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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의 타임캡슐은, 1939년 뉴욕 만국박람회에서 웨스팅하우스전기회사가 출품한 것으로, 길이 2.3m, 굵기 15㎝의 어뢰형 모양의 통으로 생겼습니다. 이것을, 박람회장인 “플러싱메도우” 공원의 지하 150m에 매설했습니다. 통은 강철과 크롬과 은을 섞은 특수합금 “큐펄로이”로 만들어 잘 부식되지 않게 했고, 내부는 열에 강한 규산유리로 둘러싸서 질소를 넣었으며, 내용물은, 각종일용품과 금속,화학섬유,공업재료,곡물,서적,백과사전,사전,회화,신문 등의 마이크로 필름과 뉴스 및 영화 등을 넣어서, 6939년에 개봉될 예정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중앙일보사에서 1985년에 제작한 “85타임캡슐”이 남산 정상의 지하에 매설되었고, 2485년에 개봉될 예정입니다. 이러한 타임캡슐은, “후세에 남길 자료를 넣어 지하 등에 묻어 두기 위한 용기”입니다. 이것은 마치, 피라미드나 왕의 분묘가 수천년 전의 문화를 오늘날 우리에게 전해주는 것과 같습니다. 타임캡슐은, 당시대의 문명과 생활상을 미래의 후손에게 전하려는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만든 것으로, 후손을 위한 역사적 사료가 됩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역사적 사실을 밝혀주는 타임캡슐 앞에서 겸허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러한 타임캡슐을 보면서,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설 때, 우리 삶의 모든 것이 타임캡슐 안에 든 내용물처럼, 하나님 앞에서 낱낱이 드러날 수밖에 없음을 생각게 됩니다. 본문에 나오는 만나를 담은 항아리 역시, 타임캡슐과 같습니다. 이스라엘은 광야에서 40년 동안 만나를 먹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광야에서 조상들에게 주신 만나가 어떤 것인지 또, 만나의 실제성을 후손들에게 증명하기 위함으로, 만나를 담은 항아리를 증거판 앞에 두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만나를 보관케 하신 것은, 이스라엘이 대대로 하나님께서 그들을 위해 베푸신 은혜를 잊지 않고 기념함으로, 하나님을 경외케 하기 위함이었던 겁니다.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가지고 나왔던 음식을 모두 먹고 더 이상 먹을 양식을 없을 때, 하나님께선 이스라엘에게 만나를 주셨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광야 40년 동안 만나를 먹었습니다. 이렇듯, 성도된 우리의 삶 속에도, 광야에서의 만나와 같이,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가 가득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본문 31 - 32절을 보시면, “이스라엘 족속이 그 이름을 만나라 하였으며 깟씨 같이 희고 맛은 꿀 섞은 과자 같았더라. 모세가 이르되 여호와께서 이같이 명령하시기를 이것을 오멜에 채워서 너희의 대대 후손을 위하여 간수하라 이는 내가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낼 때에 광야에서 너희에게 먹인 양식을 그들에게 보이기 위함이니라 하셨다 하고”라고 합니다. 만나는, 우리의 삶을 통해 살아계신 하나님의 경이로운 역사를 보여줍니다.
본문 31절을 보시면, 이스라엘이 광야를 지날 때,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주신 양식을 “만나”라고 했습니다. 본문 앞의 15절을 보시면, “이스라엘 자손이 보고 그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여 서로 이르되 이것이 무엇이냐 하니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되 이는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어 먹게 하신 양식이라”고 합니다. 이처럼 만나는, 이스라엘에게 매우 놀랍고 신비스러운 양식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은 이러한 만나를, 날마다 먹었습니다. 참으로, 광야에서의 이스라엘은 경이로운 삶을 살았습니다. 아침이면 일어나 하나님께서 내려 주신 하늘의 양식을 거두었고, 또 낮이면 구름 기둥, 밤이면 불기둥의 보호와 인도를 받으며 살아가는 놀라운 삶을 살았습니다. 이스라엘이 이처럼 경이로운 삶을 살아간 것은, 오직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하셨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성도된 우리도 우리의 삶 가운데, 하나님의 은혜가 본문의 만나와 같이 풍성하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옛말에 “잘 되면 내 탓이고, 안 되면 조상 탓이다”는 말이 있듯, “잘 되면 내 탓이고, 안 되면 하나님 탓이다”며, 오직 자신의 노력에 의해서만 모든 일이 형통하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만나를 먹은 것만이 하나님의 경이로운 은혜가 아니라, 그들이 광야에서 40년을 보냈다는 자체가 하나님의 경이로운 은혜이듯, 우리가 노력할 수 있도록, 우리의 건강, 우리의 모든 환경이 조성되는 것 역시, 또, 노력에 대한 우리의 결단까지도 하나님께서 주관하신다는 것을 생각할 때, 우리의 삶 자체가 하나님의 경이로운 은혜로 가득한 것입니다. 본문의 “만나”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함께 하시며, 이스라엘을 항상 지켜보시고, 돌보신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러기에, 광야에서의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떠나 살 수 없듯, 성도된 우리 역시, 하나님을 떠나서 살 수 없습니다. 본문 32절을 보시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만나를 보관하라고 하시며, “너희의 대대 후손을 위하여 간수하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인도한 뒤, 광야에 방치하지 않고, 계속해서 그들과 함께 하셨습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동행과 돌보심은, 광야 1세대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대대로 그들의 후손과 함께 하시기에, 하나님께서 그들의 조상들에게 베푸신 은혜의 증거로 두셨으며, 또, 후손들이 그들의 조상들에게 행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부인하지 못하도록 하신 겁니다. 여러분, 지금까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은혜들을 되돌아보세요. 그 은혜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 은혜들이 은혜로 여겨지지 않는다면, 그것은, 아직도 우리의 욕심이 하나님을 앞서기 때문입니다. 욕심을 앞세우고, 내 자신을 앞세운다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경이로운 은혜를 볼 수 없습니다. 우리의 삶 가운데, 하나님의 경이로운 은혜가 더욱 풍성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본문 33 - 34절을 보시면, “또 모세가 아론에게 이르되 항아리를 가져다가 그 속에 만나 한 오멜을 담아 여호와 앞에 두어 너희 대대로 간수하라. 아론이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대로 그것을 증거판 앞에 두어 간수하게 하였고”라고 합니다. 만나는, 하나님께서 성도들에게 주신 은혜의 증거입니다.
만나는 항상 증거 판 앞에 두어 간수하게 했습니다. 증거 판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출 31: 18을 보시면, “여호와께서 시내 산 위에서 모세에게 이르시기를 마치신 때에 증거판 둘을 모세에게 주시니 이는 돌판이요 하나님이 친히 쓰신 것이더라”고 합니다. 본문의 “증거 판”은 “율법”을 의미하며, “만나”는 “복음”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증거 판과 만나는 성도된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는 방법입니다. 하지만, 율법은 그 중 하나만 거역해도,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 되지만, 만나가 의미하는 복음은,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주시는 은혜이기에, 우리가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회개를 할 때, 또, 나사렛 예수가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대속하셨음을, 입으로 시인하고, 마음으로 믿을 때, 우리의 모든 죄가 사함받음으로,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의인이라는 칭호를 받게 됩니다. 그러므로, 율법으로는 모두가 죄인으로 죽을 수 밖에 없지만, 복음으로 다시 살아나도록 율법 앞에 복음이 있는 겁니다. 여러분, 율법은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구원받은 모든 성도들이 반드시 지켜야 할 덕목입니다. 율법의 요구는 죽음이지만, 복음으로 구원받은 성도들은 율법을 준수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율법과 복음은 분리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광야의 이스라엘에게 만나를 먹이신 것은 그들을 살리기 위함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광야로 인도하여, 40년을 지내게 하신 것에는, 세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는, 출 13: 17입니다. 보시면, “바로가 백성을 보낸 후에 블레셋 사람의 땅의 길은 가까울지라도 하나님이 그들을 그 길로 인도하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이 백성이 전쟁을 하게 되면 마음을 돌이켜 애굽으로 돌아갈까 하셨음이라”고 합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목전의 두려움으로 인해, 과거로 돌이킬 것을 방지하기 위해, 이스라엘을 광야로 인도하신 겁니다. 둘째는, 신 8: 2입니다. 보시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 년 동안에 네게 광야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지키지 않는지 알려 하심이라”고 합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순종하는지 여부를 확인코자 하신 겁니다. 셋째는, 민 14: 33 - 34입니다. 보시면, “너희의 자녀들은 너희 반역한 죄를 지고 너희의 시체가 광야에서 소멸되기까지 사십 년을 광야에서 방황하는 자가 되리라. 너희는 그 땅을 정탐한 날 수인 사십 일의 하루를 일 년으로 쳐서 그 사십 년간 너희의 죄악을 담당할지니 너희는 그제서야 내가 싫어하면 어떻게 되는지를 알리라 하셨다 하라”고 합니다. 모세 당시, 이스라엘의 12지파에서 대표 1인을 각각 선택하여, 가나안 땅을 정탐했을 때, 12명의 대표인 가운데, 여호수아와 갈렙을 제외한 10명은 모두가 부정적이었고, 이스라엘은 이들 10명의 말을 따랐습니다. 그 죄로 인해,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40년을 보내게 된 것입니다. 그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원하신 것이 무엇입니까? 오직, 하나입니다. 그것은, 하나님만을 의지하며,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라는 겁니다. 광야는 하나님의 보호가 없이는 절대로 살 수 없는 곳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만을 절대적으로 의지해야 하는 곳입니다. 낮에는 뜨거운 열기가 가득하고, 밤에는 추운 냉기가 가득한 곳으로, 낮과 밤의 온도 차가 급격함으로, 이스라엘이 적응할 수 없는 곳입니다. 또, 광야의 동물이나 곤충은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맹독을 품고 있습니다. 그리고, 매우 사납습니다. 이러한 곳에서 하나님의 보호하심이 없다면, 이스라엘이 어찌 살아갈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 성도인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광야와 같은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보호하심이 없다면, 우리가 어떻게 살아갈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이 광야를 지내는 동안 양식과 쉼터와 안전과 의복 등 삶의 모든 것을 주관하시며, 지키고 돌봐주신 것처럼, 성도인 우리가 광야와 같은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에도, 하나님은 우리를 지키고 돌봐주십니다. 그러므로, 성도인 우리는 하나님을 떠나서는 살아갈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떠나서도 살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는 하나님의 성도가 아닙니다. 하나님만을 믿고 의지하며, 광야와 같은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에게, 만나와 같은 하나님의 은혜와 돌보심이 풍성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본문 35 - 36절을 보시면, “사람이 사는 땅에 이르기까지 이스라엘 자손이 사십 년 동안 만나를 먹었으니 곧 가나안 땅 접경에 이르기까지 그들이 만나를 먹었더라. 오멜은 십분의 일 에바이더라”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만나를 주심은, 우리의 필요를 아시고, 채워주신다는 겁니다.
본문 35절을 보면 “사람이 사는 땅에 이르기까지 이스라엘 자손이 사십 년 동안 만나를 먹었으니”라고 합니다. 여기서, “사람 사는 땅”은, “가나안”을 가리킵니다. 그러므로, 본문을 역으로 본다면,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이르기까지는, 사람이 살 수 없는 곳에서 살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앞에서 우리가 광야에 대해 말씀드린 것처럼, 광야는 사람이 살 수 없는 곳입니다. 그곳에서는, 마실 물도, 먹을 양식도, 입을 옷도 구할 수 없습니다. 그러기에, 본문은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40년을 보내는 동안 하나님께서 그들을 어떻게 인도하고, 지키고 돌봐주셨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은 또한, 하나님께서 성도된 우리가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을 아시고, 공급해 주심을 증거합니다. 광야에서 이스라엘은, 자신들이 출애굽할 때 준비했던 모든 양식이 떨어졌다고 할 때,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하늘의 양식인 만나를 먹었습니다. 또, 물이 없어서 심한 갈증으로 죽어간다고 할 때, 하나님께서는 바위를 터서 물을 공급하셨습니다. 그리고, 신 29: 5을 보시면, “주께서 사십 년 동안 너희를 광야에서 인도하게 하셨거니와 너희 몸의 옷이 낡아지지 아니하였고 너희 발의 신이 해어지지 아니하였으며”라며, 그들의 의복과 건강을 지켜주셨습니다. 이렇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우리가 하나님께 구할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간구를 듣고, 우리에게 응답하시며, 우리의 필요한 것을 채워주십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명을 따라 이삭을 번제물로 바치고자 모리아의 산으로 갔을 때, 하나님께서는 이미 그 곳에, 이삭대신 사용하도록 숫양을 준비하신 것처럼, 우리의 필요에 대해 하나님께 간구하는 것 역시,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는 겁니다. 마 7: 7을 보시면,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라고 합니다. 우리의 필요한 것을 하나님께서는 아시지만, 우리가 하나님께 그것을 구하기 전에는 주시지 않습니다. 그것은, 구하지 않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하나님 안에는 모든 것이 예비되어 있습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믿고 의지하는 하나님은 준비하신 하나님 곧, “여호와 이레”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빌 4: 19에서, “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 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고 합니다. 여러분,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 필요한 것이 너무 많습니다. 많다는 것은, 하나님께 구할 것이 많다는 겁니다. 이렇게 많은 것들에 대해, 여러분은 하나님께 얼만큼 구하고 계십니까? 혹시나, 모세 당시, 가나안을 정탐했던 자들 가운데, 10명의 시각으로 하나님께 구하지 않고, 생활하지는 않습니까? 여호수아와 갈렙의 시각으로 하나님만을 믿고 의지하는 가운데, 하나님께 구하심으로, 날마다 만나의 풍성함과 같이, 풍성한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이 성도된 우리의 삶 속에 가득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