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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4월 9일(부활절)
마태복음 28:1~15
부활의 초대
하늘사랑교회 주일예배 설교문
1492년 스페인령 지브롤터 해안 끝에 작은 팻말이 하나 세워져 있었습니다. 이 팻말에는 라틴어로 “이 너머에는 아무것도 없다.”라는 문구가 적혀 있었습니다. 바로 이곳이 이 세상의 끝이라는 의미였습니다. 그런데 1492년에 콜럼버스(Christopher Columbus)가 이 세상 끝을 넘어갔고, 이 너머에는 아무것도 없는 것이 아니고 신대륙이 있음을 발견했습니다. 그 후 팻말의 문구가 바뀌었습니다. “이 너머에 더 많은 것이 있다.”
예수님이 부활하시기 전까지 사람들은 죽음이 끝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죽음을 당하면 슬퍼하고 절망했습니다. 그러나 만약 우리가 죽음은 끝이 아니라 그 너머에 더 많은 것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과연 우리의 삶에 어떤 변화가 일어나게 될까요?
-출처: 진희근, 「날마다 천국을 향해」(서울: 두란노, 2020); 「생명의 삶 플러스」(서울: 두란노, 2023년 4월호), 99에서 재인용.
한때 석가모니의 뼈가 발견되었다고 인도를 위시한 불교국에서 한동안 떠들썩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석가모니의 이 유명한 뼈들은 잘 진열되어 수백만 인도 사람들의 경의 속에 시가행진했습니다. 많은 사람이 그 뼈 앞에 부복한 것을 지켜보고 있던 한 선교사가 그의 친구에게 이런 말을 했습니다. “만약 저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뼈 하나라도 발견할 수 있었다면, 기독교는 산산조각이 나고 말았을 것이다.”
그렇습니다. 기독교는 그들처럼 죽은 자를 믿고 존경을 표시하는 종교가 아닙니다. 오히려 기독교는 살아난 자를 믿는 종교요,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을 믿는 종교가 아니라 영원히 살아계시는 하나님을 믿는 종교입니다. 이 점에서 기독교는 부활과 영생이 없는 타 종교와 차이가 납니다.
-출처: https://www.facebook.com/100004277616324/posts/2587098904776005/?mibextid=Nif5oz
오늘은 예수께서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신 날을 기념하는 부활절 아침입니다. 과연 최초의 부활절 아침에는 어떤 일이 있었을까요?
아리마대의 부자 요셉은 총독 빌라도에게 예수님의 시신을 달라고 요구했습니다. 요셉은 그 시신을 가져다가 깨끗한 세마포로 싸서 바위 속에 판 새 무덤에 넣어 두었습니다. 그리고 요셉은 큰 돌을 굴려 무덤 문에 놓았습니다.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는 예수님의 장례과정을 모두 지켜보았습니다. 안식 후 첫날 새벽이 이르자, 이 두 여인은 무덤을 보려고 갔습니다. 이때 두 여인은 신비한 광경을 목격하게 되었습니다. 큰 지진이 나고, 주의 천사가 하늘로부터 내려와서 돌을 굴러내고 그 위에 앉았습니다. 그 천사의 형상은 마치 번개 같았고, 그 옷은 눈같이 희었습니다.
아마 1세기 유대인들은 이 광경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금방 알아차렸을 것입니다. 큰 지진은 하나님이 임재하실 때 나타나는 현상이었습니다. 또 번개 같은 형상을 했고, 눈같이 흰옷을 입고 있었다는 표현은 구약성경에서 하나님을 묘사할 때 사용되었습니다(단 7:9-10; 10:6). 무덤을 지키고 있던 경비병들이 그 천사를 보고 무서워하여 떨었던 것은 인간이 신적 존재를 보았을 때 느끼는 두려움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천사는 여자들에게 “너희는 무서워하지 말라.”고 말했습니다. 이미 천사는 그 여자들이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를 찾는 줄을 알고 있었습니다. 천사는 여자들에게 두 가지 사실을 증언했습니다.
첫째로, 천사는 예수께서 다시 살아나셨다는 사실을 여인들에게 증언했습니다. 그리고 천사는 예수께서 부활하셨다는 증거로 “와서 그가 누우셨던 곳을 보라.”고 말했습니다. 천사가 돌을 굴려내기 전부터 무덤 안에는 예수님의 시신이 없었습니다.
둘째로, 천사는 주의 제자들에게 빨리 가서 예수님의 부활을 증언하도록 여인들에게 명령했습니다. 그리고 부활하신 예수께서 제자들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실 것을 예고했습니다. 장차 제자들도 갈릴리에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천사의 증언을 들었던 여자들은 어떤 반응을 보였나요? 여자들은 무서움과 큰 기쁨으로 빨리 무덤을 떠나 제자들을 향해 달려갔습니다. 여자들은 복합적인 감정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여자들은 기뻐했지만, 온전히 기뻐하지 못했고, 무서움보다는 더 큰 기쁨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저는 당시에는 증인으로서 효력을 가지고 있지 못했던 여인들을 통해 예수님의 부활이 첫 번째로 증언되었는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좀 더 공인된 남자들을 통해 예수님의 부활이 증언되었다면, 예수님의 부활이 더 많은 사람에게 받아들여 지지 않았을까요?
과연 마태복음을 기록했던 저자가 그런 점을 모르고 있었을까요? 그런데도 굳이 여자들을 통해 예수님의 부활이 증거된 것은 예수님의 부활이 누군가 꾸며내거나 인위적으로 조작된 이야기가 아니라, 역사적 사실이었다는 점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오히려 저는 돌문을 지켰던 경비병들이 그 사실을 총독에게 알리지 않고 먼저 대제사장에게 알렸는지가 궁금합니다. 왜 그랬을까요? 만약 경비병들이 예수님의 시신이 사라져버린 것을 총독 빌라도에게 보고했다면 그들은 책임을 면하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그러나 경비병들이 이 사실을 종교 지도자들에게 알렸을 때, 종교 지도자들은 돈을 많이 주며 “예수의 제자들이 밤에 와서 우리가 잘 때 그 시신을 도둑질해 갔다.”라고 말하게 했습니다. 그리고 종교 지도자들은 만일 이 일이 총독에게 들리더라도 경비병들이 피해를 당하지 않도록 보호해 주겠다고 약속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무덤을 굳게 지켰던 경비병들이 돈을 받고 가르친 대로 말해서, 많은 유대인이 그렇게 잘못 알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자고 있던 사람이, 예수의 제자들이 그 시신을 도둑질해 간 것을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이 주장이 더 말도 안 되지 않습니까? 그래서 예수의 제자들이 그 시신을 도둑질해 갔다는 주장은 오히려 예수님의 부활이 역사적 사실이었다는 점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무서움과 큰 기쁨으로 제자들을 향해 달려갔던 여자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여자들에게 “평안하냐?”라고 물으셨고, 이에 여자들은 예수님의 발을 붙잡고 경배하였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천사와 동일한 말씀을 해 주셨습니다. “무서워하지 말라. 가서 내 형제들에게 갈릴리로 가라 하라 거기서 나를 보리라(10절).”
저는 여기서 두 가지 의문점이 듭니다.
첫째, 왜 하늘로부터 내려온 천사와 부활하신 예수님은 여자들에게 “무서워하지 말라(5,10절).”라고 말씀하셨을까요?
무덤을 지키던 자들은 하늘로부터 내려온 천사를 무서워하여 떨며 죽은 사람과 같이 되었습니다. 히브리 전통에서 하나님의 얼굴을 본 사람은 죽을 수도 있었고, 하나님의 임재에 가까이 다가가는 것은 아주 위험한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무덤을 지키던 자들이 천사를 보고 무서워하여 떨며 죽은 사람과 같이 되었던 것은 극히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죽었던 예수님이 다시 살아나신 곳에서, 살아 있는 그들이 죽은 사람처럼 되었습니다.
그러나 구약성경에 등장하는 모세나 엘리야, 이사야는 하나님의 임재로 초대를 받았습니다. 때문에, 그들은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고도 살아남을 수 있었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여자들도 하나님의 메시지를 선포하라는 명령을 들었고, 보냄을 받았습니다. 여인들이 천사의 초대를 받았으며, 부활하신 예수님의 초대를 받게 된 것입니다.
-출처: 폴라 구더, 「부활의 의미」, 이학영 역, (서울: 도서출판 학영, 2023), 73.
그래서 무서움과 큰 기쁨으로 달려갔던 여자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것이 아니라, 반대로 예수께서 그 여자들을 만나셨습니다(9절). 부활하신 예수님은 지금도 살아계셔서 우리를 초대하고 계십니다. 우리에게 “평안하냐?” 물으시고, “무서워하지 말라.”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을 만났던 여자들에게 일어났던 변화가 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기 이전에 여자들은 복합적인 감정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여자들은 기뻐했지만, 온전히 기뻐하지 못했고, 무서움보다는 더 큰 기쁨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여자들은 예수님께 나아가 그 발을 붙잡고 경배하였습니다.
여자들은 최초로 빈 무덤을 목격했고, 부활의 첫 증인이자, 부활하신 예수님을 처음으로 직접 만난 사람들입니다. 또한, 여자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의 몸을 처음으로 만졌고, 예수님과 처음으로 대화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여자들이 느꼈던 두려움을 없애주셨고, 큰 기쁨만 남게 하셨습니다(「생명의 삶 플러스」, 2023년 4월호, 95).
둘째, 왜 하늘로부터 내려온 천사와 부활하신 예수님은 여자들에게 “가서 내 형제들에게 갈릴리로 가라 하라 거기서 나를 보리라(7, 10절).”라고 말씀하셨을까요?
갈릴리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처음으로 불러주셨던 곳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부르실 때 그들에게 사명을 주셨습니다. 이제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그들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셔서 그들을 맞아주시고, 그들의 잃어버린 사명을 회복시켜 주실 것입니다.
그래서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가리켜 “내 형제들(10절)”이라고 부르신 것은 특별한 일입니다. 어쩌면 ‘형제’가 아니라 ‘웬수’에 더 가까울지 모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는 분이십니다(요 13:1).
고통과 절망 가운데 있는 사람에게 자신을 끝까지 사랑하시는 분이 있다는 사실은 큰 위로가 될 수 있습니다. 그것도 연약한 보통 사람이 아니라,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이 자신을 끝까지 사랑한다고 믿는 사람이라면 고통과 절망을 견디고 이겨낼 힘을 얻게 될 것입니다.
수년 전, 고훈 목사님이 시무하신 안산제일교회에서 일어난 실화가 있습니다. 거기 김미자 집사란 사람이 있었는데, 그분의 남편은 말기 위암이었습니다. 암세포가 임파선까지 전이돼, 의학적 치료는 끝난 채 임종만 기다려야만 했습니다. 그녀는 남편의 죽음이 두려웠습니다. 진통이 찾아올 때는 더욱 두려웠습니다. 그 고통을 지켜볼 수밖에 없던 김 집사가 부활절 성찬 예배에 참석했습니다.
그녀는 남편을 위해 자기 몫의 성찬을 챙겼습니다. 떡은 손수건에 싸고, 포도주는 작은 병에 담았습니다. 그녀는 성찬 예배가 끝나기 무섭게 집으로 달려와 고통 속에 식은땀을 흘리며 쓰러져 있는 남편에게 성찬을 내밀었습니다.
“여보, 오늘 부활절 성찬예요. 당신을 위해 내 몫을 받아왔어요. 이 떡은 십자가에서 살을 찢어 영생하라고 주신 주님의 몸이고, 이 포도주는 우리를 위해 대신 고통당하신 주님의 피랍니다.”
남편은 아내의 뜨거운 사랑에 감동해 눈물을 흘리며 성찬을 받았습니다. 기적이었습니다. 평안이 오고 고통이 모두 사라져버렸습니다. 김 집사는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감사하고 죄송해요. 성찬은 그렇게 받는 것 아닐 텐데요.” 남편을 향한 아내의 깊은 사랑과 부활절 성찬에 대한 깊은 신뢰가 복합되어 나타난 놀라운 기적이었습니다.
-출처: https://www.facebook.com/100004277616324/posts/2587098904776005/?mibextid=Nif5oz
우리는 하늘에 뜬 반달을 보면서도 온달을 상상합니다. 우리는 온달이 있음을 알기에 반달의 어둠에 불평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반달의 빛을 긍정합니다. 영원 속에서 오늘을 살아가는 사람은 반달이 가리키는 온달을 봅니다. 신자의 미래는 하나님이 정하신 미래입니다. 그 미래가 오늘 우리의 삶을 붙들고 일으킵니다. 신자의 마지막은 죽음이 아닌 부활입니다. 신자의 죽음 속에 이미 부활이 있습니다.
-출처: 이재현, 「들리는 설교, 유혹하는 예화」(구리: 선율, 2022), 269.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면 무서움을 떨쳐버리고, 큰 기쁨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면 우리 마음에 자리 잡은 복합적인 감정에 휘둘리지 않고, 예수님의 발을 붙잡고 경배하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잃어버린 사명을 회복시켜 주시기 위해 우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셔서 우리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분은 사랑의 음성으로 우리를 향해 “내 형제들”이라고 부르십니다. 여러분이 부활의 기쁜 소식을 알려야 될 사람은 누구입니까? 여러분은 이 소식을 전하기 위해 큰 기쁨으로 빨리 달려가고 계십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