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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말씀의 향기♣ No2585
11월20일 [연중 제33주간 금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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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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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 오늘 미사**
https://m.youtube.com/watch?v=leVxfW8vDh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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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예수님께서는 성전을 상거래가 아니라 새로운 영적 예배와 찬미가가 흘러넘치는 기도의 집으로 복원시키셨습니다!>
꽤나 부끄럽고 송구스러운 마음으로 예수님의 성전 정화 작업을 묵상합니다. “너희는 성전을 강도의 소굴로 만들어 버렸다.”는 예수님의 말씀이 남의 말 같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애둘러 표현하지 않으시고 단도직입적으로, 아주 단호하게 말씀하십니다. “상거래는 하느님의 집에 어울리지 않습니다!”
원래 예루살렘 성전은 하느님 백성이 모여 기도하는 집이었습니다. 그러나 교회 지도자들이 상인들과 결탁하여 뒷돈을 챙기면서, 성전에서의 상거래를 허용하기 시작했습니다. 성전은 급격히 훼손되고 속화되기 시작했습니다.
당시 대사제들과 사제 가문의 귀족들은 성전 경내에서 이루어지던 매내에서 큰 이득을 취하고 있었습니다. 대사제는 유다 최고의회인 산헤드린의 의장으로서 당시 유다 사회 안에서 나름 확고한 위치와 권력을 지닌 존재였습니다.
최고의회는 사제 가문의 가족들과 율법학자들, 그리고 일반 귀족들로 이루어져있었으니, 당대 나름 잘 나가던 사람들의 집합소나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당시 물 좋은 장소, 막대한 목돈이 오고가던 장소였던 성전에서의 상거래와 뒷돈을 다른 사람들에게 맡겨놓을리가 없었던 것입니다.
잔뜩 돈독이 올라있던 그들이 최상의 수입원이었던 예루살렘 성전을 깡그리 무시하고 모독하는 예수님의 모습에 부들부들 온몸을 떨었으며, 바득바득 이를 갈았을 것입니다. 마침내 더 이상 예수님을 그냥 둘 수 없다고 작정하고 없앨 방법을 찾기 시작합니다.
다행히 그런 유다 지도층 인사들과는 달리 백성들은 예수님께 딱 붙어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가시는 곳 마다 따라다녔으며,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에 귀을 기울였고, 그분의 일거수일투족을 유심히 바라봤습니다. 이들이야 말로 예수님께서 강조하시는 하느님의 새로운 백성, 참된 백성이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철저하게도 타락하고 부패한 예루살렘 성전을 정화시키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성전을 상거래가 아니라 새로운 영적 예배와 찬미가가 흘러넘치는 기도의 집으로 복원시키셨습니다.
오늘 우리 시대에서 성전 정화 작업을 계속되어야 합니다. 혹시라도 오늘 우리 성전이 상거래가 활발히 이루어지는 시장바닥 같지는 않은지 모르겠습니다. 가난하고 힘없는 백성들은 홀대받고, 음흉한 사람들의 주머니만 가득 채워주는 훼손된 교회의 모습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더럽혀진 성전을 정화하신 예수님께서 오늘 우리 교회에 바라시는 바가 무엇일까 묵상해봅니다. 이 시대 우리는 어떻게 성전을 정화시켜야 할까 고민해봅니다.
우리끼리 만의 폐쇄적인 교회가 아니라 춥고 고달픈 세상 사람들을 향해 활짝 열린 교회가 되는 것이 진정한 의미의 성전 정화 작업이 아닐까요? 한 사람에 의해 모든 것이 결정되고 좌지우지되는 공동체가 아니라 구성원 모두의 자발적인 참여와 구성원 상호간에 적극적인 소통이 이루어지는 교회를 건설하는 것이야말로 이 시대 성전 정화작업이 아닐까요?
상상을 초월하는 건립기금으로 건립되는 성전이 아니라 방황하는 양떼들을 극진히 사랑하는 겸손하고 예의바른 사목자의 희생과 헌신이 상시적으로 이루어지는 성전을 건설하는 것이 더 시급하지 않을까요?
우리 시대 사회적 약자들, 가난하고 고통 받는 이웃들도 크게 환영 받고 아무런 차별도 느끼지 않는 환대의 교회, 서로의 상처와 아픔을 따뜻이 보듬어줄 수 있는 치유의 공동체, 나만 혹은 우리 가족이나 우리 본당만 생각하지 않고 더 큰 사랑을 실천하며 공동선을 추구하는 보편적인 교회 건설이 시급하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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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성전은 언제 강도들의 소굴이 되는가?>
(묵상 동영상)
https://youtu.be/pcyhBEpHI3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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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복음은 ‘성전 정화’입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의 멸망을 보시며 슬퍼하신 후, 성전으로 들어가 장사꾼들을 쫓아내십니다. 우리 모두도 성전인데 성전이 강도들의 소굴이 되면 예루살렘처럼 멸망하고 말 것입니다. 예수님은 “‘나의 집은 기도의 집이 될 것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너희는 이곳을 ‘강도들의 소굴’로 만들어 버렸다”라고 호되게 야단치십니다. 우리도 우리 마음 안에서 주님을 만나는 성전이 되지 못하면 강도의 소굴이 되고 맙니다.
자연인으로 소개된 인물 중에 ‘씨돌’씨가 있습니다. 본명은 김용현이고 세례명은 요한입니다. 그는 가톨릭 재단에서 운영하는 ‘SOS 어린이 마을’에서 자랐습니다. 미혼으로 사는 여성이 고아 아이를 맡아 기르는 시스템인데 1호 엄마의 1호 아들이었습니다.
그가 유명해진 것은 ‘순간포착 세상에 이런 일이’와 같은 TV를 통해서입니다. 맨발로 벌거벗고 다니며 자연과 혼연일체가 되는 삶을 사는 그의 모습은 많은 이들에게 큰 호기심을 불러일으켰습니다. 그런데 다시 SBS 스페셜 제작팀에서 「어디에나 있었고, 어디에도 없었던, 요한, 씨돌, 용현」을 방영하여 그의 실제 모습이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그는 1980년대 후반 민주화 운동 당시 가장 앞에서 언제나 자리를 지켰던 인물입니다. 고문으로 허리를 다쳐 평생 아픔을 감내하며 살아야 했습니다. 그러면서도 약자들 편에 서는 것을 선택하였습니다. 군대에서 기압을 받다가 갑자기 사망했다는 정연관 상병의 누명을 벗겨준 장본인도 김용현입니다. 17년 만에 정 상병이 야당을 지지했다는 이유로 고참에게 구타를 당해 사망한 것이라는 사실을 끈질기게 밝혀냈습니다. 삼풍백화점이 무너졌을 때 누구보다 먼저 달려가 눈물을 흘리며 구조작업을 도왔습니다. 그리고 카메라가 자신을 비추려고 할 때 사라졌습니다. 그를 만났던 모든 사람은 그를 ‘의인’으로 생각합니다. 하지만 지금은 뇌출혈로 병자의 삶을 살고 있습니다. 그에게 왜 그런 삶을 살아왔느냐고 묻는 말에 움직일 수 있는 유일한 왼손으로 이렇게 씁니다.
“인간으로서 당연한 일”
그에게 인간이 어때야 하는지를 알려준 분은 당연히 그를 키워주신 어머니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왜 사제들과 종교와 단절하고 산에서 살았을까요? 최근에 종교에 대한 문제가 불거지자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안다고 도리를 지키고 사는 게 아니야. 측은지심이 필요해. 신천지는 개천지. 종교가 기생충. 종교가 다 거짓말해. 요한이라는 이름을 돌려주고 싶어. 도둑놈들.”
저는 한 인간으로서 인간임을 지키기 위해 살아온 이분의 삶을 존경하면서도 이분을 끝까지 품어주지 못했던 우리도 반성해야 하지 않는가 생각했습니다. 한 인간으로 살고 싶은 사람에게까지 요한이란 이름을 돌려주고 싶은 마음이 일어나게 만든 것은 우리의 책임도 크겠습니다.
‘기도의 집’이 왜 ‘도둑의 소굴’이 되는 것일까요? 오늘 복음은 ‘그리스도의 가르침’이 사라졌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장사꾼들을 쫓아내신 후 성전에서 가르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날마다 성전에서 가르치셨다.”
즉, 날마다 진리의 가르침이 지속하지 않기 때문에 강도의 소굴이 되는 것입니다. 이는 우리 개인도 마찬가지고, 성당도 마찬가지입니다. 진리의 가르침이 멈추면 그 자리에 세속적 욕심이 끼어듭니다. 우리가 강도가 되지 않으려면 끊임없이 주님의 진리가 선포되는 곳이어야 합니다.
‘SBS 세상에 이런 일이’에서는 「34년째 길 위에서 사는 남자의 사연」이 소개되었습니다. 제보를 받은 제작팀은 4차선 도로 밑에 작은 움막을 짓고 산에서 약초나 떨어진 이삭 등을 주워서 끼니를 때우며 사는 한 사람을 취재했습니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아버지가 집을 나간 뒤, 어머니와 동생과 누나를 부양하겠다며 돈을 벌러 집을 뛰쳐나온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돈을 벌어도 모이지 않았습니다. 일단 나왔으니 성공해서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에 34년을 길거리에서 살게 된 것입니다.
제작진은 누나를 찾아갔습니다. 동생을 만나고 싶냐고 했더니 당연히 그러겠다고 말했습니다. 동생에게 이 말을 전하니 동생도 누나를 만날 용기가 생겼습니다. 그렇게 34년 만에 집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누나는 왜 살아있었으면서 돌아오지 않았느냐며, 그 세월을 허비한 게 아깝지 않으냐며 오열하였습니다. 동생도 눈물을 흘립니다.
만약 제작팀이 그분의 가족을 찾아서 그 가족의 마음을 전해주지 않았다면 이 프로그램은 강도의 소굴이 되었을 것입니다. 자기 이익을 챙기기 위한 프로그램일 것입니다. 그러나 가족의 마음을 알려주어 동생에게 용기를 주었고 그렇게 34년 만에 용기를 낼 수 있게 했습니다. 그러니 기도의 집 역할을 한 것입니다.
교회는 하느님의 성전입니다. 하느님과 항상 만난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교회로 나오는 이들에게 하느님을 만나 받은 말씀을 알려주어야 합니다. 그래야 그들이 용기를 얻을 수 있습니다. 이런 가르침이 지속되어야 강도의 소굴이 되지 않습니다. 이 가르침이 없다면 교회는 자신의 이익을 위해 신자들을 이용하게 될 것입니다. “요한이라는 이름을 돌려주고 싶어”란 말을 다시 듣지 않도록 우리 교회가 하느님을 만나 말씀을 받는 일을 가장 중요하게 여기며 살아야겠습니다. 하느님을 만나 전할 말씀을 받지 않으면 자연적으로 강도의 소굴이 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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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루카 19,45-48: 너희는 하느님의 집을 강도들의 소굴로 만들어 버렸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성전이 장사치의 소굴이 아니라, 거룩한 집이기를 바라신다. 그분은 사제의 직무가 부정직한 종교적 의무 수행이 아니라, 자발적인 순명으로 이루어지기를 바라신다. 주님께서는 성전에서 세속적인 교환행위가 이루어져서는 안 된다고 가르치신다. 즉 돈 바꾸는 환전상들을 성전에서 쫓아내기까지 하셨다. 주님의 돈으로 이익을 챙기려하는 자는 바로 환전상이다. 그 주님의 돈은 성경이다.
성당에서 세속적인 이익을 취하려고 하는 행위는 모두 다 환전상의 행위이다. 더구나 성경을 가지고 자기 이익을 챙긴다고 한다면, 그는 성경을 파는 사람이 될 것이다. 성경을 자기 마음대로 해석하여 사람들에게 두려움과 공포심을 주어 재물을 챙기는 많은 사이비 종교를 볼 수 있다. 그들은 모두 환전상들이지 참 목자가 아니다. 그들은 하나같이 성경을 가지고 현세의 이익을 취하고 있다.
성전에는 물건을 파는 사람들과 부끄러운 줄 모르고 돈을 사랑하는 죄인들이 무리를 이루고 있었다. 환전상들, 환전 책상을 지키는 자들, 소나 양을 파는 자들, 집비둘기와 산비둘기를 파는 사람들이 있었다. 이것들은 율법에 따라 희생 제사를 드릴 때 쓰는 것이었다. 이것들은 이제 없어지고, 우리 신앙인들의 아름답고 사랑스런 행실, 흠 없는 삶의 영광, 영광과 진리 안에서 드리는 향기로운 예배가 빛을 내야 한다. 이것이 주님께서 원하시는 참된 성전의 정화이다.
주님께서는 성전의 주인으로서 당신의 권한을 행사하신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들의 임무가 하느님 아버지와 함께 성전의 주인이신 그분을 경배하는 것이었는데도 그들은 어리석게도, 자신들의 의무를 행하기는커녕 오히려 주님을 증오하여 그분을 죽이려고 음모를 꾸민다. 그러나 많은 군중이 그분의 말씀을 들으려고 곁을 떠나지 않아 뾰족한 방법을 찾지 못했다.
율법 교사들과 바리사이들을 비롯하여 유대인 지도자들 모두의 죄가 더욱 크다. 배우지 못한 백성들은 그분의 가르침에 귀를 기울였고, 그 구원의 말씀을 단비처럼 받아 마셨다. 그들의 미음은 열매를 맺을 준비가 되어 있었고, 그분의 가르침에 따를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들을 지도하는 자들은 주님을 거역하고 살인을 계획하고 있다. 그들은 모퉁이 돌에 갈려 넘어지고 말 것이다.
주님의 집은 하느님과 우리의 형제들을 만나는 장소이다. 이 만남은 사랑의 만남이어야 하는 것이다. 이 하느님의 집이 어느 개인의 욕망을 해소하기 위한 장소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오늘 복음에서 보여주고 있다. 우리 자신도 마찬가지이다. 우리의 몸도 성령의 궁전이라고 바오로 사도께서 말씀하셨다. 이 궁전을 인간적인 욕심으로 채우려고 한다면 하느님의 궁전을 욕되게 하는 것이다. 언제나 주님을 모실 수 있는 우리가 되도록 그래서 세상을 비출 수 있는 신앙인이 되도록 은총을 구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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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서울대교구 허규 베네딕토(가톨릭대학교 성신교정 교무부처장) 신부님]
<너희는 하느님의 집을‘강도들의 소굴’로 만들어 버렸다.>
유다교에서 성전은 신앙생활의 중심이었습니다. 모든 제사의 의식은 성전을 중심으로 이루어졌고, 제사는 하느님과 화해하는 유일한 방법으로 여겨졌습니다. 구약 성경에 따르면 사제들은 조를 나누어 돌아가면서 성전에 머물며 봉사하였습니다(1역대 24장 참조). 그렇다고 성전이 제사를 바치는 곳만은 아니었습니다. 성전은 하느님과 만나는 장소이자 기도의 장소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날마다 성전에서 가르치셨다.” 루카 복음서에서 성전은 가르침의 장소로 표현됩니다. 이것은 비단 예수님만이 아니라 사도들에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성전은 사도들과 신앙인들에게 기도의 장소였으며 부활하신 예수님을 선포하고 그분의 가르침을 사람들에게 전하는 장소였습니다.
예수님의 성전 정화는 십자가 죽음의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분의 행동은 성전만이 아니라 유다교의 제도에 반대하는 것처럼 보였기에 종교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없애려고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행동은 성전이 지닌 진정한 의미를 되찾는 것이고 하느님의 뜻에 맞게 되돌려 놓는 것입니다. 성전이 참의미를 잃고 수단과 도구로만 사용된다면 종교의 모든 제도는 하느님을 잊은 채 인간의 이익만을 위하여 남습니다. 개인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앙이 삶의 태도와 생각을 변화시키지 못하고 다만 나를 위한 도구가 된다면 신앙은 가치를 잃습니다. 그 가치를 되돌려 놓는 것이 정화의 참뜻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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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성전을 정화하시다.>
“예수님께서 성전에 들어가시어 물건을 파는 이들을 쫓아내기 시작하시며,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나의 집은 기도의 집이 될 것이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너희는 이곳을 `강도들의 소굴`로 만들어 버렸다.’ 예수님께서는 날마다 성전에서 가르치셨다. 수석 사제들과 율법학자들과 백성의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없앨 방법을 찾았다. 그러나 어떻게 해야 하는지 그 방도를 찾지 못하였다. 온 백성이 그분의 말씀을 듣느라고 곁을 떠나지 않았기 때문이다."(루카 19,45-48)
다윗 왕은 왕권을 확립한 뒤에 어느 날 나탄 예언자에게 이런 말을 합니다. “보시오, 나는 향백나무 궁에 사는데, 하느님의 궤는 천막에 머무르고 있소."(2사무 7,2) 이 말은 하느님을 위해서 성전을 지어야겠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그의 말은 뭔가 이상합니다. 집도 없이 천막에 머무르시는 하느님이 딱해서 집을 지어드리겠다는 것 같은, 마치 생색을 내는 것 같은 말입니다. 그날 밤 하느님의 말씀이 나탄 예언자에게 내립니다. “나의 종 다윗에게 가서 말하여라. ‘주님이 이렇게 말한다. 내가 살 집을 네가 짓겠다는 말이냐? 나는 이집트에서 이스라엘 자손들을 데리고 올라온 날부터 오늘까지, 어떤 집에서도 산 적이 없다. ...... 어찌하여 나에게 향백나무 집을 지어 주지 않느냐고 한마디라도 말한 적이 있느냐?"(2사무 7,5-7) 하느님께서는 다윗이 성전을 짓는 것을 막으셨습니다. 사실 온 세상 만물의 주님이시고, 어디에나 계시는 하느님께서 머무르실 집이 필요한 것은 아닙니다. (오늘날의 우리도 성전을 신축할 때, 어떤 의도로 짓는 것인지를 잘 생각해야 합니다. 인간의 업적을 과시하기 위한 의도라면 안 짓는 것이 낫습니다.)
성전은 나중에 솔로몬 왕이 지었는데, 다 짓고 나서 봉헌식을 할 때 솔로몬은 이렇게 기도합니다. “어찌 하느님께서 땅 위에 계시겠습니까? 저 하늘, 하늘 위의 하늘도 당신을 모시지 못할 터인데, 제가 지은 이 집이야 오죽하겠습니까?"(1열왕 8,27-) “...... 당신 종이 이곳을 향하여 드리는 기도를 들어 주십시오. 또한 당신 종과 당신 백성 이스라엘이 이곳을 향하여 드리는 간청을 들어 주십시오. 부디 당신께서는 계시는 곳 하늘에서 들어 주십시오. 들으시고 용서해 주십시오."(1열왕 8,29-30) 솔로몬이 성전을 지은 것은 하느님께서 머무르실 집으로 지은 것이 아니라, 하느님 현존의 상징으로 지은 것이고, 하느님께 기도할 장소로 지은 것입니다.
그때 하느님께서는 솔로몬에게 축복을 내리는 말씀을 하신 다음에 이런 경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만일 너희와 너희 자손들이 나에게서 돌아서서, 내가 너희 앞에 내놓은 계명과 규정을 따르지 않고, 가서 다른 신들을 섬기거나 예배하면, 나는 내가 준 땅에서 이스라엘을 잘라 버리고, 내가 내 이름을 위하여 성별한 이 집을 내 앞에서 내버리겠다. 그러면 이스라엘은 모든 민족들 사이에서 속담 거리와 웃음거리가 되고 말 것이다. 그리고 이 집은 폐허가 되어, 이곳을 지나는 사람마다 몹시 놀라고 휘파람을 불어 대며 이렇게 말할 것이다. ‘어찌하여 주님이 이 땅과 이 집을 이렇게 만들었을까?’"(1열왕 9,6-8) 하느님께서는 성전을 봉헌하던 그때 이미, 신앙인들이 신앙인답게 살지 않으면 성전을 폐허로 만들겠다고 경고하셨던 것입니다. (이 경고는 나중에 그대로 실현됩니다. 그리고 오늘날까지 복구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경고 말씀은 예루살렘 성전에만 해당되는 것은 아닙니다. 오늘날의 우리 교회에도 해당됩니다. 하느님께서 지켜 주시니 ‘성전은 영원하신 하느님의 영원한 집’입니다. 그러나 신앙인들이 신앙인답게 살 때에만 그렇고, 그렇게 살지 않으면 한순간에 무너질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성전을 정화하신 일은, 솔로몬의 기도와 하느님의 경고 말씀을 다시 생각하라고 꾸짖으신 일입니다. 성전은 장사하는 곳이 아니라 기도하는 곳입니다. 이 말은 종교 전반에도 적용되는 말입니다. 종교는 물질적인 이익을 추구하는 집단이 아니라 기도하는 공동체입니다. 예수님께서 “너희는 이곳을 ‘강도들의 소굴’로 만들어 버렸다.”고 꾸짖으신 것은 당시에 성전에서 벌어지는 일들이 실제로 강도짓과 같았기 때문입니다. 제물용 가축들을 아주 비싼 값으로 팔고, 그 이익금을 사제들과 장사꾼들이 나누어 가진 것은, 하느님을 섬긴다는 명목으로 사리사욕을 채운 일이고, 하느님과 백성들을 상대로 강도짓을 한 것과 같습니다.
사제들과 율법학자들과 지도자들은 화가 나서 예수님을 없앨(죽일) 방법을 찾는데, 그것은 예수님께서 성전을 정화하신 일이 자신들의 기득권을 크게 흔들어 놓은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예수님 때문에 물질적으로 큰 손해를 보았고, 또 그들의 권위도 땅에 떨어졌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종교적 기득권층은 존재하고, 그 기득권층이 힘없는 사람들을 억압하고 착취하는 일도 존재합니다. 예수님의 성전 정화는 종교적 기득권층에 정면으로 도전한 일, 사실상 종교를 개혁한 일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예수님을 죽일 방법을 찾지 못합니다. (정확하게 표현하면, 예수님을 ‘죽일 방법’을 못 찾은 것이 아니라, ‘죽일 명분’을 못 찾은 것입니다.) 온 백성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느라고 예수님 곁을 떠나지 않았다는 말은, 사람들이 모두 예수님의 성전 정화를 지지했음을 나타냅니다. 기득권층 사람들은 자신들이 백성의 여론을 무시하고 예수님을 죽인다면 군중이 폭동을 일으킬 수도 있다는 것을 두려워했습니다. 폭동이 일어나면 로마 군대가 개입할 것이고, 그러면 자신들의 기득권도 위험해집니다. (실제로는 ‘온 백성’이 지지했을 것 같지는 않고, 사제들과 율법학자들과 지도자들과 한통속인 사람들은 예수님을 지지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기득권층 사람들은 결국 예수님을 죽일 명분을 만들어 내는데, 그들은 거짓 증인들을 내세워서 ‘하느님을 모독한 죄’로 예수님을 고발하게 했고(마태 26,59-61) 예수님께 사형 선고를 내렸습니다. 성전에서 감히 하느님을 상대로 강도짓을 한 자들이 하느님께 충성한다는 명분으로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분을 죽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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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매일 아침 샤워를 하면서 온수와 냉수의 물 조절을 하게 됩니다. 적당하게 조절이 되면 따뜻한 물로 샤워를 하게 됩니다. 온수가 과하면 물이 너무 뜨거워집니다. 냉수가 과하면 물이 차갑습니다. 열정과 냉정 사이의 균형을 맞추어야 합니다. 계절이 바뀌면서 집의 난방도 다시 조정했습니다. 친절한 이웃의 도움으로 요일별, 시간별로 온도를 조절하였습니다. 고속도로에도 속도를 안내하는 표시가 있습니다. 최고의 속도를 제한합니다. 어느 곳에서는 최저의 속도도 제한하고 있습니다. 최고 속도를 위반하면 교통사고의 위험이 있습니다. 최저 속도를 지키지 못하면 교통의 흐름에 방해가 되기 때문입니다. 가끔 뉴스에서 듣는 말이 있습니다. ‘분노조절 장애’입니다. 자신의 감정을 조절하지 못해서 돌이킬 수 없는 실수와 잘못을 저지른 사람이 있습니다. 공든 탑을 무너트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샤워기의 물 온도를 조절하고, 난방의 온도를 조절하고, 자동차의 속도를 조절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정말 어려운 것은 마음을 조절하는 것입니다.
동양에서는 스스로의 감정을 조절하는 것을 중용이라고 합니다. 중용(中庸)에서 중은 희로애락이 발현되기 전의 상태라고 이야기합니다. 기쁨과 슬픔의 중간이 아닙니다. 분노와 즐거움의 중간이 아닙니다. 중은 가운데나 평균이 아닙니다. 모든 감정이 드러나기 전의 상태를 말합니다. 그러기에 중은 천하의 근본이 됩니다. 영성신학에서도 중용(Indiferentia)을 이야기합니다.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는 부귀보다 가난을 택할 수도 있고, 건강보다 질병을 택할 수도 있고, 장수보다 단명을 택할 수도 있는 것이 중용입니다. 이 역시 희로애락의 감정으로는 도달 할 수 없는 영적인 길입니다. 중용에서는 교육을 통해서 희로애락의 감정을 넘어서는 도를 찾으며 그 과정을 화(和)라고 합니다. 화에 이르기 위해서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도, 들리지 않는 곳에서도 자신을 잘 돌보아야 합니다. 그것을 신독(愼獨)이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늘 깨어 있으라고 하셨습니다.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하는 것은 우리가 영적으로 깨어 있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한적한 곳에서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중용은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을 찾을 때까지 밤을 새워 들판을 머무는 사랑입니다. 예수님의 중용은 일곱 번씩 일흔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는 자비입니다. 예수님의 중용은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희생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성전에 대해서 이야기 합니다. 성전의 고유한 모습은 ‘기도하는 집’입니다. 더불어서 성전은 복음을 전하는 곳이어야 합니다. 하느님을 믿는 형제와 자매들이 친교를 나누는 곳입니다. 성전은 이제 예수님께서 당부하셨던 것처럼 나눔이 이루어지는 곳이어야 합니다. 특히 가장 가난한 이들, 아픈 이들, 외로운 이들이 머물 수 있는 위로와 치유의 공간이 되어야 합니다. 그곳에서 희망의 빛이 퍼져나가야 합니다. 우리들 또한 거룩한 성전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를 만나는 사람들이 지친 삶에서 위로를 얻는다면, 우리를 만나는 사람들이 복음의 기쁨을 느낄 수 있다면, 우리를 만나는 사람들이 절망 중에서도 희망의 빛을 볼 수 있다면 세상의 어떤 성전보다도 거룩하고 아름다운 성전이 될 것입니다.
우리는 미사를 통해서 ‘성체’를 받아 모십니다. 바로 우리들의 몸이 ‘성전’이 되는 것입니다. 주님을 모시는 나의 몸과 마음이 주님의 뜻에 따라 충실하게 살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도하는 사람들이 있는 곳, 너그러운 마음으로 가진 것을 나누는 사람들이 있는 곳 그곳이 진정한 성전이고 그곳이 바로 하느님 나라입니다. 분열과 갈등이 있는 곳, 욕심과 분노가 있는 곳은 아무리 화려하고 아름답게 보여도 주님께서 원하는 성전이 아닙니다.
“나의 집은 기도의 집이 될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날마다 성전에서 가르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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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곁에 있다는 것>
루카 19,45-48 (성전을 정화하시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성전에 들어가시어 물건을 파는 이들을 쫓아내기 시작하시며,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나의 집은 기도의 집이 될 것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너희는 이곳을 ‘강도들의 소굴’로 만들어 버렸다.” 예수님께서는 날마다 성전에서 가르치셨다.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과 백성의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없앨 방법을 찾았다. 그러나 어떻게 해야 하는지 그 방도를 찾지 못하였다. 온 백성이 그분의 말씀을 듣느라고 곁을 떠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곁에 있다는 것>
사람 곁에
사람이 있다
내 곁에
누군가 있듯이
누군가의 곁에
내가 있다
곁에 있다는 것은
그가 있게끔 하는 것
곁에 있다는 것은
그가 그답게 하는 것
곁에 있다는 것은
그를 살리는 것
곁에 있어도
곁이 되지 못하는
사람이 있고
곁에 없어도
곁이 되어 주는
사람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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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송용민 사도 요한 신부님]
“이것을 받아 삼켜라. 이것이 네 배를 쓰리게 하겠지만 입에는 꿀같이 달 것이다.” 요한 묵시록의 이 구절은 성경 말씀을 깊이 묵상해 본 사람만이 깊이 공감할 수 있습니다.
성경을 읽어 보지 않은 신자는 없겠지만, 성경을 하느님의 말씀으로 받아 삼켜 본 사람이라면 그 말씀이 내 생명의 양식인 동시에 내 삶의 걸림돌이 된다는 것을 잘 압니다.
내가 힘들고 지쳤을 때 성경은 꿀같이 달고 위로의 말씀으로 넘치지만, 내가 죄와 교만으로 살면 성경 말씀이 배가 아플 정도로 쓰고 피하고 싶기 때문입니다.
성전을 정화하시는 예수님께서는 기도의 집을 강도의 소굴로 만들어 놓은 유다인들을 심판하십니다. 유다인들에게 예루살렘 성전은 하느님을 만나고 그분의 자비와 사랑을 체험하는 기도의 장소였지만, 이제 사람들에게는 밥벌이의 장소이자 인간의 위선과 악행을 덮어 버리는 세속의 공간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이 예수님을 없애려는 악의를 품은 것도 자신들의 숨겨진 치부가 드러나는 것이 두려웠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모두 나약합니다. 숨겨진 치부 하나 없이 사는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사회적이고 종교적 권위를 지닌 이들은 나약한 자신의 인간성을 사람들의 기대에 맞추려고 노력하지만, 그렇다고 흠결 없이 사는 사람은 없습니다.
어쩌면 우리 인생은 평생 보속의 삶일지도 모릅니다. 누구의 잘못을 질책하고 고발하기에 앞서 나는 얼마나 내 죄악과 위선을 감추며 살고 있는지 돌아볼 일입니다.
꿀처럼 달지만 내 배를 쓰리게 하는 성경 말씀을 만나 보셨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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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이정호 요아킴 신부님]
<기초>
강원도 홍천 근처에 수도원을 지었다. 돈이 없어서 수사님들도 잡부 노릇을 해야만 했다. 먼저 바닥을 다지기 위해서 꽤 크고 무거운 돌들을 수도 없이 주워서 채웠다.
길이 좁아 큰 차가 들어오지 못하기 때문에 며칠 동안 손으로 일일이 날라와 쌓아놓고는 마음 뿌듯해하기도 했는데 콘크리트로 그 돌들을 덮으면서 그동안의 수고와 땀이 가려져 보이지 않게 되었구나 하며 서로 서운해하기도 했다.
그렇게 시작한 공사가 10여년 동안 계속되었다. 감사드려야 할 일은 그동안 산길을 오르던 차가 뒤집히거나 하는 사고의 위험도 많았지만 우리 형제들 누구도 심한 부상을 입거나 다치지 않았다는 것이다.
물론 기쁨도 있었고 힘겨울 때도 있었다. 집을 짓는 과정도 어려웠지만 함께 일하면서 부딪치는 상처도 컸다. 어떤 이는 공사 과정에서 형제들과 마음을 상해서 다시는 이곳에 발을 들여놓지 않겠다고까지 말하기도 하였다. 오랜 공사 끝에 마침내 제법 번듯한 집이 세워졌다.
수도원을 수도원답게 만들기 위해서는 설계의 아름다움이나 공사의 완벽함도 필요하겠지만 서로에 대한 오해와 갈등, 화해와 용서, 기도와 사랑 역시 필요한 것이었다. 그 모든 것이 한데 뭉쳐 기초 바닥에 들어간 호박돌처럼 집을 든든히 받쳐주고 있는 것이라 생각된다. 오해와 갈등이 있었기에 화해와 용서가 더욱 절실히 다가왔고 사랑이 자라났다.
수도원은 벽돌과 콘크리트만으로 지어진 게 아니라 우리의 눈물과 한숨, 분노와 짜증 그리고 기쁨과 감사가 벽과 바닥에 고스란히 배어들어 살아 있는 우리 삶의 표지가 되었다.
하느님의 집이 되느냐, 강도들의 소굴이 되느냐 하는 것은 집의 기초를 이루는 것이 무엇인지, 어떤 마음으로 그 안에서 살아가는지에 달려 있다.
우리 가정의 기초는 무엇인가? 눈물과 한숨과 기쁨을 고스란히 안고 산 아래를 내려다보며 수도원은 여전히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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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강영구 루치오 신부님]
<기도하는 집과 강도의 소굴>
옥봉성당은 근대문화재 154호로 등록되었습니다. 80년의 역사를 지닌 우리 성당은 아름답습니다.
그러나 역사와 전통이 우리 성당을 아름답게 꾸며주지 않습니다. 아름다운 정원과 큰 나무, 사철 피는 꽃들이 성당을 아름답게 만들어주지 않습니다. 온갖 인생풍랑을 겪으면서 자신을 깎고 다듬어 달관(達觀)의 경지에 이른 어르신들의 끊임없는 기도가 우리 성당을 아름답게 만듭니다.
그분들은 젊거나 싱싱하지는 않지만 하늘의 소리를 들을 줄 압니다. 하늘의 뜻에 순응하며 다소곳이 기도하는 어르신들에게서 은총의 향기가 풍겨 나옵니다.
저는 생기발랄하지는 않지만 아름다운 우리 성당을 사랑합니다. 사람이 꽃보다 아름답고, 금은보화보다 고귀합니다.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우리 성당의 꽃이자 보배입니다.
기도하는 집과 강도의 소굴은 다르지 않습니다. 기도하는 집이 강도의 소굴이 될 수 있고, 강도의 소굴이 기도하는 집이 될 수도 있습니다.
기도하는 집을 강도의 소굴로 만드는 것도 사람이고 강도의 소굴을 기도하는 집으로 만드는 것도 사람입니다.
십자가를 높이 치켜세운 웅장하고 아름다운 성전일지라도 하늘의 소리를 외면하고 욕망의 소리에 충실한 사람들이 드나들면 그 성전은 강도의 소굴이 됩니다.
초라한 천막이지만 하늘의 소리를 듣는 사람들이 드나들면 기도하는 집이 됩니다. 당신이 당신의 성당을 아름다운 성전으로 만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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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클레쇼프 효과(Kuleshov effect)라고 들어보셨습니까? 러시아 영화감독 겸 이론가였던 레프 클레쇼프가 주창한 쇼트 편집의 효과를 말합니다. 1920년대 당시 국민 배우였던 이반 모주힌의 무표정한 얼굴을 클로즈업하고 그 다음 장면에서 인형을 안고 있는 아이를 보여 주었습니다.
다음에는 마찬가지로 배우의 무표정한 얼굴을 보여 준 뒤에 따뜻한 수프가 담겨 있는 그릇을 보여 줍니다. 마지막으로 배우의 무표정한 얼굴을 클로즈업한 뒤에 관 속에 누워 있는 여자가 나오는 영상을 만들어서 사람들에게 보여 줍니다.
사람들에게 이 배우의 생각을 읽어보라고 묻습니다. 그러자 인형을 안고 있는 아이를 보고는 흐뭇해했으며, 수프를 보고는 배고파했고, 관속의 여자를 보고는 슬퍼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이 배우는 내내 똑같은 표정이었습니다.
이 실험을 통해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이 변해서 자신이 힘들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정작 그들은 아무런 변화가 없었습니다. 내 마음이 바뀌어서 다르게 받아들이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요?
예수님께서는 성전을 정화하십니다. 이 성전은 주님께서 가르침을 베푸시는 거룩한 장소로 정화되어야 했습니다. 선과 악을 분별하지 못하고, 모든 돈이 주님의 것임을 알지 못하는 환전상들이 가득한 곳은 하느님의 집이 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을 쫓아내셨습니다. 성전의 본래 용도로 사용하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본래 용도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바로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 그리고 백성의 지도자들이었습니다.
성전을 누구보다도 본래의 용도로 사용하는 데 앞장서야 할 사람들이 오히려 하느님 뜻에 역행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자신들이 바뀌어야 함을 깨닫지 못합니다. 그들은 ‘저 예수만 없다면’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예수님 때문에 이 모든 혼란이 왔다고 착각했습니다. 자신들의 마음이 바뀌어서 하느님 집을 하느님 집답게 만들지 못했다는 것을 몰랐던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늘 변함없는 모습으로 우리와 함께하셨습니다. 지금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주님 때문이 아니라, 세속적이고 물질적인 것을 내세우는 욕심과 이기심으로 가득한 나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제는 변함없이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 주님을 온전히 받아들이는 데 더 집중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본래의 주님과 온전히 하나를 이룰 수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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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성실과 나의 사랑>
개미와 베짱이 동화를 잘 아실 것입니다. 이 동화를 통해서 개미는 부지런한 곤충의 대명사로 알려졌습니다. 그렇다면 아무 일도 하지 않고 개미집 안에서 빈둥거리는 개미는 전혀 없을까요? 일개미는 하나같이 다 부지런할까요?
최근 연구를 보면 ‘그렇지 않다’라고 합니다. 부지런한 개미가 많지만, 아무 일도 하지 않고 게으름을 피우는 개미도 그에 못지않게 많다는 것이 관찰 결과입니다.
평균 65마리 정도로 구성된 20개의 개미 집단의 관찰에서, 각 집단의 40%는 아무 일도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60%의 부지런함이 전체가 부지런한 것으로 평가받게 한다는 것입니다.
인간도 그렇지 않을까요? 솔직히 잘하는 것보다 못하는 것이 더 많은 우리입니다. 그러나 몇 가지만 잘해도 전체가 뛰어난 것처럼 평가받지 않습니까? 이는 남의 노력만, 남의 능력만 기대해도 되는 것처럼 생각하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남을 내가 조정하기란 쉽지가 않습니다. 가장 쉬운 방법은 나를 변화시켜서 더 좋은 방향으로 이끄는 것입니다. 남의 성실성만 바라지 말고, 내가 성실해야 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남의 사랑만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사랑을 실천할 수 있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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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청주성모병원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강도의 소굴>
태국의 왕궁을 다녀온 적이 있습니다. 발 디딜 틈도 없이 많은 관광객에 떠밀려 겉모양을 보는 것으로 만족했습니다. 화려한 수공예 작품으로 꾸며진 왕궁을 보며 오늘날에도 여전히 국왕의 권위를 인정하며 존중한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짧은 치마를 입은 사람은 무릎 밑으로 내리는 긴치마를 빌려 입어야 하고 슬리퍼를 신은 사람은 다른 신으로 갈아 신어야 할 정도로 국왕에 대한 예의를 챙겼습니다.
왕궁의 곳곳에 그려진 벽화는 규모나 섬세함이 대단해 보였습니다. 그리고 벽화를 복원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장인 정신을 생각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들락거려 소란스러운데도 전혀 개의치 않고 온갖 정성을 들여 붓을 움직이고 있었습니다. 몇몇 한국인들이 눈에 뜨여 아주 반가웠습니다. 한국사람은 사원이나 왕궁 등 역사적인 장소를 찾기보다는 먹고, 마시고 즐기는 곳을 즐겨 찾는다는 말을 들었기에 그들이 달리 보였습니다.
국왕의 권위를 인정하는 만큼 왕궁은 보호되겠지만 관광객으로 넘쳐 나는 왕궁은 아마도 돈벌이의 장소로 전락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하였습니다. 많은 사람이 잘 포장된 과일바구니를 봉헌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봉헌한 사람이 자리를 비우기가 무섭게 바구니는 치워지며, 이미 판매 되었던 과일 바구니를 다시 판매하는 모습을 보면서 봉헌의 의미가 무시되고 있다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그래도 한편으로는 왕궁의 덕분으로 백성이 사는구나 하는 마음입니다. 모쪼록 왕궁이 돈벌이의 장소가 되지 않고 백성을 살리는 곳, 곧 기도의 집이 되기를 희망했습니다.
가끔은 마음이 혼란스러울 때가 있습니다. 무엇인가 내가 하고 싶어 하는 것, 마음에 끌리는 것과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상충할 때 어느 것을 선택해야 할지 고민이 됩니다. 마땅히 주님을 따라야 함에도 말입니다. 육적인 것을 포기하고 주님을 따르면 몸은 고달플지라도 마음의 자유를 누립니다. 그러나 육적인 욕망을 따르면 당장은 즐겁고 기쁘지만, 주님을 따르지 못한 안타까움에 마음이 걸립니다. 사실 주님을 기쁘게 해 드리지 못한 마음이 강도의 소굴입니다.
우리의 몸은 하느님의 모상을 닮았고, 하느님의 숨을 받았으며 주님을 모시는 거룩한 성전입니다. 그 몸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한 상태가 강도의 소굴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하루의 끝맺음에 늘 “허물로 누벼놓은 이 날 하루를 주님의 자비로 지켜주소서.” 하고 기도를 하지만 일관된 마음으로 주님을 따르기엔 여전히 힘에 겹습니다.
주님의 말씀이 혀에 감미로운 자는 기도의 집이요, 육의 욕망을 따르는 자는 강도의 소굴이거늘 수석 사제들과 백성의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없애 버릴 방도를 모색하였습니다. 설사 그들의 계획이 성공한다 해도 진리 안에 자유를 누릴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끝내 ‘강도의 소굴’을 ‘기도의 집’으로 회복시키지 못한 채 죽음을 자초하는 행위입니다. 그런데 오늘도 여전히 그들의 전철을 밟는 것이 우리의 모습입니다. 기도의 집을 복구하는 날 되시기 바랍니다.
주님께서 성전에 들어가시어 물건을 파는 이들을 쫓아내신 것은 성전은 이익을 남기는 곳이 아니라 하느님을 예배하고 사람을 섬기는 곳이었기 때문입니다. 그곳이 장터였다면 그들을 쫓아내지 않았을 것입니다. 밑지고 파는 장사는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물건을 파는 이들은 당연히 이익을 만들어내야 합니다. 셈을 하고 이권이 살아있는 곳이 세상입니다.
그러나 우리 삶의 자리는 주님을 모시는 성전입니다. 성전의 아름다움을 잘 지킬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무슨 일을 하든지 제일 먼저 기도하는 것을 잊지 않기를 바랍니다. 기도는 하느님의 뜻을 내 안에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내 뜻을 관철시키기 위해 기도한다면, 그 기도는 강도의 기도가될 수 있습니다. 세상의 권력자들은 강도가 되어 예수님을 죽이려고 하였지만, 백성들은 예수님 곁에 있으려 했습니다.
함께하는 행복을 가르쳐 주셨기 때문입니다.
미룰 수 없는 사랑에 눈뜨기를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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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성전 정화>
-삶의 중심, 기도와 말씀의 집, 사랑과 평화의 집-
우리는 모두 하느님의 한식구, 한가족, 한가정입니다. 온 인류가 하느님의 한가족입니다. 얼마전 반포된 교황님의 새회칙 '모든 형제들'(Fratelli tutti) 역시 교회는 물론 온 인류를 대상으로 합니다. 바로 이게 자랑스런 자모이신 우리 가톨릭 교회입니다. 지연, 학연, 혈연보다 더 깊고 짙은 하느님과의 인연, 신연神緣입니다. 바로 이 거룩한 미사은총을 통해 새롭게 깨닫는 진리입니다.
지난 수요일 일반 알현 시간에 교황님은 교회를 사랑할 것을 특히 강조하셨습니다. 교회는 우리의 고향이자 어머니이기 때문입니다. 누구나의 영혼 깊이 각인된 삶의 중심과도 같은 고향이요 어머니입니다. 고향집의 어머니를 찾듯이 끊임없이 수도원 성전을 찾는 하느님의 가족들인 형제자매들입니다. 얼마전 퇴임한 전 제주교구장 강우일 주교의 어머니의 향기란 진솔한 글의 일부를 인용합니다.
‘추석 연휴중 아무도 없는 숲길을 혼자서 걷다가 어찌된 일인지 울음이 터져 나왔다. 스마트폰으로 ’가을밤(찔레꽃)’이란 노래를 듣다 보니 나도 모르게 어머니가 보고 싶어져 흐르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다. 한참 울다 가만 생각하니 75살이나 먹고 백발이 성성한 사람이 어머니 생각을 하며 눈물을 줄줄 흘리는 모습은 누가 봐도 좀 우스꽝스러울 것 같아 나도 모르게 얼굴에 웃음이 스며 나왔다. 아마 누가 보았더라면 혼자서 울다가 웃다가 하는 이상한 노인네를 보았다고 했을 것이다.‘(생활성서 12월호)
저역시 어머니를 생각하면 늘 그립고 눈물이 납니다. 영원한 순수의 고향과도 같은 어머니입니다. 자녀들이 가장 먼저 교회를 체험하는 것도 신심 깊은 어머니를 통해서 일것입니다. 교회 현실만 봐도 부성애보다는 모성애가 얼마나 대단한 역할을 하는지 목격합니다. 그대로 어머니인 교회의 모성애를 반영하는 자매들입니다. 수도원에 봉헌금을, 선물을, 미사예물을 가져오는 것도 거의 대부분 형제들이 아니라 자매들입니다.
고향집의 어머니를 찾듯이 성전을 찾는 믿는 이들입니다. 산티아고 순례시 어느 곳이든 성전에 들어갔을 때 고향집에 온 듯 편안했던 느낌의 추억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우선 날마다 알베르게 숙소에 도착하면 미사 봉헌할 자리를 물색했고, 새벽 일어나자 마자 강론을 쓰고 함께 미사 봉헌후 순례길에 올랐습니다. 언제 어디서나 미사가 봉헌되는 곳, 바로 거기가 주님이 현존하는 교회요 성전임을 깨달았습니다.
교회의 성전은 가시적 삶의 중심이자 기도의 집, 말씀의 집도 되고, 사랑의 집, 평화의 집도 됩니다. 무지와 허무에 대한 구체적 답도 교회의 거룩한 성전뿐임을 깨닫습니다. 매일, 평생, 끊임없이 거행되는 성전에서의 공동전례기도 은총의 빛이 허무와 무지의 어둠을 말끔히 몰아냅니다. 진짜 에버랜드는 ‘늘 와도 늘 새롭고 그리운’ 하느님 성전이 중심에 자리 잡고 있는 수도원임을 새삼 깨닫습니다.
이런 세상을 성화해야할 세상의 마지막 보루와도 같은 성전이, 성직자 수도자들이 세상에 오염되어 순수를 잃고 속화된다면 정말 큰 위기가 아닐 수 없습니다. 바로 여기에 기인한 예수님의 너무나 자연스럽고 당연한 의노義怒입니다. 참으로 하느님을 사랑하는 이들은 교회의 성전을, 교회의 전례典禮를 사랑합니다.
“‘나의 집은 기도의 집이라 불릴 것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너희는 이곳을 ‘강도들의 소굴’로 만들어 버렸다.”
사랑이 사라지면 악마들이 들끓듯, 기도가 사라지면 성전은 속화되어 강도들의 소굴로 전락할 수 있음이 엄연한 현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날마다 성전에서 가르치셨고, 온 백성은 그분의 말씀을 듣느라고 곁을 떠나지 않았기에 예수님의 적대자들도 속수무책이었다 합니다.
새삼 교회의 성전은 기도의 집인 동시에 말씀의 집임을 깨닫습니다. 도대체 이광야 세상, 이런 기도의 맛, 말씀의 맛 아니면 무슨 맛으로 살아갈 수 있을런지요. 특히 날로 깊어져야할 맛은, 세상맛이 아닌 기도맛 말씀맛인 하느님맛뿐입니다. 말씀은 생명이요 빛이요 영입니다. 말씀과 만나야 영혼도 삽니다. 영혼건강에 저절로 육신건강입니다.
기도와 말씀을 통해 공급되는 신망애와 진선미의 은총이 영혼을 튼튼하게, 아름답게, 거룩하게, 행복하게 하며, 품위있고 향기로운 삶이 되게 합니다. 영혼의 영양실조, 영혼의 골다공증은 순전히 말씀 결핍으로 자초한 영혼의 병입니다. 바로 오늘 화답송 시편 119장은 그대로 말씀 찬가같습니다. 176절까지 계속되는 가장 긴 시편에 속할 것이며 오늘 화답송은 그 일부에 속합니다.
“72.당신 입에서 나오는 가르침, 수천 냥 금은보다 제게는 값지옵니다. 103.당신 말씀 제 혀에 얼마나 달콤한지! 그 말씀 제 입에 꿀보다 다옵니다.”
오늘 제1독서 요한 묵시록에서 사도 요한은 천사로부터 말씀의 두루마리를 받아 삼킵니다. 바로 하느님의 말씀이 영혼의 식食이자 약藥임을 깨닫습니다.
“이것을 받아 삼켜라. 이것이 네 배를 쓰리게 하겠지만 입에는 꿀같이 달 것이다.”
인생에서 겪는 온갖 고초의 쓴맛을 견뎌낼 수 있게 하는 것도 말씀의 단맛입니다. 고진감래苦盡甘來, 쓴 것이 다하면 단 것이 오고 고생 끝에 행복이 온다는 믿음으로 살 수 있게 하는 것도 하느님 말씀의 힘입니다. 입에는 꿀같이 달고 배를 쓰리게 하는 ‘주님의 말씀’이 ‘주님의 성체’와 더불어 영혼의 평생 최고의 보약임을 깨닫습니다. 말씀의 두루마리를 삼킨후 다시 예언직을 수행하게 된 사도 요한처럼 우리에게 주어지는 복음 선포의 예언직 사명입니다.
눈에 보이는 건물 성전과 더불어 그리스도의 몸인 성전이요 우리 하나하나 역시 주님의 거룩한 성전입니다. 성전 정화는 한 두 번이 아니라 평생 과정임을 깨닫습니다. 주님은 매일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보이는 성전 건물은 물론, 그리스도의 몸인 공동체 성전과 더불어 우리 하나하나의 성전을 정화하시고 성화해 주십니다. 끊임없이 우리를 ‘주님의 성전聖殿’으로 ‘주님의 성인聖人’으로 새롭게 변모시켜주는 미사은총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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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알타반의 말씀 사랑♡
오늘 미사의 말씀에서 우리는 성전의 본래 모습을 봅니다.
"나의 집은 기도의 집이 될 것이다."(루카 19,46)
예수님께서 이사야서의 말씀을 인용해 성전의 본질을 일깨우십니다. 성전이 거래와 잇권의 장이 되면서 그 본연의 모습을 잃어버렸기 때문이지요. 예수님은 물건 파는 이들을 쫓아내시는 거친 행동을 하시면서까지 성전의 성전다움을 되찾으려 하십니다.
이 일은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 그리고 백성의 지도자들의 심기를 건드립니다. 지금의 성전 모습은 그들의 기득권이나 재산과 무관하지 않기 때문이지요.
"온 백성이 그분의 말씀을 듣느라고 곁을 떠나지 않았기 때문이다."(루카 19,48)
하지만 예수님을 참 예언자 또는 메시아로 여기는 백성들이 그분 곁에 머무르고 있으니 적대세력들은 예수님을 붙잡을 기회를 좀처럼 얻기 어렵습니다.
말씀이신 분 곁에 모여든 백성들을 관상합니다. 얼마나 아름다운 광경인지요! 그분 입에서 흘러 나오는 진리의 가르침이 백성들의 영혼을 적시고 있습니다. 귀를 쫑긋 세우고 그분께 집중하고 있는 이들은 온 존재로 듣는 중입니다. 말씀이 예수님에게서 흘러나와 백성들 안으로 스며들며 공유됩니다. 과연 그들 모두는 말씀으로 하나가 되었습니다.
성전이 성전다워집니다. 하느님의 거처인 기도의 집은 영혼들을 말씀으로 엮어 주는 안식처입니다. 성전이 이 본질을 지킬 때 세상 모든 사물도 자기 자리와 제 질서를 찾습니다. 피조물다움, 사람다움이 회복되는 것이지요.
제1독서에서는 요한 묵시록 저자의 놀라운 체험을 이야기합니다.
"나는 그 천사의 손에서 작은 두루마리를 받아 삼켰습니다. 과연 그것이 입에는 꿀같이 달았지만 먹고 나니 배가 쓰렸습니다."(묵시 10,10)
그는 천사가 명한 대로 두루마리를 받아 삼킵니다. 주님을, 말씀을 입으로 받아 먹은 것입니다. 그런데 말씀은 입에는 달고 배는 쓰리게 합니다. 말씀은 힘 주어 전하는 이의 입을 즐겁게 하지만 육신은 고달프게 만들지도 모릅니다.
"너는 많은 백성과 민족과 언어와 임금들에 관하여 다시 예언해야 한다."(묵시 10,11)
말씀을 받아 먹은 그는 예언자의 소명을 이어가야 합니다. 그동안 충실해 해온 대로 듣고 본 말씀을 받아 적고,이를 전하는 일입니다. 그는 말씀을 받아 먹은 이, 말씀을 품은 이, 말씀을 전달하는 이입니다.
이미 그 자신이 성전입니다. 그를 살게 하고 움직이는 존재가 주님이신데, 그분이 곧 말씀 자체이시기 때문입니다. 어떤 이는 기도를 주님께 뭔가 졸라대고 간청하는 것으로 국한시켜 생각하지만, 기도는 지속적으로 끊임없이 주님 현존 안에 머무르는 것입니다. 그분을 듣고, 그분을 생각하고, 그분을 사랑하는 존재적 상태가 곧 기도입니다. 이처럼 말씀 안에 머무르는 이는 기도하는 사람이고, 성전입니다.
매일 다가오시는 말씀을 들으려 이곳을 찾으시는 벗님 여러분을 축복합니다. 여러분이 주님 곁에 머물러 말씀을 듣고 묵상하고 관상하고 기도하는 동안, 우리의 성전다움이 차츰 회복됩니다. 그리고 그런 우리를 통해 공동체와 세상도 조금씩 더 자기다움을 회복해 가는 것이지요. 말씀이신 주님을 모시고 세파와 격랑을 헤치며 살아가는 여러분 모두를 응원합니다. 함께 걸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성전이 되신 여러분을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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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대교구 김홍언 요한보스코 신부님]
♡김홍언 신부님의 영성의 샘물♡
♥정신의학에서는 정상적인 사람은 자신 안의 비정상적인 면을 인정하는
정신의학에서는 정상적인 사람은 자신 안의 비정상적인 면을 인정하는 사람입니다. 심리 치료에서도 사람을 ‘자기 문제를 보는 사람’과 ‘남의 문제를 보는 사람’으로 나눕니다. 자아가 약한 사람들은 자기 문제를 보지 못하고 이런저런 방어 기제를 만들어 허약한 자아를 둘러싸려 합니다. 이것을 ‘성격 갑옷’이라고 하는데, 이런 사람들은 주변 사람들로부터 까칠하다는 평판을 듣습니다. 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갑옷이 천근같이 무겁다는 것입니다. 무거운 갑옷을 짊어지고 버텨 서서 속으로는 누군가 내 안의 약한 자아를 다정하게 보듬어 주고 성장할 수 있도록 도와주길 원합니다.
♣성격 갑옷을 벗겨 주고, 약한 자아가 상처 받지 않고 안전하게 자라 자유를 되찾을 수 있도록 도와줄 사람들이 필요합니다. 그 역할을 해 줘야 할 대표적인 대상이 바로 교회입니다. 그러나 사제들 중에 지나치게 엄격한 분들이 있어, 미사 시간에 늦은 신자들을 지나치게 꾸짖거나, 교리 수업에 한 번 불참했다고 영세 받을 자격이 없다고 말하는 등 신자들에게 신앙인으로서의 자격 여부를 거론하는 것이지요. 성당은 담을 낮추고 마음의 병을 가진 분들에게 치유와 위로를 건네야 하는 곳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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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그리스도의 향기가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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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양주분회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시어, 맨 먼저 찾아가신 곳은 예루살렘 성전이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성전에 들어가시어 물건을 파는 이들을 쫓아내면서 말씀하십니다.
“‘나의 집은 기도의 집이 될 것이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루카 19,46)
여기서, 예수님께서는 “성전”을 ‘나의 집, 곧 당신의 집’으로 말씀하십니다. 곧 “성전”을 당신이 머무는 곳이요, 당신의 현존을 드러내는 곳으로 말씀하십니다. 그러니, 성전은 당신과 만나고 당신을 대면하고 마주하는 ‘기도의 집’입니다. 그런데, 성전이 그렇지 못하고, 오히려 ‘강도의 소굴’이 되었던 것입니다. 이는 성전이 장사와 환전이 행해지는 불결하고 부정한 곳이 되었음을 말해줍니다.
결국, 하느님과의 만남의 장소가 되지 않고, 오히려 재물과 탐욕의 우상을 만나는 장소로 변해버렸기에, 예수님께서는 성전을 새롭게 정화하시는 일을 맨 먼저 하십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우리 성당에 오시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오늘 우리 성당에서는 하느님을 예배하고 기도하는 일이 벌어지고 있는가?
예수님의 성전정화는 교회개혁의 표상이라 할 수 있습니다. 곧 교회가 항상 하느님의 현존과 활동을 드러내고 주님의 생명과 사랑에 응답해야 함을 말해줍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당신 자신을 쪼개시고, 성전의 장막을 두 갈래로 가르셨습니다. 그리고 더 이상 물리적이고 공간적인 성전주의에 갇히지 않으시는 당신의 몸을 성전으로 주셨습니다. 또한, 우리를 그리스도의 지체로서, 하느님 현존의 성전이 되게 하셨습니다. 사도 바오로는 이러한 사실을 잘 깨우쳐줍니다.
“여러분은 하느님의 성전이고 하느님의 영께서 여러분 안에 계십니다. 여러분이 바로 하느님의 성전입니다.”(1코린 3,16)
참으로 그렇습니다. 우리의 몸은 주님께서 주신 거룩한 품위를 간직하고 있습니다. 비록 질그릇 같은 깨지기 쉬운 몸이라 할지라도, 이루 헤아릴 수 없는 값진 보화를 간직한 거룩한 몸인 것입니다. 당신께서 우리 안에 살아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 안에서 현존하시며 활동하시기 때문입니다. 단지 우리 안에 계시고 활동하시기만 하신 것이 아니라, 우리의 주인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와 주님의 성전인 우리의 몸이 ‘강도의 소굴’이 되지 않도록 해야 할 일입니다. 바오로 사도가 말한 것처럼, 우리의 몸으로 그리스도의 영광을 드러내어야 할 일입니다. 우리의 몸으로 그분의 영광을 드러냄이란 우리 몸을 잘 보전하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처럼 우리의 몸을 다른 이들을 위해 내어주는 것을 말한다 할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여러분의 몸을 하느님 마음에 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바치십시오. 이것이 바로 여러분이 드려야 하는 합당한 예배입니다.”(로마 12,1)
그렇습니다. 교회가 세상을 위해 자신을 내어놓을 때, 곧 우리 자신을 타인과 세상을 위해 내어놓을 때,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와 우리 자신은 ‘기도의 집’이 되고, 우리 안에서 그분의 영광이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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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나의 집은 기도의 집이 될 것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너희는 이곳을 '강도의 소굴'로 만들어 버렸다."(루카19,46)
<성전의 기능!>
성전은 '하느님을 만나는 곳'입니다
성전은 '기도하는 곳'입니다.
성전은 '영적인 힘을 얻는 곳'입니다.
성전은 '가르치고 배우는 곳'입니다.
성전은 '쉬는 곳'입니다.
성전은 '다시 태어나는 곳, 부활하는 곳'입니다.
이처럼 성전은 '신앙생활의 중심이며, 전부'라고 할 수 있는 곳입니다.
오늘 복음은 이런 성전이 성전으로써의 기능을 다하지 못하고 있는 모습에 대한 예수님의 지적입니다. 우리의 성전, 나의 성전은 어떻습니까? 성전이 성전으로써의 기능을 다하고 있습니까?
성전은 성체가 모셔져 있는 '성당'입니다. 우리의 성전이 성전으로써의 기능을 잘 발휘하려면, 성전을 찾는 이들이 많아야 합니다. 성전에서 기도하는 사람들이 많아야 합니다.
우리는 얼마나 자주 성전을 찾고 있습니까? 우리는 얼마나 성전에서 기도하고 있습니까? 제가 사목하고 있는 이곳 영산성당에는 하루도 거르지 않고 성전을 찾아와 기도하시는 분이 계십니다. 그것도 잠깐 머물다 가는 것이 아니라 한 두 시간 씩 머물며 기도하다 가십니다. 영산에 큰 보배이십니다.
어느 성당이나 이런 분들이 분명히 계실 것입니다. 이런 분들이 많아져야 합니다. 오늘 복음인 성전 정화의 말씀은 성전에서 기도하는 사람들이 많아져야 한다는 메시지이기도 합니다. 자주 성전(성당)을 찾는 습관을 만들어 봅시다! 잠깐이라도 와서 기도하고 가는, 하느님의 사랑 안에서 쉬었다 가는 하느님의 자녀들이 되어봅시다! 코로나로 인해 많은 사람들과의 대면이 어려운 요즘이기에 이러한 상황이 오히려 하느님과 더 잘 만날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생각합니다.
성전 안에서 하느님을 만나고, 대화하고, 쉬고, 다시 부활합시다!
"저는 하느님 곁에 있어 행복하옵니다. 주 하느님을 피신처로 삼으리이다."(영성체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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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소보둥지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9B4e_lysUQU&feature=youtu.b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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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너희는 이곳을 ‘강도들의 소굴’로 만들어 버렸다."(루카 19, 46)
세상에서
가장 먼 여행은
머리에서
가슴으로의
거리이다.
절실함과
사무침 사이에
우리의
기도가 있다.
삶과
죽음 사이에
기도의 집이
있다.
삶을
되찾아 주는
기도의 집이다.
기도의 집은
치열한 우리
삶의 현장이다.
기도 없이는
진실한 성전을
우리 내면에서
결코 지을 수 없다.
간절한 회개와
절실한 청원이
어우러진 곳이
기도의 집이다.
기도의 집은
두 손 모아
기도하는
절박한
사람들이
모인 곳이다.
기도와 실천
신앙과 생활은
분리될 수 없으며
우리 영혼을
살리며
참된 평화를
가져다준다.
우리에게
내어주신
기도의 집을
강도의 소굴로
만들어 버리는
우리의 왕성한
욕심이다.
기도는
보이지 않고
기도의 집을
이용하는
세속화로 가득하다.
삶과
가까워져야 할
기도의 집이다.
살아있는 기도와
다시 진실된 마음을
일으켜 세우는
주님께서 사시는
기도의 집에서
기도드린다.
우리의 삶이란
삶을 통하여
기도의 집을
만들어가는
기도의 여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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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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