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11일 연중 제6주일 정인준신부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
현대 의학이 발달했다고 하는 지금도 나병은 무섭습니다.
오늘 레위기에서 악성 피부병에 대해서 주님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이르십니다.
이스라엘의 양심이라고 할 수 있는 사제가 악성 피부병에 대한 판명을 하는 것입니다.
일단 의심된 사람이 악성 피부병에 걸린 것으로 판명되면 사제는 ‘부정한 사람이오.’라고 선언하는 것입니다.
악성 피부병에 걸린 병자는 일반 사람과 구분되도록 옷을 찢어 입어야 하고 머리를 풀어야 했던 것입니다.
그는 진영 밖에 자리를 잡고 격리된 생활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공동구원을 위한 공동체를 이루고 삽니다.
그래서 누가 악성 피부병에 걸리면 엄하게 대처해서 다른 이들이 전염되는 것을 예방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사막에서부터 이 피부병에 대한 예방과 경계가 철저하였던 것입니다.
마르코 복음사가는 주님께서 한 나병환자를 고쳐주신 기적의 이야기를 전하고 있습니다.
한 나병환자가 주님께 와서 무릎을 끓고 “스승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마르 1,40)라고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그가 가엾은 생각이 드셔서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41절)라고 말씀하시며 고쳐주십니다.
그리고 그에게 단단히 이르시며 “누구에게든 아무 말도 하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다만 사제에게 가서 네 몸을 보이고, 네가 깨끗해진 것과 관련하여 모세가 명령한 예물을 바쳐,
그들에게 증거가 되게 하여라.”(마르 1,44)라고 말씀하십니다.
주님께서는 레위기에서 명시한 구약을 법, “누구든지 살갗에 부스럼이나 습진이나 얼룩이 생겨,
그 살갗에 악성 피부병이 나타나면, 그를 아론 사제나 그의 아들 사제 가운데 한 사람에게
데려가야 한다.”(레위 13.2)라는 구약의 법을 존중하십니다.
물론 레위기에서는 병이 걸린 사람에 대한 말씀이고 예수님께서는 병이 나은 사실을 증명하기
위한 것이기에 서론 반대되는 내용이지만 피부병에 대한 사제의 역할과 제사에 대한 것은 같은 것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가장 공신력이 있는 사제라야 피부병에 대한 공정한 정의를 내릴 수 있는 것입니다.
고통으로 괴롭히던 불치의 병에서 해방된 나병환자는 너무 기쁜 나머지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도록 조심하라.’는 주님의 당부를 지킬 수가 없었습니다.
그의 기쁨이 너무 컸던 것입니다.
마르코는 치유의 기적 후에 주님께서 드러나게 다니시지 못하는 상황을 이렇게 전하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예수님께서는 더 이상 드러나게 고을로 들어가지 못하시고, 바깥 외딴곳에 머무르셨다.
그래도 사람들은 사방에서 그분께 모여들었다.”(45ㄴ절)
나병환자가 제일 기쁜 것은 어떤 것이었을까요?
그 병자체도 두려웠고 문드러지는 얼굴을 바라보는 것도 두려웠을 것입니다.
그리고 병으로 오는 통증과 두려움은 얼마나 컸겠어요?
그래도 그것보다는 사제로부터 정상적인 사람으로 되돌아 올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보통 나환자 분들을 보면 약으로 오랜 세월 고쳐서 음성 환자가 되었다 해도 그분들의
얼굴 모양은 정상으로 돌아 오지 않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치유해준 사람은 그런 모습이 아닌 그가 가질 수 있는 정상적인 모습으로 되돌아왔다는 것입니다.
만일 그가 일그러진 모습이라면 사제가 정상으로 선언해주었겠어요?
그가 제일 기쁜 것은 병의 흔적이 말끔히 없어지고 정상으로 돌아와 그의 가족에게,
그리고 그의 동네사람들에게 돌아갈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의 모습을 보고 더 놀랐을 뿐 아니라 그 가족도
그를 아는 사람도 잃었던 그를 되찾아 기뻤던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에 나병환자가 나타나면 사람들은 경고의 뜻으로 돌을 던집니다.
그들을 맞추기 위해서가 아니라 돌 떨어진 거리 안으로는 들어오지 말라는 경고이지요.
그런데 그가 사람들과 함께 가시는 예수님께 다가 오기까지는 얼마나 힘들었을까요?
그리고 사람들은 찡그리는데 주님께서는 손을 내밀어 그를 만지며 치유해주시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이렇게 혐오스럽고 두려움을 주는 사람도 지나치지 않고 고쳐주시지요.
주님께서 나병뿐 아니라 사람들이 손가락질하며 죄인으로 몰고가는 간음하다 붙들린 여인도
단죄하지 않으시고 용서하셨습니다.
주님께서 비켜가신 병도 죄도 없이 치유하시고 용서하셨습니다. 용서하지 못하는 이들은
바로 너그럽지 못한 우리들입니다.
우리는 곧잘 하느님 위치에서 남을 단죄하고 폄하할 때가 있습니다.
우리는 사실 내 이웃을 하 느님처럼 판단할 수 없지요.
평소 허물없이 지내는 이웃으로부터 ‘죄가 많아 구원되기는 글렀다.’라고 말하것을 때가 있습니다.
자기가 ‘북 치고 장구 다 친다.’라고 할까요? 자기가 하느님처럼 다 하는 기분인가 봅니다.
우리는 하느님 입장에서 떠드는 사람들을 만날 때가 있습니다.
이번에는 반대로 타인을 가리키며 ‘그 사람은 구원이 없다.’ 라고 말하는 사람들을 만날 때가 또한 있지요.
한번은 길을 가는데 자기는 하느님을 보았고 그분께서 ‘회개해야 한다.’
‘이렇게 해서 구원되겠느냐?’라고 말씀하시는 음성을 들었다는 것입니다.
그는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소리를 높여 사람들을 하느님처럼 단죄하며 떠드는데
누구 하나 그의 말에 귀를 기우리지 않습니다.
얼마나 많은 경우에 사이비 교주들은 하느님 위치에 서서 사람들 위에 군림하려고 하는지요.
오늘날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사람들 안에서도 하느님 편에서 이웃을 심판하는 모습을 봅니다.
‘자기 종파만 구원이 가능하고 다른 종교에는 구원이 없다.’라고 선언할 만큼 교만이 하늘을 찌릅니다.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면서 배타적이고 우물 안의 개구리 모습의 광신자들을 볼 때는 고통스럽기도 하지요.
이런 것을 보면 죄인인 우리가 하느님 앞에서 얼마나 겸손해야 하며 교만에 물들지 않도록
노력해야 하는지를 깨닫게 됩니다.
사도 바오로는 적극적인 신앙인의 자세에 대해 말하며 이렇게 편지를 씁니다.
“무슨 일을 하든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려고 애쓰는 나처럼 하십시오.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것처럼 여러분도 나를 본받는 사람이 되십시오.”(1코린 10,33ㄱ;11,1)
사도의 표현대로 우리도 그리스도를 본받아야 하지요.
그리스도께서 손을 내밀어 나병환자를 고쳐주신 것처럼 우리는 내 이웃의 아픔에 다가가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적어도 우리는 세상 사람들이 하듯 내 이웃의 아픔과 죄에 대해서 소금을 뿌리거나 비방하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죄인의 편에 서신 그리스도를 본 받아 아픈 이웃을 위해 손을 내밀며 기도해 주며 그 고통에
참여할 수 있는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오늘은 ‘세계 병자의 날’이기도 합니다. 건강한 사람은 모두 자기 위주에서 병자들을 바라봅니다.
건성으로 그들에게 관심을 갖고 그들의 고통을 나눈다고 합니다. 그런데 사실 병자들을
사랑하지 않고 그리스도의 형제로 받아들이지 않으면 그들의 고통에 함께 할 수 없습니다.
주님께서 나병환자에게 조건 없이 손을 내미신 것처럼 우리도 아픈 이들에게 다가가서
그들을 위해 기도하며 관심과 배려의 마음을 나누어야 하겠습니다.
더 나아가서 사도 바오로가 “여러분은 먹든지 마시든지, 그리고 무슨 일을 하든지 모든 것을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십시오.”(1코린 10,31)라고 말 한 것처럼, 우리도 그리스도의 영광을 위해서 살아야 하겠습니다.
출처: 구름 흘러가는 원문보기 글쓴이: 말씀사랑 ♥