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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16-26
아이 성의 교훈 / 정언용 목사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 진입해 들어갈 때 가나안 땅에는 두개의 큰 성이 있었습니다. 하나는 여리고 성이며 다른 하나는 아이 성입니다. 그런데 여리고 성을 공격할 때에는 별 문제 없이 이스라엘이 승리했습니다. 믿음을 통해서 여리고 성벽이 무너지는 하나님의 기적이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처음에 아이 성을 공격할 때에 이스라엘은 그 공격에서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왜 이스라엘은 이이성의 공격에서 실패한 것입니까? 그리고 이 실패를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무엇을 교훈 하려고 하신 것입니까?
이스라엘이 아이 성 공격에서 실패한 것은 두 가지로 볼 수 있습니다.
하나는 아이 성을 공격할 때 이스라엘이 신앙적인 모습으로 출발하지 않은데 있습니다.
여리고 성은 이스라엘이 믿음에서 출발했습니다. 하루에 한바퀴 씩 여리고 성을 돌고, 마지막 날 안식일에는 성 주위를 일곱 바퀴 돌면서 여호수아의 명령이 있을 때 큰 소리를 지르게 되니 여리고 성이 무너진 것입니다. 여리고 성이 무너진 것은 전적으로 이스라엘 민족의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침묵 속에서 소리 없는 기도를 드리고 그 기도의 힘을 통해서 여리고 성이 무너져 내린 것입니다. 여리고 성을 공격할 때에 이스라엘은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기도로 시작해서 기도로 끝냈습니다.
그러나 아이 성을 공격할 때에는 기도로 시작하지 않았습니다. 어떻게 보면 아주 인간적인 방법으로 시작했습니다. 여리고 성을 공격할 때와는 아주 대조적인 방법으로 아이성의 공격을 준비합니다. 여호수아 7 : 2절에 보니까 여호수아가 아이성에 정탐꾼을 보냈다고 했습니다. 정탐꾼을 보내서 아이성의 동정을 살폈습니다. 정탐꾼들이 아이 성을 정탐하고 돌아와서 하는 말이 [저 아이성은 우리 군사가 다 올라갈 필요가 없을 것 같습니다. 약 이삼천 명만 올라가서 아이 성을 공격해도 될 것 같다]는 결론을 내리게 됩니다.
이스라엘은 여리고를 공격할 때에는 매우 신앙적인 방법을 택했습니다. 하루에 한바퀴 씩 성을 돌면서 기도하는 심정으로 여리고 성을 공격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여리고 성에서 승리한 이스라엘은 아이 성을 공격할 때에는 아주 인간적인 방법을 씁니다. 정탐꾼을 보내고 그 정탐의 결과에 따라서 공격방법을 택하게 된 것입니다. 아이 성을 공격할 때 이스라엘은 하나님 앞에 먼저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신앙적인 방법이 아니라 인간적인 방법으로 공격했습니다. 이스라엘은 먼저 하나님을 의지해서 신앙적인 방법으로 아이성의 공격을 준비한 것이 아니라 이방나라들이 전쟁을 하는 것과 같은 방법으로 아이성의 전쟁을 시작한 것입니다.
왜 이스라엘이 이런 인간적인 방법을 택했습니까?
교만했던 것입니다.
고린도 전서 10장 12절에는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여리고 성의 공격에서 성공한 이스라엘 민족은 교만해졌습니다.
여리고 성이 무너진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기적과 같은 은혜의 사건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여리고가 무너진 것을 하나님의 기적적인 사건으로 생각하기보다는 그 공로를 자신들에게 돌리게 됩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챈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인간적으로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방법으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인간적인 계산이 앞섰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기적은 절대로 인간적인 방법이나 계산과는 다르게 일어납니다. 우리는 우리 식의 계산을 하면서 하나님의 기적이 일어날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적인 방법을 뛰어넘는 초월적인 방법으로 하나님의 기적을 일으키는 것입니다.
때문에 우리가 어떤 일을 시작할 때에 인간적인 방법을 따르지 말고 신앙적인 방법을 택해야 합니다. 기도하고 시작해야 합니다. 신앙동료들의 자문을 받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인지를 판단해야 합니다. 이 일을 함으로써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수 있어야 합니다. 내 얄팍한 생각을 의지하지 말고 전적으로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나아가야 합니다. 여리고 성을 공격할 때에 이스라엘은 매우 신앙적인 모습으로 출발했습니다. 그러나 아이 성을 공격할 때 이스라엘은 신앙적인 방법을 생각하기보다는 인간적인 방법을 택함으로 실패한 것입니다. 이것이 첫 번째의 실패 이유입니다.
두 번째로 실패한 이유는 한 개인의 욕심 때문이었습니다.
여리고 성을 공격할 때 하나님께서는 너희들 가운데 누구도 전리품을 개인적으로 취하지 말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보통 싸움에서이기면 승리한 쪽에서 적군들이 쓰던 모든 물건들을 취하게 되어 있는 것이 고대 전쟁의 원칙이었습니다. 그런데 여리고 성의 전투에서 하나님께서는 어떠한 전리품도 취할 수 없다는 명령을 내린 것입니다. 여리고 성의 전투의 결과는 이스라엘의 승리였습니다. 그러나 그 누구도 전리품을 취할 수 없었습니다. 전리품을 취하지 말라는 하나님의 명령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의 군대 장군 가운데 아간 이라는 자가 있었습니다. 이 아간 이라는 사람이 전리품을 보고 마음에 욕심을 품게 됩니다. 그래서 몰래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이스라엘 사람들 중에 아무도 모르게 전리품을 숨긴 것입니다.
오늘 본문 21절에는 아간이 [시날 산의 아름다운 외투 한 벌과 은 이 백 세겔과 오십 세겔 중의 금덩이 하나를 보고 탐심이 생겨서 그 물건을 취했다]고 했습니다. 유대 랍비들의 전승에 의하면 시날에서 나오는 외투는 자주색이었다고 하는데 이 옷은 엘리야와 같은 예언자나 니느웨 왕과 같은 사람들이 입었던 옷으로 사람의 탐심을 유발할 만한 예술적인 옷이었다고 합니다.
오늘날로 따지만 [앙드레 김]과 같은 사람이 만든 옷으로, 금은 보석이 붙어있는 매우 고가의 예술품으로 생각할 수 있을 것입니다. 거기다가 전리품 가운데에는 다량의 금과 은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 물건을 보고 아간 이라는 사람이 탐심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몰래 훔쳤습니다. 그리고 이 물건을 가지고 와서 자신의 장막 안에다가 땅을 파고 그 땅 밑에 숨겨 두었습니다. 장막 위는 카펫트로 살짝 덮어놓아서 아무도 알 수가 없도록 만들었습니다. 아마 아간이 이런 짓을 할 때에는 [이 사실은 아무도 알지 못할 것이다. 감쪽같지 않느냐? 누가 이 사실을 알겠는가? 나 밖에는 모르는 사실이다. 완전 범죄다] 그렇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탐욕에 한번 눈이 어두워지면 판단력도 잃어버리고, 다른 사람의 입장도 생각하지 못하게 되고, 오직 자신의 목적 하나만 생각하게 됩니다. 우리가 흔히 눈에 콩깍지가 끼어서 결혼한다고 하는 이야기가 있는 것처럼 탐욕의 친구가 되고 한번 욕심에 사로잡히면 다른 것은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오직 욕심하고 있는 바를 이루어야 겠다는 생각에 몰두하게 되는 것입니다.
중국 고사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장자(莊子)가 하루는 활을 가지고 조능이라는 밤나무 숲 속을 산책하고 있었습니다. 그 때 밤나무 숲 남쪽에서 날아온 까치 한 마리를 발견했습니다. 장자가 활을 겨냥하여 까치를 쏘려고 하는데, 까치는 정신없이 다른 곳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까치는 제 앞에 있는 큰 왕거미를 잡아먹으려고 눈독을 들이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 거미는 자기를 노리는 자가 있는 것도 모르고, 또 밤나무에 붙어 있는 매미를 잡아먹으려고 열심히 노려보고 있었습니다.
이 광경을 본 장자는 겨누었던 활을 쏘지 못하고 무거운 마음으로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가 집으로 돌아올 때 밤나무 숲을 지키는 사람이 장자가 밤을 훔치려는 줄 알고 뒤에다 대고 [야! 이 도둑놈아!] 하면서 욕설을 퍼부었습니다. 장자는 집에 돌아와 석달 동안 문 밖 출입을 하지 않고 밤나무 숲에서 생겼던 일을 생각했다고 합니다.
탐욕에 눈이 어두우면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욕심의 싹이 생기면 꼭 이번 주에 산 복권이 몇억 원으로 변해서 우리 집에 쏟아질 것 같이 느껴집니다. 욕심이 앞서면 [이번에 주식을 사면 꼭 대박이 터질 것 같은 착각]이 일어납니다. 욕심에 사로잡히면 지금 하던 일을 그만두고 다른 일을 하면 금새 돈방석에 앉을 것처럼 느껴집니다. 욕심에 사로잡히면 일시적으로 앞을 보지 못하는 맹인이 되는 것입니다. 정치인들 보세요. 돈 먹으면 어떻게 된다는 것 모르겠습니까? 욕심 때문에 눈이 머니까 집어먹을 것, 안 집어먹을 것 생각하지 않고 꿀꺽 꿀꺽 삼키는 것입니다. 우리 신앙인들은 욕심에 사로잡히면 신앙적인 것을 다 잃어버리고 맙니다. 오히려 우리 자신이 하나님의 눈을 가릴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 이번 한번 만 입니다. 한 쪽 눈을 좀 감아주시지요!]하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자기 뜻대로 마음대로 어떤 일을 하게 됩니다.
아간이 전리품을 훔칠 때에도 자신의 욕심이 앞섰던 것입니다.
욕심이 앞서니까 이스라엘 공동체 전체를 생각할 겨를이 없었습니다. 자신이 한 일 때문에 이스라엘 전체가 어떤 고통과 어려움을 당할 것이라는 것을 미처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이스라엘은 아이 성의 일차 공격에서 실패함으로 36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목숨을 잃어버렸습니다. 한 사람의 잘못 때문에 이스라엘 전체가 하나님의 심판을 당한 것입니다. 한 사람의 욕심과 탐욕 때문에 이스라엘 전체가 곤경에 빠지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 탐욕은 자신뿐만 아니라 공동체 전체를 파멸로 몰아넣고 맙니다.
그래서 율법에서는 십계명의 말씀 중에 열 번째에 [네 이웃을 것을 탐내지 말라]고 경고하는 것입니다. 탐심이라는 것은 자기 자신에게만 영향을 끼치는 것이 아니라 탐심을 갖게되면 이웃에게 해를 끼치게 되기 때문에 특별히 경계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이야기를 잘 알지 않습니까? 초대교회는 마가의 다락방에서 하나님의 성령의 역사를 경험했습니다. 성령의 역사를 경험한 초대교회 교인들은 공동의 생활을 했습니다. 성령의 통한 일치의 역사가 일어나서 서로 가지고 있는 소유의 개념이 없이 유무 상통하는 역사가 일어난 것입니다. 구약의 희년의 정신이 그대로 드러난 것이 바로 초대교회 교인들이 재산을 서로 공유하는 사건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초대교회 교인들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재산을 팔아서 교회로 가지고 왔습니다. 그리고 교회에서는 [필요한 만큼 가져다 쓰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난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행전 4 : 34절에 보면 초대 교회 교인들 가운데에는 핍절한 자들이 없었다고 했습니다. 가난한 사람이 없었다는 말입니다. 모두가 하나님의 성령의 역사에 의해서 골고루 잘 사는 형편을 이루었다고 했습니다.
초대교회 모든 교인들이 자신들이 가지고 있던 재산을 팔아서 사도들의 발 앞에 두었습니다. 아니니아라는 사람도 자신의 소유를 팔아 제자들의 발 앞에 가지고 왔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재산을 가져다 놓는 아나니아에게 베드로가 묻습니다.
[아나니아야! 네가 어찌하여 성령을 속이고 땅 값의 일부를 감추었느냐?]하고 물었습니다. 아나니아는 너무나 깜짝 놀랐습니다. 자신 밖에는 아무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베드로가 성령의 역사를 통해서 자신의 행위를 알아낸 것입니다. 아니니아는 자신의 소유를 파는데는 성공했지만 재산의 일부를 몰래 감추어두고 사도들 앞에 갖다가 바친 것입니다. 사도들은 이러한 아나니아의 행위를 사도들을 속인 것으로 보지 아니하고 하나님과 성령을 속인 것으로 보았습니다. 그래서 아나니아에게 말합니다. [네가 성령을 속이고 땅 값의 일부를 감추었느냐? 땅이 그대로 있을 때에는 네 땅이 아니며 판 후에도 네 임의로 할 수 없더냐? 어찌하여 이 일을 네 마음에 두었느냐? 사람에게 거짓말 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로다]하고 말하자 아니니아가 그 자리에서 엎드려져 혼이 떠나 숨을 거두었다고 했습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아니니아의 그 귀중한 목숨을 거두어 갔을까요? 아나니아 보다 더 심한 죄를 지은 사람들도 모두 용서받고 살았는데, 왜 하나님께서는 한번 욕심을 낸 아나니아, 더군다나 숨긴 재산은 본래 자기 자신이 소유하고 있었던 재산이 아니었습니까? 자신이 가지고 있는 재산의 일부를 숨긴 것이 아나니아의 목숨을 거두어갈 만큼 그렇게 큰 죄였을까요?
여러분!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교회나 공동체 전체에 영향을 미치는 욕심은 하나님께서 심판하신다는 사실입니다. 내가 속였습니다. 거짓말을 했습니다. 그 속임과 거짓말이 공동체 전체에게 큰 영향을 끼칠 우려가 있을 때에는 하나님께서 심판하신다는 말입니다. 내가 욕심과 탐욕을 낸 것이 교회 전체를 병들게 만들 수도 있습니다. 그런 경우에 하나님께서는 그 사람의 죄를 심판하시는 것입니다. 죄를 심판하시는데 에도 아주 엄격하게 심지어는 그의 목숨까지도 거두어 가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교회 일을 할 때 탐욕과 욕심으로 일해서는 안됩니다. 개인의 이익과 명예보다는 하나님의 이익과 명예를 존중해야 합니다. 자신의 이익보다는 교회 공동체의 앞날을 우선 생각해야 합니다. 만약에 공동체와 교회를 위해서라면 자신의 이익이나 명예는 양보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만약에 아간이 이스라엘 전체 공동체를 먼저 생각했다면 그는 분명히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지 않았을 것입니다. 아나니아가 초대교회 전체를 먼저 생각하고 교인들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었다고 한다면 자신의 탐욕이 얼마나 부끄러운 것인가를 미리 알았을 것입니다. 탐욕과 욕심에 눈이 어두워지니까 오직 자신의 이익 밖에는 더 이상 생각하지 못함으로 자신도 목숨을 잃고 공동체 또한 큰 어려움과 곤경 가운데 빠졌던 것입니다.
때문에 우리는 욕심을 버려야 합니다. 공동체를 파괴시키는 욕심을 버려야 합니다. 교회 일을 할 때에도 자신의 욕심과 뜻만을 생각하면 우리는 죄를 범할 수가 있습니다. 한번 교회 일을 할 때에는 눈을 크게 뜨고 교회 전체를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가 어떤 일을 하든지 교회 전체에 미칠 파장을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내 행동이 교회 전체에 덕이 되어야 합니다. 나는 손해를 좀 보더라도 교회가 건강하게 되는 길을 택해야 합니다. 내 명예는 좀 손상되더라도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일을 해야 합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의 현실은 그렇지 못합니다. 기업은 망해도 기업인은 망하지 않는 기업의 윤리는 분명한 멸망의 욕심입니다. 나라는 망해도 정치인은 망하지 않는다는 윤리는 분명히 심판 받아야 할 욕심입니다. 나만 축복을 받을 수 있다면 교회는 어떻게 되어도 좋다는 생각은 이기적인 신앙 관에 지나지 않습니다. 내 생명이 살려면 다른 생명을 죽여야 한다는 윤리는 이 시대를 파괴하는 반생명의 윤리인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나]중심의 사고에서 [우리] 중심의 사고로 바뀌어야 합니다. 개인 중심의 윤리에서 공동체 중심의 윤리로 바뀌어야 합니다.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살아야할 이스라엘이 제일 먼저 깨달아야 할 것은 바로 공동체 의식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아간의 범죄를 심판하신 것입니다. 한 개인의 욕심이 이스라엘 전체를 파멸시킬 수 있었습니다. 한 개인의 죄는 개인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전체를 파멸시킬 수 있다는 것을 아간의 범죄를 통해서 보여 주었습니다.
욕심이라는 말은 한자어로 보면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골짜기(谷)라는 뜻의 곡(谷)이라는 말과 또한 없다는 뜻의 결(缺)자와 마음 심(心)자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욕심이란 골짜기는 없고 온통 봉우리만 있다는 뜻입니다. 봉우리가 있으면 골짜기가 있게 마련인데 봉우리만 남아 있고 골짜기가 없는 상태가 욕심이란 말입니다.
봉우리만 남아 있는 마음은 만족함이 없습니다. 봉우리를 하나 정복하고 나면 또 다른 봉우리가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야고보서 1:15절에는 [욕심이 잉태하면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하면 사망을 낳는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욕심을 가지면 그 욕심을 갖고 있는 사람은 파멸 당하게 됩니다.
거울 자체는 먼지가 없어도 많은 먼지가 거울에 붙기 마련입니다. 아무리 거울같이 맑은 사람일지라도 먼지 닦아내는 작업을 중단해서는 안됩니다. 욕심은 휴식이 없습니다. 달리고 또 달리는 천리마와 같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산상수훈에서 말씀하셨습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다]고 했습니다. 마음의 욕심을 비운 사람들을 말합니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 앞에만 마음이 열려있는 사람을 말합니다. 개인의 욕심보다는 전체를 향해서 마음이 열려 있는 사람을 말합니다. 마음이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4월 7일에 새로운 장로님을 피택합니다. 나는 우리 교인들이 욕심으로 이 일을 탐하지 않았으면 합니다. 개인적인 욕심을 앞세우면 교회는 반드시 시험에 든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교회의 일꾼은 자기 자신의 생각과 다를 때가 많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에 우리 인간이 욕심을 내서는 안됩니다. 아간이나 아나니아나 삽비라와 같은 사람들은 모두 교회를 생각하기보다는 자신의 욕심에 눈이 어두웠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결과적으로 그들 자신의 목숨도 잃었지만 이스라엘 공동체도 엄청난 충격과 고통을 당해야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이 성의 공격을 실패하게 했던 이유는 바로 공동체의식을 깨우쳐 주시기 위한 계획이었습니다. 그 공동체 의식을 파괴시키는 것이 바로 인간이 가지고 있는 욕심이라는 것을 아간의 이야기를 통해서 깨우쳐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 이제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새로운 이제껏 살아왔던 것과는 달리 새로운 공동체를 이루면서 살아야 하는 시점에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아이성의 1차 공격의 실패를 통해서 새로운 진리를 깨우쳐 주신 것입니다. 이 실패를 통해서 이스라엘은 개인이 갖고 있는 욕심이 이스라엘 공동체 전체를 파멸시킬 수도 있다는 교훈을 얻게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모두 교회를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신앙은 내 자신의 마음을 채우는 곳이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먼저 교회 전체를 생각하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전체를 생각하는 마음에 가장 방해가 되는 것이 바로 욕심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려고 자신의 모든 욕심을 버리셨던 것처럼 주님의 뒤를 따라 가야 할 것입니다. 주님은 개인의 욕심을 앞세우지 않으셨습니다. 자신이 죽어서 십자가의 제물이 된다 하더라도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낼 수있다면 주님은 바로 자신의 욕심을 접어두고 그 길을 따르셨습니다.
욕심을 접어두고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길은 좁은 길일 수밖에 없습니다. 욕심을 버리고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길은 십자가의 길일 수밖에 없습니다. 욕심을 버리고 사는 생활은 자신의 영광을 나타내기보다는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생활일 것입니다. 욕심을 버리고 사는 길은 마음이 가난한 자만이 가질 수 있는 축복의 길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 길에 진정한 행복과 하나님의 영적 축복이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때문에 교회를 섬겨나갈 때 욕심을 앞세우지 말고 진리와 십자가의 희생을 앞세우고 사시는 성도 여러
분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