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남의 지식인이나 정치인들이 평생에 한 번씩은 써먹는 관용구가 있다. ‘약무호남 시무국가’(若無湖南 是無國家)―‘호남이 없으면 나라도 없다’는 의미다. 호남의 가치에 어마어마한 의미를 부여한 이 문장은 임진왜란 당시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서한이 출전이라고 한다. 충무공이 이런 표현을 사용한 것은, 당시 전략적인 관점에서 호남을 지키지 못하면 일본군을 막기 어렵다는 점을 강조하는 의미였다.
이 문장은 이후 점점 의미가 강조되고 확대 해석됐다. 특히 1960년대 이후 산업화가 진전되고 호남의 농촌 공동체 해체가 본격화되면서, 호남의 소외감을 해소하는 차원에서 역설적으로 이 문장이 더 강조되는 경향이 생긴 것 같다. 호남이 대한민국의 2등 시민이라는 상처를 씻고 자존감 회복 차원에서 저 문장을 자꾸 인용하게 됐다는 것이다. 충무공의 권위와 반일감정에 편승하려는 의도도 적지 않았을 것이다.
호남 출신 지식인과 정치인들이 이 문장에 연연해 하는 것을 보면 안쓰러운 심정이 되기도 한다. 대한민국의 주류에서 얼마나 소외됐으면 저런 문장에 집착할까 하는 역설적인 연민에 빠지는 것이다. 대한민국의 시민으로서 강력한 소속감을 추구하는 심리라고 본다.
임진왜란 당시에 저 문장은 액면 그대로 진실이었다. 이후에도 곡창지대 호남은 백성들을 먹여살리는 근원이었다. 호남 지방의 수령은 양반들이 선호하는 관직이었다. 그만큼 수탈도 심하고 백성들 입장에서는 저항의식과 분노를 키울 수밖에 없었던 비극의 땅이기도 했다. 호남 특유의 저항의식과 비주류의식은 이런 수탈을 배경으로 하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최근 들어서는 이 문장을 사용하는 호남 출신 지식인과 정치인들에게 따져 묻고 싶어진다. 지금 시대에도 호남은 대한민국을 살리는 역할을 하고 있을까? 아니 심지어 호남의 지식인과 정치인들이 호남을 ‘자신들의 나라’로 생각하는지조차 의문스러운 경우가 많다.
호남의 지식인과 정치인들은 기업과 시장 질서를 거부하는 논리를 펼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기업과 시장은 악(惡), 공공은 선(善)이라는 명제가 지역의 공식 가치관처럼 통용되는 경향이 있다. 큰 정부, 작은 시장의 가치관이다. 호남의 이런 가치관이 과연 대한민국 경제를 살리고 청년 일자리를 만들어내는 역할을 했을까? 그 답은 부정적이다. 지난 대선 복합 쇼핑몰 이슈도 지식인·정치인들의 이념적 편향에 대해 평범한 호남 생활인들의 거부감이 표출된 사건으로 해석해야 할 것이다.
국가 정체성의 왜곡은 더욱 위험하다. 광주광역시에는 중국의 인민 음악가 정율성을 기념하는 도로명과 조형물 등이 설치돼 있다. 광주 출신이라는 점을 이유로 꼽지만, 정율성은 공산주의자였고 6·25 당시 인민군의 일원으로 내려왔으며 중국 공산당에 충성하는 당원으로 살다가 죽었다. 대한민국의 입장에서 보자면 반란군인 것이다. 건국의 아버지 이승만과 산업화의 영웅 박정희를 기념하는 조형물 하나 없는 광주에 정율성의 기념물이 있다는 사실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호남에서 쓰이는 ‘약무호남 시무국가’(若無湖南 是無國家)라는 문장의 의미를 새삼 따져묻게 되는 이유가 이것이다. 1980년의 비극 이후 호남은 5·18을 내세워 승자의 위상을 차지했다. 하지만 이념 성향에서 호남과 대한민국은 본질적인 갈등 관계였고 반대 방향을 바라보며 걸어왔다. 이런 길항 구조는 이제 유지하기 어렵다. 이대로 가면 정말 서로 갈라설 수밖에 없을 것이다.
호남에서 아름답지 못한 일이 생기면 온라인에서는 ‘차라리 독립해라’는 댓글이 수없이 달린다. 호남과 대한민국이 한 방향으로 가야 한다면 누가 변해야 할까? 지금 상황에서는 ‘약무호남 국가발전’(若無湖南 國家發展, 호남이 없으면 나라가 발전한다)이 차라리 더 정확한 진단일 수도 있지 않겠는가.
출처 : 자유일보(https://www.jayupres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