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0년대 모더니즘시
권대근
문학박사, 대신대학원대학교 교수
김기림은 1939년 <모더니즘의 역사적 위치>를 발표한다. 이 글에서 그는, 전대의 낭만주의와 세기말 문학의 말류인 감상적 낭만주의, 그리고 당시 신경향파 시의 편내용주의의 경향을 부정 극복하기 위한 것으로서, 모더니즘 시는 언어예술이라는 자각, 현대문명에 대한 일정한 감수, 일정한 가치의식 등을 기본이념으로 하여 전개되었다고 회고한다.
당시 모더니즘 운동은 일제의 군국주의와 중일전쟁이 초래한 시대적 상황으로 이론과 실천 사이에서 괴리가 있었는데, 이론과 실천 사이의 분열은 논쟁의 당사자인 임화의 그렇고, 김기림처럼 모더니즘의 길을 걸었던 시인 오장환의 경우도 예외가 아니었다. 도시적 자극과 퇴폐주의에 이끌렸던 그의 시는 작품 <수부>를 계기로 문명비판으로 나아갔으나, <헌사>에 이르러 현실사회로부터 자신의 내면 세계로 관심을 바꾸게 된다.
김기림, 오장환 두 시인은 모두 모더니즘이 현실 사회에 적극적으로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보았다. 오장환과는 다른 처지에서 김기림도 40년대의 시에서 많은 변화를 보여준다. 그리고 두 시인은 태평양 전쟁을 전후로 각각 고향으로 돌아간다. 이들이 40년대 보여주는 시의 향방을 살펴본다.
김기림은 근대작가가 관심을 가지고 지켜 보았던 <근대>가 이제 파탄, 해체되고 있는 만큼 정확한 결산이 요구된다고 말한다. 이 시기에 쓴 작품도 이러한 논리의 자장 안에서 읽을 수 있다. 잘 알려져 있는 작품 <바다와 나비>(1939)가 씌어진 것도 이 즈음이다. 시인의 어떤 피로감이 배어 있는 작품이지만 명증한 표현을 얻고 있다. 이에 비해 <공동묘지> <요양원> <겨울의 노래> 등은 그의 역사의 증언에 대한 인식과 의식의 각성을 보여주고 있다. 그 제목에서 주제가 암시되고 있는 이 작품들은 현저한 내면화 경향을 드러낸다. 새로운 시대에 대한 동경이 암시되기도 한다. <못>(1941)은 시의 내면화 경향을 단적으로 보여 주는 경우다.
모-든 빛나는 것 아롱진 것을 빨아 버리고
못은 아닌 밤중 지친 동자처럼 눈을 감았다
(중략)
바람에 금이 가고 비빨에 뚫렸다가도
상한 곳 하나 없이 먼 동을 바라본다.
그는 여기서 어둠 속에서 침묵하지만 깨어 있는, 응축된 자신의 내면을 표현하고 있다. 이 시기의 김기림의 작품은 현실에 대한 직접적인 관심을 드러내지는 않지만, 그가 역사의 동향에 대단히 민감하게 반응하고 있음을 보여 주고 있다. 이는 그가 근대주의자임을 말하는 것이다. 한편 오장환은 사회적 관심으로부터 후퇴하여 자신으로 귀환하면서 자신의 고뇌를 역사화하는 시 쓰기를 시도한다. 시집 <헌사>는 이러한 경향을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저무는 역두에서 너를 보냈다.
비애야!
개찰구에는
못쓰는 차표와 함께 찍힌 청춘위 조각이 흩어져 있고
병든 역사가 화물차에 실리어 간다.
대합실에 남은 사람은
아즉도
누굴 기둘려
나는 이곳에서 카인을 만나면
목놓아 울리라.
거북이여! 느릿느릿 추억을 싣고 가거라.
슬픔으로 통하는 모든 노선이
너의 등에는 지도처럼 펼쳐 있다.
전통과 인습에 대한 반한, 퇴폐주의, 그리고 문명(제국주의) 비판 등 다양한 시적 편력을 거듭해 온 그 자신의 숨겨진 슬픔이 여기에 생생히 드러나 있다. <다시 미당리>에서는 자신을 돌아온 탕아에 비유하고 있다. 도시적 삶에서 패배하고 지친 자신의 내면적 초상이 시에 담겨있는 것이다. 태평양 전쟁 기간 중에 그는 잠시 도일하였다가 돌아온 일이 있으며, 이 시기를 전후하여 혁명기 러시아의 농촌 출신의 도시파 시인 에쎄닌의 시에 깊이 매료된다. 김기림이 근대의 파국을 응시하면서 서울을 떠나 고향 함북으로 돌아가 있는 동안, 오장환은 에쎄닌을 통해 자신의 문학적 방황을 되돌아보고 있었던 것이다.
김기림과 오장환의 해방 전의 시들은 각자의 처지에서의 모더니즘에 대한 반성이라는 의미를 지닌다. 김기림은 근대성, 나아가 근대 역사에 대한 재인식을 통해 모더니즘 이론가로서의 자신의 문제점을 깊이 인식할 수가 있었고, 오장환은 병든 역사에 대한 인식과 고향의 재발견 그리고 에쎄닌과 만남을 통해 자기 자신의 문학을 재성찰할 수 있었다. 해방 후 두 사람 모두 당시의 정치적 현실에 투신하면서 재출발한다. 김기림은 민족 내부의 갈등으로 8.15 당시의 순수한 정신이 날로 혼탁해져 가는 당시의 정치적, 사회적 현실을 <우리들의 8월로 도라가자>는 시에서 노래한다. 김기림의 노래 형식의 시들은 감정의 직접성을 드러내고 있다는 점에서, 그리고 인민성에 대한 배려가 결여되어 잇다는 점에서 약간의 문제점을 지니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감정의 직접성은 오장환의 시집 <병든 서울> (1946)의 경우에도 나타나고 있다. 해방의 감격과 당시의 정치에 대한 분노, 새로운 국가 기구에 대한 열망, 혁명적 열기로 채워지고 있는 것이 이 시기의 시들이다. 그러나 인민을 위한 새나라 건설의 꿈도 잠깐, 1946년 10월(인민항쟁)을 고비로 문학가동맹을 둘러싼 정치적 공기는 급격히 냉각된다.
김기림과 오장환이 해방 후 정치와 시를 동일한 과제로 생각하게 되는 것은 모더니즘 자체의 성격 때문이다. 현대성의 인식과 탐구는 모더니즘의 기본 이념이다. 다른 어떤 것보다도 자기 시대의 사회적 삶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데서 진정한 현대성의 문제가 제기된다. 김기림과 오장환은 30년대와 해방 공간의 현대성이 역사적으로 서로 다른 점은 있으나 현대성의 문제라는 점에서는 동일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40년대 이들의 문학적 행위는 한국 모더니즘이 정치와 긴밀하게 관련을 맺고 있었다는 사실을 생생하게 보여주는 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