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는 길동이 공중으로부터 내려와 절하고 말했다.
"제가 지금은 진짜 길동이오니, 형님께서는 아무 염려 마시고
결박하여 서울로 보내십시오."
감사가 이 말을 듣고는
손을 잡고 눈물을 흘리면서 말했다.
"이 철없는 아이야. 너도 나와 동기인데
부형의 가르침을 듣지 않고 온 나라를 떠들썩하게 하니, 어찌 애닯지 않으랴.
네가 이제 진짜 몸이 와서
나를 보고 잡혀 가기를 자원하니 도리어 기특한 아이로다." 하고,
급히 길동의 왼쪽 다리를 보니,
과연 혈점이 있었다.
즉시 팔다리를 단단히 묶어 죄인 호송용 수레에 태운 뒤,
건장한 장교 수십 명을 뽑아 철통같이 싸고 풍우같이 몰아 가도,
길동의 안색은 조금도 변치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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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날만에 서울에 다다랐으나,
대궐 문에 이르러 길동이 한 번 몸을 움직이자,
쇠사슬이 끊어지고 수레가 깨어져,
마치 매미가 허물 벗듯 공중으로 올라가며, 나는 듯이
운무에 묻혀 가 버렸다.
장교와 모든 군사가 어이없어
다만 궁중만 바라보며 넋을 잃을 따름이었다.
어쩔 수 없이 이 사실을 보고 하니, 임금이 듣고,
"천고에 이런 일이 어디 있으랴?" 하며, 크게 근심을 했다.
이에 여러 신하 중 한 사람이 아뢰기를,
"길동의 소원이
병조판서를 한 번 지내면 조선을 떠나겠다는 것이라
하오니,
한 번 제 소원을 풀면 제 스스로 은혜에 감사하오리니,
그때를 타 잡는 것이 좋을까 하옵니다." 고 했다.
임금이 옳다 여겨
즉시 길동에게 병조판서를 제수하고
사대문에 글을 써 붙였다.
☆☆☆
그때 길동이 이 말을 듣고
즉시 고관의 복장인 사모관대에 서띠를 띠고
덩그런 수레에 의젓하게 높이 앉아
큰 길로 버젓이 들어오면서 말하기를,
"이제 홍판서 사은(謝恩)하러 온다." 고 했다.
병조의 하급 관리들이 맞이해 궐내에 들어간 뒤,
여러 관원들이 의논하기를,
"길동이 오늘 사은하고 나올 것이니
도끼와 칼을 쓰는 군사를 매복시켰다가 나오거든
일시에 쳐죽이도록 하자." 하고 약속을 하였다.
길동이 궐내에 들어가
엄숙히 절하고 아뢰기를,
"소신이 죄악이 지중하온데,
도리어 은혜를 입사와 평생의 한을 풀고 돌아가면서
전하와 영원히 작별하오니, 부디 만수무강하소서." 하고,
말을 마치며 몸을 공중에 솟구쳐
구름에 싸여 가니, 그 가는 곳을 알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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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금이 보고 도리어 감탄을 하기를,
"길동의 신기한 재주는 고금에 드문 일이로다.
제가 지금 조선을 떠나노라 하였으니,
다시는 페 끼칠 일이 없을 것이요,
비록 수상하기는 하나
일단 대장부다운 통쾌한 마음을 가졌으니 염려 없을 것이로다." 하고,
팔도에 사면(赦免)의 글을 내려 길동 잡는 일을 그만두었다.
☆☆☆
한편, 길동이
제 곳에 돌아와 부하들에게 명령하기를,
"내가 다녀 올 곳이 있으니,
너희들은 아무 데도 출입하지 말고 내가 돌아오기를 기다리라." 하고,
즉시 몸을 솟구쳐 남경으로 향하여 가다가
한 곳에 다다르니, 거기는 소위 율도국이었다.
사면을 살펴보니
산천이 깨끗하고 인물이 번성하여 편안하게 살 만한 곳이었다.
남경에 들어가 구경한 뒤,
또 제도라 하는 섬에 들어가 두루 다니면서 산천도 구경하고 인심도 살피다가
오봉산에 이르니, 정말 제일 강산이었다.
둘레가 칠백 리요,
기름진 논이 가득하여 살기에 정말 합당하였다.
마음속으로 생각하기를
'내 이미 조선을 하직하였으니, 이곳에 와 은거하였다가 큰 일을 꾀하리라.' 하고
가벼운 걸음으로 본 곳에 돌아와 여러 부하에게 말했다.
"그대는 아무 날 양천강변에 가서
배를 많이 만들어 몇월 며칠 경성 한강에서 기다리라.
내 임금께 청해
벼 일천 석을 구해 올 것이니, 약속을 어기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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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홍공은 길동의 작란이 없으므로
신병이 쾌차하고, 임금 또한 근심없이 지내게 되었다.
당시는 구월 보름께였는데,
임금이 달빛을 받으며 후원을 배회하고 있을 때,
갑자기 한 줄기의 맑은 바람이 일어나며
공중에서 피리 소리가 맑게 울려오는 가운데,
한 소년이 내려와 임금 앞에 엎드렸다.
임금은 놀라서 물었다.
"선동(仙童)이 어찌 인간 세상에 내려왔으며 무엇을 하려 하느뇨?"
소년은 땅에 엎드려 아뢰기를,
"신은 전임 병조판서 홍길동이옵니다."
임금이 놀라 물었다.
"네가 깊은 밤에 어찌 왔느냐?"
길동이 대답해 가로되,
"신이 전하를 받들어 만세를 모실까 했으나,
제가 천한 종의 몸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문(文)으로는 홍문관이나 예문관 벼슬 길이 막혀 있고,
무(武)로는 선전관 벼슬길에 막혀 있습니다.
이런 까닭으로 사방을 멋대로 떠돌아다니면서
관청에 폐를 끼치고 조정에 죄를 지었던 것이온데,
이는 전하로 하여금 아시게 하려 함이었습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만수무강하십시오." 하고,
공중으로 올라가 나는 듯이 가거늘,
임금이 그 재주를 못내 칭찬하였다.
그 후로는
길동의 폐단이 없으니, 사방이 태평하였다.
길동이 조선을 하직하고,
남경 땅 제도라는 섬으로 들어가, 수천 호의 집을 지은 뒤,
농업에 힘쓰고 무기 창고를 지으며 군법을 연습하니,
병사는 잘 훈련되고 양식은 풍족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