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화벨 소리에 잠이 깼다. 아침 일찍 누굴까? "봉희씨, 어제 고마웠어. 헌데 잠은 잘 잤어?" 내 이름을 부르는 이는 주방의 대장인 권사다. 그녀는 언제나 나를 보면 "봉희씨, 난 그 이름이 너무 예쁘고 좋아. 사람이 좋아서 그런가?" 라며 부른다. 나는 내 이름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녀는 얼마나 예쁜 이름인 데 그러냐며 내 뒷모습만 보고도 큰소리로 "봉희씨" 하며 부른다.
오랜만에 푹 잔 기분이다. 어제는 아침부터 교회 주방에서 야채를 씻느라 허리도 못 펴고 지냈고 라인댄스와 점심 식사 후에는 전화기에 대해 배우느라 3시가 다 되어 집에 왔다. 피곤하여 눕고싶었지만 딸에게 가져 갈 카레를 만들고, 저녁은 딸네 집에 가서 먹고 오다보니 힘이 들었다. 나는 평소 고요한 밤을 좋아해 늦게 잠자리에 드는 데 어제는 몸이 못 견디겠다며 아우성을 쳐 9시에 불을 끄고 침대에 누워 잤다. 아침에 전화벨 소리에 깨니 8시다. 잠을 푹 잤는 데 머리가 무거웠다. 거울을 보니 얼굴이 퉁퉁 부었다. 보통 저녁을 6시 전에 조금 먹는 데 어제는 거의 7시가 다 되어 사위가 투고하여 온 김밥과 떡볶이, 튀김과 오뎅국을 맛있게 먹었다. 왜 머리가 아프고 얼굴이 부었을까? 한 시간이 넘도록 깊은 싱크대에 허리를 숙이고 야채를 씻어서일까, 아니면 저녁을 늦게 많이 먹어서일까? 어쨋튼 몸이 따라가지 못하는거다.
윤봉희라는 내 이름을 나는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조금 촌스럽게 느꼈다. 중학교시절 선생님들은 "봉이 윤선달" 이라고 불렀다. 대동강 물을 팔아먹었다는 <봉이 김선달>을 빗대어 부르면 친구들은 소리내어 웃어 어린 마음에 나는 챙피했다. 엄마에게 이름을 바꿔달라고 졸랐지만 언젠가 작명소에 가서 들으니 내 이름이 형제중에 제일 좋다고 했다.
나는 학교를 졸업하고 친구들에게 편지를 보낼 때는 내 이름에서 '봉' 자를 빼고 '희야'라고 썼다.
회사를 다니며 만난 그 남자는 내게 또 다른 이름을 주었다. '금봉어' 라는 이름은 처음 만난 다방에서 내가 앉은 자리 옆에 물속을 해엄치는 금붕어만 바라보던 내 생각을 하고 붙인 이름인 것을 안다. 그는 같은 회사를 다니다 회사를 그만두고 울산으로 떠난 남자다. 회사를 그만둔 날 전화를 걸어 아버지라며 나를 바꿔달라고 하여 다방에서 만났고 그날 나는 오래동안 금붕어를 보았다. 헤어질 때 갑자기 손을 내민 그는 주소가 어떻게 되느냐고 물었고 나는 얼결결에 답했다. 미리 계획했던 그는 손바닥에 적으며 편지하면 혼자 볼 것인지 물었다. 왜냐하면 근무할 때 먼저 퇴사한 사람이 내게 회사로 편지하면 여럿이 함께 보았기 때문이다
서로 다른 부서에 있던 그 남자와는 우연히 같은 부서로 옮겨 옆자리에서 근무했다. 그는 심심하면 " 시집 갈 데 없으면 나한테 와요" 하였고 나는 그저 웃기는 사람이라며 관심도 주지않았다. 어느 날 우연히 이력서를 보게 되었다. 내 눈길을 끈 것은 그는 부잣집 자녀들이 다닌다는 학교를 나왔는 데 어느 날 엉덩이를 누빈 바지를 입은 것이었다. 그 시절에는 헤어진 옷을 누벼 입었는 데 그 바지를 본 나는 그 남자가 겉치레를 안하는 속이 깊은 사람이라고 착각한 것이다. 훗날 그는 말했다. 가난하여 양복이 한 벌 뿐인 데 누가 창문으로 바지를 훔쳐가서 어쩔 수 없이 입었다고. 내 꾀에 내가 넘어간 것이다.
그 남자는 아직 연애할 형편이 안되는 데 자꾸 나한테 마음을 뺏겨 멀리 울산으로 직장을 옮기게 됐다는 고백을 하고 떠났다. 조금 마음을 열려고 하던 나는 인연이 여기까지인가 라며 보냈다. 어느 날 집으로 편지가 왔다. 그 남자가 보냈다. 받는 이의 이름에 '금봉어' 라고 보냈으니 동생은 잘못 온 편지 같다고 했다. 내가 달라고 하니 "왜 이름이 금봉어야?" 라며 계속 물었다. 답장을 하고 싶었지만 주소가 없었다. 그렇게 계속 보내온 편지에는 주소가 없었고 그냥 받기만 했다. 금붕어를 내 이름의 '봉'을 넣어 부른 것이다. 그것은 그 남자의 꼼수였고 나도 모르게 내 마음을 뺏어갔다. 얼마후 그 남자는 서류에도 내 얼굴이 보이고 일을 못하겠다며 다시 서울로 왔고 지금도 내 곁에서 꽁냥거리며 살아가고 있다.
아이를 낳고 얻은 이름이 제일 좋다. '엄마' 그 이름으로 살아가며 행복했고 아이들은 생각만해도 내게 기쁨이 되고 힘이 된다.
또 하나의 이름은 그가 결혼 후 긴 세월 해외에 머물 때 편지를 보내며 쓴 '당신의 희야' 다. 나는 아이들의 자라는 모습을 담으며 매일 일기처럼 편지를 보냈다. 7년이 넘는 세월만큼 쌓인 편지는 지금도 보물처럼 곁에 두고 있다. 나는 살면서 자주 카드나 편지에 마음을 담아 남편에게 준다. 딱 한 번, 편지 끝에 누구라고 적어야하나 고민한 적이 있다. 서로 의견이 어긋나거나 풀어야 할 일이 생기면 편지에 담아 주곤 했는 데 그날은 정말 내 마음이 상해있었다. 쓰지말까? 생각했지만 그래도 '희야가' 라고 억지로 쓴 기억을 돌아보니 지금은 웃음만 나온다.
또 하나, 글을 쓰며 '이봉희 선생님' 이 주어졌다. 그 이름에 맞게 글을 열심히 써야하는 데 게을러 마음에 짐이 된다. 등단을 하며 글쟁이 옷을 입혀주신 분에게 부끄럽지 않게 지금부터라도 열심히 글을 써서 그 이름을 당당하게 듣고 싶다.
교회에서 만난 벗들은 나를 '이권사'라고 부른다. '봉이 윤선달' 속에는 선생님들의 사랑이 담겨있어 좋다. '금봉어'에는 또 다른 추억이 담겨있어 가슴에 고이 담으며 꺼내본다. 나이를 먹어서일까? 나를 "봉희씨" 라고 부르는 그녀 때문일까? 새삼 내 이름이 정겹게 다가온다. 아침에 불러준 이름이 귓가에 맴도는 오늘은 옛 추억속을 다녀온 또 하나의 여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