분이 그 제자들을 믿어 주시고 부여하신 복음선포의 사명이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힘을 얻고 믿음이 생긴 제자들은 사도가 되어
예루살렘에 모인 유다인들에게 복음을 선포하러 나아갔습니다.
“무식하고 평범한” 그들이었지만 자신들이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사도 4,13.20).
그들은 예수님을 죽였던 유다 지도자들이 죽일 것처럼 위협하는 그 앞에서도,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여러분의 말을 듣는 것이 하느님 앞에 더 옳은 일인지 여러분 스스로 판단하십시오.” 라고 당당하게
버틸 수 있었습니다. 그들이 담대한 믿음을 지닌 사도로 달라져 있었던 것입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그렇게 배짱있게 나와도
그 권력자들이 속수무책으로 손도 댈 수 없었던 이유가 있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그들의 담대한 믿음을 통하여 태생 불구자를 일으키는 기적을 행하셨고,
이 기적을 본 군중이 무려 5천 명이 넘게 그리스도의 세례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유다교 권력자들을 꼼짝 못하게 만든 것은 세례 받은 5천 명 이상의 유다인들이고,
그 유다인 군중이 빌라도의 예수 재판 때와는 달리 사도들을 지지하며 주목하게끔 달라지게 한 것은
사도들이 베푼 기적 때문이었습니다. 요컨대, 제자들을 달라지게 한 예수님의 발현과,
군중을 달라지게 한 사도들의 기적이 복음선포의, 더 나아가서는 새 창조의 원동력이었던 셈입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의 상황은 어떨까요? ‘어둠의 혼돈’을 방불케 하는 ‘불신과 완고함’이 사라졌을까요?
‘뱀의 유혹’은? 또 발현과 기적은 없는 걸까요? 오늘 복음의 상황에도 불구하고
독서에서 베드로와 요한을 제외한 다른 제자들이 나타나지 않았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들은 여전히 ‘불신과 완고함’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발현을 체험하고서도
요지부동이었던 그들을 통해 오늘날 우리 교회의 그리스도인들을 봅니다.
발현과 기적을 연결해 주는 고리는 ‘담대한 믿음’이었습니다.
그 당시에도 그러했거니와 오늘날에도 그러합니다.
사도들을 주춧돌 삼아 세워진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발현을 성사로 거행합니다.
그리고 성사에서 예수님을 만난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에 나가서 사도직 활동으로 사랑을 실천하고 있습니다.
사회복지, 간병간호와 의료, 정의구현과 사회교리 실천 등 현 시기 우리나라 현실에서
크게 혹은 작게, 보이게 혹은 숨어서 이루어지는 기적같은 애덕 실천은 차고 넘칩니다.
문제는 발현이나 기적이 아니라, 담대한 믿음입니다.
베드로와 요한처럼,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는” 성사의 증인들이 필요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 옳은 일임을 철썩같이 믿는” 기적의 마중물이 필요하지요.
어제의 복음과 독서에서 묵상한 바와 같이, 우리에게는 ‘153의 기적’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두 가지 “오른쪽 깊은 어장”으로 나아가야 하는 ‘행동’이 필요한 것은 그래서입니다.
예수님께서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의 비유”를 말씀하셨던 배경은,
그 양과 같이 양떼로부터 소외된 존재들이 벼랑 끝으로 내몰려서 삶의 위기에 처해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또 예수님께서 당신이 하느님이시면서도 굳이 성경 말씀을 상기시키신 이유는 믿음의 뿌리를 되찾아야
줄기도 자라고 꽃이 피며 열매가 맺힐 수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교회라는 하느님 백성도 그렇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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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410. 부활 팔일 축제 토요일. 반영억 라파엘신부님.
복음을 선포하여라
우리가 만나는 한 사람, 한 사람이 소중합니다. 다양한 사람이지만 그들을 인정해 주고 공감해 주며 위로해 준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할 수 있다면 참으로 행복한 일입니다. 그리고 한 사람을 기억하고 그로부터 주어진 기쁨을 간직할 수 있다는 것은 큰 보람입니다. 그러므로 일상 안에서 행복과 보람을 만들 수 있도록 노력하는 정성이 꼭 필요합니다. 지금 순간 나와 만남을 이루는 이의 행복과 구원을 위해 희생할 수 있는 은총을 누렸으면 좋겠습니다.
‘금맥보다 중요한 것이 인맥이다.’라는 말도 합니다. 한 개인과의 관계를 얼마나 큰 정성과 사랑을 가지고 맺어야 하는가를 말해줍니다. 관계의 형성이 곧 복음의 선포입니다. 한 사람을 주님 안에 감사할 수 있도록 눈뜨게 한다면 그를 통해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주님께 인도될지는 상상할 수가 없습니다. 한 사람과의 선한 관계가 주님의 사랑을 전할 수 있는 계기가 되기를 희망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수님의 부활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은 그들의 마음이 굳어져 있었던 까닭입니다. 자기 것으로 가득 차 있으면 다른 어떤 것도 들어갈 수 없는 법입니다. “담기는 것은 담는 그릇의 모양에 따라 달라진다.”는 옛말이 있듯이 은총이 풍부해도 담을 그릇의 준비를 제대로 하지 않으면 담을 수 없습니다. 비어 있지 않은 그릇에 무엇을 담을 수 있겠습니까? 부활의 사실을 이미 예고해 주었고 또 그대로 이루어졌지만, 제자들은 여전히 받아들이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불신과 완고한 마음을 꾸짖으시고 이르셨습니다.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마르16,15). 완고한 마음은 말씀이 전달되는 것을 막고 부활이 선포되는 것을 방해합니다. 우리 마음이 거칠어지고 굳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완고해진 내 마음을 살처럼 부드러운 마음으로 고쳐주시길 청했으면 좋겠습니다.
복음 선포는 우리의 사명입니다. 우리는 복음을 선포해야 합니다. 그런데 복음을 선포하는 방법은 다양하고 일상 안에서 표현되는 사랑이야말로 주님을 만나는 감동을 줍니다. 어떤 기회를 특별히 만들어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주어지는 매 순간을 마음을 다해 사랑하고 최선을 다하면 그것이 큰 사랑이요, 복음의 선포입니다. 어영부영, 양다리 걸치기는 증거와는 거리가 멉니다.
예수님께서는 듣는 사람의 반응에 상관없이 당신의 말씀을 전하셨습니다. 당신은 언제나 하느님의 뜻을 전하는 것이 소명이기 때문입니다. 받아들이고 받아들이지 않는 것은 자유의지를 지닌 본인의 몫입니다. 우리도 누구의 말에 구애받지 말고 주님의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자상함과 따뜻함으로 사랑을 가지고 온 정성을 다하여 그러나 사람의 눈에 들기보다 하느님의 눈에 들어야 한다는 것을 잊지 말고 전해야 합니다. 그렇지만 사람의 마음을 읽는 지혜도 필요합니다. 그들의 눈높이로 접근해야 효과 있게 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복음 선포자가 되기를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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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410. 부활 팔일 축제 토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매달 ME 모임을 ZOOM을 통해서 하고 있습니다. 어린왕자에서 여우가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나는 우리가 4시에 만나기로 했으면 3시부터 행복해!” 매달 두 번째 토요일에 모임이 있습니다. 다들 모임이 있는 날은 행복하다고 이야기 하였습니다. 비록 대면으로 하는 모임은 아니지만 영상으로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대면으로 하는 모임에는 찾아가는 번거로움이 있지만 영상으로 하는 모임은 집에서 편하게 할 수 있는 장점이 있습니다. 모임에서 꼭 빠지지 않는 시간이 있습니다. 10분 동안 글을 쓰고, 10분 동안 나누는 시간입니다. 이번 나눔의 주제는 “나는 배우자가 어떤 말과 행동을 했을 때 행복한가!”였습니다. 30년, 40년 함께 살고 있는 부부들의 진솔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예전에는 배우자가 나를 위해서 말을 하고, 행동했을 때 행복했다고 합니다. 집안 청소를 해 주는 배우자, 맛있는 음식을 해 주는 배우자, 밖에서 돈을 벌어오는 배우자, 사랑한다는 말을 하는 배우자, 칭찬과 격려를 해 주는 배우자가 있어서 행복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최근에는 행복의 기준이 바뀌었다고 합니다. 둘이 같은 곳을 볼 때 행복했다고 합니다. 아이들을 위해서 같이 묵주기도를 할 때 행복했다고 합니다. 같이 산책을 할 때 행복했다고 합니다. 같이 성당에 갈 때 행복했다고 합니다. 예전에는 나를 위해서 먼가를 해 주지 않으면 서운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지금은 같은 곳을 바라보니 서운 한 것이 없다고 합니다. 대화를 들으면서 연륜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받는 것도 행복이지만 주는 것이 더 큰 행복이라는 것을 나누었습니다.
저도 비슷한 것을 나누었습니다. 예전에 본당에 있을 때는 사순시기에 매주 금요일 십자가의 길 기도를 교우들과 함께 했습니다. 신문사에서 일하면서 십자가의 길 기도를 소홀히 했습니다. 작년에는 코로나19 때문에 성당에 갈 수도 없었습니다. 2021년 사순시기에는 매주 십자가의 길 기도를 가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집전을 하지 않지만 교우들과 함께 십자가의 길 기도를 함께 했습니다. 성체강복을 받았고, 신부님의 강의도 들었습니다. 강의를 하는 것도 기쁨이지만 강의를 듣는 것도 행복입니다. 전례를 집전할 때는 잘 몰랐습니다. 전례에 참례하면서 십자가의 길 기도에 더 집중할 수 있었습니다. 12처에서 예수님께서 돌아가심을 묵상하면서 모두가 무릎을 꿇을 때는 마음이 아팠습니다. 나의 잘못과, 나의 죄 때문에 돌아가신 주님을 보았습니다. 생각을 바꾸면 세상이 다르게 보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막달라 여자 마리아에게 나타나셔서 흐르는 눈물을 닦아 주셨습니다.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에게는 함께 하시면서 성경에 나타난 뜻을 설명해 주셨습니다. 엠마오로 가던 제자들은 가슴에 차오르는 뜨거운 것을 느꼈고, 빵을 함께 나눌 때 그분이 부활하신 예수님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패배자로 고향으로 돌아가던 제자들은 이제 희망을 가슴에 품고, 다시금 치열한 삶의 자리로 전진하였습니다. 두려움에 떨던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예수님께서는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하고 인사를 하십니다. 제자들은 이 한마디의 위로로 용기를 얻었습니다.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실패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십자가는 이제 영광의 표징이 되었음을 알았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손으로 만져봐야만 믿겠다는 토마에게도 나타나셨습니다. 그의 불신앙을 책망하지 않으시고 받아 주십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을 하십니다. ‘토마야 너는 나를 보고야 믿느냐! 나를 보지 않고도 믿는 자는 참으로 복된 자이다.’ 토마는 예수님의 이 말씀을 듣고 완전히 주님께 의탁합니다.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 이라고 고백합니다.
예수님을 체험한 제자들은 담대하게 주님을 전하였습니다. 두려움 때문에 떨지 않고 자신 있게 부활하신 주님을 전하고, 그분의 가르침을 선포하였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여러분의 말을 듣는 것이 하느님 앞에 옳은 일인지 여러분 스스로 판단하십시오. 우리로서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주신 사명을 기쁘게 실천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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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410. 부활 팔일 축제 토요일. 새벽을 열며. 빠다킹 신부님.
1950년대에 미국 위스콘신 대학에서 우수한 문학 지망생들이 각자의 발전을 위해서 모임을 만들었습니다.
그중 한 모임은 정기적으로 모여 각자가 쓴 글에 대해 비평만 했습니다. 그런데 비평과 문제점만 말하다 보니, 모임은 언제나 얼굴을 붉히는 가운데 진행되었습니다. 한편 전혀 다른 방향을 가진 모임도 있었는데, 이 모임에서는 혹평보다 상대에게 최대한 좋은 부분을 찾아서 격려해주고 칭찬했습니다.
10년이 지난 뒤, 깜짝 놀랄만한 결과를 볼 수 있었습니다. 격려하고 칭찬했던 모임의 학생들은 대부분 훌륭한 작가로 성공했지만, 비평과 문제점만 말했던 모임의 학생 중에는 뛰어난 작가가 하나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사람에게는 95%의 좋은 점과 5%의 나쁜 점이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95%의 좋은 점보다 5%의 나쁜 점에 더 주목하는 사람이 너무 많다는 것입니다. 부정적이고 불만이 가득한 채 살아갈 뿐입니다. 그러나 95%의 좋은 점을 보는 사람은 늘 긍정적이고 자신감 넘치게 살아갑니다.
비판과 문제점만 말하는 5%의 나쁜 점만을 바라보는 ‘나’의 모습에서 벗어나, 격려하고 칭하는 95%의 좋은 점을 바라보는 ‘나’로 변화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그래야 너무나 좋고 아름다운 이 세상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뒤에 마리아 막달레나에게 처음 나타나십니다. 마리아는 이 소식을 제자들에게 전하지요. 그러나 이 여인의 기쁜 소식을 믿지 않습니다. 이번에는 시골로 가는 두 사람에게 나타나셨고, 이들 역시 제자들에게 부활 소식을 알렸지만, 여전히 믿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부활 소식은 크게 기뻐할 일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믿지 않습니다. 당신의 수난과 죽음 그러나 결국은 부활할 것임을 미리 알려주었음에도 제자들은 믿지 않습니다. 믿지 않으니 예수님 부활을 기쁘게 맞이할 수 있을까요? 그렇지 않았을 것입니다. 여전히 부정적이고 불만이 가득한 암흑의 시간을 보내면서 인상을 쓰면서 살고 있을 뿐입니다.
부정적인 마음이 기쁜 소식을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아무런 변화 없이 그냥 그 자리에 갇혀 있을 뿐입니다. 마리아 막달레나, 시골로 가는 두 사람은 예수님의 부활을 기쁨을 받아들였기에 제자들과 세상에 기쁜 소식을 힘차게 전할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도 나타나셔서 완고한 마음을 꾸짖으십니다. 그리고 온 세상에 가서 복음을 선포하라는 커다란 사명을 부여하십니다. 이 사명은 긍정적인 믿음 없이는 실천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주시는 사명을 전할 굳은 믿음을 가지고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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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온 인생을 단번에 살아야 하는 것이 아니다. 다행히도 한 번에 하루를 살면 된다(엔절린 밀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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딴짓도 해야 합니다.
제게 사람들은 “신부님”이라는 호칭으로 부릅니다. 신부이니 당연히 미사와 기도에 집중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온종일 신부 역할만 하고 있을까요? 당연히 아닙니다. 일반 직장인도 일만 하지 않겠지요. 단 하나의 일만 하면서 평생을 살 수 없습니다. 자신에게 열정을 줄 무엇인가가 있어야만 합니다.
여행, 독서, 운동, 영화 보기….
저 역시 딴짓을 많이 하기에 신부로 지금까지 잘 살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저의 대표적인 딴짓은 책 읽기와 글쓰기입니다. 전문 작가가 아니니 이를 하지 않는다고 해도 ‘신부’라는 호칭이 없어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신부의 일이라 할 수 있는 미사와 기도, 묵상 등으로 알려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글쓰기와 강의하는 것으로 저 자신이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 차원에서, 딴짓도 해야한다고 생각합니다. 일로 받아들이는 ‘일’이 아닌, 의미로써 내게 다가오는 ‘딴짓’을 통해 지금을 더 활기차게 살아야 합니다. 자신이 좋아하는 분야도 ‘일’일 때는 힘이 듭니다. 그러나 의미로 받아들일 때는 기쁨이 넘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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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410. 부활 팔일 축제 토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복음 선포의 삶
- 갈망, 만남, 선포 -
계속되는 파스카의 봄꽃들 만발한 주님 부활 축제 시기입니다. 예전보다 십일쯤 빨리 동시에 만개한 봄꽃들입니다. 요셉 수도원에도 배꽃들 만발하다는 소식입니다. 겨울을 이겨낸 파스카의 봄꽃들이라 한결같이 청초한 아름다움입니다. 우리나라 어디나 곳곳에 활짝 핀 새하얀 산벚꽃들 부활하신 주님을 선포하는 듯 합니다.
파스카의 봄꽃들과 더불어 신록의 나뭇잎들 역시 파스카의 기쁨, 신록의 기쁨을 노래하는 듯 합니다. 얼마전 자매와의 주고 받은 카톡 메시지입니다.
“주님 부활 대축일 미사후 대구에 내려 왔는데 벚꽃은 다 지고 음지에도 철쭉이 모두 피었네요.”
“아, 어디나 봄꽃들 만발하니 어디나 하느님 계신 하늘 나라네요!”
그렇습니다. 파스카의 봄꽃들 만발한 오늘 지금 여기가 파스카의 주님이 계신 하늘 나라입니다. 만발한 봄꽃들은 그대로 부활하신 주님을 선포하는 영혼들을 상징하는 듯합니다. 부활하신 파스카의 주님을 선포하는 복음 선포의 삶은 우리 모두의 존재이유이자 의무입니다. 성전 층계를 오르 내릴 때 마다 마음에 강렬히 와 닿는 글귀입니다.
“순교는 성체와의 결합이다.”
주님 성체와의 결합이 깊어질수록 참으로 아름답고 거룩한 순교적 삶이요 이런 삶 자체보다 더 좋은 복음 선포도 없을 것입니다. 무아의 집 식당에 걸려 있는 순교복자수녀회의 창립자 무아 방유룡 안드레아 신부님 사진과 더불어 말마디도 생각납니다.
“사랑하옵신 주께로 향한 침묵대월은 내 일생 모든 날에 유일한 낙이로세.”
참으로 파스카의 주님이 내 사랑의 모두가 될 때 저절로 복음 선포의 삶일 것입니다. 제 행복기도중 참 많이도 인용했던, 인용할 때마다 늘 새로웠던 대목이 생각납니다.
“주님, 당신은 저의 모두이옵니다.
저의 사랑, 저의 생명, 저의 기쁨, 저의 행복이옵니다.
하루하루가 감사요 감동이요 감탄이옵니다.
날마다 새롭게 시작하는 아름다운 파스카의 하루이옵니다.”
이런 고백대로의 삶이라면 그대로 참 아름다운 복음 선포의 삶일 것입니다. 오늘 복음의 절정인 부활하신 파스카 예수님의 유언같은 말씀입니다.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피조물이 복음 선포의 대상임을 깨닫습니다. 그러나 멀리 갈 것 없습니다. 바로 우리 삶의 자리가 세상의 중심이요 복음 선포의 자리입니다. 오늘 지금 여기서 복음 선포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파스카의 신비, 파스카의 사랑, 파스카의 기쁨을 살고 나누는 것입니다. 어떻게? 바로 그 방법을 나눕니다.
첫째, 갈망하십시오.
하느님을, 파스카의 주님을 갈망하는 것입니다. 목말라 하는 것입니다. 갈망의 사람, 바로 하느님만을 찾는 수도자의 정의입니다. 갈망은 영성생활의 원동력입니다. 갈망의 불이 꺼지면 영성생활은 끝입니다. ‘하느님께 대한 갈망, 배움에 대한 사랑’ 바로 수도생활의 정의입니다. 사랑의 갈망, 사랑의 목마름, 사랑의 그리움입니다. 부활 팔일 축제 중 계속되는 감미로운 시편 첫 구절, 얼마나 많이 고백했는지요!
“하느님, 내 하느님, 당신을 애틋이 찾나이다. 내 영혼이 당신을 목말라 하나이다. 물기없이 마르고 메마른 따, 이 몸은 당신이 그립나이다.”
어제 말씀드렸던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고백이 참 기발합니다. 우리만 아니라 하느님께서도 우리를 목말라 하신다는, 그리워하신다는 고백입니다. 우리의 근원적 ‘외로움’에 대한 유일한 처방도 주님께 대한 ‘그리움’뿐임을 깨닫습니다. 그러니 용기백배하여 하느님을, 파스카의 주님을 갈망하는 사랑으로 날마다 이 거룩한 미사에 참여해야 하겠습니다.
둘째, 주님과의 만남입니다.
주님을 찾는 항구한 갈망이 있을 때 만남의 은총입니다. 만남중의 만남이 부활하신 파스카 주님과의 만남입니다. 성서의 이야기들 대부분이 살아 계신 주님과 만남의 이야기들입니다. 바로 이 거룩한 미사시간, 파스카의 주님을 만나 주님과 하나되는 시간입니다. 주님과 만날 때 정화되고 성화되는 우리들입니다.
만남의 은총입니다. 복음에서 보다시피 참으로 주님을 사랑했던 사도들중의 사도라 칭하는 마리아 막달레나를 주간 첫날 새벽에 만나 주신 부활하신 주님이십니다. 참 아름다운 도반의 모범인, 주님의 수제자 베드로와 애제자 요한 역시 유다 지도자들을 놀라게 했으니 바로 제1독서 사도행전 서두의 다음 대목이 그 생생한 증거입니다.
‘그들은 베드로와 요한의 담대함을 보고 또 이들이 무식하고 평범한 사람임을 알아차리고 놀라워하였다.’
지식공부 많이 해서가 아니라 두 사도처럼 부활하신 주님과 만남의 은총으로 누구나 담대할 수 있고 관상가나 신비가가 될 수 있습니다. 삶의 지혜에 성덕을 지닐 수 있습니다. 아무리 많은 지식을 지녔어도 살아계신 주님을 만나지 못하면 무지의 어둠 속에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빛만이 무지의 어둠을 몰아냅니다.
이런 주님을 모르는 똑똑한 바보들인 무지의 사람들이 널려 있는 세상이 아닙니까! 얼마나 많이들 탐욕의 무지에 눈먼 세상인지, 분별력의 상실을 단순히 민심이 천심이라고 치부할 일만은 아닙니다. 너무나 쉽게 잊어버리는 ‘망각忘却의 병’이 문제인 것입니다. 코로나 바이러스를 압도하는 탐욕의 바이러스입니다.
한 두 번 주님과 만남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매일 평생 새롭게 파스카의 주님을 만나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곧 잊어버려 복음의 열한 제자들처럼 굳어 완고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바로 다음 주님께 호된 꾸중을 듣는, 주님 부활을 믿지 못하는 열한 제자들 그대로 우리의 모습일 수 있습니다.
‘마침내, 열한 제자가 식탁에 앉아 있을 때에 예수님께서 나타나셨다. 그리고 그들의 불신과 완고한 마음을 꾸짖으셨다.’
셋째, 파스카의 주님을, 복음을 선포하는 삶입니다.
비상한 복음 선포가 아니라 평범한 일상에서의 복음 선포의 삶입니다. 바로 제 삶의 자리에서 제정신으로 제몫을 다하며 제대로 살 때 복음 선포의 삶입니다. 날로 주님을 사랑하여 주님을 닮아갈 때 그 삶자체가 그대로 복음선포입니다. 바로 각자 제자리에서 만발한 파스카의 봄꽃들이 상징하는 바, 존재론적 복음 선포의 삶입니다.
순교는 성체와의 결합입니다. 주님 성체와의 일치로 나날이 겸손과 섬김의 사랑에, 순교적 삶에 항구할 때 저절로 복음 선포의 삶입니다. 오늘 베드로와 요한의 복음 선포 활약상이 눈부십니다. 살아 계신 주님과 하나되었기에 이런 분별의 지혜에 확신에 넘치는 고백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여러분의 말을 듣는 것이 하느님 앞에 옳은 일인지 여러분 스스로 판단해 보십시오. 우리로서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 일로 백성이 모두 하느님을 찬양했으니 그대로 두 사도의 성공적 복음 선포의 삶임을 증거합니다.
참 기쁨과 행복은 부활하신 파스카의 주님을, 복음을 선포하는 삶에 있습니다. 그러니 1.주님을 갈망하십시오, 2.주님을 만나십시오. 3.주님을 선포하십시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성공적 복음 선포의 삶을 살 수 있도록 도와 주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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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410. 부활 팔일 축제 토요일. 오 상선 바오로 신부님.
오늘 미사의 말씀에서는 제자들의 놀라운 변화가 목격됩니다.
"듣고도 믿지 않았다."(마르 16,11)
"그들의 말도 믿지 않았다."(마르 16,13)
마르코 복음사가는 스승 예수님의 부활 소식에 대한 제자들의 반응을 전혀 미화하지 않고 적나라하게 표현합니다. 학자는 앎으로 말하고 운동선수는 기록으로 말하며 신자는 믿음으로 말해야 할 터인데, 예수님의 최측근에게서 여과 없이 드러나는 불신과 완고함이 이처럼 폭로되어도 괜찮은 걸까요...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마르 16,15)
그런데 믿지 않는 제자들을 대하는 예수님의 태도는 더욱 놀랍습니다. 믿음을 확인받거나 맹세를 시켜도 시원찮을 마당에 거두절미하고 소명을 부여하시니까요. 제자들에 대한 예수님의 근거없는 자신감은 도대체 어디에서 오는 걸까요?!?
제1독서는 최고 의회에서 담대히 발언하는 베드로와 요한의 모습을 보여 줍니다.
"유다 지도자들과 원로들과 율법 학자들은 베드로와 요한의 담대함을 보고 또 이들이 무식하고 평범한 사람임을 알아차리고 놀라워하였다."(사도 4,13)
베드로는 확실히 변화되었습니다. 예수님이나 그 추종자들을 적대하던 이들이 놀랐다고 할 정도면 과장이 아니겠지요.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 승천을 겪은 제자들은 서서히 자신의 완고한 불신의 늪에서 빠져 나옵니다. 그리고 화룡정점이 될 결정적 사건인 오순절의 성령 강림을 체험하지요.(사도 2, 1-12 참조)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여러분의 말을 듣는 것이 하느님 앞에 옳은 일인지 여러분 스스로 판단하십시오. 우리로서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사도 4,19)
베드로의 말에는 한치의 두려움도 의혹도 없습니다. 자신이 믿는 바에 대해서라면 죽음도 불사할 굳은 신념과 확신이 가득하지요. 사랑하는 이를 위해 죽을 수 있는 가장 큰 사랑은 믿음에서 나옵니다.
제자들에 대한 예수님의 '근거 없는 자신감'은 오합지졸처럼 갈팡질팡 나약했던 그들 안에서도 하느님 자녀로서의 충만하고 온전한 완성의 상태를 관상하시는 데서 나온 것입니다. 그리고 그 기대와 신뢰는 사도행전이 증명하듯, 결국 제대로 맞아떨어졌습니다.
주님을 따르는 삶에서는 믿음이 참으로 중요합니다. 하느님이 사람이 되셔서 우리와 함께 사시다가,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또 되살아나셔서 지금도 우리 곁에 현존하시며 사랑을 쏟아 주신다는 이야기는 믿음 없이 받아들이기 어려운 내용이니 그렇습니다.
세속적 번영과 성공을 누릴 때는 믿을 만하다고 여기다가 시련과 고난이 닥치면 믿음을 거두고 돌아서길 반복하면서, 믿음과 불신 사이에 어정쩡하게 서성이고 있다면 아직 믿음에 이르지 못한 것이 아닌지 스스로를 살펴야 합니다. 믿음은 거래가 아니라 투신이기 때문입니다.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
결국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바라시는 대로 됩니다. 제자들의 놀라운 변화는 부족하고 나약한 이들을 지지해 주고 힘이 되어 주신 스승의 놀라운 믿음 덕분이 아닐까 합니다. 우리가 믿기 전에 그분이 먼저 우리를 믿으신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의 믿음은 결국 그분 믿음에 대한 응답이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벗님! 부활을 성대히 경축하고 기뻐하는 부활 팔일 축제가 이제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그만큼 더 소중히 즐기고 누리면 좋겠지요. 주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믿음을 아낌없이 내어드리고, 우리를 믿어 주시는 그분께 큰 감사와 사랑을 올리는 오늘 되시길 기원합니다. 우리 모두가 보고 듣고 체험한 것을 전하지 않을 수 없는 믿음의 사람으로 성큼 자라나길 희망하며, 여러분을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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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410. 부활 팔일 축제 토요일. 이병우 루카 신부님.
"예수님께서 그들의 불신과 완고한 마음을 꾸짖으셨다."(마르16,14)
'단순하고 겸손한 믿음!'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불신과 완고함을 꾸짖으십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한 이들이 전하는 말을 그들이 믿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어서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선교사명을 부여하십니다.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마르16,15)
'복음'은 '기쁜 소식'입니다.
그리고 기쁜 소식의 본질은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입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나아가 이 기쁜 소식을 선포하라고 하십니다.
그러기 위해서 내가 먼저 해야 할 중요한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내가 먼저 믿고, 내가 먼저 부활하는 것입니다. 나의 불신과 완고함을 버리고, 주님의 죽음과 부활을 굳게 믿고, 이 믿음의 힘으로 나도 십자가의 고통과 시련을 이겨내고 부활하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단순한 믿음과 단순한 회개입니다. 단순하게 믿고, 단순하게 복음이신 예수님께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어느 자매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신부님 감사합니다. 저는 도와줄 수도 없고, 아는 것도 없고 죄송합니다." 돌아가신 저희 어머님도 살아생전에 늘 같은 말씀을 하시곤 하셨습니다.
"저는 배운 것도 없고 아는 것도 없는 죄인입니다."
하느님 앞에서 내가 죄인이라는 이 고백은 큰 신앙고백이고, 아는 것도 많고 똑똑하고 잘남을 내세우는 사람들이 많아진 지금 이 시대에 우리에게 필요한 신앙고백이라고 생각합니다.
"유다 지도자들과 원로들과 율법 학자들은 베드로와 요한의 담대함을 보고 또 이들이 무식하고 평범한 사람임을 알아차리고 놀라워하였다."(사도4,13)
지금 여기에서의 구원과 부활에 가장 큰 장애물은
'너'가 아니라, 바로 '나 자신'이라고 생각합니다.
'나의 불신과 완고함', 시퍼렇게 살아있는 '나의 의지'라고 생각합니다.
단순하게 믿고,
겸손하게 믿읍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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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410. 부활 팔일 축제 토요일.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사도들은 주님께서 언제나 나와 함께 동행하시고,
내 안에 현존하신다는 강렬한 의식 속에 복음을 선포했습니다!
사도행전은 신약성경의 다섯번째 책으로 초대 교회 공동체의 생활상과 사도들의 행적에 대해서 소상히 파악할 수 있는 소중한 책입니다.
신약성경 가운데 유일한 역사서로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복음이 어떻게 만방에 전파되고 지속되는지를 잘 소개하고 있습니다.
사도행전의 저자는 바오로 사도의 협력자이자 제3복음서의 저자인 루카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베드로 사도와 요한 사도에 대한 루카복음사가의 기록이 참으로 흥미롭습니다.
“그 무렵 유다 지도자들과 원로들과 율법학자들은 베드로와 요한의 담대함을 보고 또 이들이 무식하고 평범한 사람임을 알아차리고 놀라워하였다.”(사도행전 4장 13절)
제가 사도행전을 기록했다면 사도들의 으뜸인 베드로, 예수님의 애제자였던 요한에 대해 최소한의 예우를 갖춰 기록했을 것입니다.
적어도 “무식하고 평범한 사람”이란 표현은 쓰지 않았을 것입니다.
대신 어떻게 하면 그들의 약점을 감추고 장점을 부각시키려고 애를 썼을 것입니다.
“이들은 비록 정식 율법학교 교육을 받지 못했지만, 지혜롭고 총명했다.
특히 전문직 어부로서 갈릴래아 호수 전체를 꿰뚫고 있었으며, 고기잡이에 관해서는 둘째가면 서러워할
노하우를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루카복음사가는 그 어떤 가감도 없이 솔직하게 두 사람의 출신배경을 소개합니다.
“무식하고 평범한 사람!”
따지고 보니 그렇습니다.
“무식하고 평범한 사람”이었던 베드로와 요한 사도는 예수님과의 만남을 통해 지혜와 경륜이 충만한 사람으로 거듭나게 되었습니다.
당대 둘째가면 서러워할 율법학자들의 토론에서도 밀리지 않을 정도로 탁월한 언변을 지니게 되었습니다.
사도들의 가르침은 진솔하고 강력했으며 설득력이 있었습니다.
난다긴다 하는 율법학자들도 사도들의 논리정연하고 탁월한 가르침 앞에 입을 다물수 밖에 없었습니다.
강의를 하거나 듣다보면 즉시 파악할 수 있습니다.
잘 준비되고 진지하게 숙고된 강의인지, 아니며 그저 현란한 말재간과 품위가 떨어지는 천박한 유머로 포장된 영양가가 조금도 없는 강의인지.
사도들의 가르침에는 우선 힘이 있었습니다. 솔직하면서도 담대했습니다.
애써 포장하거나 과장하지도 않았습니다. 적대자들의 시선을 의식해서 위축되거나 감추지도 않았습니다.
그 어떤 권력가들의 눈치도 보지 않고 하고 싶은 말을 있는 그대로 외쳤습니다.
이러한 배경에는 사도들이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말씀을 선포한 것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사도들은 예수님께서 언제나 나와 함께 동행하시고, 내 안에 현존하고, 나를 이끌고 계신다는 강렬한 현존 의식 속에 복음을 선포했습니다.
그러다보니 더 이상 두려움이 없었습니다. 적대자들의 협박과 위협에도 조금도 주눅들지 않았습니다.
칼이 목에 들어와도 전처럼 뒤로 숨거나 도망가지 않았습니다.
그 모든 변화의 배경에는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자리잡고 계셨습니다.
곰곰히 생각해보니 저 역시 무식하고 평범한 사람이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주님을 제 안에 굳건히 모시고, 언제 어디서나 주님의 뜻을 먼저 찾으며, 주님의 이름으로 말씀을 선포할 때, 저 역시 강건해지고, 지혜로 충만해지며, 그 어떤 두려움 앞에서도 물러서지 않고 용감히 복음을 선포할 수 있게 됩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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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410. 전삼용 요셉 신부님. [부활 팔일 축제 토요일]
신앙체험 나눔은 교만이 아닙니다
오늘 복음은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당신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복음을 선포하라고 사명을 주시는 내용입니다.
그 이전에 마리아 막달레나가 예수님을 만난 이야기를 하였지만 믿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도 자신들이 만난 예수님에 관해 이야기하였지만, 제자들은 믿지 않았습니다.
결국, 예수님께서 나타나셔서 “그들의 불신과 완고한 마음을 꾸짖으셨습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어차피 교회를 통해 복음이 전해져야 하기에 예수님께서 어쩔 수 없이 나타나신 것으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왜 예수님께서 직접 나타나셔서 그렇게 당신 자신을 보여주면 되지 굳이 다른 증인들을 보내셔서 증언하게 하셨을까요?
본래 교회 공동체가 당신을 굳이 눈으로 보지 않더라도 여러 증언을 통해 형성된 믿음으로도 복음을 전할 근거가 충분하기를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가톨릭교회의 약점 중의 하나가 신앙체험을 나누기를 장려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가톨릭교회는 나의 신앙체험을 말하는 것이 교만처럼 여겨지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여러 대중매체를 통해 개신교 신앙체험 간증은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지만, 가톨릭 신앙 간증은 거의 찾아볼 수 없는 형편입니다.
신앙 간증이 많지 않아서 신앙체험이 많지 않은 것인지, 신앙체험이 많지 않아서 간증이 많지 않은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아무튼, 오늘 복음에 따르면 분명히 각자가 그리스도를 만난 체험이 교회 내에서 공유되기가 장려되어야 함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간증의 힘은 잘난 척하는 데 있는 게 아니라 “당신도 나와 다를 바가 없어요. 내가 했다면 당신도 할 수 있습니다.” 라고 말하는 데 있습니다.
“그도 하고, 그녀도 하는데, 나는 왜 못해?”라는 영어로 된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이것이 공동체 내에서 신앙체험 나눔이 장려되어야 하는 이유입니다.
미국에서 한 거지가 동냥하며 앉아있었습니다. 동냥을 받고 연필 한 자루를 주고 있었던 것입니다.
한 사업가가 다른 사람들처럼 1달러를 주고 남들처럼 연필을 가져가지 않고 그냥 지나쳐갔습니다.
그러다 다시 돌아옵니다. 그러며 이렇게 말합니다.
“1달러를 냈으니 연필을 가져가야죠. 왜 가져가라 하지 않죠?”
거지는 기분이 별로 좋지 않은 듯 여러 개의 연필을 들어 보였습니다.
사업가는 그중 제일 좋은 것으로 보이는 것을 골랐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자 이제 당신은 거지가 아닙니다.
당신은 사업가입니다.” 거지는 처음 들어보는 말이었습니다.
‘내가 거지가 아니고 사업가라고?’ 이 말이 머리에서 가시지 않았고 불과 몇 년 만에 사업가가 되어 많은 돈을 벌게 되었습니다.
그 사람은 “그 사업가가 나를 사업가로 불러주었기에 내가 사업가가 될 수 있었습니다.”라고 말합니다.
[출처: ‘한 사람의 인생을 바꾼 말 한마디’, 유튜브 채널, ‘최불꽃TV’]
간증은 바로 이러한 힘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보고는 베드로만 물 위를 걸을 용기를 낼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베드로를 보면 많은 이가 물 위를 걸을 용기를 낼 수 있습니다.
같은 공동체의 일원이 할 수 있다면 더 힘을 얻을 수 있기에 신앙체험 나눔이 필요한 것입니다.
“인간은 1마일을 4분 안에 뛸 수 없고, 설령 성공하더라도 심장이 터질 것이다.”
이것은 당시 육상에서 통용되는 말이었고 누구도 1마일을 4분 안에 주파한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1954년 5월, 의사 지망생으로 수련의 과정을 밟던 로저 배니스터가 1마일을 3분 59초4 만에 주파했습니다.
배니스터 경이 3분대 기록을 쓴 날 이후 1년 동안에는 37명이 기록을 세웠고 2년 동안에는 300여 명의 선수가 4분 벽을 돌파했습니다.
이런 현상을 스포츠 학자들은 “배니스터 효과”라고 이름 붙였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분명 예수님은 당신을 만난 이들이 교회 안에서 증언하라고 시켰고 그것을 믿지 않으려는 제자들을 나무라셨습니다.
교회 공동체는 신앙체험 소통의 장이어야 하고 그래서 “저 사람이 했다면, 나는 왜 안돼?”라는 생각으로 서로 자극을 주어야 하며, 또한 이런 체험들이 복음을 전하는 내용이 되어야 합니다.
2002년 한일월드컵 감독 거스 히딩크는 축구 선수들 간에도 선후배 문화로 소통이 되지 않음을 인식하고
선후배 간에 분리해서 앉던 습관을 바꿔 자신이 식사를 마칠 때까지 끊임없이 대화하게 시켰습니다.
그래서인지 당시 4강까지 갈 수 있었고, 이것을 이어받은 홍명보 감독도 2012년 런던올림픽에서 같은 방법으로 동메달을 따게 했습니다.
소통이 안 되는 팀은 망할 수밖에 없지만, 각자의 의견을 주고받는 팀은 시너지 효과를 낼 수밖에 없습니다.
신앙체험 나눔은 교만이 아닙니다.
복음이 온 세상에 전해지기 위해 교회 공동체가 그런 체험들을 모으는 그릇이 되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소공동체 모임에서 그러한 체험들을 나누는 데 주저해서는 안 됩니다.
저의 유튜브 채널 ‘함께 고민해요’가 생각보다 반응이 좋습니다.
많은 신앙인이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신앙생활을 하는가?’에 대해 궁금해하고 있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이 체험 나눔을 통해 신앙도 커지고 자극도 받습니다.
우리 소공동체에서 비록 큰 체험이 아닐지라도 일상에서 만난 예수님 이야기를 많이 해야 합니다.
이것이 각자 세상에 나가 뿌릴 복음의 씨앗을 나누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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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410. 부활 팔일 축제 토요일 복음묵상. 강만연 베드로 형제님.
오늘 복음을 이해하는 데 파란 글씨 내용은 참고가 될 자료가 될 수 있는 내용입니다. 그냥 스킵하셔도 됩니다. 이 내용을 조금 생각하면 오늘 복음묵상이 풍성할 수 있을 것 같아서 제시했습니다. 관심 있으시면 보셔도 됩니다.
알리바이라는 말은 범죄와 관련하여 수사기관에서 자주 언급되는 말입니다. 알리바이라는 개념은 쉬운 듯하지만, 조금 잘 개념이 외래어로 되다 보니 잘 와 닿지 않을 경우도 있습니다. 한마디로 ‘현장부재증명’이란 말로 바꾸어 생각해보면 쉽습니다. 범인으로 지목되면 범인은 일단 범죄현장과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만약 범죄를 저질렀다고 의심이 되는 용의선상에 올려진 요주의 인물이라면 자기가 알리바이를 증명한다면 의심을 받지 않기 때문에 알리바이를 증명하는 것은 범죄자나 수사기관이나 양 당사자에게는 중요한 요소입니다.
존재를 증명하거나 수사기관에서 증인으로 나와 증언을 할 때 법관이 판단했을 때 모든 것을 증거로 인정하지는 않습니다. 증거로써 능력이 있을 때 증거능력이 있다고 판단되면 채택이 됩니다. 증거능력이 있다고 해도 그 인정 범위를 무조건 인정할 수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현행 형사소송에서도 증인의 증언이 얼마나 신빙성이 있는지 여부를 가지고 상대방이 상대방 주장에 대해 그 증거를 물리칠 수 있는 탄핵증거를 제시하면 그 강도에 따라 상대방 증언에 대해 효력을 감쇄시킬 수가 있습니다. 이런 방식으로 해서 소송이 진행됩니다. 현행 우리나라의 형사소송에서는 ‘전문증거’이라는 게 있습니다. 이건 실제 증인이 직접 경험한 걸 증언하는 게 아니라 들은 내용을 바탕으로 해서 증언을 하는 것입니다. 이건 엄격하게 증거로서 제한을 합니다. 법에 인정 여부가 정해져 있습니다.
오늘 복음의 초점을 예수님의 부활을 믿느냐 안 믿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구약의 예언대로 실제 부활을 하셨습니다. 문제는 예수님께서 생전에 그토록 당신의 부활을 여러 차례 예언도 하셨지만 그 예언이 제자들의 귀에는 그 말씀이 귓등으로 흘려들었는지 아니면 들었어도 무슨 내용인지 잘 이해를 하지 못했던 상황입니다. 사실 지금 시점에서 제자들을 바라보면서 참으로 믿음이 없었다고 단정을 지을 수만은 없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지금으로부터 2000년 전 그 당시 사람들의 수준이 오늘날 사람들 의식 수준과 비교한다면 아무리 예수님의 제자들이라고 하더라도 지적인 수준이 아주 낮을 수준일 겁니다.
사람이 한 번 죽으면 다시 살아난다는 것은 아니 2000년 전이 아니라 지금 현대 문명에서도 이게 쉽게 용인될 수 있는 문제는 아닙니다. 지금 시점에서 우리도 신앙을 가지고 있고 믿음의 눈으로 보니 예수님의 부활을 인정하는 거지 신앙을 가지고 있지 않은 외인들에게는 그저 우리가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 것도 하나의 미신 아닌 미신처럼 인정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이건 신앙의 눈으로 보지 않으면 믿을 수 없는 사실이라고 전제를 하고 일단 들어가야 할 거라고 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 것도 실제 우리의 이성으로 믿는 것이라기보다는 믿음과 신앙의 눈으로 믿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당신의 모습을 믿지 않는 제자들을 향해서 꾸짖으십니다. 그들의 마음속에 완고함과 불신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 11절을 보면 ‘나타나셨다는 말을 듣고도 믿지 않았다’라고 우리말 성경은 이렇게 번역을 해놓았습니다. 영어성경을 참조해보면 의미는 비슷한데 조금 뉘앙스에 차이가 있습니다. 나타나셨다는 의미보다는 마리아 말달레나가 목격을 했다는 표현을 사용했습니다. 좀 더 표현을 하면 살아계신 걸 자기 눈으로 봤다는 것을 증언한 셈입니다. 이건 직접적으로 확인한 증거입니다. 그 정도까지 신로도도 높은 사실을 언급했지만 실제로는 잘 믿기지 않았던 것입니다. 만약 한 사람의 증언만을 가지고 했다면 이해를 할 수도 있지만 막달레나의 증언과 또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도 예수님을 만나 뵙고 나서 예루살렘으로 가 그들에게 알려줬기 때문에 그럼 좀 더 의문만 가질 게 아니라 이 정도 선이면 예수님께서 죽으신 후에 3일 만에 다시 부활하시리라고 하신 말씀이 이젠 머리에 떠올라야 하는데 그러지를 못했습니다.
결국 불신과 완고함은 육적인 눈으로 예수님을 보고 따랐기 때문에 생긴 거라고 볼 수 있습니다. 믿음의 눈으로 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믿음도 그들은 우리보다는 더 잘 믿을 수 있어야 했습니다. 그들은 실제 예수님께서 하신 기적을 여러 차례 봤음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기적도 기적이지만 그들이 예수님을 제대로 알아보지 못한 가장 중요한 귀책사유는 성경의 예언에 대해 도외시했다는 사실일 겁니다. 만약 그들이 성경 말씀에 대해 좀 더 잘 연구하고 했더라면 충분히 그동안 기적과 또 평소 예수님께서 회당에서 하신 말씀의 권위 이런 모든 일련의 일들을 종합적으로 보고 판단했다면 충분히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소식을 들었을 땐 늦은 감이 없지 않아 있지만 그래도 그때라도 예수님의 부활을 믿어야 했는데 그렇지 못했습니다.
결론입니다. 그들은 예수님과 같이 생활도 하고 또 지근거리에서 뵙고 또 말씀도 생생하게 육성으로 듣고 또 부활하신 모습까지도 뵙고 했다는 걸 감안하면, 우리의 믿음과 비교하면 우리는 전혀 그런 것과는 동떨어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을 받아들이고 있기 때문에 그들의 믿음은 토마스처럼 봐야만 믿을 수 있는 수준에 머물러 있었다면, 물론 나중에 성령을 받은 후에는 탁월한 믿음의 눈을 가졌습니다만 우린 실제 예수님을 그들처럼 뵙지 않고도 단 하나 믿음으로 예수님을 믿고 가는 길이기 때문에 그들의 믿음과는 비교할 수 없는 믿음이라고 생각해도 무방하지 않을까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미 2000년 전에 그들을 경험하셨기 때문에 저희의 지금 이 순간 조금 부족한 부분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들에 비하면 월등한 믿음이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물론 추측입니다만.... 그렇다고 자만하고 교만하기 위해 이런 생각을 하는 게 아니라 부족하지만 이렇게 생각한다면 힘과 용기를 낼 수가 있지 않을까 해서 그런 생각도 해봅니다. 힘과 용기를 얻기 위한 수단으로 그렇게 생각한다면 예수님께서도 분명히 긍정적으로 생각하시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결국 믿음의 눈, 신앙의 눈도 하느님의 은총도 은총이지만, 자기가 부단한 노력을 해야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의 가려졌던 눈이 열리듯이 믿음의 눈이 열려 하느님에 대한 믿음이 굳건한 믿음으로 변할 거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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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410. 부활 팔일 축제 토요일. 김 로마노 형제님.
부활 팔일 축제 내 토요일 제1독서 (사도4,13-21)
그리하여 그들은 사도들을 불러 예수님의 이름으로는 절대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고 지시하였다. 그러자 베드로와 요한이 그들에게 대답하였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여러분의 말을 듣는 것이 하느님 앞에 옳은 일인지 여러분 스스로 판단하십시오. 우리로서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18~20)
산헤드린 최고 의회의 의원들이 정작 두려워했던 것은 베드로가 행한 앉은뱅이를 걷게 한 기적이 아니었고, 기적을 일으키게 한 예수님의 이름이었다(사도3,6). 이로써 그들 스스로 기적의 근원이 예수님임을 인정하는 셈이 된 것이다(마르14,1참조).
수석 사제들의 무리들이 관심을 갖는 것은 사도들이 누리고 있는 교도권이었다. 예수님의 이름이 갖는 권세에 대해서는 그들 스스로도 인정하였다.
'그러나 병이 나은 사람이 사도들 곁에 서 있는 것을 보고는 아무 반박도 하지 못하였다.' (14)
그러면서도 이에 대해 함구령을 내려 예수님을 죽인 자신들의 죄를 덮어 두는 한편, 더 이상 예수님의 복음이 확산되는 것을 막으려 했던 것이다.
수석 사제들의 무리들이 날마다 하느님의 제사를 드리던 자들이었음을 생각할 때 하느님의 뜻에서 빗나간 그들의 가증됨이 얼마나 큰지를 알 수 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여러분의 말을 듣는 것이 하느님 앞에 옳은 일인지 여러분 스스로 판단하십시오.' (19)
하느님의 백성을 대표하는 산헤드린 최고 의회의 의원들은 살아계신 하느님을 두려워 하지 않고, 구약 성경이 이미 예언한 메시아가 왔음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의 종교적 기득권을 지키고 군중들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루카23,18) 예수를 못박아 죽였다(루카24,12).
또한 부활하신 예수님을 전하는 그의 제자들에게마저도 생명의 위협을 가하며 복음이 전해지는 것을 막았다.
이러한 위협 앞에서 사도들은 '하느님의 말씀'과 '인간의 말'을 대조시킴으로써 인간인 산헤드린 최고 의원들의 말 듣기를 거부하고, 예수님께서 복음의 증인이 되라고 하신 말씀에(사도1,8) 따를 것을 정정당당하게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산헤드린 최고 의회의 권위를 정면으로 맞서는 것으로서 자신들의 목숨이 위험해질 수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신념을 굽히지 않는 것이었다.
이러한 신념이 있었기에, 그리고 인간보다는 하느님을 두려워하는 신앙이 있었기에 초대교회는 그들을 통해 날로 확장될 수 있었다.
'우리로서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20)
베드로는 긍정문을 사용해서 '말할 것이다' 라고 표현했을 수도 있었지만, 이렇게 '뒤나메타'<'dinametha'; '~할 수 있다'(can)>란 동사와 더불어 이중 부정문('우~메'; u~me)을 쓴 것은 '전하지 않을 수 없다' 라는 그들의 결연한 의지를 분명히 하기 위함이었다.
이스라엘의 최고 법정의 판결과 지시에 대해 불복종할 경우에 최고 사형에 이를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보여 준 이러한 적극적이고 담대한 태도를 통해 이미 복음을 위해 생명까지도 아낌없이 바치는 그들의 용기와 헌신을 발견할 수 있다.
사도들이 이렇게 목숨을 내건 이유는 바로 그들이 직접 '보고 들은 것'이 있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것'에 해당하는 '하'(ha)는 복합 관계 대명사의 의미를 나타내는 '호스' (hos)의 복수형으로서 사도들이 예수님께로부터 '보고 들은 모든 것'을 나타낸다.
그들이 보고 들은 모든 것은 예수님의 지상에서의 말씀과 행적이었다. 그들은 예수님과 함께 3년 동안 동고동락하면서 그분의 말씀과 행적, 죽음과 부활을 실제로 지켜 보았고, 그분이 가르치신 말씀과 승천하기 전에 주신 복음 선포에 대한 지상 명령을 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우리는 오늘의 독서 말씀을 묵상하면서 우리 자신이 하느님의 일을 한다고 하면서도, 정작 예수님의 이름을 높이지 않고 자신의 이름을 알리지는 않는지?
예수님의 이름을 감추고 종교적 이익이나 교회의 권위를 확장하는데에 급급하거나 혈안이 되어 있지는 않은지? 반성해야 한다.
그리고 복음 자체이신 그리스도 예수님과 '보고 들은 것'을 위해 사도들처럼, 우리 믿음의 순교자들처럼 목숨을 바칠 각오가 되어 있는지도 스스로 물어 보아야 한다.
이것은 부활하신 주님께 대한 체험과 절대적 사랑과 믿음, 내세의 영원한 생명과 복락에 대한 희망없이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부활 팔일 축제 토요일
우리로서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독서(사도4,10-22)
하느님의 대속, 그 죽음, 그 사랑을 버리고 인간의 희생, 그 사랑을 구원의 가치로 여기는 신앙을 사는 것은 아닌지,~ 인간 중심의 삶은 시기와 질투를 일으키지만 하느님 중심의 삶은 그 모든 것에서 자유하게 됩니다.
4,10 불구자였던 저 사람이 성한 몸으로 여러분 앞에 서게 된 것은 바로 나자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힘입어 된 것입니다. 그분은 여러분이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지만 하느님께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분입니다. 여러분과 이스라엘의 모든 이것을 아셔야 합니다. 11 이 예수는 집짓는 사람들 곧 여러분에게 버림을 받았지만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신 분입니다. 12 이분을 힘입지 않고는 아무도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사람에게 주신 이름 가운데 우리를 구원할 수 있는 이름은 이 이름밖에는 없습니다.'
= 흠도 티도 없는 깨끗함만이 모든 더러움을 씻을 수 있습니다. 곧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 그 대속의 피입니다.
(요한14,6) 예수께서는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거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
= 사람의 도리인 계명이 구원의 진리가 될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티도1ㅡ14참조)
유다 지도자들과 원로들과 율법학자들~
13 그들은 베드로와 요한이 본래 배운 것이 없는 천한 사람인 줄 알았는데 이렇게 자신있게 말하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그리고 그 두 사도가 예수를 따라 다니던 사람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 하느님께서는 지혜롭고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당신의 뜻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십니다.(마태11,25)
아무리 신학자라도 말씀을 사람의 지혜로 깨닫고 말한다면 헛것이 됩니다.
(1코린3,19-20) 19 이 세상의 지혜는 하느님이 보시기에는 어리석은 것입니다. 성서에 '하느님께서는 지혜롭다는 자들을 제 꾀에 빠지게 하신다' 고 기록되어 있고 20 또 '주님께서는 지혜롭다는 자들의 생각이 헛되다는 것을 아신다' 고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 인간은 그 허황된 것에 더 감동한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래서 분별이 필요한 것입니다.
(루가9,45) 그러나 제자들은 그 말씀을 알아듣지 못하였다. 그 뜻이 감추어져 있어서 이해하지 못하였던 것이다. 그들은 그 말씀에 관하여 묻는 것도 두려워하였다.
= 하느님의 뜻으로 깨닫느냐 사람의 뜻으로 깨닫느냐~의 분별입니다, 하느님의 뜻이 사람에게 이루어지는 것, 그것이 그리스도교 신앙입니다,(마태6,10참조)
14 그러나 병이 나은 사람이 사도들 곁에 서 있는 것을 보고는 아무 반박도 하지 못하였다. 15 그래서 그들은 사도들에게 최고 의회에서 나가라고 명령한 다음, 저희끼리 의논하며 말하였다. “저 사람들을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16 저들을 통하여 명백한 표징이 일어났다는 사실이 예루살렘의 모든 주민에게 알려진 터이고, 우리도 그것을 부인할 수가 없습니다. 17 그러니 이 일이 더 이상 백성 가운데로 퍼져 나가지 않도록, 다시는 아무에게도 그 이름으로 말하지 말라고 엄중히 경고만 합시다.” 18 그리하여 그들은 사도들을 불러 예수님의 이름으로는 절대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고 지시하였다.
= 지도자, 학자의 권위로 예수님의 대속, 그 의로움을 구원의 진리로 가르치지 말라고 지시함입니다.
이들이 가르쳤던~ 인간의 지혜에서 나온 자신들의 열심, 그 의로움을 지키기 위해서입니다.
19 그러자 베드로와 요한이 그들에게 대답하였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여러분의 말을 듣는 것이 하느님 앞에 옳은 일인지 여러분 스스로 판단하십시오.
= 우리는 오늘 말씀으로 하느님의 뜻(지혜, 법)으로 깨닫는 것보다 사람의 뜻으로 깨닫는 것이 옳은지 판단해 봐야 합니다. 하느님의 지혜의 법은 대속의 죽음, 그 십자가의 의로움을 통한용서, 구원이지만, 사람의 지혜의 법은 말씀을 문자대로 보아 사람의 의로움을 위한 도덕과 윤리의 계명이 되어 선악의 판단으로 사람을 죽입니다.
(2코린3,6) 우리로 하여금 당신의 새로운 계약을 이행하게 하셨을 따름입니다. 이 계약은 문자로 된 것이 아니고 성령으로 된 것입니다. 문자는 사람을 죽이고 성령은 사람을 살립니다.
20 우리로서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21 그들은 백성 때문에 그들을 처벌할 방도를 찾지 못하고 거듭 위협만 하고 풀어 주었다. 그 일로 백성이 모두 하느님을 찬양하고 있었던 것이다.
= 사람의 권위의 위협일 뿐입니다.
22 이 기적으로 몸이 성해진 사람은 마흔 살이 넘은 사람이었다.
= 마흔살~ 광야40년의 잘못을 치유하십니다. 우리의 한 생애의 잘못을 용서하심입니다.
그런데 ‘십자가로 치유, 용서 받았다’~의 초점을 두면 안 됩니다. 우리의 죄를 대속하신 십자가의 죽음, 그 사랑에 초점을 두어야 합니다. 그 사랑은 인간의 지혜로는 깨달을 수 없기에 성령께 의탁하며 그 사랑을 깨닫기 위한 삶의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다.
(에페3,18-21) 18 모든 성도들과 함께 하느님의 신비가(하느님의 사랑이) 얼마나 넓고 길고 높고 깊은지를 깨달아 알고 19 인간의 모든 지식을 초월한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이렇게 해서 여러분이 완성되고 하느님의 계획이 완전히 이루어지기를 빕니다. 20 하느님께서는 우리 안에서 힘차게 활동하시면서 우리가 바라거나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풍성하게 베풀어 주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21 하느님께서 교회와 그리스도 예수를 통하여 세세 무궁토록 영광을 받으시기를 빕니다. 아멘.
= 우리의 창조 목적인 하느님께 감사의 영광을 드리기 위해~ 십자가의 사랑을 배우고 깨닫고 받는 곳이 교회입니다.
그래서 이웃에게 그 사랑을 전해주어 그 이웃이 십자가의 사랑으로 용서 받았음에 감사하며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도록 하는 것, 큰 계명을 실천하는 신앙생활입니다.
인간의 사랑을 주는 것은 인간의 도리이지 신앙이 아닙니다. 인간의 도리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이신 분의 대속의 죽음, 인간의 지각으로 알 수 없는 그 사랑으로 받는 구원입니다.
(에페1,6) 사랑하시는 아드님을 통하여 우리에게 거저 주신 이 영광스러운 은총(은혜)에 대하여 우리는 하느님을 찬양할 수밖에 없습니다. 아멘 아멘 아멘~!!!
부활 팔일 축제 내 토요일 복음(마르16,9-15)
"마침내, 열한 제자가 식탁에 앉아 있을 때에 예수님께서 나타나셨다. 그리고 그들의 불신과 완고한 마음을 꾸짖으셨다. 되살아난 당신을 본 이들의 말을 그들이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14)
'마침내'에 해당하는 '휘스테론'(hysteron; afterward; later)이 언제를 가리키는지는 확실치 않다.
마르코 복음 16장 14절의 내용은 루카 복음 24장 36-43절, 요한 복음 20장 19-25절, 26-31절 등과 병행 구절인 것으로 여겨진다.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신 당일에 토마가 없을 때 제자들에게 한 번 나타나셨고, 그후 한 주간이 지나 토마가 있을 때 또 한번 나타나신 것을 마르코 복음사가는 통합하여 기록했다고 본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부활을 목격한 제자들에게 제시한 증거들을 제자들이 믿지 못하였기 때문에 꾸짖으신다.
새 성경은 제자들이 믿지 못한 이유를 불신과 완고한 마음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불신'으로 번역된 '아피스티안'(apistian; unbelief; lack of faith)의 원형 '아피스티아'(apistia)는 '믿음이 형성되지 않음'(마르9,24)에 대해서도 사용되었지만, 주로 믿음을 적극적으로 거부하거나 배척하는 일에 사용되는 강렬한 용어이다(마르6,6; 마태13,58; 로마11,20; 1티모1,13; 히브3,19).
그리고 '완고한 마음'으로 번역된 '스클레로카르디안'(sklerokardian; hardness of heart; stubborn refusal)의 원형 '스클레로카르디아'(sklerokardia)는 확실한 증거를 거절하는 굳은 마음을 뜻한다.
이것을 보았을 때에, 당시 부활 소식을 접한 제자들의 마음 상태가 불신앙에 얼마나 단단히 고착되어 있었는가를 알 수 있으며, 또한 제자들의 마음이 다른 것을 받아들일 수 없도록 이미 단단하게 굳어져 있었음을 잘 보여 준다.
여기에 언급된 희랍어 단어들은 지금까지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꾸짖을실 때 한 번도 사용한 적이 없는 매우 강한 뜻을 지닌 단어이다.
따라서 이것은 예수님의 수많은 가르침과 애정에 비해 너무나도 형편없이 반응한 제자들의 모습을 반영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아무리 예수님께 대한 지식이 있고, 겉으로는 제자 직분의 외양을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가장 근본적인 믿음이 없다면 그것은 예수님을 기쁘게 할 수 없는 것이다(히브11,8).
여기서 마르코 복음사가는 믿음을 다시 한번 강조하면서, 동시에 제자들의 완고하기만 한 불신앙을 뛰어넘는 예수님의 포기하지 않으시는 끝없는 사랑도 드러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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