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列國誌]
3부 일통 천하 (195)
제13권 천하는 하나 되고
제 21장 조정(趙政), 진왕에 오르다 (9)
다음날이었다.
번어기(樊於期)는 왕전을 쉽게 격퇴시킬 수 없음을 직감하고 탈출을 결심했다.
장안군 성교를 찾아가 청했다.
"적군의 형세는 크고 성안의 민심은 점점 어지러워갑니다. 이대로 가다가는 언제 함몰당할지 모릅니다.
일단 연(燕)나라로 몸을 피했다가 후일을 도모하는 것이 낫겠습니다.
제가 적의 포위를 뚫을 터이니 대군께서는 지금 곧 탈출 준비를 하십시오.“
그러나 장안군(長安君)은 쉽게 마음의 결단을 내리지 못했다.
"연나라가 나를 받아줄까?"
"그 점은 염려하지 마십시오. 소장이 책임지고 대군을 지켜드리겠습니다.“
"일단 오늘 하루 더 생각해보고 내일 답을 주겠소.“
"시간이 없습니다. 때를 놓치면 달아나고 싶어도 달아날 수가 없습니다."
번어기(樊於期)가 안타까워하는 중에 성문을 지키던 장수가 달려와 보고했다.
"지금 적군이 남문 밖에 와서 싸움을 청하고 있습니다.“
번어기는 일단 그들을 물리치고 난 후 다시 설득하리라 마음먹고 병차에 올라타 남문 밖으로 나갔다.
그러나 어찌 알았으랴.
그것이 그들 두 사람의 마지막 대화였을 줄이야.
번어기(樊於期)가 남문 밖으로 나가자마자 장안군 성교 앞에 한 사내가 나타났다.
전날 밀담을 나눈 바 있던 양단화였다.
양단화(楊端和)는 장안군 성교의 소매를 잡아끌다시피 성 위로 올라갔다.
"보십시오. 왕군(王軍)이 저렇듯 새카맣게 깔려 있는데 번어기(樊於期)가 저들을 이기리라 보십니까?"
양단화(楊端和)의 말대로였다.
그 날따라 왕전의 군사들이 유독 많이 몰려들고 있었다.
장안군(長案君)은 겁에 질려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때 번어기(樊於期)도 왕군의 엄청난 숫자에 기가 질렸음인지 얼른 병차를 돌려 둔류성으로 돌아왔다.
성벽 위를 향해 외쳤다.
"성문을 열어라!"
그 순간이었다.
양단화(楊端和)가 장안군 성교의 칼을 빼앗아 높이 쳐들며 성 아래를 향해 소리쳤다.
"모든 군사는 들어라!
장안군께서는 이미 항복하셨다. 만일 성문을 여는 자가 있으면 즉시 목을 베리라!"
양단화(楊端和)는 말을 마침과 동시에 소매 속에서 기(旗)를 꺼내 성벽 위에 꽂았다.
깃발 한복판에는 커다란 글자가 하나 새겨져 있었다.
- 항(降).
때를 같이하여 성벽 여기저기서 '항(降)' 자가 새겨진 깃발이 솟아올랐다.
둔류성 안에 살고 있던 양단화의 친척들이 내건 깃발이었다.
전혀 예상치 못한 이 돌발 사태에 가장 놀란 것은 번어기였다.
그는 성 위를 올려다보았다.
장안군 성교(成嶠) 역시 어쩔 줄 모르다가 급기야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흐느끼기 시작했다.
번어기(樊於期)는 분통이 터져 자신도 모르게 욕설을 퍼부었다.
"저렇게 못난 놈을 위해 내가 지금까지 싸우다니! 더 이상 저런 자를 도울 필요가 없다."
그때 이미 왕전(王翦)의 군사들이 겹겹이 번어기를 에워싸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번어기를 사로잡으라는 진왕 정(政)의 명 때문에 활을 쏘지는 않았다.
이것이 번어기(樊於期)로서는 행운이었다.
"비켜라!“
그는 별안간 사나운 괴성을 질러대더니 자신을 에워싼 왕군을 향해 돌진했다.
또 한 번 번어기의 용력이 발휘되는 순간이었다.
닥치는 대로 군사들을 베어 마침내는 포위망을 뚫고 북쪽을 바라보고 달아났다.
왕전(王翦)은 기를 쓰고 추격했으나 끝내 그를 잡지 못했다.
둔류성의 사방 성문이 열렸다.
왕전(王翦)은 성안으로 들어가 장안군 성교를 체포했다.
그러나 왕의 친동생인지라 자기 마음대로 처결할 수가 없었다.
일단 공관에 감금한 후 신승(辛勝)을 함양으로 보내 승전을 고하고 장안군의 처리에 관해 물었다.
얼마 후 진왕 정(政)의 명이 하달되었다.
- 동생이라도 나를 반(反)하는 자는 모두 죽인다.
장안군의 목을 끊어 둔류성 성문 위에 내걸어라.
아울러 장안군(長安君)에 동조한 모든 군사를 능지처참하라.
반란군을 따른 둔류 땅 백성들을 모조리 임조로 추방하라.
장안군(長安君)은 물론 그 군사들과 백성들에게까지 혹독한 형벌을 내린 것이었다.
임조는 감숙성(甘肅省) 북단에 위치한 황무지.
진왕 정(政)의 분노가 얼마나 극에 달했는지를 알 수 있는 명령이었다.
이어 달아난 번어기(樊於期)에 대한 명도 시달되었다.
- 누구든 번어기를 잡아 바치는 자에게는 다섯 개의 성을 상으로 내리리라!
장안군 성교(成嶠)는 자신을 죽이라는 왕명이 떨어졌음을 알고 절망하여 큰 소리로 울음을 터뜨렸다.
왕전(王翦)이 그 앞에 섰다.
차마 칼로 목을 벨 수가 없었다.
"자결하시오."
장안군(長安君)은 눈물을 씻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허리띠를 풀러 대들보에 건 후 목을 맸다.
군졸 하나가 발을 받치고 있는 의자를 걷어찼다.
장안군의 몸은 길게 늘어졌다.
다음날, 왕전(王翦)은 진왕 정의 명에 따라 장안군의 목을 끊어 둔류성 성문 꼭대기에 높게 내걸었다.
아울러 포로로 잡은 장안군의 군사들을 모조리 도륙했으며, 둔류성 백성들은 임조로 강제 이주시켰다.
이로써 둔류성 안은 텅 비게 되었고, 썩은 시체만 거리에 산처럼 쌓였다.
그 냄새가 어찌나 심했던지 한동안 둔류성에는 아무도 살지 않았다.
BC 240년(진왕 정 7년)의 일이었다.
🎓 다음에 계속.............
< 출처 - 평설열국지 >
카페 게시글
류재훈의 列國誌
조정, 진왕에 오르다 (9)
류재훈
추천 0
조회 12
23.08.12 07:45
댓글 0
다음검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