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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릴 것과 취할 것
마가복음 13:1~8
1 예수께서 성전에서 나가실 때에 제자 중 하나가 이르되 선생님이여 보소서 이 돌들이 어떠하며 이 건물들이 어떠하니이까
2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이 큰 건물들을 보느냐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려지리라 하시니라
3 예수께서 감람 산에서 성전을 마주 대하여 앉으셨을 때에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과 안드레가 조용히 묻되
4 우리에게 이르소서 어느 때에 이런 일이 있겠사오며 이 모든 일이 이루어지려 할 때에 무슨 징조가 있사오리이까
5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사람의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라
6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이르되 내가 그라 하여 많은 사람을 미혹하리라
7 난리와 난리의 소문을 들을 때에 두려워하지 말라 이런 일이 있어야 하되 아직 끝은 아니니라
8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나겠고 곳곳에 지진이 있으며 기근이 있으리니 이는 재난의 시작이니라
제 인생을 돌이켜 보며 그때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었는데 하고 후회하는 몇 가지 중 하나는 제 큰딸에게 화를 낸 것입니다.
제 딸이 중학교 2학년 때였을 것으로 기억합니다. 딸 아이가 친구들을 집으로 초청하여 제가 사용하는 컴퓨터를 이용하여 숙제를 프린트하려고 하였습니다. 당시에 제가 가지고 있었던 레이저 프린터는 165만 원을 주고 산 것으로 꽤 비싼 것이었습니다. 이 프린터는 220V의 전원을 트랜스를 이용해서 110V로 전환해서 사용해야 하는 데 제 아이는 220V 전원에 연결하여 스위치를 올리니 펑 소리와 함께 프린터가 고장이 나버렸습니다.
마침 제가 이 모습을 보고 불같이 화를 내고 말았습니다. 이제 돌이켜 보면 그리해서는 안 되는 것이었습니다. 아이들 친구 앞에서 얼마나 창피한 노릇입니까?
아무리 소중하고 비싼 것이라도 때가 되면 모든 것은 지나가는 것이고 이렇게 해서 지나고 나면 더 좋은 것을 얻을 수 있는 것이 세상 이치인데 그때는 그것을 모르고 아이를 주눅 들게 만든 것이 지금도 잘못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세상 이치가 그렇습니다.
모든 것은 지나가게 되어 있습니다. 문제는 더욱 악화하여 썩을 것으로 변환되는지 아니면 더욱 세련되고 가치 있는 것으로 바뀌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이런 이치를 모르기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혼란에 빠진 적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자랑으로 여겼던 성전의 파괴에 대한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의 노예에서 벗어나 광야에서 하나님을 섬기게 하려고 짓게 하신 것은 성막이었습니다. 이 성막이 가나안 땅에 정착하므로 발전하여 솔로몬 왕의 시대에 화려하고 웅장한 성전을 지었습니다. 이 성전은 370년이 지난 후 바벨론 느부갓네살 왕의 군대에 의해 불 질러지고 모든 기물이 탈취당하는 수모를 겪게 되었습니다.
그다음 성전은 스룹바벨 성전입니다.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갔다가 돌아와 스룹바벨을 중심으로 성전을 다시 건축하였습니다. 그렇지만 이 성전 역시 5백여 년이 지난 후 이방인들에 의해서 파괴되고 말았습니다. 그다음이 헤롯 성전이었습니다. 헤롯은 로마 제국에 돈을 주고 유대의 분봉왕이 된 후 유대인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 성전을 건축하였습니다. 오늘 본문에 예수님께서 돌 위에 돌 하나도 남지 않고 무너뜨려 지리라고 하신 성전이 이 헤롯 성전입니다.
이런 부분이 이해할 수 없는 것입니다.
성전은 하나님의 명령으로 지어졌습니다. 그리고 이 성전을 건축하는데 몸과 마음을 드려서 온 정성을 다해 지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야 하는 성전이 이방인에 의하여 파괴되어야 하는지 납득하기 어려운 부분입니다.
이 부분에 대하여 오늘 함께 나눈 본문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함께 나눈 마가복음 13장은『감람산 강화』라고 하기도 하고『소 묵시록』이라 불리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여기에 기록한 말씀이 요한계시록의 축약본이기에 그러합니다.
감람산 강화라고 하는 이유는 제자들의 질문에 예수님이 대답하신 내용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앞으로 자신이 다시 오실 것에 대하여 그리고 그때 나타날 징조와 그 이전에 일어날 일들을 자세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인류의 역사는 예수님이 말씀하신 대로 성취되었고, 앞으로도 그대로 이루어질 것입니다. 그렇다면 역사의 흐름은 예수님 안에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요 2:19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고 하였습니다. 성전의 주인은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고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셔서 영원한 하나님의 성전이 되셨습니다.
예수님뿐 아니라 눈에 보이는 성전은 사라지고 예수님 안에서 구원을 받은 성도들이 예수님께서 보내신 성령으로 영원한 성전이 되었습니다. 고전 3:16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 안에서 버려야 할 것이 있고 취하여야 할 것이 있습니다.
첫 번째는 버려야 할 것입니다.
막 13:1 “예수께서 성전에서 나가실 때에 제자 중 하나가 이르되 선생님이여 보소서 이 돌들이 어떠하며 이 건물들이 어떠하니이까”하였습니다. 예수님이 성전에서 나가실 때였습니다. 제자 중 하나가 성전을 가리키면서 예수님에게 말했습니다. “선생님이여 보소서 이 돌들이 어떠하며 이 건물들이 어떠하니이까.” 한 마디로 너무도 웅장하지 않으냐는 뜻이었습니다. 먼저 그는 성전에 사용된 돌들을 가리켰습니다. 큰 건물들을 지으려면, 그에 걸맞은 큰 돌들이 필요했을 것입니다. 대리석의 높이는 평균 90-120㎝나 되었고, 어떤 것은 돌 하나의 길이가 12m이고, 무게가 100t이나 되는 것도 있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 성전을 본 자는 누구나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으며, 유대 랍비들은 ‘이 성전을 보지 못한 자는 아름다움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고까지 극찬하였다고 합니다. 이 성전을 짓는 데는 주전 19년부터 주후 63년까지 모두 82년이 걸렸습니다. 그러니 얼마나 크고도 아름답게 지었겠습니까? 그 면적도 어마어마해서 예루살렘 성 전체의 1/6을 차지했습니다. 시골에서 올라온 제자들이 놀라는 것도 충분히 이해가 갑니다.
그런 제자의 물음에 예수님은 막 13:2“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이 큰 건물들을 보느냐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려지리라 하시니라”는 말씀으로 찬물을 끼얹는 듯한 답변을 하십니다. 이 말씀을 마 23:38절에서는 “보라 너희 집이 황폐하여 버려진 바 되리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너희 집’의 ‘너희’는 복수형이지만 ‘집’은 단수형입니다. 집이란 이중적인 의미로 하나님의 성전인 예루살렘 성전일 수 있고, 또 다른 하나는 이스라엘 국가라고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성전을 ‘내 집’ 또는 ‘내 아버지 집’이라고 부르지 아니하시고, ‘너희 집’이라고 부르셨습니다.
이것은 성전의 본래 목적을 잃어버리고 성전을 강도의 소굴로 만들었을 뿐 아니라, 과부의 가산을 삼키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부패한 성 예루살렘은 반드시 심판을 받아야 했음을 알리고 있습니다. 잎사귀만 무성한 무화과나무가 저주를 받아 뿌리째 마른 것처럼 외형으로 그럴듯하게 꾸미고 있었던 예루살렘 성전은 예수님의 예언대로 AD70년 경 로마 장군 디도에 의하여 둘 하나도 남김없이 무너뜨리는 무서운 재앙을 겪게 되었습니다.
아무리 화려하고 정성이 깃든 것이라도 그 안에 사랑이 담겨있지 않으면 쓸모없이 사라질 것뿐입니다. 성전에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예배를 드리는 것이 살아 있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 안에는 형식만이 존재할 뿐 하나님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경외하는 믿음은 사라지고 외식과 탐욕만이 깃들어 있었습니다.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사 43:21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를 찬송하게 하려 함이니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찬송’은 히브리 원문에서 ‘테힐라 תְּהִלָּתִי’고 하였습니다. 테힐라는 하나님을 높이거나 찬양하는 노래를 지칭하는 전문 음악 용어입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신 목적은 하나님을 경험하고 그것을 감사함으로 노래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므로 인생의 참가치는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고 그것을 고백하는 예배자로 세움을 받을 때 있습니다. 사랑이 담겨있지 않는 모든 것을 버려야 할 것들입니다.
두 번째는 취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막 13:3~4 “예수께서 감람 산에서 성전을 마주 대하여 앉으셨을 때에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과 안드레가 조용히 묻되 우리에게 이르소서 어느 때에 이런 일이 있겠사오며 이 모든 일이 이루어지려 할 때에 무슨 징조가 있사오리이까”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과 안드레는 예수님께서 ‘성전의 건물들은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려질 것’이라는 말씀에 큰 충격을 받고 신중한 자세로 “이 모든 일이 이루어지려 할 때에 무슨 징조가 있사오리이까”라는 질문을 던지게 되었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에게 나아와 질문한 내용은 두 가지였습니다. 첫째 질문은 ‘어느 때에 이런 일이 있겠사오며’였고 또 하나는 ‘이 모든 일이 이루어지려 할 때 무슨 징조가 있사오리이까’였습니다. 즉 시기(When)와 징조(What Signs)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종말의 시기와 징조에 관해서 묻는 제자들에게 막 13:5~6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사람의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라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이르되 내가 그라 하여 많은 사람을 미혹하리라”고 대답하십니다. 예수님은 부활의 주님으로 이 세상에 다시 오실 분이심을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주님이 오시는 목적은 부패하고 가치 없는 모든 것을 청산하시고 새로운 질서를 세우기 위함입니다. 이때를 준비하는 성도에게 중요한 것은 예수님을 바르게 알고 믿는 것입니다. 이것을 바르게 할 수 있는 과정에서 적그리스도의 출현입니다. 마치도 자기가 그리스도 곧 세상의 구원자임을 선언하고 사람을 넘어트리려는 계교를 부립니다. 이것을 뛰어넘어 오직 예수님만이 구원자이심을 믿는 믿음이 중요합니다. 행 4:12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 외에는 구원자가 없습니다. 옛것을 버리고 새로운 질서를 받아들이기 위하여 철저하게 예수님이 구원자이심을 믿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종말의 때에 미혹의 영은 눅 22:31에서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탄이 너희를 밀 까부르듯 하려고 요구하였으나”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까부르듯하려고’는 ‘체를 흔들다’, ‘체를 치다’는 뜻입니다. 곡식을 체질하는 것은 원래 쭉정이를 날려 보내기 위한 목적이 있으므로 이것은 사탄이 시련의 체를 통해 제자들을 참소(讒訴)할 증거들을 찾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이기고 나가야 합니다. 또한, 버려야 할 것은 구별하여 신속히 버리도록 사탄의 시험을 허락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으면 자신을 사랑하고 돈을 사랑하며 세상을 사랑합니다. 그리고 이것을 자랑하며 의지합니다. 이것을 버리는 것이 중요합니다. 사탄의 시험을 통하여 버릴 것은 버리고 오직 하나님을 의지하는 믿음을 취하여야 할 것입니다.
연이어 눅 22:32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가 시험에 들지 않도록 기도하시고 성령으로 내 심령을 굳건하게 하시고 천사를 통하여 보호하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미혹의 영을 통하여 우리의 믿음을 시험할 것을 말씀하시면서 외적인 환경도 흔들릴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막 13:7 “난리와 난리의 소문을 들을 때에 두려워하지 말라 이런 일이 있어야 하되 아직 끝은 아니니라” 여기서 ‘끝’은 헬라어는 ‘텔로스 τέλος’입니다. 텔로스는 끝이라는 뜻도 있지만, 목적이라는 뜻도 있습니다. 영어의 end도 끝이라는 의미뿐만 아니라 ‘목적, 목표’ 란 뜻이 담긴 것과 같습니다. 우리의 목표는 고통이 아닙니다. 새로운 질서에 합당한 생명을 취하는 것입니다. 육에 속한 무질서한 것을 버리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질서, 만왕의 왕께서 다스리라는 하늘의 것을 취하기 위한 과정입니다.
막 13:8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나겠고 곳곳에 지진이 있으며 기근이 있으리니 이는 재난의 시작이니라”고 했습니다. ‘재난의 시작’은 영어 성경에서 ‘the beginning of the birthpangs’라고 했습니다. 산고(産苦)의 시작이라는 말입니다. 산모가 아이를 배면 반드시 산고를 겪을 날이 오게 되겠지만 언제 그날이 올는지 모르듯이 세상의 종말도 갑자기 예고 없이 찾아올 것인데, 중요한 것은 지금 전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는 흉흉한 소문은 재난의 끝이 아니라 시작에 불과하다는 말씀입니다.
재난이 시작되면 무엇을 버려야 할지 그리고 무엇을 취하여야 할지에 대한 분별력이 생깁니다. 하나님은 세상의 모든 것은 사라지나 하나님 나라는 영원할 것임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영원한 가치를 추구할 것을 권고하고 있습니다.
이런 난리와 난리의 소문 속에서 취하여야 할 것은 하나님의 사랑으로 이뤄지는 모든 것입니다. 마 5:7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라고 하였습니다. ‘긍휼’이란 헬라어 ‘엘레에몬 ἐλεήμων’입니다. 이것은 허리 숙여 낮아져 상대의 입장을 취한다는 자비와 같은 용어입니다. 히 2:17 “그러므로 그가 범사에 형제들과 같이 되심이 마땅하도다 이는 하나님의 일에 자비하고 신실한 대제사장이 되어 백성의 죄를 속량하려 하심이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이 우리 각 사람을 긍휼하게 여기셔서 낮은 자가 되어 사람으로 세상에 오셨음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나를 위하여 긍휼을 베푸셨다면 우리 역시 여기에 응답하여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의 긍휼에 응답하는 것이 예배입니다. ‘예배’는 ‘프로스퀴네오 προσκυνέω’라고 합니다. 이 뜻은 ‘엎드리어 무릎을 꿇고 경배하다’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으니 우리는 스스로 낮추어 경배하는 자세를 갖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나님만 경배하는 것이 아니라 이웃을 향하여 낮은 자세로 배려하고 긍휼하게 여기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주님이 오실 때가 가까이 올수록 겉으로 드러나는 것을 자랑하는 것을 버리고 내면의 세계에서 얻어지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과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을 취하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세상의 없어질 것에 마음이 빼앗기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 합당한 예배자로 바르게 세움을 받는 것을 취하는 자세가 무엇 보다 소중한 세대에 살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