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여주(驪州) 역사기행/코리아모니터
秀峯 鄭用眞 詩人
여주시 전경
경기도 여주시는 천혜적인 지리로 인해 진국 시대부터 평화로운 집단 마을을 영위해 왔으나 역사상 지명이 뚜렷이 나타난 것은 476년 고구려 장수왕 63년에 골내근현(骨乃斤縣)이라는 이름으로부터 시작된다. 그 후 757년 신라 경덕왕 16년에는 황효(黃驍), 940년 고려 천수(天授) 23년에 황려현(黃驪縣), 고려 고종 원년(1214년)에 영의(永義)로 개칭하였다가, 1305년 충렬왕 31년에 여흥군(驪興郡)으로 승격하였다. 조선 태종 2년(1401년)에 여흥부(驪興府)로 승격하였고, 1413년 태종 14년에 도호부가 설치하였다. 이 때 충청도에서 경기도로 이관되었다. 1469년 조선 예종 1년에 여주목으로 승격하였다.
여주시 연혁
1895년(조선 고종 32년) 23정부 시행으로 충주부 여주군으로 개편,
원주군 강천면 편입
1896년(건양 원년) 13도제 시행으로 경기도 여주군
1941년 10월 1일 여주면이 여주읍으로 승격하였다.[1]
1995년 3월 1일 강천면 대둔리가 원주시 문막읍에 편입
2013년 3월 26일 여주군 일원에 도농복합시를 신설하는 안을 정부에서 의결[3]
2013년 9월 23일 여주군에서 여주시로 승격. 여주읍은 여흥동, 중앙동, 오학동으로 분동되고, 가남면은 가남읍으로 승격.
강 마을 정용진
내 님이 사는 마을은
돛단배 밀려오고
따사로운 인정 머무는
버들 숲 강마을.
동산에 돋는 해
머리에 이고
가녀린 손길을 모두어 가며
한없이 한없이
기다리는 마음
애달픈 사연 토해놓고
기러기 떼 떠나가고
파아란 강심에
깃드는 강 노을
하아얀 모래밭
푸른 갈 숲을
끝없이 끝없이
가고픈 마음
외로운 초생 달
창가에 들면
멧새도 울음 멈춰
숲으로 드네
그토록 오랜 세월
고운 꿈 가꾸며
이 밤도 잔잔한 강마을
창가에 쉬네.
여강변에서 아내 선옥
가정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고향을 사랑하지 않는다. 고향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조국을 사랑하지 않는다. 이는 내가 스스로 내린 결론이요, 애국관의 정의다. 영월루(迎月樓)는 전설의 바위 마암(馬巖)위에 솟아있어 여주의 상징과도 같은 곳으로 공원으로 아름답게 조성되어 있었다.
여주시 상거동에는 250여개의 세계적 명품 아울렛들이 모여 있었고 년 5-6백만명의 국내외 쇼핑객들이 몰려온다는데 신세계와 미국 첼시가 50대 50의 지분으로 조성하였다고 한다.
여주(驪州)는 옛 지명의 이름이 고구려 장수왕 때에는 골내근현(骨內近縣)이었고, 마암 굴에서 두 말을 탄 현인이 솟아올라 하나는 여흥 민씨의 시조가 되었고 다른 한분은 여흥 이씨의 시조가 되었다하여 낙화암과 같은 바위에는 마암이라 크게 새겨져 있고 “두 말이 물가에서 솟아오르니 현 이름이 황려가 되었다.”(双馬雄起 出水涯 縣名從此 得黃驪)라 전한다.
그래서 여주는 황려 여흥 여강 여주의 여러 이름이 있다.
여주에는 청심루(淸心樓)라는 아름다운 누각이 있어 포은 정몽주, 다산 정약용, 목은 이색, 우암 송시열, 퇴계 이황, 류성룡, 김종직 등 4백여편의 시판이 걸려 있었다 전하며, 숫한 시인 묵객들이 찾아 시를 읊었고 성종. 중종, 숙종, 영조. 정조등 많은 임금들이 성군 세종영릉을 참배한 후 쉬어가기도 하였다. 지금을 소실되었으나 복원 운동이 한창이다.
청심루는 여주 팔경의 진수 이기도한데 서울의 낙천정. 세검정. 광주의 청풍루. 파주의 화석정. 청풍의 한벽루. 남원의 광한루. 제주의 관덕정과 함께 한국의 명루 반열에 올랐다.
또한 여주는 싸리산을 중심으로 양질의 고령토가 많이 매장되어 있어서 일찌기 경기 광주와 함께 이조백자의 근원지가 되었고, 일본. 경기 이천 등지로 전파된 곳으로 해마다 경기광주, 이천과 더불어 매 4년마다 세계 도자기 박람회가 열리고 있다. 최근에는 한국명 도자기의 생산 공장 행남 도자기 본사가 여주로 옮겨와서 성업을 이루고 있고, 전남 강진과 전북 부안의 청자와 함께 백자의 명산지로 6백여 개의 공장들이 학동을 중심으로 산재해 있어 한국 생활자기의 80프로를 이곳에서 생산하고 있다.
내 고향 여주에는 여강(남한강)에 3개의 큰 다리가 있는데 처음에 놓인 다리는 폭이 좁아서 지금을 인도로 사용하고 있는데 이를 낭만적으로 여강 연인교라 부르고 새로 신축한 강다리는 여주대교, 그리고 세종 영릉 쪽에 신설된 한강에서 제일 긴 다리를 세종대교라고 부른다.
여강(驪江) 연인교(戀人橋) 정용진
여강(驪江)을 가로질러
절경 영월루(迎月樓)와
명찰 신륵사(神勒寺)를 잇는
옛, 여주대교
연인의 다리.
발아래는
명주비단자락
푸른 물굽이가 넘실거리고
밤마다
아련한 달빛이
박꽃으로 피어
내 님의 맑고 고운 옷자락.
너와 나는
이 연인의 다리를
손 마주잡고 거닐면서
사랑을 싹틔우고
꽃을 피운다.
오늘도
애틋한 그리움이
외등 불빛으로 번져
내 고향
여강의 가슴속에
한 폭의 그림으로 정겨운데
해맑게 씻기운 은 모랫벌 위에
사랑의 발자국을 나란히
추억으로 아로새기자.
여주시 천송리 남한강변에는 절벽위에는 신라시대 원효대사가 창건한 명찰 신륵사(神勒寺)가 있는데 나옹화상(懶翁和尙)이 입적하신 사찰로 유명하다. 유유히 흐르는 강변에는 그의 호를 따서 강월헌(江月軒)이라는 8각정 누각이 암벽위에 서있다.
봉미산 신륵사 앞 나루를 조포(潮浦)나루라 하는데 예부터 마포, 광진포, 이포와 더불어 한강의 4대 나루라 전해온다.
나의 대학시절 조포나루에서
조포(潮浦)나루 정용진
지존(至尊)의 선비가
천한 뱃사공이 젓는
낡은 목선(木船)에
옥체(玉體)를 맡기고
청강(淸江)의 물살을 갈랐으리라.
인간의 정(情)이란
주고받을 수 록
소리 없는 강물처럼
저리 깊어만가는 것인데
사농공상(士農工商) 계층을
권력의 잣대로 그어놓고
가난한 백성들을
함부로 부리던 그들은
지금, 다 어디로 갔는가?
조포(潮浦)나루에서
서러운 세월 속에
소리 없이 낡아가는 목선(木船)은
사공의 노 젓는 소리가
옛 임의 숨결로 그립다.
산 노을이 붉은 이 저녁
신륵사 천년의 종소리가
여강(驪江)물결에 티 없이 번지는데
오늘도
마암(馬巖)을 굽이돌며
한양(漢陽)을 향해
도도히 흘러가는
저문 강물소리가
나그네 가슴을 두드린다.
다시 고향을 그리는 시 한수를 감상해보자.
강나루 정용진
노을 붉어
하루가 저무는
강나루.
계곡을 따라 흐르는 종소리
종소리를 따라 내리는 강물
천 만길 벼랑을
구르는 아픔보다
더한 진통의 밤은
침묵의 산을 낳고
청명한 공간에서 삶을 부르면
티 없이 메아리 져
되돌아오는 언덕에서
온갖 번뇌로 젖어온
그 마음은
바람을 따라 흐르는 종소리
종소리를 따라 내리는 강물
가오는 세월도
맴돌아 씻기는 길 역에서면
님의 노래는
애달픈 물결
오늘도
머 언 꿈길을 밀어가는
강나루.
오래전 시인인 정용주 막내 동생과 함께 만나 지난밤에 회포를 풀고 원효대사가 창건한 신라 천년의 명찰 신륵사(神勒寺)를 다시 찾았다.
이곳은 나의 어린 시절의 아름다운 추억이 가득히 서려있는 곳이다.
신륵사(神勒寺)
여주 신륵사 전경
여주 신륵사(神勒寺)는 경기도 여주시 봉미산에 위치한 대한불교조계종 소속의 사찰로서 신라 시대 때 창건되었다고 여겨진다.
일반적으로 한국의 절은 산 속에 짓는 경우가 많은데 반하여 신륵사는 남한강이 보이는 강변에 세워져 있다. 조계종 제2교구 본사 용주사의 말사이다.
신라 때 처음 지어진 것으로 전해진다. 전설에 따르면 신라 진평왕 때 원효가 아홉 마리의 용이 승천한 연못을 메우고 창건했다. "신륵(神勒)"이라는 절 이름의 유래로는 세 가지 이야기가 있다. 첫 번째는 신이한 미륵(彌勒)에서 유래했다는 이야기이다.[1] 두 번째와 세 번째는 신륵사의 륵(勒)자는 말을 다스린다는 뜻이 있다는 것과 관련이 있다. 두 번째는 고려 우왕 때 왕사 나옹(王寺懶翁)이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는 용마를 신비한 굴레를 씌워 얌전하게 다스렸다는 이야기이다. 세 번째는 고려 고종 때 건너 마을에 사나운 용마가 자주 나타나 사람들을 괴롭히자 승려 인당(印塘)이 나타나 고삐를 잡아채자 순해졌다는 이야기이다. 설화에 나타난 신력과 굴레에서 신륵(神勒)이라는 이름이 나왔다고 전해진다.
신륵사에서는 고려의 고승인 나옹이 머물러 절이 크게 확장되었다. 나옹은 1376년(우왕 2)에 신륵사에서 사망하여 이색이 이곳에 대장각을 짓고 《대장경》을 봉안했다. 지금은 나옹과 나옹의 제자인 무학의 영정이 봉안되어 있다. 1379년(우왕 5)에 각신(覺信)·각주(覺珠) 등이 이 절을 크게 짓고, 나옹의 부도(浮屠)를 세웠다.
조선 시대에는 1440년(세종 22)에 중수하였으며, 1473년(성종 4)에 세종의 능인 영릉을 경기 광주에서여주로 이장하면서 영릉의 원찰로 신륵사가 지정되었다. 이때 국가에서 확장하여 크게 중수되어 사찰명은 보은사(報恩寺)로 바뀌었다. 1671년(현종 12)에는 계헌(戒軒), 1702년(숙종 28)에는 위학(偉學) 천심(天心) 등이 중수하였다.[1] 원찰로서의 의미가 약해진 뒤 신륵사라는 이름으로 되돌아왔다.
지금은국민관광지로 지정되어 있어서 경내가 잘 정비 되었고 대웅전인 극락보전은 천년 만에 완전 해체 복원 되었고, 고려시대 나옹화상(懶翁和尙)이 거처한 절로 여강의에 고색이 창연하게 서있는데 사명대사가 지팡이를 꽂았다는 천연 기념물 은행나무가 우람하게 서있고 벽탑(전탑)이 너무나 아름답다. 신륵사는 나옹선사께서 거하시다 입적하신 명찰로 유명하다.
나옹선사의 명시를 여기에 옮겨 놓는다.
靑山兮要我 - 청산은 나를 보고 나옹선사 (懶翁禪師)靑山兮要我以無語 (청산혜요아이무어) 청산은 나를 보고 말없이 살라하고蒼空兮要我以無垢 (창공혜요아이무구) 창공은 나를 보고 티 없이 살라하네 聊無愛而無憎兮 (료무애이무증혜) 사랑도 벗어놓고 미움도 벗어놓고如水如風而終我 (여수여풍이종아) 물같이 바람같이 살다가 가라하네 나옹선사 (懶翁禪師 1320 ~ 1376)
고려 말기의 고승으로 휘는 혜근(慧勤), 호는 나옹(懶翁), 본 이름은 원혜(元慧)이다. 속성은 아(牙)씨인데 고려 말 예주부(지금의 경북 영덕군 창수면 갈천리)에서출생 하였다. 그는 원나라 유학을 했고 인도의 고승 지공스님의 제자로서 인도불교를 한국불교로 승화시킨 역사적 인물로서 조선태조(朝鮮太祖)의 왕사였던 무학대사(無學大師)의 스승 이었다,
경기도 양주군 회암사 절터가 있는데 우리나라 최대의 사찰로 중창했고, 그의 출생지 부근 경북 영덕군 창수면 운서산(雲捿山) (해발520m)기슭에 장육 사(莊陸寺)를 창건 하고 오랫동안 머물며 참선했다고 전하며, 나옹선사가 입적한 뒤에는 많은 승려들이 모여들어 수도한 수도 사찰로 유명했다 한다.
회암사 터의 뒤쪽에는 나옹, 지공, 무학, 세분의 부도와 비석이 현존하고 있는데, 비석은 조선왕조 유학사상의 지주였던 목은 이색이 찬하여 지금도 비문이 남아있다. 장륙사(莊陸寺)에는 고려 공민왕 때 건물과 건물 내벽에 그의 초상화가 남아있다. 그가 입적한 남한강변 여주 신륵사에도 사리를 봉안한 부도와 비문이 남아 있다. 그의 가송집과 비문을 한글로 해석한 서적으로 나옹록이 있고 연구서도 있다. 이 시의 작자에 대해서는 나옹선사 이외에 중국 당나라의 寒山스님이라는 설과작자 미상이라는 설이 있다.
신륵사 앞 강월헌 CNN 이 뽑은 한국 50경의 하나
신륵사(神勒寺) 정용진
외길 향한
구도의 염원이
얼마나 깊고 멀기에
여강(驪江)은
봉미산(鳳尾山) 자락을
품에 안고
밤과 낮을
여울져 흐르는가.
대 소리 같은
신륵사 종소리가
차안(此岸)에 일어
피안(被岸)에 달하면
원효(元曉), 나옹(懶翁), 무학(舞鶴)스님의
설법이
중생의 낡고 빈 가슴을
자등명(自燈明)을 채우고
법등명(法燈明)으로 밝히네.
인연(人緣)이 다하면
만남과 헤어짐도
무상(無常)한
구름처럼
떠나가는 것.
오늘도
사바(娑婆)의 세계를 향해
멀어져 가는
저문 강물소리
여래(如來)의 마음 같은
신륵사의 종소리가
노을 속에 번지네.
이조 중종시 경기 광주에서 세종릉을 여주로 천장하고 여주는 현에서 주로 승격하여 목사가 부임하였고 신륵사를 세종대왕의 은덕을 기린다는 뜻으로 크게 중창하고 보은사(報恩寺)로 개칭하였었다.
입구에는 솟을삼문 ‘신륵사 관광지문’이 웅장하게 솟아 있는데 주위에는 여주 박물관이 있고 여기에는 여주 출신의 문인 목은(牧隱) 이색(李穡), 백운거사(白雲居士) 이규보(李奎報), 묵사(黙思) 류주현(柳周鉉)의 문학비가 서있다.
신륵사 전탑(神勒寺 塼塔) 정용진
무슨 염원이 그리도 많아
수백 층의 전석(塼石)을
만년 암반위에
저리도 층층이 쌓아 올렸는가.
여강(驪江) 푸른 물결은
소리 높여 굽이치며
주야로 흐르건만
거친 바람소리에도
천년 함묵(緘黙)
전탑은 말이 없구나.
오늘도
신륵사 종소리는
세월 속에 낡아가고
맴도는 이들의 발걸음엔
시름이 가득한데
검은 이끼 가득 덮인
신륵사 전탑은 창연히 서있다.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노스님의 독경소리만
중생들의 가슴을 두드리네.
그 간에 경주의 첨성대와 같은 재질의 전석으로 쌓은 신륵사의 보물 다층전탑이 세월의 흐름 속에 말없이 창연히 서있다.
이어 민족의 성현 한글창제의 명군 세종대왕의 능침 영릉(英(陵)과 병자호란으로 고통을 겪고 왕위에 오른 효종대왕의 녕능(寧陵)을 참배 하였다.
여주에는 서희장군의 묘와, 노론의 영수요 효종의 스승이었던 우암 송시열의 사당 대로사(大老詞)와 북벌계획의 명장 이완대장의 묘가 있다. 이는 사후에도 효종대왕께서 함께하기를 바라는 효종 염원의 결정이었다.
여주는 정감록이나 택리지에서 이중환이 명당으로 일컸는 곳이다. 대동강변의 평양을 비롯하여, 소양강변의 춘천. 여강(남한강)변의 여주. 낙동강변의 청도가 천하 길지로 알려져 있다.
그래서 시인 묵객들이 많이 나왔고 왕비가 무려 9명이나 탄생하였다.
지금의 인구가 11만 명인데 그 당시는 1천여 명이나 되었을 법하다.
여주가 배출한 태후와 왕비를 보면
고려 고종의 원비 순경태후(順敬)를 시작으로
이조 태종의비 원경왕후(元敬) (세종의 모친).
숙종의 계비 인현왕후(仁顯).
영조의 계비 정순왕후(貞純)
순조의비 순원 숙황후(純元).
헌종의비 효현왕후(孝顯).
철종의비 철인왕후(哲仁).
고종의비 명성황후(明成皇后).
순종의 비 명효황후(明孝)가 나셨다.
그리고 순조의 생모 현목수빈 박씨(顯穆). 고종의 어머니 부대부인(府大) 민씨가 탄생한 곳이다. 여주는 산수의 아름다움과 쌀의 명산지로 땅콩과 마의 주산단지로 물이 맑아 명인이 많이 배출된 천하 명당 길지임이 분명하지 않은가.
효종대왕은 인조의 둘째 아드님으로서 광해군 11년(1619년) 5월 22일 한성부 중부 경행방에서 탄생하였으며 휘가 호(淏)이고 자(字)는 정연(靜淵), 호(號)가 죽오(竹梧)이며 어머니는 인열왕후 한씨이다.
인조 4년(1626년)에 봉림대군(鳳林大君)에 봉하여졌으며 병자호란 후인 인조 15년(1637년) 왕세자인 소현세자(昭顯世子)와 함께 청의 심양에 인질로 있다가 인조 23년(1645년) 환국하였으며, 이 해 4월 26일 형이며 왕세자인 소현세자가 병사함에 9월 17일 왕세자로 책봉되었으며 인조 27년(1649년) 5월 인조가 승하함에 이 해 5월 13일 창덕궁 인정문에서 즉위하였다. 효종은 대군시절 청의 심양에 8년간이나 볼모로 있으면서 고초를 겪었고 부왕 인조의 삼전도 치욕을 설욕하고자 북벌계획을 세우고 이를 추진하였으나 재정의 빈약과 청의 강성으로 북벌을 실행하지 못하였고 임진 정유왜란과 병자호란으로 피폐한 민생의 안정을 위하여 충청도와 전라도 근해지역에 대동법을 확대 실시하였으며 필생의 간원이던 북벌을 실행치 못한 채 효종 10년(1659년) 5월 4일 창덕궁 대조전에서 승하하니 재위 10년이었고 춘추 41세였다.
현종 즉위 하던 해(1659년) 5월 11일 묘호를 효종이라 하고 릉호를 녕릉(寧陵)이라 하였으며, 이 해 10월 29일 양주 건원릉 서쪽 산줄기에 예장하였다. 녕릉 석물에 틈이 생겨 릉침의 누수가 우려되어 릉을 옮기자는 여론에 따라 현종 14년(1673년) 10월 7일 여주 영릉 동쪽 언덕에 정북에서 정남향으로 릉을 옮겼으며, 릉을 옮기기 앞서 릉의 구역 안의 민가와 무덤을 모두 옮기게 하였다. 여주는 자연경관이 뛰어나 8경이 있는데 다음과 같다.
여주(驪州八景)
신륵종성(神勒鐘聲) 신륵사에서 강산에 울려 퍼지는 종소리
마암어등(馬巖漁燈) 마암의 저녁 고잡이의 은은한 등불
학동모연(鶴洞暮煉) 강건너 학동의 저녁연기 모습(도자기. 혹은 밥 짓는)
연탄귀범(燕灘歸帆) 강여울에 돛단배가 귀가하는 모슴
양도낙안(洋島落雁) 양섬에 기러기떼 내리는 모습
팔수장림(八樹長林) 오학리 강변에 울창한 숲이 강물에 비치는 전경
이릉두견(二陵杜鵑) 영릉과 녕능에서 두견새 우는소리
파사과우(波娑過雨) 파사성에 여름철 소나기 스치는 광경
대로사((大老祠.江漢祠)
□ 소재지 : 여주읍 하리 200-1 □ 지정사항 :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20호(조선조)
1785년(정조 9) 영·녕릉을 참배하러 여주에 행차한 정조가, 숙종대의 대학자이자 정치가인 우암(尤菴) 송시열(宋時烈, 1607~1689)을 제향하기 위해, 수행한 김양행(金亮行, ?~1779)에게 대로사(大老祠)를 짓게 하고 곧 바로 사액을 내렸다. 대로사라는 명칭은 정조가 친히 지은 것으로 “덕망이 높은 노인”이란 뜻이며 『맹자』에 그 용례가 보인다. 또 실록에는 정조가 신하들에게 말하기를 “대로(大老)란 두 글자는 다만 예부터 천하대로(天下大老)란 글이 있었을 뿐만 아니라, 일찍이 선정(先正 : 송시열)의 문집 가운데에 뛰어난 구절을 모아 편집하면서 그 책의 제명(題名)을 『대로일고(大老逸稿)』라 하였으니, 대체로 이에서 따온 것이다.”라는 기사가 있어 대로사라는 명칭이 붙게 된 연유를 알 수 있다. 송시열은 살아생전 여주에 머물 때마다 대로사 자리에서 효종의 능인 녕릉을 바라보고 비통해 하였으며, 후진들에게는 북벌의 대의를 주장했다고 한다.
대로사는 여주 시내의 강변에 위치하고 있다. 지금의 대로사는 크게 추양재(秋陽齋)와 대로사비각, 대로서원 강당, 그리고 대로사 본채의 건물로 구성되어있다. 추양재는 관리실로 사용하기 위해 최근에 신축한 건물이며, 대로사비각에는 1787년(정조 11) 송시열이 태어난 뒤 세 번째 맞는 회갑년을 기념하여 평소 송시열을 존숭하던 정조가 친히 비문을 짓고 쓴 비석을 안치하였다. 장대한 비석 우측 상단에 “어필(御筆)”이라 표기되어 있다.
대로서원 강당은 팔작지붕에 정면 6칸 측면 4칸 규모의 건물이다. 처마 밑에는 정조대 명필중의 한사람인 도천(道川) 황운조(黃運祚, 1730~ ?) 가 휘호한 “대로서원(大老書院)” 현판이 걸려있다. 또 내부에는 경산(京山) 이한진(李漢鎭, 1732~ ?)의 전서로 된 “첨백당(瞻柏堂)”과 황운조가 행서로 활달하게 쓴 “강한루(江漢樓)” 편액이 있다.
이외에도 덕수(德水) 이기진(李箕鎭, 1687~1755)이 지은 「강당상량문(講堂上樑文)」과 1785년(정조 9)에 원임 이조판서 서유린(徐有隣, 1738~1802)이 짓고 쓴 「대로사상량문(大老祠上樑文)」도 게시되어있어 대로사의 오랜 역사를 대변해 주고 있다. 이어 강당 우측의 장린문(長隣門)을 들어서면 대로사 본채가 나타난다. 녕릉이 위치한 서쪽을 바라보게 세웠으며, 내부에는 송시열의 입상(立像)으로 된 복제본 초상화가 걸려있다. 사당의 정면에는 1785년(정조 9) 사액받을 때 정조의 명을 받들어 규장각제학(奎章閣提學) 김종수(金鍾秀, 1728~1799)가 써서 내려준 “대로사(大老祠)” 현판이 있다. 이후 경기지역 노론의 주요한 거점 역할을 하며 약 백여 년 간 유지되다가 1871년(고종 8) 흥선대원군이 전국의 서원과 사우를 크게 훼철할 때 사라질 운명에 처했으나 다행히 그 대상에서 제외되었다. 그러나 명칭만은 강한사(江漢祠)로 개명하였는데, 이때 원임대제학(原任大提學) 박규수(朴珪壽, 1807~1876)가 왕명을 받들어 쓴 “강한사” 현판이 현재도 사당의 뒤쪽처마에 달려있다. ‘강한(江漢)’은 중국 양자강과 한수(漢水)의 인근지역을 일컫는 것으로, 강한사가 위치한 여주가 이들 지방처럼 풍광이 아름답다하여 붙여진 명칭이다.
대유 송시열(宋時烈)은 효종대왕이 북벌을 꾀할 당시 북벌을 논의하던 가장 신임 받는 신하였다. 함께 북벌을 논의하던 이완대장대장묘가 효종대왕을 뵈옵듯 효종대왕릉을 향해 위치해 있듯이, 이곳 대로사 서원이 효종대왕능릉을 향하여 바라보고 있다. 이완대장 묘도 이와 같이 서향이다. 이는 효종의 원에 의하여 충남 은진 송씨 송시열의 사당 대로사와 이완대장 묘가 여주에 있게 된 연유라 전한다.
여주는 본래가 문향인지라 교리의 향교. 여주의 (대로사. 강한사) 세조시 건립된 가남 본도리 삼우당 문익점 선생의 매산서원. 1686년 숙종의 사액을 받고 설립된 고산 이존오. 문충복. 희봉 문광규의 고산서원. 등의 귀한 서원들이 많이 산재하여 있고, 특히 대로사(강한사)는 대원군 당시 회철되지 아니한 명 서원의 하나다.
고려조의 서희장군 묘. 북벌계획의 명장 이완대장의 묘등 숱한 명인들이 잠들어 있고 성역화 된 면성황후 생가. 신라 파사왕이 고려에 침공을 막으려 쌓은 이포 부근의 파사산성, 근래에 목아 박천수 선생이 설립한 목아박물관 도자기의 명소 수봉 도자기 박물관. 여주 박물관. 잠사 박물관. 사진 박물관. 여선박물관 등이 산재하여 있고 순복음 대순진리교회 본부도 있다.
더구나 한국 근대사의 권세 명문가 안동김씨. 풍양조,에 이어 .세도가인 여흥민씨의 본향이고 여흥 이씨의 본관이 기도 하다.
옜부터 강산이 수려하고 명산대천인 지방에는 8경이 있었다. 여주도 예외는 아니다. 한국에는 관동팔경. 단양팔경 여주팔경 등이 그 대표적이다.
영월루(迎月樓)
여주 영월루 전경
여주시에서 신륵사로 가는 길에서 여주대교 조금 못미쳐 우측고대위에 푸른 숲으로 둘러싸인 고풍의 한 누각이 보이는데 이것이 영월루이다. 익공의 형태나 가구(架構)로 보아 18세기 말경의 건물로 추정된다. 영월루는 원래 여주시청의 정문이었는데 1925년경 당시 신현태(申鉉泰)군수가 파손 될 운명에 처해있는 이 누각을 현 위치에 다시 세웠다고 한다. 영월루 입구에는 비석거리가 있고 그 위쪽에는 1958년에 이건된 창리 삼층석탑(보물 제91호)과 하리 삼층석탑(보물 제92호) 이 있다.
상층 누마루에 올라보면 숲속에 파묻힌 유명한 절 신륵사의 대가람이 한강변에 바라보이고, 학동모연·팔수장림·마암어등(馬巖漁燈) 등의 여주팔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누각 바로 아래에는 커다란 괴암이 절벽을 이루는데 바위 위에는 힘있는 필치로 씌어진 '마암(馬巖)'이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다. 이 암혈에서 황마(黃馬)·여마(驪馬)가 승천하는 것을 본 사람이 있어 이것이 구전되어 여주군명을 황려(黃驪)라 칭했다는 것이다. 이 황려의 군명은 후에 여흥이라했고 그것이 다시 지금의 여주로 변한 것인데 이 「여(驪)」자는 황마승천설에서 유래했다는 전설이 있다. 영월루는 마암(馬巖) 절벽위에 서있는데 마치 백마강의 부여 낙화암(洛花巖)과 흡사하다.
해질 무렵 여강(驪江)에 배를 대다.(서산대사:1520~1604)
落雁下長沙 낙안이 장사에 내리고樓中人起舞 누 가운데 사람이 춤을 추네淸秋一葉飛 청추에 한 잎 낙엽이 날리는데
客宿西江雨 객숙 서강엔 비가 내리네
마암(馬巖)에 올라서 정용진
청산을 우러르며
벽사(壁寺)를 휘감아
마암으로 흘러드는
청심의 여강(驪江).
무구한 세월의
꿈이 서린
천인단애의 바윗등엔
초연히 웃고 섰는
진달래 꽃 등걸
머언데선 구름이 일고
가까이선 범종소리
청강에 파문지는데
발아랜
가없는 은 모랫벌
그리던 옛님도
학(鶴)으로 되돌아와
강심(江心)을 거니는데
어제의 동안(童顔)은 어디두고
백발서린 모습으로
장승처럼 예섰는가.
마암에 뜨는 달이
영월루에 깃을 펴고
이릉(二陵)에 걸린 달이
향촌에 가득한데
내 마음도
물빛으로 젖어들어
파아란 가슴
하늘이 고여오네.
신륵사(神勒寺)를 굽이돌아
마암을 우러르고
오늘도
소리 없이 저어가는
청심의 여강(驪江). * (이릉은 세종 효종릉)
여주향교(驪州鄕校)
여주향교는 창건연대를 알 수 없지만,고려말 이곡(李穀;1298∼1351)이 여주시 상리(上里)인 마암(馬巖) 근처에 창건하였다고 한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으로 소실된 후, 1651년(숙종 2) 여주읍 홍문리의 잣나무고개에 재건하였으나, 부락에 재앙이 자주 발생하고 풍수지리학상으로 불길하다고 하여 숙종 11년(1685)에 현 위치로 이건(移建)하였으며, 이건 후 여러 차례 중수(重修)와 보수(補修)를 하였다.
1977년에 대성전(大成殿)과 명륜당(明倫堂)을 중수하였고, 1980년에는 동무(東?)와 서무(西?)를 복원하였다. 1981년 교직사(校直舍)를 신축하고 외삼문(外三門)에 단청(丹靑)을 하였으며, 1986년에 중수하여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현존하는 건물로는 대성전·명륜당·동재·내삼문·동무·서무·홍살문등이 있다. 향교의 배치 형식은 정면 낮은 곳에 강학 공간인 명륜당이 있고, 후면 높은 곳에 문묘(文廟) 공간인 대성전이 있는 전학후묘(前學後廟)의 구조로 되어 있다. 대성전은 정면 3칸·측면 3칸 규모의 방풍판이 설치된 익공계(翼工系) 맞배지붕 건물이며, 내부 앞쪽의 기둥열로 미루어 전면에 개방된 퇴칸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동무와 서무는 정면 3칸·측면 1칸의 익공계 맞배지붕 건물이며, 익공의 형태와 가구(架構) 수법으로 볼 때 대성전과 함께 18세기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명륜당은 학생들이 모여 공부하는 강당으로 정면 5칸·측면 2칸 규모의 팔작지붕 건물이며, 평면은 凹자형으로 중앙의 4칸 대청 좌우에 3칸의 온돌방이 있다. 기숙사인 동재는 정면 4칸·측면 1칸 규모의 맞배지붕 건물이며, 내삼문은 솟을대문으로 맞배지붕이고 1칸씩이다. 이 향교는 조선시대에 국가로부터 토지와 전적·노비 등을 지급받아 교관 1명이 정원 30명의 교생을 가르쳤으나, 갑오개혁 이후 신학제 실시에 따라 교육적 기능은 없어지게 되었다. 현재 대성전에 5성(五聖)·송조2현(宋朝二賢)·신라2현(新羅二賢)·고려2현(高麗二賢)을 배향하고, 동무와 서무에 우리 나라 14현(十四賢)을 배향하고 있으며, 매년 음력 2월과 8월 상정일(上丁日)에 석전(釋奠)을 봉행하고 있다.
매산서원(梅山書院)
매산서원(梅山)) (지방문화재 10호)
매산서원은 삼우당(三憂堂) 문익점(文益漸, 1329~1398)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세조 때에 경상남도 거창과 산청 지방 유림의 공의(公議)로 건립되었다. 그 후 목은 이색(1328~1396)과의 친분을 감안하여 추향하고 매산(梅山)이라는 이름으로 사액받았다. 그러다가 병자호란 때 후손인 문겸(文謙)이 지금의 위치로 이건하여 춘추로 제향해 왔으나,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따라 1868년(고종 5) 훼철되었다.
이후 삼우당의 후손으로 여주경찰서장에 취임한 문광규(文光圭)가 복원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1978년에 한차례 더 보수하였고 1987년에는 서원내의 사당을 헐고 다시 지었다. 번도리의 번머리마을 내에 있는 홍살문을 지나면 서원의 정문인 외삼문이 나타난다. 경내의 좌우에는 유생들이 기거하던 동·서재가 세워져 있고 정면에는 공부하던 강당이 자리 잡고 있다. 강당 내에는 「매산서원봉건기(梅山書院奉建記)」를 비롯하여 「충선공별묘사기문(忠宣公別廟祠記文」과 “매산서원(梅山書院)” 현판이 걸려있어서 서원의 연혁을 살펴볼 수 있다. 강당을 지나 뒤쪽의 계단을 오르면 내삼문이 있고 담장 시설 안에 사당이 위치한다. 처마에 “매산사(梅山祠)”란 현판이 걸린 사당은 맞배지붕에 방풍판(防風板)을 달고 한식골기와를 얹었다. 정면 3칸의 규모를 갖추고 있으며, 내부에 문익점과 이색의 위패를 봉안하였다. 사당의 마당에는 보호수로 지정된 수령 150년의 향나무가 드리워져 있어, 서원의 기품을 더해주고 있다.
기천서원(沂川書院)
기천서원은 여주시 마암에 마암서원(馬岩書院)으로 창건하였다.
임진왜란으로 인하여 소실(燒失)되었다가 1608년(선조 41)에 현 위치인 금사면 이포리로 이건(移建)하여 복원하였으며, 1625년(인조 3)에 사액(賜額)되었면서 기천서원으로 개칭하였다.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1820∼1898)의 서원철폐령으로 1871년(고종 8)훼철(毁撤)되었으며, 1936년에 모현사(慕賢祠)로 재건하였다.
기
기천서원 전경
1978년에 복원하였고, 1987년에 사우(祠宇)를 신축하였다. 현존하는 경내의 건물은 3칸의 모현사가 있으며, 50m 떨어진 곳에 재실(齋室)이 있다.
창건 당시에는 김안국(金安國;1478∼1543)의 위패를 봉안하였는데, 1611년(광해군 3)에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1491∼1553)과 홍인우(洪仁祐;1515∼1554)를 추향(追享)하였고, 1661년(현종 2)에 정엽(鄭曄)·이원익(李元翼)·홍명구(洪命耉)를 추향하였으며,708년(숙종 34)에 이식(李植)을 추향하고 그 뒤 홍명하(洪命夏)를 추향하였다. 매년 음력 2월과 8월 중정일(中丁日)에 향사를 지내고 있다.
기천서원은 모재 김안국, 회재 이언적, 지재 홍인우, 오리 이원익, 수몽 정엽, 택
당 이식, 나재 홍명구, 기천 홍명하 등 여덟 명의 위패를 모신 곳이다. 기천서원은 선조 13년(1580)에 처음 지었으며 인조 3년(1625) 왕으로부터 ‘기
천’이라는 이름으로 사액서원으로 승격됐다.
그 후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철거되었다가 1937년 모현사가 다시 지어
지고 1978년 사당을 복원했으며 최근 부속 건물들도 복원해 옛 모습을 되찾았다. 서원터에는 사당과 동재 및 서재가 있고 서원 동쪽 언덕에 모현사가 있다.
사당은 앞면 3칸․옆면 2칸 규모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자 모양인 팔작지붕이다. 기천서원지(沂川書院址)는 1987년 2월 12일 문화재자료 제75호로 지정됐으며, 남양홍씨종친회가 관리하고 있다.
고달사(高達寺) 址
고달사지 부도(국보4호)
여주시 북내면 상교리에 있는 절 고달사에는 경기도 유일의 원종선사 다비
탑이 있고 발굴이 한창이다. 대찰의 풍모다 선연하다. (高達寺.고달원이라고도
함)하는데 이는 양주 도봉원과 함께 고려 왕조의 비호를 받는 3대 사찰로 유명하였다고 전한다.
또 여주에는 고려 시대의 명장 서희장군 묘가 있고 병자호란으로 주화파 최
명길 등은 제외하고 주전파 홍익한 오달제 윤집 삼학사와 “삼각산아 잘 있거
라 한강수야 다시보자 세월이 하수살하니 올동말동 하여라.”시를 남기고 중국
으로 잡혀간 오상헌과 함께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이 청국에 인질로 잡혀갔었고
그 후 소현세자는 병으로 죽고 봉림대군이 세자로 책봉되어 효종이 되었는데
이완대장과 절치부심 북벌을 계획하다가 국권이 불길하여 두분이 다 일찍 세
상을 떠나시니 효종이 원하여 스승인 우암 송시열 선생과 이완대장은 죽어서
도 내 곁이 있게 하여 달라 원하여 송시열 사당은 남한강변에 대로사 서원을
짓고 봉안하고 이완대장을 상거리에 장례하니 두분의 사원과 묘의 방향이 세
종대왕 옆에 서 쉬시는 효종의 묘를 향하였으니 이는 결코 우연이 아니다. 그
으기 당당하여 수십 곳의 서원을 철폐하여 유림을 괴롭혔다.
청심루터[淸心樓址]
□ 소재지 : 여주시 창동 여주초등학교 교정□ 시 대 : 고려
소실되기 전 청심루의 모습
淸心樓(청심루) - 鄭夢周(정몽주)
<在驪州(재여주)> <圃隱集(포은집)>
煙雨涳溕滿一江(연우공몽만일강)
가랑비가 부슬부슬 온 강을 채우니,
樓中宿客夜開窓(누중숙객야객창)
정자에 든 나그네 자다 말고 창을 열어보네.
明朝上馬衝泥去(명조상마충니거)
내일 아침 말을 타고 진흙 밟고 갈 적에,
回首蒼波白鳥雙(회수창파백조쌍)
머리 돌려 창파 보면 흰 갈매기 쌍쌍이리.
청심루는 창동에 있는 여주초등학교 건물 바로 뒤편에 있었던 누정으로, 여주 관
아의 객사 북쪽에 있는 부속 건물이었다. 해방 전까지도 관상목(觀賞木)이 많이
있어 고색창연한 옛 모습을 간직하고 있었다하나 1945년 8월 22일 군수 관사의
화재로 인해 소실되고 지금은 터만 남아 있다. 그 터에 1987년 12월 26일 경기
도에서 “청심루터” 표석을 세웠다.
여주는 경관이 아름다워 일찍부터 강변을 따라 여러 곳에 누정이 세워졌다. 그중
에서 여주 관아의 객사였던 청심루가 가장 유명했다. 청심루에서 바라보는 신륵사
의 동대(東臺, 다층전탑)가 아득히 보이고 서쪽으로 영릉의 울창한 송림과 강 아
래로 오고가는 돛단배들이 그림처럼 전개되는 등 ‘여주팔경(驪州八景)’의 경관
이 매우 뛰어났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로부터 많은 시인묵객들이 유람을 하며 글
을 남겼는데, 한때 목은 이색(1328~1396), 포은 정몽주(1337~1392)를 비롯한
약 40여 명의 시판(詩板)이 걸려 있었다고 한다.
고려시대부터 있었던 청심루는 1617년(광해군 9) 여주군수 김용(金涌)이 중건하
였다. 또한 숙종대왕 어제(御製)의 “독동국사(讀東國史) 감고려우정언이존오충절
(感高麗右正言李存吾忠節) 수작찬(遂作贊)”이 걸려 있었다. 이는 우암 송시열이
1682년(숙종 8) 여주로 내려와 머물 때 청심루에 올라 효종의 녕릉(寧陵)을 바라
보고 그리며 여러 편의 시를 지었던 인연과 연관이 있는 듯하다. 우암 송시열은
“청심루(淸心樓)”라고 현판을 새로 쓰고 걸어 놓았다.
여주에 능행하였던, 정조가 청심루에 나아가 관찰사 정창성(鄭昌聖)에게 명하여
크고 작은 모든 배를 정돈하여 대령하게 하고, 주변 언덕 위로는 각 영의 대장으
로 하여금 군사를 거느리고 진을 치게 한 뒤, 배 수백 척을 청심루 앞에 정돈하여
횃불을 올림과 동시에 각 영과 배에서 일제히 응하여 고악(鼓樂)을 울리게 하였는데, 이때 강을 둘러 구경하던 여주의 남녀노소가 만 명에 이를 만큼 장관이었다고
한다.
청심루에는 조두순(趙斗淳)이 1856년(철종 7) 여름에 쓴 「청심루기(淸心樓
記)」가 있었다. 또한 1869년(고종 6) 여주 부사 이인응(李寅應)이 여주 관아에 대
한 대대적인 중건을 시작하면서 퇴락한 청심루도 1870년 3월부터 수선하기 시작
하여 8월에 마쳤다. 중수를 마친 뒤 이인응은 「청심루중수기(淸心樓重修記)」를
써서 청심루에 걸었다.
여주의 청심루는 서울의 낙천정과 세검정, 광주의 청풍루, 파주의 화석정, 청풍의
한벽루, 남원의 광한루, 제주의 관덕정과 더불어 유명한 정자 가운데 하나로 시인
묵객들이 남한강을 지나다가 반드시 들러보는 명소였다.
청심루에 올라 제영을지은 시인묵객들은 이곡, 이색, 김구용, 정추, 정자후, 설문우, 도원흥, 김종직, 최숙정, 서거정, 한수, 김안국, 이황, 유성룡, 노수신, 송시열, 홍섬, 홍양호, 신광한, 권상하, 이병연, 이항로, 김좌근 등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
파사 산성(婆娑山城)
파사산성 모습
파사산성은 신라시대 파사왕 때 지어진 산성으로 임진왜란때 기존의 성을 보강하여 지금의 크기대로 지었다 합니다.해발 235m(여주군 설치 정상 이정표/영진 50000/1지도 표기 230.5m) 파사산 정상을 중심으로 5각형의 경사가 가파른 곳을 이용하여 삼국시대에 축성된 석성으로 전체 둘레 약 943m, 면적 52,165㎡(15,780평)이다.
삼국시대에 쌓은 부분과 조선시대에 다시 쌓은 부분이 구분될 정도로 축성기법에서 차이를 보이는 성으로 파사산 정상에 쌓은 포곡형의 석축산성이며 주변 지역은 모두 해발 30~40m의 낮은 평지여서 남한강의 상류와 하류지역을 한 눈에 볼 수 있는 곳으로 교통로를 장악하기 위한 매우 유리한 지역에 위치해 있다.
축성연대는 삼국시대임에는 분명하나 신라가 파사왕 2년에 쌓았다는 것은 신뢰성이 떨어진다. 그 이유는 파사왕 2년 당시에는 이곳이 신라의 영역에 속했다고 보기 어렵기 때문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여주의 서북쪽 40리에 있으며, 강에 인접해 있고 선조25년에 승장 의암이 고성을 수축하였는데 둘레가 일천일백보'라고 기록되어 있다.
한편 '선조실록'과 '서애집' 등의 기록에 의하면 서애 유성룡의 주도하에 임진왜란 때에 옛 성터에다 성곽을 수축하였음을 알수 있고, 선조28년(1595) 3월 비변사의 요청으로 승 '의암'을 도총섭으로 임명하여 1597년에 수축을 마치었다는 자세한 기록이 있으나, 수축연대에는 약간의 차이가 있다.
파사성 정상을 중심으로 능선을 따라 성벽 등이 비교적 많이 남아 있으며, 성벽 중 최고 높은 곳은 6.25m나 되나 낮은 곳은 1.4m 되는 곳도 있다.
천서리에 면한 동문지, 금사면 이포리에 면한 남문지에는 문앵을 세웠던 고주형초석 2기와 평주 초석이 남아 있고 동문지에는 옹성문지가 남아 있다.
기전문화재연구원의 발굴조사 결과 파사성은 내외협축으로 축성된 돌로 만든 성으로 암반층을 기반층으로 하여 다듬은 직사각형의 돌을 이용한 초축성벽과 부정형의 쪼개진 돌을 이용한 추축성벽이 있는데, 이는 여러 시기에 걸쳐 수축되어 오늘날의 구조를 갖춘 것으로 추정된다.
성내 구조물로는 동문에 성문을 보호하기 위한 ㄱ자형으로 구축된 옹성을 포함하여 치 3개소, 문지 2개소(동문과 남문), 우물지 1개소, 수구지 1개소 등이 있으며, 파사성이 신라의 한강 유역 진출시기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유적지로 판단할 수가 있다.
성벽조사중 발견된 삼국시대 유물은 대부분 신라의 유물로 추정되는 토기류였으며, 축성기법 또한 신라의 산성일 가능성이 높으나, 파사성의 위치가 강 언덕에 자리잡은 교통의 요지임을 감안할 때 백제에 의해 사용되었을 가능성도 전혀 배제할 수는 없는 것으로 보고 있다.
여주시에서는 파사산성의 성벽보수를 계획하고 1999년 시굴조사를 비롯하여 2008년까지 4차례 걸쳐 경기문화재단 부설 기전문화재연구원에서 발굴조사를 실시하였고, 2001년 까지 245m의 성벽을 복원하였다.
복원된 성벽 위로 올라가 보면 돌채움방식인 적심방법으로 축조된 것임을 알 수가 있다.
여강(驪江) 정용진
님은
명주 비단자락.
내 마을 인정을
살포시 두르고
굽어 도는
청실 강줄기
그리운 물결 소리
밤마다
애틋한 꿈을 싣고 와
은 모랫벌
조포(潮浦) 나루를 건너는
님은
아련한 달빛.
내 누님의
속마음 같은
명주 비단자락. * 여강은 여주 앞강 이름. 조포는 신륵사 앞 나루 이름
여행에는 난만과 시정(詩情)이 따른다.
그래서 엣 시인은 ‘네 영혼이 고독하거든 산으로 가라.’고 노래하였다.
하늘이 인간을 위하여 마련해준 천연의 유산, 우리 인간들은 항상 아끼고 사랑하면서 즐길 줄 알아야한다. 자연은 인간들의 영원한 스승이기 때문이다. 여행 속에서는 위대한 인물들의 아름다운 과거를 만나게 된다. 그것이 골 여행의 고귀한 열매다.
나는 인생을 살면서 우리 민족사에 위대한 인물들의 삶을 통하여 많은 것을 배워 내 인생을 풍요롭게 살찌우고 싶었다. 내가 진심으로 고개 숙여 존경과 경의를 표한 분들은 고려의 충신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 유적지 개성 선죽교에서, 여주 영릉(英陵) 세종전 세종대왕 어진 앞에서, 남해 한산도 충무공(忠武公) 이순신(李舜臣)장군 사당에서, 영월 김삿갓 시인 묘전에서, 안동 이황(이황) 이퇴계(李退溪)선생의 도산서원(陶山書院)에서, 강릉 오죽헌(烏竹軒) 신사임당(申師任堂) 사당에서, 남양주 다산(茶山) 정양용(丁若鏞) 산소에서, 서울 흥사단(興士團) 본부 앞 도산(島山) 안창호(安昌浩) 동상 앞에서, 상해 임시정부 백범(白凡) 김구(金九)선생 동상 앞에서, 연세대학 윤동주(尹東柱) 시인 시비 앞에서, 진심으로 엎드려 절하고, 고개 숙여 예의를 표하였다.
기회가 주어지면 우리 민족의 영산 백두산 등정과 만주 여순의 안중근(安重根)의사 옥사와, 만주 용정의 윤동주 시인의 생가를 방문하는 것이 나의 간절한 염원이다.
목아박물관(木芽博物館)
목아 박물관 전경 불교미술의 진수를 만날 수 있는 목아 불교박물관은 한국의 전통 목공예와 불교미술의 계승 발전을 위해 설립된 사립 전문 불교 박물관이다. 무형문화재 제108호(목조각장)인 박찬수 선생이 설립하였다.
1989년 2월 착공해 이듬해 전시관을 완공한 후 전통 공예관으로 개관한 뒤, 학예연구실·소반정사·야외전시관 등 부속건물을 조성하였다. 1993년 야외전시장에 미륵삼존대불을 점안하면서 정식 개관하였다.
박물관은 야외조각공원과 지하 1층, 지상 3층의 전시관으로 구성되어 있다. 전시관에는 불상, 불화, 불교 목공예품 등의 유물과 더불어 목아 박찬수 관장의 불교 목조각과 목공예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고, 야외 조각공원에는 미륵삼존대불, 비로자나불, 백의관음, 삼층석탑 등이 조화롭게 자리 잡고 있다.
설립자목아 박찬수(木芽 朴贊守 국가 중요무형문화재 제 108호 목조각장)
불교미술의 진수를 만날 수 있는 목아 불교박물관은 한국의 전통 목공예와 불교미술의 계승 발전을 위해 설립된 사립 전문 불교 박물관이다.
무형문화재 제108호(목조각장)인 박찬수 선생이 설립하였다.
1989년 2월 착공해 이듬해 전시관을 완공한 후 전통 공예관으로 개관한 뒤, 학예연구실·소반정사·야외전시관 등 부속건물을 조성하였다. 1993년 야외전시장에 미륵삼존대불을 점안하면서 정식 개관하였다.
세종대왕(世宗大王) 영릉(英陵)
세종대왕유적관리소는 유네스코 선정 세계문화유산 등재 및 사적 제195호로 지정된 조선 제4대 세종대왕 및 소헌왕후의 합장릉(영릉,英陵)과 제17대 효종대왕 및 인선왕후의 쌍릉(영릉, 寧陵)을 보존 관리하고 세종시대의 천문, 과학 유물 등을 지속적으로 복원·전시함으로써 대왕의 위업을 홍보하고, 선조들의 과학 기술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돕기우해 설립된 문화제청 소속 기관이다.
세종대왕 영릉 전경
경기도 여주시 능서면 영릉로 269-50(왕대리 신83-1)에 위치하고 있다.
영릉(英陵)은 조선 제4대 세종과 그 비 소헌왕후(昭憲王后)의 동봉이실합장릉이다. 조선왕릉 최초의 합장릉이다.
광주(廣州, 현 서울 서초구 내곡동) 헌릉(憲陵)에 있던 것을 1469년(예종 1년)에 이곳으로 이장하였다.
지세는 층층이 해와 달의 모습을 띠면서 봉황이 날개를 펴고 내려오는 형국이라, 최고의 명당자리라고 한다. 정문으로 들어서면 재실과 세종대왕 동상이 오른쪽에 서 있고, 왼쪽에는 세종대왕 기념관인 세종전이 있다. 세종전 안에는 집현전 학사도를 비롯한 여러 유물들이 대왕의 업적을 기리며 모작 혹은 진품으로 진열되어 있고, 세종전 밖의 잔디밭엔 해시계·자격루·관천대 등이 전시돼 있다.
봉문 앞에는 4개의 돌로 받친 혼유석 2개를 놓아 합장릉임을 표시했다. 봉분 둘레는 돌난간을 두르고 동자기둥에 십이지를 문자로 새겨 넣었다. 그 앞에 팔각으로 다듬어진 장명등과 능 앞으로 석상·석마·문인석·무인석을 배치했다. 정자각은 합장 봉분에 축이 맞추어진 배치이나, 홍살문의 위치가 틀어져 있어 참도는 꺾인 축형이 되었다.
현재의 홍살문은 후대에 옮겨진 듯하며 원래의 위치에 초석이 남아 있다. 또한 수복방과 수라간의 위치가 정자각 바로 옆까지 올라간 특수한 예에 속한다. 1977년 능역 성역화를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해마다 이곳에서 한글날을 전후하여 각종 행사가 열리며, 평소에도 찾는 이들이 많다.
매년 5월 15일(양력)에 세종대왕릉 정자각 일원에서 세종대왕탄신 숭모제전(崇慕祭奠;탄신일을 기념하여 올리는 제사)을 봉행하고 다양한 행사를 개최하고 있다.
영릉(英陵)에서 정용진
뜻이 높으시매
넓은 가슴에
어진 백성들의
애달픈 마음을 품으시고
문(文)이 깊으시매
나랏말씀(國之語音)을 창제하사
만백성들의
언로(言路)를 여셨네.
여기는
경기 땅. 여주 고을. 왕대마을
천년 노송들도
성덕을 기려
주야, 사시장철
고개 숙여 푸르른데
미물(微物)
멧새들도
천지 사방에서 몰려와
ㄱㄴㄷㄹ
ㅏㅑㅓㅕ
나랏 글을 익히네.
오늘도
임의 먼발치에서
미진(未盡)한 이 몸
훈민정음으로
시를 쓰는 기쁨이여. * 영릉은세종대왕 릉임
효종대왕(孝宗大王) 녕릉(寧陵)
효종대왕 녕릉(寧陵)은 조선 제17대 효종과 그 비 인선왕후(仁宣王后)의 무덤을 좌우로 나란히 하지 않고 아래·위로 만든 동원상하릉으로 쌍릉 형식을 취하고 있다.
구리(九里) 건원릉(建元陵) 부근에서 1673년(현종 14년)에 이곳으로 이장하였다.
정자각 뒤 봉분은 오른쪽이 왕비릉이고 왼쪽이 효종릉이다. 왕비릉엔 둘러쳐진 곡장이 없고 왕릉에는 곡장이 있다. 영릉은 다만 쌍릉이면서 앞뒤로 엇비슷하게 위치를 잡고 있어 지형과 상관없이 애당초 ‘나란히’ 놓이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그 밖의 석물들은 똑같이 갖춰져 있는데, 배치와 양식은 조선전기 '국조오례의'를 충실히 따르고 있다.
영릉의 재실은 조선왕릉 재실 중 기본형태가 가장 잘 남겨져 있어 보물 제1532호로 지정되어있다.[2] 또한 재실 안에 심어진 수령 300년의 회양목은 키가 크고 나무의 모양이 양호한 노거수로 평가되어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었다.
효종대왕 녕릉 전경
명성황후(明成皇后) 생가
명성황후생가는 조선 제26대 고종 황제의 비로 개화기에 뛰어난 외교력으로 자주성을 지키면서 개방과 개혁을 추진하시다 1895년 10월 8일 새벽 일본인에 의해 시해당하여 파란만장한 일생을 마쳤던 명성황후가 출생하여 8세까지 살던 집이다.
1687년(숙종 13년) 왕의 장인 민유중의 묘막(墓幕) 으로 건립되었는데 당시 건물로서 남아있는 것은 안채 뿐이었으나, 1995년에 행랑채와 사랑채, 별당채 등이 복원됨으로써 면모가 일신되었다
그후 명성 황후가는 명성황후가 어렸을 때 공부했다는 방이 있었던 자리에 탄생을 기념해 세운 "명성황후 탄강구리(明成皇后 誕降舊里)" <명성황후가 태어나신 옛 마을>이라 새겨진 비가 세워져 있다
명성황후 생가 모습
생가 앞에 기념관이 건립되어 각종자료· 유품등이 전시되어 있으며, 161석 규모의 공연장(문예관)이 있어 명성황후에 대한 영상물을 상영하고 있다.
◇ 명성황후 기념관
명성황후 생가 맞은편에 위치한 명성황후 기념관은 왜곡된 역사를 바로 세워 올바른 역사관을 정립하고자 건립한 기념관이다. 520㎡의 전시실은 명성황후와 고종의 영정 등을 비롯한 관련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으며, 계절에 따라 변화하는 자연경관과 잘 어우러져 봄, 가을로 많은 관광객이 찾는 곳이다.
기념관 주변으로 넒은 주차장과 공중화장실, 연못 등을 설치하여 관람객의 편의를 도모하고 있다.◇ 감고당 중건 인현왕후의 사저이며 명성황후가 8살에 이사하여 왕비 간택 전 까지 머물렀던 곳으로서 영조가 감고당이라 명하였으며 처음에는 안국동에 있었으나 1966년에 쌍문동으로 이전하였다가 2004년에 여주군에서 인수하여 2008년도에 중건을 완료하였다.*
서희장군(徐熙將軍)의 묘
고려 초기의 외교가이며 문신인 장위공 서희(942∼998)의 묘소이다.
광종 11년(960)에 과거에 급제하여 광평원외랑을 거쳐 내의시랑에 올랐으며,
정치적 활동뿐 아니라 외교적으로도 큰 업적을 남겼다.
성종 12년(973)에 거란이 침입하여 압록강을 건너오자 거란의 장수 소손녕과
담판하여 고려가 고구려의 후계자임을 내세워 거란군을 물러가게 하였다.
그 후 청천강 이북에 있던 여진족을 토벌하고 강동 6주를 설치하여 평안북도 일대의 땅을 확보하였다.
그의 묘는 부인의 묘와 같이 있는 합장묘이고, 봉분 아래에 2단의 둘레석을
른 형태이다. 쌍분의 가운데에 묘비가 서 있고, 상석과 장명등(長明燈:무덤 앞에
있는 돌로 만든 등)이 1기씩 놓여 있으며, 좌우에는 문인석과 무인석이 각 1개
씩 있다. 묘역은 전체적으로 3단으로 되어 있어 고려시대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서희장군 묘
이완장군(李浣 將軍)의 묘지정번호 :경기도기념물 제16호지 정 일 : 1973.7.10시 대 : 조선 1674년(현종15)소 재 지 : 경기도 여주시 상거동 19◎
조선 중기의 무신인 매죽헌(梅竹軒) 이완(1602∼1674) 장군의 묘소이다. 인조(仁祖) 2년 (1624) 무과에 급제한 후 벼슬길에 오르게 되었으며, 평안도 병마절도사·함경도 병마절도사·경기도 수군절도사 등의 자리를 역임하였다. 1649년 효종이 청나라에 인질로 잡혀갔던 치욕을 씻기 위해 북벌 정책을 계획할 때 어영대장, 훈련대장으로 발탁되었고 이어 훈련대장과 병조판서의 임무를 맡았다.
이완장군의 묘
당시 제주도에 표류했던 네덜란드인 하멜을 시켜 신무기를 만들게 하였으며, 성곽의 개조와 신축 등을 추진해 나갔다. 그러나 효종이 재위 10년 만에 승하하자 북벌 계획이 중지되어 뜻을 이루지 못했다. 현종 때에는 수어사로 임명되었고, 포도대장을 거쳐 우의정에 이르렀다. 묘역은 봉분을 중심으로 둘레에 돌담이 둘러져 있고 봉분 앞에는 제물을 차려놓고 제사를 드리기 위한 상석과 향로석, 장명등(長明燈:무덤앞에 세우는 돌로 만든 등)이 있다. 묘역의 좌우에는 문인석·망주석·동자석이 각각 1쌍씩 있고, 조금 떨어진 곳에는 신도비(神道碑:왕이나 고관 등의 평생업적을 기리기 위해 무덤 근처 길가에 세운 비)가 있다.
이완 대장의 묘는 봉분을 중심으로 좌우 및 후편에 높이 1.2m의 곡담이 둘러 있으 묘앞에 상석과 한층 아래 좌우로 망주석이 있고, 그 앞에 문인석이 각 1쌍식 차례로 배치되었다. 상석의 우측으로 묘비가 있으며, 신도비는 묘역으로부터 약 100m 떨어진 곳에 있다. 조선시대에는 정1품 이상의 관직에 장명등,, 그리고 정2품 이상의 관직에 신도비를 세울 수 있었다.이 묘소는 이완이 정1품인 우의정 관직을 제수받아, 비교적 모든 석물이 골고루 갖추어져 있었으나 장명등과 동자석은 도굴되어 현재는 볼 수 없다. 1688년(숙종 14)에 건립된 신도비는 이수, 비신, 귀부로 구성되었는데 이수의 용과 귀부의 거북 모습이 매우 생동감 있게 조각되어 있다 이완 장군은 선조 35년(1602)에 출생한 조선조 효종때의 무신으로서 1624년(인조 2)에 무과에 급제하여 상원군수를 거쳐 1631년 평안도병마절도사가 되었다.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김자점의 별장(別將)으로 출전하여 정방산성싸움에서 전공을 세웠고, 1643년(인조 21)에 경기도수군절도사 겸 삼도통제사가 되었다. 효종은 즉위 후 청나라에 인질로 잡혀갔던 치욕을 씻기 위해 북벌을 계획하였는데,이 때 이완 장군은 어영대장에 발탁되었고, 이어 병조판서 및 훈련대장을 겸하여 비밀히 군대를 훈련시켰다.
또한 마침 제주도에 표착한 네덜란드인 하멜 등을 시켜 신무기를 만들게 하였다. 그러나 효종이 재위 10년 만에 승하하여 북벌계획이 중지되어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여주시 도예촌
여주시내에서 서북쪽으로 약 3km 정도 떨어진 북내면 오학리, 오금리, 현암리, 천송리, 지내리 일대에 약 600여 개의 도자기 공장이 밀집되어 있는 곳을 말한다. 기록에 따르면 이곳에서는 고려 말부터 도자기 제조를 시작하였으며 조선 초기부터 발달했다. 그 이유는 북내면 싸리산 언저리를 중심으로 점토, 백토나 고령토 등 전국에서 제일 좋은 도자기 재료가 생산되었기 때문이다. 특히, 이곳의 중견 작가들은 근래에 전승 도예를 깊이 연구하면서 독특한 수법으로 특이한 신작을 개발하고 있다. 또한 제기, 화분, 식기, 전기부품 등 생활 용품을 대량 생산한다.
여주시 도예 전시장 전경
강물 정용진
강물은
그 천성이 얼마나 정하면
하늘을 가슴에 담고
청산을 품에 들여
물고기들의 춤과
온갖 새들의 노래로
축제의 향연을 베푸는가.
내 마음
한줄기 강물이 되어
맑게 맑게
프르게 프르게
끝없이 끝없이
흐르기를 바라네.
오늘도
너무나 후미져
어느 누구도 내려가기를 꺼리는
낮은 곳으로 흐르는 강
자신이 낮아질수록
스스로 풍성해지는 진실을
그는 안다.
몸을 스스로 낮출수록
더욱 깊고 투명해지는 강물
삼라만상들이
자신의 모습을 비춰보고
놀라는 광경을 보라.
바다는
강이 밤새도록 실어다준
온갖 잡생각들을
조용히 다스릴 수 없어
언성을 높여 파도로 내려치며
깊게 깊게 가라앉힌다.
깊어질수록
몸과 음성을 낮춰
소리 없이 흐르는 강물.
* 여주도예단지의 볼거리 *
여주도예단지 관광의 장점은 도자기를 보는 것뿐만 아니라 도자기 제조과정을 직접 확인할 수 있다는 것. 단지 내에 여주민속도자기조합과 도자기 종합전시관 외 60여 개의 개인전시관이 있어 다양한 도자기를 관람할 수 있으며, 각 도요지마다 도자기의 제조 과정을 볼 수 있다. 또한 매년 5월에는 세종대왕숭모제전과 함께 여주도자기박람회를 실시하여 색다른 관광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그리고 주변에 신륵사 국립관광지, 세종대왕릉(영릉), 효종대왕릉, 명성황후생가, 영월루, 목아불교박물관 등의 관광지가 있어 연계 관광으로 좋다. 여주 도예촌은 여주 시내에서 서북쪽으로 약 3km 정도 떨어진 북내면 오학리, 오금리, 현암리, 천송리, 지내리 일대에 약 600여개의 도자기 공장이 밀집되어 있는 곳을 말한다. 기록에 따르면 이곳의 자기는 조선 초기부터 발달하였다는데, 이것은 여주시 북쪽 북내면 싸리산 언저리를 중심으로 점토, 백토나 고령토 등 전국에서 제일 좋은 도자기 재료가 생산되었기 때문이다. 이곳 부근엔 신륵사 국민 관광지와 영릉, 고달사지 등 문화 유적지가 많아 학생들의
문화유적 탐방지로 적합한 곳이다.* 전시 시설 - 도자기 종합 전시관 외 50여 개의 개인 전시관이 북내면 오학리에 있으며, 신륵사 관광지 입구나 시내에 전시 판매장이 곳곳에 있다.* 생산품 - 고려청자, 이조백자, 생활자기, 전기부품, 화분류 등이 있다.
정용진(鄭用眞) 詩人의 약력
(yong chin chong)my home mijumunhak.com/chongyongchin/
Cafe.daum.net/chongyongchin/문화유적 탐방지로 적합한 곳이다.* 전시 시설 - 도자기 종합 전시관 외 50여 개의 개인 전시관이 북내면 오학리에 있으며, 신륵사 관광지 입구나 시내에 전시 판매장이 곳곳에 있다.* 생산품 - 고려청자, 이조백자, 생활자기, 전기부품, 화분류 등이 있다.
39. 경기 여주출생(아호 秀峯)
1971 년 도미. 지평선 시인동인
미주한국문인협회협 이사장. 회장 역임.
한국 크리스챤 시인협회. 민족문학 작가회의.
한국문인협회. 행문회 회원.
Pen USA. The International Society of Poets VIP회원.
미주문학상. 한국 크리스챤문학상 대상.
Outstanding Achievement Award.(07.08)
(The International Society of Poetry)수상.
The Best Poems & Poets (05.07) 선정됨.(미국. 국제시협)
시집 : 강마을. 장미 밭에서. 빈 가슴은 고요로 채워두고. 금강산.
너를 향해 사랑의 연을 띄운다(한영). 설중매. (미래문화사)
에세이 : 마음 밭에 삶의 뜻을 심으며. 시인과 농부.
문예창작교본 : 시는 언어로 그리는 영혼의 그림.
샌디에고에서 에덴농장 경영. 샌디에고 문장교실 운영.
E-mail yongchin.chong@gmail.com
Home Page. my home mijumunhak.com/chongyongchin/
Cafe.daum.net/chongyongchin/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