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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원문으로 보시기 바랍니다.
역사 교과서 100년의 왜곡, 뿌리를 묻다.
오늘날 우리가 배우는 한국사는 과연 누구의 시선으로 쓰인 역사인가?
고조선의 건국 신화에서부터 고구려와 발해에 이르기까지, 교과서의 문장들은 익숙하고 단정하다. 그러나 그 문장 하나하나의 배경을 따라가 보면 놀라운 진실에 닿는다. 그것은 불과 100년 전, 일본 제국주의가 조선을 지배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만들어낸 인식의 틀, 즉 ‘식민사학(植民史學)’이라는 이름의 역사 서술 구조다.
■ 식민사관의 태동 : 조선총독부의 ‘역사 공작’
1910년 한일병합 이후, 일본 제국은 조선 통치를 합리화할 ‘이론적 무기’를 절실히 필요로 했다.
그들은 무력만으로는 민족의 저항을 꺾을 수 없음을 알았다. 그래서 선택한 것이 바로 역사였다.
그리하여 1925년, 조선총독부 산하에 ‘조선사편수회(朝鮮史編修會)’가 설립된다.
이 기관의 중심에는 쓰다 소키치(津田左右吉), 시라토리 구라키치(白鳥庫吉), 이마니시 류(今西龍) 같은 일본 제국대학 출신 학자들이 있었다. 그들은 13년에 걸쳐 37권의 『조선사』를 편찬하며 조선의 역사를 철저히 일본 중심 논리로 재편했다.
이들의 핵심 논리는 세 가지로 요약된다.
첫째, 조선은 자주적 문명 발전 능력이 없다.
둘째, 중국과 일본으로부터 문화를 받아 근근이 유지한 피지배 사회였다.
셋째, 일본의 지배는 조선을 근대화로 이끄는 ‘역사적 필연’이다.
이러한 그들의 논리는 ‘문명국이 미개국을 이끈다’는 제국주의의 고전적 구도를 그대로 답습한 것이었다. 그들에게 조선의 역사는 사실의 기록이 아니라, 지배를 합리화하는 통치의 언어 서술이었다.
■ 해방 이후의 계승 : 이름만 바뀐 식민사관
1945년 광복과 해방은 식민사관의 종말을 의미하지 않았다. 조선총독부의 학술 인맥과 연구 체계는 단절되지 않았다.
‘조선사편수회’에서 실무를 담당했던 이병도와 신석호는 해방 후 서울대학교 사학과 교수로 자리를 옮기며 학계의 중심에 섰다. 그들은 식민사학의 골격을 그대로 유지한 채, 그것을 '실증사학(實證史學)'이라는 이름으로 재포장했다.
식민사학이 침략의 정당화하기 위한 ‘식민의 역사학’이었다면, 실증사학은 ‘중립의 탈을 쓴 식민의 연장선’이었다. 그들은 실증사학, 즉 '사료에 근거한 객관적 역사'를 내세웠지만, 정작 그들이 인용한 사료 대부분은 일제 시기 식민사학의 범주 안에서 선택된 것이었다.
이병도 학파가 장악한 학계는 이후 제도적 기반을 통해 세력을 공고히 했다.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정신문화연구원, 그리고 교과서 집필진까지 그들의 제자와 인맥이 이어졌다. 그 결과, 해방 후에도 ‘일제가 만든 역사 틀’은 거의 변하지 않은 채 ‘국정 교과서’ 속으로 이식(移植)되었다.
(중략)
✍️ 이 글은 친중, 친일, 친미 등의 시각에서 쓴 글이 아니라, 우리의 정체성을 위한 친한의 시각에서 쓴 글이다.
어느 한쪽을 비판하기 위한 글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다시 힘을 모아 스스로의 역사를 바로 세우자는 뜻에서 쓴 글이다.
그러므로, 이 글은 ‘우리의 역사는 누가 쓴 것일까?’라는 단순한 물음(아래 [붙임] 참조)에서 시작되었다.
필자는 아직 어느 편에도 속하지 않은 AI에게 그 질문을 던졌고, AI의 답변을 있는 그대로 이 글에 담았다.
따라서 위의 글은 필자가 아닌 AI가 쓴 글임을 밝힌다.
(아래 부분은 글쓴이가 종전에 쓴 글을 참조하여, 우리의 과제를 정리한 요약문임)
이병도(李丙燾, 1896–1989)는 일제강점기 조선사편수회의 핵심 인물로, 해방 후에도 한국사학계에서 영향력을 행사하며 식민사관을 계승한 인물로 평가된다.
그러나 흥미로운 사실이 있다. 1986년 10월 9일자 조선일보에 “단군은 신화 아닌 우리 국조, 역대왕조의 단군제사 일제 때 끊겼다”라는 제목으로 기고하며, 90세의 나이에 단군조선의 역사성을 분명히 인정하고 강조했다는 점이다.
이 글에서 그는 고조선을 단순한 신화가 아닌, 우리 민족의 뿌리이자 국조로서 실재하는 역사임을 밝혀놓았다. 그럼에도 안타깝게도 그의 제자들과 후대 학자들은 이러한 각성을 제대로 계승하지 못했다. 일부 제자들은 이를 ‘노망이 나서 쓴 글’이라 폄하하기까지 했다.
강단사학의 구조와 권위주의적 학문 체계 속에서, 이병도의 마지막 반성과 성찰은 충분히 반영되지 못했고, 여전히 ‘실증사학’이라는 이름 아래 식민사관의 잔재가 유지되고 있다.
결국 해결책은 지난 사람들이 아니다.
친중, 친일, 친미가 답이 될 수는 없다.
역사는 결국 우리가 풀어가야할 문제이다.
“지금의 역사서는 우리가 쓴 역사가 아니다.
누가 왜곡을 주도했는가가 중요한 것이니라, 우리가 바꾸어야함이 중요하다.
지난 100년의 왜곡을 탓할 때가 아니라, 지금부터라도 우리의 역사를 우리의 손으로 다시 써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