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묘자
출 26: 1-14
성소에 위치해 있는 성구를,
순서상으로 본다면 「촛대」 다음으로 「향단」을 소개해야되나 성경은 곧장 성막의 덮개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왜 이토록 「향단」은 뒤로 밀려 30장으로 넘겨야 했는가? 여러 이유가 있겠으나 모름지기 「향단」은 성도들의 「거룩한 삶과 기도」여야겠기에 뒤로 넘기신 것 같습니다.
자세한 것은 훗날 천국에 입성하여 아버지께 여쭈어 보아야 됩니다.
자, 오늘의 본문! 4종류의 성막 덮개를 말씀합니다.
필요에 의해서, 필요한 성막덮개를 사용하도록 하신 것이 아니라 항시 4종류의 성막덮개를 씌워야 했습니다.
과연 이러한 성막덮개는 무엇을 의미하고 무엇을 상징하는지요?
첫째 성막) 4가지의 색실은 예수의 상징입니다.
1절 "너는 성막을 만들되 앙장 열폭을 가늘게 꼰 베실과 청색 자색 홍색실로 그룹을 수놓아 만들지니…"
말씀 그대로 성막을 첫 번째로 덮는 덮개는 4가지 색실을 꼬아 만든 「천」입니다.
특이한 것은 그곳에 그룹(천사)를 수놓았던 겁니다.
아름답겠죠!
① 베실이 나옵니다. - 거룩함입니다.
백색은 순결함의 상징이기 때문입니다.
② 청색이 나옵니다. - 생명을 상징합니다.
흔히 청년의 기상이나 싱싱함을 상징하고자 했을 때 우리는 청색을 사용합니다.
찬송 303장) 가슴마다 「파도」친다 우리들의 젊은이
눈동자에 어리운다 우리들의 「푸른 꿈」
주의 말씀 주의 행함 길과 진리 되시니
우리 평생 한결같이 주만 따라 살리라.
③ 자색이 나옵니다. - 권위의 모습입니다.
왕처럼 권세가 있거나 부자들이 주로 자색을 많이 사용했기 때문입니다.
④ 홍색이 나옵니다. - 피의 상징입니다.
고난의 상징입니다.
이러한 4가지 색실로 공교히 수놓아 만든 것이 비단 성막의 덮개뿐 아니라 후에 등장하는 제사장의 성의인 「에봇」도 동일합니다.
자∼ 4색실 누구라 해야 옳습니까?
아니, 예수님을 어떻게 표현해야 옳습니까?
신약성경의 사복음서는 사색실이 상징하는 예수님을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보다 앞선 이사야 선지자의 예수님 소개를 봅시다.
사 9:6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그렇습니다.
인간의 논리로 예수님을 보면 알 수 없습니다.
어떻게 하나님이신 분이 사람이 되시고 말구유에서 태어나신 그 아기에게 영존하시는 아버지의 신성과 평강의 왕이라 할 수 있는 공의가 있는가?
정말 도무지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믿음의 대상이 되시고 믿음 이후엔 알게 되므로,
이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이 되는 겁니다.
요 1: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
무슨 뜻입니까?
알 수 없는 그 분, 신비한 그 분! 기묘자인 예수님이 믿어지고 고백되어지는 것은 논리가 성립되어서가 아니라 하나님 주신 믿음으로 가능한데 그 믿음이라는 것이 바로 하나님 자녀된 증거라는 겁니다.
마치 늑대 새끼는 늑대 어미를 알아보고, 병아리는 어미 닭을 따라가듯,
생명의 유전, 피의 부름에 의하여 예수 생명을 가진 하나님의 자녀들만이 예수님이 기묘자라 할지라도 믿어지고 고백되어 따라가는 것입니다.
둘째 성막) 염소의 털인데 고난의 예수님을 상징합니다.
앞서 4가지 색실로 공교히 짠 성막 덮개는 아름답기 그지없을 겁니다.
그 아름다움 속에는 신성이 감추어져 있고 은혜와 진리가 풍성하시고 겸손조차 하셨기에 땅위의 삶은 처절하리만큼 고난과 가난과 치욕의 삶을 사셔야만 했습니다.
왜요? 세상은 잘못해 놓고는 큰 소리 치는 자가 우세하는 세상이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의 33년의 생애는 고난의 연속이었습니다.
목 마르셨고, 쉴만한 처소조차 없으셨고 두 벌 옷도 없으셨고, 무덤조차도 요셉 것을 빌어 사용하시었던 겁니다.
4색 실로 짠 덮개 위에 이제는 염소털로 짠 덮개를 덮은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고난으로 예수님의 아름다움과 신비로움은 가려져 세상에 드러나지 못했던 겁니다.
요 1:10∼11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치 아니하였으나,"
세상은 겉을 보고 판단합니다.
그 일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불신자나 신자나 같습니다.
만약 예수님이 고난의 왕이 아니라 권세의 왕이었다면 세상은 지금보다 더 많이 예수님을 추종했을 겁니다.
한 예를 말씀합니다.
예수님이 오병이어의 기적을 베푸신 후의 일입니다.
백성들은 예수님을 억지로 임금 삼고자 했습니다.
그 후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게 되자 곁에 있던 제자들조차 예수님을 떠났습니다.
그러므로 아시길 바랍니다.
한길 사람의 마음 속도 모르겠거든 하물며 기묘자인 예수님을 겉만 보아서 어찌 알겠습니까?
만약 알 수 있다면 그는 우리가 믿고 따르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또한 아시길 바랍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예수님을 표준으로 혈통을 떠나 하나님 백성이냐 아니냐를 구별하십니다.
막 16:16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라."
뿐만 아니라 염소털 덮개는 보온도 감당해야 됩니다.
광야! 어떤 곳입니까?
낮에는 덥고 밤에는 추워 기온의 변화가 큰 곳입니다.
염소털은 특별한 냉·난방시설이었던 성막에 좋은 냉·난방시설의 역할을 이루어 낸 겁니다.
여기서 우리는 우리네 인생들과 하나님의 뜻이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인생들은 여러 경험을 통하여 삶의 지혜를 터득하는데 비해 하나님은 지혜의 근본이시기에 삶이 없더라도 인생들의 삶의 지혜까지 발휘하시고 계신 겁니다.
즉, 인생들은 춥다고 느끼다가 비로써 염소털을 덮게 되지만, 하나님은 처음부터 염소털로 실용하도록 하신 겁니다.
자! 여기서 우리 또 알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기묘자인 예수님은 우리의 「모사」도 되십니다.
목자가 목회에서
사업가가 사업에서
교육자가 교육에서… 범사에 예수님을 인정할 때 예수님은 그의 지혜가 되고 힘이 되어 주십니다.
셋째 성막) 붉게 물들인 수양의 가죽으로써 예수님의 희생을 의미합니다.
출애굽 시 유월절 어린양은 암 양이 아니라 수양이었던 것을 기억하시는지요?
「붉게 물들인」가죽은 피 흘린 어린양 가죽을 대신 한 겁니다.
자연적 피는 세월이 갈수록 탈색되고 변질되기 쉽기에.....
더 거슬러 올라가면 아담 하와가 범죄 했을 때 대신 죽었던 희생 동물을 기억할 수 있습니다.
창 3:21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
그러나 이 가죽옷은 상징성은 있으나 실제로는 영원하지 모사여 아담 후예들의 죄와 허물을 가리우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오직 예수님은 하나님 어린양 되어서 대신 죽으심으로 단번에 뭇 백성들의 죄를 영원히 구속하신 겁니다.
히 9:12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니하고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
넷째 성막은 해달의 가죽인데 인자의 예수님이십니다.
누군가가 성소 안에서 위를 본다면 아름다운 천장을 볼 수 있을 겁니다.
사색실로 공교히 짠 그룹들이 수놓아 있는 덮개를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밖에서 성소를 보았다면 「거무튁튁한」해달의 가죽으로 덮인 지붕을 보게 될 겁니다.
우리나라의 문화를 보면 「체면 문화」가 아직은 여러 곳에 있습니다.
벗은 거지는 굶어도 입은 거지는 산다! 고 했던가요?
그래서 인지 좋은 자동차일수록 할부차가 많고, 큰소리 칠수록 별볼일 없는 사람이 많습니다.
겉은 아름다운데 속은 빈 강정인 겁니다.
중국 사람들은 그렇지 않은 것 같습니다.
집이든 사람이든 겉은 초라하기 그지없는데, 그 안에는 실속이 있고 아름답습니다.
몇 번 중국에서 겪은 일입니다.
식당을 안내 받아 가면 겉은 창고 같았습니다.
무슨 장사가 될까? 싶어 들어가면 넓고 웅장하고 호화롭기까지 합니다.
이러한 한국, 중국의 문화 차이가 사업하는데 선교하는데 큰 장애가 옵니다.
예수님! 어떻습니까?
인간의 눈으로 본다면 보잘 것 없는 「나사렛 출신의 목수 아들」입니다.
빌립이 나다나엘에게 나사렛에서 구주가 났다고 하니 나다나엘은 그곳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겠는가? 하며 처음부터 거부하기도 했습니다.
학력도, 번뜻한 명함도 없습니다.
몰락한 다윗 왕가의 가난한 집안의 장남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속에는 무엇이 있었습니까?
사도 요한의 고백입니다.
요 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사도 바울의 고백입니다.
골 2:3 "그 안에는 지혜와 지식의 모근 보화가 감추어 있느니라"
여러분들은 과연 예수님을 어떻게 보시는지요?
해달의 가죽만 보아서도 안됩니다.
염소털만 보아서도 안됩니다.
4종류의 모습으로 보아야 됩니다. 고백해야 합니다.
감사한 것은 이 성막 덮개는 모든 것을 감쌀 수 있을 만큼 넉넉한 덮개였습니다.
출 26:9 "폭 절반은 성막 전면에 「접어」드리우고"
무엇을 의미할까요?
주님의 속죄는 못가울 죄가 없고,
주님의 은혜는 못 감싸 안을 죄인 없고,
주님의 지혜는 알지 못하는 것이 없으시고,
주님의 능력은 능력 못할 일이 없으심입니다.
기묘자! 우리 주님이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