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산
신 숙 자
하루가 다르게 선선해지는 계절이라 산에 오르기 좋은 날이다. 새벽 세 시에 집을 나서 설악산 봉정암에 도착하니 저녁공양 시간이 되었다. 맑은 미역국에 단무지 몇 조각으로 허기진 배를 채우고 나니 산사에는 어둠이 내린다.
저녁예불 시간이다. 불자들 사이에 끼어 대웅전에 앉았지만 기도가 되지 않는다. 유리창을 통해서 보이는 건넛산 능선 위에 세워진 사리탑에 멍하니 시선을 두고 있다. 어둠이 짙어질수록 석등에 비친 사리탑 주위로 월광이 내려앉은 듯 황홀하다. 허공과 같은 여래의 세계가 저곳일까. 찬연한 분위기에 매료되어 그야말로 무념무상이다.
새벽 3시 반, 봉정암에서 빠져나와 대청봉으로 향한다. 해발 1,700 고지인 대청봉으로 가는 길은 험하고 매섭다. 추적추적 비까지 내리는 칠흑 같은 어둠 속을 헤드랜턴 하나에 의지하며 걷는다. 하늘도 땅도 구별되지 않는 악산이다. 한 치 앞을 알 수 없는 우리네 삶이 이 같을까. 발밑에 무엇이 있는지도 모른 채 정상을 향해 무소처럼 오른다.
소청대피소 불빛이 보일 쯤 산멀미가 시작된다. 아직 날이 어두운데 대피소 안은 생각보다 많은 사람으로 부산스럽다. 구석진 바닥에 자리를 깔고 마른 빵으로 시장기를 채우려니 다른 사람들이 끓이는 라면 냄새에 홀리는 기분이다. 흔하고 많은 것도 수중에 없으면 아쉬운 법, 라면 한 봉지가 이처럼 간절하긴 처음이다. 따뜻한 물 한 컵으로 속을 달랜 다음, 어제부터 경련을 일으키는 다리에 파스를 뿌리고 다시 중청대피소로 향한다.
새벽이 오지 않을 것 같았던 설악산에 빛이 들고 있다. 눈을 홉뜨고 살펴도 천지간의 구별이 어렵던 산길에 여명이 들자, 오색 단풍잎들이 물먹은 손으로 어깨를 건드리며 인사를 해온다. 세상 돌이란 돌은 다 모아 놓은 듯한 험한 악산이 비에, 어둠에 짓눌렸다가 서러운 듯 깨어난다. 키 작은 구절초는 창백한 낯빛으로 바위틈에 걸터앉았고, 바람을 피해 누운 눈잣나무는 영롱한 물방울을 머금고 기지개를 켠다.
신비롭게 펼쳐진 중청의 알몸에 눈앞이 어찔하다. 금실금실 운무가 걷히자, 나는 어디서 왔고, 왜 여기에 있는지, 이제 어디로 가야 하는지 묻고 싶어진다. 자문에 답을 얻기도 전에 트인 하늘로 미륵불 같은 대청봉이 거룩한 자태를 드러내고 있다. 바라만 보아도 가슴이 쿵쾅거리는 봉우리다. 강한 힘에 끌려 마지막 남은 고지를 향해 발걸음을 옮긴다.
대청봉 정상은 생각보다 너르고 바람이 순하다. 거칠고 가파른 길에 비하면 한결 펑퍼짐한 돌밭이다. 정복한 자만이 느낄 수 있는 성취감인가, 나도 산이 되는 순간, 뿌듯함에 가슴이 터질 것만 같다. 하늘이 맞닿은 아득한 풍광에 취한 듯 빠져든다. 무르익은 오색가을이 눈 아래에서 출렁거린다. 무엇이 계절이 바뀐 뒤에도 이처럼 황홀할까. 찬바람이 훑고 지나가는 자리마다 불덩이 같은 단풍이 골을 타고 번져 내려간다.
비 그친 뒤에 불어오는 맑은 대청봉 공기가 가슴으로 그윽하게 스며든다. 고지에서 내려다보이는 산은 천지간만 구별될 뿐, 어디가 어딘지 길이 보이지 않는다. 바람과 햇살이 그려낸 한 폭의 수채화 같은 풍경 속에는 굽이굽이 걸어온 인생길이 숨어 있다. 무엇을 찾아 여기까지 왔단 말인가. 한 마리의 사슴을 잡겠다고 허둥대는 사냥꾼처럼 정신없이 달려온 세월이다.
이제 산도 인생도 내려가는 길만 남았다. 오르는 길이 수월하지 않았듯, 그 누구도 내려가는 길이 쉽다고 말하지 않는다. 인생의 산에서 내려간다는 것은 다시는 오를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할 테지. 바닥에 내려앉은 물먹은 단풍잎 하나를 주워본다. 언뜻 결이 고와 보이는 낙엽인데 지난한 세월을 반영이라도 하듯 흑반투성이다. 겉보기에 화려해 보이는 나뭇잎도 세월 앞에서는 호락하지 않았나 보다.
아프지 않은 삶이 어디 있으랴. 상처 없는 나뭇잎이 없듯이 나 또한 비바람에 해쓱하도록 해지면서 여기까지 왔다. 각박하게 돌아가는 세상에서 낙오자가 되지 않으려고 가쁜 숨을 몰아쉬며 달음질했다. 돌아보면 하루하루 사는 일이 산을 오르는 일 못지않게 고행이었다. 이제 좀 숨 돌리려나 했더니 쉰 고개 넘으면서 시작된 갱년기 증상으로 단풍 못지않은 안면홍조에 시달린다. 피로와 건망증에다 붉으락푸르락하며 찾아오는 오한증에 아주 밤잠을 못 이룰 지경이다.
험난한 산길이 인생의 의미를 조금 깨우쳐 주었을까. 빈손인 내가 천하를 제패한 장군의 모습이다. 왕복 26킬로미터의 거리인 정상을 밟고 돌아서는 길이 겁나지 않는다. 별도 달도 없는 어두운 산길을 오르지 않았던가. 내려가는 길에서는 나만의 오롯한 즐거움을 찾고 싶다. 오를 때 느끼지 못했던 곳곳의 장활한 풍경에 심취하는가 하면, 흙으로 물로 불로 바람으로 돌아갈 나무 한 그루, 풀 한 포기에도 눈을 두어 보련다.
쌍용폭포에 닿자 두 물줄기가 속세의 고락을 씻어주려는 듯 시원하게 내리꽂힌다. 산에서는 물도, 단풍도, 사람도, 모두가 아래로만 흐른다. 낮은 곳으로 내려간다는 것은 더 멀리, 더 넓은 것을 보려 함일 테지. 분명 내려가는 것도 인생일 터, 다시 들메끈을 고쳐 매고 길을 나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